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테러, 왜 일어날까?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2
헬렌 도노호 지음, 전국사회교사모임 옮김, 구춘권 감수 / 내인생의책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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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러'의 기원은 1605년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국왕 제임스 1세의 가톨릭 박해에 저항하기 위해 영국 의회를 폭파하려고 시도한 것이 테러의 첫 시도다. 하지만 '테러'라는 명칭은 프랑스 혁명 때 자코뱅파가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던 '공포정치'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테러의 역사는 꽤나 오래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끔찍한 테러를 저지르는 것일까?

 

  그건 '불의'에 저항하기 위한 '정의로운 행동'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너무나도 강력한 불의 앞에서 정의의 외침은 종종 힘을 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정의로운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서 때때로 과격한 정의의 모습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우리는 '독립운동가'로 기억하고 있는 안중근을 일본의 과격한 보수집단들은 '테러리스트'로 깎아내리는 것처럼 말이다. 조선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을 과연 '살인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안중근을 '살인자'라고 본다면 일본제국의 선두에 선 '이등박문'은 동양평화를 위해 혁혁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악의 소굴인 조선에서 '불령선인(일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조선인)'이 난데없이 등장해서 정의로운 이등박문을 암살했다고 봐야 할까? 결단코 그렇게 바라볼 수 없을 거다. 전범국으로 동양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뜨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일본제국을 '정의'라고 말하는 이는 제정신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안중근이 사람을 죽인 일을 무한히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거다. 이것이 바로 '테러'가 보여주는 딜레마다. 분명히 정의로운 일인데도 '방법적인 면'에서 결코 정의로울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테러'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야 할까?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선명한 테러는 '9·11 테러'일거다. 2001년 9월에 벌어진 이 사건은 '빈 라덴'과 '알카에다'라는 테러단체가 벌인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개입에 불만을 품은 집단의 보복 테러라는 점에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뛰어든 전쟁 가운데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쟁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남의 나라 내전'에 개입한 결과, 개운하지 못한 뒤끝을 남기는 '전통(?)' 덕분에 미국은 그 톡톡한 값을 치룬 셈이다.

 

  하지만 이유를 불문하고 '테러'라는 행위를 우리가 용인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과연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평가와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난 없다고 본다. 테러를 당한 쪽도, 테러를 일으킨 쪽도, 어느 한쪽을 두둔하기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엄청난 사건일수록 옳고 그름을 가리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테러'를 용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소수와 약자가 보여주는 정의로운 행동일지라도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테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셈이다. 소수의 약자들이 '최후의 결단'을 보여주기 전에 소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방법 말이다. 그리고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만으로도 대다수의 테러는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유 없는 테러'도 왕왕 일어나고 있다. 1995년에 일본에서 벌어진 '옴 진리교 도쿄 지하철 테러'는 밑도 끝도 없는 종말론을 앞세워서 벌인 테러이기에 미연에 막을 도리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라는 것이 '비이성적'인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이성적인 목소리'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들어야만 하는 피곤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정당한 테러'도 '비이성적인 테러'도 끔찍한 결과를 낳을 뿐이므로 근절해야만 한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에 '테러지원국'을 선포하고 공격적인 양상을 보였다. 또한 공항의 안전을 위해 '보안검색'을 높였고, 이로 인해 승객들의 소지품까지 일일이 검사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물론 안전을 위해서 감수해야 할 일이고 당연히 협조해야 할 일이지만,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이 떠오르는 건 어쩔까?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높은 보안수준을 유지해야 하며, 불편을 감수해야 할까? 혹시 더 좋은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방향이 옳다면 아무리 어렵고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도 그 길을 갈 수 있을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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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원칙 - 투자의 신 래리 하이트의 추세추종 투자 전략
래리 하이트 지음, 강병욱 감수 / 한빛비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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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부를 쌓는 절대 원칙은 '추세추종'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풀이하면, '추세를 따르라'는 말인데, 과연 '추세'를 간파하고 투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라는 의문부터 문득 들었다.

