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카프카 단편선 세계의 클래식 9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세훈 옮김 / 가지않은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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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프란츠 카프카 / 권세훈 / 가지않은길 (2007)

[My Review MDCCCIII / 가지않은길 4번째 리뷰] 카프카의 문학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대부분 절망적인 비극으로 끝맺음을 하거나 매우 우울한 마무리로 독자들을 당황케 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실제로 카프카의 책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독자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널리 알려진 터다. 그런데도 수많은 독자들은 '카프카 읽기'에 도전한다. 무엇보다 그가 쓴 <변신>이라는 소설이 너무나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토록 난해한 소설들 가운데 가장 읽을 만한 내용이기도 하고, 그나마 읽고 난 뒤에 이해가 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이해'는 사람들마다 제각각이다. 심지어 문학전문가들조차 색다른 '해석'을 내놓기 일쑤인 카프카의 문학을 일반 독자가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이런 '무모함'이 카프카 문학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 매력을 좀 더 비약시킨다면, 저마다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음으로써 카프카의 문학은 '재구성'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매력적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정답'은 없지만, 누구라도 '정답'이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문학'은 늘 신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 '가지않은길'에서 내놓은 <변신>에는 3가지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순서대로 <선고>, <변신>, 그리고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이다. <변신>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으련다. 먼저 <선고>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카프카가 '하룻밤'만에 집필해 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혼을 앞둔 주인공과 그 소식을 전달받을 친구, 그리고 주인공의 아버지가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친구는 주인공과 아버지의 대화에서 나타날 뿐,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 친구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서 '예술가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의 발단은 주인공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전해줄까? 말까?로 고민하였지만, 결국 전해주기로 결정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아버지'에게 전하면서 두드러진다. 그 까닭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가 소원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아버지는 그 손을 야멸치게 거부하였고, 아들의 결혼이 자신을 더욱 '소외'시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각인시키며, 급기야 그동안 '불효'했던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려버린다. 이에 아들은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행복한 결혼을 꿈꾸던 아들에게 어찌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아버지는 어째서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동안 관계가 소원했고, 아들의 결혼으로 인해 자신은 홀로 집에 남겨져야 하며, 그로 인해 더욱더 고독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불효'를 이유로 행복해야할 아들의 미래를 짓밟을 수 있느냔 말이다. 더구나 아들은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행복해야 할 결혼을 앞두고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란 말인가?

카프카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되도록 멀찍이 떨어져서 읽어야 한다. 왜냐면 카프카의 글은 '세부적인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앞뒤 문맥이 이상하리만치 '맥락'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니, 아들이 멀리 떨어진 친구에게 '결혼소식'을 전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대뜸 역정부터 내더니, 그동안의 서러움을 토해내다가 끝내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려버리고 만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정도에서 그쳤다면 아버지의 속상함이 매우 컸구나 싶을 정도로 마무리 되었으련만, 아들은 아버지의 '사형선고'를 듣자마자 몸을 던져 생을 끊고 만다. 아무리 불효막심한 아들이었기로서니 '죽어 마땅할 죄'로 보이질 않았는데 말이다.

이러한 괴이한 결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결혼에 실패'한 카프카의 개인적인 경험까지 끌어들여 설명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작품 <선고>가 쓰여질 당시 카프카는 사랑에 빠졌었고, 오래지 않아 사랑과 결혼 모두 실패하고 만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그 뒤로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고 4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기에 <선고>는 카프카의 자전적인 소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앞둔 행복해야 마땅할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카프카는 평생 '고독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곤 하는데, 글쎄...

