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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ㅣ 무의식의 저널 Umbr(a)
슬라보예 지젝.가라타니 고진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3년 8월
평점 :
품절
'무의식의 저널 Umbr(a)' 시리즈는 우리에게 익숙한 저자의 '낯선 글모음집'의 성격을 띤 책이다. 이름만 들어도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등등 세계 명문대학의 교수들이 집필진(?)으로 활약하기에 이 시리즈는 읽어봄직한 책이기도 하다. 거기에 'umbra'라는 단어가 지닌 뜻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보통은 '천문학'에서 일식이나 월식 때 지구, 또는 달의 '본그림자'를 뜻할 때 쓰는 단어이지만, 고대 로마에서는 '동반자'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함께 한다'는 뜻의 환영받는 뜻이 아니라 '초대객이 데리고 온 손님'이란 뜻으로, 한마디로 '불청객'이란 뜻이다.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손님에게 묻어서, 또는 묻혀서 딸려왔으니 얼마나 불편하겠냔 말이다. 그래서 난 이 시리즈의 본래 의도가 바로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라고 짐작한다.
딴에는 '무의식'이 그렇다. 정신분석학에서도 '무의식'은 의식세계의 저편에 있어서 우리의 '의도'에 관여받지도 않고 받을 수도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저변에 깊숙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마치 초대한 적은 없지만 불현듯 찾아와 어느새 함께 자리하고 있는 '불청객'처럼 말이다. 이 책, '무의식의 저널'이 바로 딱 그렇다. 우리의 깊은 관심 '밖'에 있는 책임에 분명하지만 우연히라도 '읽는 순간', 손에서 책을 땔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갖고 있는 책으로 소개하면 딱 맞을 것 같다. 이 책 <유토피아>도 그랬으니, 다른 'Umbr(a)'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김에 '무의식의 저널' 시리즈를 탐독해보려 한다. 시간이 좀 걸려도 해보려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가 쓴 책일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기에 가장 완벽히 이상적인 곳을 모어는 '유토피아'라고 표현했다. 허나 '유토피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가장 완벽한 곳인데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런 곳'이 유토피아라니 말이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유토피아'의 반대말인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상상하는 가장 암울한 곳인데도 현실속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의 진정한 뜻은 '없는 곳'이 확실하다. 그 반대말인 디스토피아가 확실히 '있는 곳'이니 말이다. 아니 너무 흔해서 굳이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눈앞에 펼쳐지는 까닭에 더욱 짜증날 따름이다.
이렇게 짜증이 나는 '디스토피아' 말고 우리가 찾고 싶어하는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을지 정신분석학적으로 나름 분석한 책이 바로 이 책의 골자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를 보여줄 생각은 저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세상에 없음직한 '유토피아'가 왜 확실히 '없는지'만을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유명 대학의 교수님들이 짜고서 그런 글들만 써낸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까닭인 즉슨, 학문적 관점에서 '유토피아'에 관한 내용을 써내려가다보니 꽤나 '형이상학적인 내용'의 글잔치를 펼쳐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각의 저자들은 이 책에서 '유토피아'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이 세상에 '없는 곳'을 지향하는 '무엇'에 대한 주제를 담론으로 삼아, 그 '무엇'이 이 세상에 없을 수밖에 없는 까닭을 진솔하게 나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딴에는 당연한 소리를 뭘 그렇게 어렵게 꺼내서 어렵게 마무리하시나 싶지만, 원체 교수님들이 하는 말발이 원래 그런 식이니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상식적인 선'에서 유토피아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역자 서문'에도 영화 <아일랜드>의 예를 들어 이 책 '유토피아'를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굳이 라캉, 파스칼, 프로이트와 마르크스가 언급된 '유토피아'에 심취하고 싶다면 이 책을 탐독하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난, 나만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꼭 존재했으면 더 바랄나위가 없는 그런 '유토피아' 말이다.
내게 그런 유토피아의 이름은 바로 '대한민국'이다. 현실속의 대한민국은 많이 해묵어서 낡아빠진 이데올로기를 애써 끄집어내서 나라를 통째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미국의 노예'로 만들고도 자신이 한 짓을 자랑삼아 떠벌리는 반푼이 30% 국민과 함께 '동반자(umbra)'로 품고 살아가야 하는 후진국 지향국가지만, 내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선진국을 훨씬 넘어서서 이 세상 모든 국가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선도국가'이다. 우리는 잠시나마 그런 대한민국을 경험해봤었다. 다들 알지 않은가.