 

  저자인 래리 하이트는 어려서부터 공부도 못하고 장애를 가졌고 못생긴 덕분에 '잘난척'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고백을 꺼내놓았다. 이 책의 서두에 나오는 말인데, 그래서 그는 매사에 조심조심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확실한 곳'에만 투자를 했더란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의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추세추종'이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할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 '확실한 투자'만 골라담는 법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무엇'이 확실한 투자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셈이다.

 

  하지만 대박을 내기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도 필요한 법이다. 모험을 떠나지 않고서 어찌 보물을 차지할 수 있겠냔 말이다. 저자도 말한다. 복권 당첨을 바란다면 복권부터 사라고 말이다. 그런데 '추세추종의 원칙'에 따르면 복권을 사더라도 '당첨될 복권'을 사라는 말이다. '무엇'을 근거로 당첨될 복권을 살 수 있을까? 과연 어떤 추세를 따라야 복권당첨의 행운이 아니라 필연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물론, 저자는 복권에 당첨이 되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다. 주식 투자로 돈을 벌었다. 분명 복권과 주식은 다르다. 주식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며 '오름세'를 파악할 수 있고, '내림세'를 예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대단한 '수학적 영감'을 통해서 단련할 수도 있다. 실제로 수학에서 '미분'은 한 점의 기울기를 계산할 수 있게 하며 이 '점의 기울기'가 올라가는 것인지, 내려가는 것인지 분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추세추종'이라는 것은 이를 수학적으로 계산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영감'이 필요한 셈이다. 따라서 '대세를 따르는 법칙'이란 얘기인데, 이런 방식으로 투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까닭에 대박을 노리긴 힘든 방식이다.

 

  그렇지만 '바빌론의 부자들'이 가진 지혜를 엿보면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적으면 부를 쌓을 수 있고, '쓰는 돈'보다 '모으는 돈'이 더 많으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주식투자도 바로 이런 지혜를 통해서 실천하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부를 쌓아갈 수 있는 법이다. 존 리도 말을 보탠다. 주식에 묻어둔 돈은 10년이고, 20년이고 묵혀두라고 말이다. 돈이 돈을 벌게 냅두면 눈에 띄지는 않아도 나중에 확실한 목돈이 되어 있을 거라고 말이다.

 

  결국 '추세추종의 원칙'은 절대로 돈을 잃지 않는 법을 터득하라는 주문인 셈이다. 대세를 따르되 경거망동하지 말고 진득하게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조급하게 굴면 '돈을 잃기' 십상이라는 점도 유독 강조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내용이다. 부자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다만 때를 알고 기다릴 줄 알고 확실하지 않으면 큰 걸음은 절대 내딛지 않는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실패를 거울로 삼아 더 확실한 추세를 따를 뿐이다.

 

  근데,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교훈 아닌가? 뭐, 큰 가르침은 대부분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절대적이고 확실한 <부의 원칙>은 이미 당신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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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 명작 3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혜연 그림, 송윤섭 글 / 은하수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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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등학생 논술수업을 준비하다 발견한 책인데 초등학생들도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작품이었다. 특히 <베니스의 상인>의 줄거리와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이 창가에서 나눈 '유명한 대사'를 읊으며 따라하는 모습을 보며 흐믓해했다.

 

  그렇다면 초등학생들도 '사랑'을 안다는 것일까? 적어도 '연애'는 아는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면서 여자아이들이 책 속의 삽화를 보면서 '등장인물'들의 외모 순위를 매기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미오'보다 로미오의 친구인 '머큐쇼'에게 더 큰 호감을 보였다. 그러다 '머큐쇼'가 로미오를 대신한 결투에서 케풀렛가의 '티볼트'에게 칼을 맞아 죽는 장면에서 오열을 하는 장면도 보았다. 잘 생긴 남자가 죽는 장면에서 여자아이들은 한결 같이 대성통곡을 했더랬다.

