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한 의학의 전설들 - 위대한 의학의 황금기를 이끈 찬란한 발견의 역사
로날트 D. 게르슈테 지음, 이덕임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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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의학지식'이 담겨 있는 역사책이다. 다시 말해, 역사적 사실을 낱낱이 드러내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그리고 '더 알고 싶은 내용'으로 정리하면서 읽으면 충분한 책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의학계에서 획기적인 발견, 또는 발명으로 수많은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바꾼 전설적인 인물들의 삶과 비하인드 스토리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꽤나 감동적인 감상으로 읽어도 좋을 역사책이다. 그러나 이러나저러나 '여러 가지 지식의 나열'인 것만은 다른 것이 없다.

 

  그래서 난 이런 책을 접하면 고민을 하게 된다. '지식의 나열'에 동참해서 책을 읽지 않고도 책내용의 전반적인 내용을 감 잡을 수 있도록 '친절한 리뷰'를 쓸 것인가? 아니면, 책의 내용보다 더 풍부한 지식을 자랑질하듯 '화려한 리뷰'를 쓸까? 그도 아니면, 글쓴이가 미처 다 담지 못한 몰랐던 정보를 담아 '놀라운 리뷰'를 써낼 것인가? 하고 말이다. 적어도 난 '친절한 리뷰'하고는 담을 쌓았다. 너무 식상하기 때문이다. 간혹 '화려한 리뷰'를 쓰기도 했지만, 글쓴이에게 실례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절필하였다. 그래서 종종 '놀라운 리뷰'를 쓰곤 했지만...이것도 자주 쓰다보니 이 책의 내용을 저 리뷰에, 저 책의 내용을 요 리뷰에 짜깁기하는 느낌이 들어서 자중하고 있는 편이다. 이런 까닭에 요즘에는 '내 생각'에 '충실한 리뷰'를 쓰고자 노력한다. 책을 읽고 난 뒤의 나의 솔직한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담론'은 바로 '의학이 바꿔 놓은 인류사'다. 이를 테면, 손씻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산모를 출산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고, 마취제를 발명함으로써 더는 수술장이 비명으로 가득하지 않았으며, 소독제를 사용함으로써 더는 감염으로 인한 죽음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 말이다. 물론, 쌩뚱맞게도 철도의 발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PTSD)'라고 하는 질병을 보다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었고, 다윈의 <진화론>이 '유려한 문체'로 쓰여진 탓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었던 데 반해서, 제멜바이스의 책은 너무나도 읽기 힘들 정도로 어렵고, 때로는 광기에 물든 문체로 쓰여져서 의학전문가들조차 읽기 거북한 탓에 '손씻기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강조했음에도 그후로도 오랫동안 '산욕열'로 죽어가는 산모와 '감염'으로 인한 사망이 줄지 않았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어쩌면 '기-승-전-의학'이라는 귀결로 쓰여진...어떤 에피소드라도 결국엔 '의학'이라는 우격다짐으로 쓰여진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토록 난삽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의학의 발달'로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된 역사적인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 가운데 난 '의학의 전설들'이 하나같이 당대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주목받데 된 점이 눈에 띄었다.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그의 사후에 '주목'받고 걸작으로 평가받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팬데믹'을 되돌아 보았다. 벌써 대유행이 시작된 지 3년째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인간과 바이러스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이 대결은 대부분 '시간'이 해결해주곤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말이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삽시간에 퍼져 넓은 지역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난 뒤에 '면역력'을 갖춘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염병이 잦아드는 '기록'이 참 많기 때문이다. 당대의 내놓아라하는 '명의'들도 팬데믹과 같은 상황에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오늘날에는 달랐다. '의료계'에서 발빠르게 움직였고, '감염관리'를 전담하는 부서에서 긴밀하고 적절하게 대응함으로써 '팬데믹' 상황속에서도 버티고 시간을 지연시켜 '대비'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팬데믹과 이번의 '코로나19 팬데믹'은 양상이 많이 달랐다.

