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1 최후의 오디세이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4
아서 C. 클라크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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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자면, <3001 최후의 오디세이>는 전작들에 비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매 시리즈를 더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충격'을 선보였던 것에 비해 '최후의 오디세이'는 비교적 잔잔한 마무리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 클라크가 언급한 것처럼 '2001', '2010', '2061', 그리고 '3001'에서 이어지는 줄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류보다 앞선 문명의 산물이었던 'TMA-1(일명 '티코석판')이 지구에서 초기 인류에게 '발견'된 이후 인류가 달에 발을 딛는 순간 '새로운 티코석판'을 발견했고, 인류가 태양계로 확장시켜 눈을 돌리는 순간 '또 새롭고 거대한 티코석판(일명 '큰형')이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에서 발견하는 '순서'로 점차점차 독자들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나가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이 그린 '미래'는 오류투성이였다. 작가가 살던 시기는 7080 '냉전시대'였지만, 작가가 그린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21세기였기 때문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그 시기에서 보았을 때에는 인류가 우주로 나아가기 위해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화합을 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최후의 오디세이'를 집필하던 90년대에는 느닷없이 독일이 통일하고 구소련이 붕괴를 하는 등 작가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뻥뻥 터지고 말았다. 그렇기에 '최후의 오디세이'는 어떤 면에선 '방향전환'이 필요했었을 거라 짐작이 된다. 더구나 세 번의 밀레니엄을 거쳐 네 번째 밀레니엄 시대를 맞은 '3001년의 지구'는...아니 '우주'는 온인류가 '지구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나의 체제 아래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구인들이 이렇게 똘똘(?) 뭉칠 수밖에 없게 된 까닭은 지구인들이 더는 지구에서만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속에서도 지구인은 '지표면'에서 살지 않았다. 바로 '인공위성이 돌던 궤도'상에 인공건축물을 만들고, 그 거대한 구조물 안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0년 대에 수없이 많이 일어났을 것이 분명한 '기술적 혁명'으로 인해 인류는 보다 손쉽게 우주로 나아갈 수 있고, 우주 어디서든 머물 수 있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을 거라 작가는 상상했던 것이다. 이른바 '테라포밍(지구 이외의 다른 행성이나 위성에 인간이 살 수 있도록 지구환경과 비슷하게 조성하는 일련의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실제로 '테라포밍'은 다각도로 연구되고 있고 현재의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믿기도 한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46억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듯이 가장 가까운 달을 비롯해서 화성과 수성, 그리고 거대한 기체행성들의 위성들을 '테라포밍'해서 지구인들이 살기 적합한 환경을 만들기까지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억 년이 걸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긴 시간들조차 137억 년전에 만들어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그런데도 작가 클라크는 비교적 짧은 '1000년'이라는 시간안에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걸 가능케 한 '작가적 상상력'에 뜨거운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결정적 가정'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목성'이 '또 하나의 태양(루시퍼)'으로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코석판'이라는 외계 문명의 결정체가 지구인과, 그리고 '인공지능'과도 결합(?)하여 최고의 지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의 '지적설계론'이 한몫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작가 클라크는 '특정' 종교를 염두에 두고 상상력을 펼칠 것은 아닐 것이다. 티코석판이 '어떤 존재'인지 밝히지 않았기에 독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배경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작가도 '새로운 생명체'가 지구인과 조우하기 위해선 '운명적인 만남'을 주선할 '무엇'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가정(설계)이 필요했을 뿐일 것이다. 또한 이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특정' 종교가 이야기하는 '종말론'이 전혀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클라크의 소설에서는 '지구의 종말'이나 '외계의 침공', 그로 인해 지구에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허황된 짓을 전혀 하지 않아 고마울 따름이다. 뭐, 소행성 충돌 따위의 위험인자까지 싹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시나리오는 우주적 관점에서 평범한 일상이고, 이미 지구가 경험한 '사실(팩트)'이니 탓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의 줄거리를 짤막하게나마 소개를 해야 겠다. <3001 최후의 오디세이>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놀랍게도 1편에서 등장했다가 우주선(디스커버리 호) 밖으로 튕겨나간 프랭크 폴이다. 미친 인공지능 HAL과의 싸움에서 어이없게 소외(?)되었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니 얼떨떨한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렇게 차가운 우주속에서 그야말로 '얼어붙었다가' 거의 1000년 만에 다시 깨어나게 된 것이다. 아무리 태양계 안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광활하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그 넓고 텅빈 공간을 떠돌다가 기적과 같이 지구로 생환하게 된 셈이다. 신호가 끊긴 인공위성도 찾지 못하는 21세기 과학수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31세기에는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더 기적같은 일은 1000년 가까이 꽁꽁 얼었던 사람에게 '생명의 숨결'을 다시 불어넣는 '의료기술'일 것이다.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 안에 있던 미라를 다시 되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미라클처럼 펼쳐진 것이다. 물론 '미라'와 '동면기술'은 엄연히 다른 방식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폴의 기적같은 생환이 벌어진 이후의 묘사들은 살짝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마치 '고대 중세사람'이 오랜 잠을 자다 '현대'에 깨어나서 벌이는 에피소드처럼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이 책이 쓰여진 1996년 당시의 상상력이 그려낸 먼 미래와 현재 2024년에 펼쳐진 현실과 상상하는 미래 '사이'의 묘한 이질감이 집중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30년 전의 독자들은 이 책에 묘사된 이야기에 열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전편에서 다루었던 '지적외계인의 존재', '목성의 대폭발', '에우로파(유로파)의 생명체' 등의 '충격'에 비하면 너무나도 밋밋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31세기 사람들은 모두 '대머리'...아니아니 스포일러가 될 수는 없기에 이쯤 하겠다.

