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펭귄클래식 48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한 개인이 국가 전체를 뒤집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테니, 이를 태면, 혹시라도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집단'이 생긴다면, 국가는 그 '집단'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국가 전복위험성'이 짙은 사안들을 거르고 골라서 국가의 평화와 국민들의 안녕을 해친다는 죄를 물어 단죄하는 것은 정당한걸까? 만약 그것이 정당하다면, 그런 집단을 색출해내기 위해 반항적인 국민들이 발생할 가능성을 애초에 막기 위해 철저한 '감시사회'를 만드는 것도 용인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온국민의 손발놀림 하나하나를 모조리 CCTV로 '지켜보고' 도청장치로 '엿듣는' 단 말이다. 사생활이 보호받아야 마땅한 '장소'까지 빠짐없이 말이다. 조지 오웰은 그런 '감시사회'를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려냈다. 소설 <1984>가 바로 그렇다.

 

  이 책이 오웰의 유고작인 것도 눈여겨볼 만하겠지만, 책이 출간된 해가 1949년이라는 사실도 꽤 중요해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소 냉전시대'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주의 진영'이 서로 대립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영국사람'인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당연히 '공산주의(사회주의)'일 것으로 보이지만, 소설속의 배경은 의외로 '영국'이었다. 분명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자본주의 진영'이었음에도 오웰은 '영국'을 감시사회의 최정점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웰은 전후복구로 바쁜 시간을 보내던 '영국 사회의 혼란'과 '무능력함'을 비꼬기 위해서 이런 소설을 구상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런 질문에도 의아함은 여전히 남는다. 소설속의 '절대권력'을 쥐고 흔드는 권력자는 '공산주의'를 딱히 옹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나치즘'을 비롯한 '파시즘', '군국주의'를 아우르는 '전체주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일까? 소설 속에서 '런던'은 [오세아니아]에 속했고, [오세아니아]와 전쟁을 벌이던 상대는 [유라시아]였다. 하지만 소설 중반을 넘어서면 [오세아니아]는 상대를 바꾸어 [동아시아]와 전쟁을 벌인다. 그러다 막판이 되면 [유라시아]와 다시 전쟁을 벌이는 혼란스런 상황이 펼쳐진다. 하지만 전세계가 '세 개의 대륙'으로 쪼개지거나 누구와 누구가 싸우는 것도 왜 싸우는지도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들이 벌이는 전쟁은 단순히 저마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소모전'일 뿐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전쟁을 통해 국민들을 불안감에 빠뜨리고 위기감을 조성하고서 '집권당'에 비판하는 세력을 견제하고 온국민들의 맹목적인 충성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은 서로를 향해 큰 피해를 주지도 않으면서 전투를 치루며 그저 '끊임없는 소모'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불안요소를 만들어 '권력'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이 전하는 전황 소식은 꽤나 심각하게 전해진다. 그래야 국민들이 적절한 불안감에 빠져 '빈곤한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심각한 불평등을 조장해도 국민들이 불평불만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1984>에서는 국민들이 '무식'한 채로 살아가는 것을 그냥 방치할 뿐이다. 왜냐면 그것이 '장기집권'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속에서 권력을 차지한 '내부당'의 일인자는 '무지는 힘', '자유는 속박', '전쟁은 평화' 따위 같은 말도 안 되는 '거짓'을 국민 모두가 믿도록 강요한다. 한마디로 '우매한 군중'으로 만들어 지배하기 쉬운 '사회구조'를 건설하는 것이 당의 최우선 목표인 셈이다. 행여나 이런 부조리한 국가지배구조가 잘못되었다고 인식하고 잘못을 수정하려 '내부당'에 저항하는 세력이 만들어진다면, 그런 세력이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전에 '사상경찰'과 '군인' 들을 풀어서 잡아들이고 감옥 같은 곳에 가둬두고 모진 고문과 세뇌 과정을 거쳐 저항을 하지 못하게 '원천봉쇄'를 하고 있다. 오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상범'이나 '저항군'을 잡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공개처형'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을 '순교자'로 만들거나 '우상'으로 만드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로마황제가 기독교인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거나 중세시대 마녀사냥을 통해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끔찍하게 처형함으로써 권력의 지속을 꾀했으나, 끝내는 실패를 하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내부당의 독재'에 반기를 드는 이가 등장하게 되면 그를 잡아다 가두어두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부당한 권력'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부정'하게끔 만드는 집요한 고문을 시작한다. 허나 결코 고문중에 사망에 이르는 일은 없도록 철저히 조심한단다. 그렇게 죽고 만다면 그것조차 '당을 부정했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란다. 오직 그들이 모진 고문을 통해 '죽을만큼' 괴로운 고통을 끊임없이 받으며 '스스로를 부정하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 고문을 이어갈 뿐이다. 모진 고문에 못이겨 당에 충성하겠다는 '거짓자백'은 소용이 없다. 단지 고통을 못이겨 억지로 한 '거짓'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죽지 못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의식'에서라도 저항하길 포기하고 철저히 당에 충성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당이 원하는 것에 무조건 순응하는 단계, 이를 테면, 2+2=5가 맞다고 당이 원하면, '그것'이 곧 진리라고 순응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겨우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풀려난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번 당을 배신한 자에겐 '총살'이 곧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단지 '언제' 총살 당할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때고 당이 '원하는 순간'에 아무도 모르게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넣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세아니아]의 사형방법이다.

