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시대 - 기술이 인류를 소외시키는 사회에 대한 통찰과 예측
브래드 스미스.캐럴 앤 브라운 지음, 이지연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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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컴퓨터를 활용한 'IT(정보통신)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시대'라고 부르는 지금은 컴퓨터 기반의 온갖 기술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급속한 기술 변화의 시대에는 기술 자체의 문제보다 발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인간들의 문제가 더 심각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일자리를 비롯해서 안전, 인권, 그리고 전통적인 가치가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들까지...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점들이 속속 등장하게 된다. 그렇다고 '변화의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기술 혁신으로 얻는 이득이 너무나도 많은 까닭에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혁신의 속도가 늦어질수록 경제적인 문제 등등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코 늦출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혁신과 전통의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마치 '사극드라마'에서 '카카오톡'을 쓰는 것처럼 어색한 느낌부터 들 수도 있는 해법이지만, 그래도 기술의 변화 속도에 뒤쳐져 버린다면 '인공지능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대안이라는 사실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IT 기술의 발전'을 살펴보자. 인류는 '방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인류의 지식 축적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문자'가 없을 땐 몽땅 외웠다. '문자'가 등장하자 인류는 '기록'하기 시작했다. 종이의 발명은 '기록'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인쇄술의 발명은 지식이 특정한 이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게 인류는 문자와 종이, 인쇄술이라는 기술을 발전시켜서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지식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 방대한 양의 지식을 삽시간에 처리해버리는 기술을 고민하다 '컴퓨터'가 등장하게 되었다. 컴퓨터는 실로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처리하는데 유용한 기술이었다. 이렇게 세대를 거듭하며 발전한 컴퓨터는 놀라운 '처리속도'를 자랑하며 점점 더 발전하기 시작했다. 처리속도가 빨라지면서 대두된 문제점은 '저장공간'이었다. 플로피 디스크와 하드 디스크에 매달리던 시대를 지나 'CD'가 등장하면서 엄청 날씬한(?) 저장공간이 생겨버린 셈이다. 하지만 날씬해도 금새 엄청난 부피를 자랑하게 되어 버리곤 한다. 그러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서버'와 같은 대형저장공간이 곳곳에 설치되기 시작했다. 초기엔 그마저도 부족해서 먹통이 되다시피 했지만, 엄청나게 방대한 서버가 점점 많이 만들어지면서 공간에 여유가 생길 지경에 다다랐다.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지식정보의 양은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개개인의 정보'를 대신 저장해주는 아이디어가 번뜩이게 되었다. 바로 '클라우드'의 등장이다. 이제 인류는 어마어마한 저장공간에 '개인의 정보'를 올려두면 '누구나' 편리하게 그 정보를 쓸 수 있는 기술 혁신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없이 저장하고 원없이 뽑아 쓸 수 있는 지식 저장공간이 생기자 그 편리함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개인의 사생활이 노출되거나 '개인 정보'가 누출되거나, 심지어 그런 정보들을 노리는 범죄집단과 그런 정보들 덕분에 발생하는 또 다른 범죄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감시'와 '통제'의 도구로 전락되어 버리는 위험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어지게 되었다. 기술의 발전이 도덕의 발전보다 빠르게 되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인 셈이다.

 

  한편, 'AI(인공지능)의 발전'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바로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해진다는 점이다. "아리야, 오늘 날씨는 어때?", "아리야, 오늘 점심 뭐 먹지?", "아리야, 데이트 장소로 알맞은 곳을 선택해줘", "아리야~~~" 인류는 컴퓨터와 '대화'를 하며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른바 '특이점'이라고 불리는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순간'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펼쳐질 미래인 셈이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과연 행복해질까?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척척 해내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양날의 검이 아닐 수 없다. 인간보다 똑똑해진 컴퓨터가 인간들의 일자리를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대신하는 것을 넘어서서 '정신적 노동'까지 대신하게 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필요해질 것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암울한 영화 속에서는 인간이 기계를 움직일 전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생체 건전지'가 되어 버리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쯤 되면, '기술 혁신'은 윤리적인 문제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개인 정보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능력을 넘어버린 '기술'이 인류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미 '기술 혁신'의 대부분은 인간의 발전 속도를 훨씬 뛰어넘어서 발전하고 있다. 이제 인류는 뒤쫓을 여력조차 없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기술 혁신의 속도'에 딴죽을 걸어 속도를 늦추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니, 아주 늦추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인류가 따라잡을 수 있을 때까지만 혁신의 속도를 늦추어 나가는 방안은 어떤가?

