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순의 천일야화 1 - 첫날밤의 맹세
양영순 지음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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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아라비안 나이트>라고 알려져 있는 이야기는 사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알라딘의 요술램프', '신드밧드의 모험' 등이 대표적으로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제목으로 묶여 나오곤 한다. 그렇지만 <아라비안 나이트>만으로는 이 책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원래의 제목은 <천일야화>, 다시 말해, '천하룻밤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야화'라는 말에서도 느낌이 팍팍 오듯 <천일야화>는 세상의 모든 야한 이야기는 다 담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한 뿐만 아니라 꽤나 폭력적이기까지 한 탓에 '진정한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소개해도 모자를 정도다.

 

  이토록 야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라면 '양영순 작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누들누드>로 널리 알려진 양영순 작가는 우리 나라 '웹툰의 선구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이 '단행본'으로 나오긴 했지만 애초에 '웹툰'으로 그려진 탓에 '스크롤'을 휙휙 내려가며 읽는 맛이 일품인 작품이기도 하다. 허나 <양영순의 천일야화>가 연재될 당시에는 웹툰이 그닥 활성화되던 시기가 아니었던 탓에 '수익'을 그리 낼 수 없었고, '단행본'으로 출간을 해야 겨우...쿨럭쿨럭.. 어디서 주워 들은 풍월은 있어서 나불거렸지만, '그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암튼, <천일야화>를 만화로 그린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양영순'만한 작가가 더는 없다고 봐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천일야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왕국을 다스리는 임금이 잠시 궁을 떠나 업무 겸 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아름다운 왕비가 '식스팩의 꽃미남 노예'와 놀아나곤 했는데, 임금이 깜빡 잊고 온 것이 있어 다시 궁으로 되돌아가보니 '자신의 궁'에서 '자신의 여자'가 '자신의 노예'와 '자신의 침실'에서 껴안고 뒹굴고 있는 장면을 직접 확인하고 난 뒤에 '여자에 대한 신뢰'는커녕 '여자'라는 존재를 절대 믿지 못할 짐승처럼...아니 '짐승'이라면 주인의 말에라도 절대 복종할 줄 알기에...짐승보다 못한 천박한 암컷으로 확신하게 된다는 슬픈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런 충격은 받은 임금은 그날부터 '첫날밤'을 치룬 뒤 자신의 아내인 왕비를 아침에 목을 댕강 잘라 처형해버리는 잔혹한 짓을 벌이기 시작한다. 왜냐면 왕국을 다스리는데 '국모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는 죄다 '남편 몰래 불결한 짓거리를 일삼는 천박한 암컷'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임금은 왕국의 처녀와 하룻밤을 보내고 죽여버리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왕국 안의 처녀란 처녀는 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왕국의 병력을 총괄하는 대장군의 여식인 '세라자드'가 임금의 새왕비가 되겠다고 자청을 한다. 당연히 대장군은 반대하지만 세라자드는 자기만의 꿍꿍이가 있다며, 다음날 아침, 임금과 혼례를 올리고 '첫날밤'을 보낸다.

 

  원래대로라면 임금은 세라자드도 날이 밝으면 죽여버려야 했지만, 임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첫날밤'이 지났지만 '첫날밤'을 치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금은 '둘쨋밤'에 '첫날밤'을 치루고 처형하려 했으나, 그도 역시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셋째밤', '넷째밤', 그리고 '천밤'이 지나고, '천하룻밤'이 되었을 때야 '첫날밤'을 보낼 수 있었으나, 임금은 세라자드를 죽일 수가 없었다. 그 길고도 긴 '천하룻밤'동안 임금은 '재미난 이야기'를 듣느라 밤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사연인 즉슨, 세라자드는 첫날밤부터 천밤까지 밤마다 임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알라딘의 요술램프>, <신드밧드 선원 이야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등의 이야기도 모두 여기서 나왔다. 그밖에도 각양각색의 섹스와 폭력이 난무한 이야기로 임금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임금의 '거시기'까지 세웠다 죽였다 다시 세웠다를 무한반복한 덕분에 임금은 그동안 저지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세라자드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 골자다.

 

  그렇다면 <양영순의 천일야화>는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만화를 전공 삼아 대학을 다닐 때부터 "섹스와 폭력이 난무한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라는 당찬 포부를 밝혔기 때문에 원작소설을 능가하는 작품을 펴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아니다. 원작에 충실했으나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도 그랬다. 그도 '순수창작'이 아닌 원작을 베낀 작가였을 뿐이었으나, 그의 작품은 늘 '원작'을 뛰어넘는 '무엇'으로 가득한 것처럼, 양영순도 섹스와 폭력이 난무한 <천일야화>의 골자는 고스란히 빌려왔으면서도, 양영순만의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천일야화 1권을 살펴보자.

 

  매일밤 악몽을 꾸는 샤리아르 왕이 있다. 그가 절대권력을 갖춘 왕인데도 악몽을 꾸는 까닭은 딱 하나다. 사랑했던 왕비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죽여버렸고, 그 이후에 들인 새왕비들조차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모조리 다 죽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샤리아르 왕은 '폭군'이었다. 그래서 매일밤 악몽을 꾼다.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말이다. 그러고보면 샤리아르 왕도 아주 나쁜놈은 아닌 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대장군의 딸 세라쟈드가 자진해서 왕의 새왕비가 되길 청한다. 물론 죽으러 가는 건 아니다. 끝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자신을 죽을 틈조차 없게 만들 생각으로 갔다면, 너무 뻔한 스토리일 것이다. 그래서 세라쟈드는 '이야기 치료사'라는 설정을 가져왔다. 매일밤 악몽을 꾸던 샤리아르 왕은 새로 들인 왕비가 '이야기 치료'를 할 줄 안다는 말을 듣고, 미심쩍지만, 치료를 받아보기로 한다. 이야기는 시작되고 샤리아르 왕은 꿈속인듯 현실인듯 인식하지 못하는 '이야기'속으로 곧장 빠져들고 만다.