 

  우리의 주인공인 '원스턴 스미스'는 그렇게 철젛나 '감시사회' 속에서 당이 하는 일에 '의문'을 품고 은밀히 접근한 '저항세력'의 손을 잡고, 아내가 아닌 줄리아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 이들을 감시하던 '내부당'에 의해 모든 사실이 발각이 되어 감옥으로 끌려가고 모진 고문을 받다 겨우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 전체 줄거리다. 하지만 모진 고문에 못이겨 '스스로 저항'하길 포기하고 얻어낸 '자유의 삶'인 까닭에 윈스턴은 행복할 리가 없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사랑했던 모두를 '배신'해야만 했고, 가장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에는 가장 사랑했던 '줄리아'가 그 고통을 대신해야 마땅하다는 자백을 꺼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했던 마지막 '인간다움'을 스스로 포기하고 난 뒤에야 당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윈스턴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풀려난 윈스턴은 '이미' 인간이 아닌 셈이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서 '인간성'을 말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독재자의 말로는 끝내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독재자의 승리'를 결말로 장식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권력을 위해서라면 온국민을 '감시'하고,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권력'에 반하는 세력은 끔찍한 방법으로 분쇄시켜버리고 만다. 그래서 결국에는 '독재자의 권력'이 영원토록 유지되는 사회를 만들고야 말았다. 이런 끔찍한 사회가 영원토록 존속하게끔 '결말'을 지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1984>년에 말이다.

 

  물론, 지금은 1984년을 훌쩍 지난 시점이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조지 오웰의 '예언(?)'이 맞아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우리도 '전두환'이란 독재자를 맞아 이도저도 못하던 암울한 시기였기에 꽤나 관심 받던 소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머지않아 <1987>을 맞아 민주화의 물꼬를 틔우게 되었다. 그리고 부당한 권력은 언제고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고 말이다. 그런데도 <1984>에선 부당한 권력이 집권한 채로 결말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어떤 평론가는 이를 두고 비전문소설가인 조지 오웰의 '한계'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허나 아무리 비전문가라고 하더라도 뛰어난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조지 오웰이 마땅한 '사회비판'도 없는 소설을 써냈으라곤 쉬이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암울한 미래'를 그려서라도 결단코 '부당한 권력'이 설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는 '역설적인 의도'가 깔렸던 것은 아닐까? 부당한 독재권력이 영원토록 집권하기 위한 '유일한 꼼수'가 바로 '폭력'이니, 독재자가 들 '몽둥이'만 제거하면 부당한 권력이 설 자리는 없다는 명백한 진리를 명명백백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말이다.

 

