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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순의 천일야화 1 - 첫날밤의 맹세
양영순 지음 / 김영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우리에게 <아라비안 나이트>라고 알려져 있는 이야기는 사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알라딘의 요술램프', '신드밧드의 모험' 등이 대표적으로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제목으로 묶여 나오곤 한다. 그렇지만 <아라비안 나이트>만으로는 이 책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원래의 제목은 <천일야화>, 다시 말해, '천하룻밤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야화'라는 말에서도 느낌이 팍팍 오듯 <천일야화>는 세상의 모든 야한 이야기는 다 담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한 뿐만 아니라 꽤나 폭력적이기까지 한 탓에 '진정한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소개해도 모자를 정도다.
이토록 야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라면 '양영순 작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누들누드>로 널리 알려진 양영순 작가는 우리 나라 '웹툰의 선구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이 '단행본'으로 나오긴 했지만 애초에 '웹툰'으로 그려진 탓에 '스크롤'을 휙휙 내려가며 읽는 맛이 일품인 작품이기도 하다. 허나 <양영순의 천일야화>가 연재될 당시에는 웹툰이 그닥 활성화되던 시기가 아니었던 탓에 '수익'을 그리 낼 수 없었고, '단행본'으로 출간을 해야 겨우...쿨럭쿨럭.. 어디서 주워 들은 풍월은 있어서 나불거렸지만, '그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암튼, <천일야화>를 만화로 그린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양영순'만한 작가가 더는 없다고 봐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천일야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왕국을 다스리는 임금이 잠시 궁을 떠나 업무 겸 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아름다운 왕비가 '식스팩의 꽃미남 노예'와 놀아나곤 했는데, 임금이 깜빡 잊고 온 것이 있어 다시 궁으로 되돌아가보니 '자신의 궁'에서 '자신의 여자'가 '자신의 노예'와 '자신의 침실'에서 껴안고 뒹굴고 있는 장면을 직접 확인하고 난 뒤에 '여자에 대한 신뢰'는커녕 '여자'라는 존재를 절대 믿지 못할 짐승처럼...아니 '짐승'이라면 주인의 말에라도 절대 복종할 줄 알기에...짐승보다 못한 천박한 암컷으로 확신하게 된다는 슬픈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런 충격은 받은 임금은 그날부터 '첫날밤'을 치룬 뒤 자신의 아내인 왕비를 아침에 목을 댕강 잘라 처형해버리는 잔혹한 짓을 벌이기 시작한다. 왜냐면 왕국을 다스리는데 '국모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는 죄다 '남편 몰래 불결한 짓거리를 일삼는 천박한 암컷'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임금은 왕국의 처녀와 하룻밤을 보내고 죽여버리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왕국 안의 처녀란 처녀는 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왕국의 병력을 총괄하는 대장군의 여식인 '세라자드'가 임금의 새왕비가 되겠다고 자청을 한다. 당연히 대장군은 반대하지만 세라자드는 자기만의 꿍꿍이가 있다며, 다음날 아침, 임금과 혼례를 올리고 '첫날밤'을 보낸다.
원래대로라면 임금은 세라자드도 날이 밝으면 죽여버려야 했지만, 임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첫날밤'이 지났지만 '첫날밤'을 치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금은 '둘쨋밤'에 '첫날밤'을 치루고 처형하려 했으나, 그도 역시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셋째밤', '넷째밤', 그리고 '천밤'이 지나고, '천하룻밤'이 되었을 때야 '첫날밤'을 보낼 수 있었으나, 임금은 세라자드를 죽일 수가 없었다. 그 길고도 긴 '천하룻밤'동안 임금은 '재미난 이야기'를 듣느라 밤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사연인 즉슨, 세라자드는 첫날밤부터 천밤까지 밤마다 임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알라딘의 요술램프>, <신드밧드 선원 이야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등의 이야기도 모두 여기서 나왔다. 그밖에도 각양각색의 섹스와 폭력이 난무한 이야기로 임금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임금의 '거시기'까지 세웠다 죽였다 다시 세웠다를 무한반복한 덕분에 임금은 그동안 저지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세라자드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 골자다.
그렇다면 <양영순의 천일야화>는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만화를 전공 삼아 대학을 다닐 때부터 "섹스와 폭력이 난무한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라는 당찬 포부를 밝혔기 때문에 원작소설을 능가하는 작품을 펴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아니다. 원작에 충실했으나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도 그랬다. 그도 '순수창작'이 아닌 원작을 베낀 작가였을 뿐이었으나, 그의 작품은 늘 '원작'을 뛰어넘는 '무엇'으로 가득한 것처럼, 양영순도 섹스와 폭력이 난무한 <천일야화>의 골자는 고스란히 빌려왔으면서도, 양영순만의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천일야화 1권을 살펴보자.
