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 1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조은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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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CIII / 문학동네 21번째 리뷰] 일본인 부부는 '한 이불'을 덮고 자지 않는다고 한다. 직접 확인한 사실이 아니기에 아닌 부부도 있겠지만, 수많은 소설과 만화책, 그리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간접적인 확인'을 해본 결과, 그런 것 같다. 뭐, 나도 결혼을 하면 '한 침대'는 좀 생각해보려고 한다. 워낙 뒤척임이 많은 잠버릇을 소유하고 있다보니 옆에 누가 자고 있으면 불편해서 그런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라면 '합체와 분리'가 용이한 킹사이즈 침대를 고려해볼 수는 있겠으나, 대개의 일본인 부부들은 아예 '두 침대'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뜬금없이 '부부의 침실'을 소잿거리로 삼은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마스다 미리의 만화가 유독 그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혼네(속마음)'는 그렇지가 않다. 재는 것도 많고, 따지는 것도 많고, 뭔가 불만이 쌓이고 불평을 쏟아낼 것도 같은데,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그러면서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애둘러서 '딴소리'를 한다. 그치만 '혼네'가 분명히 담겨 있다. 11년을 같이 산 부부라면 그런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다테마에(드러낸 마음)'는 죄다 엉뚱한 소리뿐이다. 도대체 그런 얘기를 듣고서 속마음이 그런 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싶을 정도로 딴소리를 꺼내곤 한다.

그래서 치에코와 사쿠짱의 결혼 생활은 알콩달콩한 것 같으면서도 진짜 사랑하는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답답하게 느껴진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인이라면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애꿎은 '달빛이 참 아름답다'는 방식을 선호할 것이라서, 외국의 서적을 뒤칠(번역할) 때에도, 그런 일본인의 정서를 반영해야 옳다고 말했다고 한다. 뭐, 이해는 간다. 운치 있는 달밤에 연인과 단 둘이 사랑의 밀어를 속닥거릴 때 '달빛 어쩌구'라고 말을 꺼내면, 아~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마음이 들면서 두 볼이 발그레지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11년이 지난 후에 "자기야, 그때 달빛이 아름다웠던 밤 기억나? 그때 당신이 했던 말을 다시 듣고 싶어."라는 말을 듣고 기억을 떠올릴 사람이 있기는 할까? '직접적인 표현'도 기억이 날까 말까 할텐데, '간접적으로 애둘러 표현'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이런 걸 기억해내는 것을 '소소한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치에코 씨다.

분명 마스다 미리의 만화와는 다른 면이 엿보인다. 매번 '독신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것에 비해, '11년 차 부부'이지만 '신혼 부부' 못지 않게 꽁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보였다. 그런데 만화의 내용속으로 들어가보면, 달라진 게 없다. 앞서 '사와무라 씨 댁' 시리즈를 소개할 때에도 얘기했던 것처럼 여전히 '한결같다'는 느낌이 앞선다. 마스다 미리의 책들은 어김없이 죄다 '소소한 것들' 뿐이다. 그러한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없이 좋아라하겠지만, 그래도 10년 전에 연재한 만화와 10년 후에 연재한 만화의 내용이 한결같다면...좀

