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2 : 혼세편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XCVII / 엘릭시르 9번째 리뷰] 돈을 가진 이가 돈을 쓰는 것을 두고 뭐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힘을 가진 이가 힘을 쓰는 것은 어떨까? 조금 달리 표현해보면, 돈 좀 많이 가진 이가 '돈자랑'을 하듯 돈을 펑펑 쓰면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을까? 그리고 힘이 남달리 쎄서 '힘자랑' 좀 하면 어떻겠느냔 말이다. 이 세상에 돈이 좀 많은 '부자'와 힘이 좀 쎈 '장사'가 제 자랑하듯이 돈과 힘을 저만의 이득을 위해서 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돈 많은 부자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하거나, 남보다 더 쎈 힘으로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위해 사고현장이나 화재현장에서 인명구호를 위해 힘쓴다면 얘기가 다르다. 이들에겐 도덕적 윤리의식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런 이들이 꼭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착한 부자와 선한 장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 때론 '초능력'에 가까울 정도로 '상위 0.1%의 능력'을 갖춘 이들이 저만을 위해서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더 흔하다. 심지어 그 능력이 너무도 엄청나서 사회구성원 99.9%의 능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웃도는 차이를 보이는데도,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기득권 유지'만을 위해서 능력을 쏟아붓는다면 그 사회는 망했다고 보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기적인 초능력을 갖춘 상위 0.1%를 '공공의 적'이라 부르며, 소위 '악마'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옛날에도 백성의 피땀을 짜내어 저들의 재산축적에만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지배층을 '흡혈귀'에 비유하지 않았잖은가.

<퇴마록>은 바로 그럼 악마같은 이들을 물리치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저들의 행복과 욕망을 위해 쓰지 않고 삐뚫어진 세상을 바로 잡고 이기심으로 가득한 중생들을 위해 '하나 뿐인 목숨'마저 아깝지 않아 하며 저들의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그저 이 세상이 악에 물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인 '퇴마사 일행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책이 비록 '장르소설'에 불과하지만, 삐뚫어진 욕망으로 이 세상을 암울하게 만들려는 이들의 잘못을 깨치어 올바른 길로 이끄는 역할을 부여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장대한 내용은 이미 '국내편'과 '세계편'에서도 다루었고, 그 이유조차 이미 밝혀놓았지만 '혼세편'에 들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담론주제이기도 하다. '혼세편 1권'에서는 <와불이 일어나면>에서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 대해 분명히 밝히면서도 그 죄값을 일본의 현세대에게 물어 '일본침몰'과 같은 대재앙을 일으키고, 또한 그런 꼴을 보고서 손뼉치며 좋아라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아버지가 저지른 죄값을 아들과 손자에게 물어서는 안 되는 이치와 서로 통한다. 그러나 죄값을 물지 않는다고 해서 '아버지가 저지른 죄'까지 모른 체하고 부정하는 일을 방관할 수는 없다. 준엄하게 과오를 따지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고, 고칠 것은 고쳐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과거'가 되풀이 되어 '또 다시 만행'을 저지르고 말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 조금의 양보도 있을 순 없는 것이다.

'혼세편 2권'에서는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일본정계의 거물이 악령에 쫓게 괴로워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며,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언급하며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언급하였다. 이렇게 일본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서 퇴마사 일행은 죽다 살아나게 되었다. 박 신부는 총알 세례와 다리 부상까지 당하며 '임사체험'을 경험하기도 하였고, 이현암은 일본에 가기 직전에 한빈거사로부터 엄청난 공력을 받았는데도 총까지 쏘아대는 무술고수들과 상대를 하는 도중에 '주화입마' 상태에 처하기도 했다. 장준후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주술 능력이 한층 높아졌지만 자신은 끝내 '단명할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일행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하자 '악령'이 아닌 사람을 향해선 주술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깨버리고 만다. 현승희의 경우엔 자신의 몸안에 '현신'한 애염명왕이 깨어나 퇴마사 일행을 위기에서 구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깨어난 애염명왕은 승희의 몸을 떠나 사라지고 만다. 한편, 언어학 박사이자 퇴마사들과 함께 동행하는 서연희는 '심연의 눈'으로 퇴마일행을 돕는 등 중요한 순간마다 일행을 구하는 기지를 발휘하며 함께 죽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들을 겪게 된다.