그런데 그랬던 나라가 불과 1~2년 만에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고, 정치는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외교는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는지 '국익'을 외치면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그런데도 잘했다고 스스로 성적을 매겨버리는 요상한 일들이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국외순방을 나갈 때마다 온국민들이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소원을 빌지경이다. 나갔다하면 사고를 치고 돌아와서는 천연덕스럽게 '또 다른 사고'를 저질러 덮어버리려고만 하니 정말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또 사고를 쳤다. 이웃나라에서 '오염수'를 대놓고 바다에 방류하겠다는데 반대는커녕 '잘 버리는지, 과학적 감시'만 하겠단다. 핵폐기물을 그냥 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 '잘 처리해서' 버리는지, '허용기준치'를 넘어서면 방류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버려달라, 요청'하는 말만 하겠다면서도 어찌나 당당한지 말이 안 나올 정도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바다에 '오염수'를 버려서 오염을 시켜서 발생한 '일본어민들의 피해보상'을 비롯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비용처리'를 한국정부가 대신 부담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아니, 바다오염의 '가해자'는 일본인데, 그 피해당사국인 '한국정부'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단 말인가? 이게 '호구짓'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거기다 대한민국 총리라는 작자가 '오염수'를 '오염 처리수'라고 명칭을 바꿔 '괴담(?)'에 맞서 대한민국 어업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앞장서겠다고 한다. 이건 또 뭔 짓거리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팩트는 간단하다. '방사능에 피폭되면 뒈진다'는 것이 가장 과학적인 진실이다. 알프슨지 히말라얀지 현대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아무리 '핵오염수'를 걸러도 '방사능물질'을 모두 다 거를 순 없다는 것도 '과학적 팩트'다. 이걸 아무리 희석한다고 해도 '방사능 수치'가 내려갈 뿐, '방사능 물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적은 양이라해도 '방사능 물질'은 방사능을 뿜어내며 이 방사능에 '피폭'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는 일본에 투하된 '원폭피해자들의 데이타'가 거의 전부다. 그렇게 피폭된 생존자들의 2세, 3세, 그리고 4세들까지 '방사능피폭'에 따른 원인모를 희귀질환에 시달리는 것을 일본정부는 생생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도 기시다 일본정권은 전세계가 공분할 '오염수방류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향후 30년간 오염수를 버린 다음, 완벽히 '핵폐기'를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온다는 가정이 따라야 하겠지만, 그 다음에 오염수 수도꼭지를 잠글지는 미지수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하루에 500톤 이상을 방류하고, 30년 동안 방류하면 오염된 바다는 어찌 될 것이냔 말이다. 바다에 '검은 잉크 500톤'을 뿌려댄다고 상상해보잔 말이다. 아무리 '희석'을 한들, '검은 잉크'는 30년 이상 계속 버려지고 바다생태계 모두에 '검은 잉크'가 축적되고, 해양지층에 퇴적되고, 더 나아가 갯벌을 비롯해서 육지생태계까지 '검은 잉크'는 침범해서 결국 온지구가 '검은 잉크'로 얼룩지고 말 것이라는 '디스토피아'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시다 정권'의 유토피아를 짐작할 수 있다. 당장에 처리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니 가장 값싼 방법으로 '핵오염수의 부담'을 걷어내고, 넓고 넓은 바다에 아주 적은 양으로 희석시켜서 버릴 뿐이니 바다생태계가 견뎌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일본수산물'을 날것 그대로 먹어도 안전...아니 별탈은 일어나지 않겠...그래도 행여 안심이 되지 않으니, "기시다는 쬐끔 불안하니까. 노르웨이산 연어스테이크를 먹어줄꺼예요. 서민들은 안심하고 후쿠시마 앞바다 생선 많이 먹어서 삼중수소 박멸할 때까지 흡입해주세요. 그래야 기시다 베이비들은 미래에도 안심하고 스시 먹을 수 있을테니까. 다이죠~부"라고 가장 완벽한 '유토피아'를 상상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 윤석열정부의 '유토피아'는 궁금하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얘들이 상상한 '유토피아'는 상상불가다. 당췌 '국익'이라는 것이 없는 '핵오염수 방류사건'으로 대한민국이 얻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자신들의 빵빵한 호주머니 정도일까? 고작 그딴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면 정말 실망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는 알든 모르든 '무조건' 반복(?)된다면서 '120년 주기설'을 내세웠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120년 전을 살펴보니, '친일개화세력'이 나라를 팔아먹기 일보직전이었다. 윤석열정권이 2022년에 집권했으니 120년 전은 1902년이었다. 곧 러일전쟁이 벌어질 참이었고,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걍 내주고, 나라를 통째로 일제에 넘겨버린 주역들이 한창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단 말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딱 그 꼴인듯 싶어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어난 일도 아니고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우리고 꿈꾸는 '유토피아'가 불확실 할수록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디스토피아'가 닥쳐올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다시 '일제의 식민지', '미국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최선도 우리는 익히 경험했다. 이명박 정권때도 물대포를 맞아가며 '촛불'을 들었다. 박근혜 정권때도 엄동설한에 어묵국물로 추위를 달래며 '촛불'을 들었다. 윤석열 정권이라고 다를 건 없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위해 촛불을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시들하다. 촛불의 주역들이 촛불을 들 생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시들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걸까?