 

  세라쟈드가 들려준 첫번째 이야기는 '마신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상인 이야기'다. <천일야화>에서 등장하는 '마신(魔神)'은 신도 아니고 악마는 더욱더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램프의 요정, 지니'를 떠올리면 좋을 듯 싶은데, 이게 디즈니가 요상하게 변형시켜 버려서 '마신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암튼 악마는 아니지만 악마보다 더 무시무시한 존재이면서, 결코 신(이슬람교는 유일신 알라뿐이다)도 아니지만 전지전능한 능력을 갖춘 존재라고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양영순은 '마신'을 괴물같은 존재로 그려놓았다.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믿고 이야기에 몰입해야만 한다. 어느날 상인이 우연히 던진 돌에 맞아 '마신의 아들'이 죽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아들이 죽은 마신은 분노에 겨워 상인을 단박에 잡아먹어버리려 하지만, 상인은 울면서 용서를 빌며 자신에게는 세 딸이 있으며 그 딸들에게 자신이 '죽는 이유'라도 알리고, 자신이 '죽기 전'에 처리해야할 일들을 다 할 때까지만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하게 된다. 이 조건을 수락한 마신은 상인을 약속대로 살려준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돌아온 상인은 마신과 한 약속대로 일을 처리하고서 다시 마신을 찾아가 죽기로 각오하지만, 사랑하는 딸들과 만나고나니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되려 마신을 잡아서 죽일 수 있는 '마신사냥꾼'을 고용해서 자신의 목숨을 살리려고 한다. 허나 '마신사냥꾼'은 마신보다 더 나쁘고 사악한 놈들이었다. 그놈들은 순진한 상인을 속이고 난 뒤에 '약속대로' 상인의 목숨은 살려주지만, 상인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세 딸들을 '마신사냥꾼'들이 가로채서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로써 상인은 가진 재물도 모두 잃고 사랑하는 세 딸도 빼앗기고서 겨우 목숨만 살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다 듣고난 샤리아르 왕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흔히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고들 하지만, 정작 목숨을 지키고나니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상인과 마신은 '순진한데' 반해서 마신사냥꾼들은 이렇게 순진한 존재를 속이며 모든 것을 앗아가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마신'은 샤리아르 왕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빼앗긴 것에 분노해서 빼앗아간 원흉에게 '죽음'을 내놓으라고 명령을 내리는 무서운 존재였지만, 그런 마신 또한 '마신사냥꾼'에게는 속여먹기 딱 좋은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였을 뿐이다. 만약 샤리아르 왕을 가리키는 인물이 '상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우연한 사고로 하나 뿐인 목숨을 잃어버릴 뻔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허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모두 빼앗기고 빈털털이가 되고 보니, 자신이 품었던 알량한 분노가 하찮게 보일 지경이었다. 과연 세라자드는 이 모든 것을 간파하고 샤리아르 왕에게 감히 '직언'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세라쟈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 권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가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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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어벤저스 1 : 전염병, 응급 센터를 폐쇄하라! - 어린이 의학 동화 의사 어벤저스 1
고희정 지음, 조승연 그림, 류정민 감수 / 가나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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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이 되자 논술공부방을 접어야만 했다. 급작스럽게 대유행하기 시작한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해 아이들과 '대면수업'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임시휴업'과 '수업재계'를 반복하다가 이듬해에 공부방을 잠시 닫고 병원에 취직을 했다. 그렇게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기에 나는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돈은 벌어야 했기에 말이다. 물론 '전문의료진'으로 일을 했던 것은 아니다. '비의료진'이고 '비정규직'이었을 뿐이다. 대한민국 남성 가운데 마흔을 훌쩍 넘기면 '정규직 채용'이 가능한 곳이 거의 없다. 이것이 대한민국 99% 노동자가 겪는 슬픈 현실이다. 비정규직은 언제든 쉽게 '해고 가능'한 것이 기업활동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동인권' 같은 배려는 눈을 뜨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다. 그저 쉽게 채용해 쓰다가 편리하게 해고해 버릴 뿐이다. 암튼, 큰 병원에서도 '비정규직' 근무자가 많다는 사실만 알아두면 병원을 조금 더 유용하게 이용하실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에 다시 말해보자.

 

  이 책, <의사 어벤저스>는 '어린이책'이지만, 어렵고 복잡한 '의료지식'과 더불어서 '병원근무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알려주는 훌륭한 책이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크게 '전문의료진'과 의료진들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비의료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의료진은 의료현장에서 마주치는 '의사', '간호사'와 병원의 업무를 총괄적으로 전담하는 '상급부서'에서 일을 하는 분들이다. 이들은 진료와 의료활동에 대한 지식을 갖춘 '전문인'이기 때문에 이들의 빠른 진료와 치료로 수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료진들만 병원에서 근무하는 것이 아니다. 의사의 업무를 보조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간호사'인 것처럼, 간호사의 업무를 도와주고, 병실의 청결 및 관리를 위해서 일하는 필수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비의료진'들인데, 우리는 이들을 흔히 '조무원', '미화원', '경호원', '수납원', '관리원' 등등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서, 병원업무는 의사와 간호사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비의료진'들의 감춰진 헌신에 의해서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병원의 일상을 살짝 들여다보자. 수술실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환자를 살리기 위해 헌신을 다하는 현장을 상상해보라. '의학드라마'를 재미나게 보셨을테니 상상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환자가 입원을 하고 병실을 배정받고 수술일정과 예약, 그리고 수납까지 수많은 병원업무는 '누가' 할까? 병실에 입원한 환자를 수술실까지 옮기는 일은 '누가'할까? 수술실에 정전이 되지 않게 하려면 '누가' 철저히 준비해야 할까? 수술실에 있는 수많은 기기들이 고장이라도 나면 '누가' 고칠까? 수술이 끝나고 난 뒤에 다시 수술을 할 수 있도록 99.9% 무균을 유지하기 위해 '누가' 깨끗하게 청소할까? 수술실 밖에서 보호자들이 애타게 기다리다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 난동이라도 부리게 되면 '누가' 이들을 진정시키고 상황을 통제할까? 이런 수만 가지 '잡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바로 'ㅇㅇ원'으로 끝나는 비정규직들의 숨겨진 노고 덕분이다. 물론 작은병원에서는 '의료진'들이 이 모든 일들을 다하지만, 대학병원 같은 '대형병원'은 너무 크기 때문에 '의료진'만으론 병원업무를 모두 다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은 대형병원에서 조금이라도 불만이 생기면 의료진들에게 직접 대면해서 하소연할 수가 없다. 이들은 칭찬받을 때에만 잠시 얼굴을 보여줄 뿐, 비난 받거나 불만을 토로하면 가장 먼저 뒤로 빠진다. 그리고 '비의료진들'에게 떠넘겨지면서 온갖 쓴소리를 다 듣게 만든다. 그렇게 대형병원에 방문하게 되면 가장 먼저 '비의료진들'과 대면을 하게 된단 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담당자, 불러와~!"라고 언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더욱더 '비의료진들'만 만나게 된다. 그래서 원만하게 해결이 되지 않으면, 병원은 그 책임을 가장 먼저 '비의료진'에게 물으며 '해고통보'를 한다. 왜냐면 가장 쉽게 자를 수 있고 '다시 뽑아 쓰면' 되기 때문이다.

