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품은 수학, 수학을 품은 역사 - 인류의 역사에 스며든 수학적 통찰의 힘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4
김민형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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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수학시간'에 과학과 역사를 만날 수 없는 것일까? 7차 교육과정(1997년) 이후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교과통합'이고, 수학교과에서는 '스토리텔링'과 '스팀수학'으로 큰 변화를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학시간에 배우는 것은 '수학문제'를 풀고, 또 푸는 '무한반복'일 뿐이다. 다시 말해, '단순연산문제'에서 실생활과 밀접한 익숙한 문제에 이야기를 입혀 놓고, 이를 '서술형답안'으로 작성하는 방식으로 바꿔 놓았을 뿐, 여전히 수학시간에는 '문제풀이'만 열심이란 말이다.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하긴, 수학문제풀이만 하기에도 벅찬 시간이긴 하다. 학교수업시간으로도 모자라서 학원으로 달려가고, 밤늦도록 '문제풀이'만 하다가 집에 가서도 '문제풀이'를 숙제로 반복하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시간이 모자라서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부족한 학습을 채우고, 예습, 복습을 하는 등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만에 하나 '여기'에 적응을 하지 못하면 '수포자'로 낙인을 찍히며 평생 수학과 담을 쌓고 살아야만 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곤 한다. 정말로 수학은 그토록 어려운 학문이란 말인가?

 

  솔직히 말해, 세상 어디에도 '학문의 길'은 쉬운 법이 없다. 내노라하는 석박사들조차 '학문의 길'은 어렵다고들 한다. 자신들이 그 분야의 전문가이면서도 늘 부족하다고 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겸손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학문은 늘 높고 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학문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정진하는 까닭은 재미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학문의 재미'를 학생들에게도 전해주면 좋지 않을까? 깊고 깊은 수학의 세계에 푹 빠져야만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아니라 살짝 맛만 보여주어도 '흥미로움'이 절로 느껴지는 그런 것 말이다.

 

  우리가 '스포츠의 재미'에 푹빠져서 열광하는 것이 늘 '프로의 세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때론, 아마추어 경기가 흥미진진해서 볼 만한 경우도 많다. 심지어 '경기의 규칙' 따위는 몰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감출 수 없는 것이 스포츠의 진면목이지 않느냔 말이다. 그렇게 '관심'이 생겨서 더 많은 경기를 찾아보게 되고, '경기 규칙'도 익히게 되어 더욱 흥미진진해지게 되며, 프로선수들의 명경기, 명장면을 직관하면서 짜릿함을 느낄 수 있게 되면서, 스포츠의 세계에 점점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다. 수학공부를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해보려 한다. 학창시절에는 지루하기만 했던 '역사공부'가 어른이 되니 갑자기 재밌어지는 경우를 겪기도 한다. 이는 머리가 커지면서(경험이 쌓이면서) '안목'이 늘어나며 '보이는 것'들이 많아져서 그런 경우가 많다. 학창시절에는 경험이 미천한 탓에 무작정 암기해야만 했던 '역사적 사건들'이 어른이 되니, 매우 중요한 '역사적 순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뒤늦게 역사공부 삼매경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참 많다. 마찬가지로 학창시절에는 그닥 중요하다고 생각지 못했는데, '과학의 발전'이 우리 일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어마무시하다는 것을 깨닫고 '국가경쟁력'이 과학의 힘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과학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과학상식을 깨우치려 열심히 늦깍이 학생들이 참 많은 요즘이다. 대한민국이 우주로켓(누리호) 발사에 성공하고, 달탐사(다누리호) 우주선을 직접 만들어 쏘아보내는 광경을 보면서 느끼는 짜릿함을 학창시절엔 모르다가 어른이 되어 자긍심으로 다가오게 되는 경험을 하면 묘한 느낌을 겪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작 수학공부의 필요성을 느껴본 적은 있는가?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되지 미적분까지 어렵게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만 들지는 않는가? 그런데도 왜 우리는 학창시절의 절반 이상을 '수학공부'하는데 써야만 하는가..하고 억울해하는 어른들이 태반일 것이다. 여전히 '문제풀이' 위주의 수업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문제풀이' 이외에 다른 수업을 받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수학이 중요한 과목이라는 것은 알아도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쉽사리 공감하기 힘들 것이 틀림없다.