마스다 미리는 '우리네 일상'을 아주 잘 묘사하고, 그 속에서 '생각할 거리'를 투사해낸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가임에 틀림없겠지만, 결국 '대단한 것'을 기대할 수 없고, '심오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상다반사' 속에서 내 마음은 이런데, 네 마음은 어떠니? 아라라...쏘데스네. 얏빠리 스게~ 뭐 이런 영혼없는 추임새만 늘어놓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도 왜 일까? 그런 소소한 일상속에서 '무언가' 만족할 만한 것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동시에 느껴진다. 아주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소소할 따름이다. 그래서 난 또 '다음 권'을 읽게 된다.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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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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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CII / 민음사 22번째 리뷰] 목련꽃이 아직 지지도 않았는데 벚꽃이 만개했다. 그 사이에 개나리가 노랗게 물들이고 매화도 드문드문 꽃망울을 피우더니 요사이에는 철쭉까지 꽃봉오리가 솟아올랐다.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이 찾아왔다는 말이다. 물론 나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홀로 독수공방을 하고 있을 때 읽으면 딱 좋은 책이 바로 '사랑이야기'다. 그 가운데 유독 '자신'을 지독하게 사랑한 작가가 있다. 바로 프랑스와즈 사강이다. 그녀의 책과는 별개로 그녀의 인생 자체가 온통 '독선, 그 잡채'이기 때문이다. 금지된 것들을 즐긴 댓가로 법정에 선 그녀는 자기 자신을 문학적으로 변론하고 만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정말 멋들어진 문구 아닌가. 그런데 그녀는 그런 말할 권리가 없다. 이미 저 말을 할 당시에나, 그 후에나 '주변 사람들'을 너무나도 힘들게 했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가 20대 초반에 쓴 <슬픔이여, 안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과 같은 작품들은 어떤가? 지독히도 아름답다. 물론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뭐, 개인적인 아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버지니아 울프'도 있는데, 새삼스레 '프랑스와즈 사강'이 겪은 고난 정도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일 것이다. 암튼, 작가의 생애와는 별개로 '사랑이야기'에 푹 빠져본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서른아홉 살의 폴은 한 차례의 이혼 경력이 있지만, 아주 오랫동안 로제라는 남자와 사귀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권태기'에 빠졌는지, 둘의 사랑이 영 시원치 않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둘 만의 저녁시간인데도 로제는 '회사일'을 핑계로 저녁을 먹고 오거나 약속시간에 늦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처하자 폴은 심드렁해진다. 더구나 로제는 '다른 여자'와 바람까지 피우고 있다는 정황도 포착했다. 뭐, 그것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로제는 꼬박꼬박 다시 돌아오긴 했으니까. 그런데 정작 문제는 폴이 '고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분명 연인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폴은 사업차 젊은 남자를 만났는데, 이 젊은 남자가 좀 잘 생겼다. 그리고 대놓고 폴에게 '플러팅'까지 갈기면서 폴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다. 그 존잘남의 이름은 '시몽'이고,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다. 무려 14살이나 어린 남자가 대놓고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여기서 폴은 고민에 빠진다. 분명 자신은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니 '철벽'을 쳐야 마땅한데, 존잘남의 사랑고백이 싫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폴이 로제가 싫어진 것도 아니기에 시몽의 대쉬를 살짝 밀어내긴 하지만, 젊은 남자는 거침이 없다. 그는 첫 눈에 사랑에 빠졌다며 폴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고 말한다. 이건 정말 너무 달콤하잖아!

한 여자를 두고서 두 명의 남자가 서로 밀고 당기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로제는 그런 '밀당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로제는 그런 밀당보다 '단 한 번의 유혹'에 섹스까지 오케이하는 헤픈(?) 여자와의 육체적 놀음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메지라는 여자가 그렇다. 물론 로제 입장에서는 절대 '사랑'이 아니다. 로제가 사랑하는 여자는 '폴' 뿐이다. 그런데 폴은 이미 '잡힌 물고기'이기 때문에 굳이 애정공세를 할 필요가 없는 여자가 되어 버렸다. 로제에게 폴은 그런 여자였다. 언제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편안하고 안락함을 주는 여자'말이다. 약속시간에 늦어질 것 같으면 전화를 걸어서 '회사일'을 핑계 삼아 이야기할 수 있는 편한 상대 말이다.

그런데 로제도 위기감을 느꼈다. 폴이 시몽과 함께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과 결별한 것도 아닌데, 새로운 남자를 받아들인(?) 폴에게 배신감마저 들 정도지만, 로제는 폴에게 화를 낼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편한 여자'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빠졌을 뿐이다. 물론 그런 상실감을 회복하려 '섹스파트너(메지)'를 찾아가 서로의 몸을 밀착하지만, 로제도 결코 회복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로제는 폴을 찾아간다. 둘의 사랑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자, 이쯤 되면 '상황파악 완료'다. 독자인 당신은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 폴의 사랑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옳다'고 생각하는가? 나라면 당연히 '시몽'을 선택해야 옳다고 본다. 바람을 피운 것은 둘째치고, '편한 여자(?)'라니 이건 정말 최악 아닌가? 언제고 다시 돌아가면 항상 받아줄 게 확실한 '사랑'만큼 안심이 되는 것도 없겠지만, 그건 '연인 사이의 사랑'이 아니다. 99.9% '모성애'일 수밖에 없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 아니고서야 '잘못'을 저지른 연인을 무조건 용서하고 다시 받아줄 수 있느냔 말이다.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근데 이 책의 후반부를 읽다보면 의아해진다. 폴이 다시 로제를 받아들이고, 폴도 로제에게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이다. 어째서 '시몽'이 아니라 '로제'가 결론이란 말인가? 이건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폴의 수많은 '변명'과 '핑계'를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이유로 '시몽'이 너무 어리다는 점이다. 둘째는 뚜렷한 직업이 없이 빈둥거린다는 점, 셋째는 로제가 자꾸 주변에서 알짱거린다는 점이다. 그 결과, 폴은 다시 '로제'에게도 돌아간다. 시몽과는 이별을 통보하고 말이다.

