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1 : 혼세편 퇴마록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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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 혼세편 1>  이우혁 / 엘릭시르 (2012)

[My Review MDCCXCVI / 엘릭시르 8번째 리뷰] 세상이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국내편'에서 퇴마행을 하기 위해 뭉쳤던 박 신부, 이현암, 현승희, 장준후, 4명의 퇴마사들은 언어학 박사 서연희 양과 함께 '세계편'에서 대활약을 펼친 끝에 이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려 악마 아스타로트를 불러들이는 '지옥문'을 열려는 블랙서클과 싸워 승리를 거두웠다. 그렇게 세상은 평온해지는 줄 알았으나 여기저기에서 '악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며 퇴마사들을 바쁘게 만든다. '혼세편 1권'에서는 블랙서클 퇴치 뒤에 국내에서 일어나는 혼돈스런 상황을 정리하는 일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와불이 일어나면 편>에 잘 나타났다.

<와불이 일어나면>에선 일제 총독부가 앞장 서서 조선의 정기를 끊어놓겠다며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조선팔도 명당이란 명당 자리에 '쇠말뚝'을 박아넣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론 풍수지리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산이나 들에 쇠말뚝 몇 개, 아니 수백 수천 개를 박아놓았다고 한들 큰 문제가 될 것도 없다. 만약에 풍수지리가 실제로 큰 힘을 발휘하는 과학적 근거가 있다면 '국내의 건설업'은 물론이거나와 전세계 건설업자들은 모두 풍수지리에 따라 조심스럽게 사업을 펼쳐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풍수지리는 그럴 만한 힘이 없으니 크게 걱정할 것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가 '한국땅'에 쇠말뚝을 박아넣은 일이 만행인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이 '조선의 정기'를 끊어 한민족이 절대로 부흥하지 못하고 결국엔 쇠망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를 품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곱지 못한 의도로 저지른 짓을 철저히 파헤쳐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겠다는 것이 '혼세편 1권'의 핵심 주제인 셈이다.

<와불이 일어나면>의 배경은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운주사다. 이 운주사가 유명한 까닭은 이곳에 '천불천탑'이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석탑'이 있다는 이름인데, 그 옛날 신라 효공왕 때 도선국사가 천상(하늘)의 석공들을 불러 하룻밤만에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수의 불상과 석탑이 있는 관계로 장관을 이룬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나 많은 불상과 석탑의 모습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1000개의 숫자보다는 한참 모자란 수로 현존하는 까닭에 그저 '많다'는 뜻을 담아 지었다는 설과 당시엔 '천 개'를 꼭 채웠으나 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은 수백 개만 남아 있다는 설이 함께 전해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운주사에 있는 와불(누운 자세의 불상)을 일으켜 세우려는 시도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기술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크레인이나 기중기도 없었기에 놀라울 따름이고, 굳이 누워 있는 불상을 세우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그 의도가 '풍수지리'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와불이 일어나면 벌어질 일들에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풍수지리상 한반도의 형세가 어떠한가 살펴보면,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뜻을 풀면, 배가 동쪽 바다로 나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백산맥이 있는 동쪽 지형이 지대가 높고 서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낮아지는 모양을 하고 있으니 한반도의 땅 모양이 배와 같은데, 한 쪽이 무거워서 무거운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 배가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크게 휘어져 나가는 형세라는 말이다. 그러나 풍수지리라는 것이 '좋은 땅, 나쁜 땅'을 가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애초에 좋은 땅은 더욱 좋게 만들고, 반대로 나쁜 땅이라 할지라도 '부족함'은 채우고 '과함'은 깍아서 좋은 형세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근본이다. 그렇기에 동쪽 땅이 무거우면 서쪽 땅에도 그에 못지 않은 '무게'를 주어 기울어진 배를 바로 잡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행주형국'인 한반도의 서쪽 땅(전라남도)에 운주사를 하루만에 짓고 그곳에 천불천탑을 하룻밤만에 지어 바로 잡아 '한반도의 풍수 기운이 올바르게 차고 넘치도록 보완했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소설에서는 바로 이런 '사실(史實)'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여기에 일제시대 총독부의 만행을 기어 넣은 것이다. 다시 말해, 도선국사가 바로 잡은 한반도의 좋은 풍수를 망치려 전국에 '쇠말뚝 테러'를 저질렀고, 와불 또한 일으켜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만행이다. 명백하게 '나쁜 의도'로 저지른 짓이자,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소중한 문화재를 망가뜨리려 한 범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마사와 함께 동행한 풍수지리가와 도가의 고수(도술 고단자)가 부족한 불상과 석탑을 복원하고 와불을 일으켜 세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하지 않은 일본 정부를 향해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 다시 말해, 읿어버렸던 풍수의 기운을 되살리는 것을 넘어 와불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그 기운을 더욱 넘치게 한다면, 우리 나라는 큰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일본은 침몰시켜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식민의 경험'이라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저들의 잘못을 사죄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저들 덕분에' 한국이 이만큼이나마 잘 살게 되었다는 허튼 소리를 지꺼리는 일본정치인들에게 혼쭐을 낼 수 있다면,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것뿐 아니라 더 심한 일도 마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풍수지리'라는 것은 비과학적인 일이다. 천불천탑으로 '기울어진 형세'를 바로 잡았는데, 일제가 이를 훼손시켜 우리에게로 향하던 '기운'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일제가 부흥할 수 있었으니, 역으로 훼손된 천불천탑을 복원시켜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기운'을 흘러가지 못하게 막고, 와불을 일으켜 세워 무거운 태백산맥을 지렛대의 주춧돌로 삼아 일본 열도를 높이 들어올렸다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뜨려서 그대로 '침몰'시켜버린다는 가설이 실제로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 총독부가 실제로 효과가 있을 지 없을지 모르지만 '나쁜 의도'로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들처럼' 우리에겐 좋은 기운을 일본에겐 나쁜 기운을 천벌처럼 내려본다면 어떨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통쾌하지 않겠는가? 