한편,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은 카프카의 '마지막 작품'으로 유명하단다. 여타의 작품들이 '개인적인 내용'을 품고 있는 반면에, 이 작품에선 '종족 전체' 또는 사람으로 빗대어서는 '민족 전체'를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작품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줄거리는 변변찮은 게 없다. '여가수'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녀가 부르는 노래라는 것은 노래라고 할 것도 없는 '찍찍!'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쥐의 종족이었던 요제피네라는 여가수는 '쥐의 언어'인 찍찍거리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였던 것이다. 그래서 얼핏 들으면 노래라기보다는 '쥐의 울음소리'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수많은 쥐들이 자신들의 여가수의 찍찍거리는 노랫소리를 듣기 좋아했다. 그래서 여가수는 청중을 향해서 '찍찍'거렸고 수많은 쥐들은 여가수의 '찍찍'거리는 노래를 듣고 환호했다. 하지만 노래가 너무 짧은 것인지, 쥐의 생애가 너무 짧은 것인지, 수많은 군중들은 자신들의 여가수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모이려 하지만, 여가수는 하나이고 군중은 너무 많아서, 여가수가 노래를 부르려는 '찰나'에 수많은 군중들이 다 모이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여가수는 무작정 '긴 기다림'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신경질과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를 듣기 좋아했던 군중들은 그녀의 신경질과 짜증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하지만 여가수는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군중들에게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홀연히 공연장을 떠났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은 더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뭘까? 카프카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바는 말이다. 어쩌면 살아생전에 작가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카프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은 아닐까? 너무나도 짧은 자신의 소설들을 '찍찍'이라는 짧은 노래로 비유하고,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던 군중들은 '카프카의 독자들'을 상징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소설속에서나마 '카프카의 단편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으나, 그 인기가 자신을 향한 '존중'이 되질 못하고, 그만큼의 인기가 '영예'롭지 못하다고 느낀 탓에 홀연히 떠나버린 여가수처럼 카프카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선고>도 그렇고,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도 그렇고. 카프카의 단편들의 '결말'은 언제나 예측불가다. 아니 엉뚱하다고나 할까? 분명 독자로서 '기대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기대이상'이 아니라 '기대이하'로 인식되는 경향이 크다는 점에서 카프카는 절대고독과 더불어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느끼는 대문호 '프란츠 카프카'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이런 '엉뚱발랄함'이 충분한 매력일 것이다. 기왕 엉뚱한 김에 '카프카의 문학'을 비극적이고 우울하게 읽지 말고, 희극적이고 유머와 해학으로 읽으면 아주 색다를 것이다. <선고>에서 생을 마감한 아들을 죽어 마땅한 불효자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그 죄를 달게 받아 생을 마감한 것이라면서 '슬랩스틱'을 하며 단단히 삐친 아버지 앞에서 '과장'된 죽음을 연출하는 해학적 요소를 첨가했다고 말이다. 그러니 실상은 죽지 않았지만 불효한 죄에 대해서 '죽음'으로 깨우쳤으니 앞으로는 살뜰히 아버지를 챙기겠다는 다짐으로 이야기를 새롭게 이해해보는 것이다. <요제피네...>를 읽을 때에는, 심각하게 진지하게 읽지 말고, 수많은 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한 마리의 여가수'가 진지하게 폼을 잡더니 '찍찍'하는 로래를 부르자 100만 구름관중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상상을 해보잔 말이다. 먼 옛날 조용필이라는 가수가 마이크를 붙잡으면 수많은 군중들이 숨을 죽이며 가수를 지켜보다 "기도하는~"이라는 노랫소리가 울리자마자 수많은 관중들이 일제히 "오빠! 꺄아~"하고 외치던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나는 꽤나 귀엽고 깜찍한 상상을 하면서 읽어 나갔다.

물론, 이처럼 카프카의 문학을 '익살과 해학'으로 유머스럽게 읽는다고해도 어렵고 난해하긴 마찬가지다. 그 까닭은 '카프카의 문학'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앞뒤 문맥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이 장면'에서 '저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설명이 태부족이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철저히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고 스리슬쩍 이야기를 넘겨버리곤 한다. 그리고서는 끝내 '비극적이고 우울한 끝맺음'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허탈감'을 넘어 '문학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은 카프카의 기발함에 집중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분명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정답'이 없기에 저마다 '색다른 해석'으로 다른 이들의 '동의'와 '공감'을 얻어내기에 용이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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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7 : 변신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7
최윤정 글, 김연승 그림, 손영운 기획, 윤순식 감수, 프란츠 카프카 원작 / 채우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CII / 채우리 18번째 리뷰] 독일의 문학가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적인 소설 <변신>은 부조리한 사회를 다룬 대표적 문제작으로 손꼽는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너무나도 천박했다는 것이 이 짤막한 소설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현대 사회의 문제로 떠오른 '인간 소외' 문제에 대한 경종을 강렬하게 울렸다. 주인공인 그레고리 잠자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 회사의 영업 사원으로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한 모범적인 인간이었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변신'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벌레가 되어버린 잠자는 사랑하는 가족에게마저 철저히 버림을 받고 쓸쓸히 죽어 간다는 것이 전체적인 줄거리다. 여기에 '왜' 벌레가 되었는지, '어떻게' 변신을 하였는지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필 변신한 것이 동물 가운데서도 가장 하찮은 '벌레'인 것인지, 아무런 단서조차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일단 '벌레'가 되고 난 뒤에는 '인간'으로서 받아 마땅한 존경과 명예, 심지어 사랑마저 깡그리 잃어버리고 만다. 인간이었을 때에는 몰랐던 '자신의 처지'가 극명하게 대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카프카는 말하려 한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지 말이다.

