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 이성을 넘어 다시 만나는 감정 회복의 인문학 서가명강 시리즈 30
신종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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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I / 21세기북스 26번째 리뷰] 우리는 '감정'보다 '이성'에 충실한 삶을 바람직하게 여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이성적인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는 서적이 넘쳐나고, 반대로 감정적인 사람은 마음을 잘 다스려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훈련해야 훌륭한 사회의 일원이 된다고 가르치기 일쑤다. 그런데 이렇게 감정을 억제하고 매사에 이성적인 일상을 보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이 책은 '의문'을 던졌다. 그리고 때론 이성보다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성공'이 먼저냐? '행복'이 우선이냐? 를 놓고 고민한다. 딴에는 성공한 삶이 행복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을 맺기도 하지만, 누구나 인정할 만큼 성공했다고해서 모두가 다 행복한 것은 아닌 것을 보면 '정답'은 아닌 것도 같다. 그렇다면 행복하게 살아가니 성공하는 것일까? 이때의 성공은 남들이 인정할 만큼 큰 성공은 아닌 듯한 느낌이 쎄다. 이때 '성공비결'은 과연 이성적인 삶일까? 아니면 감정적인 삶일까? 이런 이야기들을 좀 풀어보자.

우리는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는 것을 '감정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일상에서는 이러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비이성적인 행동'이라며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기뻐도 크게 기뻐하지 않고 슬퍼도 슬픔을 참아야 칭찬을 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운다. 이와 반대로 기쁠 때 크게 기뻐하고 슬플 때 엉엉 울음을 터트리면 성숙하지 못하고 어른답지 못하다면서 핀잔을 주기 일쑤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분위기는 점점 '이성적인 사회'로 굳어져 간다. 이런 사회분위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분위기는 답답하지 않은가 말이다.

한편, 이런 답답한 사회분위기로 인해서 '차별'을 양산하기도 한다. 즉, 이성적인 사람과 감정적인 사람으로 나누어 후자쪽을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뚜렷해진 탓이다. 더구나 이런 갑갑한 사회분위기가 '남녀차별'까지 조장하고 있으니 문제가 된다. 이를 테면, 이성적인 사회분위기를 '남자'에겐 강요하고, '여자'에겐 관대(?)하면서 남자는 반드시 '이성적'이어야만 한다고 강요하고, 여자는 감정에 충실해도 괜찮다면서 은근히 '비이성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뚜렷한 문제다. 물론 남자인데도 '감정적인 사람'이라면 사회적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고, 여자인데도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극찬을 아끼지 않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래저래 우리 사회는 '이성적인 사람'을 편들고, '감정적인 사람'을 배격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적인 사람'이 감정적인 사람보다 더 행복할까? 이에 관한 연구결과는 놀랍게도 '감정표현'에 솔직한 사람이 스트레스도 덜 받고 더 행복한 느낌을 받는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단다. 오히려 '감정억제'를 하면 할수록 행복지수는 현저히 떨어졌으며, 이성적인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은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 수명도 짧아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래도 우리 사회가 '이성적'이어야만 할까?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우는 사람이 스트레스도 덜 받고 더 오래 살 수 있다면 우리는 '감정'에 충실한 사람을 벽안시하며 바라보아선 안 된다. 되려, 더 행복하고, 더 장수할 가능성이 높으니 부러워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는 사회분위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감정적인 사회분위기가 더 긍정적이고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나라 사람을 두고서 '흥이 많은 민족'이라고 하지 않은가. 수천 년 전부터 노래와 춤을 즐기는 풍습을 갖추고 있다고 말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떼창 문화'로 콘서트의 흥을 돋우고, 스포츠 '응원 문화'도 신명나서 전세계가 부러워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렇게 즐길 줄 아는 사회분위기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단련시키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너무 흥이 넘쳐나서 나름의 '중용'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일까? 어쨌든 우리 사회분위기의 긴장감을 좀 낮추고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는 강박감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까닭은 바로 '성공하는 삶'을 살고 있어서 일 것이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마다할 '동기'가 충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성공을 보장하는 지침서'들이 한결같이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에 충만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자기계발서>에는 즐거움 마음을 갖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가면 '성공의 길'로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조언하는 내용도 덧붙이고 있지만, 그렇게 즐기기에 앞서 엄청난 '부의 성공'을 이루어야 할 것이기에 '즐기는 삶'보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생활습관으로 자리매김하라고 당부하기 일쑤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마시멜로 이야기>, <아침형 인간>, <미라클 모닝> 등등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한결같이 다 그모양 그꼴이다. 심지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원칙>, 워랜 버핏, 잭 웰치 등등 부자들의 생활습관 따위가 적혀 있는 책들에서도 '성공'하려면 감정적이지 말고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어쨌든 그렇게 성공을 했다고 치자. 그게 과연 행복한 삶인가 말이다. 통계적으로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결과를 내놓지만, 행복이 부와 '정비례'하지는 않다는 보고도 빠지지 않고 덧붙여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약간 풍족한 삶을 살고 여유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지, 최상위권의 부자들이 가난뱅이보다 덜 행복하다는 이야기는 차고도 넘친다. 돈 많은 재벌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남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영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없이 모두를 적으로 삼고 의심부터 하는 일상을 살아가며, 부모형제가 죽기라도 하면 '상속'을 더 많이 받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남남처럼 법정다툼을 벌이곤 한다. 이런 삶이 과연 행복하겠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성적인 사회분위기를 '옳게' 보고, 감정적인 사람을 '그르게' 바라보는 시선부터 바꿔야 하는 것이다. 왜 부자만 인생을 즐기며 살 것인가? 금전적으로 조금 부족한 듯 해도 감정적으로 풍족하게 살면 더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 것 같지 않은가. 너무 감정에 충실하면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억누르며 살 필요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감정에 충실하고 충만한 사람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 또한 거두어야 한다. 너무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에겐 어깨를 쪼물락쪼물락하면서 긴강을 풀고 살라고 충고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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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시즌2 : 14 (리커버 에디션) 미생 (리커버 에디션) 14
윤태호 글.그림 / 더오리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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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시즌2 14>  윤태호 / 더오리진 (2019)