마치 거대한 태풍이 우리 나라를 비켜서 일도 열도로 곧장 가버리던가, 진도 9가 넘는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고, 그로 인해 지진해일(쓰나미)가 일본 열도를 강타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면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그에 대한 사죄나 반성 따위는 할 줄도 모르는 '야만인들의 나라'가 그처럼 천벌을 받아 벌벌 떠는 모습이라도 보는 것이 속시원한 일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우리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면 그런 마음을 품는 것조차 큰 죄책감을 갖게 될 것이 틀림 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잖은가. 일제가 저지른 만행은 반드시 죄값을 받게 하고, 그 피해 배상 또한 꼭 받아내야 하며, 다시는 그런 죄악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사죄를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 두 번 다시 이 땅을 넘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처절한 반성까지 얻어내면 개이득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인, 모두를 죄인으로 삼겠다'는 것이라면 옳지 못한 일이다. 과거에 저지른 '아빠의 잘못'을, 현재의 '그 아들'과 미래의 '그 손주'가 대신 받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현재를 살아가는 '전후 세대의 일본인'에게 과거의 죄값을 물어, 너희들은 죽어 마땅한 족속이라고 매도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반드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일본정부'다. 그들의 뻔뻔한 면상을 후두려 패고 굴복시켜야 한단 말이다. 물론 폭력적인 방법이 아닌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이 '정상국가'이자 '선진국'의 방식인 것이다. 이를 얻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일본정부보다 앞서고 뛰어난 '선도력'을 보여줘야 저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 허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저들을 굴복시킨다면 '복수는 복수는 낳는다'는 진리를 통해 저들 또한 '앙갚음'을 하려 들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일본 침몰을 실현시킬 수 있는 '스위치'를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그리고 퇴마사들이 선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 한 명의 목숨을 구하고, 고통에 겨워하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하나 뿐인 목숨일망정 기꺼이 내놓을 준비가 된 이들이 바로 퇴마사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능력을 허튼 일에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저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능력이 놀라운 까닭은 '능력,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능력을 지녔음에도'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목숨과 영혼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놓을 각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천할 따름이다. 그들이 구할 수 있다면, 그들은 어디라도 갈 것이다. 설령 그곳이 지옥의 끝자락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런 퇴마사들이 일본 침몰을 목적으로 한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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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6 - 제국의 그늘 미국사 산책 1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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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XCV / 인물과사상사 23번째 리뷰]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까지도 미국인들은 '진화론'보다는 '창조론'을 믿는다고 한다. 심지어 과학을 전공한 박사들조차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이 세상을 조물주이신 하느님이 창조하셨고, 그런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는 곳은 미국인들이 사는 땅이라는 결론을 천연덕스럽게 내놓는다. 오죽하면 신앙의 과학적 접근을 허용하며 '지적 설계론'이라는 것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서 미국 공립학교에서 '과학과목'의 내용을 과학선생님이 가르치면서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가르쳐야 한다는 법까지 제정하고, 이를 어기면 과학선생님이라도 불법을 저지르게 된단다. 이미 '지적 설계론'으로 인해서 종교적 믿음조차 과학적으로 증빙이 되었으니 과학선생님들은 '빅뱅'이 아닌 '천지창조'로 우주의 탄생을 가르쳐야 한다고 아이들의 학부모들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단다.

하느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과 어둠으로 갈라졌고, 이것이 첫째날이다"라는 성경구절을 과학시간에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들은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미국의 법'이다. 아직까지도 미국 법정에서 증인이 선서를 할 때 손을 올려놓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미국의 헌법책'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바로 그런 나라다. 유대인들만 하느님께서 콕 집어 지목하고 영원토록 보살펴 주겠다는 '선민의식'을 가진 게 아니다. 미국민들도 <성경>의 말씀에 따라, 인간이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던 것처럼, 인간 가운데 오직 '백인'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만하니 '유색인종'을 짐승처럼 다루고 소유할 권리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미국인이다. 이런 미국에서 아직까지도 '흑백갈등'이 찬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처럼 미국에선 신앙심이 깊으면 그만큼 대접을 해주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다른 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오직 <성경> 단 한 권의 책만 읽는 조지 W. 부시가 2004년에 재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강한 미국'을 선호했고, 아들 부시는 이에 부응해 '강경한 대외정책'을 표방하며 미국 이외의 나라들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철저하게 악을 응징하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들 부시 시절에 '9·11테러'가 일어난 것이 과연 우연일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부시행정부에 속한 측근들의 입을 통한 소문은 거의 대부분이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되어서도 하는 일이라곤 <성경> 공부뿐이었다고 한다. 중대한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아들 부시는 어김없이 '성경구절'만 달달 인용하였고, 심지어 '이라크 전쟁'을 할지 말지 찬반을 논의할 때에도 아들 부시의 명령은 "이라크 침공이 합당하다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내라"면서 장관과 보좌진들을 닥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대통령인데도 미국민들은 아들 부시를 또 다시 선택했다. 실수가 아니다. 미국민이 원하는 바였던 것이다. 왜냐면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 '성경구절'을 들을 때면 애국심이 철철 넘쳐나는 듯한 감성에 푹 빠져드는 유권자들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그렇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하느님이 미국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말을 들을 때 가슴 뭉클해지는 무언가가 샘솟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신앙심이 이 정도다.