 

  서론이 장황했다. 이제부터 이 책 <역사를 품은 수학, 수학을 품은 역사>에 담긴 이야기를 하련다. 이 책은 '수학의 재미와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역사책이다. '수학의 역사'라고 하니 제목부터 지겨워지는 것 같지만, 막상 읽어보면,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로 진행되는 까닭에 흥미롭기 그지 없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와 고대 로마의 아르키메데스의 일상으로 시작해서, 갈릴레이, 케플러가 펼쳐낸 우주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바로 '수학'이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으며, 우주의 신비를 품고 있는 과학을 이해하는 도구가 바로, '수학'이라는 사실을 통해 '과학의 혁명'이 곧, '수학의 혁명'이었다는 진실을 새삼스레 깨우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며 '양자역학'을 풀어내는 핵심, 또한, '수학'에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하며 수학이라는 학문이 가지고 있는 다채로운 활약상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고대의 수학자들이 쓴 '시'를 읽으며, 후대의 학자들이 얼마나 많은 영감을 얻게 되었으며, 그를 통해서 인류에게 보탬이 되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는지 알게 되다면 '수학의 필요성'을 넘어 '수학의 중요성'까지 단박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수학시간'에 이런 것들을 맛볼 수가 없다. 문제풀이에 매몰된 학생들은 '시'를 통해 수학을 맛볼 수도 없고, '과학'을 통해 수학의 묘미를 깨달을 수도 없으며, '우주의 신비'가 오로지 수학의 발달에 의해서만 풀릴 수 있었다는 진리조차 알지 못한다. 그저 어제도 풀고, 오늘도 풀고, 내일도 풀기만 하는 지겨운 수학을 할 뿐이다. 이젠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기왕 '통합교과'로 교육과정이 바뀌고, 문이과 통합까지 한 마당에, 수학문제만 고집스레 풀려들지 말고 '수학이야기'를 나누며 진정한 '수학의 세계'로 재미나게 여행해보면 안 될까? 먼저, 이 책으로 살짝 맛 본 뒤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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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 30년사 - 버블에서 아베노믹스까지
얀베 유키오 지음, 홍채훈 옮김 / 에이지21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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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지난 30년사'를 살펴보는 두 번째 책으로 선정해보았다. 첫 번째 책이 정치, 경제 등 '일본의 사회문화 전반'을 다뤘다면, 이번 책은 90년대이후 일본 경제의 30년사를 중점적으로 다룬 책이다. 흔히, 일본의 경제 현주소를 '잃어버린 30년'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30년간 일본정부는 일본경제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기사회생'을 꿈꾸며 '개혁을 통한 발전'을 약속했지만,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결과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소소한 '회복'은 있었을지 몰라도 확실한 '반등'은 없었다. 이대로 일본경제는 침몰하는가?

 

