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을 수업한 적은 많았지만, 리뷰로 쓰게 된 것은 이번에 처음이다. 내가 결정지은 '해석'이 그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변신>은 수업을 할 때마다 '주제'가 달라지는 묘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내가 강의를 하면서도 강의내용이 매번 달라지는 것이 참 재밌고 흥미진진할 정도니까 말이다. 아마도 '카프카에 대한 리뷰'도 매번 달라지게 될 것이다. 뭐, '나의 리뷰'는 늘 그런 식이지만 말이다.
<변신>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단편소설이기에 간단할 수밖에 없지만, '카프카'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이야기는 '느닷없이'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 잠자의 당혹스러움으로 시작한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잠자가 잠자다가 별안간 '벌레'가 된 까닭 말이다. 카프카는 이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무슨 단서라도 던져줄까 샅샅이 뒤져봐도 '그런 것'이 없다. 보통 '판타지소설'에서는 현실세계와 환상세계 사이를 연결해주는 '통로'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해리 포터도 킹스크로스역 '9와 3/4 승장강'을 통해 마법학교로 가게 되고, 앨리스도 토끼를 따라서 나무굴속으로 한없이 떨어져 '이상한 나라'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카프카'는 그런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 그저 어느날 갑자기 '벌레'가 되었다는 신선한 충격을 독자들에게 안겨줄 뿐이다.
암튼, 잠자는 '벌레'가 되어 출근도 하지 못하다 '단 한 번의 지각'으로 회사에서 짤리게 된다. 그토록 성실하게 일했던 직장인데도 회사는 '일할 능력을 상실한 사원'에게 가차없이 퇴직 통보를 알린다. 그리고 잠자의 가족들도 '더는 돈을 벌어올 수 없는 가족'에게 애정이 빠르게 식어감을 보여주었다. 이런 정황 묘사는 카프카가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아주 적확하게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회구성원에겐 매몰차게 '소외'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완벽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삐걱거리면 '무한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체적 장애나 정신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는 더할나위없이 비정하게 굴며, '경제적 무능력'을 입증(?)한 구성원에겐 더욱더 가혹한 냉담함을 취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그렇게 잠자는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어 버리고, 가족 안에서도 철저히 고립되어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잠자'가 소외된 상황에서도 회사는 잘 굴러가고, 잠자의 가족들도 나름 잘 적응하며 살아가게 된다. 다시 말해, 누구보다 성실하던 '회사원'이었고,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이었음에도 '잠자의 빈자리'는 금방 채워지고 흔적조차 사라지게 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무능력'이 증명되는 순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을 빠르게 지워나가고 만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거대한 대기업을 잘 굴러가게 만드는 '부속품'에 불가한 것이 아닐까?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자 그토록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숙명을 살펴보잔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냔 말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물질의 풍요로움'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가치'는 오직 실적과 결과로만 증명하게 되고 '목표치'를 채우지 못한 인간은 인간취급조차 받지 못하고 도태되고 내쫓기고 만다. 그 '빈자리'는 빠르게 다른 누군가가 채우게 되어 애초에 '빈자리'가 있었는지 티도 나지 않게 된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인공지능로봇'이 개발된다고 하는데, 그때가 되면 '인간 노동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애초에 티도 나지 않는 '빈자리'는 모조리 로봇이 대신하게 될 것이다. 과연 그런 미래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결국, 잠자는 다시 인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골칫거리만 제공하던 잠자가 죽어버린 것이 '행복의 시작'이란듯이 나머지 가족들도 활기를 되찾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쓸쓸한 죽음이다. 끝내 자본주의적 인간이 맞이할 '종말'로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최고의 능력을 보여주며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만 기억하는 세상이지 않느냔 말이다. 시쳇말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할 것이다. 이런 세상에선 '2등'도 '패배자'일 뿐이다. 꼴등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뭔가 보완해야 할 것이 많다.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절실할 것이다.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들은 없는지 '관심'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순간에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대책도 충분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력'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계급화'하는 사회적 풍토도 전환시켜야만 할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나고 돈 낳지, 돈나고 사람 낳냐?'라면서 물질만능주의를 질타하며 인간의 가치회복에 지대한 관심이라도 있었다. 허나 이제는 '돈(경제)'이 모든 것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가 되어버린 듯 싶다. 돈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고, 할 수조차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자가 딱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저 돈지랄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만족하는 아주 저렴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듯 싶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이렇게 <변신>은 이야기의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수업을 한 번 시작하면 좀처럼 끝맺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풍요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그렇고,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도 딱히 만족스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불만족의 시대', 만족이란 느낌을 느끼며 살지 못하는 '불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소설이기도 하다. 당신은 무엇에 만족하며 살아야겠는가? 라고 '카프카'는 되묻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