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2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2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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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XLIII / 넥서스Friends 2번째 리뷰] 이 책은 <전천당>으로 유명한 히로시마 레이코의 어린이 소설이다. <전천당>에서도 기발한 에피소드를 펼치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선보였는데,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서도 그 기발함과 흥미로움은 난형난제라 할 것이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인간의 아이 '야스케'가 요괴의 아이를 돌보는 요괴인 '우부메의 집'을 망가뜨린 죄로 우부메를 대신해서 '요괴의 아이'를 돌봐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큰 줄거리 속에 요괴의 특징이 드러나는 '자잘한 에피소드'를 펼쳐내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 형태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전형적인 '시리즈물' 구성이지만 전혀 식상하지 않은 것이 '레이코 소설'의 장점일 것이다. 이번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요괴 아이의 혼'을 빨아들이고 '인간의 시체'를 잡아먹는 포식자 요괴와 살아있는 인간과 꼭 닮은 인형을 만드는 재주를 가진 '인형술사'가 메인 스토리다. 언뜻 연결이 되지 않는 두 등장인물이지만, '생명연장'이라는 인간의 탐욕과 결합하면 이 둘의 조합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다쳐서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죽는다. 이는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사랑하는 존재'가 영원히 나와 함께 하길 바란다.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 그대로, 오래도록 시들지 않는 꽃처럼 싱싱한 아름다움을 유지하길 바란다. 그런데 여기 '인형술사'가 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꼭 닮은 인형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형술사 말이다. 그런데 인형술사는 자신의 인형에 만족을 하지 못한다. 모습만 꼭 닮아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인형'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포식자 요괴'에게 먹이로 넘겨주고, 그 대가로 받은 '무엇'을 이용해서 자신이 만든 인형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주문'이 넘쳐난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 다시 살아난 듯 싶고,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다시 살려내는 듯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거래를 한 '인형'이 망가져도 다시 새것처럼 '고치면' 그뿐이다. 이렇게 죽은 사람도 되살려내는 '인형술사'의 꿈은 자기 자신을 '완벽한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형술사는 '요괴의 아이'와 '죽은 시체'를 포식자 요괴에게 먹잇감으로 넘겨주고, 그 대가로 '인형술사'는 살아 움직이는 인형을 만드는 유용한 재료를 챙긴다. 그렇게해서 근래에 행방불명된 요괴의 아이와 분명히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요괴 돌보미 야스케는 이 사건들을 어떻게 해쳐나갈까?

  신기하고 흥미로운 요괴이야기를 읽다가 이런 '철학적인 문제'를 만나면 즐겁기 그지 없다. 우선, "생명연장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생명을 연장하겠습니까?"라는 질문부터 던져보자. 인간이 영생, 즉 '영원한 삶'을 꿈꾼 것은 아주 오래 되었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탐했다는 것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고, 이집트의 미라도 '부활'을 꿈꾸며 육신이 썩지 않게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킨 결과다. 현대의 기술발달은 '냉동인간'도 가능케 했고,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간복제'도 가능케 했으며, 뇌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뇌'를 대신할 기기만 있다면 '뇌를 담을 그릇'인 몸은 무엇으로든 대체할 수 있는 세상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전한다. 물론, 아직까진 '실용화 단계'까지 성공한 생명연장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요점은 '생명연장'이 어렵지 않게 가능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생명연장'에 오케이하겠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이 그닥 높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많은 까닭으로는 '인간답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나도 동의한다. 과거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에서도 철이는 '기계인간'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는 그 꿈을 포기하고 만다. 애초에 자신이 생각했던 삶과는 아주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생명연장'은 어떤 방법이어야 하는가? 그건 바로 '젊음의 유지'다. 스물다섯 살의 모습 그대로 늙지도 아프지도 않고 오래도록 유지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는데,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젊음의 유지는커녕 건강 유지조차 힘겨운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인형술사'처럼 삐뚫어진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된 탐욕으로 그릇된 행동을 일삼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망가지기 마련이다. 단 한 사람이라의 탐욕이라도 말이다.