 

  그럼에도 대작의 결말은 긴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인류는 오랜 꿈인 우주로 나아가기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우주정복'과 같은 심술궂은 야망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시의 불빛이 사라진 깜깜한 어둠속에서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면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말이다. 그 까닭은 세이건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가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다시 우주로 돌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작가 클라크는 우리의 심연 깊은 곳에서부터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담은 것일테다. 그리스의 지략가 오디세이가 온갖 험난한 모험을 겪으며 기나긴 항해 끝에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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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4 : 무기여 잘 있거라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4
이연호 글, 백문호 그림, 손영운 기획, 어니스트 헤밍웨이 원작 / 채우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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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쟁에 열광하는 이들이 많다. 싸워서 승리하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다는 탐욕 때문만이 아니라 '무슨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이기면 '착한 영웅'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승리한 쪽이 언제나 선하고, 패배한 쪽은 늘 사악한 집단으로 매도할 수 있기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전쟁을 참 좋아한 것이다. 아무리 선한 의지로 권력을 쟁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고인물이 썩듯' 장기집권의 야욕을 탐하는 순간부터 권력자는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그럴 듯한 감언이설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고 오직 승리하기만을 바라는 요행수로 전쟁을 이용할 따름이다.

 

  하지만 전쟁의 끝에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오직 '파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승리한 쪽도 수많은 희생자과 파괴된 터전만 남을 뿐이고, 패배한 쪽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리고 전쟁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오래도록 남긴다. 전쟁 영웅이라고해서 다를 건 없다. 아니 영웅이기에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테고 더욱더 처참한 고통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터라 제정신을 차릴 새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쟁 영웅'을 추켜세우고, 그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며,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을 맡기는데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어주고 그런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도록 방치하고 만다. 왜? '애국자'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서 제 한 몸을 아끼지 않고 희생을 한 위대한 인물이며, 사악한 적들을 초토화시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낸 위인이라 칭송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앞서 말했듯이 '적보다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며 앞장서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분이 철옹성같이 안전하기 이를데 없는 '지하벙커'에 꽁꽁 숨어서 수많은 군장병들을 살벌한 전장터로 내보내 죽어나가는 보고를 받고도, 또 공격명령을 서슴없이 내리는 무자비한 권력가로 활약할 뿐이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 전쟁영웅은 '살인자'를 뛰어넘는 '살육자'이며, 전쟁광일 뿐인 이들에게 절대로 권력을 쥐어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들의 단순한 머리로는 '평화'란 자신의 독재에 대한 복종일 따름이고, 자신이 독재자가 되지 못하게 되면 언제든 '영광스런 전쟁'을 통해 권력을 오래오래 이러나갈 생각뿐인 존재들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각 나라들의 지도자들을 보면 어김없다. 냉전 이후 지금까지 벌어진 수많은 '전쟁'과 '내전'의 양상들을 살펴봐도 꼭 맞아 떨어질 것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전장에 참전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저마다 자신의 조국이 가장 강하다는 신념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은 전쟁에 뛰어들었고, 각 나라들은 발달된 무기로 인해 수많은 군인들이 전장터의 이슬로 사라지는 충격속에서도 결코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전장터의 빈곳으로 '보충병'들을 기차로, 택시로, 심지어 걸어서라도 보급하는데만 골머리를 썩혔을 뿐이다. 후방에 남겨진 사람들도 언제든 기회만을 엿보면서 '참전'을 하려했고, 지리한 전투가 이어지며 교착상태에 빠져 '무의미한 돌격'만을 감행하는 무모한 작전에 투입된 병사들은 시체들이 쓰러져 넘어진 '똑같은' 그곳에 쓰러져 생을 마감할 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달라졌을까? 달라진 것은 '대량살상무기'의 가공할 위력뿐이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양상은 똑같았다.