 

  물론, 겉잡을 수 없이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나는 것에 대응할 수 없었던 국가들은 초기에 많은 희생을 막을 수 없었다. 심지어 선진국에서조차 말이다. 그동안엔 돈 많은 선진국들은 가난한 후진국처럼 '질병에 의한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곤 했는데, 이번 '팬데믹'에서는 '직접 당사자'가 되어 큰 피해를 보았다. 허나 이렇게 선진국에서 호되게 당하고 나니 좋은 점도 있었다. 거대제약회사들이 앞다퉈서 '백신개발'에 나섰고, 보통 10년 이상이 걸리던 개발기간을 1년이내로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한 백신'은 아니어서 추후에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에 시달리거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에 처하게 되는 일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한 조치였다. 그만큼 급박한 사태로 번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코로나 팬데믹'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손씻기'와 '마스크'였다는 사실에 새삼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질병' 자체를 없애거나 '죽음'을 막을 순 없다. 또한, 백신이나 항생제, 그리고 치료제 따위로 완벽하게 막아내고 되살리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백신이나 항생제, 치료제가 너무나도 비싸서 '있어도' 사지 못하고 써보질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손씻기'와 '마스크'는 비교적 저렴한 돈으로 엄청난 혜택을 볼 수 있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예방법'이다. 물과 비누, 또는 소독제로 '손'을 씻으면 98%의 감염병을 예방할 수 있고,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는 것만으로도 '호흡기질환'의 99%를 차단할 수 있게 된다. 단돈 천원(1달러 상당)으로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으니 웬만해서는 병원에 갈 일도 없게 해주는 효과적인 '상식'이고 말이다.

 

  현재는 '오미크론'이 대유행을 하면서 마스크조차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니냐? 하는 오해를 불러오고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마스크 착용을 꼼꼼이 하면 거의 대부분 걸리지 않는다. 잠시 방심한 틈에 걸리고, 오랜 방역으로 인한 피로도가 증가한 탓에 느슨해진 틈을 타고 번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확실할 것이다. 하지만 '팬데믹'이 지나고 나면 선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마스크를 '벗을 자유'보다는 마스크를 '쓰는 배려'가 더 많은 인류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팬데믹'이 찾아왔을 땐, 분명해질 것이다. '벗을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이 진짜 '모두를 위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는지, '개인의 이익'을 침해받지 않기 위해 그랬는지 말이다.

 

  대유행의 정점을 지나면 '집단면역'을 형성해 '백신의 효과'와 더불어서 팬데믹을 종식하게 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지금 대유행으로 안타까운 사망자가 늘고 있는 것은 안타깝지만, 종지부를 확실히 찍기 위해서라도 '손씻기'와 '마스크'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하다. 의학의 전설들도 복잡한 치료법과 비싼 치료약을 만들었기에 전설이 된 것은 아니다. 의외로 가장 기초적인 방법에서 힌트를 얻어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더 획기적인 방법을 제안하는 것으로 의학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또다시 '손씻기'를 강조한 제멜바이스의 이야기로 마무리하련다. 의사들에게 '모든 환자와 접촉하기 전, 반드시 손을 씻을 것! 예외는 없음'이라는 문구를 전하고 실천하라고 했을 때, 당대의 권위 있는 의사들은 '권위'를 앞세워 손씻기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고귀한 의사의 손을 '전염의 도구'로 전락시킨 제멜바이스를 의사들의 권위를 추락시킨 원흉이라고 비난해서가 아니었다. 당시의 손씻는 소독제(염소)가 의사들의 손을 쓰라리고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귀찮아서였다. 아직 세균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아 '감염의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손씻기'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던 시절인 탓이었다. 그럼에도 제멜바이스는 '통계'를 이용해서 손씻기를 강조했다. 손씻기를 하지 않은 병동에서는 여전히 산모들이 산욕열로 죽어나갔지만, 손씻기를 한 병동에서는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의사들의 손씻기가 일상화 된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은 바로, '단순함'과 '예방'이다. 진리를 통찰하는 힘은 '단순함'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고, 건강은 아프고 난 뒤에는 절대로 되찾을 수 없기에 미리미리 건강을 챙겨야 하고, 모든 질병은 치료에 앞서 '예방'이 최선임을 말이다. 복잡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잘 모르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복잡한 것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로 '안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의사들이 우주의 기운이 나쁘게 작용해서 산모들이 죽어간다고 했을 때, 제멜바이스는 관찰과 통계로 '손부터 씻으라'고 명령했다. 산모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산욕열'은 '감염'에서 일어나는 질병이니 감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손씻기'라는 예방책을 내놓았다. 단순명쾌한 의학적 발견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 또한,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코로나 팬데믹' 상황속에서 손씻기와 마스크가 최선이라는 진리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다른 팬데믹이 찾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극복할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고 말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코로나'부터 극복하고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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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의 세계사 - 뺏고 싶은 자와 뺏기기 싫은 자의 잔머리 진화사
도미닉 프리스비 지음, 조용빈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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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금을 내면서 좋아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금은 꼭 필요한 것이라 세금은 '아예' 내지 않겠다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면 '적정 수준'의 세금이 존재하지 않을까? 많이 내기는 싫고 원천적으로 내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는 국가경제(GDP 기준)의 10퍼센트 정도가 적당하다고 제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저자는 "그 정도의 세금은 '강제'로 걷어간다고 해도 기분 나쁘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신에 차 있을 정도였다. 정말 그럴까?