이런 신앙심은 상식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과학자라면 '검증가능한 것'만을 믿을 수 있다고 해야 하는데, 종교와 신앙에서의 '맹목적인 믿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국의 과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적 설계론'을 옹호하면서 '신앙'조차 '검증가능'한 분야로 확장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지적 설계론자들의 논리는 이런 것이다. 온갖 것을 다 갖춘 '쓰레기장'에 우연히 허리케인이 불어닥친다고해서 비행기가 뚝딱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런데도 만약 '비행기'가 만들어졌다면, 이건 '신의 섭리'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가능한 것이다. 왜냐면 전지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만드는 '개입' 없이는 이토록 정교한 시스템을 갖춰서 만들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일부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연'이 개입해서 어떻게 이토록 정교한 것들을, 이렇게나 많이 만들 수 있겠느냔 말이다. 오직 '필연'만이 가능케 한다. 우리는 이런 '필연'을 '지적 설계'라고 말한다. 바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다. 그럴 듯한 논법을 전개했지만, 이것을 어찌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연히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을테니 필연적인 개입이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신의 섭리'라는 주장이 어찌 '과학적 검증방법'이란 말인가?

그런데 '교회의 힘'이 막강한 환경속에서는 이런 주장이 통용될 수도 있다. 또한 '과학'처럼 어렵지 않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무장했다는 점이 '지적 설계론'을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 미국인들이 '역사'에 무지하다는 소문은 거의 대부분 사실로 확인된다. 아니 '무지'하다기보다는 '관심'조차 없다. 자기 조국이 초강대국이 되어서 전세계를 호령하고 있는데, 굳이 뭣하러 역사공부를 하러 골머리를 썩혀야 하겠는가 말이다. 골머리를 썩히기보다 그냥 누리는 것이 훨씬 더 편한데 말이다. 역사공부만 하지 않을까? 다른 공부도 안하긴 마찬가지다. 미국학생들의 기초학력이 우려할 정도로 형편없다고 걱정하면서 '한국의 교육'을 본받으라고 입 아프게 외친 이가 바로 '버락 오바마 미대통령'이다. 그렇게 형편없는 상식으로 뽑아놓은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우려할 정도가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미국이 이처럼 '강한 미국'을 선호하고, 그 강력함에 취해 있으면서 미국에는 점점 더 많은 문제점들이 산적해 가고 있었다. 온갖 매체를 통해서 양산되는 '폭력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빈부격차는 초강력한 나라인 만큼 더할 나위 없이 극과 극으로 갈라졌으며, 다인종·다민족·다문화 사회속에서도 소통과 화합보다 우위에 선 '백인우월주의'가 꿋꿋이 자리매김하며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양산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LA한인폭동과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위력 앞에 '빈민들'을 처리(?)하는 미국의 기득권 세력들의 행태가 그 단적이 증거들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승자독식주의'는 미국 선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전세계를 상대로 미국은 '승자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횡포를 부렸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 초반까지도 미국은 그런 횡포를 저지르더니 지금에 와서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져만 간다. 그간 미국만의 부려왔던 '권위주의', 또한 러시아나 중국, 그리고 이스라엘 따위가 부리기 시작하자 미국의 위협은 더는 먹히지 않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미국이 자초한 '승자독식주의'가 더는 미국에 이익을 수반하지 못하게 될 때, 과연 미국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이래저래 미국이 갖고 있는 딜레마가 나의 호기심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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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5 - '9.11테러 시대'의 미국 미국사 산책 1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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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XCIV / 인물과사상사 22번째 리뷰] 2000년 미국인이 선택한 43대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다시 말해, '아들 부시'였다. 아빠 부시가 '노련한 정치인'이었다면 아들 부시는 '멍청한 정치인'이었다. 왜냐면 그는 맹목적인 신앙심에 기대어 좋고 나쁨을 '구분'만 할 줄 아는 얼뜨기였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선한 목자'였으나, 기독교에 반하는 세력은 모두 '타자화' 시키고, 그들을 '악의 축'이자 '미국의 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어설픈 정치인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있을 때, 두 가지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하나는 '9·11 테러'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 전쟁'이었다. 이런 사태를 맞이한 '아들 부시'가 한 선택은 전쟁이었다. 딴에는 이해가 된다. 역사적으로 독립 이후 미국 본토가 적대세력에게 공격받은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는데, 공격을 받았으니 크나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정당한 보복을 해야 한다는데 미국 국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에는 '명분'이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차고 넘치는 명분으로 '전쟁'을 해서 미국이 얻는 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 왜냐면 '실익'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강대국 미국이 테러를 당했다지만 국가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충격도 아니었다. 다만 테러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와 경제적인 손해, 그리고 미국이 갖고 있던 자부심에 상처를 받았으니,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 미국이 '실리'를 챙기는 것이라면 전세계 그 어떤 나라라도 미국의 의지에 반대할 명분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강자의 처지에 놓여 있는 미국이 테러를 주동한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때려 잡는 것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침공'까지 계획했던 것이다. 테러 집단을 보호하고 있다는 명목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국가에 본격적인 내정간섭까지 시나리오를 짜놓은 것이다. 