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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진 웹스터 지음, 한영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0월
평점 :
아직도 <키다리 아저씨>는 소녀들에게 로망을 심어주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 책으로 논술수업을 하면 소년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데 반해서, 소녀들은 '저비 도련님'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선행을 베풀어준 이가 '노령의 할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젊고 잘생긴 옵빠'였다는 반전이, 흡사 '백마 탄 왕자님'이 짜잔~하고 나타나는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라고 소감을 나타내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액의 후원을 미끼로 젊은 여자를 꼬여 내기 위한 범죄수법(?)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더니, 소녀들은 자신들의 환상을 깨지 말라고 야유를 보내곤 했다.
과연 '키다리 아저씨'에 얽힌 소녀들의 환상이란 어떤 것일까? 난 이 작품을 당찬 소녀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대단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것이 많은 고아소녀이지만 밝고 명랑하며 수동적이지 않고 남성 위주의 사회분위기에서도 진취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멋진 여성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엔딩 장면'에서 이런 감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사랑의 결실'을 맺으며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갈 준비가 다 된 듯한 '연애편지'로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호동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조국을 지켜주는 '자명고'를 손수 찢어버리는 낙랑공주처럼 말이다. 그래서 난 <키다리 아저씨>가 '열린 결말'이라면, 뒷이야기는 웬지 비극적일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팬들턴 가문에 입성한 고아소녀의 악몽같은 시집살이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소녀들에게는 마냥 즐거운 작품인 모양이다. 자기가 어려움에 처했는데 엄청난 거액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나타났데, 그런데 매달 편지 한 통씩 보내는 수고만 하면 온갖 명품선물도 받을 수 있고, 방학 때면 어마어마한 별장으로 초대를 받아서 신 나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데, 그리고 그 별장에는 잘 생기고 돈 많고 젊은 남자가 있다는 거지. 근데 알고 보니까 그 젊은 남자가 자기를 도와주었던 후원자였다는 거지. 완전 '백마 탄 왕자님'이 따로 없지 않니?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야... 아마도 이런 식으로 읽히는 모양이다.
하긴 누구에게나 로망은 있다. 그런 로망을 꿈꾸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읽는 '추억의 명작'에 불편함 한 토막이 담겨 있고, 시대가 달라져서 '달라진 관점'으로 다시 한 번 투영을 하니 예전엔 볼 수 없었던 '부족함'이 엿보이게 되니 아쉬움이 남게 되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당연한 진리로 <키다리 아저씨>를 읽으면 안된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나 할까? 키도 작고 못 생겼고 돈도 없어서 '젊은 여자'를 꼬실 수 없게 된 늙은 총각의 자격지심이 폭발한 것이라고 해야 하나? 이 나이에 '백마 탄 왕자'를 시샘하면 안 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