 

  역사적으로 사료를 뒤적거려도 '그리스도교의 십일조' 정도의 세금은 언제나 매겨 왔고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큰 불만을 사지 않은 평화로운 시기의 세율이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난한 이들조차 '그 정도'의 세금은 경제적으로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경영'이 위태로운 상황을 초래하게 되어 '증세'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경우에 발생했다고 한다. 이 시점부터 부자들은 더 내기 싫어하고 가난한 이들은 없어서 못 내는 '조세저항'이 세진다고 말이다. 결국,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세금'에 있었다면서 '강제징수'부터 '조세형평성'까지 세금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고, 나라의 운명조차 좌지우지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대목일 것이다. 국가(정부)가 세금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권력의 행방이 좌충우돌하였다는 것은 얼마전에 치뤄진 대한민국의 대선에서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극단적으로 설명할 것도 없이 '문재인 정권'의 교체를 바란 대다수의 국민들은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거론하며, '부동산세'에 대한 반감이 대통령후보의 능력검증보다 더 확실한 결정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만큼 후보와 정당 모두에게 '비호감'으로 치뤄진 적이 없었으며 여러 이슈들을 모조리 덮어버리고 '부동산정책'만 제대로 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도 없었다. 그럼에도 선거가 끝나고나자 '하릴없는' 이슈들을 들먹이며 '부동산정책'에 대한 관심을, 아니 '부동산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희석시키려 드는 적폐언론들의 행동거지는 일찌감치 예상했던 바인지라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결국 그런 '공작'도 1년만 지나면 고스란히 밝혀지고 말 것이다. 과연 새정부가 어떤 '세금폭탄'을 터트리게 되느냐에 따라 여론의 행방이 결정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공정하고 부정부패비리와는 손절하길 바랄 뿐이다.

 

  암튼, 글쓴이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조세정책을 정리하자면, 첫째, 세금을 많이 걷는 정부는 망하고 적게 걷는 정부는 오래 간다. 둘째, 강제로 걷는 세금보다 자발적으로 내게 하는 세금이 더 많이 걷힌다...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세금은 적게 매기고 부족한 세금은 자발적으로 내도록 하되 세금을 많이 내는 이에게 후한 혜택을 충분히 제공하면 국가를 운영하는데 큰 지장이 없으면서도 국가경제가 성장발전하는 양상을 띠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심지어 그런 나라를 '유토피아'로 지칭하면서 말이다. 과연 그럴까?

 