  일본 경제를 바라보는 한국의 시선은 언제나 두 갈래다. 이웃나라가 경제적으로 흥하는 것이 바람직할 건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폭망하는 것이 나을 것인가? 그렇다면 흥했을 때 우리가 취할 자세는 무엇이고, 그 반대일 경우에 우리가 반면교사로 얻을 것은 무엇이냐? 하는 물음을 주로 묻곤 한다. 그리고 한결같이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경제교류'는 연관짓기 꺼리는 쪽을 전제로 깔아두는 편이다. 그래야 대한민국에 이득이라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과연, 정말 그럴까? 일본도 그렇게 생각할까? 다시 말해, 일본도 대한민국이 가난하지 않고 선진국으로 발전해야 일본에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천만에! 일본은 지금도 대한민국을 '일본의 식민지'쯤으로 여기고 자국의 2등국민 취급하는 야만국가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표가 일본보다 한국이 앞서고 있는 지금도 "일본은 한국의 형님뻘이다"라는 망발을 하며, 국제적 외교결례를 일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일본을 곁에 두고서 '반면교사'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겸손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무례한 일본에게는 따끔한 일침이 합당하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경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침을 가할 땐 가하더라도, 왜 일본경제가 추락하고 있는지, 내리막길을 무한질주하고 일본에 어떤 방식으로 일침을 가해야 효과적일지 연구해봄직한 것이다. 이 책은 일본의 경제학자가 분석한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일본경제의 현주소'를 파악한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본의 경제가 침몰하기 시작한 90년대는 '주가와 땅값의 거품 꺼짐현상(버블 붕괴)'가 주된 원인이었고, 2000년대는 '경제회생을 위한 구조개혁의 실패'가 원인이었으며, 10년대에는 '아베노믹스의 무능한 대응'이 일본의 경제회생을 가로막은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그리고 이런 '개혁의 원동력'이 사라지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해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일본, 그 자체에 경제침몰의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전쟁 이후, 일본경제는 어떻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나? 80년대 일본경제가 미국에 이어 '경제대국 2위'에 오를 수 있었던 중요 원인은 '가파른 주가상승'과 '더 가파른 땅값 상승' 덕분이었다. 시쳇말로 '도쿄의 땅'을 다 팔면, 그 돈으로 '미국의 주'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다는 우스개소리가 통하던 시절이었단 말이다. 때마침 미국 하버드 대학교수인 '에즈라 보겔'이 쓴 책 하나가 일본의 자존심을 더욱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일본은 넘버원(Japen as Number one)>(1979)이란 책이다. 그러나 '거품 꺼짐현상'이 지속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이런 자부심만 가득차 있던 일본은 '내리막길'을 면치 못하면서 '일본은 괜찮아'라는 심정으로 묵묵히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일본의 경제정책은 연이어 '헛발질'을 해댄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고이즈미 내각'은 '구조개혁 카드'를 내걸고, 일본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전면적으로 실시했지만, 여지없이 참패를 면치 못했다. '신자유주의 경제'란 '수정자본주의'를 말하는데, 90년대 이후, 공산주의 경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경제가 승리를 거둔 시점부터 '경쟁상대'를 잃은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수정보완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내용이 골자다. 하지만 이때부터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복지정책' 등 사회보장시스템이 크게 후퇴하고,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하는 등 세계적으로 경제가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경제'를 도입하겠다는 일본의 정책이 일본 서민들의 삶을 크게 후퇴시켜서 '내수 성장'이 원동력을 잃고,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권당이던 '자민당'이 선거에서 패배하고, '민주당의 약진'이 성공하면서, '경제개혁의 바람'이 새롭게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9~2012년, 사이의 잠깜이었다. 민주당 정권은 큰 기대와 함께 탄생했지만, 연어이 터지는 부정부패사건으로 국민의 신뢰를 크게 잃더니, '소득세(부가가치세) 인상'으로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어차피 '소득세 인상'은 불가피했다. 경제회생에는 큰 돈이 드는 정책이 시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세금'은 꼭 필요했지만, 가뜩이나 곱지 않은 내각이 세금 인상을 시도하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부가가치세'라는 것이 부자보다는 서민에게 더 많은 부담을 주기 때문에 '조세저항'은 거세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민주당은 자멸하고, '아베 노믹스'가 찾아왔다. 아베 정권이 핵심적으로 내세운 경제정책은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자'였다. 이를 위해 '법인세 인하' 등 대표적인 '부자감세 정책'을 뻔뻔스럽게 전면에 내놓으며, 직장인들의 월급은 '임금 동결'시키며 무려 30년 전과 '동일한 임금'을 받게 되었고,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월급쟁이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일본의 경제가 성장하기라도 했으면 덜 욕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베 노믹스'는 환장할 만큼 대실패했다. 이 책이 일본 현지에서 2019년에 출간되었으니 '코로나 이전'의 데이터만을 참고했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아베 수상은 대한민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시키며, 수출금지국가로 선정해 일본경제를 더욱 추락하게 만들었으며, 판데믹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베 노믹스'를 그대로 전승한 후임 내각의 헛발질도 여전한 형국이다.

 

  현재의 일본경제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냄비 속의 개구리 신세'일 것이다. 펄펄 끓는 물에 개구리를 '첨가'하면 살아있는 개구리는 펄쩍 뛰어 '위기'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겠지만, 서서히 끓어오르는 물속에서 개구리는 평온하게 '온천욕'을 즐기며 '아직은 괜찮아'를 외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일본경제의 위기는 '일본은 넘버원'이라는 과거의 영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국민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이 책은 비판한다. 경제정책에서 연이은 헛발질을 계속 하는 '무능한 내각'에 일침을 놓치 않는 국민들의 수준 이하의 국민의식이 일본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이다.