 

  이 책 <무기여 잘 있거라>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20살의 젊은 헤밍웨이는 '전쟁영웅'이 되고자 참전을 희망했고,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지만 어찌어찌 고집을 피워 '구급차 운전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하게 된다. 하지만 전장터에서 포탄의 피격을 받고 부상을 당한 뒤로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게 되었고, 그 참혹함을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에 녹여내었다. 정녕 '전쟁'이 무엇이길래 수많은 젊은이들을 참전하게 만들고, 거기서 무슨 일을 당했길래 정반대의 '반전'을 외치게 된 걸까? 헤밍웨이는 무려 다섯 번의 전쟁에 참여하였고, 그는 소설에 그런 경험을 제대로 살려내 '허무주의' 가득한 현대의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바로 '인생, 뭐 있어? 그냥 즐기는거야!'였다.

 

  하긴 권력을 탐한 야심가들은 전쟁을 이용해서 '권력자'로 변신을 하여 한몫 단단히 챙겼지만, 그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사람을 죽인 경험, 부상을 당해 평생 불구가 된 경험, 그리고 숱한 씻지 못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아픔을 안고 돌아와서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경험 따위를 생생하게 전해듣고서, 결국 '전쟁'으로 얻는 것이 무엇이냐는 회의감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회의감은 곧 '허무주의'로 빠져들게 만들면서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마음껏 누리며 살길 바라는 나약한 존재로 만족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말았다. 이 책 <무기여 잘 있거라>의 프레데릭이 그런 '허무주의'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자발적인 참전으로 '영웅적인 부상'을 당한 주인공이 훈장까지 수여하며 자긍심을 높일 수 있었지만,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결국 패배의 불명예를 안고서 퇴각하는 길에 '전쟁의 무상함'을 느끼고 끝내 탈영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의 죽음뿐이라는 허무함이었다. 프레데릭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탈영한 신분을 숨기고 스위스로 도망가서 아내 캐서린과 함께 했던 몇 달뿐이었다.

 

  그런 20세기 허무주의를 딛고서 21세기를 맞이한 이들이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속으로 뛰어들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권력이란 탐욕에 눈 먼 '독재자'들만이 전쟁을 외칠 뿐이다. 이제 똑똑해진 시민들과 현명한 민중들은 그딴 독재자들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다만, 미래비전 따위도 없이 그저 '그들만의 천국'을 꿈꾸는 영혼없는 정치인과 추종자들만이 그런 독재권력을 옹호하고, 검찰과 경찰, 그리고 가짜언론들까지 '그들만의 게임'에 참여하며 전쟁을 통해 영욕을 채우려는 검은 속내를 드러낼 뿐이다. 물론 그런 '거짓'에 속아넘어갈 사람들이 많지 않음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아주 '적은 표 차이'만으로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고나니 도무지 안심을 할 수가 없을 따름이다. 팬데믹 시대에도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안전한 대한민국'이 어쩌다 '각자도생'을 외칠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이제라도 제정신을 차리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헤밍웨이의 말마따나, 무기여, 잘 있거라~ 전쟁을 벌여서 승리를 거두면 '이득'을 보는 건, 오직 독재자와 그를 옹위하는 소수자들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란다. 승전국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잡힐 뿐이고, 패전국은 '더'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될 뿐이다. 그렇게 승전국과 패전국 '국민들의 무덤' 위에 쌓은 영광을 자랑스럽게 여길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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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8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8
이충환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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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나 읽지 못하는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 책 속에 담긴 내용이 어려운 것은 둘째치고, '벽돌책'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두께와 쪽수를 자랑하는 까닭에 좀처럼 읽기 꺼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렵고 난해한 내용을 한 번이라도 접해보는 순간부터 세상이 달라보이는 까닭에 '고전'은 꾸준히 사랑받아 왔고 오래도록 '읽어야 할 책' 목록에서 빠진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고전'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왜 없겠는가. 지금껏 수많은 선배독자들이 '고전'을 먼저 접하고서 최선을 다해서 이해하기 쉽고 재미나게 풀어내려 엄청나게 노력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쫌만 발품을 팔다보면 <고전책>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중에 [웅진지식하우스]에서 선보인 '지적 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시리즈가 있다.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그 내용이 참으로 '수준급'이고, 빠르게 완독할 수 있도록 분량도 '종이책 100쪽 분량' 안팎이라 누구라도 쉽게 읽고 교양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 내용을 음미하며 읽는 '정독 독서가'라면 30분만에 독파하기는 힘들 것이고, 책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길 좋아하는 '속독 독서가'라면 충분한 시간일 것이다.