카프카는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작가다. 하지만 '전업작가'가 되진 못했다.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으려 했지만 생계를 위해선 일(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프카는 낮에는 '재해 보험국 공무원'으로 일을 했고, 밤에는 그렇게나 좋아하던 '글'을 썼다. 그렇게 밤낮을 바쁘게 살아간 카프카는 41세(1883~1924)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그는 살아있을 때 '소속감'을 느끼려 간절히 원했다. 왜냐면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유대교도'는 아니었고,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독일인'이 아니었으며,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체코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르주아 계급이기에는 '미흡'했고, 노동자 계급이기에는 '충실'하지 못했다. 이렇듯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그는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카프카는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곳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랬다. 특히 '직업'을 통해서만 사회에 소속될 수 있다는 강박감마저 갖고 있기에 '전업작가'를 꿈꾸는 삶을 살면서도 관두고 싶었던 회사를 떠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피곤하게 살아간 '실존' 인물이었다.

그가 살던 20세기 초반의 유럽은 '산업 사회'를 막 벗어나 전운이 감돌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런 그가 '실존주의(불안한 존재의 부조리상을 자각하고, 그 불안을 극복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는 인간을 묘사) 문학'적 경향을 띤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변신'을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한 카프카는 현대 사회가 지닌 모순성에 주목했다.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것처럼 부자도 하루 아침에 빈자가 될 수 있고, 건강했던 사람이 질병이나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법이다. 계급적으로도 '지배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지배 당하는 처지'로 전락하는 경우도 다반사란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변신'을 거친 인간은 '똑같은 인간'이 아니게 된다. 분명 '같은 존재'였지만 변신을 거치게 되면 더는 '같은 존재'가 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부자가 부를 잃으면, 건강한 자가 건강을 잃으면, 사회적 지휘나 명망이 높은 사람이 더는 높은 위치에 있을 수 없다면, 더는 '같은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사랑으로 충만한 '가족 관계' 안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 건실한 사업가로 부와 명예를 걸머쥐어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사람일지라도 한순간에 부와 명예를 잃게 되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삽시간에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성실하고 유능한 영업사원이었다. 잠자의 가족은 은퇴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그리고 사랑스런 여동생으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잠자의 수익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하게 일을 해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은 잠자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오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잠자가 성실하고 유능했기에 그럴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화목한 가족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잠자는 '벌레'가 되었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벌레'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한순간에 '경제적 능력'이 사라져버리자 나머지 가족들은 잠자를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돈을 벌어다줄 때는 당연히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지만,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벌레'가 되자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레고르를 여전히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이다. 처음에는 잠자의 가족들도 그러려고 노력했다. 나름대로 말이다. 하지만 흉측하게 변해버린 '외모'와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일삼는 그레고르를 오랫동안 보면서 참을 수는 없었다. 아니 '인간답지' 못했더라도 '경제적 능력'만 잃지 않고 나머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줄 수 있었다면 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아무런 '경제적 보탬'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족의 부담'만 늘려놓는 상황이 펼쳐지자 잠자의 가족들도 더는 참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다시 '직업'을 구하고, 어머니는 '바느질 일감'을 받아다가 생계를 꾸리기 시작한다. 그레고르가 '경제적 능력'을 갖고 있을 때는 판판이 놀던 인간들이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니 저마다 살 궁리를 한 것이다. 애초부터 그레고르가 힘겹게 생계를 꾸려나갈 때에 함께 도우며 살아갔더라면 그레고르가 괜한 고생을 하며 때려치우고 싶었던 회사를 꾸역꾸역 다닐 필요도 없었을 것 아닌가. 그렇게나 능력을 감추고 '빌붙어' 살아가던 가족들은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를 천대하면서 저들만의 살 궁리를 하며 살아간다. 어차피 '경제적 능력'이 없는 존재는 '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라면서 말이다. 여기서 카프카는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바로 '경제적 능력'이다. 경제적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인간답게 살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한편, 이 소설은 '실존주의 문학'의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 실존주의란 '기존의 가치 체계'를 거부하고, '개인의 결단'과 '자유 의지'를 중시하는 경향을 띤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실존 인간은 기존의 가치 체계를 아무런 비판 없이 따르지 않고, 운명조차 정해진 바 없으니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 문학작품으로 사르트르의 <구토>, <존재와 무>, <벽>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페스트>를 꼽는다. 그 가운데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도 함께 선보이는데, 이는 그레고르 잠자가 '변신'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되고 스스로 삶의 가치가 없음을 깨닫자 그대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을 선보이며 '기존의 정해진 가치'를 따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초기적 모습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카프카 이전에는 '벌레'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 같은 존재로 변해버린 주인공일지라도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뻔한(?) 결말로 끝맺었다면, <변신>에선 '삶의 가치'를 깊이 고민한 끝에 자신이 처한 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강렬한 결말을 선보이자 사르트르와 카뮈도 '실존주의 문학'적 영감을 카프카에게 얻고서 명작을 선보였던 것이다.

