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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5 - '9.11테러 시대'의 미국 ㅣ 미국사 산책 1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12월
평점 :
[My Review MDCCXCIV / 인물과사상사 22번째 리뷰] 2000년 미국인이 선택한 43대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다시 말해, '아들 부시'였다. 아빠 부시가 '노련한 정치인'이었다면 아들 부시는 '멍청한 정치인'이었다. 왜냐면 그는 맹목적인 신앙심에 기대어 좋고 나쁨을 '구분'만 할 줄 아는 얼뜨기였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선한 목자'였으나, 기독교에 반하는 세력은 모두 '타자화' 시키고, 그들을 '악의 축'이자 '미국의 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어설픈 정치인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있을 때, 두 가지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하나는 '9·11 테러'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 전쟁'이었다. 이런 사태를 맞이한 '아들 부시'가 한 선택은 전쟁이었다. 딴에는 이해가 된다. 역사적으로 독립 이후 미국 본토가 적대세력에게 공격받은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는데, 공격을 받았으니 크나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정당한 보복을 해야 한다는데 미국 국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에는 '명분'이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차고 넘치는 명분으로 '전쟁'을 해서 미국이 얻는 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 왜냐면 '실익'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강대국 미국이 테러를 당했다지만 국가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충격도 아니었다. 다만 테러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와 경제적인 손해, 그리고 미국이 갖고 있던 자부심에 상처를 받았으니,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 미국이 '실리'를 챙기는 것이라면 전세계 그 어떤 나라라도 미국의 의지에 반대할 명분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강자의 처지에 놓여 있는 미국이 테러를 주동한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때려 잡는 것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침공'까지 계획했던 것이다. 테러 집단을 보호하고 있다는 명목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국가에 본격적인 내정간섭까지 시나리오를 짜놓은 것이다. 이는 테러소탕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에 '친미정권'을 세워 러시아와 중국 등 '반미국가'까지 동시에 견제하겠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문제는 전쟁을 마무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21세기가 되어서도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얻은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 명분은 그럴 듯 했지만 실리를 챙기기는커녕 '엄청난 손실'만 보게 되는 나쁜 수를 미국이 또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전쟁'을 치루는데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아들 부시'가 전쟁을 일으켜야 하겠다고 결심을 세웠으나 온 나라가 이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정계와 제계, 그리고 언론까지 한목소리로 '전쟁'을 외쳤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후폭풍은 고스란히 '미국민들의 몫'이 되었다. 빈약한 명분으로 엄청난 손해를 얻었는데, 그 손실을 메꿀 수 있는 방법은 '미국민이 책임'을 지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에 멈추지 않고 아들 부시는 '대량살상무기'라는 카드를 꺼내며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독재자 후세인만 제거하면 '이라크의 모든 문제'는 일거에 해소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또다시 정계, 제계, 언론이 삼박자를 맞춰 '이라크 전쟁, 찬성'쪽으로 밀어붙인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또다시 불명예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이라크 전쟁이 시작하기 전부터 '반전의 목소리'가 거세게 타올랐는데도 '아들 부시'는 이를 일축해버리고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만 우겼다. 급기야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할 거라는 예언(?)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주장까지 해대며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는 후세인 정권을 몰락시켜야만 한다는 정당성만 앞세운 주장을 매일같이 떠들어댔다. 그렇게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었지만, 이라크 어디에서도 '대량살상무기'는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독재자 후세인 아래에서 신음하던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킨 미군이었지만, 그 미군이 자행한 '이라크 포로를 학대한 증거'만 잔뜩 쏟아져 나왔을 뿐이다. 후세인만 끌어내리면 이라크는 행복할 수밖에 없다던 아들 부시의 생각이 여지없이 틀렸다는 빼박증거였다. 심지어 이라크 포로를 고문하고 학대해도 좋다는 '명령서'에 아들 부시가 직접 사인까지 했다는 후문이 들리자 미국민들은 이라크 전쟁이 수치스런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도대체 미국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미국민들이 '자국의 역사'에 대하 무지하다는 것은 정평이 나 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이 언제인지도 모른다고 답한 미국민들이 70%가 넘는다고 한다. 