 

  암튼, <의사 어벤저스> 1권에서 다루는 내용이 '코호트 격리'에 이르게 된 '어린이 전문 응급센터'다. 다시 말해, 전염병으로 인한 '환자 확산'을 막기 위해서 병원 폐쇄라는 강력한 조치가 취해졌다는 말이다. 우리 나라도 '메르스', '코로나19'로 인해 이러한 '격리 조치'가 전국적으로 취해진 경험을 직접 겪었으므로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이 2021년이라 '코로나19'의 변종인 '코로나알파바이러스'에 따른 병원 폐쇄를 주요 내용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가뜩이나 병원 수가 적은 '어린이병원(소아전문응급병원)'이 코로나알파 감염으로 인해 문을 닫게 되는 상황이 펼쳐지니 매우 급박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린이 의사'인 강훈, 장하나, 이로운, 구해조, 4면의 어벤저스가 활약한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실제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사실적'으로 펼쳐져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단순히 어린이를 위한 '의학지식'만 다룬 것이 아니라 감염병으로 인해서 벌어질 수 있는 '병원업무'부터해서 '언론', '매스컴'을 비롯한 '병원홍보'까지 다루고 있어 웬만한 '의학드라마'를 초월하는 생생한 현장을 고스란히 담아놓았다. 심지어 20세 이하의 어린이의사들인데도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전문적인 일이다보니 어른들이나 겪을 법한 '직장내 스트레스'까지 다루고 있어서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서 어린이책에 걸맞지 않은 안타까운 '노동현실'을 리뷰에 담아본 것이다. 책에서는 다루지 않는 '감춰진 일들'이지만 말이다.

 

  다행히 응급으로 방문한 환자는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고, 대규모 확진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던 위급한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한 의료진 덕분에 일상으로 빠르게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해피엔딩'이 가능했던 까닭도 바로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아낌없는 협조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현장 메뉴얼'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국가적인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면 바로 이 세 가지가 모두 절실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언제나 '의도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럴 때마다 일일이 '진위파악'이나 하고 있고, '책임자 추궁' 따위만 일삼고 있으면, 사고는 일파만파로 퍼지고 더 많은 희생자만 만들 뿐이다. 또한, 사고 해결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응원해주지는 못할망정 비도덕적으로 조롱하고, 비상식적으로 악담하며, 비이성적으로 '가짜뉴스'를 퍼뜨리는데 열을 올리는 또라이들도 있다. 거기에 '컨트롤타워'가 되어야 할 정부관계자가 '일이 되게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는커녕, 사고 해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현장방문 사진찍기', '브리핑 준비' 따위로 경호인력과 언론인들을 몰고 다니고,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 현장관리자들이 하릴없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 따위는 정말이지 대가리에 총 맞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이다.

 

  한편, 병원에서 '고마운 일'을 겪었을 때에는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었으면 한다. 병원이라는 곳이 기쁜일보다 마음 아픈일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장소다. 더구나 '대형병원'에서는 여전히 '마스크의무착용'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팬데믹은 종식을 선언했다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코로나', '독감' 등과 같은 감염병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선 더욱이 '감염에 취약한 환자'가 더 많은 법이다. 그러니 잠시동안 불편을 감수하고 '마스크'만이라도 꼭 착용해주길 바란다. 병원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은 여전히 온종일, 그리고 일년 365일, '마스크착용중'이다. 그래서 환하게 웃는 표정조차 지을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병원근로자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는 그야말로 활력소가 될 수밖에 없다. 99분이 따뜻한 위로를 전해도 딱 한 명의 '진상짓'을 하는 내원객 덕분에 마음에 상처를 받으며 수명을 깎아먹기 일쑤다. 그러니 제발 '같은 노동자 처지'까리 서로 마음을 다치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고마운 일을 겪게 되면 조금 귀찮더라도 '칭찬카드'라도 써주면, 쉽게 잘리는 '비정규직'일지라도 조그만 혜택을 주니, 정말 고마운 일을 겪게 되면 아낌없이 칭찬해주시길 바란다. 그게 '고용불안'으로 걱정이 많은 비정규직들에게 가장 큰 보탬이 되는 일이니 말이다. 물론 헌신을 다해 생명을 살리는 '의료진들'의 노고에도 박수 쳐주시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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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나무 숲 - 완전판
하지은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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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은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놀라울 정도의 '흡입력'으로 읽는 내내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만들고, 시선은 행간을 뚫고 아래로아래로 내리꽂게 하며, 귀에선 천재음악가들의 음률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정말 대단한 소설이었다. 근데 말이다. 언제나 '극찬'을 마치고 나면 어딘가 구멍이 숭숭 뚫린듯한 헛헛함에 빈구석을 채우기 위한 '비판'을 찾기 마련이다. 뜨거운 조명 아래서 배우들의 열띤 연극이 끝나고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던 관객들까지 모두 떠난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은 것처럼 말이다. 한 편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차가운 '분석'만 남고 만다. 이제 하지은의 소설을 처음으로 접한 '나의 리뷰'가 공연될 차례다.