또한, <변신>은 자본주의의 비열함을 맹렬히 비판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집필되던 시기는 1912년에서 1915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 당시에는 '식민지 약탈자본주의'가 심각하게 펼쳐지던 때였기 때문이다. 서구열강들의 '시장 강탈'로 인해 전세계는 전쟁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부가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자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노동자(무산자)와 자본가(유산자)의 계급적 갈등은 날로 심해졌으며, 노동자는 생계를 위해선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시달렸는데도 변변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진정한 '노동의 가치'가 사라지고 오직 '돈의 노예'가 되버렸다는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사회고발이 절실한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신>에서는 경제적 능력을 상싱한 것으로도 '인간 존재'조차 의심받고 내버려야만 하는 비정한 가족관계를 고발한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변신>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현대인들도 여전히 '경제적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인간 존중'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을 평가할 때 '경제적 능력'만이 아닌 다양한 가치를 고려해서 인간의 '존재가치'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고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일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경제적 무능력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연애도 포기하고, 결혼도 포기하고, 출산까지 포기해서 더는 '인간답게' 살아갈 최소한의 욕구 또는 품위를 지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적 능력이 충족된다면 어떠한 것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 능력'은 그 어떤 가치보다 상위에 있으며,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해 '자유 의지'마저 포기하라면 할 정도로 더욱 비참한 '노예적인 인간'으로 퇴화되고 말았다. 물론 나름의 방식으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며 인간다움의 다양성을 선보이는 사람들도 늘고 있지만,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는 그 어느 곳이건 간에 '경제적 능력'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면 '살아갈 가치'조차 없는 존재인 것일까? 우리는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물질만능주의'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의 고질병일지도 모르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는 까닭도 인류진화적인 차원에서 늘 배고프던 시절에 생존확률을 높이는 쪽으로 진화한 탓이다. 인간은 '배고픔'에 길들여져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배부름'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과거에는 없던 병을 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면 대부분 '배곪음'으로 일상을 개선하면 호전되는 경우가 흔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각종 성인병을 겪으면서도 '배부름'을 부러워하고,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을 부러워하는 지경에 다달았다. 배고픈 시절에는 굶어죽기 딱 좋을 체질(!)이었는데 말이다. 암튼 현대인들에게 <변신>은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케하는 명작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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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 이성을 넘어 다시 만나는 감정 회복의 인문학 서가명강 시리즈 30
신종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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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I / 21세기북스 26번째 리뷰] 우리는 '감정'보다 '이성'에 충실한 삶을 바람직하게 여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이성적인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는 서적이 넘쳐나고, 반대로 감정적인 사람은 마음을 잘 다스려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훈련해야 훌륭한 사회의 일원이 된다고 가르치기 일쑤다. 그런데 이렇게 감정을 억제하고 매사에 이성적인 일상을 보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이 책은 '의문'을 던졌다. 그리고 때론 이성보다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성공'이 먼저냐? '행복'이 우선이냐? 를 놓고 고민한다. 딴에는 성공한 삶이 행복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을 맺기도 하지만, 누구나 인정할 만큼 성공했다고해서 모두가 다 행복한 것은 아닌 것을 보면 '정답'은 아닌 것도 같다. 그렇다면 행복하게 살아가니 성공하는 것일까? 이때의 성공은 남들이 인정할 만큼 큰 성공은 아닌 듯한 느낌이 쎄다. 이때 '성공비결'은 과연 이성적인 삶일까? 아니면 감정적인 삶일까? 이런 이야기들을 좀 풀어보자.

우리는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는 것을 '감정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일상에서는 이러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비이성적인 행동'이라며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기뻐도 크게 기뻐하지 않고 슬퍼도 슬픔을 참아야 칭찬을 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운다. 이와 반대로 기쁠 때 크게 기뻐하고 슬플 때 엉엉 울음을 터트리면 성숙하지 못하고 어른답지 못하다면서 핀잔을 주기 일쑤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분위기는 점점 '이성적인 사회'로 굳어져 간다. 이런 사회분위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분위기는 답답하지 않은가 말이다.