 

 기술 혁신의 속도는 결코 늦춰지는 법이 없을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 혁신을 뒤쫓을 생각만 하다가는 정작 중요한 답을 놓칠 수 있다. 그건 바로 '기술 혁신' 자체를 인류에게 유용한 도구이자 강력한 무기로 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인류가 컴퓨터에게 지배 당해선 절대로 안 된다. 유용한 컴퓨터를 편리한 도구로, 때론 강력한 무기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인간의 패배로 결론이 났다. 이제 '기술 혁신'과 인간이 대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앞으로 인간은 '기술 혁신'과 대결했을 때 번번히 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과 터미네이터와의 싸움이랄까?

 

  이제는 인간은 '기술 혁신'의 파도를 타고 즐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원리를 배우려고' 아둥바둥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써먹을 것'인지 고민하면 그뿐인 셈이다. 새 스마트폰이 나왔을 때, 사용법을 익히느라 고민하지 말고, 스마트폰이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써먹어야 좋을지 고민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스마트폰을 잘 쓰기 위해서 '스마트폰 만드는 방법'을 배울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기술 혁신이 필요한 까닭을 곰곰히 생각하고,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면 '어떤 일'에 써먹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단 말이다.

 

  물론,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하곤 한다. 바로 '범죄'에 수단으로 악용될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유용한 기술 혁신으로 다른 사람의 '개인 정보'를 손쉽게 빼낼 수 있고, 이것을 가지고 정부가 '억압'과 '감시'의 수단으로 활용해버린다면 끝내 '디스토피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을 막기 위해 '도덕윤리적 가치관'이 뒷받침 되어야 하며, 이를 미연에 막을 수 있는 법이나 규율을 발빠르게 마련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 민주사회를 완성해야만 한다. 온 국민, 나아가 전 세계인이 도덕과 윤리의 가치관으로 '기술 혁신'을 다룰 수 있을 때, 진정한 기술 혁신이 보장되고 올바르게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인간이 '기술 혁신'을 다룰 수 있는 자신감으로만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에는 더욱 빠르게 '기술 혁신'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도 결국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이자 무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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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 자본론으로 21세기 경제를 해설하다
한지원 지음 / 한빛비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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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들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심지어 공산주의든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잘 따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언제나 기본 전제는 '자유, 평등, 풍요'인 탓이다. 물론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하였다. 계급을 타파하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평등을 추구했던 공산주의는 현실에선 자본가를 쫓아내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자본가의 자리를 '공산당'이 차지해버리는 모순을 보였기 때문에 동유럽의 공산국가의 몰락을 시작으로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북한이 고립되는 결말로 치닫고 말았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유도 보장하지 못하고, 평등은 지켜지지 못했으며, 풍요는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논외로 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어떤가? 마르크스가 주창한 <자본>의 결말은 자본주의가 끝장나면 사회주의가 완성된다고 했다. 허나 '이론'으로서만 그렇고 '현실'은 그렇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는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용케 버티고, 또 버티고, 또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 불안하다. 자본주의를 대신할 만한 것이 없어서 계속 이어오고 있긴 하지만, 현대인들이 꿈꾸던 '자유, 평등, 풍요'가 좀처럼 보편화되지 않은 까닭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날로 심각해지고 '상위 1%의 부'가 전세계 인류의 절반에 해당하는 자산과 맞먹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주목 받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자본>이다.