  저자는 그런 유토피아의 예로 고대 아테네와 영국 지배하 홍콩의 조세정책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아테네가 도시국가로 성장발전하고 페르시아의 공격에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로 '강제징수'가 없었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세금은 지배층이나 부자들이 모두 충당했고, 일반 평민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단다. 물론 세금을 많이 낸 만큼 '정치참여'의 기회를 주었고, 일반 평민들도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적게나마 세금을 내며 국가를 운영했다고 한다. 홍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홍콩은 전쟁으로 인해 황폐했지만 이렇다 할 '조세정책'을 내세우는 대신 '자발적인 징세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고, 마치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이라도 하듯 홍콩은 빠르게 경제를 회복했고 홍콩시민들은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렇듯 '부담없는 조세정책'은 자유와 평화의 첫걸음이라는 공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반면에 '강제징수'와 '증세'는 어김없이 나라 안을 혼란스럽게 했고 심할 땐 망국이나 파국으로까지 치달았던 예는 부지기수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과연 '세금'은 내야 하는가? 내지 말아야 하는가? 국가경영의 시작은 '조세'에 있다. 무엇을 하든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 같은 돈을 떼인다는 생각만 해도 극렬히 저항하는 본능(?)은 어찌할 것이냔 말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세금을 내고, 충분할 만큼의 세금을 걷게 되면 아무 문제도 없지만, 내려는 자와 걷으려는 자의 갈등은 쉬이 '뺏기지 않으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의 갈등'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허나 그럴수록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일찍이 영국의 마그나카르타(대헌장)에는 '대표 없는 곳에 과세도 없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세금이 필요한 만큼 '투명하게' 그 이유를 밝히면, 언제든지 얼마만큼의 세금을 낼 용의가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걷은 세금을 어따 쓰는지도 밝히지 않으면서 무작정 세금만 많이 걷으려 하면 극렬한 '조세저항'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 나라의 부동산정책도 그러하다. 복잡할 필요도 없다. '1가구 1주택'을 원칙으로 삼고, 이를 지키면 세금부담을 대폭 낮추고, 반대로 어기면 '세금폭탄'을 매기면 된다. 물론, 이를 두고도 저항하는 부류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임대업'으로 먹고 사는 이들인데, 이들에겐 '재산세'와 '소득세'로 징벌적 과세를 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나라에서 '징벌적 과세'가 웬말이냐 싶지만, 욕심꾸러기에겐 그래도 된다고 본다. 집이 없어 서러운 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을 판인데 '한정된 주택'을 선점한 것으로도 모자라 '신도시 주택'까지 투기로 '가격상승'을 부추긴 원인제공을 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인 '부동산세법'은 더 복잡하고 많은 이유를 품고 있다. 그러나 설명하기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기득권의 이득'만 챙겨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니, 온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른 마당에 '부동산세법'에 대한 간소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암튼, 세금은 꼭 필요하다. 부자에게 쏠린 혜택이 가난한 이들에게도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비용'은 언제나 필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법'에 대한 국민과의 합의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일방적인 과세정책'은 언제나 '조세저항'을 불러왔다. 그런 까닭에 '세금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잘 나가는 나라에는 조세저항 따위는 없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인 까닭이다. 그리고 애써 거둔 세금이라면 꼭 '투명하게' 쓰고 또 써야만 한다. 물론 막상 거둔 세금이 '이쪽'에 써야 하는데 남아서 '저쪽'으로 유용되는 경우도 있고, 갑작스럽게 예상할 수 없는 곳에 급하게 '땡겨서' 써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심성의껏 밝혀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낸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고 세금에 대한 반감을 덜 수 있고, 꼭 필요한 곳에 소중하게 쓰였다는 보람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행방이 '묘연한' 세금이 엉뚱한 '그들'을 위해서만 쓰여서 '그들만의 천국'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더욱더 세금에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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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 - 신대륙 이주와 독립전쟁 미국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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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1776년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역사를 고작해야 250년에 불과하다고 말들 하지만, 지금의 초강대국 미국을 감히 '짧은 역사'만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 짧은 시간에 가장 강력한 나라로 우뚝 선 미국에 대한 경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과연 미국은 어떤 나라길래 이토록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힘쎈 나라가 된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시중에는 미국에 관한 책이 넘쳐난다. 저마다 독특하고 남다른 관점이 담겨 있어서 흥미롭기 그지 없지만, 그 가운데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 시리즈는 단연 돋보였다. 먼저, '우리의 시선'으로 미국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끌렸다. 외국인이 쓴 책들도 많고, 그 책들의 훌륭함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국인의 시선'으로 미국을 서술한 책을 먼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우리만의 시선으로 미국을 이해하고나서야 외국인의 시선으로 미국을 서술한 내용이 제대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겉으로 드러난 미국의 위대함'보다는 '속살 깊이 파헤친 미국의 속사정'을 낱낱이 파고드는 '강준만의 비판적 서술'은 정말 인상 깊었다. 원래 힘 있는 것들은 '뒷담화'를 해줘야 제맛이다..라는 속설을 제대로 증명해낸 강준만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런 까닭에 이 책으로 '미국의 민낯'을 들여다보려는 나의 독서계획에도 딱 들어맞았다.


  이 책이 마음에 꼭 들었던 이유를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미국'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바깥'은 물론이려니와 '미국이 생기기 이전'까지 속속들이 나열하면서 '미국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하였다. 이제 고작 1권을 읽은 탓에 나머지 완결까지 계속 이런 방식을 유지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미국의 손발놀림' 하나하나를 낱낱이 파헤치기 위해서 '미국의 주변국 동향'과 더불어 '미국을 위한 이권개입', '미국에 의한 전세계적 사건사고들'을 살펴보는 것이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사 산책>이지만 마치 <세계사 산책>을 읽은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해서 흡족했다.