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은 줄을 지어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탐욕'을 경계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병들어 가는 시점에서 인간이 너무 많이 살고 있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량학살'을 계획중이라면 어떻겠는가? 대찬성인가? 물론 지구를 사랑하는 관점에서 대찬성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지구가 병들어가는 것과 '인구 증가'와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 지구환경파괴는 '인구증가' 때문이 아니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자연환경파괴가 심각해진 탓이고, 다른 생명체들이 살아갈 터전인 숲마저 '인간을 위한다'는 논리로 파괴하고 도시나 농경지, 또는 공장지대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연 생태계는 파괴되어 제 기능을 잃어버렸고, 인간을 보호하던 자연이 도리어 인간을 해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증거가 바로 '지구온난화', '해수면상승', '기후변화' 등이고,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도 덩달아서 전세계적인 대유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괴의 생명'도 소중할 수밖에 없다. 비록 요괴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지만, 요괴 하나하나가 '만물'에서 비롯되었다는 '애니미즘 사상'을 확대하면 요괴의 생명은 곧바로 '자연의 생명력'과 일대일 대응을 시킬 수 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요괴들도 '자연적으로 발생'하거나 '인위적인 방식으로 탄생'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괴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야스케의 마음은 그대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또한, 인간이 만든 물건일망정 그 재료는 '자연'에서 얻은 것이기에 소중히 다루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어떤가? 어린이책으로 철학을 하는 것도 재미나지 않은가.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당연한 진리로부터 시작된 물음에서 '지나친 욕심(탐욕)'은 도리어 화를 부른다는 결론과 인간이 아닌 생명도 소중히 다뤄야 마땅하는 결론까지 내릴 수 있었다. 물론 '정답'은 없다. 탐욕은 나쁘지만 욕심이 없는 세상도 활기를 잃어버린 삭막한 세상이 될 우려도 있으며,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지만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해충과 병균'마저 사랑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더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은 혼자 읽고 말 것이 아니라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어야 더욱 지혜로운 법이다. 또래와도 생각을 나누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면 더할나위가 없다. 그래서 '좋은책'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은 책' 모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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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 - 모두, 좌현으로!
장 이브 르 나우르 지음, 마르코 그림, 소서영 옮김 / 팬덤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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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덤북스 1번째 리뷰]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꼭 빠지지 않는 '좌우 갈등'에 대해서 궁금했더랬다. 지금은 '좌파'라는 말을 더 많이 쓰지만 '좌익'이라고도 불렀다. 무엇으로 불리던지 그렇게 불리는 정치세력은 무언가 범죄를 저지른 나쁜 집단처럼 들리곤 했는데, 사실 '좌파의 어원'은 프랑스혁명(1789~1799) 당시 제1 국민의회의 '의장석'을 기준으로 왼쪽에 섰던 무리를 '좌파', 오른쪽에 섰던 무리를 '우파'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두 세력은 서로 정치적 대립을 했었고, 일반적으로 '안정보다 변화', '성장보다는 분배와 복지'를 강조하는 정치사상을 품은 세력이었다. 프랑스혁명이 '앙시앵레짐(구시대 체제)'의 무능함 때문에 먹고 사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으니, 바로 이들에게 '시민의 권리'를 가져다 준 사상이 바로 '좌파의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이 나쁜 것이었나? 그렇다면 좌파사상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좌파'라고 하면 나쁜 것이라는 편견이 생긴 것일까? 그것이 궁금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 '만화'인데도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 내용이 난해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정치사상적 배경지식'이 한없이 부족한 탓에 수많은 사상과 사상가들의 나열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낯익은 이름 하나만이 반갑기 그지 없었다. 바로 '마르크스'다. 그리고 좌파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쁘다고 못박은 까닭도 바로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기초를 닦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관한 안 좋은 기억들 때문에 '좌파'라고 하면 싸그리 뭉뚱그려서 '나쁜 것'이라고 매도한 모양이다. 그런데 말이다. 좌파와 우파가 대립적인 정치사상이니 '좌파=나쁨'이라면 자연스럽게 '우파=좋음'이어야 할텐데, 우파가 그렇게나 좋은 정치세력이었던가? 내 기억엔 '우파'도 그리 좋은 짓을 많이 한 것 같지 않아 의아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서로 그리 좋은 집단도 아니면서 왜 만날 치고박고 싸움질만 하느냔 말이다.