 

  이 책도 그렇다. 21세기에 걸맞는 관점으로 <자본>을 들여다보고 자본주의의 맹점을 다시금 돌아보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당사자는 보지 못하는 수를 옆에서 관망하는 이의 눈에는 잘 띄어서 곧잘 훈수를 두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자본>은 '자본가의 착취'를 파헤쳐서 '노동자의 해방'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착취 당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가 조금이라도 덜 착취 당할 수 있도록 방편을 마련하기 위해서 써놓은 책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서는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은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가 점점 벌어져서 더는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 되면 '피착취자(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오게 되어 끝내 사회주의가 시작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자본주의가 망한 적이 없기 때문에 끝내 사회주의가 펼쳐질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직까지는 마르크스의 상상에 머물러 있는 단계일 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삐걱거릴 때마다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요즘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열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길 즐긴다(?)고 한다. 그래 봤자, '복지정책'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정도이지만, 기꺼이 '자유, 평등, 풍요'를 이루기 위해서 가치관을 바꿀 의지가 있다는 점에서 심상찮은 분위기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무상급식'으로 시작해서 '기본소득'에 이르기까지 보다 적극적인 공공근로와 복지정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애써 무식한 이들은 이를 '공산주의의 책동'이라며 무식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고 있지만, 이것들 모두가 바로 '자본주의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이 책에서도 수없이 언급하지만 '자본주의의 결함'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현실이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과연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인가? '뉴노멀 시대'에도 자본주의는 굳건하게 경제시스템의 지휘를 누리고 있을 것인가? 어느 것 하나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어쩌면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경제시스템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 더욱 어두운 미래를 점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더욱더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긍정적인 힘'을 발휘해야만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긍정의 힘은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만이 '자본주의의 허점'을 제대로 지적한 덕분이다. 물론 '사회주의의 이상향'으로 귀결된 것은 안타깝지만, 그것마저도 우리는 주목해야만 한다. 왜냐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이상향을 꿈꾸는 것'으로 돌파구를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대변혁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결국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는 원대한 몽상가들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시민들이 깨어나야만 한다. 꿈은 꾸되 무지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몽상가들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몽상가들의 꿈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함께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벽한 자유와 평등, 풍요로운 시장경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큰 정부의 힘'이 필요하지만 '커다란 정부'는 위험요소가 대단히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재정부담'이다. 원대한 이상향을 실현시키기 위해 '무모한 도전'이 계속된다면 자본주의 변혁을 완수하기도 전에 파탄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전세계가 '같은 꿈'을 꾸어야만 한다. 더는 '약소국의 피땀눈물'을 착취하여 선진국의 경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는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착취자(자본가)'와 '피착취자(노동자)'의 밀접한 관계로 성장을 한다지만, 전세계의 경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버리면 '자본주의 변혁'은 또다시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함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꿈을 동시에 꾸어야 한다. <동물농장> 속의 '복서' 같은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하지만, 결코 이용 당하고 착취 당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깨어 있는 경제 시민'이 되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더는 영웅적인 정치인의 등장을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일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멈추는 것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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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 - 한빛비즈 교양툰 한빛비즈 교양툰 1