한편, 이런 답답한 사회분위기로 인해서 '차별'을 양산하기도 한다. 즉, 이성적인 사람과 감정적인 사람으로 나누어 후자쪽을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뚜렷해진 탓이다. 더구나 이런 갑갑한 사회분위기가 '남녀차별'까지 조장하고 있으니 문제가 된다. 이를 테면, 이성적인 사회분위기를 '남자'에겐 강요하고, '여자'에겐 관대(?)하면서 남자는 반드시 '이성적'이어야만 한다고 강요하고, 여자는 감정에 충실해도 괜찮다면서 은근히 '비이성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뚜렷한 문제다. 물론 남자인데도 '감정적인 사람'이라면 사회적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고, 여자인데도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극찬을 아끼지 않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래저래 우리 사회는 '이성적인 사람'을 편들고, '감정적인 사람'을 배격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적인 사람'이 감정적인 사람보다 더 행복할까? 이에 관한 연구결과는 놀랍게도 '감정표현'에 솔직한 사람이 스트레스도 덜 받고 더 행복한 느낌을 받는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단다. 오히려 '감정억제'를 하면 할수록 행복지수는 현저히 떨어졌으며, 이성적인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은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 수명도 짧아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래도 우리 사회가 '이성적'이어야만 할까?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우는 사람이 스트레스도 덜 받고 더 오래 살 수 있다면 우리는 '감정'에 충실한 사람을 벽안시하며 바라보아선 안 된다. 되려, 더 행복하고, 더 장수할 가능성이 높으니 부러워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는 사회분위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감정적인 사회분위기가 더 긍정적이고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나라 사람을 두고서 '흥이 많은 민족'이라고 하지 않은가. 수천 년 전부터 노래와 춤을 즐기는 풍습을 갖추고 있다고 말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떼창 문화'로 콘서트의 흥을 돋우고, 스포츠 '응원 문화'도 신명나서 전세계가 부러워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렇게 즐길 줄 아는 사회분위기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단련시키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너무 흥이 넘쳐나서 나름의 '중용'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일까? 어쨌든 우리 사회분위기의 긴장감을 좀 낮추고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는 강박감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까닭은 바로 '성공하는 삶'을 살고 있어서 일 것이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마다할 '동기'가 충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성공을 보장하는 지침서'들이 한결같이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에 충만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자기계발서>에는 즐거움 마음을 갖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가면 '성공의 길'로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조언하는 내용도 덧붙이고 있지만, 그렇게 즐기기에 앞서 엄청난 '부의 성공'을 이루어야 할 것이기에 '즐기는 삶'보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생활습관으로 자리매김하라고 당부하기 일쑤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마시멜로 이야기>, <아침형 인간>, <미라클 모닝> 등등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한결같이 다 그모양 그꼴이다. 심지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원칙>, 워랜 버핏, 잭 웰치 등등 부자들의 생활습관 따위가 적혀 있는 책들에서도 '성공'하려면 감정적이지 말고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어쨌든 그렇게 성공을 했다고 치자. 그게 과연 행복한 삶인가 말이다. 통계적으로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결과를 내놓지만, 행복이 부와 '정비례'하지는 않다는 보고도 빠지지 않고 덧붙여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약간 풍족한 삶을 살고 여유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지, 최상위권의 부자들이 가난뱅이보다 덜 행복하다는 이야기는 차고도 넘친다. 돈 많은 재벌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남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영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없이 모두를 적으로 삼고 의심부터 하는 일상을 살아가며, 부모형제가 죽기라도 하면 '상속'을 더 많이 받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남남처럼 법정다툼을 벌이곤 한다. 이런 삶이 과연 행복하겠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성적인 사회분위기를 '옳게' 보고, 감정적인 사람을 '그르게' 바라보는 시선부터 바꿔야 하는 것이다. 왜 부자만 인생을 즐기며 살 것인가? 금전적으로 조금 부족한 듯 해도 감정적으로 풍족하게 살면 더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 것 같지 않은가. 너무 감정에 충실하면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억누르며 살 필요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감정에 충실하고 충만한 사람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 또한 거두어야 한다. 너무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에겐 어깨를 쪼물락쪼물락하면서 긴강을 풀고 살라고 충고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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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시즌2 : 14 (리커버 에디션) 미생 (리커버 에디션) 14
윤태호 글.그림 / 더오리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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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시즌2 14>  윤태호 / 더오리진 (2019)

[My Review MDCCC / 더오리진 1번째 리뷰] 내가 <미생>을 처음 만난 건 2015년이었다. 드라마를 먼저 접했고, 시청을 다 한 뒤에는 'N차 시청'을 거듭하다 '원작 만화'까지 직접 구매해서 탐독을 했더랬다. 과연 <미생>의 무엇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무엇보다 '비정규직의 설움'을 아주 잘 표현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사회생활의 첫 발을 '97년 IMF'로 시작했더랬다. 그랬던 탓에 '정규직'을 꿈꾸며 알바 느낌으로 시작했던 '비정규직'으로 시작한 직장이 그대로 굳어져 버리고 말았더랬다. 그렇게 꼬박 8년 동안 일을 하다 더는 비젼을 기대할 수 없이 30대 초반에 비정규직을 때려치우고 '공부방'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는 논술쌤이 되었더랬다. 그렇게 쭉 아이들을 가르칠 것으로 기대했건만, '코로나 팬데믹(2020)'이 덮치자 공부장 사업마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를 해서 투잡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 이런 '나의 삶'이 <미생>이라는 프리즘을 투과하니 화려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그저 '흙수저의 그림자' 마냥 투박하게 비춰보일 뿐이었다. 물론 내 인생이 초라하다고 슬퍼하거나 우울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구나 싶어서 대견(?)해 할 뿐이다.