매일밤 악몽을 꾸는 샤리아르 왕이 있다. 그가 절대권력을 갖춘 왕인데도 악몽을 꾸는 까닭은 딱 하나다. 사랑했던 왕비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죽여버렸고, 그 이후에 들인 새왕비들조차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모조리 다 죽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샤리아르 왕은 '폭군'이었다. 그래서 매일밤 악몽을 꾼다.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말이다. 그러고보면 샤리아르 왕도 아주 나쁜놈은 아닌 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대장군의 딸 세라쟈드가 자진해서 왕의 새왕비가 되길 청한다. 물론 죽으러 가는 건 아니다. 끝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자신을 죽을 틈조차 없게 만들 생각으로 갔다면, 너무 뻔한 스토리일 것이다. 그래서 세라쟈드는 '이야기 치료사'라는 설정을 가져왔다. 매일밤 악몽을 꾸던 샤리아르 왕은 새로 들인 왕비가 '이야기 치료'를 할 줄 안다는 말을 듣고, 미심쩍지만, 치료를 받아보기로 한다. 이야기는 시작되고 샤리아르 왕은 꿈속인듯 현실인듯 인식하지 못하는 '이야기'속으로 곧장 빠져들고 만다.
세라쟈드가 들려준 첫번째 이야기는 '마신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상인 이야기'다. <천일야화>에서 등장하는 '마신(魔神)'은 신도 아니고 악마는 더욱더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램프의 요정, 지니'를 떠올리면 좋을 듯 싶은데, 이게 디즈니가 요상하게 변형시켜 버려서 '마신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암튼 악마는 아니지만 악마보다 더 무시무시한 존재이면서, 결코 신(이슬람교는 유일신 알라뿐이다)도 아니지만 전지전능한 능력을 갖춘 존재라고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양영순은 '마신'을 괴물같은 존재로 그려놓았다.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믿고 이야기에 몰입해야만 한다. 어느날 상인이 우연히 던진 돌에 맞아 '마신의 아들'이 죽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아들이 죽은 마신은 분노에 겨워 상인을 단박에 잡아먹어버리려 하지만, 상인은 울면서 용서를 빌며 자신에게는 세 딸이 있으며 그 딸들에게 자신이 '죽는 이유'라도 알리고, 자신이 '죽기 전'에 처리해야할 일들을 다 할 때까지만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하게 된다. 이 조건을 수락한 마신은 상인을 약속대로 살려준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돌아온 상인은 마신과 한 약속대로 일을 처리하고서 다시 마신을 찾아가 죽기로 각오하지만, 사랑하는 딸들과 만나고나니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되려 마신을 잡아서 죽일 수 있는 '마신사냥꾼'을 고용해서 자신의 목숨을 살리려고 한다. 허나 '마신사냥꾼'은 마신보다 더 나쁘고 사악한 놈들이었다. 그놈들은 순진한 상인을 속이고 난 뒤에 '약속대로' 상인의 목숨은 살려주지만, 상인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세 딸들을 '마신사냥꾼'들이 가로채서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로써 상인은 가진 재물도 모두 잃고 사랑하는 세 딸도 빼앗기고서 겨우 목숨만 살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다 듣고난 샤리아르 왕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흔히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고들 하지만, 정작 목숨을 지키고나니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상인과 마신은 '순진한데' 반해서 마신사냥꾼들은 이렇게 순진한 존재를 속이며 모든 것을 앗아가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마신'은 샤리아르 왕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빼앗긴 것에 분노해서 빼앗아간 원흉에게 '죽음'을 내놓으라고 명령을 내리는 무서운 존재였지만, 그런 마신 또한 '마신사냥꾼'에게는 속여먹기 딱 좋은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였을 뿐이다. 만약 샤리아르 왕을 가리키는 인물이 '상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우연한 사고로 하나 뿐인 목숨을 잃어버릴 뻔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허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모두 빼앗기고 빈털털이가 되고 보니, 자신이 품었던 알량한 분노가 하찮게 보일 지경이었다. 과연 세라자드는 이 모든 것을 간파하고 샤리아르 왕에게 감히 '직언'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세라쟈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 권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가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