이토록 무지한 미국민들이 열광하는 것은 바로 '엄청난 상금'이 걸린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이를 테면 '무인도에서 벌어진 생존 서바이벌'이나 '엄청난 갑부와 결혼하기' 등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허용하는 서바이벌 매치를 벌이며 매일, 또는 매주 후보자들을 탈락시키며 최종 1인에게 엄청난 상금을 수여하는 방송이었다. 이런 방송에선 비열한 속임수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고 종종 폭력성과 선정성이 도마 위에 올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조차도 '시청률 대박', '흥행 보증'이라는 방송사의 수익구조에 묻혀서 있는 듯 없는 듯 해결되고 말았다. 이러한 미국민들이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이라는 중요한 이슈에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물론, 양식과 교양을 갖춘 지식인들 사이에선 수준 높은 토론을 벌이며 '앞으로의 미국'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나갔지만, 대다수의 미국민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보수적인 언론매체의 선동'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미국을 되살리기 위해선 '합당한 보복(전쟁)'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애국'이라는 보수적인 메시지에 미국민들이 환호하게 된 셈이다. 이 메시지의 중심에는 바로 '아들 부시'가 있었고 말이다. 그는 '십자군 전쟁'을 부추긴 교황처럼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면서 강한 미국의 힘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것만이 올바른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광신도들 앞의 교주'처럼 목놓아 외치고 있었다. 미국 안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반전시위'를 벌이고 있는데도, 그들의 목소리는 애써 무시했고, 심지어 그들의 행태를 '반애국적'이라면서 매도하기 십상이었다. 이렇게 미국의 보수주의와 신앙심을 합친 '온정적 보수주의'는 부시 행정부의 모토였으며, 강경한 대외정책을 주장하는 '네오콘'이 급부상하면서 미국은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극좌가 위험한 '생각'인 것처럼 극우의 '행동' 또한 매우 위험한 일이다. 공산사회주의가 내세우는 '평등'과 '공동체 우선주의'는 상상속에서만 실현가능한 일이다. 현실은 어쩔 수 없이 '불공정'과 '불공평'하게 돌아간다. 이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고작 '매우 불공정'하고 '매우 불공평'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감시하고 처벌이 필요하다는 벌을 주어서라도 '살짝 불공정'과 '살짝 불공평' 정도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반면에 모든 것을 '기득권 유지'에 올인하는 극우적 행동도 좌시해선 안 된다. 더 나아가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려는 시도엔 대변혁으로 맞서야만 한다. 이렇게 극좌와 극우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로 유지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극우의 행동'으로 너무나도 치우쳐졌다. 마침 맞게 부시 행정부의 탄생과 더불어 테러를 당한 미국사회는 이러한 '극우적 행동'으로 나아가는데 길을 넓히고 만 것이다. 그로 인해 분명 '미국인'인데도 백인이 아니면 '잠정적 테러리스트'로 간주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당연시하게 되었다. 당시 '아랍계 미국인들'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인 '무함마드', '모하메드' 등과 같이 테러범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어 수년 동안 감옥을 전전했던 무고한 시민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인이 아니란 말인가? 애국을 당연시하면서 왜 '백인'이 아니면 미국을 사랑할 수도 없게 만드냔 말이다. 왜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죄수' 취급을 하느냔 말이다. 미국사회는 이때를 계기로 더욱더 '백인'과 '부자'에게만 더할나위 없는 천국이 되어 버렸다.
진보와 보수의 조화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다양성과 변화를 '중시'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 나라를 '사랑'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행동을 일삼는 일이 어찌 상충할 것이냔 말이다. 변화를 중시하는 진보적인 사고는 '그들'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가득찬 '나라사랑'으로 온국민을 똘똘 뭉치게 만드는 행동주의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바탕이 된다. 허나 현실적으로 서로 다른 '개인'이 똘똘 뭉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양성을 중시하고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매우 중요하다. 나와 다른 너의 생각을 '포용'하고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보적 사고방식과 보수적 행동방식은 조율을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서로 '상충하는 개념'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생각을 하며 보수적인 행동을 일상으로 실행하다 보면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서민적인 마인드를 가진 재벌의 행동양식을 실천한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처럼 말이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초일류 부자들이 "내게 세금을 더 많이 물려라!"라는 외침이 이러한 실천의 일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