[My Review MDCCC / 더오리진 1번째 리뷰] 내가 <미생>을 처음 만난 건 2015년이었다. 드라마를 먼저 접했고, 시청을 다 한 뒤에는 'N차 시청'을 거듭하다 '원작 만화'까지 직접 구매해서 탐독을 했더랬다. 과연 <미생>의 무엇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무엇보다 '비정규직의 설움'을 아주 잘 표현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사회생활의 첫 발을 '97년 IMF'로 시작했더랬다. 그랬던 탓에 '정규직'을 꿈꾸며 알바 느낌으로 시작했던 '비정규직'으로 시작한 직장이 그대로 굳어져 버리고 말았더랬다. 그렇게 꼬박 8년 동안 일을 하다 더는 비젼을 기대할 수 없이 30대 초반에 비정규직을 때려치우고 '공부방'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는 논술쌤이 되었더랬다. 그렇게 쭉 아이들을 가르칠 것으로 기대했건만, '코로나 팬데믹(2020)'이 덮치자 공부장 사업마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를 해서 투잡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 이런 '나의 삶'이 <미생>이라는 프리즘을 투과하니 화려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그저 '흙수저의 그림자' 마냥 투박하게 비춰보일 뿐이었다. 물론 내 인생이 초라하다고 슬퍼하거나 우울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구나 싶어서 대견(?)해 할 뿐이다.