이는 테러소탕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에 '친미정권'을 세워 러시아와 중국 등 '반미국가'까지 동시에 견제하겠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문제는 전쟁을 마무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21세기가 되어서도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얻은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 명분은 그럴 듯 했지만 실리를 챙기기는커녕 '엄청난 손실'만 보게 되는 나쁜 수를 미국이 또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전쟁'을 치루는데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아들 부시'가 전쟁을 일으켜야 하겠다고 결심을 세웠으나 온 나라가 이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정계와 제계, 그리고 언론까지 한목소리로 '전쟁'을 외쳤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후폭풍은 고스란히 '미국민들의 몫'이 되었다. 빈약한 명분으로 엄청난 손해를 얻었는데, 그 손실을 메꿀 수 있는 방법은 '미국민이 책임'을 지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에 멈추지 않고 아들 부시는 '대량살상무기'라는 카드를 꺼내며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독재자 후세인만 제거하면 '이라크의 모든 문제'는 일거에 해소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또다시 정계, 제계, 언론이 삼박자를 맞춰 '이라크 전쟁, 찬성'쪽으로 밀어붙인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또다시 불명예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이라크 전쟁이 시작하기 전부터 '반전의 목소리'가 거세게 타올랐는데도 '아들 부시'는 이를 일축해버리고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만 우겼다. 급기야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할 거라는 예언(?)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주장까지 해대며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는 후세인 정권을 몰락시켜야만 한다는 정당성만 앞세운 주장을 매일같이 떠들어댔다. 그렇게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었지만, 이라크 어디에서도 '대량살상무기'는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독재자 후세인 아래에서 신음하던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킨 미군이었지만, 그 미군이 자행한 '이라크 포로를 학대한 증거'만 잔뜩 쏟아져 나왔을 뿐이다. 후세인만 끌어내리면 이라크는 행복할 수밖에 없다던 아들 부시의 생각이 여지없이 틀렸다는 빼박증거였다. 심지어 이라크 포로를 고문하고 학대해도 좋다는 '명령서'에 아들 부시가 직접 사인까지 했다는 후문이 들리자 미국민들은 이라크 전쟁이 수치스런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도대체 미국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미국민들이 '자국의 역사'에 대하 무지하다는 것은 정평이 나 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이 언제인지도 모른다고 답한 미국민들이 70%가 넘는다고 한다. 이토록 무지한 미국민들이 열광하는 것은 바로 '엄청난 상금'이 걸린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이를 테면 '무인도에서 벌어진 생존 서바이벌'이나 '엄청난 갑부와 결혼하기' 등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허용하는 서바이벌 매치를 벌이며 매일, 또는 매주 후보자들을 탈락시키며 최종 1인에게 엄청난 상금을 수여하는 방송이었다. 이런 방송에선 비열한 속임수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고 종종 폭력성과 선정성이 도마 위에 올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조차도 '시청률 대박', '흥행 보증'이라는 방송사의 수익구조에 묻혀서 있는 듯 없는 듯 해결되고 말았다. 이러한 미국민들이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이라는 중요한 이슈에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물론, 양식과 교양을 갖춘 지식인들 사이에선 수준 높은 토론을 벌이며 '앞으로의 미국'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나갔지만, 대다수의 미국민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보수적인 언론매체의 선동'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미국을 되살리기 위해선 '합당한 보복(전쟁)'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애국'이라는 보수적인 메시지에 미국민들이 환호하게 된 셈이다. 이 메시지의 중심에는 바로 '아들 부시'가 있었고 말이다. 그는 '십자군 전쟁'을 부추긴 교황처럼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면서 강한 미국의 힘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것만이 올바른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광신도들 앞의 교주'처럼 목놓아 외치고 있었다. 미국 안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반전시위'를 벌이고 있는데도, 그들의 목소리는 애써 무시했고, 심지어 그들의 행태를 '반애국적'이라면서 매도하기 십상이었다. 이렇게 미국의 보수주의와 신앙심을 합친 '온정적 보수주의'는 부시 행정부의 모토였으며, 강경한 대외정책을 주장하는 '네오콘'이 급부상하면서 미국은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극좌가 위험한 '생각'인 것처럼 극우의 '행동' 또한 매우 위험한 일이다. 공산사회주의가 내세우는 '평등'과 '공동체 우선주의'는 상상속에서만 실현가능한 일이다. 현실은 어쩔 수 없이 '불공정'과 '불공평'하게 돌아간다. 이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고작 '매우 불공정'하고 '매우 불공평'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감시하고 처벌이 필요하다는 벌을 주어서라도 '살짝 불공정'과 '살짝 불공평' 정도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반면에 모든 것을 '기득권 유지'에 올인하는 극우적 행동도 좌시해선 안 된다. 더 나아가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려는 시도엔 대변혁으로 맞서야만 한다. 이렇게 극좌와 극우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로 유지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극우의 행동'으로 너무나도 치우쳐졌다. 마침 맞게 부시 행정부의 탄생과 더불어 테러를 당한 미국사회는 이러한 '극우적 행동'으로 나아가는데 길을 넓히고 만 것이다. 그로 인해 분명 '미국인'인데도 백인이 아니면 '잠정적 테러리스트'로 간주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당연시하게 되었다. 당시 '아랍계 미국인들'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인 '무함마드', '모하메드' 등과 같이 테러범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어 수년 동안 감옥을 전전했던 무고한 시민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인이 아니란 말인가? 애국을 당연시하면서 왜 '백인'이 아니면 미국을 사랑할 수도 없게 만드냔 말이다. 왜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죄수' 취급을 하느냔 말이다. 미국사회는 이때를 계기로 더욱더 '백인'과 '부자'에게만 더할나위 없는 천국이 되어 버렸다.