  물론 '좌파의 이미지'가 좀 과격한 것은 사실이다. 변화를 추구하다보니 '기존의 것'을 맹렬히 공격하고 심지어 파괴도 일삼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안정'을 추구하는 사상까지 '썩은 것' 취급을 하며 싸그리 갈아엎어버리려는 끔찍한 테러까지 자행하는 일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좌파만의 문제'일까? '안정'을 추구하는 세력도 처음에는 '변화'를 이끄는 중심세력이었고, 그렇게 중심세력으로 '집권'을 오래하다보니 '기득권 세력'만을 옹호하고 사회가 '계급적 갈등'을 겪게 되는 문제가 심각해지니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자연스럽게 결집하게 마련인 것이다. 상식이 통하고 소통이 원활한 '우파'였다면, 이러한 '좌파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회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 '개선'해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변화'는 말뿐이고, 여전히 '기득권 유지'에만 골머리를 썩히다가 끝내 사회문제가 심화되다가 '시위와 폭동'으로 불만표출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좌파세력'은 이를 기회로 삼아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등극하기 위해 열심이었던 셈이고 말이다. 그렇게 '좌파 집권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갔는가? 그것도 딱히 그렇지가 않았다. 애초에 추진했던 '변화'는 곧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고, 그렇게 '안정화' 된 정책들도 사회문제가 일어나긴 마찬가지였다. '성장'을 문제삼고 '분배와 복지'를 추구하다보니 금방 '재정고갈'을 겪게 되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또 다른 집단'을 범죄시하는 경향이 끝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치세력'에 좋은 놈들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좌우 가릴 것 없이 '나쁜 것' 투성이란 말이다. 특히나 오른쪽으로 치우쳐도 문제고, 왼쪽으로 치우쳐도 문제다. 그렇다면 균형을 잡아 '중간'을 추구하는 중도세력에는 문제가 없을까? 역시나 그들도 '집권'을 하면 어김없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좋은 정치사상이 있단 말인가?

  정답은 '유능한 정치인'이다. 유능한 정치인은 좌우를 왔다갔다 할 수 있는 '능력자'여야 한다. 혼란스런 시절에는 '안정'을 추구하고, 수구세력이 판을 치는 꼴 같잖은 시절에는 과감한 '변화'를 추구하는 유연한 사상가 말이다. '좋은 시절'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어떨 땐 '신나는 음악'이 필요하고, 때로는 '잔잔한 음악'이 듣기 좋을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신명나는 분위기라고 해도 너무 시끄럽고 너무 빠른 비트로 쿵쾅거리다보면 지쳐 쓰러지고 만다. 그럴 땐 비트와 볼륨을 낮추고 잔잔한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며 심장을 달래야 한다. 그렇게 멜로디에만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하품이 나며 졸리고 잠이 들기 마련이다. 그것이 계속되면 지루해질 뿐이다. 그럴 땐 또다시 비트와 볼륨을 올리고 쿵쾅쿵쾅 떠들썩하게 놀아주어야 살맛 나는 세상이 되는 법이다.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만능뮤지션'이 없듯 유능한 정치인도 찾기 힘들다. 랩퍼가 EDM을 부르면 어색하고, 발라드는 못부른다. 반대로 발라더가 "드랍 더 비트!"를 외치며 옹알거려봐야 듣기에 거북할 뿐이다. 그래서 유능한 정치는 '한 사람'이 도맡아서 할 수 없다. 마치 '아이돌그룹'처럼 보컬과 서브보컬, 랩퍼, 댄서, 그리고 비쥬얼 담당, 연기자, 예능 등등 '완전체'로 활동하기도 하고, '유닛'으로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소화해내는 '만능뮤지션'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말이다. 정치가도 이젠 '아이돌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완벽한 하모니를 선보이기도 하고, 다른 아이돌그룹과도 '콜라보'를 하면서 새롭고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물론 정치인이니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활약을 펼쳐 '문제해결'을 하는 실력도 보여주어야 하고 말이다. 이때에도 홀로 활약해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사상의 정체성도 밝히지 못하고서 '여당과 야당'이 되는 순간부터 무조건 '반대'만을 외칠 뿐이다. 국민들이 보기에 '좋은 정책' 같은데, 어떤 프레임을 뒤집어 씌워서라도 '나쁜 정책'이라며 맹공을 하고, 그마저도 시원치 않으면 '상대 정치인의 뒷조사'를 캐내어서 망신살이 뻗치게 만들고, 범죄인으로 매도하고, 사돈의 팔촌까지 들쑤셔서 기어코 '연좌죄'를 물어야 속이 시원해지는 모양이다. 그렇게 지저분하게 쌈박질하고나면 애초의 '좋은 정책'이 무엇이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로의 세를 과시하며 '일부 국민'을 '전체 국민'이라 뻥튀기 시켜 끝끝내 '반대'를 하고 만다. 그 뒤에는 어땠나? 반대를 하고 '좋은 정책'을 흐지부지 만들고서는 결국 '나쁜 정책'을 시행하다 손해 보는 것은 결국 국민들 아니었느냔 말이다. 세상에 이런 멍청이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제는 '반대'를 하다하다가 상대를 '적대시'하는 것으로 모자라 '없애려'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상대방과 대화와 타협, 토론 등 점잖은 방법으로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조건 반대'만 하니, 나와 생각이 다르면 '죽여 없애' 버려도 된다는 식으로 테러를 벌이고 만 것이다. 어떻게 '나홀로 혁명'이라도 하겠단 말인가? 그건 혁명이 아니라 테러다. 그런 끔찍한 짓에 동조할 '건전하고 공정한 국민들'은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냔 말이다. 상식과 소통을 바라는 국민들은 그런 테러를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그 어디에도 없는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를 선보여준 정치적 선도국가란 말이다. 