근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폴은 로제에게 '이별'을 통보한 적이 없다. 그냥 시몽과 사귀기 '시작'했고, 잘 사귀다가 '싫증'이 나서, '이별'을 통보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로제와는 그런 것이 없다. 그냥 저냥 지내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처럼 둘은 다시 사귄다. '폴의 마음에는 변화가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로제와 '이대로'는 안 돼! 시몽으로 갈아탈거야! 근데 시몽은 너무 어려! 로제랑 있을 때가 마음 편했는데...다시 로제와 함께 있어야겠다! 시몽, 잘 가! 로제와 다시 '뜨밤'...다음날 저녁, 로제는 또다시 '회사일' 핑계를 대고 저녁약속을 펑크낸다!! 아마도 폴은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로제와 사귀고 있겠지만, 다시 '고독'을 느끼는 관계로 말이다.

이걸 무슨 감정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폴의 사랑을 과연 '정답'이나 '옳은 결정'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랑을 지속하는 커플들이 꽤나 많다. 뜨겁게 사귀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다시 식고...결국엔 '사랑'이 아닌 '우정'보다도 못한 '믿음'으로 유지는 하는데, '새로운 사랑'이 나타났더라도 다시 '컴백홈'을 하는 일이 무한도돌이표 사랑을 하는 커플들 말이다. 이런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가 <사랑과 전쟁>, <이혼숙려캠프> 같은 방송에서 꾸준히 회자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닐런지 의심해본다.

나는 이런 사랑을 감당하지 못한다. '감정소모'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충분히 모자란 시간인데, 왜 저런 바보같은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사랑의 유효기간'이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3년이라고 주장하는 '유경험자들의 증언'을 참고해보면, 또 말이 된다. 안정적인 사랑은 결코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이 '진리'라면, 주기적으로 '사랑의 위기'를 조장해야만 한다. 바람도 피우고, 불륜도 저지르고, 지지고 볶고 싸우고 해야 '찐사랑'이 새록새록 솟아나면서 '짧기만한 사랑의 유효기간'을 연장하고 또 연장할 수 있다고 본다면, 또 이게 맞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폴의 결정이 또 이해가 되기도 한다. 로제와 오랫동안 사귀는 동안 시들해진 '사랑의 감정'을 시몽이라는 젊은 남자를 통해서 '재확인'하고 난 뒤에, 시몽의 쓸모는 다 했으니 갖다버리고, 다시금 로제와 안정적이고 불같은 사랑을 이어갈 수 있었노라고 말이다. 그래서 작품의 후반부에 '희생양'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언급된다. 결국 시몽은 '폴과 로제의 사랑'을 위한 희생제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젊은 남자의 순수한 사랑을 짓밟으면서 말이다.

사랑, 너무 어렵다. 시들해진 사랑을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서 풋풋한 사랑을 뗄감으로 삼고서 하얗게 불태운 뒤에 재만 남게 되면 버리고, 둘의 사랑은 소생되어 다시 뜨겁게 온기를 나누고, 또다시 '소생'이 필요할 때쯤에 또 다른 '희생양'을 찾으면 그뿐이라는...어째 점점 '사기공갈단'으로 보이지만, 폴과 로제, 그리고 시몽, 이 세 등장인물 모두는 '사랑'에 진심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게 '문제작'이란 것이다. 프랑스와즈 사강이 고작 '스물네 살'에 써낸 소설 한 편이 '평단'을 들썩이게 만들고 '천재작가의 등장'이란 수식어가 난무했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결론은 '시몽'을 선택했어야 한다. 그게 옳다. 그래야 '사랑의 종착역'이 보인다. '로제'를 선택하는 것은 '순환선'을 탄 것과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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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셜록홈즈 1 (셜록 홈즈의 모험 1) 스토린랩 셜록홈즈 1
아서 코넌 도일 지음 / 스토린랩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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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CI / 스토린랩 1번째 리뷰] 얼마만에 다시 읽는 '추리소설'인가? 애거사 크리스티 이후로도 수 년만이지만, <셜록 홈즈 시리즈>는 얼추 20여년 만에 다시 읽는 것 같다. 초등학생 때는 구하기도 힘들어서 읽었던 것을 또 읽고, 또 읽고 했었는데 말이다. 이번에 'eBook'으로 아주 저렴한 책이 있길래 읽기 시작했다. 살짝 외적인 퀄리티(글꼴, 오타 등)는 좀 떨어지지만, 그럭저럭 어릴 적 '문고판' 책을 읽는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다.