 

  음악을 소재로 한 소설은 드물다. 귀로 듣는 음악이 가능한 뮤지컬, 오페라, 연극, 영화, 드라마 장르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음악'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만화'로는 음악을 표현한 것들이 부쩍 늘기도 했다. 비록 귀로 들을 수는 없는 '그림'이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와, 음악을 듣는 청중, 그리고 '그림'으로 그린 음표와 선율 따위로 음악이 전하는 감동을 나름대로 표현하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은 오직 글로만 음률과 박자, 그리고 멜로디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오직 '상상력'만을 발휘하도록 만들 뿐이다. 그래서 음악을 소재로 삼은 소설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크게 히트를 한 작품을 아직까지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책 <얼음나무 숲>도 전형적인 '음악소설'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판타지소설'이나 '추리/공포소설'로 분류해야 마땅할 정도로 기괴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하지은 장르소설'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녀의 다른 책들도 좀더 읽어보아야겠지만 말이다.

 

  암튼, <얼음나무 숲>의 첫 인상은 '그로테스크'였다. 기괴하다는 뜻인데, 음악으로 가득한 도시라는 설정도 뜻밖이었고, 그런 곳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 것도 의외였고, 그 사건속에서 밝혀지는 살인자가 '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도 정말 상상밖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얼음나무 숲>은 영락없는 '추리소설'이다. 실제로 살인사건을 파헤치며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용의선상'에 오르고 '피해자'로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인자가 밝혀지기까지 참으로 미스테리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판타지소설'로 읽을 수밖에 없다. 애당초 '가상의 도시, 상상의 현실'에서 그려지는 소설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도 소설의 초반부에는 '천재적인 음악가'들이 등장하며 전형적인 '로맨스소설'로 시작한다. 아니, 그렇기엔 '남녀커플'이 아니라 '남남커플'인 관계로 '브로맨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추리소설'과 '판타지소설', 그리고 '브로맨스소설'이 한데 어우러져 있으니, 어찌 기괴하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거기다 살인사건의 모티브가 되는 것은 음악도시 '에단'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니,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공포스럽다'고 표현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것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얼음나무 숲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악마가 실체를 드러냈다. 납량특집이 따로 없다.

 

  전반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언제나 음악이 들리고, 음악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음악도시, 에단에 천재적인 연주자 세 명이 등장했다. 하지만 수많은 청중들이 열광하는 인물은 오직 한 명이다.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아나토제 바옐'이다. 그 바이올린 신동이 세계투어를 마치고 에단에 돌아오자, 곧이어 '악기경매'가 펼쳐졌고, 그곳에서 전설적인 악기 '여명'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바옐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J 카논이라는 악기장인이 자신의 혼을 갈아넣어서 만들었다는 딱 하나 뿐인 바이올린인데, 여명을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었다는 소문과 함께 '30년' 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마침맞게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등장하자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제 관심은 바옐이 여명을 연주하고도 살아남느냐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옐이 여명을 연주하고 오랫동안 감춰졌던 '얼음나무 숲'으로 가는 길을 열자마자, 한 여인이 하룻밤 사이에 수십년 동안 방치되어 버린 것처럼 썩어버린 채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여명'이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공교롭게도 그 죽은 여인은 바옐이 연주하던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여명의 소리를 들었다는 정황이 밝혀졌다. 정말로 여명은 살인을 저지르는 악기였단 말인가? 근데 왜 연주를 한 당사자가 아니라 연주를 '들은' 사람이 죽었던 것일까? 혹시 그동안 여명을 연주했던 연주가의 실력이 형편없었기에 연주가들이 죽었었는데, 이번에 새로 주인이 된 '바옐'은 천재적인 연주가였기 때문에 살아남고, 오히려 듣는 사람의 수준이 떨어지면 죽게 된 것일까?

 

  하지만 이런 예상은 가뿐하게 즈려밟고 엉뚱한 피해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름 아니라 '바옐'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사람들, 또는 '바옐의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인물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바옐은 아예 연주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옐이 가장 아끼던 사람들이 죽기 시작하는데, 바옐은 사랑하던 사람들을 위해서 '진혼곡'을 연주하기에 이르렀고, 바옐의 진혼곡은 듣는 이로 하여금 미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바옐의 진혼곡을 듣기 위해 좀비처럼 달려들기 시작하는데, 과연 진정한 살인자는 누구이고,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음악을 사랑하는 도시 에단은 점점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둘 죽어나가는 '연쇄살인의 도시'로 변모하게 된다. 도대체 '살인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런데 살인자의 실체는 뜻밖의 실마리가 잡히게 되고, 바옐과 그의 절친 '피아니스트 모르페'는 그 살인자와 살인사건을 막기 위해 '얼음나무 숲'으로 달려가게 된다. 과연 그 숲에서 벌어지는 결말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음악이 살인의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가? 그 비밀이 모두 풀리게 된다.

 

  그런데 '살인사건'과는 별개로 달달한 로맨스가 동시간대에 펼쳐진다.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 사이에 말이다. 물론 둘 다 남자지만, 천재 음악가이기에 그 둘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 찐하다. 더구나 그들의 신분은 평민과 귀족, 그렇기에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야기'가 펼쳐지는 셈이다. 하지만 그 둘의 사랑은 '육체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관계'였기에 더욱 애뜻하게 펼쳐진다.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짝사랑'은 실체하지만, '짝우정'은 듣도 보도 못했기에, 그 둘의 사이는 '우정'보다는 '사랑'에 어울릴 것이다. 까닭인즉슨, 어릴 적부터 천재, 신동 소리를 듣던 바옐은 첫 눈에 초보 피아니스트 모르페를 보고서 '천재'인 걸 알아챘던 것이다. 그래서 바옐은 모르페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연주를 해왔던 것인데, 모르페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와 함께 '반주'를 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에 겨워 자신의 모자란 실력 따위에 자격지심을 갖기는커녕 되려 '바옐과 함께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해버리는, 아니 오히려 천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연주하며, 바옐을 '동경'해 마지 않는 '단 하나 뿐인 청중'이 되기 위해 열심이다.