  부당한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지독한 악취'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공작'을 벌이고, 무고한 이들에게 '오명'을 뒤집어 씌워 자신들의 악취를 감춰보려 애쓰기 마련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상대의 잘못'을 지적해 똑같이 '더러운 짓'을 했으니 쌤쌤이다..라는 전략을 곧잘 쓰곤 하는데...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대국민쇼'에 속아넘어가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긴 하겠으나, 결코 속지 않는 '똑똑한 국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똑똑한 국민들은 부당한 권력자를 온전히 놔두질 않았다. 4·19혁명, 5·18민주화혁명, 6월혁명,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정당한 저항의 물결'은 멈출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또다시 부당한 세력이 득세하는 시절이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가만히 지켜만 볼 국민들이 아니다. 비록 <1984>에선 저항에 실패한 주인공의 나약한 모습이 연출되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오웰의 <1984>는 '미완성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결말을 도려낸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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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가 뭐예요? 미래를 여는 키워드 2
이시한 지음, 황정하 그림 / 풀빛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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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마크 주커버그가 자신이 설립한 '페이스북'을 '메타'로 이름을 바꾸면서 본격적인 메타버스 구현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시점은 바로 5년 뒤인 2025년이라고 말했다. 많은 전문가들도 메타버스가 실현가능한 시점을 24~25년즈음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메타버스 세상'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무겁고 거추장스런 '고급 장비'를 착용해야만 메타버스 세계로 입장이 가능한 까닭에 낯선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제페토'라는 메타버스가 운영중이라고 하니 머지 않은 미래에는 본격적인 메타버스가 우리의 일상을 빠르게 확대될 것이 틀림없다.

 

  쉽게 말해서 '메타버스'는 게임속으로 들어가 직접 게임캐릭터(아바타)가 되어 실제처럼 게임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과 같은 가상현실속에서 실제처럼 '또 다른 일상'을 경험할 수 있다고 이해해도 좋다. 더 중요한 것은 '메타버스'로 구현된 세계에서는 현실에서처럼 똑같은 일상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그래서 돈을 벌어서 '현실'에서 쓸 수도 있다.

 

  이렇게 실제 세상과 똑같이 구현되었기 때문에 집에서 몇가지 장비만 갖추면 멀리 여행을 직접 떠날 필요없이 '관광'을 즐길 수도 있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공연'을 직접 찾아가지 않고서도 '관람'할 수 있으며, 출퇴근의 불편함 없이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학교수업'을 할 수도 있다. 그로 인해 직접적인 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집에서 가만히 머물러만 있으니, '지구온난화', '탄소배출제로' 등을 실현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라도 선진국에선 발빠르게 '메타버스'를 구현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메타버스를 구현하는데에 문제점도 많다. 첫째로 아직까지 메타버스 세상이 실제와 똑같이 구현되지 않았기에 가상현실에 들어가면 '멀미'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하지만 점점 기술이 발전하고 있고 정부차원에서 투자개발을 아끼지 않고 있기에 금방 해결될 문제이기도 하다. 둘째로는 '언어장벽'이 있다는 점이다. 가상세계는 전세계에서 '동시접속'이 가능한 세상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원활해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AI 번역기'가 완벽히 구현되지 않아서 글로벌한 세상을 만드는데 애로사항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셋째는 메타버스로 입장하는 '장비'가 너무 비싸고 거추장스럽다는 점이다. 메타버스 안에서는 '아바타'가 대신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 아바타의 행동거지를 우리 몸에 '직접' 부착한 센서로 작동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머리에 쓰고 몸에 붙여야만 한다. 그 장비가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오랜 시간 접속하지 못하게 만든단다. 특히 여름철에는 너무 더워서...하지만 앞으로는 '접속장비'가 스마트폰만큼 저렴(?)하게 대량보급될 것이고, 지금보다 쉽고 조작할 수 있게 '일상 아이템'으로 바뀔테니 크게 걱정한 것은 못 된다.

 

  허나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는 '현실도피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 문제'다. 메타버스는 현실세계와는 다른 가상세계인 까닭에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중독'과 같은 현실도피를 추구하는 '현실부적응자'가 등장하게 된다면 분명 사회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가상세계라지만 너무나도 실제 현실과 비슷하게 구현을 하다보니 '현실'과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고, 현실세계에서보다 가상세계에서의 삶이 더 만족스러운 경우에는 가상세계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려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게다가 '범죄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가상세계에서는 '아바타'로 된 모습으로만 활동을 하기 때문에 가상세계에서 '아바타'를 상대로 살인을 저질러도 현실에서 직접 죽인 것이 아닌 까닭에 처벌이 쉽지 않다. 또는 '성추행'이나 '언어폭력'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가상세계와의 접속을 끊어버린 뒤에라도 상처와 고통으로 괴로워할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현실세계에서 각자 결혼을 한 유부남, 유부녀가 '가상세계'에서 사랑을 빠져 연애와 결혼까지 해버려서 문제가 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경우에도 '현실'이 아닌 '가상'으로 벌인 일이니 현실세계에서 '불륜'으로 처벌받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 '사기범죄'가 벌어지는 일이 빈번하다고 하니 하루라도 빨리 '가상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나 법적조치가 뒤따라야 하겠고, 무엇보다 스스로 '도덕규범'을 성실히 지켜지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문제점이 많은 곳이지만, 언젠가는 구현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10대는 '메타버스'에서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시급한 것은 지금의 30~40대다. 20대들은 어느 정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지만, 30~40대들의 '10년 후'는 40~50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재 '메타버스'가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게다가 '낯선 세상에 대한 적응력'도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이들이 한창 '경제력'을 갖춰야 할 나이인데, 확확 바뀌는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자연도태'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는 노후준비가 덜 된 50~60대도 마찬가지지만 어차피 살 날이 많지 않은..쿨럭쿨럭