갈로아 지음 / 한빛비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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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뭐라 소개하면 좋을까? 읽으면 참 유익한데 뭔가 2% 부족하다고 느낄 때, 할 말이 참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빛비즈>의 '교양툰' 시리즈의 첫 번째라는 이름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책이기도 하다. 벌써 두 번째 리뷰를 쓰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외계인이 지구를 관찰하고 있다면 가장 유심히 바라볼 대상은 무엇일까? 아니, 질문이 좀 잘못 되었다. 지구에 대한 첫인상을 물어본다면 무어라 대답할까? 라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가장 먼저 눈에 띠고, 가장 '개체수'가 많은 무엇을 꼽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은 바로 '미생물'일 것이다. 비록 인간의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은 대상이지만, 외계인의 '시각'에서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체수가 가장 많은 '미생물'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외계인이 지구 침공을 할 수 없는 까닭도 바로 '미생물' 때문일 것이다. 영화 <우주전쟁>에도 지구인을 먹이(?)로 삼는 외계인이 허무하게도 지구의 미생물에 대한 면역체계가 없는 까닭에 전멸하고 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아쉽게도 '미생물'이 아니라 '곤충'이다. 세상은 참으로 더럽게도 1등만 기억한다고 하지만 미생물 다음으로 많은 개체수를 자랑하는 대상이 바로 '곤충'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화적인 관점'에서도 곤충은 참으로 신기한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생물이 바다를 벗어나지 못한 때에 최초로 '육상'으로 나아간 생물도 곤충이며, 거의 대부분의 생물이 육상에서 머물고 있을 때에 최초로 '하늘'을 날아오른 생물도 곤충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아주 단단한 '외골격'을 갖고 있는 탓에 다른 천적으로부터 스스로 몸을 지킬 뿐만 아니라 조그만 덩치로도 자기보다 30배가 넘는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릴 수 있는 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유리한 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멸종 시기'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오늘까지 살아남아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생물 가운데 곤충이 가장 많은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따라서 '곤충의 진화'에 대한 역사를 관찰하다보면 자연스레 '지구의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는 것을 아주 손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곤충기>가 아니라 <곤충의 진화>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곤충기>의 대명사인 '파브르'는 다윈과 동시대 사람이며 친분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까닭에 <파브르 곤충기>를 읽으면, 그저 '곤충의 생태'를 살펴볼 수 있을 뿐, 지구의 장대한 역사를 눈치 챌 수 없다. 하지만 <종의 기원>을 읽으면 다르다. 아주 오랜 시일동안 서서히 환경에 적응해가며 '살아남은 생명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지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곤충의 진화>이면서 동시에 <지구의 역사 또는 생명의 진화>라는 제목으로 읽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진화론의 곤충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진화'에 대한 맥락이 매우 중요한 이 책은 '진화의 매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면 반쪽만 즐길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진화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환경 적응'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이 책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화란 무엇일까?> 그건 우선 '살아남았다'는 것으로 개념이해를 시작해야 한다. 다윈은 '적응과 도태'라는 핵심으로 환경에 잘 적응하면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하면 절멸한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시시때때로 변하는 '환경'에 살아남기 유리한 쪽으로 진화를 한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생물은 '멸종'에 이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화는 '목적성'도 '방향성'도 없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수컷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이나 수사슴의 거대한 뿔은 암컷을 유혹하는데에 쓸모가 있을지 몰라도 천적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진화에 목적이나 방향성이 있다면 '잘못된 선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공작새의 깃털과 수사슴의 뿔은 점점 더 화려하고 거대해질 뿐이다.