  진보와 보수의 조화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다양성과 변화를 '중시'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 나라를 '사랑'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행동을 일삼는 일이 어찌 상충할 것이냔 말이다. 변화를 중시하는 진보적인 사고는 '그들'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가득찬 '나라사랑'으로 온국민을 똘똘 뭉치게 만드는 행동주의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바탕이 된다. 허나 현실적으로 서로 다른 '개인'이 똘똘 뭉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양성을 중시하고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매우 중요하다. 나와 다른 너의 생각을 '포용'하고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보적 사고방식과 보수적 행동방식은 조율을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서로 '상충하는 개념'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생각을 하며 보수적인 행동을 일상으로 실행하다 보면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서민적인 마인드를 가진 재벌의 행동양식을 실천한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처럼 말이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초일류 부자들이 "내게 세금을 더 많이 물려라!"라는 외침이 이러한 실천의 일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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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3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3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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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XCIII / 넥서스friends 3번째 리뷰] 작가인 히로시마 레이코가 앞서 밝혔듯이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는 애초에 성인을 대상으로 쓴 소설이었다. 그랬던 것이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 '어린이책'으로 재구성하는 바람에 과도한 폭력이나 살해, 그리고 선정적인 대목 들이 대폭 수정되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을 읽다보면 묘한 줄타기를 하는 느낌마저 들곤 한다. 어차피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요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괴'는 무엇일까? 일본의 요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등장하는 관계로 그야말로 '애니미즘의 확장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요괴는 기이한 이야기를 담은 <산해경>에 자세히 나와 있고, 대표작으로는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한국의 요괴는 언뜻 떠오르는 것이 그닥 없다. 대표적으로는 '구미호'와 '도깨비'가 있으나 귀신을 다룬 민담이나 설화의 수에 비해서 '요괴에 관한 이야기', 다시 말해 '요사스럽고 괴상한 이야기'는 상당히 적다. 그 적은 수마저 '불교에 관한 전래 이야기'나 '은혜 갚은 까치 / 두꺼비 / 호랑이' 등등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가 태반이라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귀신(원혼) 이야기'와는 사뭇 결이 다르다. 그에 반해 일본 요괴가 등장하는 괴담은 너무나도 흔해서 '전래한 것'인지, 아님 '새로 창작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특히나 일본 요괴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너무나도 쉬이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며, 너무나도 적나라한 성애 장면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컬트(신비주의)'나 '그로테스크(기괴함)'를 즐겨 읽는 독자가 아니라면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 가운데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는 귀여운(?) 요괴들이 등장하는 관계로 '2030 여성독자'들이 즐겨 읽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레이코의 히트작인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의 인기가 원인인 듯 싶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번 책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담았다. 이제 막 사랑에 눈뜬 '화사족(뱀 요괴)의 공주'가 이야기의 문을 열었고, 자식을 너무도 사랑한 엄마의 죽음을 초월한 염원을 담은 이야기와 누나(요괴이긴 하지만 가족이 있다)의 행복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남매의 사랑(형제애)까지 말이다. 결국 요괴라는 것도 인간이 죽어서 새롭게 생을 이어가는 존재이고, 비록 사물에서 비롯된 요괴일지라도 '살아있던 생물의 강한 염원'이 담겨서 탄생한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생명체'에 가깝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물론 실제로 살아가는 생명보다 월등히 '오랜 세월'을 누리며 살기 때문에 그 힘이 축척되어 엄청난 힘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어서 '현실세계의 생명'과는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이를 테면 '천년 묵은 여우'가 재주를 넘으면 사람으로 변신하여 이성을 유혹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런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요괴가 '인간처럼' 생을 살아가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기 딱 좋은 것이다. 그래서 요괴가 인간처럼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서 '판타지'를 펼쳐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된다. 이는 '일본 요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어느 나라의 요괴 이야기(다시 말해, '기묘하고 기이한 이야기')가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판타지 세계관'을 만드는데 성공하고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갖추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암튼, 사랑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보면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를 즐기는 색다른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먼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요괴'인 화사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이 책에 '한자'를 병기하지 않았기에 '이름'에 담긴 정확한 뜻을 유추하기 살짝 힘들긴 하지만, 화사족은 분명 '꽃뱀'이나 '꽃처럼 아름다운 뱀'을 이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요괴가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않으면 '어른'이 될 수 없는 특징이 있단다. 한마디로 사랑에 눈 뜨지 못하면 평생 '어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사족 요괴는 '부부사이'가 좋지 않기로도 유명하단다. 뭔가 감이 오지 않은가? 