 

  그렇다면 지금의 10대는 '메타버스 세상'을 맞아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통찰력'을 키우는 방법이란다. 통찰력은 모든 일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초기 메타버스는 '구현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때도 '통찰력'을 발휘해서 더 나은 메타버스 세상을 구현하는데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완벽히 구현 될 낯선 세상'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도 '통찰력'은 큰 힘이 될 것이다. 왜냐면 통찰력은 지식을 많이 쌓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척보면 착하고' 이해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만약 첫번째 통찰이 실패했더라도 두번째, 세번째 통찰력을 휙휙 발휘하면 되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이 통찰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인문학 독서'를 즐기는 것이다. 인문학에는 오랜 세월 '인간이 살아온 모든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 책을 즐겨 읽으면서 '생각하는 힘'을 기르면 통찰력도 저절로 깨닫기 마련이다. 여기에 '질문하고 답하는 것'을 즐기는 또래친구와 함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제 미래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기술발전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단 말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생각'을 기르는 것이다. 현실문제가 심각해지더라도 '문제해결'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결된 문제가 비관적이거나 부정적으로 흐르지 않게 '긍정적인 생각'을 담아내야만 한다. 물론 무조건적인 낙관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는 '긍정회로'를 항상 작동시키고 있어야 멋진 미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메타버스'는 우리가 새로 만들 세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기왕이면 새 세상에는 '좋은 것'만 가득하면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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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3 : 오만과 편견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3
윤주연 글, 최익규 그림, 손영운 기획, 제인 오스틴 원작 / 채우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로맨스 소설'로만 보게 되면, 자존심 강한 엘리자베스와 무뚝뚝한 다아시가 만나서 서로를 오해하고 불만을 쌓다가 끝내는 사랑의 결실인 결혼에 골인한다는 이야기로 끝맺게 된다. '해피 엔딩'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기에 이 소설은 그렇게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정말 그뿐일까? <오만과 편견>이 그 정도의 소설이라면 이처럼 오래도록 사랑받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결혼을 꿈꾸는 여성'이 통속적 사회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에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과 마찬가지로 '여성해방'을 담고 있는 소설이기에 더욱 사랑받았던 것이다.

 

  19세기 영국여성들이 왜 결혼에 목을 매달게 되었을까? 그건 바로 '경제적 독립'을 하기 위해서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상속'은 오직 장남에게만 주어진 권리였다. 남자조차 차남과 삼남은 상속의 대상에서 빠져 있기 때문에 물려받을 재산은 거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군인'이나 '성직자'가 되어 사회고위직과 명예를 얻어 부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여자는 아예 상속의 대상에서 제외 되었고, 만약 물려받을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가까운 남자친척'이 대신 물려받는 '한정상속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상속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여성은 철저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돈 많은 남자'를 잡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못되는 낮은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젊은 여성들이 예쁘게 단장하고 '무도회 순례'를 나서는 까닭은 한창 예쁠 때 '돈 많은 남자'를 꾀어내 안락한 노후를 맞이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는 좀 남달랐다. 결혼의 조건이 '진실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남자가 아니라면 청혼에 승낙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 스스로도 그런 '완벽한(?) 남자'에게 걸맞는 숙녀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 덕분에 수많은 남정네들이 '그녀'를 탐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눈높이에 딱 맞는 남자가 아닌 까닭에 누구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노력'만으로 성사되지 않는다. 상대가 아무리 오만불손해도 첫눈에 꽂히는 '무엇'이 있어야 불꽃이 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그런 경우였다. 둘은 첫만남부터 사랑의 불꽃이 튀어 올랐으나 서로가 갖고 있던 '고집스런 조건' 때문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에게 받은 첫인상 때문에 줄곧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장점'이 아닌 '단점'만 확인하며 급기야 서로를 오해하게 된다. 서로의 단점이란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이었다. 사실 둘은 모두 '합리적인 성격'으로 모든 상황을 꼼꼼하게 따지는 묘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이 불타올랐음에도 사랑에 휩쓸리지 않고 서로를 관찰하는 용의주도(?)함마저 닮았다.