 

 

  반면에 로미오의 외모순위는 상당히 낮아졌다. 그러면서 영화배우 '디카프리오'를 얘기했다. 얘네들이 태어나기도 전인 1996년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적도 없을 텐데, '검색'을 통해서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선생님이랑 디카프리오를 비교한다면 어떨 것 같냐면서 포즈를 취했더니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알려줬다. 디키프리오랑 선생님이 호랑이띠 '동갑'이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실망실망 대실망을 하길래...하도 괘씸해서 디카프리오의 육덕진 사진을 보여줄까 하다가 말았다. 소녀 감성에 스크래치를 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암튼, 로미오의 인기순위는 생각보다 아래였는데, 그 까닭은 로미오가 처음 등장하면서 '줄리엣'이 아닌 '로잘린'에게 사랑고백을 했다가 차였다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줄리엣'에게 사랑고백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대실망을 하고 말았단다. 요즘 아이들도 '쉽사빠'는 매력적이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이 불 같은 사랑에 타오르고, 결혼을 하며 사랑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가, 끝내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장면을 보면서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역시나 아이들 감성에는 '해피엔딩'이 제격인 셈이었다. 허나 아이들도 느끼고 있었다. 너무 뻔한 '해피엔딩'보다는 비극적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더 크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아이들이 그걸 직접 표현하기에는 너무 어려울테지만 말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희곡'은 아니다. 다시 말해, '원작'이 아니라 원작에 가깝게 쓴 '소설'인 셈이다. 아직 초등학생들에게는 대사로만 구성된 '희곡'이 그닥 읽기 쉬운 책은 아닐 듯 싶어서 '줄거리'가 잘 드러난 책을 골라서 논술수업에 활용하였다. 이렇게 '줄거리'를 알고 나면, 언젠가는 원작 '희곡'도 즐길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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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와인의 역사 한빛비즈 교양툰 5
브누아 시마 지음, 다니엘 카사나브 그림, 이정은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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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양툰 시리즈>를 읽으면서 교양을 톡톡히 쌓아가고 있다. 이젠 '만화'를 읽는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까닭이 전혀 없다는 것을 '교양툰'을 보면서 실제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여전히 '만화형식'이 갖고 있는 부족함은 지적할 만하다. 만화형식은 어쩔 수 없이 '컷'과 '말풍선'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가 그 '한계'를 벗어날 때, 만화만이 가진 장점이 더 없이 드러날 테지만, 아직까지는 '종이책'이 갖고 있는 한계점인 '수정'이 쉽지 않고, '첨가'하기 어려운 점과 함께 극복하게 된다면 우리가 꼭 가져야만 할 '교양'을 더욱 쉽고 재미나게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이라도 '만화 교양책'을 더 자주, 더 많이 읽길 바란다.

 

  이 책은 <와인의 역사>란 책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포도주의 발효과정을 알기 쉽게 요점 정리한 지난한 역사책'이라고 소개할 수 있겠지만, 역시나 '만화형식'으로 그려내었기 때문에 조금은 어렵지 않고 술술 읽을 수 있도록 써내려갔다. 하지만 살짝 '와인'에 매료된 서술방식이 담겨 있기 때문에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가 담겨 있고, 서양사람들이 갖고 있는 '와인'에 대한 자부심(?) 또한 살짝 곁들여져 있는 탓에 '와인 홀릭'에 가까운 책이 아닐까 싶다. 허나 와인을 즐기고 좋아하는 독자분들이라면 '상식'적인 면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지식을 선사할 것이 분명하다.

 