  각설하고, 1권에서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부터 '미국의 독립전쟁'까지 서술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신대륙 발견'이 아닌 '구대륙 발견'이라고 고쳐부르며 '콜럼버스의 업적'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 관점으로 당연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이 책은 무려 10년 전에 쓰여져 있는데도 콜럼버스의 오판에서 비롯된 '원주민 학살'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콜럼버스를 뒤따라서 '신대륙'에 탐욕의 손길을 뻗친 스페인의 후발주자들이 벌인 잔학한 짓들도 낱낱이 서술하고 있다. 물론 콜럼버스는 '미국인'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곧잘 드러내고 있는 '미국의 야만성'이 콜럼버스의 후예가 아니고서는 적절히 설명할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닮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할 것이다. 암튼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길'을 찾겠다고 저지른 무모하고 모험적인 행동이 오늘의 미국을 있게 했다는 점에서 미국과 콜럼버스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미국인'들조차 콜럼버스를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다음은 '미국인들의 조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바로 '청교도(퓨리턴)'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내가 가장 궁금한 내용이기도 하다. 바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정착한 이들이 '자신들의 자유'만 보장하고, '원주민'과 '흑인'에겐 제외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제 논에 물대기' 아니냔 말이다. 자신들도 '탄압'을 피해 새로운 땅에 이주했으면 '탄압'을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일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 다음 내용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높은 도덕적 신념이라하더라도 '실익과 실리' 앞에선 언제나 두 번째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까닭에 미국이란 나라는 언제나 '실리'를 챙기면서, 온갖 명분을 내세울 뿐이라는 것도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실리'를 더는 챙길 수 없게 되면 곧바로 '손절'해버리는 습성도 '미국인들의 조상'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그 덕분(?)에 미국에서 '약자'는 언제나 소외되고, 희생을 강요 당하며, 심지어 죽임까지 당해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심각한 까닭이었다. 이토록 심각한 인종차별의 뿌리는 '흑인 노예무역'과 '인디언 사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기 미대륙개척자들에게 흑인과 인디언은 '애매한 존재'였다. 광활한 대륙이 필요로 한 것은 '튼튼한 노동자'였는데, 흑인만큼 적절한 노동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필그림 파더스에게 인디언은 낯선 땅에서 겨울을 날 수 있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준 '생명의 은인'이었었다. 그런데 조금 먹고 살만해진 이주 백인들은 '흑인노동자'를 '흑인노예'로 전락시켰고,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인디언 사냥'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렇게 인디언에게 빼앗은 드넓은 땅을 경작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흑인노예를 사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인디언은 학살 당하고 흑인노예의 비참한 삶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잔인무도해지게 되었다. 오직 '이주 백인들의 실익'을 위해서 말이다.


  이런 와중에 '식민지인'들을 분노케 만드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바로 연이은 전쟁으로 국고를 탕진한 '영국 본토인'들이 '미국 식민지인'들의 의사와는 상관도 없이 '세금'을 매기고 올린 탓이다. 이에 '미국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슬로건을 내세웠고, '영국 본토인들'은 들어주는 척, 대부분의 과세를 없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차 세금'을 대폭 인상하면서 식민지인들을 분노케 했다. 이 때문에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세상을 뒤흔든 총성'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발하며 미국 독립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식민지인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영국은 엄청난 수의 정규군을 파견하며 '13개 식민지'를 공격했지만, 식민지인들은 총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내세웠을 뿐, 변변한 승전보도 없이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은 식민지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민병대'였다. 그렇게 민병대는 영국 정규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승승장구하였고, 속속 워싱턴의 본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한편, 토머스 페인의 <상식>이라는 얇은 책이 식민지인들에게 '독립의 정당성'을 심어주었다. 미국 독립전쟁이 한창인 시기에도 여전히 많은 식민지인들은 '영국이 세금만 깎아준다면 전쟁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냐면 식민지인들도 '영국 국왕폐하의 충실한 신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상식>의 등장은 식민지인들의 생각을 확 뒤바꿔버렸다. 스스로 독립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는 '페인의 설득'이 먹혀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미국의 독립전쟁은 승리로 장식했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독립선언을 바탕으로 미국은 독립국이 되었다.