<미생>의 장그래는 누구나 겪었을 '인생의 고비'를 넘어 '잔혹하고 냉혹한 현실'을 더욱 잘 드러나게 해주는 캐릭터다. 뛰어난 실력을 갖췄으나 그 실력을 인정받지 못해서 남들보다 몇 배나 더 고생을 하는 역할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장그래 같은 인재는 '무한경쟁사회'가 낳은 안타까운 비극이다. <미생>을 본 분들은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세상엔 장그래 같은 인재가 넘쳐나는데도, 그 '인재'를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비정한 사회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말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대기업 정규직에 뽑혔다고해서 제대로 된 인재이고, 대기업 인사채용에 탈락했다고해서 쓸모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채용시스템'이 공정하지 못한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기업은 기업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채용방식으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인재들을 선출하고, 채용해서 잘 부려먹고 있다. 다만, 아직 고용받지 못한 이들은 채용이 될 때까지 실력과 스펙을 쌓으면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똑같이 채용'되고, '똑같은 업무'를 하는데도 '차별'을 두는 '정규직/비정규직'을 두는 것이 문제다. 기왕 뽑았으면 '똑같이 대우'를 해주면 좋을 것을, 비정규직은 실컷 부려먹다가 '계약기간'이 만료가 되는 순간 내쳐버리고 만다. 계약이 짧은 만큼 뭘 더 챙겨주는 것도 아니면서 왜 서럽게 만드냔 말이다. 그렇게 서럽게 만들 거면 '업무'까지 차별을 두어 어렵고 힘든 일은 '정규직' 시키고, 쉽고 하찮은 일은 '비정규직'에게 시키면 될 것을, 결국엔 온갖 차별을 하면서도 하는 일은 '비정규직'에게 더 많이 전가하고 만다. 어차피 '쓰다 버릴 용도(?)'로 뽑았다면서 하기 힘들고, 하기 어렵고, 하기 더러운 일감은 오로지 '비정규직의 몫'으로 떠넘기고 만다. 그래서 대기업에 취직한 장그래도 처음엔 개고생을 한다. 오상식 차장과 김동식 대리라는 멋진 직장동료와 한 팀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미생 시즌2 14>의 내용은 그 환상적인 팀워크를 자랑하던 '영업3팀의 멤버'가 고스란히 자리를 옮겨 '온길 인터내셔널'이란 중소기업에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는 과정을 연출하며 '한그루'라는 사원이 합류하게 되는 에피소드다. 한그루는 온길 인터내셔널와 거래를 하던 '송일무역'이라는 가족회사의 대리였는데, 한그루의 아버지이자 사장이 쓰러지면서 사업을 정리하고 '온길'과 인수합병하면서 새식구로 맞이하였다. 앞으로 벌어질 에피소드는 장그래와 여러 모로 닮은 한그루와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미생>에서는 허투루 에피소드를 다루는 법이 없다. 가족회사의 성격을 띠었다고하지만 '송일무역'도 엄연한 회사다. 그런 회사가 '오너'가 쓰러지는 바람에 경영에 문제가 생겼고, 거래처였던 '온길 인터내셔널'에 인수합병된 일은 아주 흔한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깊이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왜냐면 '오상식 부장'이 있기 때문이다. <미생>을 본 분들은 모두 공감하리라 본다. 자신에게도 '오상식'과 같은 직장상사와 함께 일을 했더라면 신 나고 즐겁게 직장생활을 했을 거라고 말이다. 일에 대해서 철두철미하지만 인간미가 넘쳐나서 모든 일을 '맛깔'나게 할 줄 아는 상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상식과 함께라면 힘든 일도 힘든 줄 모르고, 어려운 일도 함께 헤쳐나가며, 하는 일마다 보람차다고 느끼며 즐겁게 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오상식 차장이 활약하던 '시즌 1'이 아닌 오상식 부장과 함께 헤쳐나가야 하는 '시즌 2'는 이야기가 살짝 다르다. 시즌 1에서는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대기업 차장이었기에 일의 규모와 성과가 매우 크고 시원시원했지만, 시즌 2에서는 '중소기업'으로 축소되어 천하의 오상식 부장이 하는 일이라도 자잘한 스케일의 업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업규모도 현저히 작아져서 '하루 벌어서 하루를 더 연명하는' 중소기업의 애환이 시즌 2를 지배하고 있어서 살짝 우울한 느낌이 더 짙어져버렸다. 그렇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온길과 거래하던 송일무역을 인수합병하는 '리스크(위험요소)'까지 떠안아 버렸다. 앞으로의 에피소드는 희망적일까? 아님 절망적일까?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장그래와 파트너가 될 것으로 보여지는 '한그루의 등장'은 온길에 한가닥 희망으로 다가오는 듯 싶다. 왜냐면 <미생>에는 '바둑'이라는 요소를 접목시켰기에 앞선 내용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룬 대국은 99년 초에 벌어졌던 '제3회 삼성화재배 결승 5번기 제5국'으로 중국의 마샤오춘 9단(백) vs 한국의 이창호 9단(흑)이 벌인 대국이다. 그 가운데 14권에서 다룬 대목은 '77수부터 94수까지'다. 이 과정에서 마샤오춘은 네 귀와 중앙까지 모두 '백집'으로 만들어 초반 승부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지만 84수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고, 이어서 두었던 이창호의 85수가 '결정적 한 방'이 되어 바둑판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드디어 대역전승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과일 뿐, 아직 헤쳐나아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대역전극이 늘 그렇듯 '한수 한수'가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질 것이고, 온길 인터내셔널에 새로 입사한 '한그루의 활약'도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조심 내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프리퀄'에서는 오상식의 원 인터 사원시절의 이야기를 다뤘다. 특별히 '사석(死石)'이라는 제목을 다뤘는데, 오상식의 직장상사였던 송과장의 죽음을 다뤘기 때문이다. 송과장은 무척이나 일에 열심이었고 '애사심'도 투철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송과장이 '과로'로 쓰러져서 죽고 만 것이다. 송과장의 가족은 오열했고 송과장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슬픔에 빠졌는데, 회사에서는 '산재처리'를 급히 서두르려다 그만 큰 실례를 범하고 만다. 회사업무를 하다 사망했으니 당연히 회사가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하겠으나 '사망장소'가 직장 안이 아니라 퇴근시간이 훌쩍 넘은 '외근중'이었던 관계로 회사가 책임회피를 하려는 내용을 다룬 것이다. 지금이야 '출근길'이나 '퇴근길', 그리고 '회식'까지도 정상적인 근무로 인정을 받아 회사에서 산재처리를 해주고 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회사 '안'에서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대기업이라 할지라도 '면피'를 하기 위해 별의별 꼼수를 다 부리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아무리 기업의 최대목표가 '이윤추구'라고는 하지만, 결국엔 그 이윤을 벌어다주는 것은 '사람'이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번듯한 회사마저도 이윤(또는 '비용절감')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물건'처럼 쓰다가 소용이 없어지면 폐기처분하는 비정한 짓을 저지르곤 했다. 앞서 '비정규직의 설움'도 매한가지다. 한 사람의 몫이 아쉬워서 고용했으면서도 필요 없어지면 '해고'해버리고, 회사 비용절감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편한대로 '사람'을 처리해버리고 만다. 솔직히 말해 월급을 조금 덜 주는 것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사람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것은 치욕스럽기 짝이 없다. 왜 사람을 '사람대접' 해주지 않느냔 말이다.