 

  그래도 의심을 한 다윈은 '성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데 더 유리한 쪽으로 진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닐지 의문을 달았다. 다윈이 살았을 당시에는 '유전자'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을텐데도 말이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거추장스러운 장식일지라도 '종의 번성'을 위해서는 짝짓기에 성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왜 하필 '목숨'을 걸어야 짝짓기에 유리해진단 말인가? 얼마든지 환경에 적절히 적응하는 방향으로 오래오래 살아서 '종의 번성'을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간단한 진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따라서 진화에 '목적성과 방향성'은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곤충에 관한 이야기로 간단한 진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예가 있다. 바로 '산업화 이전과 이후의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바로 이곳에 '같은 종'의 흰색 나방과 검은색 나방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둘은 같은 종이지만 색깔만 다를 뿐이었다. 그런데 산업화 이전에는 공기도 맑고 주변도 밝았기에 '흰색 나방'이 천적의 눈에 덜 띠어서 더 많이 살아남았고, '검은색 나방'은 천적에게 잡아먹히기 일쑤였단다. 이대로라면 검은색 나방은 오래 가지 않아 멸종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영국에 산업화가 활발해지면서 곳곳에 매연을 뿜는 공장이 들어섰고, 그 때문에 주변 환경이 거무튀튀해졌기 때문이다. 바로 '환경'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변과 색의 차이가 없는 검은색 나방이 생존에 유리해졌고, 흰색 나방은 멸종에 다다를 정도로 개체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환경은 '진화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고, 진화는 '우연적인 요소'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방은 생존에 유리해지기 위해서 자신의 몸색깔을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반대로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손쉽게 바꿀 수 없다는 얘기다. 즉, 진화의 속도는 매우 느리다. 반면에 환경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생존의 갈림길'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또한, 생존에 유리해지도록 '변신'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낮다는 점이다. 이런 변신을 자연계에서는 '돌연변이'라고 불리지만, 이런 돌연변이가 생존에 유리해질 확률이 매번 높다는 것을 보장할 수도 없다. 따라서 돌연변이가 일어났는데, 그 돌연변이가 생존에 유리해지는 것은 순전히 운에 달렸다. 어쩌면 돌연변이로 힘들게 살아남았다가 오랜 시일이 지나, 갑자기 생존에 유리하도록 환경이 바뀌게 되면 '살아남아서' 어엿한 종으로 대접받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이해한다면, 왜 유독 '곤충의 종'이 대체로 비슷하지만 매우 다양한가를 이해할 수 있다. 개미만 해도 수없이 많은 다른 종들이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풍뎅이는 또 어떤가? 사슴벌레도 비슷하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종이 저마다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까지 인류에게 알려진 것만으로도 이렇게 다양한데 아직 학계에 보고가 되지 않은 '미지의 곤충'까지 계산에 넣으면 정말 엄청날 것이다.

 

  이쯤 되면, 인간이 오직 '사피엔스'라고 하는 단 하나의 종만 살아남은 것이 참으로 희귀한 일인 셈이다. 동시에 인류는 수많은 종들이 멸종의 단계에서 보여주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것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조차 할 지경이다. 따라서 우리는 곤충에게 배울 점이 참 많다. 참으로 들여다보면 볼수록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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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진 웹스터 지음, 한영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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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키다리 아저씨>는 소녀들에게 로망을 심어주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 책으로 논술수업을 하면 소년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데 반해서, 소녀들은 '저비 도련님'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선행을 베풀어준 이가 '노령의 할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젊고 잘생긴 옵빠'였다는 반전이, 흡사 '백마 탄 왕자님'이 짜잔~하고 나타나는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라고 소감을 나타내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액의 후원을 미끼로 젊은 여자를 꼬여 내기 위한 범죄수법(?)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더니, 소녀들은 자신들의 환상을 깨지 말라고 야유를 보내곤 했다.



과연 '키다리 아저씨'에 얽힌 소녀들의 환상이란 어떤 것일까? 난 이 작품을 당찬 소녀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대단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것이 많은 고아소녀이지만 밝고 명랑하며 수동적이지 않고 남성 위주의 사회분위기에서도 진취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멋진 여성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엔딩 장면'에서 이런 감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사랑의 결실'을 맺으며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갈 준비가 다 된 듯한 '연애편지'로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호동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조국을 지켜주는 '자명고'를 손수 찢어버리는 낙랑공주처럼 말이다. 그래서 난 <키다리 아저씨>가 '열린 결말'이라면, 뒷이야기는 웬지 비극적일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팬들턴 가문에 입성한 고아소녀의 악몽같은 시집살이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소녀들에게는 마냥 즐거운 작품인 모양이다. 자기가 어려움에 처했는데 엄청난 거액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나타났데, 그런데 매달 편지 한 통씩 보내는 수고만 하면 온갖 명품선물도 받을 수 있고, 방학 때면 어마어마한 별장으로 초대를 받아서 신 나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데, 그리고 그 별장에는 잘 생기고 돈 많고 젊은 남자가 있다는 거지. 근데 알고 보니까 그 젊은 남자가 자기를 도와주었던 후원자였다는 거지. 완전 '백마 탄 왕자님'이 따로 없지 않니?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야... 아마도 이런 식으로 읽히는 모양이다.