 

  참고 삼아, '정독 vs 속독'의 장단점을 비교하자면, 정독은 '기억'에 오래남기는 장점이 있는 반면 완독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강박을 줄 수 있다. 반면에 속독은 '전체 내용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아주 탁월한 방법이자, 원하는 내용만 골라 읽을 수 있는 발췌독을 병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용한 독서법이지만, 책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으면 '기억'이 금세 휘발되어 사라져버리는 단점도 있다. 이렇게 장단점이 다양한 만큼 '어느 방법'이 더 좋으냐는 물음보다는 '필요에 따라' 어떤 독서법을 선택할 것이냐라는 판단이 더욱 현명할 것이다. 유의할 점은 '독서는 절대 강요해서는 얻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이는 '독서법'도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독서법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법이다.

 

  이 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그 유명한 <코스모스>의 '축약본'이라고 해도 좋다. 다른 고전책에 비하면 책 내용이 어렵지 않고 재밌기로 유명한 책인데 유일한 단점은 '두껍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매한 분들'은 많지만 '완독한 분들'은 그닥 많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 쉽고 재밌는 책을 '완독'의 성취감을 줄 수 있는 '포켓북 버전'이라고 소개해도 무방할 것이다. 단지 이 '지대30분고전' 시리즈는 eBook으로만 출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살짝 아쉬울 따름이다. 예쁘고 깜찍한 '문고판' 형식으로 출간이 되었어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부담없이 수준 높은 교양을 쌓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요즘에는 누구나 손에 들고다니는 '스마트폰'이 있으니 전자책으로 나온 것도 시기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긴 '종이책'을 여전히 좋아하는 나조차 요즘에는 부쩍 '전자책'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노안이 찾아와서 '작은 글자'가 잘 뵈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그렇지 않다고 깨톡을 날리는 모양이다.

 

  암튼, 책의 내용은 이렇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를 통해서 우리에게 우주를 친숙하게 만들어주었다. 그가 나사에 몸을 담고서 참여한 프로젝트만 59년 마리너 계획(금성), 69년 아폴로 계획(달), 72년 파이어니어 10호(목성), 73년 파이어니어 11호(토성) 계획, 75년 바이킹 계획(화성), 77년 보이저 계획(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직접 참여했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미국 나사는 그의 뜻을 기리며 꾸준히 우주탐사를 진행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사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우주를 친숙하게 만들어준 그는 '외계인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아서 모든 프로젝트에서 '생명체의 존재'를 찾아 헤매곤 했다. 그래서 <코스모스>를 읽으면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서 지구로 찾아올 외계인에게 "여기에 지구인이 살고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노력 또한 느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보이저 호'에는 혹시 만날지도 모르는 외계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메시지'가 황금 레코드에 실려 지금도 태양계 밖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이 보이저 호에는 '한국어' 메시지도 담겨 있어 한국의 7080세대 가운데 '천문학자'를 꿈꾼 이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말이다. 안타깝게 성적이 살짝 모자라서 '천문학도'는 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처럼 <코스모스>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주의 신비'를 파헤쳐주는 동시에 '어딘가에' 꼭 있을 외계인의 존재를 찾으려는 세이건의 노력이 담뿍 담긴 책이다. 그래서 그 방대한 내용을 탐독하다보면 누구라도 '외계인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현재까지 태양계 안에서 '생명체의 존재'를 확인한 바는 없으며, 지금까지 관측한 결과에서도 '외계인의 존재'는커녕 지구 행성 말고 다른 곳에서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코스모스>는 폐기처분해야 할 책일까?