<미생>의 장그래는 누구나 겪었을 '인생의 고비'를 넘어 '잔혹하고 냉혹한 현실'을 더욱 잘 드러나게 해주는 캐릭터다. 뛰어난 실력을 갖췄으나 그 실력을 인정받지 못해서 남들보다 몇 배나 더 고생을 하는 역할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장그래 같은 인재는 '무한경쟁사회'가 낳은 안타까운 비극이다. <미생>을 본 분들은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세상엔 장그래 같은 인재가 넘쳐나는데도, 그 '인재'를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비정한 사회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말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대기업 정규직에 뽑혔다고해서 제대로 된 인재이고, 대기업 인사채용에 탈락했다고해서 쓸모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채용시스템'이 공정하지 못한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기업은 기업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채용방식으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인재들을 선출하고, 채용해서 잘 부려먹고 있다. 다만, 아직 고용받지 못한 이들은 채용이 될 때까지 실력과 스펙을 쌓으면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똑같이 채용'되고, '똑같은 업무'를 하는데도 '차별'을 두는 '정규직/비정규직'을 두는 것이 문제다. 기왕 뽑았으면 '똑같이 대우'를 해주면 좋을 것을, 비정규직은 실컷 부려먹다가 '계약기간'이 만료가 되는 순간 내쳐버리고 만다. 계약이 짧은 만큼 뭘 더 챙겨주는 것도 아니면서 왜 서럽게 만드냔 말이다. 그렇게 서럽게 만들 거면 '업무'까지 차별을 두어 어렵고 힘든 일은 '정규직' 시키고, 쉽고 하찮은 일은 '비정규직'에게 시키면 될 것을, 결국엔 온갖 차별을 하면서도 하는 일은 '비정규직'에게 더 많이 전가하고 만다. 어차피 '쓰다 버릴 용도(?)'로 뽑았다면서 하기 힘들고, 하기 어렵고, 하기 더러운 일감은 오로지 '비정규직의 몫'으로 떠넘기고 만다. 그래서 대기업에 취직한 장그래도 처음엔 개고생을 한다. 오상식 차장과 김동식 대리라는 멋진 직장동료와 한 팀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미생 시즌2 14>의 내용은 그 환상적인 팀워크를 자랑하던 '영업3팀의 멤버'가 고스란히 자리를 옮겨 '온길 인터내셔널'이란 중소기업에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는 과정을 연출하며 '한그루'라는 사원이 합류하게 되는 에피소드다. 한그루는 온길 인터내셔널와 거래를 하던 '송일무역'이라는 가족회사의 대리였는데, 한그루의 아버지이자 사장이 쓰러지면서 사업을 정리하고 '온길'과 인수합병하면서 새식구로 맞이하였다. 앞으로 벌어질 에피소드는 장그래와 여러 모로 닮은 한그루와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미생>에서는 허투루 에피소드를 다루는 법이 없다. 가족회사의 성격을 띠었다고하지만 '송일무역'도 엄연한 회사다. 그런 회사가 '오너'가 쓰러지는 바람에 경영에 문제가 생겼고, 거래처였던 '온길 인터내셔널'에 인수합병된 일은 아주 흔한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깊이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왜냐면 '오상식 부장'이 있기 때문이다. <미생>을 본 분들은 모두 공감하리라 본다. 자신에게도 '오상식'과 같은 직장상사와 함께 일을 했더라면 신 나고 즐겁게 직장생활을 했을 거라고 말이다. 일에 대해서 철두철미하지만 인간미가 넘쳐나서 모든 일을 '맛깔'나게 할 줄 아는 상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상식과 함께라면 힘든 일도 힘든 줄 모르고, 어려운 일도 함께 헤쳐나가며, 하는 일마다 보람차다고 느끼며 즐겁게 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오상식 차장이 활약하던 '시즌 1'이 아닌 오상식 부장과 함께 헤쳐나가야 하는 '시즌 2'는 이야기가 살짝 다르다. 시즌 1에서는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대기업 차장이었기에 일의 규모와 성과가 매우 크고 시원시원했지만, 시즌 2에서는 '중소기업'으로 축소되어 천하의 오상식 부장이 하는 일이라도 자잘한 스케일의 업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업규모도 현저히 작아져서 '하루 벌어서 하루를 더 연명하는' 중소기업의 애환이 시즌 2를 지배하고 있어서 살짝 우울한 느낌이 더 짙어져버렸다. 그렇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온길과 거래하던 송일무역을 인수합병하는 '리스크(위험요소)'까지 떠안아 버렸다. 앞으로의 에피소드는 희망적일까? 아님 절망적일까?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장그래와 파트너가 될 것으로 보여지는 '한그루의 등장'은 온길에 한가닥 희망으로 다가오는 듯 싶다. 왜냐면 <미생>에는 '바둑'이라는 요소를 접목시켰기에 앞선 내용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룬 대국은 99년 초에 벌어졌던 '제3회 삼성화재배 결승 5번기 제5국'으로 중국의 마샤오춘 9단(백) vs 한국의 이창호 9단(흑)이 벌인 대국이다. 그 가운데 14권에서 다룬 대목은 '77수부터 94수까지'다. 이 과정에서 마샤오춘은 네 귀와 중앙까지 모두 '백집'으로 만들어 초반 승부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지만 84수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고, 이어서 두었던 이창호의 85수가 '결정적 한 방'이 되어 바둑판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드디어 대역전승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과일 뿐, 아직 헤쳐나아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대역전극이 늘 그렇듯 '한수 한수'가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질 것이고, 온길 인터내셔널에 새로 입사한 '한그루의 활약'도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조심 내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프리퀄'에서는 오상식의 원 인터 사원시절의 이야기를 다뤘다. 특별히 '사석(死石)'이라는 제목을 다뤘는데, 오상식의 직장상사였던 송과장의 죽음을 다뤘기 때문이다. 송과장은 무척이나 일에 열심이었고 '애사심'도 투철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송과장이 '과로'로 쓰러져서 죽고 만 것이다. 송과장의 가족은 오열했고 송과장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슬픔에 빠졌는데, 회사에서는 '산재처리'를 급히 서두르려다 그만 큰 실례를 범하고 만다. 회사업무를 하다 사망했으니 당연히 회사가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하겠으나 '사망장소'가 직장 안이 아니라 퇴근시간이 훌쩍 넘은 '외근중'이었던 관계로 회사가 책임회피를 하려는 내용을 다룬 것이다. 지금이야 '출근길'이나 '퇴근길', 그리고 '회식'까지도 정상적인 근무로 인정을 받아 회사에서 산재처리를 해주고 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회사 '안'에서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대기업이라 할지라도 '면피'를 하기 위해 별의별 꼼수를 다 부리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아무리 기업의 최대목표가 '이윤추구'라고는 하지만, 결국엔 그 이윤을 벌어다주는 것은 '사람'이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번듯한 회사마저도 이윤(또는 '비용절감')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물건'처럼 쓰다가 소용이 없어지면 폐기처분하는 비정한 짓을 저지르곤 했다. 앞서 '비정규직의 설움'도 매한가지다. 한 사람의 몫이 아쉬워서 고용했으면서도 필요 없어지면 '해고'해버리고, 회사 비용절감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편한대로 '사람'을 처리해버리고 만다. 솔직히 말해 월급을 조금 덜 주는 것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사람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것은 치욕스럽기 짝이 없다. 왜 사람을 '사람대접' 해주지 않느냔 말이다.