분명 '사랑'을 해서 아름다운 미모를 갖춘 요괴 부부일텐데,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는 다르게 '부부사이'는 냉랭하다 못해 평생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남남처럼' 살아가는 요괴라니, 분명 사랑을 하긴 하되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어 '부부의 연'까지 맺은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나이가 꽤 찼음에도 여전히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하쓰네라는 화사족 공주가 등장하는데, 이 요괴의 특기는 얼굴이 잘생긴 요괴만 만나면 '결혼'을 하자고 조르는 인물로 등장한다. 주위에서는 이런 하쓰네의 서툰 행동을 보고 충고를 하지만, 화사족 요괴답게 하쓰네는 '아름다운 자신'과 잘 어울리는 미남 요괴가 아니면 제대로 된 짝을 이룰 수 없다며 고집을 피운다. 그러다 운 좋게 외모가 출중한 요괴를 만나면 어김없이 '사랑고백'을 하는데, 밑도 끝도 없이 첫만남부터 "당신 정도의 미모라면 나랑 어울려요. 나랑 결혼하지 않을래요?"라고 말하는 예쁘장한 미소녀 요괴의 말에 "그럽시다"라고 말할 멍청한 요괴가 있을리 만무하다. 사랑은 '외모'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는 어김없이 '잘생김'과 '예쁘장'으로 잘 버무린 남녀 배우가 등장해서 운명적인 사랑을 '연기'한다. 그들은 꽃 같은 외모로 가슴 절절한 사랑을 그리다가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해피한 대단원'으로 막을 내리곤 한다. 시청자들은 이런 '러브스토리'에 열광하며, 그렇게 열연한 두 남녀가 '현실세계'에서도 부부의 연을 맺는 경우도 참 많다. 남들이 보기에는 '천생연분'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이어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드라마속의 연인이 끝내 '파경'을 맞아 둘로 갈라서는 일이 흔하다는 것 또한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왜 그처럼 아름다운 연인들이 끝내 헤어지고 마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성격차이'라고 한다. 연애할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실제 성격'과 '현실적인 본심'이 드러나면서 잘 포장되었던 '내면의 욕망'이 서로 잘 어울리지 않다보면 으레 헤어짐을 맞이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연애중에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단점을 감싸줄 여력이 생겼을 때, 비로소 진실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쓰네는 잘생긴 요괴만 만나면 다짜고짜 "당신은 나와 운명적인 사랑을 나눌 '자격'을 갖췄어요. 어서 빨리 나랑 사랑을 하자구요"라고 말할 뿐이다. 이렇게나 뜬금없는 고백에 잘생긴 요괴남들은 하나 같이 하쓰네와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나 사랑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이와 사귀면 골치 아픈 일만 가득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초보 사랑꾼' 하쓰네 앞에 그럭저럭 잘생긴 '인간남'이 등장한다. 그와 이런 저런 일을 겪다보니 하쓰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숙한 여인의 자태'를 뽐내는 요괴로 거듭나게 되는데, 느닷없는 변신에 깜짝 놀란 하쓰네는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배워나가게 된다. 과연 요괴와 인간의 '종의 장벽'을 넘어 사랑에 성공할 수 있을까? 참고로 하쓰네에겐 '첫사랑'인 셈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자식을 향한 넘치는 사랑 때문에 '죽음'마저 초월해버린 엄마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이 세상 어느 엄마라도 '자식의 죽음'을 앞에 두고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이를 흔히 '모성애'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사랑이 도를 지나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그 넘치는 모성애는 십중팔구 자식에게 크나큰 화를 끼치게 될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렇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랑'하기에 딱 알맞게 조절하기 힘든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여기에 '안텐'이라는 아이가 있다. 안텐은 깊은 산속에서 홀로 지내는 외로운 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안텐에게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른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어김없이 큰 사고를 당하거나 죽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저주 받은 아이', '어둠을 몰고 다니는 아이'라는 험한 말을 들으며 자랐지만 안텐도 영문을 알 수 없기에 무어라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안텐은 어린 나이에 집에서 쫓겨나 깊은 산속 사찰에 맡겨지게 되지만, 사찰에 살고 있단 주지스님과 두 명의 동자승도 결국 '안텐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거나 죽기 전에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안텐은 깊은 산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홀로 지내왔던 것이다.

  그런데 안텐이 이렇게나 저주스런 삶을 살게 된 까닭이 밝혀지자 안텐은 괴로워하게 된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탓에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었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안텐의 엄마'가 자식을 대신해서 죽음을 맞이하고 안텐은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안텐의 엄마는 죽어서도 '안텐의 수호령'이 되어 자기 자식을 지켜주었다. 그런데 너무 잘 지켜줬던 탓일까? 안텐의 엄마는 점점 안텐을 '과보호'하게 되었고, 끝내는 '안텐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안텐에게 조금이라도 해코지를 하면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안텐은 '저주 받은 아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실제로는 안텐이 아닌 자식을 너무도 사랑한 엄마의 영혼이 뿜어내는 저주인데도 말이다.

  사랑이란 '서로 주고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한쪽만이 일방적으로 퍼붓는 '외사랑'이나 '짝사랑'은 그래서 사랑이 아닌 셈이다. 그리고 그런 일방적인 사랑은 결국 끝이 좋지 않다. 받지는 못하고 주기만 하다보니 '적당함'을 가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모성애'가 그런 경향이 있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게 여기지만, 그런 과한 사랑을 받은 자식은 '적당함'을 가늠하지 못하고 삐뚫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나도 사랑을 한다면 너무 뜨겁지도 않게, 반대로 너무 차갑지도 않게 적당한 '미지근한 사랑'을 해야 한다. 아직 사랑받을 '준비'가 덜 된 아기라면 더욱더 그렇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스런 아기조차도 적당히..앵간히 사랑을 표현해야만 한다. 너무 과하면 '응석받이', 너무 냉정하면 '애정결핍'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마지막은 형제애로 똘똘 무장한 남동생이 누나를 사랑할 때를 보여준다. 강력한 힘을 타고난 요괴인 남동생이 누나를 너무도 사랑한 까닭에 '누나의 남편감' 다시 말해, 매형이 될 요괴를 없애버릴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남동생의 눈으로 봤을 때 하나 뿐인 누나에게 절대 어울리지 않을 신랑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나는 이미 사랑에 빠져서 그처럼 별볼일 없는 요괴일망정 결혼을 하게 된다. 급기야 누나의 결혼을 방해할까봐 아버지는 남동생을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이를 어이하면 좋을까?