<미생>은 이처럼 '사람대접'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들의 눈물을 이해해주는 명작이다. 비정규직의 목소리를 대신 외쳐주는 걸작이기도 하고 말이다. '시즌 2 15권'에서는 어떤 사연으로 감동을 전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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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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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XCIX / 넥서스Friends 4번째 리뷰] '차이와 차별'은 '다름과 틀림'만큼 다르다. 누구나 각자의 개성을 갖고 살아가기 마련인데 '서로의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두는 것일까? 막상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죽는다느니 어쩐다느니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다.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에서는 요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반인반요'가 된 인물이 등장하면서 요괴 아이 돌보미 야스케와 일행들에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그런데 '반인반요'란 무엇인가? 인간으로 치자면 '혼혈'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여자와 요괴 남자가 사랑에 빠져서 함께 살게 되니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인간과 요괴의 특징을 모두 갖춘 셈이다. 그렇다면 '반인반요'를 어떻게 볼 것인가? 4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할 것이다. 인간과 요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이 섞여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혼혈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위에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로 말이다.

어느 날 인간 여자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때 자신을 구해준 용감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인간 여자는 이 남자에게 한 눈에 반하고 만다. 그래서 둘은 사귀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는 자신이 '요괴'임을 밝히게 된다. 인간 여자는 요괴 때문에 위험에 처했는데 '요괴의 도움'으로 자신이 살아난 사실을 깨닫고 이 요괴에 함께 지내길 바란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요괴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의 곁에 있길 바란 것이다. 인간이 아닌 요괴는 두려운 존재이니 말이다. 그렇게 요괴 남자는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인간처럼 여자와 함께 지낸다. 그러다 딸 아이가 하나 생겼는데, 인간 여자는 두려움에 빠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요괴'이면 어쩌나하고 말이다. 다행이 겉모습은 인간의 모습이라 안심이었는데, 어느 날 어린 딸이 높이 있는 서까래를 어렵지 않게 오르는 광경을 목격하지 겁에 질려버리고 만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요괴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인간 여자는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한다. 요괴 남자 때문에 자기 딸이 요괴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기 딸에게도 '요괴의 능력'을 보이지 말라고 겁을 주었다. 나이 어린 딸은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엄마와 함께 지내고 싶었던 탓에 '요괴의 능력'을 감추고 평범한 인간 아이처럼 굴기 시작한다. 그렇게 딸아이는 요괴인 아빠를 멀리하고 인간인 엄마와 함께 지내며 점점 엄마처럼 '요괴'를 싫어하는 아이로 자란다. 그런데도 인간 여자의 히스테릭한 발작은 멈추지 않았고 요괴 남자는 온갖 방법을 다해서 인간 여자를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몸이 약했던 탓인지 결국 죽고 말았다. 그렇게 요괴 아빠와 요괴를 싫어하는 반인반요 딸아이만 남게 되었는데, 둘 사이는 부녀지간인데도 더욱 서먹할 따름이다. 그러다 야스케를 만난다. 요괴아이 돌보미인 야스케는 요괴 아빠인 소테쓰와 함께 다이코 공동주택을 방문한 것이다. 딸아이를 돌봐달라면서 말이다. 야스케와 반인반요 미오는 그렇게 만나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겪게 된다.