그 1권인 이 책은 '셜록 홈즈의 모험'(전2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전체 시리즈는 '셜록 홈즈의 회상록'(전2권), '셜록 홈즈의 귀환'(전2권),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인사', '셜록 홈즈의 사건집'(전2권)으로 모두 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단편선 56편'을 수록하고 있으며, 유명한 장편 4편인 <주홍색 연구>, <네 사람의 서명>, <바스커빌 가문의 개>, <공포의 계곡>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럭저럭 속도감을 즐기며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듯 하다. 그 가운데 1권인 이 책에는 6편의 단편선이 수록되어 있다. 차례대로 <보헤미아 스캔들>, <붉은머리클럽의 비밀>, <사라진 신랑>, <보스콤 계곡의 미스터리>, <오렌지 씨앗 다섯 개>, <입술이 삐뚤어진 사나이>다. 셜록 홈즈의 열광적인 팬이라면 '제목'만으로도 흥분할 것이다. 어느 것 한 가진들 즐겁지 않은 것이 없을테니 말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셜로키언'이나 '홈지언'으로 불리는 열광적인 팬까지는 못 된다. 그래서 코난 도일의 작품 하나하나의 평가를 내릴 처지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유독 흥미를 끄는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볼까 한다.

먼저 코난 도일이 만들어낸 '셜록 홈즈'를 파헤쳐 보자. 흔히 알기로 '최고의 명탐정'은 셜록 홈즈라고들 하는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의 추리방법은 '예리한 관찰'을 통해서 남들이 알지 못할 정보까지 속속들이 파헤쳐내고, 수많은 단서를 조합해서 끝내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범죄사건에 감춰진 진실'마저 추리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초의 명탐정'은 아니다. 추리소설의 시초는 애드거 앨런 포가 쓴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1841)이고, 이 소설속에 등장하는 오귀스트 뒤팽이 바로 '최초의 명탐정'이다. 뒤팽은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특히 '뛰어난 관찰력'으로 누구도 풀지 못한 사건을 척척 해결해내곤 했다. 여기서 모티브를 얻은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를 창조해냈고, 모리스 르 블랑은 '아르센 뤼팽'이라는 세기의 도적을 창조해냈다. 뿐만 아니라 '추리소설의 원형'을 제시하여서 수많은 탐정들을 배출한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탐정의 기본은 바로 '뛰어난 관찰력'이 필요하다. 셜록 홈즈는 바로 이 점에서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홈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 사건의뢰인이 '자기소개'를 하기도 전에, 그의 직업이나 성격, 취향, 심지어 의뢰할 사건의 내역까지 척 보기만 하고도 알아맞추곤 한다. 모두 '단서'를 통해서 알아낸 것들이다. 물론 홈즈의 절친인 '왓슨'도 홈즈와 같은 방식으로 추리를 하곤 한다. 그러나 번번히 틀리고 만다. 왜냐면 '단서 포착'까지는 잘 했지만, 그 단서에서 유추해내는 '과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늘 엉뚱한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렇다면 홈즈와 왓슨의 '추리방식'에 다른 점이 있는 것일까?

사실, 명탐정을 만들어낸 것은 '코난 도일', 작가 자신이다. 그의 머릿속에서 짜낸 이야기 줄거리대로 홈즈가 줄줄이 읊어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셜록 홈즈의 추리과정을 '역순'으로 읽어나가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기법이다. 이야기의 순서대로 읽으면 '대단한 추리'를 하는 것 같지만,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면 그의 추리과정은 이미 짜여져 있는 '각본대로' 흘러가는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리소설'을 읽을 때에는 최대한 차례대로 읽어나가야 제맛이다. 만약 사건이 시작되자마자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마지막 결말부터 먼저 읽고난 다음에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면 읽는 맛이 확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추리소설'은 한 번 읽고 두 번 다시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일까? 그건 절대 아니다. 결말을 알고 있어도 재밌는 추리소설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셜록 홈즈>다. 아주 치밀한 과정을 통해서 사건을 해결해나가고, 사건을 해결할 '단서'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사건의 진실'을 알아챌 수 있는 묘한 흥분을 만끽할 수 있는 조밀한 구성력까지, 어디 하나 흠 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잘 짰기 때문이다. 그래서 <셜록 홈즈>는 작품 전체를 달달 암기할 정도로 대단한 팬들이 수두룩 한 것이다. 사실 이런 경지에 다다른 '추리소설 작가'는 전세계적으로도 몇 안 된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말이다.