 

  그런데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에게 매력을 느꼈음에도 그녀의 집안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낮은 지위(젠트리: 하급귀족)'이고 가난하며 돈 많은 남자만 밝히는 천박한 언행을 일삼는 가족들의 대화를 듣고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부류라고 섣불리 판단을 내려 버린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걸맞게 '오만한 말과 행동'으로 오해를 사게 된다. 한편, 엘리자베스도 첫만남에서 다아시에게 묘한 호감을 느꼈으나 그가 내뱉는 말과 행동으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냉혈한일 것이라는 섣부른 '편견'에 빠지고 만다. 둘은 이렇게 서로의 단점만 확인하고서 자신의 가슴속에서 싹튼 사랑의 감정을 애써 무시하고 만다.

 

  이런 둘의 '오만과 편견'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며 '결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양한 대답을 내놓게 된다. 특히, 엘리자베스를 비롯해서 다섯 딸들을 시집 보내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인 베넷 부인을 통해서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을을 찾은 '명문가 청년들'을 상대로 자신의 딸들이 신부로 선택된다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을 여성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자에게 '결혼' 이외의 경제적 독립 방법이 없고, 노처녀로 늙어서 '경제적 부담'이 된다면 평생을 천덕꾸러기로 살아야 한다고..심지어는 여기저기 구걸이나 하는 거렁뱅이 취급을 받게 된다며 '결혼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바로 둘째딸인 엘리자베스다. 설령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원치 않는 결혼'이나 '사랑 없는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마을을 찾은 사람은 콜린스라는 베넷가의 친척이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죽음과 동시에 그의 재산을 모조리 상속받을 유일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돈 많음'을 앞세워 다섯딸 가운데 한 명과 결혼을 목적으로 찾아오게 되었다. 당시 영국사회는 사촌간의 결혼도 허용하였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었으며, 아버지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와의 결혼을 놓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첫째딸 제인은 '명문가 자제'인 빙리와 이미 사랑에 빠졌고 혼담이 오고 갈 상황이었기에 콜린스는 둘째딸인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한다. 당연히 엘리자베스는 사랑없는 결혼에 승낙할 리가 없다. 그러자 콜린스는 엘리자베스의 이웃이자 친구인 샬롯에게 청혼을 하고, 샬롯은 '풍족한 미래'가 보장된 그와의 결혼을 망설이지 않고 승낙해버린다. 물론 사랑도 없고, 무조건적으로 '남편에게 복종하는 아내' 역할이라는 부당한 요구를 할게 뻔하지만 샬롯은 결혼한다. 그게 그 당시 여성이 처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기꾼에 방탕하기 이를 데 없는 위컴과 엘리자베스의 동생인 리디아가 '야밤도주'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 당시의 여성은 교육을 통해 지식을 쌓는 일이 허락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생각'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는 존재로 인식되던 시절이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하더라도 여성 스스로 이혼을 요구하거나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도 없었다. 오히려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잘못된 결혼을 했더라도 남자쪽에서 내치지 않는 이상 그냥 참고 살아야만 했다.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남자들은 돈 좀 있는 여성을 어떻게 해서라도 꾀어낸 뒤에 그 집안의 남자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뻔뻔한 짓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곤 했다. 위컴도 바로 그런 부류였던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이렇게 '열악한 처지'에 놓인 여성들을 해방시키고자 고집 쎈 엘리자베스를 주인공으로 발탁했고, 그런 그녀에게 딱 어울릴 만한 멋진 남성인 다아시를 등장시켰을 것이다. 여성은 사랑받아 마땅하고 남성은 그런 여성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 완전한 사랑과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제인 오스틴이 스무 살에 이 책을 썼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녀도 부유한 청년들에게 청혼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작가 생활에 만족했다고도 전한다. 그녀는 애정없는 결혼은 '무덤에서의 삶'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긴 듯 싶다.