다시 돌아와 '혼혈'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혼혈은 이쪽과 저쪽을 모두 아우르는 '양쪽의 특징'을 갖추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혼혈에 대한 시선은 그리 곱지 못한 것이 슬픈 현실이다. 이쪽에서는 '저쪽의 특징'이 있으니 따돌리기 십상이고, 저쪽에서도 '이쪽의 특징'이 보이니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만다. 그렇게 혼혈은 '양쪽의 특징'을 모두 갖춘 능력자(?)인데도, 양쪽 모두의 따돌림을 받기 일쑤다. 왜 그럴까? 아마도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은 아닐까? 이를 테면,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중 언어생활'을 하며 두 개의 언어를 모두 잘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겉모습은 한국인과 미국인의 모습을 반반 섞였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는데 겉모습은 '다른' 점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들의 시셈과 질투심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변수를 다 고려하지 못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혼혈이 가진 장점이 '다수의 횡포'에 의해 잠식 당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 만 할 것이다.

우리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열린 사회를 바람직하다 말한다. 그리고 '소수의 몫'으로 남겨두는 배려에 대해서도 다분히 관대한 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독 '혼혈'에 대해서는 야멸치게 굴기 십상이다. 왜 혼혈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순수한 혈통을 지키고 고유한 전통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각고의 노력으로 혼혈에 대한 차별을 올곧게 지향하는 것인가? 혼혈에 대한 편견과 따돌림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 책이 '일본소설'이니 일본 안에서 벌어지는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 살짝 논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왜 일본은 외국인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면서도 유독 '한국인'에 대해서만큼은 '2등 국민 취급'을 하는 것인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 '특유의 열등감'으로 이해하면 좋겠는가? 한국인의 뛰어난 재능으로 일본인의 순수한 혈통과 고유한 전통문화가 어그러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본사회에 만연해 있기라도 하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내용으로 '해석'을 내린 학계의 전문가가 있을 정도로 일본인의 '한국인 차별'은 꽤나 설득력 있게 들릴 정도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인 차별'은 그 정도가 심각해서 '한국 혐오'로까지 확장해나가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일본정계를 주름잡는 '정치인'과 '경제인' 들이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아무래도 일본의 보수우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위치(?)'에 선 사람들이라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혐한론'은 필수이고, '망언'은 선택일 지경에 다다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인 차별'로 인해서 일본사회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인 폄하는 일상처럼 흔해 빠진 일이지만 다른 나라의 시선으로 보면 '외국인 혐오(제노포비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이런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이 얼마나 '외국인'에 대해 친절하고 친근한지 증명이라도 하듯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고 있지만, 정작 '재일교포'를 향한 폭력과 횡포는 여전히 도를 넘고 있고, 아직까지도 개선되지 못한 뿌리 깊은 악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처럼 한국의 흔적을 아주 지워버려야 겨우 그러한 '악습과 폐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억압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한류열풍'과 함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보수우익의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강경하며 '한국 말살 정책'은 여전히 유효하기만 하다.