암튼, 1권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건을 꼽으라면 '붉은머리클럽의 비밀'이다. 사건의 핵심이 '붉은머리'에서 '은행강도'로 돌변하는 장면이 압권이기 때문이다. 사건의뢰자는 자신이 '은행강도'와 연관되어 있는 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읽어버린 사기꾼을 찾는 단순사건이, 사실은 '은행강도단'이었던 도둑들의 잔꾀에 불과했고, 사건의뢰자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은행강도단의 범행'을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서는 엉뚱하게도 '백과사전'의 글귀를 옮겨적는 일만 하고도 두둑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버린 아쉬움을 토로하는 의뢰자에게로 온갖 시선을 쏟게 만들고서는 독자를 희롱하였기 때문이다. 이 단편을 읽는 독자들은 100이면 100 모두 깜빡 속았을 수밖에 없다. '은행강도'에 대한 아무런 단서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날라가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에 공감하던 독자를 느닷없이 '은행'에 감춰진 '금고'를 털려고 한 강도단을 등장시켜버리니 말이다. 바로 이런 쾌감이 <셜록 홈즈>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든다.

자, 다음 편에서는 어떤 사건이 우리를 흥분시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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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통 만화 삼국지 9 - 영웅의 최후
나관중 원작, 천웨이동.량샤오롱 글.그림 / WISDOM(위즈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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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C / 위즈덤(WISDOM) 9번째 리뷰] 9권에서는 '삼국지의 영웅들'이 하나둘 죽음을 맞이한다. 이미 수많은 군웅들이 죽었지만, 관우, 장비, 유비, 그리고 조조의 죽음은 무게감이 다르다. <삼국지연의>를 초반부터 이끌던 진정한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국지'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팬들조차 유비가 입촉 이후 사망한 이후부터는 관심도가 시들해져서, '그 뒤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누가 등장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다. 그럼 이 네 명의 영웅들이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살펴보자.

유비가 '서천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떠나고 '형주땅'을 지키고 있던 장수는 관우다. 방통이 갑자기 죽자 제갈량은 서둘러 유비의 곁으로 가면서 관우에게 형주를 맡기고는 다짐을 받아두는데, '조조와는 서로 맞서고, 손권과는 손을 잡아라'는 내용이었다. 까닭이 무엇일까? 제갈량이 주장했던대로 '천하삼분지계'에 따라서 북위, 동오, 그리고 서촉으로 형세가 갈라지게 되면, '형주'의 중요성은 반반으로 갈라진다. 물론 형주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인 것에는 틀림없다. 물자가 풍부하고, 인재가 많으며, 교통이 수월한 곳이라서 이곳을 차지하고 있는 이점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유비가 '서촉'을 차지하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천땅은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적 유리함과 동시에 '풍요로운 자원'으로 축복을 받은 곳이다. 그러니 서촉은 수비는 한결 쉬워지고 물자는 풍족하니, 굳이 '형주'가 없어져도 큰 문제가 없는 곳이 되었다. 다만, 수비가 쉽다는 것은 나아가 진출하기도 어렵다는 뜻이니 '중원'으로 나아가는 길목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형주'를 차지하고 있다면 여전히 유용하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형주땅'을 손권이 유난히 탐을 내고 있다는 것에서 이해득실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서촉과 동오는 북위라는 어마어마한 '공동의 적'을 마주하고 있는 형국이니, 서로 긴밀하게 손을 잡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서 '적벽대전'이라는 달콤한 승리를 맛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달콤한 가운데 대부분을 유비가 차지하고 말았다. 이는 제갈량의 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비는 더 큰 땅을 차지할 한 밑천 단단히 잡음과 동시에 손권에게 담보를 맡기고 이윤을 챙길 수 있는 '형주땅'을 아주 잘 이용해 먹었다. 그리고서 형주보다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서촉'을 차지했으니, 그만 돌려주어도 전혀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관우'에게 형주를 맡겨 놓고 있었으니 끝내 사달이 나고 만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관우의 책임'이 크다. 그리고 '제갈량의 방조'도 한몫 단단히 했다. 먼저 '관우의 책임'부터 따져보자. 결과적으로 형주를 지키다 관우는 목숨을 잃는다. 무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겠지만, 문제는 자신의 죽음으로 일단락된 것이 하나도 없이 더 큰일을 연쇄적으로 발생시키고 말았다는 점이다. 장비의 죽음과 유비의 죽음에 '관우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만약 관우가 전장에서 죽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면, 장비와 유비도 그렇게 비명횡사하듯 서둘러 죽음을 재촉하지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관우는 왜 죽었나? 그건 하릴없이 부린 '고집'과 쓸데없이 벌인 '만용' 때문이었다. 일찍이 관우가 제갈량의 조언대로 '손권이 내민 손'을 꼿꼿하게 거절하지 않고 유연하게 잡았더라면, 유비가 이제 막 얻은 서촉땅을 탄탄하게 자리매김한 뒤에 당당히 중원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관우가 쓸데없이 '형주'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일념만으로, 또한 자신이 최고의 무장이라는 자만으로 인해서 결국 '맥성'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야 만다. 죽는 것보다 더 치욕스런 '포로'로 잡혀서 손권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했고, 손권은 그 책임을 조조에게 떠넘기기 위해서 '관우의 머리'를 조조측으로 보내버린다. 만약 여기서 관우가 손권에게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다가 훗날을 도모하는 여유(?)를 보였다면 어땠을까? 비록 형주땅을 손권에게 빼앗겼지만, 관우를 무사히 되돌려 받고서,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고, 또는 더욱 굳센 '촉오동맹'을 맺어 북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관우의 만용으로 인해 그러한 모든 변수를 일거에 불식시켜버리고 말았다.