  인류에게 '술의 역사'는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이다. 인류를 흠뻑 취하게 하고 몽롱하며 알딸딸하도록 기분 좋게 만드는 '술'을 오래 전부터 즐겼기 때문이다. 술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농업혁명'과 관련이 깊다. 곡물이나 과일을 오래도록 저장하다가 우연히 부패가 아닌 '발효'가 된 술을 맛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맛이란 한 번 경험하게 되면 자꾸 찾게 되는 '중독성'마저 있었기에 인류는 '술'을 직접 담가 마실 수 있는 과정을 찾기 위해 큰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중독성 얘기가 나왔으니 '마약'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마약, 역시 술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둔하게 만들거나 환각 상태를 경험할 수 있기에 인류와 함께 발달하였지만, 의료용 '마취제'로 사용하는 한으로만 마약을 제한한 것에 비해서 술은 지금도 널리 즐기고 있다. 허나 둘 다 '과하면' 옳지 않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자, 이제 '와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 서양에서 만든 술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와인'과 '맥주'다. 전세계 시장에서도 주류계에서는 여전히 '와인'과 '맥주'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식사를 하면서도 즐기고, 의학적으로도 몸에 좋다고 알려진 '와인'이 더 사랑받고 있으며, 희귀한 와인의 경우에는 고가에 거래가 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점에서 왠지 '와인의 우세승'이 점쳐지곤 한다. 물론 '맥주'를 좋아하는 분들에겐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소식이겠지만 말이다. 한때 일본에서 출간한 <신의 물방울>이란 만화책 덕분에 우리 나라에서도 와인의 인기는 대단했으며, 지금도 와인 감별사인 '소물리에'는 고품격 전문가로 소개될 정도다.

 

  밝혀두지만, 개인적으로 건강상 '금주'를 하고 있으며 와인 특유의 텁텁하고 떪은맛 때문에 와인을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다. 한창 술을 마실 때에도 와인은 주머니 사정상 늘 관심밖이었다는 것도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래서 난 절대 '와인 예찬론'에 절대 찬성하지 않으며 동의하지도 않는다. 내 입에는 '막걸리'가 제격일 뿐이다. 암튼, 이 책은 '와인 예찬론자'에서 더 없이 즐거움을 전해줄 책이라는 것만 밝혀두려 한다.

 

  다시 돌아와서, '와인 예찬론자'가 아닌 나로서는 와인이 그리스도교의 비호 아래 '중세시대'에도 꾸준히 제조되어 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흔히 독실한 신앙을 가진 분들은 '금주'를 권하기 마련인데 중세 그리스도교에서는 '와인 제조법'을 교회가 지켜왔던 것일까? 오히려 황제가 다스리던 지역에서는 '제조법'을 잊어버려서 교황의 덕(?)이 아니었다면 오늘날까지 '와인'이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으며, 지금도 유명한 '고급 품종'이 일찍이 개발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는 그저 '와인의 맛'이 대단히 좋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심지어 <성경>에서도 예수가 맹물을 와인으로 바꾸는 기적(!)을 선보였기 때문에 교회가 그토록 독실하게 '포도의 재배'와 '와인 숙성'에 열심이었다고 불경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유럽과 인근 지역이었던 '아랍권'에서도 <꾸란(말씀)>에 적혀 있길, "매일매일 마셔도 좋지만, 과하게만 마시지 말라"고 했다며 '와인'을 마시는 것을 금기시 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곡주(청주)'가 보편화 되었고, 역시나 술을 멀리 하라는 가르침 덕분에 포도는 싱싱할 때 먹는 '제철 과일'로 여겼던 터라 '와인'이 일찍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가 깜빡 잊고 적지 않은 것이 있는데, 동양에서는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오히려 덕담에 가까울 정도로 '술에 관대한 성향'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과실주'보다 '곡주'가 더 널리 애용된 까닭을 '술맛'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살짝 몰아가는(?)는 것은 저자의 인식 부족으로 보일 뿐이다. 아니면 '와인 예찬'을 하다보니 와인을 대접으로 마시는 한국인을 무식의 소치로 여기는 오만함이거나 말이다.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와인'에 관한한 한국을 언급한 내용이 전혀 없다. 중국과 일본까지만 살짝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암튼, 오늘날까지 대단한 '와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유럽인(특히 프랑스인)에 대한 집중적인 설명이 무척 아쉬울 따름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이 '친환경적 와인 생산 방식'이었다.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유럽에서는 다시금 '포도재배'와 '와인 생산'에 열을 올렸는데, 이때 빨리 생육하기 위해서 '화학비료'를 첨가한 것이 문제되었단다. '화학비료' 덕분에 더 빠르고 더 많은 포도 생산을 할 수 있었지만 '와인의 맛'은 물론, 건강에도 해로운 성분이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해충을 잡기 위해 'DDT(살충제)'를 뿌린 결과는 상상 이상의 해악을 끼쳤을 뿐이었단다. 그로 인해 '유기농 재배'와 함께 '유기농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노력을 한 덕분에 오늘날에는 더 맛좋은, 더 건강한 와인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단다.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더욱 좋아질 예상이며, '기후변화'에도 끄떡 없는 '포도재배'와 '와인 생산'을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할 예정이란다.