어린이들이 읽는 소설에서 '외국인 혐오'까지 논하는 것은 언어도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레이코 작가는 일본사회에 만연한 '차별의식'에 대해서 어린이 독자들에게 교훈을 남겼다고 믿고 싶다. 딱히 이 책의 내용이 '재일교포에 관한 차별'을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사회에 만연한 '차별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NO!'라고 말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도 심각한 '차별문제'를 사회적으로 겪고 있으니 마찬가지다. 그 어떠한 이유로도 '차이'를 가지고 '차별'을 하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비단 '외모차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빈부차이', '정치견해차이' 등등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한 사회는 극렬한 혼란만 첨가되고, 그 혼란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면 문제는 점점 더 가중되어 사회 전체구성원 모두에게 피해를 안겨줄 뿐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각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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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하는 기계 질문하는 리더 - AI 시대, 대체 불가능한 리더의 첫 번째 조건
변형균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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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XCVIII / 한빛비즈 150번째 리뷰] 인간보다 더 똑똑한 AI(인공지능)의 등장은 과연 우리 인류에게 축복으로 다가올 것인가? 아니면 악몽보다 더 끔찍한 현실을 초래할 것인가? 전문가들의 견해는 극명하게 둘로 갈린다. 한쪽은 '낙관론'으로, 다른 한쪽은 '파멸론'으로 말이다. 둘의 견해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과는 달리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균형'을 이루며 상호보완적으로 장밋빛 미래를 보장할 거라는 '중도론'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인간보다 뛰어난 AI로 촉발된 사회의 변혁은 매우 빠르고 초현실적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란다. 이는 우리가 현재 유용하게 쓰고 있는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도 잘 살아왔지만, 일단 '스마트폰'이 생겨난 이후에는 스마트폰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보다 똑똑한 AI의 등장(특이점) 이후의 삶'은 현재로선 전혀 예측불가이지만, 특이점이란 변곡을 겪고 난 뒤에는 다시 'AI가 없는 세상'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게 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보다 똑똑한 AI의 등장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이 책 <통찰하는 기계, 질문하는 리더>가 품고 있는 내용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AI가 초래할 '파멸론'과 '낙관론'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보자. 인간보다 더 똑똑하다는 '기준'은 AI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창의성'을 발휘하여 세상에 없던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단순히 '무'에서 '유'를 창출해내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임무를 맡기더라도 최적의 조건으로 최상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 인간보다 훨씬 월등한 재능을 갖추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스웨덴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이 처음으로 언급한 '종이클립의 역설'인데, AI가 간단한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빙식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다. 이를 테면, AI는 '종이클립 생산'을 늘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구의 모든 자원'을 활용해서 최상의 실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으로 말이다. 그런데 '종이클립'을 만들려면 나무를 베어서 '펄프'를 먼저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AI에게 최적의 목표달성을 이루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전지구의 나무를 모조리 베어다 '종이클립'을 만들어버린다면 지구의 환경을 황폐화할 것이며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절멸해버리는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AI는 목표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란 말이다. 이는 인간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지만, AI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왜냐면 AI의 행동을 인간이 절대로 '예측불가'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빠르고 과감하게 처리하며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다른 문제발생'이라는 예측가능한 변수를 '값'으로 매겨서 입력해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종이클립 생산'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뒤늦게 이러한 문제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AI의 발빠른 행동력으로 인해 지구의 환경을 파괴해버리고도 남을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예측불가능한 AI의 행동'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다면 인간 뿐만 아니라 지구생태계를 온전히 보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면에 '낙관론'은 완전히 다르다. 이는 AI 기술이 가져올 '긍정적인 변화'와 '무한한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AI가 문명의 진보를 더욱 빠르게 이루고 인간의 삶을 쾌적한 방향으로 대폭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특히 낙관론자들은 AI 기술의 '상업적 성공'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혜택'에 큰 기대를 건단다. 스탠퍼드대학교 교수인 앤드루 응이 대표적인 낙관론자인데, 그는 AI 기술이 인류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줄 것이며,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AI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고 수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연 어느 쪽이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일까? 지금까지의 예측 결과는 '파멸론'쪽이 더 우세하다. 하지만 '낙관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파멸을 예측한 쪽도 AI가 인류의 미래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는 점도 유념해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한 가지다. 결국엔 AI 기술이 '인류의 지능'을 훨씬 넘어서게 될테지만, 그처럼 뛰어난 지능을 갖춘 AI가 '완전 자율'에 맡겨지지 않고 '인간 통제'의 아래에 놓여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AI 기술의 핵심은 '빅데이터'다. 엄청나게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간이 상상하지도 못한 '창의성'을 발휘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기는 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인간이 '입력'하지 않는 정보를 스스로 창조해내거나, 인간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해결점을 창의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기계일 뿐이라는 점이다. 물론 '특이점 이후의 AI'는 미처 인간이 떠올리지 못한 것들을 순식간에 찾아내 '실행'에 옮기는 무시무시한 재능을 보여줄테지만, 그 재능의 근본이자 원천은 결국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지 못할 거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인류에게 도움이 될 AI를 만들기 위해서 '윤리적인 검증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이 정한 윤리도덕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윤리도덕적인 사고방식조차 인간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첨예한 갈등 양상을 보이는 사회문제를 '처리'할 AI가 어떠한 결론을 내릴지 여전히 예측불가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다. 인간보다 뛰어난 AI에게 현명하고 명철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고 말이다. 더구나 현재의 스마트폰처럼 'AI 상용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AI를 가지고 사용하게 될 텐데, 이렇게나 뛰어난 '개인비서'를 갖게 된 인류에게 남은 숙제는 바로 '뛰어난 재능을 갖춘 AI'를 훌륭하게 다룰 줄 아는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엔 AI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먼저 '학습'을 통해서 똑똑해지게 된다. 인간도 학습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온전한 인간이 되고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처럼 AI도 마찬가지란 말이다. 그리고 성숙한 어른이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행동하는 '질문형 학습'을 하는 것처럼 AI에게도 똑같이 질문을 던져서 '모두가 행복하고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데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물론 더욱 뛰어난 AI는 '인간의 질문' 없이도 스스로 생각하고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엇나가는 AI'가 발생한다면 인간이 직접 관여하여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기도 하다. 인간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췄는데, 인간의 '통제'를 불가능하게...아니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예측불가한 AI'가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예측불가한 일 가운데 '하나 뿐인 지구'를 송두리채 날려버릴 어마어마한 '시작'을 AI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문제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통제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AI를 이끌 리더로 거듭나야만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특이점(AI가 인간의 지능을 초월하는 시공간적 경계)'을 막을 수는 없다. 현재의 AI 기술 발전 속도로는 2040년을 그 시기로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가속화하는 발전속도를 감안하면 그 시기는 더 앞당겨질 것이 뻔하다. 그 '특이'한 AI를 누가 먼저, 어느 국가가 먼저 '선점'할지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다. 결단코 AI를 악용하는 사례가 단 한 번이라도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쁜 쪽으로 사용하게 되면 인류는 심각한 위험에 빠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좋은 쪽으로 사용하려다가도 '단 한 번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암울한 미래를 막을 유일한 방법은 '예측불가한 미래까지도 예측'하는 현명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질문해야 할 것이다. 훌륭한 리더는 '결단력'과 '실행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요구되는 것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리더'여야 한다. 우리 모두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최소한의 위험'만을 찾아내어 '최상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신중하게 추진하는 리더말이다. 그런 리더가 AI 기술이 초래한 '예측불가능한 미래'를 낙관하게 만들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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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2 : 혼세편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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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My Review MDCCXCVII / 엘릭시르 9번째 리뷰] 돈을 가진 이가 돈을 쓰는 것을 두고 뭐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힘을 가진 이가 힘을 쓰는 것은 어떨까? 조금 달리 표현해보면, 돈 좀 많이 가진 이가 '돈자랑'을 하듯 돈을 펑펑 쓰면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을까? 그리고 힘이 남달리 쎄서 '힘자랑' 좀 하면 어떻겠느냔 말이다. 이 세상에 돈이 좀 많은 '부자'와 힘이 좀 쎈 '장사'가 제 자랑하듯이 돈과 힘을 저만의 이득을 위해서 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돈 많은 부자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하거나, 남보다 더 쎈 힘으로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위해 사고현장이나 화재현장에서 인명구호를 위해 힘쓴다면 얘기가 다르다. 이들에겐 도덕적 윤리의식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런 이들이 꼭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착한 부자와 선한 장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 때론 '초능력'에 가까울 정도로 '상위 0.1%의 능력'을 갖춘 이들이 저만을 위해서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더 흔하다. 심지어 그 능력이 너무도 엄청나서 사회구성원 99.9%의 능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웃도는 차이를 보이는데도,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기득권 유지'만을 위해서 능력을 쏟아붓는다면 그 사회는 망했다고 보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기적인 초능력을 갖춘 상위 0.1%를 '공공의 적'이라 부르며, 소위 '악마'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옛날에도 백성의 피땀을 짜내어 저들의 재산축적에만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지배층을 '흡혈귀'에 비유하지 않았잖은가.