 

  결혼의 조건은 무엇일까? 평생을 써도 줄지 않는 경제력,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어도 꿀리지 않는 외모,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지 않을 나이차이, 남부럽지 않고 부끄럽지도 않는 명성, 그리고 하고 싶은대로 해도 걸리적거리지 않는 성격 등등 결혼상대로 부족할 것이 없는 조건만 충족이 되면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아무런 조건도 없이 오직 '사랑' 하나만으로 결혼을 선택하면 행복이 아니라 '도박'일 것이다. 분명 따질 건 따져보아야 한다. 허나 하나하나 따지기만 하면 평생 '홀로 살 다짐'을 해야 할 것이다. 어찌보면 사랑과 결혼은 '완벽히 마련한 결과'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맞춰 나아가는 과정'에서 시작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변변한 사랑도 못해보고 결혼도 못한 총각이 내린 서툰 결론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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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2 : 말테의 수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2
홍은희 글, 최순표 그림, 손영운 기획, 라이너 마리아 릴케 원작 / 채우리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도대체 왜 이 책이 '서울대선정도서'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읽어도 읽어도 뜻모를 책인데 말이다. 솔직히 <말테의 수기>를 읽고 이 책에 담긴 명확한 뜻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어보길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도 헤매는 이들에게 속시원히 답을 내어주면 정말 고맙겠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책의 '정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렴풋이 왜 이 책을 선정했는지 짐작은 된다. 비록 '정답'은 없지만,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답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문제는 '답이 뻔한 문제'가 아닌 '누구도 풀 수 없다'고 믿는 가운데 '자기만의 답'을 찾아내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길을 묻는 문제다. 그렇다면 <말테의 수기>는 아주 훌륭한 문제인 셈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줄거리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이 책을 읽고서 '정답'을 말해야 하는 부담감 말이다. '일기 형식'과 '편지 형식'이 두서 없이 나열되어 있고, 줄거리가 없으니 일관된 '하나의 사건'도 없으며, 오로지 작가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속내만이 고백인지, 독백인지 알 수 없는 넋두리처럼 늘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아주 유명한 시인이 아니었던들, 이 소설은 결코 출간되지도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암튼 그의 경험과 일상이 담긴 '단편의 나열'속에서 우리는 무엇이라도 발견하려 드는 모습만 볼 수 있다.

 

  그나마 이 소설에서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주제는 '죽음과 사랑'이다. 하지만 왜 죽는지 이유를 알 수 없고, 왜 사랑하는지 까닭을 알 수 없다. 그저 사람들이 죽어가고, 사람이기에 사랑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절실히 바라지만 '죽음의 공포와 고통'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느냔 말이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어서 빨리 죽기를 바라는 한 남자의 비명을 듣는 이들은 모골이 송연해지며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 허나 그 분이 너무나도 고귀한 분이기에 함부로 죽일 수도 없어 그냥 죽을 때까지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고통에 겨워 울부짓는 비명소리가 잦아든 것은 그에게 찾아온 '죽음의 순간' 덕분이었다. 그렇게 사라진 공포스런 비명이 사라지자 그의 곁을 지키던 수많은 사람들은 안도하고 평온을 느끼지만, 고귀한 분이 죽었다는 사실에 또다시 누군가는 오열하고 슬퍼하고 만다.

 

  한편, 사랑도 누구든 바라마지 않는다. 허나 너무 사랑한 탓에 어느 순간 '부담'으로 다가온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난 탕아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만끽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떠돌이 삶을 살다보니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더럽고 추한 빈털털이가 되어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는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자유도 탕아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탕아는 집으로 되돌아가기로 하고 가족들은 그 탕아를 아무런 비난 없이 반갑게 받아들이고 '무한한 사랑'을 듬뿍 전한다. 되돌아온 탕아는 가족의 품에서 다시 말끔한 사람으로 되돌아오지만, 또다시 가족들이 '넘치는 사랑'을 줄 거라는 부담감에 걱정이 밀려온다.