 

  이런 일본경제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있다면, 단 하나'다. 바로 '무능한 정권'에게 표를 몰아주는 교양없고 몰상식한 국민들에게 각성을 주는 것이다. 대통령 한 명 잘못 뽑았다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무능한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몰상식한 국민이 깨어나지 못하면, 나라는 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책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은 분명하다. 일본경제 침몰을 보면서 대한민국 경제정책에 참고할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일본경제정책을 참고 삼아 뭘 시도하는 위정자가 있다면 경계할 일이다. 일본경제 침몰의 가장 원인이 '무능한 내각'을 지지하는 '몰지각한 일본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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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0 - 강화도조약 Ominous 본격 한중일 세계사 10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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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명치유신'이후 내부혼란이 가중된다. 근대화라는 가닥은 잡았으나 권력에서 밀려난 '사무라이 집단들'이 전국에서 들고 일어서는 형국이고, 우여곡절 끝에 '서구식 신정부'가 들어섰는데도 여전히 서양열강에는 미치지 못하고, 전통적인 동양국가들 사이에서도 위세를 떨치지 못하는 것에 자존심이 점점 상하고 있던 것이다. 특히, 청나라와 조선과의 관계 계선에 크게 공을 들이지만 '그만큼의 성과'를 아직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신정부의 위신'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럴수록 외교에 박차를 가해 '달라진 위상'을 보이며 '국제관계'에 있어서 확실히 달라졌음을 만천하에 알리는데 노력하려 했겠으나, 19세기 제국주의시절이었던 탓에, 국제관계는 오로지 '힘의 과시'로만 성립될 수 있었고, 힘을 과시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오직 전쟁'밖에 없었던 터라, 일본, 아니 일본제국도 그런 절차를 밟게 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먼저 힘을 뽐내려 했던 곳이 지금의 '대만'이다.

 

  당시, 대만은 청나라의 섬이었으나 대륙 안에서 벌어지는 일만으로도 벅찼던 청왕조는 빈약한 해군을 앞세워 섬을 정복할 여력이 없었던 탓에 그저 '복속'한 섬으로만 치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는 '파이완족'이라는 원주민들이 대만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산맥을 경계로 삼아 그 동쪽에 살면서, 서쪽 평야지대로 이주해온 한족과 별개로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류큐(유구국, 현재의 오키나와)의 주민이 태풍에 떠밀려 표류했다가 파이완족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의 신정부가 이를 트집 잡아 청왕조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허나 청왕조는 애초에 '류큐인'이 일본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류큐가 아닌 일본에게 손해배상이 할 것이 없다고 나왔고, 일본 신정부는 류큐는 엄연히 일본의 섬이니 '일본인'이라는 억지주장을 하며 청에게 손해배상을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류큐국의 대표는 나설 수 없는 상황에 처해서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이를 틈타 일본이 '파이완족'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청왕조는 '관할구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방조를 하니, 일본의 첫 해외원정인 '대만침공'이 되겠다. 어쨌든, 전쟁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일본군의 사상자가 너무 커지자 자진철수를 결정하는데, 그냥 철수를 할 수는 없고, 청에게 '전쟁배상금'을 요구했지만, 전쟁에 들인비용에 터무니없는 적은 액수를 받고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투중엔 별다른 피해 없이 완승을 거뒀지만, 주둔을 하면서 '풍토병(말라리아)'에 걸려 사상자가 속출하니 급히 탈주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일본은 자국 국민들에게 '전쟁승리 소식'만 대대적으로 홍보할 뿐, 그밖에 '불리한 소식'은 은폐하면서 일본제국의 첫 단추는 잘못 끼우게 된 셈이다.

 

  이렇듯, 안팎의 불만을 잠재울 마땅한 카드가 딱히 없던 일제는 '정한론'이라는 카드를 스물스물 꺼내들기 시작한다. 마침, 조선이 일본이 보낸 국서에 적힌 '일본국의 황제 직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과 전통적인 양국관계와 사뭇 다른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일본관원의 무례한 점을 꼬집으며 조선의 관원이 일본을 향해 '무법지국'과 다를 바 없다고 발언한 것을 꼬투리 삼아 '정한론의 정당함'을 표방하니, 이른바 '운요호 사건'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이란 서막이 오른 것이다.