<퇴마록>은 바로 그럼 악마같은 이들을 물리치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저들의 행복과 욕망을 위해 쓰지 않고 삐뚫어진 세상을 바로 잡고 이기심으로 가득한 중생들을 위해 '하나 뿐인 목숨'마저 아깝지 않아 하며 저들의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그저 이 세상이 악에 물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인 '퇴마사 일행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책이 비록 '장르소설'에 불과하지만, 삐뚫어진 욕망으로 이 세상을 암울하게 만들려는 이들의 잘못을 깨치어 올바른 길로 이끄는 역할을 부여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장대한 내용은 이미 '국내편'과 '세계편'에서도 다루었고, 그 이유조차 이미 밝혀놓았지만 '혼세편'에 들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담론주제이기도 하다. '혼세편 1권'에서는 <와불이 일어나면>에서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 대해 분명히 밝히면서도 그 죄값을 일본의 현세대에게 물어 '일본침몰'과 같은 대재앙을 일으키고, 또한 그런 꼴을 보고서 손뼉치며 좋아라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아버지가 저지른 죄값을 아들과 손자에게 물어서는 안 되는 이치와 서로 통한다. 그러나 죄값을 물지 않는다고 해서 '아버지가 저지른 죄'까지 모른 체하고 부정하는 일을 방관할 수는 없다. 준엄하게 과오를 따지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고, 고칠 것은 고쳐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과거'가 되풀이 되어 '또 다시 만행'을 저지르고 말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 조금의 양보도 있을 순 없는 것이다.