이제 곧 상식적이고 소통을 바라는 공정한 국민들의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 대통령 선거든, 국회의원 선거든, 그 모든 선거는 다 '국민의 심판'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국민들이 저마다의 소신으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으로 대한민국 정치는 '심판'을 내린다. 민주주의 국가의 모범국민들은 이 '심판'에 공정성을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에 승복할 줄도 안다. 이런 훌륭하고 위대한 국민에 걸맞는 '유능한 정치인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면 좋겠다. 좌우 갈등에 매몰되어 뻘짓하지 말고 진정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게 비추는 정치인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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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한국 요약 금지 - <뉴요커> 칼럼니스트 콜린 마샬의 변화하는 한국을 읽는 N가지 방법
콜린 마샬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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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크로스 2번째 리뷰] 외국인이 등장해서 '한국의 이색적인 면'에 대한 저들만의 생각을 들려주는 너튜브 방송을 보면서 한국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배우기도 했더랬다. 한국에서만 살다보니 '한국인의 평범한 일상'이 외국인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지만, 이런 방송들이 거의 대부분 '한국, 또는 한국인의 위대함'으로 끝맺는 것을 보면서 '두 가지 관점'이 굉장히 의아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게 왜 대단한 거지? 당연한 것 아닌가? 별것도 아닌 걸 칭찬하네' 싶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 그렇게나 대단한 것이었어? 한국이 그렇게나 강한 나라였었나?'라는 생각이었다.

  이를 테면, 밤늦은 시간에 특별한 치안 걱정 없이 밤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도 깜깜한 밤엔 '범죄의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있긴 하다. 그래도 못 돌아다닐 정도는 아니고 특별한 '우범지역'이 아니라면 대체로 아무 거리낌없이 노닐 수 있다. 심지어 '여성'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이나 유럽에서조차 저녁 7시 이후엔 '번화가' 이외에 거의 모든 곳이 한산해진다는 점, 그래서 밤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는 '차량이동'이 아니면 치안이 불안해서 이동에 제한을 받는다는 점, 그래서 관광객들조차 어두운 밤거리에 나가는 것이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천만한 시도'라는 점, 특히 여성이 홀로 밤거리를 배회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치안이 불안하다는 점 등을 이야기할 때 정말 놀랍기 그지 없었다. 한편, 한국의 수출제품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없으면 불안할 정도'로 심각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이야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대한민국의 군사경쟁력도 전세계 10위 권 안에 있다는 점도 뜻밖이었다.

  이런 류의 신박함에 들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청하기도 하는데, 계속해서 보고 있으면 거의 반복적인 내용들이라 금새 식상해지기도 한다. 특히 이런 방송들은 '칭찬일색'이라서 더욱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이 책 <한국 요약 금지>는 달랐다. 칭찬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비판적인 내용'도 그에 못지 않게 신랄하게 전개시켜서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고, 한국인이 아니기에 더욱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면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약간 어눌한 '한국어'로 부자연스럽게 쓰여진 내용도 있어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기도 했고, 한 번 다뤘던 '동일한 소재'의 내용이 반복되는 경향도 있어서 살짝 아쉬웠지만, 전반적으로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을 색다르고 다채롭게 해석하는 관점으로 서술하였기 때문에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런 류의 '또 다른 책'이 있다면 또 읽고 싶어졌다. 마이클 브린의 <한국, 한국인>(2018)이란 책도 있다니 꼭 읽어보아야 겠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한국정치, 한국사회, 한국문화'를 이방인의 눈으로 이색적인 해석을 덧붙인 것이다. 건축가 김수근과 소설가 황석영에 관한 설명은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거의 모르고 있었을 내용까지 다뤘고, 자살과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내용을 다룰 땐, 많은 한국인들이 인지하고 있음에도 솔직한 심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어두운 내용인데도 따끔할 정도로 쎄게(?) 지적해주어서 정말 좋았다. 그리고 외국인 저자가 '한국의 매력'을 소개하면서, '한국인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한국의 저력'을 일깨워주는 내용이 정말 많아서 책을 읽는 내내 흐믓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정말 기분 좋은 경험이다.