 

  애초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부산 왜관'을 열어 무역을 하고 있었더랬다. 그리고 일본의 국서는 곧바로 조선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대마도주'를 거쳐서 대신 전하게 되어 있었는데, 새로운 정부를 설립한 일본은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며 '직접' 통교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조선은 이전과는 다른 태도에 '형식적인 문제'를 내세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외교관계를 이어나가자고 요구한 것이다. 일본은 바로 '이런 점'을 꼬투리 삼아 조선국이 대일본국에게 무례하다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애초에 '부산 왜관'에 머무는 일본인은 '왜관밖'으로 한발짝도 나설 수 없게 되었으나, 그 경계를 함부로 넘나들지를 않나, 칼을 찬 무사들이 조선인들에게 위협을 가하질 않나, 신식군대를 태운 군함을 부산항에 보내 위협을 가하질 않나...말로 다 할 수 없는 '무례한 짓'을 일삼았기에 '무법지국'이라고 에둘러 훈계를 한 셈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 '힘의 과시'를 하겠다며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니, 식수를 얻으려 했다는 핑계를 둘러대며 조선군의 경고사격을 빌미로 강화도 초지진을 선제공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강화도 남쪽의 영종진에 군대를 상륙시켜 주민들을 몰살시키는 만행을 일삼는다. 이를 시작으로 '강화도 회담'을 열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였고, 조선의 관원이 '사건의 진상'을 조목조목 따지며 일본의 무례함을 지적하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다 '전쟁 아니면 조약'을 요구하며 깽판을 놓았다. 이미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오랜 왕래를 하고 있는데 따로 무슨 조약이 필요하냐는 물음에 일본은 답한다. 서양인들이 말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근대식 조약'이 새로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맺게 되니,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식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이었다. 조선이 어리석었기 때문이었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조선은 전통적인 양국 관계에서 통용되었던 내용을 '조약문'을 작성하고 싸인하는 것으로만 알았지만, 그 '조약문'에 함정이 있다는 것은 미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과 일본, 양국의 관계는 선린우호 관계로 맺어진 전통적 가치를 서로 존중해온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에 뒷통수를 치고 '사기로 가득한 조약문서'를 내밀며 일방적인 억지를 주장할 빌미로 삼은 것은, 그간 일본이 서양의 힘에 굴복해 당해온 수법을 고스란히 조선에 되돌려 이득을 보려한 못된 심보였던 것이다.

 

  조선이 어쩌다 이런 통수에 당하게 된 것일까? 먼저, 국제정세에 눈을 감고 외면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개항을 주장하며 일찌감치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화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면 적어도 이런 '불평등조약'을 맺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대원군의 몫'이 가장 클 것이다. 대원군은 애초에 '자신의 몫'이 아니던 권력을 독차지하며 개혁을 시행하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내부용'이었을 뿐, '국외용'으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둔 것이 없었다. 게다가 고종이 성장하여 자연스럽게 '친정'을 하게끔 도와주어야 마땅했는데도, 권력의 욕심이 앞서 '아들'과 권력다툼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 '며느리'와의 갈등으로 번지고 말았으니, 나쁜 아빠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말았다. 이런 내부갈등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판국에 '나쁜 나라'인 일본이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을 착착 준비해 야욕을 드러냈으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전개되고 만 것이다.