이런 무책임한 관우의 죽음인데도, 관우는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의(義)'를 높이 사서 곳곳에 '관우의 사당'이 지어졌고, 심지어 민간신앙에서는 '신'으로 추대를 받아 국난극복과 같은 큰 어려움을 맞이했을 때 간절히 소원을 비는 구심점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도 '관우의 묘(동묘)'가 있을 정도로 동북아시아에서 '관우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봤을 땐, 이런 관우가 숭상되는 모습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엄청난 실책으로 서촉을 빠르게 망국의 길로 가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의리'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와 동시에 그가 보여준 '똥고집'은 절대 본받을 만한 것이 없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역사서에서 '장비'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관우를 능가하는 면이 없지 않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그가 머리(지혜)는 없고, 오로지 힘(무력)만 가진 괴력의 장수로 묘사되지만, 소설속에서도 간간히 등장하는 '장비'가 무력이 아닌 지략으로 거둔 승전보는 그가 애초부터 단순무식한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가 '의형(역사서에는 '도원결의' 장면도 없다. 그러니 유관장 삼형제라는 것은 나관중의 픽션의 소산으로 볼 수도 있다)의 죽음'에 분노하다 과음으로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사이에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실제 역사서에서도 이 장면은 자세히 나오지 않기에, 그저 허구일 뿐이라고 짐작하지만, 장달과 범강이 장비의 목을 가지고 동오의 손권에게 투항한 사실만큼은 진실이니, 이를 통해서 분석해보자.