<미생>은 이처럼 '사람대접'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들의 눈물을 이해해주는 명작이다. 비정규직의 목소리를 대신 외쳐주는 걸작이기도 하고 말이다. '시즌 2 15권'에서는 어떤 사연으로 감동을 전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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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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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XCIX / 넥서스Friends 4번째 리뷰] '차이와 차별'은 '다름과 틀림'만큼 다르다. 누구나 각자의 개성을 갖고 살아가기 마련인데 '서로의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두는 것일까? 막상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죽는다느니 어쩐다느니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다.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에서는 요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반인반요'가 된 인물이 등장하면서 요괴 아이 돌보미 야스케와 일행들에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그런데 '반인반요'란 무엇인가? 인간으로 치자면 '혼혈'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여자와 요괴 남자가 사랑에 빠져서 함께 살게 되니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인간과 요괴의 특징을 모두 갖춘 셈이다. 그렇다면 '반인반요'를 어떻게 볼 것인가? 4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할 것이다. 인간과 요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이 섞여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혼혈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위에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로 말이다.

어느 날 인간 여자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때 자신을 구해준 용감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인간 여자는 이 남자에게 한 눈에 반하고 만다. 그래서 둘은 사귀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는 자신이 '요괴'임을 밝히게 된다. 인간 여자는 요괴 때문에 위험에 처했는데 '요괴의 도움'으로 자신이 살아난 사실을 깨닫고 이 요괴에 함께 지내길 바란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요괴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의 곁에 있길 바란 것이다. 인간이 아닌 요괴는 두려운 존재이니 말이다. 그렇게 요괴 남자는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인간처럼 여자와 함께 지낸다. 그러다 딸 아이가 하나 생겼는데, 인간 여자는 두려움에 빠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요괴'이면 어쩌나하고 말이다. 다행이 겉모습은 인간의 모습이라 안심이었는데, 어느 날 어린 딸이 높이 있는 서까래를 어렵지 않게 오르는 광경을 목격하지 겁에 질려버리고 만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요괴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인간 여자는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한다. 요괴 남자 때문에 자기 딸이 요괴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기 딸에게도 '요괴의 능력'을 보이지 말라고 겁을 주었다. 나이 어린 딸은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엄마와 함께 지내고 싶었던 탓에 '요괴의 능력'을 감추고 평범한 인간 아이처럼 굴기 시작한다. 그렇게 딸아이는 요괴인 아빠를 멀리하고 인간인 엄마와 함께 지내며 점점 엄마처럼 '요괴'를 싫어하는 아이로 자란다. 그런데도 인간 여자의 히스테릭한 발작은 멈추지 않았고 요괴 남자는 온갖 방법을 다해서 인간 여자를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몸이 약했던 탓인지 결국 죽고 말았다. 그렇게 요괴 아빠와 요괴를 싫어하는 반인반요 딸아이만 남게 되었는데, 둘 사이는 부녀지간인데도 더욱 서먹할 따름이다. 그러다 야스케를 만난다. 요괴아이 돌보미인 야스케는 요괴 아빠인 소테쓰와 함께 다이코 공동주택을 방문한 것이다. 딸아이를 돌봐달라면서 말이다. 야스케와 반인반요 미오는 그렇게 만나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겪게 된다.