  허나, 신생국은 혼란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승리를 이끈 주역인 '민병대'는 독립 직후에 해산되었지만, 변변한 이득도 없었고, 심지어 무일푼으로 목숨만 겨우 부지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반면에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부류와 '영국 본토에서 귀족으로 살았던 부류'는 온갖 이득을 다 챙기며 더할나위 없이 부유했고 말이다. 이처럼 부의 불균형으로 인해 불만을 품은 전쟁영웅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바로 '셰이즈의 반란'이다. 비록, 반란은 곧 진압되고 주동자였던 셰이즈는 죽임을 당했지만, 이런 반란에 화들짝 놀란 '중앙정부'는 곧바로 부의 분배와 혜택이 골고루 전해질 수 있도록 대책을 세워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빠르게 조치했다. 하지만 이런 일사분란한 조치에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부류가 있었으니, 바로 '흑인'과 '인디언', 그리고 '여성' 들이 그렇다. 이들이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명명백백하다. 한마디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이들을 사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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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이주윤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한글을 쓰고 읽는 대한민국은 전세계 인류 가운데 가장 '문자학적 축복'을 넘어 사치를 누리고 있다며 전세계 언어학자들이 극찬해 마지 않고 있다. 왜냐면 전세계에 언어를 가진 국가나 민족은 많지만, 그 언어에 딱맞는 '문자'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문자 가운데서도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단 하루만'에 쓰고 읽을 수 있으며, 영특한 사람이라면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대한 문자를 가진 우리 나라인데도 '문법 체계'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라서 웃음거리(?)가 될 지경이라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한글의 원조인 '훈민정음'이 반포된 건 1443년이지만, 이 문자를 우리가 온전히 갈고 닦으며 쓰게 된 것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던 탓이 크다. 창제 당시에는 '중국문자'와 다른 오랑캐 문자를 쓸 수 없다며 천대를 받았고, 누구나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에 지독히 반감을 품은 당시 '기득권층'의 저항에 궁중의 여인들을 비롯한 '소외계층의 문자'로 전락하고 말았던 탓에 제대로 된 '문법체계'를 갖출 기회조차 없었으며, 비로소 주목받게 된 때에는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었기에 '우리 민족'이 쓰는 '우리 문자'조차 제대로 연구할 수 없어서 조악하고 열악한 처지에 놓인 학자들에 의해 '기초문법'이나마 갖추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해방이 된 뒤에 '우리 말'과 '우리 글'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게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혼란스런 해방정국의 여파로 아름다운 우리 글의 문법조차 이러쿵저러쿵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루뭉술하고 억지로 껴맞추게 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이렇게 '국어 문법'은 어렵사리 정리되었지만, 최소한 '맞춤법 통일안'조차 일사분란하고 일맥상통한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일상 생활'에서 헷갈리게 쓰이고 있는 실정이며, 심지어 '맞춤법'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조차 <국어사전>을 들춰보지 않으면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으며, 그래도 헷갈리는 점은 '국립국어원'에 문의를 해본 뒤에야 겨우 쓰게 되는 경우가 적잖다. 더욱 큰 문제는 '국립국어원'조차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거나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어색한 똥고집을 부리며 꼭 '그렇게' 써야만 한다고 장광설을 내놓는 경우가 허다한 문제점이다.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이것도 저것도 모두 '표준어'로 공표하는 통에 수많은 예외조항만 만들어 놓는 '누더기'가 된 지 정말 오래 되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이런 혼란스럽고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글쓴이는 '최소한의 맞춤법'조차 제대로 쓰지 않는 오빠는 정말 정떨어진다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물론 완전 동의한다. '신조어'깜도 되지 않는 '엉터리'로 소듕한 한글을 더럽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정말 많기에 글쓴이의 분노(?)에 적극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난, 사소한 문자나 간단한 톡을 쓸 때에도 '맞춤법'에 맞게 쓰고, '띄어 쓰기'에 철저하려 노력하며, '전하는 내용'에 어긋나지 않는 '표준어 사용'을 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철저한 노력을 하게 된 까닭도 첫사랑의 영향이 크다. 첫사랑에게 최대한 귀여움을 어필하려고 '혀 짧은 듯'한 문자를 보냈다가 '맞춤법'을 지키라고 핀잔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 첫사랑은 '출판사 편집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방 맞은 뒤부터는 열심히 '맞춤법 공부'를 했고, 그렇게 난 '논술쌤'이 되었다. 물론 난 '미혼'이다. 그런 비슷한 경험(?) 때문이었던 걸까?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어버렸고, 급기야 글쓴이에게 '공개구혼'이라도 하고픈 심정이 들었지만, 참고 있다. 혹시라도 그 사이에 솔로가 아닐까봐서 말이다. 나 말고 그녀가 말이다.

 