 

  하지만 이 책을 덮을 즈음에는 '와인'에 대한 생각보다는 우리 나라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이 들었다. 술에 관한 한 우리는 그 어떤 나라나 그 어느 민족보다 우수(?)한 까닭에서다. 우리도 '한국식 와인'인 <복분자주>를 전세계 시장에 퍼뜨릴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전통 청주(맑은 술)와 탁주(거른 술)가 좀 많으냔 말이다.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음주량'도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절대 빠질 수 없는 '막걸리' 역시, 세계화를 거치면 세계인들의 사랑을 흠뻑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짜 막걸리는 '만든 지 사흘만'에 다 비워야 하니 얼마나 유니크하냔 말이다. 이런 술맛을 세계에 맛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막걸리의 역사>가 출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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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쫌 아는 10대 - 까칠한 백수 삼촌의 최저임금 명강의 사회 쫌 아는 십대 1
하승우 지음, 방상호 그림 / 풀빛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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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저임금제는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선진국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제도이다. 시행목적은 노동자의 삶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사용자로부터 '최소한의 임금'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고임금'으로 적용되어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큰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건강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있는 법'이라도 제대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현 정부 들어서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2017년 대선 당시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모든 후보들이 '최저임금 1만 원으로 인상 안'을 만장일치로 공약했기 때문이다. 헌데, 지금에 와서는 '1만 원'은 줄 수 없으니 8350원(2019년 기준)으로 인상폭을 대폭 낮춰서 결정하였다. 이유는 우리 나라의 경제력으로는 '1만 원 이상'을 주면 기업이 죄다 망하기 때문이라나...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저지하였다.

 

  대기업이 '최저임금 1만 원' 때문에 망한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주장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암튼 대기업도 어렵다고 핑계를 대니 중소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정작 시끄러운 곳은 '자영업자들'이 되었다. 단기 알바생에게도 '시급 1만 원'을 줄 수 없다고 말이다. 이유는 대기업과 같다. 경영상 도저히 불가하다는 점이다.

 

  물론, '자영업자들'의 주장은 공감이 간다. 각종 프렌차이즈 본사가 떼어가고, 건물주가 임대료를 올리는 통에 자신들도 '영세'하기는 마찬가진데, 알바생들에게는 '최저임금'을 보장해주면서, 왜 자신들과 같은 '영세업자'들의 '최저임금'은 보장해주지 않느냐는 목소리에는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근데, 정작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에 대기업은 빠졌느냔 말이다. 갑 중의 갑인 대기업이 최저임금 인상안에 가장 확실한 저항을 했으면서, 왜 애꿎은 '자영업자'들이 희생양이 되었느냔 말이다. 그리고서는 '정부탓'만 늘어놓는다. 문재인 정부가 애초에 무리한 '인상안'을 내놓았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났다고 말이다. 과연 다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어도 '정부탓'으로 돌릴지는 의문이지만, 암튼 '최저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일단, '최저임금'을 인상하도록 정부는 강력히 밀어붙어야 한다. 왜냐면 '최저임금'은 노동자의 마지막 보루다. 노동자의 삶이 안정되어야 경제도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번 소득은 곧바로 '소비자'가 되어 소비로 이어진다. 그때문에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 위해서라도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주어야 하는 것이 순리다. 반대로 '최저임금'을 동결해버리면 물가상승을 감당하지 못한 소비자가 지갑을 닫고 허리띠를 꽁꽁 묵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면 '경제의 악순환'이 벌어지며 자영업자, 중소기업, 그리고 대기업 순으로 연쇄도산을 하는 대공황을 맞이하게 될 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기업이 공황을 맞이할 리가 없다고? 그러니까 문제라는 것이다. 왜 불공정하게 불황속에서도 대기업만 살아남을 수 있느냔 말이다. 과거 97년 '한보사태'가 일어났을 때 수많은 계열사는 다 죽었는데도 온갖 비리를 저지른 '사업주'는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이러한 비리를 지금도 눈 감아 줄 것인가? 정부는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사업주에게 엄벌을 가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건전해지고 튼튼해질 수 있다.