관우의 죽음으로 유비는 동오를 곧바로 치고자 하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직 나라를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했고 '복수전'을 벌인다해도 대군을 준비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정황은 급박하게 돌아가 '조조'가 위왕에 등극한 것으로도 모자라, 조조의 사후에 조비가 '헌제'에게서 선위를 받아 황제에 등극하게 되니, 바야흐로 '한나라'는 끝내 망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분개한 유비는 대소신료의 청으로 '황제'로 등극하길 거부하고 '한중왕'에 올랐다. 조비가 선위를 빙자한 찬탈을 한 것을 확인하고서, 한의 정통을 이어받아 '촉한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서 첫 번째 명령이 바로 '동오 토벌'이었다. 손권을 향한 복수전을 치르겠다는 결심이었다. 이에 제갈량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만류하지만, 장비가 울면서 유비를 찾아오자 유비는 결심을 철회하지 않게 된다. 이에 들뜬 장비는 속히 '복수전'을 감행하려 부하들에게 독촉을 하던 와중에 그만 죽고 만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짐작컨대 '성급하고 불같은 성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술'을 좋아해서 끝내 비명횡사한 것이라고 호사가들은 말하지만, 술 좋아한다고 다 장비처럼 비극을 맞이하지는 않기에 '성급한 일반화'라는 오류는 말아야 한다. 한 번 결심하면 물불 안 가리고 '직진'하는 성격은 때론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태반은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성격이니 고쳐야 할 성격일 것이다. 더구나 쳐부수어야 할 대상은 '손권측 사람들'이지 '자기편 사람들'이 아니지 않은가? 왜 불같은 화를 낼 때 '자기 사람'을 다치게 해야만 했는가 말이다. 참고 참았다가 '적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폭발시켰어야 옳은 방법이었다. 애먼 사람에게 화를 내면 장비처럼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 유비의 죽음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한 날 한 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한 날 한 시에 죽기를 맹세한다는 '형제의 맹약'을 지키는 군주를 매력적으로 보아야 할까? 국가의 지도자가 '사적인 일'로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오늘날 '두 번째 현직대통령 파면'을 마주한 대한민국의 위기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최순실 국정농단'을 감추려다 박근혜는 파면 되었고, '명태균 게이트'를 덮으려다 윤석열도 파면 되었다. 이게 모두 다 '제 식구 감싸기'를 하려다 국가를 파탄낸 일이다. 유비도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면 결국 '파면 대상'일 뿐이다. '제 식구(관우의 죽음) 감싸기'를 하다가 모든 군대를 총동원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온 국민을 전쟁으로 내몰 위인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물론 유비가 불세출의 영웅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국가의 위급 상황(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때, 의로운 군대를 이끌고서 난세를 평정하는데 일조하고, 동탁과 조조라는 '황제'를 위협하는 역적들을 처단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세력을 규합해서 당당히 맞서 싸운 영웅을 깎아내릴 까닭은 전혀 없다. 그런데 그런 모든 위업들이 '복수전' 한 방으로 송두리채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전쟁(이릉대전)도 지고 말았다. 그로 인한 국가의 손실은 막대하고, 장비와 황충, 유봉, 맹달 등등 아까운 인재들을 숱하게 잃어버리고, 수많은 병력과 영토까지 빼앗겨 잃어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자기자신의 목숨조차 보존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으니, 촉한의 미래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처지로 전락하고 만 셈이다. 그나마 마지막 유언으로 '제 아들(유선)이 차기 황제로 부족하니, 제갈량에게 촉한을 차지하라'고 남긴 것만은 영웅다운 마지막이었으나, 제갈량은 이 유언을 따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이 책에서는 제갈량이 유비의 성품을 닮아서 그랬다는 해석을 따랐다. 유비도 도겸의 땅, 유표의 땅, 유장의 땅을 함부로 낼름하지 않은 것처럼 제갈량도 촉한의 땅을 함부로 낼름하기보다는 '충(忠)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족했다는 해석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조조의 죽음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의 관상평은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고 했단다. 이래저래 조조의 평가는 '대단한 능력자'일 수밖에 없는 평가인데, 실제의 삶도 과연 그랬다. 그는 영웅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췄고, 심지어 '호색(好色)'까지 갖춰서 그야말로 완벽한 영웅(?)이었다. 그런 그도 끝내는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황위 찬탈'까지는 하지 않고, '위왕 등극'으로 만족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을 쏙 빼닮았다는 첫째 조비는 아비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헌제'를 핍박해서 강제로 선양하게 만들고서 세 번의 거절 끝에 '선위'라는 방법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로써 '한나라'는 망하고 '위나라'가 새로 시작하며, 조조는 죽고 난 뒤에야 '선황'의 자리에 오르는 영예를 차지한다.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 더할나위 없는 멋진 인생 아니었나? 그는 '역사의 승리자'였다. 그런데도 뭔가 찜찜하다. 왜 그의 아들은 제 아비의 무덤을 72개나 만들었을까? '가짜 묘'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이 떳떳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완벽하고 멋진 인생이 왜 끝이 허무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일까? 그건 그가 '실리'만 추구하고, '의리'는 그때 그때 다르게 처리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주 야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실리를 추구하고, 이득을 쟁취하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 단지, 이득을 많이 챙긴 '부자'를 존경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현 대통령 트럼프의 관세정책이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미국을 부자로 만들겠다는 그의 소신을 탓하지는 않지만, 그 소신을 따르기 위해서 취한 정책이 엉터리라서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것이 싫어서 비판하는게 아니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그동안 숱한 위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었던 명분(법치주의, 민주주의, 자유평등, 상호호혜 등등)을 스스로 걷어차고 '깡패짓'보다 못한 짓거리를 하며 전세계를 상대로 삥뜯고 있는 모습이 기가 차서 그런 것이다. 물론 미국이 옛날부터 했던 짓을 트럼프도 하고 있을 뿐이긴 하지만, 그나마 옛날에는 '세계평화'를 위해서라는 명분이라도 내세웠지만, 지금은 우격다짐(아메리카 퍼스트)일 뿐이지 않은가 말이다. 결국 조조의 평가는 대단한 능력자이긴 하지만, 전혀 존경받을만한 대상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자, 이제 숱한 영웅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사마의 vs 제갈량'의 대결이 벌어지는 대격전이 벌어질 차례다. 남은 분량으로 짐작컨대 '오장원에서 지는 별'로 이 책도 마무리 될 것 같다. 즉, '제갈량의 죽음'으로 북위의 승리와 사마의의 아들들이 찬탈을 해서 세운 '진나라'를 끝으로 대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또 한 편의 <삼국지>'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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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은 이제 개를 키우지 않는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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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XIX / 이봄 13번째 리뷰] 작가의 '한결같음'은 매력일까? 권태일까? 딱히 '전작(全作)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작가에 꽂히면 그의 저작물을 닥치는대로 읽고, 사 모으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오랜만에 '마스다 미리'가 걸려들었는데, 이 작가는 좀 한결같다. 그래서 좀 지루한 감이 있기도 하다. 그 까닭은 '3, 40대 독신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벌써 마스다 미리 작가의 13번째 리뷰인데 조심스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거 예전 리뷰에서 썼던 내용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하면서 리뷰를 쓸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지루하면 더는 읽지 않을텐데, 꾸준히 읽는 것을 보면 단순한 권태는 아닌 모양이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긴 한데, 그게 뭔지 딱 와닿지 않은 것 같다.