  그 가운데 하나만 소개하자면, 서구인의 눈에 비친 '중국적인 것', '일본적인 것'은 너무 명확해서 식상한데 반해, '한국적인 것'은 분명히 느낄 수는 있는데 뭐라고 콕 집어서 '이것'이라고 하기 애매하다는 내용이 있다. 이건 한국인으로 살아온 내가 절실하게 느꼈던 점이기도 하다. 분명 서양사람들에게 이색적으로 보이는 '아시아 문화'는 저마다 독특한 특색을 지녔다. 물론 처음엔 잘 구분이 가지 않다가도 '관심'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중국것', '일본것', '인도것', '태국것', '베트남것' 등등 명확히 구분이 가고 저마다 본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반해서, '한국것'은 서양사람들에게 분명 이국적이면서도 친숙한(?) 느낌을 느끼곤 한단다. 아니 어쩌면 이색적인 점보다 '서양에서 즐기던 낯익은 것'들이 먼저 보여서 실망하는 이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 '낯익음'이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한국의 문화에 점점 젖어들어야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젖어들었음에도 '한국것'을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힘든 것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고, 무엇으로 '형용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변화무쌍한 무형의 무엇이기 때문이란다. 바로 이것이 '한국문화의 매력'이자 '한국문화의 힘'이기 때문에, 그 매력에 푹 빠진 저자는 한국을 떠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정말 '최고의 칭찬'이다.

  그런데도 이처럼 매력적인 한국에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많은 것은 '한국어 소통'에 대한 어려움 때문일 거라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분명 한국의 매력에 푹 빠졌는데도 '체계적인 한국어 교습법'이 널리 제공되지 않고 있어서 불편과 어려움을 호소하는 외국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저자도 상대적으로 한국어 학습이 중국어나 일본어보다 더 어려웠다고 경험을 밝혔다. 하지만 이는 '언어학습의 어려움'이 한국으로의 접근을 방해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그러니 어설픈 '보다 쉬운 한국어 학습법'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기보다는 한국인들 스스로 '영어광풍'에서 벗어나고 '영어공부'의 강박을 내려놓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어차피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라면 '한국어 정복'이 아무리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 할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국어'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공부하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로 '한국문화의 매력'을 세계 만방에 퍼뜨리는데 주력하는 것이 더 낫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정부관계자'보다 '평범한 한국인'들이 더 잘 할 수 있을테니 어설픈 '영어 슬로건'일랑 내다버리고 '더 한국적인 소개(한글로 쓰여진)'를 하라고 조언까지 했다. 어차피 '한글'에 대한 매력에 푹 빠진 외국사람들에게 '한글'로 적힌 문구에 더욱 열광할테니 말이다.

  그러니 '웰컴 코리아' 같은 영어문구보다 '신명나는 한국에 놀러오세요'라는 문구가 더 끌린다는 말이다. 여기에 몇 가지 문구를 적으며 글을 마무리 하련다. '당신과 나를 연결해주는, 서울', '너른 바다를 품은 도시, 부산만의 매력',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람이 어우러지는 나라, 대한민국', 'K-시골에선 낭만과 마주하게 된다' 등등

#한국요약금지 #콜린마샬 #이방인의눈 #한국을사랑한외국인 #대한미국인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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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 대한민국 - 고도성장의 기적 이후, 무엇이 경제 혁신을 가로막는가 서가명강 시리즈 26
박상인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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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북스 22번째 리뷰] 대한민국 경제가 폭망하고 있다. 비단 윤석열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전 정부에도 손을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는 길은 '재벌 개혁'이기 때문이다. 웬만한 경제학자들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대한민국 경제를 망치는 주범은 바로 '재벌'이며, 가족 경영으로 대대손손 '기업'을 물려주는 형태로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니, 하루라도 빨리 서두르지 않는다면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30년'을 대한민국도 똑같이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를 수도 없이 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재벌들은 꿈쩍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더 '수직계열화' 시키며 자회사, 손자회사, 증손자회사(?)까지 만들어 '일감 몰아주기'로 손실을 최소화하며 버틸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중소기업이 개발한 '신기술'을 가로채거나(기술탈취), '전속계약'을 미끼로 삼아 가격을 터무니 없이 깍아버려(단가 후려치기) 중소기업이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고 대기업에 더욱더 의존하게 만드는 경제구조 환경을 조성해서 대한민국 경제가 스스로 혁신과 융합할 수 있는 기회마저 송두리채 앗아가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 체제로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은 분명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 전세계가 놀라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일제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가난한 '농업국가'였던 대한민국을 70년대부터 발빠르게 '산업화', '도시화'를 외치며 성장동력을 끌어올려 90년대에는 전세계가 놀랄 정도로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서 '경제선진국의 대열'로 진입한 것은 누가 뭐라해도 자랑스러운 업적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업적을 이룩하는데 '대기업'이 제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사실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허나 대한민국 대기업이 이룬 '위대한 업적'은 정부의 공적자금을 몰빵한 결과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 모두가 '대기업'에 매달려서 키워낸 결과로 이룬 결과란 말이다. 