 

  반면에 바옐은 자신을 이길 생각도 없이 그저 함께 연주하는 것으로 만족해버리는 모르페가 점점 실력이 늘어 자신의 실력을 앞지를 정도로 실력이 부쩍 늘어나는 것을 보고 질겁을 하게 된다. 허나 어릴 적부터 천재소릴 듣던 바옐이기에 겉으로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실력을 향상시키며 모르페에게 범접하지 못할..아니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인식을 콱 심어주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위치까지 쑥쑥 성장하는 모르페를 바라보면서 진정한 천재는 자신이 아니라 '모르페'라는 위기감에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결코 티를 내지 않곤 한다. 그러면서 둘은 '함께' 연주를 하며 서로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좋은 친구가 되어 버렸다. 비록 모르페가 바옐을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허나 둘 사이를 가로막는 딱 하나의 문제점이 있다. 바로 '음의 언어'를 이해하는 바옐과 그렇지 못하는 모르페였기 때문이다. 바옐은 어느날 자신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에서 '음'이 '말'로 들리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바옐은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한음 한음에 실어서 들려줄 수 있는 실력을 갖게 되었고, 급기야 연주를 하면서 '음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바옐은 거기서 심각한 공포를 느껴버렸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공포 말이다. 자신은 열심히 말하는데 상대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말에 '응답'하지 못하는 고독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절망에 빠져서 살게 된 셈이다. 한편, 모르페는 바옐의 연주가 '보통의 연주'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끝내 '바옐과는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오직 한 명인 '단 하나뿐인 청중'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남들이 자신을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부르게 된 까닭도 바로 '바옐의 전하는 음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둘 사이는 '말하고' '들으려는' 밀접한 사이였던 셈이다. 이토록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최강의 짝꿍', '최고의 사랑'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만약 바옐이 연주하는 '음의 언어'를 이해하는 악마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렇다. 이 책이 한순간에 '공포소설'로 변모하는 까닭은 바로 '음의 언어'를 알아듣는 악마의 등장 때문이다. 그 악마가 등장하므로써 소설은 삽시간에 '핑크빛'에서 '핏빛'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악마가 이해하는 '바옐의 음의 언어' 덕분에 바옐은 음악에 더욱 정진할 수 있게 되었고, 수많은 청중들은 그런 바옐의 멈출 줄 모르는 황홀한 연주에 열광을 하며 '음악도시 에단'을 더욱 들뜨게 만든다. 만약 사람을 신들린듯 미치게 만들고 황홀하게 죽일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단연 '음악'일 것이다. 마치 소프라노가 펼치는 '고음의 향연'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 기절을 하며 픽픽 쓰러지는 청중들처럼 말이다. 바옐이 여명을 켤 때면 그런 일이 펼쳐졌던 것이다. 그렇게 악마는 바옐로 하여금 여명을 계속 켜게 만들었고, 그럴 때마다 청중들은 더욱더 열광을 하며 바옐로 하여금 연주를 멈추지 못하게 만들곤 했다. 들을 때마다 심장을 쥐어짜면서 발작을 일으키고 픽픽 쓰러지는 일을 겪으면서도 말이다. 정말이지 좋아서 죽을 지경...아니, 죽어도 좋을 지경에 이르고야 만 것이다. 이렇게 악마는 자신조차 전율케 만드는 '바옐의 여명, 혹은 여명의 바옐'을 듣기 위해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 버린다. 이러다 다 죽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은 과연 어떻게 극복하게 될 것인가?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읽는이'로 하여금 전율할 수밖에 없게 만든 소설이 대단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그 전율이 끝나지 않으면 살인사건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죽고 죽이다보면 에단의 시민들도 다 죽을테고, 하나도 남지 않으면 '읽는이'까지 죽여버리고 말텐데,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 굴뚝 같은데, 죽기는 싫으니까...독자까지 죽여버릴 수는 없으니까. 소설이 먼저 끝나고 말았다. 다 읽고 나니 '외전' 하나 남았고, 헛헛한 마음에 '외전'까지 후루룩 읽고마니 더욱더 갈증만 남게 되었다. 정말 죽어도 좋을만큼 짜릿했는데 말이다. 그 짜릿을 하지은의 다른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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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보는 동양사 만화라서 더 재밌는 역사 이야기 2
살라흐 앗 딘 지음, 압둘와헤구루 그림 / 부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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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빠지지 않고 벌어졌다. 그리고 전쟁은 언제나 '최선의 순간'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 '최악의 순간'에 벌어졌다는 사실도 잘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쟁은 최악 중의 최악으로 가장 나쁜 짓이다. 그런데도 왜 인간은 전쟁을 되풀이 하는 것일까? '고장난명'이라고 했다.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는 뜻이다. 전쟁도 홀로 치룰 수는 없는 법이다. 즉, 어느 한 쪽이 전쟁을 하자고 덤벼도 나머지 한 쪽이 제정신을 차리고 전쟁을 피하고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에서 '멈출 수 있는 방법'을 논하려 든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인간은 오랜 역사속에서 전쟁을 피하지 않았다. 과연 전쟁을 일으키고 참전했던 이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었을까?

 

  이 책 <전쟁으로 보는 동양사>는 전작인 <전쟁으로 보는 서양사>에서 다루지 못한 동양의 전쟁사를 다뤘다. 하지만 영광스런 전쟁이라느니 정의로운 전쟁 따위의 메시지는 담지 않았다. 이런 점이 참 신선할 따름인데, 전쟁을 벌인 이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을 저질렀는지 새삼 돋보이게 전달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참 좋았다. 물론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어쩔 수 없이 참전해야 할 전쟁이라면 '승리'를 해야할 테지만, 어차피 전쟁이라는 것이 승자든, 패자든, 얻는 것은 거의 없고, 잃는 것만 더 많은 법이기 때문에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꼭 전쟁을 치루고 난 뒤에야 깨닫곤 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러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전쟁은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호전광들은 '그렇지 않다'고 외칠 것이다. 초전박살을 낼 정도로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기만 한다면 전쟁은 이롭기 그지 없다면서 말이다. 실제로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초반 상황'만 볼작시면, 그럴 듯해 보인다. 먼 과거의 알렉산더나 칭기즈칸처럼 거대한 영토를 차지한 사례를 들면서 강력한 군대를 앞세우면 못할 것이 없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로마제국이나 제국주의를 내세운 서구열강들도 그랬고,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패권주의'를 내세우는 오늘날의 미국이 그렇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전쟁사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될 것이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폭망하게 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하고, 전쟁에서 승리해도 얻는 것은 거의 없고, 오히려 빚더미에 깔려 나라경제가 흔들리기 일쑤고, 젊은세대들은 전쟁터에 끌려나가 헛되이 목숨을 잃어버리고, 늙거나 어린 세대 들은 기울어진 경제를 되살릴 여력이 없어 결국엔 온 국민이 경제난에 허덕이게 될 뿐이다. 그럼 손실분만큼 패전국에게서 빼앗아오면 모자란 점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이득을 얻지 않겠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양의 전쟁사'를 통해서 정말 그런지 확인해보자.