이렇게나 퇴마사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 까닭은 다름 아니라 '퇴마사들의 선한 의지'를 역이용해서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악의 세력과 혈투를 벌이는 와중에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퇴마사들의 동정심을 사고 절체절명의 위기속에서도 어린 아이를 구하려 '방비'를 갖추지 않고 '방심'하는 순간에 퇴마사들의 등뒤에 총을 쏘거나 칼을 꽂는 따위로 심각한 상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퇴마사 일행들과 맞상대를 해서는 이길 승산이 없자 이따위 '비겁한 수'를 써가며 퇴마사들을 위기로 내몰았다. 그런데도 퇴마사 일행들은 죄는 '악령'에게 있는 것이지 '빙의'된 이들을 죽일 수 없다면서 되려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는 없다면서 말이다. 또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능력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고자 '무고한 희생'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말이다.

이럴 때면, 선한 의지와 선한 행동은 참으로 무력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악당과 악령 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렇게나 착한 사람들을 함부로 해치는데 왜 선한 의지를 갖춘 이들은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도 제 목숨을 돌볼 수 없단 말인가? 퇴마사들의 능력으로 본다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쳐부술 수 있는데 말이다. 왜 그 힘을 써서는 안 된단 말인가? 함부로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 뿐인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인데도 말이다. 한편,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언급한 내용은 악령이 되어버린 리더의 '잘못된 명령'이라도 그저 묵묵히 따르는 일본인로 인해 퇴마 일행은 죽다 살아난다. 고작 '단 한 명의 악인'이 거대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면 그 '집단 전체'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악행을 저지르고 마는 것에 대한 비판도 함께 하고 있다. 이런 맹목적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악인'이라 부를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명령에 따르면서도 '일말의 양심'에 거리낌을 느끼고 있는 일본인들도 있을 텐데, 악령의 명령에 따르는 무리 전체를 절멸시킬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느냔 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두머리, 딱 한 명'만 골라서 처단을 하면 공리주의적 논리에 의거하여 가장 합리적인 일이 되겠지만, 그 딱 한 명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순종하는 그들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퇴마 일행을 바로 그런 이유로 목숨을 건 퇴마행을 치룬 셈이다. 과연 어찌 하면 좋겠는가?

우리는 '단 한 명의 악인'이 우두머리가 되어 '전체 집단'이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이웃나라를 두고 있는 셈이다. 이를 <국화와 칼>에서는 일본인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칼을 자기 배에 꽂고 할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중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어느 나라 사람이든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으나, 일본인의 이중성은 남다르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토록 체계적인(?) 이중적 사고방식을 사용하는 일본인을 상대할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옳단 말인가? 세상 둘도 없을 정도로 '친절한 일본인'이 등 뒤로 돌린 손에는 항상 칼을 들고 있을 수도 있다는데, 우리는 겉으로 웃지만 속까지 웃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웃나라와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한 해답도 역시 <국화와 칼>에 담겨 있다. 일본인들은 '절대복종'을 할 정도로 강한 힘 앞에서 맹종을 하는 습성이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일본인이 겉과 속을 알 수 없는 전략을 사용할 때, 우리는 강대한 힘을 길러 저들이 꼼짝달싹할 수도 없게 만들어야 속으로 들고 있는 칼을 '영원히 꺼내지 못하게' 할 수 있단다.

하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맥아더는 이를 잘 활용하여 일본을 '미국의 충직한 개'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일본은 현재까지도 '우방국'이라는 미명 아래 충직한 '미국의 개'로 활약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 빈틈을 보인다면 일본은 언제든 '숨겨둔 칼'을 꺼내 들고 주인(?)인 미국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국화와 칼>에 적힌 방식으론 퇴마 일행이 악령이 깃든 우두머리를 제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제 목숨마저 내놓으면서 '악령집단'을 품에 안는 위험천만한 수법을 썼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퇴마 일행들 앞에 앞으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책의 말미에 '임사체험'을 하며 하느님과 만나고 말씀까지 전해들은 박 신부는 '그분께서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