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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 ㅣ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4월
평점 :
[My Review MDCCXCIX / 넥서스Friends 4번째 리뷰] '차이와 차별'은 '다름과 틀림'만큼 다르다. 누구나 각자의 개성을 갖고 살아가기 마련인데 '서로의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두는 것일까? 막상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죽는다느니 어쩐다느니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다.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에서는 요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반인반요'가 된 인물이 등장하면서 요괴 아이 돌보미 야스케와 일행들에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그런데 '반인반요'란 무엇인가? 인간으로 치자면 '혼혈'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여자와 요괴 남자가 사랑에 빠져서 함께 살게 되니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인간과 요괴의 특징을 모두 갖춘 셈이다. 그렇다면 '반인반요'를 어떻게 볼 것인가? 4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할 것이다. 인간과 요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이 섞여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혼혈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위에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로 말이다.
어느 날 인간 여자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때 자신을 구해준 용감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인간 여자는 이 남자에게 한 눈에 반하고 만다. 그래서 둘은 사귀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는 자신이 '요괴'임을 밝히게 된다. 인간 여자는 요괴 때문에 위험에 처했는데 '요괴의 도움'으로 자신이 살아난 사실을 깨닫고 이 요괴에 함께 지내길 바란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요괴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의 곁에 있길 바란 것이다. 인간이 아닌 요괴는 두려운 존재이니 말이다. 그렇게 요괴 남자는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인간처럼 여자와 함께 지낸다. 그러다 딸 아이가 하나 생겼는데, 인간 여자는 두려움에 빠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요괴'이면 어쩌나하고 말이다. 다행이 겉모습은 인간의 모습이라 안심이었는데, 어느 날 어린 딸이 높이 있는 서까래를 어렵지 않게 오르는 광경을 목격하지 겁에 질려버리고 만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요괴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인간 여자는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한다. 요괴 남자 때문에 자기 딸이 요괴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기 딸에게도 '요괴의 능력'을 보이지 말라고 겁을 주었다. 나이 어린 딸은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엄마와 함께 지내고 싶었던 탓에 '요괴의 능력'을 감추고 평범한 인간 아이처럼 굴기 시작한다. 그렇게 딸아이는 요괴인 아빠를 멀리하고 인간인 엄마와 함께 지내며 점점 엄마처럼 '요괴'를 싫어하는 아이로 자란다. 그런데도 인간 여자의 히스테릭한 발작은 멈추지 않았고 요괴 남자는 온갖 방법을 다해서 인간 여자를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몸이 약했던 탓인지 결국 죽고 말았다. 그렇게 요괴 아빠와 요괴를 싫어하는 반인반요 딸아이만 남게 되었는데, 둘 사이는 부녀지간인데도 더욱 서먹할 따름이다. 그러다 야스케를 만난다. 요괴아이 돌보미인 야스케는 요괴 아빠인 소테쓰와 함께 다이코 공동주택을 방문한 것이다. 딸아이를 돌봐달라면서 말이다. 야스케와 반인반요 미오는 그렇게 만나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겪게 된다.
다시 돌아와 '혼혈'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혼혈은 이쪽과 저쪽을 모두 아우르는 '양쪽의 특징'을 갖추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혼혈에 대한 시선은 그리 곱지 못한 것이 슬픈 현실이다. 이쪽에서는 '저쪽의 특징'이 있으니 따돌리기 십상이고, 저쪽에서도 '이쪽의 특징'이 보이니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만다. 그렇게 혼혈은 '양쪽의 특징'을 모두 갖춘 능력자(?)인데도, 양쪽 모두의 따돌림을 받기 일쑤다. 왜 그럴까? 아마도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은 아닐까? 이를 테면,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중 언어생활'을 하며 두 개의 언어를 모두 잘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겉모습은 한국인과 미국인의 모습을 반반 섞였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는데 겉모습은 '다른' 점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들의 시셈과 질투심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변수를 다 고려하지 못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혼혈이 가진 장점이 '다수의 횡포'에 의해 잠식 당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 만 할 것이다.
우리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열린 사회를 바람직하다 말한다. 그리고 '소수의 몫'으로 남겨두는 배려에 대해서도 다분히 관대한 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독 '혼혈'에 대해서는 야멸치게 굴기 십상이다. 왜 혼혈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순수한 혈통을 지키고 고유한 전통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각고의 노력으로 혼혈에 대한 차별을 올곧게 지향하는 것인가? 혼혈에 대한 편견과 따돌림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 책이 '일본소설'이니 일본 안에서 벌어지는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 살짝 논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왜 일본은 외국인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면서도 유독 '한국인'에 대해서만큼은 '2등 국민 취급'을 하는 것인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 '특유의 열등감'으로 이해하면 좋겠는가? 한국인의 뛰어난 재능으로 일본인의 순수한 혈통과 고유한 전통문화가 어그러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본사회에 만연해 있기라도 하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내용으로 '해석'을 내린 학계의 전문가가 있을 정도로 일본인의 '한국인 차별'은 꽤나 설득력 있게 들릴 정도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인 차별'은 그 정도가 심각해서 '한국 혐오'로까지 확장해나가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일본정계를 주름잡는 '정치인'과 '경제인' 들이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아무래도 일본의 보수우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위치(?)'에 선 사람들이라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혐한론'은 필수이고, '망언'은 선택일 지경에 다다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인 차별'로 인해서 일본사회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인 폄하는 일상처럼 흔해 빠진 일이지만 다른 나라의 시선으로 보면 '외국인 혐오(제노포비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이런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이 얼마나 '외국인'에 대해 친절하고 친근한지 증명이라도 하듯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고 있지만, 정작 '재일교포'를 향한 폭력과 횡포는 여전히 도를 넘고 있고, 아직까지도 개선되지 못한 뿌리 깊은 악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처럼 한국의 흔적을 아주 지워버려야 겨우 그러한 '악습과 폐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억압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한류열풍'과 함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보수우익의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강경하며 '한국 말살 정책'은 여전히 유효하기만 하다.
어린이들이 읽는 소설에서 '외국인 혐오'까지 논하는 것은 언어도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레이코 작가는 일본사회에 만연한 '차별의식'에 대해서 어린이 독자들에게 교훈을 남겼다고 믿고 싶다. 딱히 이 책의 내용이 '재일교포에 관한 차별'을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사회에 만연한 '차별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NO!'라고 말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도 심각한 '차별문제'를 사회적으로 겪고 있으니 마찬가지다. 그 어떠한 이유로도 '차이'를 가지고 '차별'을 하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비단 '외모차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빈부차이', '정치견해차이' 등등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한 사회는 극렬한 혼란만 첨가되고, 그 혼란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면 문제는 점점 더 가중되어 사회 전체구성원 모두에게 피해를 안겨줄 뿐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각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