 

  고대 전제왕권시대에는 '왕의 명령' 하나로 전쟁을 벌이곤 했다. 현명한 임금이라면 절대 전쟁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고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겠지만, 꼭 멍청한 임금들이 자신들의 못난 점을 가리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어김없이 '전쟁'을 통해서 문제해결을 일거에 해버리려 들기 일쑤였다. 그래서 전쟁에 승리해서 안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임금이나, 시대가 있었던가? 진시황이 오랜 전란으로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최초의 통일왕조를 이룩했다. 결국 15년 만에 폭망하고, 항우와 유방의 전쟁인 '초한지'가 펼쳐졌다. 유방이 한으로 다시 통일하고 난 뒤에는 어땠나? 전쟁에서 이겨 한나라가 흥했던가? 오래오래 태평했던가? 주변의 오랑캐들에게 시달리고 내부의 부정부패로 인해 혼란스럽지 않았던 때를 손꼽는 것이 훨씬 편했을 정도다. 이후에 송나라 때나, 원나라 때, 명나라 때, 청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늘 전쟁에 시달려야 했고, 전쟁으로 망할 뿐이었다.

 

  전쟁으로 폭망한 아주 좋은 케이스가 바로 '군국주의 일본제국'였다.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에 성공하기 무섭게 '군사력'을 키워 무장을 하더니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무차별 공격으로 선빵을 날려 승리를 거둔 쾌거였다고 자평할 정도였다. 그로 인해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챙겼고, 요동반도와 조선까지 일거에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려고 야심을 감추지 않았더랬다. 허나 요동반도는 '삼국간섭'으로 도로 뱉어내야 했고, 조선마저 아직까지 집어삼키기에 이르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었다. 왜냐면 러시아가 만주와 조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서둘러 '러일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청일전쟁'에서 얻어낸 배상금도 몽땅 '군사비용'으로 허비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 손실을 본 비용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둬서 채울 생각이었다.

 

  허나 '러일전쟁'은 길고 긴 싸움이었다. 물론 요동반도와 발해만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을 궤멸시키고, 아프리카를 돌고 돌아서 1년 만에 겨우 대마도 앞까지 도착한 막강한 '발트함대'까지 '대마도해전'에서 몰살 시키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다. 허나 러시아는 아직 전쟁을 시작하는 단계였을 뿐이고, 일본은 이미 총력전을 치룬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러시아는 항복조차 하지 않고,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는대로 육군을 일본 본토에 상륙시켜 전쟁을 이어갈 태세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미 모든 전력을 투입한 일본으로써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여기서 미국이 주선을 하며 '러일전쟁'을 일단락시키긴 했지만, 명목상 아무도 패배하지 않은 전쟁이었기에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오직 조선에 대한 패권과 이권만 얻을 수 있었는데, 전쟁비용으로 허비한 것을 채우기에는 초라한 결과였던 셈이다.

 

  그렇게 착착 조선침략을 서두르더니, 결국엔 중국까지 차지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고 말았다. 조선과 만주를 자국의 식민지로 삼고, '병참기지화'를 빠르게 진행시키더니, 느닷없이 중국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물론 선전포고 따윈 없었다. 일왕의 재가도 얻지 못한 상태로 '중일전쟁'은 돌입했고, 한 달만에 '북경'을 점령하고, 석 달만에 '상해'와 '남경'까지 점령하는 쾌거를 이뤘다. 허나 거대한 영토와 어마한 인구를 거느린 중국은 '결사항전'을 다질 뿐이었다. 전쟁은 점점 '장기전' 양상을 띠었고, 일제는 전쟁을 빨리 끝낼 욕심에 도시를 파괴하고 민간인들을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에 미국은 미친짓을 그만 두라며 '석유수출'을 금지시켰고, 일제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 '동남아'로 전쟁을 확대시키며 '석유보충'을 하다가, 급기야 미국을 선제공격까지 감행하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을 하고 말았다. 이때는 선전포고를 했는데,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키고 난 뒤였다.

 

  일제의 미친짓에 제대로 열이 받은 미국은 의회의 승인을 얻어 '일본과의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태평양 함대를 잃어버린 초반에는 상당히 고전을 했지만,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승리', '이오지마섬 점령', '도쿄대공습', 그리고 '핵폭탄 투하'까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미국은 끝내 일제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게 된다. 이렇게 일제는 전쟁으로 얻은 것도 별로 없었지만, 패전을 함으로써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만약 '공산주의 국가의 팽창'과 5년 뒤에 벌어진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지금껏 가난한 농경국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양쪽에서 벌인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미국은 전쟁으로 '최고의 이익'을 얻은 게 아닐까? 물론 1945년 이후의 미국은 '냉전체제'까지 승리(?)를 거두면서 일약 '패권국가'로 성장하며 '팍스 아메리카(미국에 의한 평화)'를 구축하며 명실상부한 초일류국가로 거듭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팍스 아메리카'는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도 허물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2024년일 뿐인데, 미국은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고, 대외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보이지 못하고 흔들리는 모양새가 점점 확연해지고 있단 말이다. 과연 미국은 그동안 벌인 '전쟁'에서 엄청난 이득을 챙기기나 했는지 모르겠고 말이다. 혹여 챙겼다손치더라도 그로 인해 미국에 영광보다는 더 큰 불이익만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을까?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면서 베트남에서 깨지고, 아프간에서 터지고, 걸프만에서 된통 당하고, 급기야 '9·11사태'까지 겪게 되고, 이제는 동네북마냥 이나라 저나라에게 만만한 나라로 전락하고 만 듯 싶을 정도다. 물론 아직까지는 '초강대국' 역할을 하곤 있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예전 같지 않다.