 

  당연히 그건 아니다. 왜냐면 우주가 너무나도 넓기 때문이다. 77년에 쏘아올린 보이저 호조차 2024년 현재 '태양계'를 벗어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보이저 호가 명왕성의 궤도를 벗어나 더 멀리 날아가긴 했지만, 태양계의 범위 안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르트 구름'에 이제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 구름을 벗어나는데만도 지금까지 날아간 거리만큼 더 멀리 나아가야 겨우 '태양계 밖으로' 나가 항성과 항성 사이의 '텅빈 공간'에 접어들게 된단다. 이렇게나 큰 태양계조차 '우리 은하'에 비춰보면 조그만 점에 불과할 뿐이고, 우리 은하를 포함한 '은하단'에 견주면 깨알 같은 점으로도 표시할 수 없는 범주일 뿐이며, 온 우주에 비하면 감히 언급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우주인 셈이다. 이렇게나 넓고 넓은 우주에서 오직 '지구 행성'에만 지적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비효율적인 '공간낭비'냔 말이다. 바로 칼 세이건이 한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주를 연구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곳에 우리 모두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지적능력은 '지구밖까지' 뻗어나가고 있는데, 우리보다 훨씬 더 지적능력이 뛰어날 것이 틀림없는 '외계인'들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지구 행성'에서만 갇혀 있다면 우리는 지적인 생명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직무유기'를 하는 셈일 테니 말이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한 장면처럼 운명적인 만남을 성사시켜야 할 숙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물론 '숙제검사'를 할 존재는 없다. 그러나 숙제를 꼭 검사받는 맛으로 하는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칼 세이건은 생애를 통해서 오직 이것 '숙제'를 하기 위해 온 생애를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숙제'를 하다 뜻하지 않은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태양계 개발'을 통해서 인류가 지구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멀지 않은 미래에 실현하게 될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달'이 될테고, 그 다음엔 화성, 수성, 그리고 커다란 행성의 위성들에도 정착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외계인'과도 조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광활한 우주도 비로소 '우주마을'로 축소되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칼 세이건의 꿈이 담긴 <코스모스>에 오롯이 새겨진 것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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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동물대탐험 3 : 반가워 제돌아 - 돌고래와 바다 친구들 최재천의 동물대탐험 3
최재천 기획, 박현미 그림, 황혜영 글, 안선영 해설 / 다산어린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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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인걸까? <성경>에 따르면 조물주께서 온세상에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고서는 "네가 세상 모든 것들의 주인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훗날 인간들은 이를 근거로 온세상을 제것인 것마냥 제멋대로 행동한 결과는 '지구온난화', '해수면상승', '기후위기', '미세먼지', '미세플라스틱', '방사능오염수 방류' 등등 한마디로 전지구적인 재앙을 초래하고 말았다. 세상 그 어떤 동식물도 전지구적인 파괴를 일삼지 않는데, 오직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신들의 터전인 자연환경을 망치고, 생태계를 파괴하며, 결국은 동족인 인간마저 스스로 절멸시켜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는데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황송한 표현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잠시, 책 내용으로 들어가서, 3편에서는 '개미박사(최재천)'가 바닷속에서 '제돌이'와 재회하는 장면이 나오게 된다. 1~2편에서 밀림을 탐험하며 '의태'와 '진화'에 대해서 알아보던 동물탐험대원들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해양생물의 신비로움'에 대해서도 연구하게 된다. 그렇게 수많은 동물들을 만나다가 '제주 남방큰돌고래'인 제돌이와 재회하게 된다. 제돌이는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쇼를 공연하던 남방큰돌고래로 많은 인기와 사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넓은 바다를 헤엄쳐야 할 돌고래가 좁은 수족관에서 지내는 것이 '동물학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이 시민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고, 더구나 제돌이의 경우에는 '불법포획'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제주도 바다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자칫 적응을 못하면 어떡하느냔 걱정도 했었지만, 체계적인 관찰보호를 거쳐 바다에 방류한 탓에 무사히 돌고래 무리와 합류하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 책이 꾸며지게 된 것이다. 