'혼세편 2권'에서는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일본정계의 거물이 악령에 쫓게 괴로워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며,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언급하며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언급하였다. 이렇게 일본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서 퇴마사 일행은 죽다 살아나게 되었다. 박 신부는 총알 세례와 다리 부상까지 당하며 '임사체험'을 경험하기도 하였고, 이현암은 일본에 가기 직전에 한빈거사로부터 엄청난 공력을 받았는데도 총까지 쏘아대는 무술고수들과 상대를 하는 도중에 '주화입마' 상태에 처하기도 했다. 장준후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주술 능력이 한층 높아졌지만 자신은 끝내 '단명할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일행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하자 '악령'이 아닌 사람을 향해선 주술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깨버리고 만다. 현승희의 경우엔 자신의 몸안에 '현신'한 애염명왕이 깨어나 퇴마사 일행을 위기에서 구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깨어난 애염명왕은 승희의 몸을 떠나 사라지고 만다. 한편, 언어학 박사이자 퇴마사들과 함께 동행하는 서연희는 '심연의 눈'으로 퇴마일행을 돕는 등 중요한 순간마다 일행을 구하는 기지를 발휘하며 함께 죽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들을 겪게 된다.

이렇게나 퇴마사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 까닭은 다름 아니라 '퇴마사들의 선한 의지'를 역이용해서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악의 세력과 혈투를 벌이는 와중에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퇴마사들의 동정심을 사고 절체절명의 위기속에서도 어린 아이를 구하려 '방비'를 갖추지 않고 '방심'하는 순간에 퇴마사들의 등뒤에 총을 쏘거나 칼을 꽂는 따위로 심각한 상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퇴마사 일행들과 맞상대를 해서는 이길 승산이 없자 이따위 '비겁한 수'를 써가며 퇴마사들을 위기로 내몰았다. 그런데도 퇴마사 일행들은 죄는 '악령'에게 있는 것이지 '빙의'된 이들을 죽일 수 없다면서 되려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는 없다면서 말이다. 또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능력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고자 '무고한 희생'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말이다.

이럴 때면, 선한 의지와 선한 행동은 참으로 무력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악당과 악령 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렇게나 착한 사람들을 함부로 해치는데 왜 선한 의지를 갖춘 이들은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도 제 목숨을 돌볼 수 없단 말인가? 퇴마사들의 능력으로 본다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쳐부술 수 있는데 말이다. 왜 그 힘을 써서는 안 된단 말인가? 함부로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 뿐인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인데도 말이다. 한편,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언급한 내용은 악령이 되어버린 리더의 '잘못된 명령'이라도 그저 묵묵히 따르는 일본인로 인해 퇴마 일행은 죽다 살아난다. 고작 '단 한 명의 악인'이 거대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면 그 '집단 전체'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악행을 저지르고 마는 것에 대한 비판도 함께 하고 있다. 이런 맹목적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악인'이라 부를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명령에 따르면서도 '일말의 양심'에 거리낌을 느끼고 있는 일본인들도 있을 텐데, 악령의 명령에 따르는 무리 전체를 절멸시킬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느냔 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두머리, 딱 한 명'만 골라서 처단을 하면 공리주의적 논리에 의거하여 가장 합리적인 일이 되겠지만, 그 딱 한 명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순종하는 그들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퇴마 일행을 바로 그런 이유로 목숨을 건 퇴마행을 치룬 셈이다. 과연 어찌 하면 좋겠는가?

우리는 '단 한 명의 악인'이 우두머리가 되어 '전체 집단'이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이웃나라를 두고 있는 셈이다. 이를 <국화와 칼>에서는 일본인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칼을 자기 배에 꽂고 할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중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어느 나라 사람이든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으나, 일본인의 이중성은 남다르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토록 체계적인(?) 이중적 사고방식을 사용하는 일본인을 상대할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옳단 말인가? 세상 둘도 없을 정도로 '친절한 일본인'이 등 뒤로 돌린 손에는 항상 칼을 들고 있을 수도 있다는데, 우리는 겉으로 웃지만 속까지 웃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웃나라와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한 해답도 역시 <국화와 칼>에 담겨 있다. 일본인들은 '절대복종'을 할 정도로 강한 힘 앞에서 맹종을 하는 습성이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일본인이 겉과 속을 알 수 없는 전략을 사용할 때, 우리는 강대한 힘을 길러 저들이 꼼짝달싹할 수도 없게 만들어야 속으로 들고 있는 칼을 '영원히 꺼내지 못하게' 할 수 있단다.

하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맥아더는 이를 잘 활용하여 일본을 '미국의 충직한 개'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일본은 현재까지도 '우방국'이라는 미명 아래 충직한 '미국의 개'로 활약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 빈틈을 보인다면 일본은 언제든 '숨겨둔 칼'을 꺼내 들고 주인(?)인 미국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국화와 칼>에 적힌 방식으론 퇴마 일행이 악령이 깃든 우두머리를 제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제 목숨마저 내놓으면서 '악령집단'을 품에 안는 위험천만한 수법을 썼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퇴마 일행들 앞에 앞으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책의 말미에 '임사체험'을 하며 하느님과 만나고 말씀까지 전해들은 박 신부는 '그분께서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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