제목에서 '반려견'을 다루고 있지만, '치비(히토미가 어릴 적에 붙여진 반려견의 이름)'를 그리 많이 다루진 않았다. 그보다는 '사와무라 씨 댁, 세 식구'에 관한 일상이야기가 주를 이룰 뿐이다. 그리고 무려 결혼한 지 40여 년 간의 일상을 불쑥불쑥 꺼내들 뿐이다. 그런데도 비슷비슷한 '일화'들이 주를 이룬다. 참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 식구들이다. 오죽했으면 1편에서는 '오랜만에 여행을 가다'가 제목이었겠는가. 그런데 뜬금없이 2편에선 '이제 개를 키우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궁금하겠지만, 특별한 것은 없다. '사와무라 씨 댁'의 가족들의 평균 연령이 60세인 탓이 가장 크다. 그렇다. 반려견보다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개의 평균수명은 견종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작은 견종은 10~15년, 큰 견종은 20~30년을 산다고 하니, 아무래도 이제 고희(70세)를 맞이한 사와무라 씨에게는 "내가 돌볼테니 개를 키웁시다"라는 말을 내뱉기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일본인들은 가족끼리도 '폐'를 끼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하니,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피곤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마음씀씀이'다. 불편해도 가족이니 괜찮겠거니 마구 일을 벌이는 것도 실례지만, 가족끼린데도 불편을 꺼리고 눈치를 보면서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사는 것도 예가 아니기는 마찬가지라고 보인다.

암튼, 이 책의 주된 주제는 '노년의 삶'이다. 초고령화 사회로 돌입한 것 때문인지 한국과 일본은 연일 '저출생 문제'를 들이대고 '인구감소'를 크나큰 재난마냥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그나마 일본의 인구가 한국보다 2배 많은 것이 현재라서 조금 덜 심각하게 여기고 있긴 하지만, 우리보다 더 심각한 '경제문제(잃어버린 30년)'를 안고 있어서 '노후대책'에 대한 관심이 꽤나 높아진 것은 사실인 듯 싶다. 거기에 '고독사', '1인 가정',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노인' 등등의 문제가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종종 마주할 수 있는 문제가 되고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이 '노인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문제가 되기 '전'에 마주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기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을 정도로 '지루'하지만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 딴에는 언제까지 '한결같을 것'인지 오기로 읽고 있는 느낌도 있고 말이다.

어쩌면 작가는 '늙음에 대한 평범한 고찰'을 시도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늙게 되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발상의 전환'같은 고도의 전략적인 '일상 탈출'을 계획하지 않게 된다. 그저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느낄 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도 아주 장점이 없지는 않다. 아주 작은 변화도 금방 '눈치' 챌 수 있게 되고, 아주 사소한 즐거움도 놓치지 않게 된다. 젊어서나 어려서는 전혀 알아챌 수 없었던 '작은 변화'조차 늙은이의 삶에 포착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탓에 노인들은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물'보다 느려서 움직임조자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식물'에 관심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계절의 변화도 '꽃'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하나, '벌레' 한 마리, '바람'에서 느껴지는 냄새 하나하나에서 모두 '기운'을 느끼고 반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노인의 초능력'인 셈이다. 우리는 이를 흔히 '노련함'이라고 뭉뚱그려서 표현하지만 말이다.

나도 나이가 50살이 넘어가니 슬슬 그 초능력이 생기는 것 같다. 언제까지 그 초능력을 사용하며 살아갈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 내리는 봄비가 그치고 나면 좀 따스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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