여기에 '대기업' 스스로 기술혁신을 이룩해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것이라면 좋았으련만, 다른 선진국들이 만들어놓은 '기술력'에 기대어 더 빠르게 더 값싸게 '모방'한 결과, 대한민국 수출 효자 상품으로 등극할 수 있었고, 이런 제품을 발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대기업 문화'가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셈이다. 한마디로 '제조업'에 치중해서 빠르게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21세기 세계 경제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급격한 기후변화에 위기감을 느끼고 온실효과를 절감할 수 있는 '탄소중립'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구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을 선언했고, 2050년에는 '탄소배출 제로'를 달성해야 하며, 가깝게는 2030년부터 '탄소중립'을 맞추기 위해 기존 에너지를 대신해서 '재생에너지 100%'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이런 일련의 경제산업 흐름을 담아 'RE100', 다시 말해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캠페인을 대한민국도 호언장담했다. 허나 윤석열 정부는 기존의 재생에너지 주력상품이었던 태양광과 풍력으로 이를 충당하기 요원하자 문재인 정부때 배제했던 '원자력'을 탄소배출하지 않는 에너지원으로 되돌려 놓기로 하고, 원자력 발전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보고도 '탈원전의 의지'를 박살 내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재생에너지개발 후발주자인 대한민국이 다른 선진국의 충족율보다 뒤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칠 수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보다 재생에너지 충당률이 뒤쳐진 것은 '기술력 문제'가 아니라 '개발 의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 때는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재생에너지 기술개발을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꺼리라도 있으련만, 윤석열 정부는 어떠한 변명조차 하지 않고서 적반하장격으로 'RE100' 따위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 대한민국 경제는 건제하다..는 말 같지도 않은 무식한 발언을 하느냔 말이다. 그 뒤에 이어질 '대기업의 성장신화'를 믿어 의심치 않고, 정부도 그런 '대기업'을 팍팍 밀어줄 야심찬 계획과 정책이 있으니 국민 여러분께서는 걱정을 붙들어 매라는 거짓말을 또 할 셈인가?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 운운하면서 침몰하고 있는 까닭도 '경제력 집중 현상'을 해소하지 못하고, 새로운 기술혁신과 융합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일본 경제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경제선진국의 '기술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경제 신흥국가의 '기술력 상승'과 '가격경쟁력 뒤쳐짐'에 따른 발빠른 추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샌드위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넛 크래커(호두까기)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대한민국 경제가 발빠르게 성장했던 까닭은 정부와 국민들이 '대기업'에 몰빵해서 국가경제를 성장시키는데 한몸처럼 움직였기 때문이고, 부족한 기술력은 선진국의 것을 '베끼기'를 해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성장에만 주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뤄 '경제대국'의 자리에 올라선 뒤에는 선진국들의 기술을 베낄 수만은 없다. 이제는 선진국의 기술을 넘어서고 더 앞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혁신과 융합'이 필요한데, 경제주체가 '대기업 중심'이다보니 혁신이라는 모험보다는 '인권비 절약' 등과 같은 손익계산을 통한 안정에만 몰입하고 있으니 대한민국 미래경제가 암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탄소중립'이라는 큰 걸림돌이 버티고 있는데도 아무런 노력조차 하고 있지 않는 '대기업'만 바라보고 있는 정부와 국민들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일본 경제의 지난 30년이 이랬는데, 이젠 대한민국 경제 차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불을 보듯 뻔한 셈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없는가? 역사적으로 경제적, 기술적, 환경적 큰 변화를 맞이한 시대에는 몸집이 큰 대기업보다 몸집이 작은 '중소기업'이 변화에 잘 대응했더랬다. 물론 타격을 받는 것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매한가지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망해도 금방 다시 '새 중소기업'이 나타나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온갖 모험에 뛰어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중소기업이 망해도 '국가경제'에 큰 위기를 가져오지도 않는다. 왜냐면 실업자가 생기더라도 그 수가 적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직장을 옮기기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기업은 변화의 시대에 모험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망하면 대량실직 사태가 벌어지고 지역경제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까지 휘청거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나서서 그 많은 실업자들을 챙겨주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애초에 '대기업'이 망하지 않도록 '공적자금'을 투입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대기업은 기술혁신에 올인하며 위기에 맞서 대응하지 않는다. 그동안에도 하지 않던 '기술혁신'이 공적자금을 투입했다고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기업은 결국 폭망하고 만다. 그리고 대기업을 기반으로 동거동락했던 '자회사'도 망하고, '손자회사'도 망하고, '증손자(?)회사'도 망하는 '줄줄이 도산'이 벌어지며 '지역경제'가 폭망하고, 더 나아가 '국가경제'까지 폭망하는 것이다. 특히나 '탄소배출'을 많이 하는 '제철회사'인 포스코가 망한다면 울산 인근 지역의 경제도 함께 망하고, 국가 기간산업이었던 제조업의 한 축이 무너지게 되니 대한민국 경제가 휘청일 것은 뻔한 이치다. 이런 위기감이 점점 임박해오고 있는데도 '대기업 개혁'을 손놓고 있을 것이냔 말이다.