  형제간에 우애가 좋은 것만큼 보기 좋은 장면은 없다. 그런데 그 우애가 지독해서 서로 떨어지는 것조차 싫어지게 되면 어떡해야 할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근친'에 대한 터부가 굉장히 심하다. 유전과학적으로 '근친'을 하면 비슷한 유전자끼리 조합을 해서 '면역력 감소', '기형아 출산' 등등 유리하지 못한 결과를 낳기에 부적절하다면서 금지하고 있지만, 멀지 않은 과거에도 '왕가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서 근친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그런데 시대적 배경이 '에도막부 시절'인 이 책에서 형제간의 사랑이 지나친 설정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근친'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의외로 '브로맨스(남자끼리의 찐한 우정) 스토리'로 장식을 하며, 앞서 티격태격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맹인안마사 '센야'와 요괴봉행소의 동쪽 봉행 '쓰쿠요'의 과거 이야기를 펼쳐냈다. 이 둘의 옛 이름은 '바쿠란'과 '유키야'였다. 그리고 둘은 정말 '둘도 없는 우정'을 선보이는 절친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근친'으로 오해할 정도로 찐한 남매간의 사랑을 선보이다가 느닷없이 이야기가 선회를 하며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하면 서러워할 찐한 '브로맨스'를 펼쳐보인다. 그리고 절친이었던 친구가 하나 뿐인 누나를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지며 바쿠란과 유키야는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된다. 엄청난 대결을 벌인 끝에 누나를 되찾은 유키야는 매형이 될 남자와 누나를 서둘러서 결혼시켜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오해하며 지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 '바쿠란의 선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스토리로 마무리하였지만, 글쎄...애초에 '성인 버전'이었다면 유키야와 누나 사이에 끈적끈적한 러브씬을 연출하지 않았을까하는 의심이 든다. 어린 독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어른들의 사랑이야기'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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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 대청 외교와 『열하일기』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서가명강 시리즈 16
구범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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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XCII / 21세기북스 25번째 리뷰]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는 너무도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만, 정작 그 책을 완독한 이는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 방대한 양에 질려서 띄엄띄엄 읽거나 '축약본'을 읽었을 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허나 <열하일기>가 출간되었을 18세기 말에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웬만한 사대부 양반들은 읽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왠고 하니, 당시 건륭제의 천수제(칠순잔치)를 맞아 정조가 파견한 사신단에 박지원의 삼종형(8촌형)인 박명원을 따라서 수행원의 자격으로 연암이 함께 할 수 있었는데, 박명원이 황제가 직접 선물한 금불상을 받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기 때문(봉불지사)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따르는 유교국가인데 불교에 기인한 부처상을 사대부가 직접 가지고 조선으로 되돌왔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의 처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지만, 당시 최강대국이자 조선이 사대를 표하는 '청나라 황제'가 생일축하를 받자 그 답례로 선사한 선물인데, 조선을 대표하는 사신으로 '황제의 선물'을 거부할 수도 없지 않느냔 말이다. 이렇게 받을 수도 없고, 그러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 대해서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한 기록'이 <열하일기>에 담겨 있다고 하니 당시의 사대부로서 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오늘날 우리는 <열하일기>를 다루면서 조선의 실학자이자 '북학파 사상가'로서 연암 박지원의 개혁적인 관점을 부각시키곤 한다. 바야흐로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편 영조, 정조의 치세에 '개혁정치가'가 직접 쓴 책이라며 당시 시대상보다 앞선 사상이 담겼다는데 큰 의의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허나 이 책 <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에서는 그런 관점보다는 앞서 언급한 '봉불지사(부처를 받들어 모신 일)'에 관한 객관적인 근거(?)를 연암의 수려한 문체로 잘 포장해 변명한 책이 <열하일기>의 진면목 가운데 하나라고 풀어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을 색다른 관점에 바라보며 '(또 다른) 해석'을 풀어낸 것이다. 모든 학문이 그렇지만 '새로운 해석'은 언제나 환영할 만하다. 왜냐면 우리의 관점을 더 넑은 스펙트럼으로 확대시켜 주며 학문하는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골머리를 썩힐 일로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학문은 그런 과정을 거치며 발전하는 법이니 어쩌겠는가. 고인물이 쉬이 썩는 것처럼 '발전' 없는 학문 또한 아무 짝에도 쓸모 없긴 매한가지다. 그런 차원에서라도 '해석'을 즐기는 자세는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암튼, <열하일기>가 세세할 정도로 '봉불지사'를 다룬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탓에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더불어서 연암 박지원이 지니고 있던 '북학파 사상'까지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열하일기>를 통해서 조선과 청의 관계는 어떠한 '인식변화'를 보이게 되었을까?