 

  자, 이래도 '전쟁'이 달갑게만 보이는가? 설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해도 그 영광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전쟁에서 승리한 영광 때문에 '또 다시 전쟁'을 치뤄야 하는 어려움만 겪을 뿐이란 말이다. 과거의 서구열강들이 싸질러놓은 똥 때문에 아직까지도 전세계가 혼란스럽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최고의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시점에 놓여 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오늘날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기까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역사'가 없는 전세계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우리가 '제2의 한국전쟁'까지 벌이지 않고, 평화체제를 유지하며 통일을 이룩하고, 지정학적인 '동아시아 화약고' 상황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대한민국은 앞으로 거칠 것이 없는 선도국가로 우뚝 서게 될테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전쟁'을 치루는 순간 어떻게 될까? 단 한 번도 '침략의 역사'를 가지지 않았다는 명예로운 이득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것이고, 또 다시 침공을 받아 '전쟁터'로 전락하고 만다면 다시금 경제대국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만 깨닫게 될 뿐이다. 설령 우리가 압도적인 군사력과 빵빵한 경제력으로 북한과 통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조선족'이 살고 있는 만주땅까지 되찾고, 감히 우리를 식민지로 삼은 일본열도를 점령하여 거대한 영토를 거느린 '대제국'으로 거듭난다 하더라도, 언젠간 주변의 강대국들의 이익선 때문에 '또 다른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만 커지고, 우리가 일순간 확보했던 '짧은 달콤함'은 '오랜 쓴맛'을 작렬하게 경험할 뿐일 것이다. 이래도 '전쟁'을 옹호할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그리고 그 전쟁으로 얻은 달콤함은 결코 모든이들이 맛볼 수 없다. 단지 몇몇 소수만이 이익을 누릴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폐허가 된 터전에서 신음하고, 전장에 참전된 사람들은 헛된 목숨을 잃을 뿐일 것이다. 따라서 '전쟁영웅'은 없다. 오직 '잔인한 학살자'만 있을 뿐이다. 알렉산더,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 히틀러, 도조 히데키...모두모두 잔인한 전쟁광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전쟁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을 뿐이니 결코 자랑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전쟁사'를 다루면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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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2 : 국내편 - 완결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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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퇴마록-국내편>의 백미를 꼽는다면, 단연 '생명의 나무'와 '초치검의 비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나무' 편은 드디어 퇴마일행 4명이 모두 힘을 합쳐 '악령의 힘'을 물리치는 대서사시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었으며, '초치검의 비밀'에서는 퇴마사들의 능력이 더욱 빛을 발하며 각각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걸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퇴마(또는 구마)의 힘은 '영능력자'마다 결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힘을 합친다거나 도움을 준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쉽게 이해하려면, 무당이 굿판을 벌이며 한창 신들리는 대목에 이르러서 마침내 악령을 물리치려는 대목에서 누군가 찬송가를 부르며 주님을 찾는 성경구절을 외거나 찬송가를 목청껏 부른다면 서로의 힘을 북돋기는커녕 도리어 악령의 힘에 영력자들이 다치고 말 것이다. 그런 판국에 기공술 같은 '외공'을 다루거나 '검기'를 뿜어내며 귀신을 썰어버리겠다고 나선다면 홍수를 불로 막겠다며 횃불을 들고 설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유파'의 영능력자들에게 힘을 보태주는 '힐러'가 등장해서 나머지 영능력자의 힘을 더해주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이 <퇴마록>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인 셈이다. 이렇게나 서로의 개성이 뚜렷한 서로 다른 퇴마사들이 한데 어울릴 수 있는 딱 한 가지는 바로 '악을 물리치는 힘'에 있지 않고, 악령조차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따뜻한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4명의 서로 다른 영능력자들의 힘을 한데 모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다.

 

  퇴마사의 수장격인 박윤규 신부는 기이한 경험 때문에 늦은 나이에 가톨릭 신부가 되었으나 악령으로부터 가여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구마행위'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결국 엄청난 영능력을 얻었지만 그 힘을 인정받지 못하고 '파문'을 당한다. 그럼에도 박신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더 많은 사람과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퇴마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자 다짐할 뿐이다. 박신부의 영능력은 그리스도 신앙에서 말하는 '성령의 불꽃, 아우라'다. 대개는 박신부가 들고 다니는 '은십자가'에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지만 기도력을 발하면 온몸을 통해서 그 힘을 발휘하며,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을만큼 넓게 펼쳐낼 수도 있다. 아우라는 주로 악령을 제어하는 힘을 발휘할 뿐, '물리적인 타격'은 전혀 줄 수 없지만, 박신부의 아우라는 종종 악령뿐 아니라 영적인 힘이 실린 사물까지도 물리칠 수 있는 일종의 '보호막 구실'을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승희의 도움을 받을 땐 아우라를 광폭으로 넓힐 수도 있고, 때때로 구체 형태로 뿜어서 내던질 수도 있다.