이명박 때의 촛불들은 '광우병'으로부터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라를 꿈꿨다. 박근혜 때의 촛불들은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진실이 은폐되고 거짓을 선동하는 부정한 세력을 내몰고 깨끗한 국정을 꿈꿨다. 그런데 윤석열 때로 접어들자, 국민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진실은커녕 온갖 거짓선동만 퍼나르며 '과학'이라고 우기는 거짓선동꾼들만 가득한 나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참에 바른소리, 옳은소리, 뼈아픈소리를 외치던 지사들마저 두문동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냔 말이다.
총선 때를 기다려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방식은 가장 소극적인 방식으로 큰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도 '여소야대의 정국'인데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할 때다. 한동훈 장관은 '사형집행' 운운하며 칼부림을 참지(?) 않을 것이라 겁박하는 형국이다. 이럴 때 무엇을 기다리냔 말이다.
우리는 3·1만세혁명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4·19혁명으로 부정선거를 용납치 않았으며, 5·18혁명으로 부당한 정권을 하나 뿐인 생명을 내놓고 부정해봤고, 6월혁명으로 그 정권을 작살냈었다. 그 이후에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서 우리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를 꿈꿨었다. 당신은 그때 꿈꿨던 우리의 유토피아를 잊었단 말인가? 그건 아니 된다. 비록 우리가 꿈꿨던 '유토피아'가 실제로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지언정 '유토피아'를 꿈꾸길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꿈꾸길 포기하냔 말이다. 어쩌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120여 년전 나라를 팔아먹어도 좋다는 '매국노들의 후예'가 지금 본색을 드러내고 저들의 세상이 온것마냥 나대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들을 소통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경일에 '일장기'를 내걸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저들을 싹쓸이할 기회가 '바로 지금'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이 땅의 매국노들을 싹 쓸어버린 '뒤'의 대한민국을 말이다. 또다시 흐지부지 끝날 '그날 이후'를 미리 걱정할 필요따윈 없다. 그래서 난 즐겁다. 날이면 날마다 '망국의 앞잡이들'이 목을 길게 늘이고 나불대고 있는 지금이 말이다. 얼마나 좋으냔 말이다.
이렇듯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비-존재의 대상'으로 삼아 무궁한 고찰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 <유토피아>가 얘기하고 있는 골자로 생각한다. 각각의 저자들이 나름의 '전문분야'에서 나름의 '유토피아의 개념'을 풀어냈지만 말이다. 정신분석학에 걸맞게 '유토피아'와 '정신병'에 유사한 점을 분석한 저자도 있었다. 따라서 과거의 '광기어린 인물'들이 종종 '천재성'을 발휘하여 모든 인류에게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고도 말한다. 꽤나 신선한 풀이가 아닐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도 광기어린 천재들(장승업 등)이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예가 있어 솔깃한 내용이었다. 허나 나는 한 술 더 떠서 '한 사람의 정신병자'가 나라를 거덜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의식의 저널'은 무한한 상상의 재미를 선사하는 책이라 마음에 흡족했다. 다음 책도 무진 기대가 된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