다시 돌아와 '혼혈'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혼혈은 이쪽과 저쪽을 모두 아우르는 '양쪽의 특징'을 갖추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혼혈에 대한 시선은 그리 곱지 못한 것이 슬픈 현실이다. 이쪽에서는 '저쪽의 특징'이 있으니 따돌리기 십상이고, 저쪽에서도 '이쪽의 특징'이 보이니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만다. 그렇게 혼혈은 '양쪽의 특징'을 모두 갖춘 능력자(?)인데도, 양쪽 모두의 따돌림을 받기 일쑤다. 왜 그럴까? 아마도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은 아닐까? 이를 테면,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중 언어생활'을 하며 두 개의 언어를 모두 잘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겉모습은 한국인과 미국인의 모습을 반반 섞였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는데 겉모습은 '다른' 점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들의 시셈과 질투심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변수를 다 고려하지 못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혼혈이 가진 장점이 '다수의 횡포'에 의해 잠식 당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 만 할 것이다.

우리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열린 사회를 바람직하다 말한다. 그리고 '소수의 몫'으로 남겨두는 배려에 대해서도 다분히 관대한 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독 '혼혈'에 대해서는 야멸치게 굴기 십상이다. 왜 혼혈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순수한 혈통을 지키고 고유한 전통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각고의 노력으로 혼혈에 대한 차별을 올곧게 지향하는 것인가? 혼혈에 대한 편견과 따돌림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 책이 '일본소설'이니 일본 안에서 벌어지는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 살짝 논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왜 일본은 외국인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면서도 유독 '한국인'에 대해서만큼은 '2등 국민 취급'을 하는 것인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 '특유의 열등감'으로 이해하면 좋겠는가? 한국인의 뛰어난 재능으로 일본인의 순수한 혈통과 고유한 전통문화가 어그러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본사회에 만연해 있기라도 하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내용으로 '해석'을 내린 학계의 전문가가 있을 정도로 일본인의 '한국인 차별'은 꽤나 설득력 있게 들릴 정도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인 차별'은 그 정도가 심각해서 '한국 혐오'로까지 확장해나가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일본정계를 주름잡는 '정치인'과 '경제인' 들이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아무래도 일본의 보수우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위치(?)'에 선 사람들이라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혐한론'은 필수이고, '망언'은 선택일 지경에 다다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인 차별'로 인해서 일본사회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인 폄하는 일상처럼 흔해 빠진 일이지만 다른 나라의 시선으로 보면 '외국인 혐오(제노포비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이런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이 얼마나 '외국인'에 대해 친절하고 친근한지 증명이라도 하듯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고 있지만, 정작 '재일교포'를 향한 폭력과 횡포는 여전히 도를 넘고 있고, 아직까지도 개선되지 못한 뿌리 깊은 악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처럼 한국의 흔적을 아주 지워버려야 겨우 그러한 '악습과 폐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억압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한류열풍'과 함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보수우익의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강경하며 '한국 말살 정책'은 여전히 유효하기만 하다.

어린이들이 읽는 소설에서 '외국인 혐오'까지 논하는 것은 언어도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레이코 작가는 일본사회에 만연한 '차별의식'에 대해서 어린이 독자들에게 교훈을 남겼다고 믿고 싶다. 딱히 이 책의 내용이 '재일교포에 관한 차별'을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사회에 만연한 '차별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NO!'라고 말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도 심각한 '차별문제'를 사회적으로 겪고 있으니 마찬가지다. 그 어떠한 이유로도 '차이'를 가지고 '차별'을 하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비단 '외모차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빈부차이', '정치견해차이' 등등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한 사회는 극렬한 혼란만 첨가되고, 그 혼란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면 문제는 점점 더 가중되어 사회 전체구성원 모두에게 피해를 안겨줄 뿐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각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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