 

  암튼, 조일수호조규 이후, 조선은 일본에 '수신사'를 보내 일본의 변화를 직접 눈으로 살펴보고자 했으나 '미흡한 준비'와 '일본의 꼼수'에 넘어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끝마치고 돌아오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이런 실수를 만회할 겨를도 없이 '대원군의 역습'이 기다리고 있으니...다다음권에 계속될 것이다. 커밍순...아니, '인커밍' 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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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9 - 블러디 선샤인 신미양요 본격 한중일 세계사 9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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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0년대를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본다는 것은 참 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은 신정부에 의해 '근대화(명치유신)'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중국은 어찌어찌 '북양함대'를 추진하며 군제를 서양식으로 개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한국..아니, 조선은 대원군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관계로 '개항'이 아닌 '쇄국'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이로써 동북아시아 삼국은 서로를 향해 잠시 숨을 돌릴 틈을 각자 갖게 되지만, 속내는 그러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서양에서는 '보불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북독일연방(프로이센)'이라는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려는 형국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독일민족 통일이라는 명분에 더욱 불을 붙이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바이에른'을 비롯한 '남독일 4개국'이었지만, 오스트리아가 패배함으로써 힘의 균형이 프로이센에게 기울어진 상황에서 '흡수통일' 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를 가로막고 '통일 독일'을 막아선 나라가 프랑스였다. 왜냐면 '남독일 지역'은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매우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빌헬름 1세(독일 황제)가 스페인의 왕위 계승을 막아선 전례가 있었기에 '프로이센' 처지에서는 '간섭'으로 볼 수밖에 없어서 결코 곱게 볼 수 없는 나라였다. 그런 프랑스가 '남독일 4개국'과의 통일전선을 막아서니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선택한다. 시작은 치열한 '언론전'이었지만, 언론끼리의 자존심 싸움은 두 국가의 국민들의 감정을 서로 상하게 하였고, 끝내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전쟁, 또는 프프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의 시작은 프랑스가 우세를 점하며 시작하였으나, 보급물자는 프로이센이 훨씬 더 빠르게 조달할 수 있었고, 화력의 우세함이나 전술운영의 우월함에서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전쟁의 승리는 '프로이센'에게 돌아갔고, 파리의 개선문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행진을 하고 돌아가는 등 프랑스로서는 패배의 치욕을 씻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유대인)에 의해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이에 대노한 흥선대원군은 '통상거부(쇄국)정책'을 더욱 굳게 밀어붙이게 된다. 여기에 미국의 함대가 '제너럴셔먼호'의 행방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강화도로 쳐들어오게 되는데, 바로 '신미양요'다. 프랑스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을 공격한 미함대는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만 애초에 목적으로 삼은 힘에 의한 '수호통상조약'은 맺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마는데, 어찌 되었든 조선에 또 한 번의 승리를 안겨주게 되었다. 승리의 비결은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인해 태평양 건너의 전쟁에 충분한 힘을 보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고, 대원군시대의 외교가 '근시안적'이었고,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 세력의 안이한 태도로 인한 것이었으니,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조선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진 못했다.


  하지만 눈여겨 볼 대목은 있다. 조선 후기 '북학파의 후손들'이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나름의 방법대로 서양과 (조만간 일본과도) 손을 잡고 '조선의 개화(근대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북학파의 계승자'들이 어찌어찌 '매국노'가 되어버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점을 다시금 살펴볼 일이다. 이들은 시대를 앞선 지식인들이기도 했으나 '권력'과는 인연이 없던 관계로 늘 '아웃사이더'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가정책으로 제대로 시행하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외세'만 끌어들이는 결과만 내놓았으니, 중앙정부는 정부대로, 지식인들은 지식인들대로 '따로따로' 조선의 안위와 안녕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백성은 고달파지기만 했고 말이다. 과연, 조선의 백성을 구할 위인은 없었단 말인가?