특히, 최재천 박사님이 직접 제돌이 방류 프로젝트에 참여한 탓에 더욱 생생하게 그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시, 제돌이와 함께 들어간 바닷속의 풍경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멸종위기종인 '귀신고래의 사채'가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사채속에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가 널려 있는 모습은 이 책의 주제와는 상관없이 '비극'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어찌 하다 고래의 뱃속에 '쓰레기'가 가득했고, 깊은 바닷속에서도 인간들이 먹고, 쓰다가 버린 '쓰레기'들이 그득했던 것일까? 그건 어리석은 인간들이 돈 몇 푼 아낄 요량으로 바다에가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린 탓이다. 그렇게 버린 '쓰레기'를 해양생물들은 아무 것도 모른채 먹은 것이다. 그리고 뱃속에서 소화도 되지 않고 배출도 되지 않고서 죽을 때까지 '몸속'에 담고 다니게 된 셈이다. 그렇게 소화가 되지도 않는 쓰레기를 먹은 해양생물들은 배가 고픈데도 배가 더부룩하니 불러서 더는 먹지 못하고 굶어죽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왜 인간들은 바다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일까? 첫째는 '비용절감' 때문이고, 둘째는 땅속에 매립할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냄새도 나지 않고' 감쪽같이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과거 서울시민들이 쓰레기매립장으로 쓰던 '난지도'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요즘 어린이들은 '서울의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현재 '상암 하늘공원')를 모를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함부로 버린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참으로 궁금하기도 할 텐데, 대부분은 '쓰레기소각장'으로 들어가 연기가 되어 버리지만, 산이나 강, 그리고 계곡 따위에 함부로 몰래 버린 쓰레기들이 장마나 홍수 때 빗물에 쓸려 바다로 흘러간 뒤에 바다밑바닥에 쌓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바다에 쓰레기를 몰래 버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그렇게 버린 쓰레기들이 큰바다에서 다시 모여 거대한 대륙과 같은 '쓰레기섬'이 되기도 한다는데, 머지않은 미래에는 바다생태계가 망가져서 인류는 결국 굶주리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는 메시지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인류 종말을 대비한 씨앗저장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인류가 재앙에 가까운 일을 겪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 노르웨이령 스피츠베르겐섬에 '스발바르 국제 종자 저장고'를 만들었는데, 세계 100여 개 기관에서 100만 종 이상의 씨앗을 현재 저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씨앗들은 '지구 최후의 날'에 개봉할 예정으로 현재는 꽁꽁 잠겨있고, 연구목적을 위해서만 아주 조금씩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저장고의 문을 여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인간은 더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해온 행동들을 볼작시면 당연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망가뜨린 지구의 자연환경을 되살릴 수 있는 '지혜보따리'도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면 좋겠다. 더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쭐함은 버리고, 인간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세상의 모든 생물이 다 소중하다는 진실을 깨닫고 행동한다면 지구의 미래는 한층 밝아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로 절박할지라도 우리의 후손들도 아름다운 자연환경속에서 깨끗하게 살게 해주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과 동물은 쫌 '따로따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 인간은 '도시'에, 동물은 '야생'에 따로따로 말이다. 물론 '전원풍경'이 펼쳐진 자연과 마을이 어우러진 한적한 시골마을도 있겠지만, 농사와 어업, 그리고 산촌 지역을 제외한 별도의 '야생동물보호구역'을 마련해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꾸어나가며 인간들의 손길이 닿지 않고 발길이 머물지 않은 자리를 만들면 분명 효과적일 것이다. 이제 인간만을 생각하다가는 모두가 다함께 끝장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을 최고조로 올려야 할 것이다. 안 그럼, 정말 큰일이 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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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3
아서 C. 클라크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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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의 마무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목성이 스스로 빛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태양계에는 '2개의 태양'이 존재했고, 또 하나의 이름은 '루시퍼'라 불렀다. 왜 악마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좀 나중으로 미루고...