 

  릴케는 일생을 살면서 이런 '죽음의 공포'와 '사랑의 부담감'을 느끼며 지냈는가 보다.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가 겪은 수많은 경험들이 모두 자기 맘에 쏙들지 않은 불만족이 <말테의 수기> 속에 수두룩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내면의 혼란은 자신을 너무 완벽한 사람이라고..완벽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생겨난 듯 싶다. 사랑이란 감정조차 완벽하기 위해선 '완벽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정의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아야 '순수한 사랑'이고, 표현을 하는 순간부터 상대를 향한 욕망이 꿈틀대니 '순수하지 않은 사랑'이라는 대목이 그렇다. 이미 사랑에 빠진 연인이라면 굳이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절실히 아끼고 충만히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첫눈에 빠진 상대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조차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느냔 말이다. 게다가 애초부터 사랑은 순수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저지르는 다양한 범죄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릴케는 현실에서는 있지도 않은 '순수'를 찾아헤매다 스스로 '만족'이라는 것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한 듯 싶다. 하지만 그도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면서 완벽하고 순수한 '죽음'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을까 싶다. 삶은 '희노애락의 연속'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줄 아는 '안분지족'을 일찍 깨달았다면 릴케의 분신인 '말테'도 무난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바는 무엇일까? 자기 삶의 완벽함을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고민과 번뇌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테라는 주인공이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해질 때까지 번뇌하며, '해탈'할 때까지 고통을 맛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삶은 너무나도 끔찍한 '고행'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고행'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고행을 겪어야만 진짜 사람이 된다는 식의 결론을 내려선 곤란할 것이다. 어쩌면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곧바로 뒤치면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이니 말이다. 멋대로 뜻을 부여한다면, 죽음의 고통을 맛 본 자만이 지금 이 순간을 진정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사랑을 맛보기 위해 끔찍한 죽음의 고통을 겪으라고 강요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말아라. 그런 삶은 완벽한 사랑은커녕 죽음보다 더한 '지옥의 맛'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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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킴의 거침없는 중국사 - 신화시대부터 청나라까지 영화처럼 읽는 중국 역사 이야기 썬킴의 거침없는 역사
썬킴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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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역사를 '한국사'와 '세계사'로 나누어 배우는 경향이 있다. 각 나라별 역사를 공부할 때는 어쩔 수 없이 '한 나라'를 중점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역사가 어찌 '국내와 국외'를 칼로 무를 자르듯 반듯하게 나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갔다면 분명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무엇'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역사는 한데 뭉뚱그려서 '통찰'을 하듯 바라보면서 공부를 해야지 '한국사' 따로, '세계사' 따로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나라를 둘러싼 나라들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특히, '한중일, 세 나라의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만큼 깊이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그 가운데 이 책은 '중국사'를 후루룩 들이킬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재미나게 풀어썼기에 '중국사 입문용'으로도, 폭넓게는 '역사 입문용'으로도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책이다. 심지어 역사와 담을 쌓았던 독자라도 쉬이 빠져들며 읽어나갈 수 있을테니 한 번쯤 필독해보길 권한다.

 

  우리에게 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정서상으로 굉장히 먼 나라에 속한다. 물론,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고, 유교, 불교, 도교 등 사상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지만, 지금도 '공산체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느낌적인 느낌이 가로막고 있다. 심지어 '한국전쟁' 당시에는 우리를 침공한 나라였고, 지금도 우리와 적대시하고 있는 '북한'과 형제관계 운운하고 있는 상황이라 마냥 편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런데도 <삼국지>와 <초한지>, 그리고 <수호지> 같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나라인 까닭에 꽤나 친숙한 느낌을 지울 수도 없다. 한국사에서도 중국은 빠지지 않고 등장을 하며 우리가 전통사상을 이야기하며 '공맹사상'이니, '노장사상'이니 동양사상을 거론할 때에도 중국의 '요순시대'와 '춘추전국시대'를 들먹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작 <중국사>에 대해서 깊이 얘기하지 못한다. 알면서도 잘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중국의 역사를 너무 띄엄띄엄 공부한 탓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역사는 흐름이 중요한 법이다.

 