  암튼, 맞춤법을 지키면 '섹시'하다는 글쓴이의 주장에 당당히 한 표를 던진다. 맞춤법을 지킨 글을 읽으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실수를 발견하면 실망감도 커지는...글쓴이와 비슷한 경험이 정말로 많아서 '공감'으로 충만한 책을 읽는 유쾌한 독서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 보았다. 맞춤법을 '이토록' 지키기 어렵다면 좀더 쉬운 맞춤법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이를 테면, 있으나 마나한 '사이시옷' 같은 건 아예 없애버리고, '띄어 쓰기' 규정은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한 뒤에 '뜻'만 적확하게 전할 수 있다면 모두 맞게 바꾸는 것 말이다. 사실 '사이시옷'이라는 게 얼마나 어이가 없냐면, '장맛비[장마삐/장맏삐]'처럼 발음규정도 확실히 규정하지 못하고, 뜻조차 '장마 때 오는 비'인지 '장맛 나는 비'인지 헷갈린 예가 정말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초점[초쩜/촛쩜]'처럼 '한자어'인 경우에는 무조건 빼라는데, 애초부터 예외규정을 둘 요량이면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장면' 같은 경우처럼 오래도록 '자장면'만 옳고 '짜장면'은 틀렸다고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혼용'해서 쓰고 있으니 둘다 표준어로 허용해준 사례가 많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의 권고사항은 애초부터 듣지 않고 박박 우기면 해결될 일이라는 해석까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와 '허용'이 남발되면 혼란이 가중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허나 언어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만듦-쓰임-죽음'의 과정을 겪게 마련이고, 그로 인해 '문법체계' 또한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문법체계를 누더기처럼 깁고, 이해하기 어렵게 장황한 부연설명을 늘어놓은 것들을 싹 골라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결국 '문법'도 많이 쓰이고, 자주 쓰여야 사랑받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문법 체계'에 대한 접근이 쉽고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들도 어렵지 않게 접근해서 모두가 널리 알맞게 쓰는 한글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문법책>과 <맞춤법>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야만 할 것이다. 그동안에는 읽기만 해도 졸음이 쏟아지는 딱딱한 책이 많았지만, 이 책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처럼 쉽고 재미난 책이 널리 사랑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한글사랑을 더욱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관심'이라는 사실도 함께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 책을 '불알이며' 읽으면 정말 누구나 '맞춤법 천재'가 되고 '뇌섹남/뇌섹녀'가 되는 특급열차를 타게 될 것이다. 더는 '맞춤법'을 초등학생 때만 배우는 유치한 공부라고 매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작 어른들은 절대로 '받아쓰기 만점'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점을 받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우리 맞춤법'이 어렵기 때문인 것이고, '맞춤법'의 눈높이를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우리가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레 우리 모두가 수준 높은 '교양인'이 된다는...뭔가 했던 말 또 한 느낌이지만.. 암튼, 맞춤법은 관심을 가져주는 만큼 재밌고, 지켜주는 것만큼 섹시하다는 글쓴이의 말씀에 공감하는 바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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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우먼 : 진실의 영혼 시공그래픽노블
알렉스 로스.알렉스 로스 지음, 이규원 옮김 / 시공사(만화)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원더우먼은 '여성 히어로'의 대명사다. 놀랄 만큼 강한 힘에 날아오는 총알도 막을 수 있는 팔찌, 그리고 묶이면 진실만을 토해내는 밧줄이 그녀의 능력이다. 하지만 원더우먼의 힘이 이것 뿐일까? 물론 아니다. 그녀의 원천적인 힘은 '아름다움'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조화를 이루며 불의에 당당히 맞서는 정의로움이 그녀의 진짜 힘이다. 바로 원더우먼이 강력한 까닭은 그녀의 겉모습이 아닌 진정으로 아름답고 올곧은 마음가짐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원더우먼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묻히기 십상이다. '남자들이 지배한 세상'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고작 '섹시한 외모'에서 찾으려는...심지어 '성적 도구', 그 이상으로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더러운 속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남자보다) 잘난 여성'은 비난과 질타의 대상이 되곤 한다. 비단 남자만의 어리석음은 아니다. 같은 여성끼리도 '자유와 평화, 정의, 그리고 박애에 앞장서는 여성'에게 신랄한 비난을 퍼붓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무지한 남성과 '똑같이' 그녀의 섹시한 외모에 초점을 두어 비난하기 일쑤다.

 

  만화속에서 '원더우먼'은 아마존 부족의 공주로 재탄생했다. 아마존은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사회'를 일컫는 말인데, 전설에 전해지기로는 '남성들에게 핍박 받은 여성들'이 무리를 이뤄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따로 떨어져 은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여성들만이 존재하는 사회지만 '아마존 전사'로 유명세를 떨쳤으며, 아마존 전사들은 기존의 남성 전사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아마존 전사는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점점 잊혀져 갔다.

 

  그런데 '그 땅'에서 다이애나(원더우먼의 본명)가 태어났다. 아니 만들어졌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여성만의 사회에서 '임신과 출산'으로 태어난 생명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아프로디테와 아테나 여신'에 의해 흙에서 빚어져 태어난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에겐 '정의를 지킬 원천적인 힘'을 이어 받아서 말이다. 그렇게 태어난 다이애나는 숙명적으로 온 세상의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수호하려고 아름다운 고향을 떠나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나가려 한다. 그리고 그속에서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아낌없이 쏟는다.