  다시, 일본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명치시절에 '이와쿠라 사절단'이 활약을 펼쳤더랬다. 이들은 서구열강을 두루두루 둘러보고 '선진제도와 문물'을 일본의 신정부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지 중차대한 임무를 떠안고 세계유람을 떠났더랬다. 그 결과, 새로운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했다. 얼추 정리해보면, 미국에서는 '행정제도'를, 영국에서 '정치제도'를, 프랑스에서 '사법제도'를, 그리고 독일에서는 '군사제도'를 받아들여, 신일본의 멋진 시작을 뽐내려 했으나, 그보다는 일본내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소요로 인해 시작부터 삐그덕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 '서양식 제도'를 도입해 근대화 국가로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일본의 민중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봉건시대의 사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폐번치현'과 '사민평등'을 시작했지만, 갑자기 하루 아침에 시골촌놈이 서울깍쟁이로 바뀔 수 없는 것처럼 일본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는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하루도 편할 날이 없도록 훽훽 돌변하는 '동북아 3국'의 바쁜 일상은 다음 권에 계속된다. 커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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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8 - 막부의 멸망과 무진전쟁 본격 한중일 세계사 8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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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장황한 서론을 끝내고 '일본의 부흥'을 알리는 명치유신(明治維新, 메이지이신)이 시작된다. 하지만 일본의 부흥은 '막부의 종말'을 뜻하기도 하기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유신'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시작하게 되었다. 동시에 일본은 다시 '일왕제'로 되돌아가야 했기에 '또 다른 아이러니'를 낳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신지사'들이 막부의 권력을 찬탈해서 '정당한 권력'으로 되돌려놓은 곳이 하필이면 전근대적인 중앙집권제 방식인 '왕정복고'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의 왕은 전통적으로 '신의 아들'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일왕이 다스리는 일본은 '인간신(현신, 또는 천손)이 다스리는 신의 나라'였던 것이다. 일본의 부흥을 알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근대화'가 왕정복고에, 신의 나라라니...고대의 건국신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어쨌든, 일본인들은 명치유신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소설을 꽤나 좋아한다. 일본의 국운이 하늘을 찌르고 뭐든 했다하면 통하는 기세가 아드레날린을 뿜어내는 것처럼 활활 타오르곤 했기 때문이다. 비록, 1945년에 패망하긴 했지만, 60년부터 90년대까지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루며 미국 다음으로 '경제대국'으로 거듭나기까지 일본은 최고의 20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허나 그때 쓴 운빨이 다한 것인지, 1991년부터 버블이 사그라들면서 시작한 '잃어버린 30년'째를 맞은 현재에는 영락없이 비에 홀딱 젖은 생쥐 꼴을 면치 못하고 있기에 더욱더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일본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새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찾을 것인가? 모쪼록 그 발판이 '우리'는 아니길 바랄 뿐이다.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그정도로 어리석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인데...

 

  다시, 명치유신으로 되돌아 간다. '조슈정벌'이 한창이던 때, 쇼군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정벌은 흐지부지 끝나고 막부는 다시금 움츠러들어 버렸다. 때를 같이 해, 일왕도 승하하게 되니, 왕위를 승계 받은 이가 바로 '명치 일왕', 다시 말해, '메이지 일왕'이다. 막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유신지사'들은 모든 권력을 일왕에게 되돌리는 '대정봉환' 계책을 막부에게 들이미니, 당장 손을 쓸 수 없는 막부는 전쟁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받아들여 '왕정복고'를 성사시킨다. 이로써 일본은 '신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명치유신'은 서서히 발효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명치유신'이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성사된 것은 아니다. 친막부세력과 반막부세력의 힘겨루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반막부세력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오랜 갈등이 한순간에 쏟아지며 '신정부군'과 '반정부군'으로 나뉘어 '무진전쟁의 시작'을 알렸으며, 서양의 신무기로 무장한 '신정부군'이 막부 사무라이로 구성된 '반정부군'을 토벌하고 승리를 연이어 거두었고, 전쟁 양상은 서남 방면의 신정부군과 동북 방면의 친막부 동맹군의 대결로 이어졌으나 신정부군의 최신무기와 서양식으로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손쉽게 전쟁을 끝맺으니, 이른바 '막부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명치유신'은 막부가 종말된 이후에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막부가 종식을 고하기 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명치유신'은 일본에게 무엇을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겉모습만 달라진 걸까? 속마음까지 싹 개조한 것일까? 겉으로 보여지기엔 일본의 겉과 속이 모두 싹 바뀐 듯이 보인다. 서구의 근대화에 발맞춰 일본의 사회와 문화까지 빠르게 변하고, 정신까지 '개조'하여 동양적 사고관이 아닌 서양의 근대적 사고방식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허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바뀐 것은 '일본의 겉모습'뿐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일본의 야만성은 전통 사무라이 복장을 하던, 서양의 신식군복을 입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전성은 더욱 심화되었다. 전통적인 동양의 예법을 따르던 시절엔 '도리'와 '예법'을 그나마 따르던 것이 서양의 '이기주의'를 맛본 뒤엔 '무법천지'로 바꾸고, 국가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몰염치한 짓거리도 서슴지 않는 얌생이로 완전히 돌아섰기 때문이다.