  이제 대한민국 '대기업'은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던 사업들을 하나둘 내려놓고 '중소기업'들이 알아서 성장할 수 있도록 냅둬야 한다. 당장은 이들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꿀꺽하고, 중소기업의 이익마저 대기업의 계열사로 착복하면 '이득'을 챙기고, 국가경쟁력도 '성장'하는 듯 보일 테지만, 앞으로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등과 같은 새로운 기술력이 절실한 시점이 찾아오면 '대기업'만으론 대응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니 거의 '재벌 해체' 수준으로까지 대기업을 쪼개서 밀려오는 큰 파도에 의한 '충격'을 최소화해야만 한다. 그래야 뒤쳐진 '재생에너지 기술력'을 끌어올려 다시금 대한민국 경제가 승승장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현재의 대기업 운영을 '친족경영'에서 '실력경영', '전문경영'으로 전환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탈취하지 말고 '제값'을 쳐서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끌어 올려주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정부의 투명한 감시, 감독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나서서 '벤처기업'이니 '중소기업 지원정책' 따위를 추진하며 설레발 치지 말기를 당부한다. 정부의 '근시안적인 관료'들은 당장의 이익과 성과가 나지 않는 중소기업과 기술력에는 자금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혁신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정부관리자가 나서봐야 헛물만 켤 뿐이고, 세금낭비만 될 뿐이다. 그러니 중소기업 스스로 지지고 볶을 수 있게 '자유경쟁체제'만 만들어주면 된다. 오히려 규제대상은 '대기업'이어야 한다. 이들은 결코 스스로 '해체'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경제는 '빨간불'임에 틀림없다. 허나 대한민국 경제가 폭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폭망'한 뒤에 다시금 '기적'처럼 일어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럴 경우에는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하며 대혼란의 시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재벌 개혁'은 반드시 실천해야만 한다. 하지 않고서는 대한민국 경제가 다시 일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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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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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넥서스Friends 1번째 리뷰] 히로시마 레이코 작가는 <전천당> 이후 두 번째 소설로 접하게 됐다. 이 소설도 <전천당>과 비슷한 느낌이다. 일본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현대의 사상'을 담아 연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배경은 좀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에도 시대'를 펼쳐 냈다. 17세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 가문이 권세를 누리던 '에도 막부시대'라고 해야 하겠으나,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칼잡이(무사)'의 활극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적한 시골마을의 공동주택에서 벌어지는 요괴 대소동인 까닭에 '막부'라고 하는 거창한 시대극(사극)은 아니다. 제목 그대로 '인간의 아이'가 '요괴'를 돌보며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잔잔하게 펼쳐지는 '주니어소설'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애초부터 '주니어소설'로 쓰여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레이코 작가가 스스로 밝히길 이 책은 '성인소설'로 집필했다고 한다. 이 소설을 쓰던 당시에 <귀멸의 칼날>이 방영하던 시기였던 탓에 좀 더 '호러물'에 가깝고 피와 시체가 나뒹구는 잔혹한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반려하면서 "아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다시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새로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분량도 줄어들고 에피소드도 덜어내야만 했단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는 어린이도 읽고 즐길 수 있는 책이 되었다. 하지만 애초의 '스토리'는 유지한 탓에 책내용이 담고 있는 주제가 '성인용(?)'이라는 느낌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 탓에 논술쌤의 관점에서 이 책을 '초등학생'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귀멸의 칼날>도 '19세 미만 관람불가'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완전 성인용도 아니기 때문에...애매한 책이다.