 

  그러나 세상은 '원더우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잘못을 저지른 남성들은 원더우먼 앞에서 준엄한 꾸짖음을 받으면서도 흘끔흘끔 '원더우먼의 몸매'를 감상할 뿐이고, 각성하지 못한 여성들은 '원더우먼의 구원'을 받으면서도 '자신(여성)과 다른 강한 힘'에 또 다른 두려움을 느낄 뿐이다. 그럴수록 원더우먼은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뽐내며 온세상의 나쁜 점들을 하나씩 고쳐나가려 한다. 그렇게 해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 줄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돌아온 시선을 따가울 뿐이다. 이미 '남성의 지배'에 길들여진(!) 여성들은 원더우먼을 이해하지 못했고, '남성의 지배'에 익숙한 남자들은 쳐맞으면서도 '섹시한 몸매'만 감상할 뿐이다. 평범한 여성과는 '다른' 색다른 매력을 가진 원더우먼조차 '언젠가는(!)' 남성에게 순종하는 여성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인간일 뿐인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남성이 지배하고 여성이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정말 그런가? 절대 그렇지 않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인간이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한 '최적의 시스템'일 뿐이다. 인간은 오직 남자만으로 이루어져 살아남을 수 없고, 오직 여성으로만으로 무리지어 번성할 수 없는 법이다. 반드시 양성이 어우러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잘 살아갈 수 있다. 이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개념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차별의 잣대'로 삼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십분 이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는 대부분의 사회는 남자를 우위에 놓고 여성을 그 밑에 놓아 '남자가 군림하는 사회'를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사회'라고 기준 삼고 있다. 행여 그 반대가 되면 '비정상'이라 낙인 찍고 애써 바로 잡으려 고집부리곤 한다. 이를 증명할 예는 얼마든지 많다. 전세계적으로 '여왕'의 존재는 부정 당하기 일쑤고,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을 부각시키곤 해서 '또 다른 여왕'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기 일쑤며, 수많은 '(남성)왕' 가운데 무능력하거나 못된 짓을 일삼았으면 '폭군'이라고 명명하며 '불운의 시대'가 잠시 스쳐지나갔다고 어물쩍 넘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탐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느리는 것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취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문제점은 고쳐야 하지 않을까. 그런 까닭에 '페미니즘'은 남녀를 불문하고 주목할 만 하다. 아, 물론 요새 청년들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혐남'과 '꼴페미' 따위의 극단적인 페미니즘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니, 나는 '여성운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개인적으로 어설프게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발언했다가 '남자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받은 경험 때문이다. 물론 충분히 이해한다. 남자인 나는, 어두운 밤거리를 걸으면서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속으로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작은 배려'로 엘리베이터를 탈 때, 여성과는 웬만해선 같이 타지 않으려 한다. 여성운동가인 나를 '치한 취급'해도 탓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말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정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억울한 남성들은 말한다. 이는 명백한 '역차별'이라고 말이다. 여성들이 무차별적으로 남성을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이 정상은 아니라고 말이다. 불편한 점은 십분 이해한다. 허나 '남성지배사회'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그런 역차별쯤은 가볍게 능가할 것이다. 여성들이 죄없는 남성을 '변태, 치한, 범죄자' 취급을 해서 불편하다고? 수많은 남성들이 '죄없는 여성들'에게 가한 폭력과 억압, 그리고 차별 등등은 어쩌구 말이다. 한껏 예쁘게 꾸미고 나갔는데 기분 잡치고 곧장 집으로 숨고만 싶은 '여성만의 불편함'을 이해하는 남성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그런 불만이 있다면 속시원히 토로하고, 안 되면 경찰에 신고하고, 법적인 도움을 받으면 될 일, 아니냐고? 귀가하는 여성의 뒤를 쫓아 '무단침입'한 성범죄자조차 '여자가 먼저 자신을 유혹했다'고 증언하면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사회에서 할 소리는 아니다.

 

  원더우먼 이야기를 하다가 샛길로 빠지긴 했지만, 암튼, 대통령 당선인께서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마당에 고민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몇 자 끄적였다. 근본적으론 '양성평등'이 완벽히 이루어져서 '여가부' 따위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진정한 양성평등은 '차이'는 인정하고 '차별'은 없애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배려'다.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영웅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잘난 여성(원더우먼)의 등장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잘난 남성이 해결해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고쳐야 할 문제점은 바로 '우리의 시선'이다. 아직도 '원더우먼의 몸매'만 감상할 요량이라면 '양성평등'은 점점 멀어질 것이다. 진정한 원더우먼이 '수많은 남성 영웅들' 틈바구니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을 때 '그녀의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지지해줄 작은 배려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시선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되 겉모습이 아닌 착한 마음가짐과 올곧은 가치관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하겠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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