 

  다음으로 '최저임금'을 갖고 을끼리 싸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 지금도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자영업자'와 '알바생' 들 간의 최저임금에 대한 다툼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일단 '알바생'들에게는 '노동자의 권리'인 정당한 임금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학생이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공짜로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다. '근로계약서'에 근거한 정당한 임금을 반드시 지급해야만 한다. 또한 '주휴수당'과 같은 법이 보장하는 임금도 반드시 지급해야 한다. '주휴수당'은 일도 하지 않고 공짜로 받는 돈이 아니라 노동자의 인권과 생명을 보장하는 '정당한 임금'이다. 5일간 40시간의 노동을 했으면 하루에 해당하는 8시간 만큼의 임금을 주휴수당으로 지급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의 삶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알바라도 당연히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다.

 

  물론, 영세한 자영업자가 '프렌차이즈'에 뜯기고, '건물주'에게 떼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알바생에게까지 챙겨주느냐는 하소연이 나올 만도 하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가장 힘이 없는 '알바생'에게 생트집을 잡느냔 말이다. 왜 더 많이 뜯어가는 '프렌차이즈'와 '건물주'에게는 한 소리도 못하고 애꿎은 알바생 탓을 하느냔 말이다. '정부 탓'을 하는 것까지는 나름 의미가 있으니 어쩔 수 없더라도 '쓰레기 언론'의 더러운 언론 플레이에 홀랑 넘어가 '거대한 갑'들인 프렌차이즈와 건물주에게 해야할 푸념을 힘 없는 알바생에게 풀지는 말잔 말이다.

 

  물론, 갑들이 무섭긴 하다. 괜히 '갑질'이란 말이 나왔겠냔 말이다. 그러니 영세한 '을들'까지 싸우지 말고 힘을 모아서 갑들에게 한방 먹이잔 말이다. 정부 탓을 하려면 이런 갑질을 하는 놈들을 혼내달라고 청원을 넣잔 말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최저임금의 해법'을 탐사보도하면서 '을'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여론을 형성할 수 있게 머리를 써야 할 것이다.

 

  사실, 기업총수들에게 '최저임금'은 그닥 큰 문젯거리도 아니다. 자신들이 해마다 챙기는 '배당금'만 제대로 분배해도 웬만한 중소기업을 먹여살리는데 어려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삼성에서 해마다 정관계에 로비를 하기 위해 책정한 금액이 '1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총액이 아니라 '매년 1조 씩' 챙긴다. 그 돈이면 '구멍가게(자영업자)'가 최저임금으로 손해보는 손실을 다 막고도 남을 돈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최저임금'으로 생긴 논란의 화살을 제대로 쏘아보잔 말이다. 없는 사람들끼리 치고 받고 싸워봐야 코피 터지기밖에 더 하겠나.

 

  애초부터 기업의 불공정거래는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왔다. 최저임금도 '정치권'에서 먼저 시작을 했으니 '해법'도 정치권에서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놀랍게도 박정희 정권 때에도 '최저임금'은 법에 명시되어 있었단다. 그런데도 기업들이 노동자들 삥 뜯기(?) 너무 힘들어진다면서 미루고 미뤘던 것이다. 물론, 그 정치인들이 기업들에게 뒷돈(!)을 받아먹으면서 그랬겠지만 말이다. 이제 '촛불혁명'으로 바른 정치를 하고자 하는데, 기업들에게 뒷돈을 받아가며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을 챙기면서 노동자들이 불성실한 탓이라고 몰아댈 수 있겠느냔 말이다. 비리 정치인들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대한민국은 다시 시작하는 셈이다. 어렵고 복잡하겠지만 해나가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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