  거기다 우리는 중국과 너무나도 자주 싸웠다. 중국사의 시초라고 하는 '삼황오제시절'부터 동이족의 수호신인 '치우천왕'과 수없이 싸웠다고 하며, 상나라의 유적이 발굴된 '은허'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은 거의 대부분 '동이족'의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서 연구를 할 수 없다. 중국정부가 '중국땅' 안의 모든 것은 '중국사'라고 트집을 잡고 있기에 다른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출입국조차 쉽지 않고, 역사연구를 목적으로 한다면 심한 '검열'을 하고, 심지어 자기네들에게 불리한 사료가 나오면 '체포와 수감'까지 불사하고 있는 탓에 '고대사 연구'는 더욱더 힘들다고 한다. 정황으로 봤을 때 분명 '한국의 역사'인 것이 틀림없는데도 말이다. 암튼, 그런 세세한 내용까지는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으니 살짝 재껴두고, 우리와 똑같은 '반만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중국사의 흐름을 조명하며 읽어나가면, 도리어 '한국사'가 절로 이해되는 '역사의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너무 자주 싸운 탓에 '공통의 역사'도 많기 때문이다. 한무제는 '고조선 멸망', 수당시대는 '고구려침공 및 멸망', 송요금원시대에는 '고려의 위상'을 느낄 수 있으며, 명청시대에 '조선'이 중국사를 들었다놨다하곤 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를 잘 들여다보면 중국이 '분열의 시대'를 겪을 때에는 한국이 '부흥의 시대'를 맞이하고, 중국이 '통일제국'을 건설하게 되면 한국이 '위기의 시대'를 겪게되는 묘한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국사'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 주목적이다. 중국은 우리에 비해 엄청 큰 대륙이라는 지리적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국이 분열되면 우리에겐 '기회'가 되고, 통일을 하면 '위협'이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분열되었을 때 중국은 '부흥'했고, 우리가 통일했을 땐 중국도 바짝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중국의 초기역사는 미약했고 혼란했다. 그렇기에 '고조선'은 대륙을 호령하는 강국있었고, 중국이 진한시대에 통일을 한 뒤에 '고조선'은 위기에 봉착했다. 중국이 위진남북조(5호16국)시절을 겪을 때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이라 외칠 정도였다. 하지만 수당제국으로 중국이 또다시 통일을 하자 고구려는 수차례의 대규모 침공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또다시 중국이 '5대10국', '송요금원'으로 분열하자 우리는 북쪽에 발해가, 남쪽에 고려가 차례로 등장해 각각 당당히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랑하였다. 하지만 몽골이 '원제국'으로 통일을 하자 고려는 다시 위축되고 말았다. 이후 명청시대에도, 현재의 중국도 마찬가지다. 비록 현재는 우리가 '남북'으로 분열하여 중국에 짓눌린 상황에 처했지만, 중국의 공산주의가 쇠퇴하여 혼란해지고, 우리가 통일을 이룩하면 또다시 반전이 일어나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중국사'에 깊이 빠져들어야만 한다. 아예 '한국사와 중국사'를 뭉뚱그려 '동아시아 대륙사'로 같이 묶어 빠삭하게 파헤쳐야 마땅하다. 분명 앞으로는 그리해야만 할 것이다.

 

  역사공부는 다분히 '자국중심주의'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사를 배우며 '서양의 위대함'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되는 것처럼 '중국사'를 다루면서 '대륙의 스케일'에 압도될 것이 전혀 없다. 오히려 대한민국이 대륙의 원래 주인이었다는 심정으로 '중국사'를 바라보면 의외로 '중국의 빈틈'이 굉장히 많고 상당히 크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들이 훨씬 더 많게 된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말이다. 중국이 '동북공정' 따위로 무한한 자국이기주의 사상의 근거를 조작하려는 속셈도 같은 이치다. 하지만 중국은 심각한 '과장법'을 자주 사용하는 못된 버릇이 있기 때문에 애써 마련한 자기애적인 이기주의조차 헛물켜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 바로 이 틈을 파고 들어 우리는 '냉철한 이성'으로 한국사를 다시 써야만 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할 수 있는 역량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 역량을 발휘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역사분야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게 되면 중국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실은 더 냉혹한 법이다. 대한민국의 국력은 아직까지 중국과 맞짱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편이다. 중국을 비롯해서 미국, 일본, 러시아, 심지어 북한과도 '역사적 명분'에서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 행세에 익숙했고,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속국신세를 면하나 싶었는데, 일제가 강제로 '식민통치'를 했으며, 해방된 뒤에는 '미국과 소련의 군사통치'로 혼란했고,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남북으로 분단된채 오래도록 '미국의 그늘'에서 쑥쑥 성장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이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정도로 성장하긴 했으나, 막상 '홀로 우뚝 서 본 경험'이 없는 관계로 자신감이 실종된 상태가 우리가 직면한 처지다. 과연 우리는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역사는 거대한 중국조차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게 만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도 거대한 중국을 쫄게 만든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그 시절이 되돌아오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다. 이제 전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있다. 세계사의 변방이 아니라 '주역'이 되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하루 빨리 '홀로서기'를 달성해야만 한다. 중국사의 흥망성쇠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역사공부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 책이 분명 '그 시작'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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