 

  일본은 철저히 깔아뭉개야 말을 듣는 족속들이다. 애매한 '판정승'으로 일본을 고분고분하게 만들 순 없다.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패야 겨우 패배를 인정하고,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리며 다시는 고개를 빳빳히 쳐들지 않는 '굴종의 심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을 향해 '겸양'을 떨거나 '겸손한 예법'으로 염치와 도리를 가르치려 들면 주인의 등에 칼을 꼿는 배은망덕한 일을 자랑스럽게 저지르고 말 종자들인 까닭에 버릇을 고치려 들땐, 가차없고 단호하게 매를 들고, 당근을 줄 땐 '절대복종의 서약'을 맺은 뒤에 줘야 한다. 우리가 하늘과 땅 차이가 날 정도로 '강대국'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웃나라에 이런 족속이 살고 있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본의 야만성이 '명치유신'이라는 국뽕을 만나 어떻게 변했는지는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허나 그러기까지 세세하고 조목조목 알아둘 필요는 있다. 역사공부의 진정한 힘은 '디테일'에 있기 때문이다. 방대한 분량의 역사공부를 위해서 처음엔 두루뭉술하지만 '맥락의 흐름'을 파악할 정도로 가볍게 시작하더라도, '맥락 파악'이 끝나면 중요한 사건별로 '인과관계'를 세세히 따져가면서 '미세한 흐름'까지 이해해야 진면목이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는 제격이다. 비록 '만화형식'이라 그 세세함이 띄엄띄엄 나타날지라도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적 상식'보다는 더욱 세분화하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 그리고 '세계사'를 따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편년체 방식의 서술과 더불어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기사본말체 방식으로 전세계사적인 스펙트럼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이기에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세계사'라고 소개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대중역사책 가운데 이 책처럼, 청왕조의 멸망을 일찌감치 부르고 신해혁명의 프로토타입이었던 '태평천국 운동'을 자세히 펼쳐보이고, '막부의 종말부터 명치유신까지' 일본의 변천을 펼쳐보이며, 조선후기 세도정치 이후의 양상을 '세계사적인 관점'으로 풀어낸 책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길 바란다. 단언컨대,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왜냐면 그만큼 동북아시아 삼국의 근현대사가 엄청나게 방대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새롭고 중대한 사건이 뻥뻥 터지는 통에 이를 '종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역사책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이 시리즈는 과감히 손을 댔고, 그것도 '만화형식'으로 쉽게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역사서술 관점이 '균형잡혀 있느냐'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고, 그저 '완간'이 되기까지 응원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면 어떻게 해서든 다뤄져야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또 다른 역사책'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두손 두발을 들며 이 시리즈에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삼천포에 잠시 갔다왔는데, 암튼, '명치유신'을 통과한 일본은 새롭게 '신일본'으로 거듭났다. 아니, 이제부터는 '일본'이 아니라 '일본제국'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서구열강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게 되었지만, 그 열강으로부터 신문물을 발빠르게 도입해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실력을 쌓은 일본은 '일본제국'으로 거듭나면서 거침없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 여기까지는 '같은 문화권'을 갖고 있는 동질적인 관점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다. 허나 '일본제국'은 첫 수부터 악수를 놓았다. 그것이 초반에는 일본에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준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대국 전체로 보았을 때, '패착'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패착'이란 바둑에서 그 돌을 놓음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게 된 나쁜 수를 말한다. 일본이 아시아국가 가운데 가장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한 것까지는 '아시아의 자랑'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 자랑이 끝내 서구열강 뺨칠 정도로 악랄한 침략과 약탈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패착의 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대한민국'의 막판 대역전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초반에 펼쳐놓은 대마는 '잃어버린 30년'과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형국인 탓이다. 안타깝게도 그 역전극이 이 시리즈에 담기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못난 모습을 거울로 삼기에 딱 좋은 소재이니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당장은 답답하고 미칠 노릇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일본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빠르게 치고 오르는 모습도 눈여겨 볼 일이다. 능력이 실력으로 확인된 다음에 그 힘을 어떻게 써야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는지 말이다. 적어도 일본이 간 길은 옳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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