 

  실제로 목성이 '항성(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이론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목성은 '행성'치곤 상당히 큰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천문학자들은 목성의 질량이 조금만 더 무거웠다면 태양계는 '쌍성계'가 되었을 것이고, 우주 곳곳에는 '쌍성계'가 훨씬 더 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태양처럼 질량이 작은 별이 홀로 빛나고 행성도 이렇게나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특별한 경우라고 지적하곤 한다. 하지만 태양계가 '쌍성계'였다면 지구에 이렇게나 많은 생명이 태어나긴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면 생명은 '밤'에 더 많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이 한낮보다는 달빛이 은은한 밤에 '잉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등동물'일수록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잠을 자야 하는데, '두 개의 태양'이 번갈아 뜨게 되면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는 '밤의 시간'이 줄어드는 탓에 생명이 번성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지적하는 과학자들도 많다. 더구나 '야행성 동물'의 경우엔 잠보다 더 중요한 '먹잇감 구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어 '동물의 번성'에 큰 차질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생태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질 것이 분명하단 말이다.

 

  그런 까닭에 엉뚱한 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번성하게 되었다. 바로 목성의 위성이었던 '에우로파(유로파)'다. 이제는 목성이 행성의 지위에서 승격을 하여 '항성(태양)'이 되었으니, 에우로파도 당당히 '행성의 지위'를 얻게 된 셈이다. 2권의 초반에 중국의 우주선이 에우로파에 '연료보급'차 착륙을 했다가 괴생명체에 의해 우주선이 파괴되고 유일한 생존자는 '그 사실'을 알리고서 조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비록 소설속 이야기지만 '에우로파'에 생명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셈이다. 그러다 목성의 주변에 있던 '티코석판(TMA-1)'이 불현듯 사라졌다가 목성을 '새로운 태양(루시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행방불명이 되었던 데이비드 보먼이 존재를 나타냈고, 새로운 메시지도 전달했다. [이 모든 행성들은 에우로파를 제외하곤 당신들 것입니다. 에우로파에는 착륙을 시도하지 말길.] 

 

  과연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3권의 시작은 '루시퍼 탄생'으로부터 50년이 훌쩍 지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 '에우로파'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그리고 왜 하필 50년 뒤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던 걸까? 이런 이야기의 맥락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상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1986년에 지구를 찾아왔던 '헬리 혜성'이 76년 뒤인 2062년에 다시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전편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헤이우드 플로이드 박사가 바로 '헬리 헤성'에 직접 착륙해서 탐사를 하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실제로 2003년에 일본 탐사선 '하야부사'가 소행성에 착륙해서 시료를 채취한 뒤 2010년에 성공적으로 귀환한 일이 있었기에, 소설에서 '헬리 혜성'에 착륙해서 탐사를 마치고 유유히 떠나는 장면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비록 하야부사도 무사귀환에는 실패하고 우여곡절 끝에 시료를 채취한 '캡슐'만을 무사히 보낸채, 지구의 대기권 속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지만, 앞으로 더욱 기술발전을 이룬다면 '혜성탐사' 정도는 우아하게 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암튼, SF소설 <206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혜성탐사를 무사히 마친 플로이드 박사가 자신의 손자인 크리스 플로이드가 불시착한 '에우로파'로 구조를 떠나면서 이야기가 더욱 흥미진진해지게 된다. 과연 '접근금지명령(?)'을 보낸 에우로파에서 무사히 구조작전이 성공적으로 마치게 될 것인가? 이쯤해서 태양계의 새로운 별 '루시퍼의 등장'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사실 태양계의 이름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족보'에서 따오기 마련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말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성경'에 나오는 악마(사탄)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다니..과연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

 

  사실, '루시퍼'는 하느님을 따르는 대천사의 이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를 짓고 '타락천사'가 되었으며, 하느님의 명을 거역한 악한 정령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탄'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목성'을 스스로 빛나게 만든 '티코석판'이 어떤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복선을 깔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에우로파 행성'은 진정한 악의 소굴이 될 거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곳에 불시착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서 클라크가 '사악한 악령'을 외계생명체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락천사(루시퍼)'의 다른 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루시퍼가 왜 천사의 신분으로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지 말이다. 하느님은 죄 많은 인간들을 벌 주고자 했단다. 그 명을 받은 천사가 바로 루시퍼였고 말이다. 그런데 명을 받고 내려와 벌을 내리려고 하니, '죄를 받아 마땅한 인간들'이 아니라 '불쌍한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루시퍼의 눈에는 말이다. 그래서 불쌍한 인간들이 '회개'를 하고 벌을 면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했는데, 그것이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가 되어 루시퍼가 '대신' 벌을 받게 되었더란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루시퍼는 '타락천사'가 아니라 죄 많은 인간들 '대신' 벌을 받은 메시아(구원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와 그닥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이런 '루시퍼'를 악마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우주를 방랑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더욱 흥미를 더해간다. 곧 마지막 4권의 이야기도 풀어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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