하긴 누구에게나 로망은 있다. 그런 로망을 꿈꾸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읽는 '추억의 명작'에 불편함 한 토막이 담겨 있고, 시대가 달라져서 '달라진 관점'으로 다시 한 번 투영을 하니 예전엔 볼 수 없었던 '부족함'이 엿보이게 되니 아쉬움이 남게 되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당연한 진리로 <키다리 아저씨>를 읽으면 안된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나 할까? 키도 작고 못 생겼고 돈도 없어서 '젊은 여자'를 꼬실 수 없게 된 늙은 총각의 자격지심이 폭발한 것이라고 해야 하나? 이 나이에 '백마 탄 왕자'를 시샘하면 안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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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딱 알아야 할 세계사 상식 이야기 맛있는 공부 30
전기현 지음, 홍나영 그림 / 파란정원 / 202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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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왜 알아야 하나? 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여기서 과거란 '과거의 사실'인 역사기록을 말하고, 현재란 '오늘날의 역사가'를 말한다. 다시 말해, 과거의 기록을 오늘날의 역사가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것이 바로 '역사'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고정 불변의 사료'에 '여러 역사가의 관점'이 반영되어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왜곡' 같은 것까지 올바른 역사해석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역사는 '전문가(역사가)'만이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전문성이 없는 역사해석이 권위를 띨 수는 없겠지만, 결코 '그들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암튼, 역사교육의 중요성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공부가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방대한 양'이 학생들 앞에 떡하니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역사의 재미'를 일찍 깨우친 학동들에겐 정말 재미난 역사가 산더미처럼 쌓여도 아무런 부담이 없겠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겐 '역사공부'는 부담, 그 자체다.

 

  그렇다면 역사를 재미나게 공부하는 방법은 없을까? 모든 공부가 그러하듯 그런 방법은 없다. 어느 정도 기본적인 바탕지식을 쌓고 역사적인 맥락과 흐름을 깨우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 바탕지식을 쌓기 위해서 <위인전>이든, <역사만화>든, '사극드라마'든 닥치는대로 읽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역사의 바탕지식을 기본적으로 쌓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세계사 상식'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책 한 권 만으로 '세계사 상식'을 완벽 마스터 할 수 있다는 착각은 내려두는 것이 좋다. 어떤 일이든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속담이 절로 와닿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어, 이건 어디서 읽어본 내용인데!", "아하, 지난 번에 선생님이 수업한 내용이구나!"라고 떠올릴만 한 대목이 툭툭 나오게 될 것이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상식'적인 역사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에 초등교양(지식)을 쌓기에도 아주 유용한 책이다. 거듭 말하지만,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양'은 필수적으로 쌓아야 한다. 교양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하는 것이 '지식쌓기'인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말이다.

 

  아쉬운 점은 '100가지 사건'이라는 한정된 지식으로 세계사 상식을 탄탄히 쌓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허나 초등 수준의 독자들에게는 이 정도 분량도 상당히 만만찮은 분량일 것이다. 또한, 제목에 '초등학생'이라고 쓰여 있긴 하지만 '중고등학생'이 읽어도 단박에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어려운 내용도 있다. 따라서 스스로 역사적인 기초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부담없이 읽어도 좋을 듯 싶다.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하자면, 걸어다니며 책을 읽는 버릇이 있는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주목받기 일쑤인데,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책 표지'를 핸폰으로 찍을 수 있겠냐는 요청을 해오곤 했다. 자녀나 손주에게 권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책이 가진 '원초적인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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