  인조 때 '병자호란(1636년)'을 겪으며 조선은 뼈아픈 패배를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삼전도의 굴욕'까지 당하고 말았다. 병자호란보다 더 큰 피해를 보았던 '임진왜란(1592년)'에서도 조선은 패배하지 않았는데, 같은 오랑캐가 쳐들어온 전쟁인데 조선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허무할 정도로 어이없게 참패를 당한 것이다. 이 당시 조선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오랑캐에 당한 치욕을 되갚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더구나 이자성의 반란으로 명나라가 멸망(1644년)한 뒤에는 조선이 섬겨야 할 나라(사대주의)가 망했으니 '중화질서'를 간직하고 지킬 나라는 조선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중화 사상'이 떠오르며 조선 사대부들의 자긍심(?)이 스물스물 치솟아 오를 때였다. 이들은 중원땅에서 '오랑캐 왕조'가 100년을 넘지 못할 것이라 전망하며 명나라의 후예인 '한족'이 다시 부흥하여 청나라를 복속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때를 같이 하여 조선이 '한족 부흥군'과 힘을 합쳐 '중화질서'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라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힘을 받았다. 이른바 오랑캐에게 받은 치욕을 되갚자는 운동으로 인조의 뒤를 이른 효종이 직접 관여하며 군사를 기를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하기도 했다. 허나 그렇게 키운 '정벌군'은 청나라를 정벌하지 못했고, 되려 정벌하려던 청나라를 도와 '나선정벌'을 하는데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만다. 한마디로 조선은 청나라에 복수하지 못했다. 왜냐면 청나라가 가파른 성장을 하며 영토를 팽창시켰고, 나라를 평화롭게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나라는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라는 훌륭한 임금이 연이어 나오며 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조선에서는 여전히 '소중화 사상'이 팽배해서 이토록 강성해진 청나라를 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물론, 조선은 청나라의 '우수 조공국'으로 자리매김하며 없어진 명나라를 대신해서 '사대주의'를 견고하게 표방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증거가 '매년 사신단'을 꾸려 청나라로 조공을 바치러 보낸 사실인데, 비록 겉으로는 사신단을 보내긴 하지만 속으로는 굴복하지 않고 호시탐탐 '북벌의 꿈'을 키워나갔다는 말이다. 이런 결의조차 효종이 붕어한 뒤에 시들해져서 '북벌의 위한 군대 양성'은 멈추게 되지만, 조선의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은 '실속 없는 명분'일지언정 꿋꿋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조가 즉위하고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잔치가 열리게 되자 조선은 '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일을 꾸미게 된다. 바로 1780년 정조의 사신단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신단에 연암 박지원이 함께 했고, 연암은 그 사신단의 일행으로서 '낱낱이 기록하여' <열하일기>에 남겼던 것이다. 그렇게 무사히 건륭제의 칠순잔치 축하사신단이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귀국하자, 정조는 건륭제의 선의에 보답하는 사신단을 꾸려 다시 보내게 되고, 이후 조선과 청나라의 양국은 둘도 없는 '친선관계'를 맺으며 향후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조선은 '대접'을 잘 받는 우호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열하일기>는 바로 그런 '조선과 청의 관계개선'의 신호탄 역할을 하는 기록물이며, <열하일기>를 전후로 조선과 청나라는 '적대국'에서 '상호 우호국'으로 커다란 인식변화까지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커다란 '인식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적대국이었던 두 나라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아낌없이 '동맹'을 맺게 된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 <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은 기존의 <열하일기>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의 관점에서 '북벌'보다 '북학'을 해서 조선의 실리를 챙기려 한 내용이 담겨 있기 않다는 얘기다. 오히려 <열하일기>의 또 다른 면모(용도)에 치중해서 <열하일기>에서 오류가 발생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열하일기>가 쓰여진 이후에 조선과 청 사이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다는 점에서 <열하일기> 속에 등장한 '정조의 조선 사신단'의 활약에 집중했고, 그렇기에 <열하일기>를 읽을 때 새로운 관점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당부하였다. 그렇다면 이 책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으로 봐야 할까?

  <열하일기>를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면, '북벌'과 '북학'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시선'을 펼쳐야 마땅할 것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고 간주하며 서로 의견이 다를 뿐인데도 서로를 '적대시'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행태가 만연해 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전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훌륭한 민주주의 국가의 면모를 자랑할 정도였는데,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 방식'이 옳다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일은 추태에 가깝다. 북벌이 옳다고 생각하면 북벌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근거로 전국민을 설득해야 올바른 처사다. 제대로 된 근거를 내세우지도 못하면서 '북벌에 반대하는 세력'을 범죄자로 내몰고, 범죄자들이 주장하는 이야기는 들을 가치도 없다면서 비상식적인 '거부'만 한다면, 정신 똑바로 차린 국민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런 거부에 찬성하는 국민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빼박 증거'로밖에 이해될 뿐이다. 반대로 '북학을 꼭 해야만 한다'면 그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내세워 온국민을 설득시켜야 마땅하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성장발전하기 위해서 '북벌' 또는 '북학'을 선택해야할 때, 제대로 선택을 한다면 어느 쪽이든 조선을 성장발전할 수밖에 없게 된다. 북벌에 성공해서 초강대국 청나라를 꿀꺽 집어 삼키는 결론을 얻을 것인지, 북학에 전념해서 초강대국 청나라와 함께 윈윈하는 성과를 거두던지, 어느 쪽이든 조선에 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관건은 '실현가능성'이 어느 쪽이 더 높은지 따지는 일이다. 그 가능성을 따지지도 전에 '내편 vs 니편'으로 나뉘어 쌈박질만 일삼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결론도 얻지 못할 뿐더러, 성장발전은커녕 안으로부터 썩어들어가 망할 수밖에 없지 않느냔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관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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