 

  기공술의 익힌 이현암은 '태극기공'을 홀로 익히다 주화입마에 빠져 죽을 고비를 맞았는데, 한빈거사를 만나 기이한 도움을 받아 주화입마에서 풀려나고 파사신검, 사자후, 부동심결을 익혔으나, 물귀신에게 죽임을 당한 여동생 현아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복수심에 불타서 무리하게 수련을 하다가 또 다시 주화입마를 당했는데, 또 다시 도혜스님의 공력을 받아 수십 년의 내공을 전수받게 되는 무술의 달인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외공과 내공을 모두 갖춘 기인이 등장하기란 매우 어려운 법인데, 마침맞게 이현암에게도 아킬레스건과 같은 결점을 갖게 되었다. 바로 무리하게 고난도의 기공술을 익히다 꼬여버린 기혈 때문에 엄청난 내외공을 갖춘 고수임에도 겨우 상반신과 오른팔에만 기공을 모으고 뿜어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엉켜버린 기혈을 뚫기 위해 '해동밀교'의 도움을 받으러 갔다가 박신부와 주술의 신동 장준후와 만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주술을 다룰 수 있는 천재아이 장준후는 '해동밀교'의 수제자이자 유일한 전수자로 등장한다. 원래 밀교라는 것은 인도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뿌리는 '불교'와도 인연이 깊고, '도교'의 신선술과도 맥락을 같이 하며, 우리 토종신앙에 해당하는 '무당'의 모든 결을 한 몸에 흡수한 인재 중의 천재인 소년으로 등장하였다. 이 세 가지 유파는 공통적으로 '부적술'을 다루는데, 따라서 장준후는 동양의 모든 술법을 다룰 줄 아는 영능력자로 보아도 무방하다. 허나 불교과 도교, 무속신앙이라는 것조차 서로 다른 결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이를 통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손치더라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소설속에서는 '해동밀교'라는 비밀종파를 만들어서 서로 다른 주술을 한데 엮어낼 수 있도록 '5대 호법(장로)'가 몰래 기른 수제자라는 보충설명까지 하였다.

 

  마지막으로 현승희는 고고학을 전공한 유학파로 초기에는 별다른 영능력이 없는 캐릭터였다. 하이텔 연재 당시에도 애초부터 등장 계획이 없던 캐릭이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국내편에서는 별다른 능력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만다. 다만 승희의 아버지가 사물을 생각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염력자인 관계로 승희도 애초부터 대단한 초능력을 소유할 것이라는 단초만 주어졌다가, <퇴마록>의 이야기가 점점 확장되면서 승희가 갖게 되는 영능력도 점차 대단하게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말세편'에서는 4명의 퇴마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추게 되는데, 아직 '국내편'에서는 그 힘에 눈을 뜨지 못하고, 다만 승희의 몸속에 '애염명왕'을 품고 있는 '아바타라(화신)'의 현신인 탓에 큰 힘을 밖으로 뿜어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몸은 보호할 수 있는 영능력자이면서, 동시에 다른 퇴마사에게 자신의 힘을 보태줄 수 있는 능력과 약간의 투시력(독심술)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다른 퇴마사에 비하면 '엑스트라(보조 출연자)'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4명의 퇴마사들이 처음 힘을 합쳐 활약하는 '생명의 나무'편에서는 수메르의 흑마술사들과 대결을 펼쳐야 했다. 특히, 브리트라라고 불리는 '거대한 뱀'을 불러 영생을 바라는 사악한 집단과의 대결이 압권이었다. 원래 뱀을 숭배하는 종교집단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주 출현하였다. 그 가운데 '브리트라'는 인도신앙에서 등장하는 악신으로 사악한 힘으로 사람을 유혹해서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불살라 사라지게 만드는 악마로 등장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을 보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신비한 동물로 여기곤 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악한 집단은 '뱀'을 숭배하는 것만으로도 영생을 누릴 수 있다며 신도들을 속이는 '사이비 종교'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나타나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홀려 인생을 망치게 하곤 만들었다. 박신부를 비롯한 퇴마사들은 이러한 '사악한 종교'로부터 잘못된 믿음으로 삶을 송두리채 망치고 마는 어리석은 짓을 막고자 힘을 모으게 된다.

 

  그리고 '초치검의 비밀'은 강화도에 감춰져 있던 '단군의 신물(흔히 '천부인'으로 불리며, 칼, 방울, 거울로 알려져 있으며 '천부삼인'이라 부르기도 한다)'을 빼앗으려는 일본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국내의 지킴이들이 벌이는 대활극이다. 이 작품에서는 퇴마사들의 능력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덜 알려진 다른 유파의 능력자들까지 총출동하는데, 암튼 이 작품 한 편만으로도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도 좋을 정도로 탄탄한 시나리오를 전달하고 있다. <퇴마록>의 매력을 이 한 편에 다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정황까지 겸하 '팩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더 실감이 나고, 흔히 말하는 '국뽕'의 느낌도 가미되어 있으나, 단군을 섬기는 신앙이 '홍익인간(널리 이롭게 하라)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기에, 아무리 우리를 침략한 외적이라하더라도 목숨은 소중한 것이라는 메시지가 더 강하기 때문에 감히 '인류애'로 승화시킨 드라마라고 소개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매력을 잠시 소개하자면, 우리 나라 강화도에 대단한 영능력의 소유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것도 '한날 한시'에 말이다. 여기에 신문기자와 퇴마사들까지 합류하여 대난장을 벌이게 되는데, 그 까닭은 다름 아니라, 고려말로 추정되는 5백명이 넘는 왜구들의 시체들이 온전한 형태의 해골 모습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신문기자들은 당연히 '역사적인 자료가 발굴되었다'면서 취재를 하러 도착했지만, 퇴마사들은 그보다는 심상치 않은 영의 기운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기에 행여 사람들이 다칠까 걱정이 되어 강화도에 왔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5백이 넘는 왜구들이, 그것도 한 방향으로 자세를 잡은 채 가지런하게 출토된 것이 수상쩍기 그지 없기에, 이들이 단순한 도적질을 하러 온 왜구가 아니라 애초에 수상한 목적을 갖고 출병한 군대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수상한 왜구의 해골들이 온전한 형태의 모습으로 하나둘 땅속에서 솟아나게 되고, 이를 더욱 진행시키려는 '3명의 일본 영능력자들'과 여러 유파에서 한데 모여든 스무 명 남짓의 국내 영능력자들의 한 판 대결이 시작된다. 과연 왜구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왜 그들이 '일왕의 삼종신기' 가운데 하나인 '초치검'을 들고 왔으며, 그 초치검으로 우리 땅에서 훔쳐가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던 걸까? 이야기를 직접 읽기 전에는 단순한 호기심뿐일테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가슴속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왜놈들의 시커먼 속셈'이 속속 들어나게 되고, 영능력자들의 술수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점점 깊이 빠져들어서 헤어나올 수 없는 '몰입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설마 아직도 <퇴마록>을 읽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초치검의 비밀'부터 읽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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