  1권의 내용은 주인공인 '야스케'란 소년이 길가에 있는 '하얀 돌'을 우연히 발견하고서는 실수로 떨어뜨려 깨뜨리고 만다. 그저 돌멩이를 깼을 뿐이니 별일 아닌 듯 싶었지만, 사실 그 돌에는 '요괴의 아이'를 돌봐주는 요괴 '우부메의 집'이었던 것이다. 돌이 깨짐과 동시에 우부메도 떠나버렸고, 요괴의 아이를 돌볼 요괴가 사라지자 '요괴 봉행소(재판을 담당하던 에도시대 관청 이름)'가 요란스러워졌고, 결국 돌을 깨뜨린 범인 야스케가 요괴에게 잡혀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벌이 바로 인간의 몸으로 '요괴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대신 맡게 된 것이다. 우부메가 다시 돌아와 요괴의 아이를 돌봐줄 때까지 말이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뒤에 이어질 내용이 얼마나 기괴하고 음산한 요괴들이 등장할지 자못 궁금해질 테지만, 막상 뒷이야기를 읽어 보면, 살짝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특히 '호러 마니아'라면 말이다. 왜냐면 인간의 아이, 야스케가 처음으로 돌보게 된 요괴 아이가 바로 '매실절임(일본 장아찌)'이기 때문이다. 정말 귀염뽀짝이다. 어린이를 위한 소설로 개작했다는 느낌을 확연하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괴는 요괴다. 인간을 해치는 '포식자 요괴'는 아니지만, 요괴이니만큼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전천당>의 느낌이 물씬 났다. 특정 년도가 적힌 동전에 해당하는 물건만이 가진 독특하고 신비한 능력 때문에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가득했던 것처럼,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서도 요괴마다 독특한 특징과 사건이 벌어지며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하지만 시대배경이 옛날이고, 요괴가 등장하는 몽환적인 배경이 자못 '이국적인 느낌'마저 든다. 일본에는 특히나 '요괴'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에서 비롯되었는데, 일본의 애니미즘은 좀 더 유별 날 정도로 많은 요괴가 등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요괴들은 '장난꾸러기 님프'나 '괴팍한 고블린'처럼 사람에게 크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일본의 전설에는 섬뜩한 요괴들도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고, 이런 요괴들은 종종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살육을 즐기는 끔찍한 괴물로 등장하곤 한다. 한국형 귀신은 '원한'을 품은 경우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일본형 요괴는 원한의 유무와 상관없이 사람의 피와 살을 탐하고, 살육을 거듭하며 능력을 키우는 요상한 취향까지 거침없이 드러내는 경우가 흔하다. 유독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의 특성을 닮은 듯도 싶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는데 무슨 원한을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막 싹쓸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요괴들의 성격도 그런 모양인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는 그런 끔찍한 요괴는 등장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면 시대배경은 '과거'의 것이지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은 '현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의 전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겠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 사고방식은 분명 요즘 것이다. 바로 '인간의 권리'를 담은 인권사상이 엿보인다. 물론 등장인물 태반이 '요괴'인 탓에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이 동물의 모습이긴 하다. 그치만 그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주제의식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이 책을 '성인호러물'이 아니라 '어린이용'으로 출간해보라고 했던 모양이다. 단순히 피와 살이 튀기는 끔찍함이 아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고귀한 생각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요괴는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다. 인간이 아닐 뿐더러 '살아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천 년을 훌쩍 넘겨서 살아가는 요괴들의 삶에 고귀함 따윈 애초부터 없다. 백 년을 살아도 지겨운 것이 '인생'인데, 천 년을 살면 지겹다 못해 '무의미한 삶'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잃고 심심풀이로 인간을 잡아 먹는 요괴들의 삶을 그려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레이코 작가가 그린 '요괴'는 좀 달랐다. 그들의 수명이 언제까지인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요괴일망정' 유년 시절이 있고, 그 시절의 유약함을 지키고 보살펴 주려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딴에는 일본도 '초고령화 사회'가 된 지 오래되었기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마을도 꽤나 많을 것이다. 심지어 현재 일본사회는 '고독사(홀로 늙어 돌봐줄 사람도 없이 죽어서도 주검마저 거두어줄 사람 없이 그대로 방치된 죽음)'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기에, 이야기 속에서나마 어린아이를 돌보는 풍경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이야기를 좀 더 읽어본 뒤에 꺼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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