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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7 : 변신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7
최윤정 글, 김연승 그림, 손영운 기획, 윤순식 감수, 프란츠 카프카 원작 / 채우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CII / 채우리 18번째 리뷰] 독일의 문학가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적인 소설 <변신>은 부조리한 사회를 다룬 대표적 문제작으로 손꼽는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너무나도 천박했다는 것이 이 짤막한 소설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현대 사회의 문제로 떠오른 '인간 소외' 문제에 대한 경종을 강렬하게 울렸다. 주인공인 그레고리 잠자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 회사의 영업 사원으로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한 모범적인 인간이었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변신'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벌레가 되어버린 잠자는 사랑하는 가족에게마저 철저히 버림을 받고 쓸쓸히 죽어 간다는 것이 전체적인 줄거리다. 여기에 '왜' 벌레가 되었는지, '어떻게' 변신을 하였는지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필 변신한 것이 동물 가운데서도 가장 하찮은 '벌레'인 것인지, 아무런 단서조차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일단 '벌레'가 되고 난 뒤에는 '인간'으로서 받아 마땅한 존경과 명예, 심지어 사랑마저 깡그리 잃어버리고 만다. 인간이었을 때에는 몰랐던 '자신의 처지'가 극명하게 대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카프카는 말하려 한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지 말이다.
카프카는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작가다. 하지만 '전업작가'가 되진 못했다.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으려 했지만 생계를 위해선 일(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프카는 낮에는 '재해 보험국 공무원'으로 일을 했고, 밤에는 그렇게나 좋아하던 '글'을 썼다. 그렇게 밤낮을 바쁘게 살아간 카프카는 41세(1883~1924)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그는 살아있을 때 '소속감'을 느끼려 간절히 원했다. 왜냐면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유대교도'는 아니었고,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독일인'이 아니었으며,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체코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르주아 계급이기에는 '미흡'했고, 노동자 계급이기에는 '충실'하지 못했다. 이렇듯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그는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카프카는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곳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랬다. 특히 '직업'을 통해서만 사회에 소속될 수 있다는 강박감마저 갖고 있기에 '전업작가'를 꿈꾸는 삶을 살면서도 관두고 싶었던 회사를 떠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피곤하게 살아간 '실존' 인물이었다.
그가 살던 20세기 초반의 유럽은 '산업 사회'를 막 벗어나 전운이 감돌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런 그가 '실존주의(불안한 존재의 부조리상을 자각하고, 그 불안을 극복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는 인간을 묘사) 문학'적 경향을 띤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변신'을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한 카프카는 현대 사회가 지닌 모순성에 주목했다.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것처럼 부자도 하루 아침에 빈자가 될 수 있고, 건강했던 사람이 질병이나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법이다. 계급적으로도 '지배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지배 당하는 처지'로 전락하는 경우도 다반사란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변신'을 거친 인간은 '똑같은 인간'이 아니게 된다. 분명 '같은 존재'였지만 변신을 거치게 되면 더는 '같은 존재'가 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부자가 부를 잃으면, 건강한 자가 건강을 잃으면, 사회적 지휘나 명망이 높은 사람이 더는 높은 위치에 있을 수 없다면, 더는 '같은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사랑으로 충만한 '가족 관계' 안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 건실한 사업가로 부와 명예를 걸머쥐어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사람일지라도 한순간에 부와 명예를 잃게 되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삽시간에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성실하고 유능한 영업사원이었다. 잠자의 가족은 은퇴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그리고 사랑스런 여동생으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잠자의 수익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하게 일을 해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은 잠자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오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잠자가 성실하고 유능했기에 그럴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화목한 가족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잠자는 '벌레'가 되었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벌레'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한순간에 '경제적 능력'이 사라져버리자 나머지 가족들은 잠자를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돈을 벌어다줄 때는 당연히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지만,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벌레'가 되자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레고르를 여전히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이다. 처음에는 잠자의 가족들도 그러려고 노력했다. 나름대로 말이다. 하지만 흉측하게 변해버린 '외모'와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일삼는 그레고르를 오랫동안 보면서 참을 수는 없었다. 아니 '인간답지' 못했더라도 '경제적 능력'만 잃지 않고 나머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줄 수 있었다면 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아무런 '경제적 보탬'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족의 부담'만 늘려놓는 상황이 펼쳐지자 잠자의 가족들도 더는 참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다시 '직업'을 구하고, 어머니는 '바느질 일감'을 받아다가 생계를 꾸리기 시작한다. 그레고르가 '경제적 능력'을 갖고 있을 때는 판판이 놀던 인간들이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니 저마다 살 궁리를 한 것이다. 애초부터 그레고르가 힘겹게 생계를 꾸려나갈 때에 함께 도우며 살아갔더라면 그레고르가 괜한 고생을 하며 때려치우고 싶었던 회사를 꾸역꾸역 다닐 필요도 없었을 것 아닌가. 그렇게나 능력을 감추고 '빌붙어' 살아가던 가족들은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를 천대하면서 저들만의 살 궁리를 하며 살아간다. 어차피 '경제적 능력'이 없는 존재는 '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라면서 말이다. 여기서 카프카는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바로 '경제적 능력'이다. 경제적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인간답게 살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한편, 이 소설은 '실존주의 문학'의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 실존주의란 '기존의 가치 체계'를 거부하고, '개인의 결단'과 '자유 의지'를 중시하는 경향을 띤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실존 인간은 기존의 가치 체계를 아무런 비판 없이 따르지 않고, 운명조차 정해진 바 없으니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 문학작품으로 사르트르의 <구토>, <존재와 무>, <벽>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페스트>를 꼽는다. 그 가운데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도 함께 선보이는데, 이는 그레고르 잠자가 '변신'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되고 스스로 삶의 가치가 없음을 깨닫자 그대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을 선보이며 '기존의 정해진 가치'를 따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초기적 모습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카프카 이전에는 '벌레'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 같은 존재로 변해버린 주인공일지라도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뻔한(?) 결말로 끝맺었다면, <변신>에선 '삶의 가치'를 깊이 고민한 끝에 자신이 처한 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강렬한 결말을 선보이자 사르트르와 카뮈도 '실존주의 문학'적 영감을 카프카에게 얻고서 명작을 선보였던 것이다.
또한, <변신>은 자본주의의 비열함을 맹렬히 비판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집필되던 시기는 1912년에서 1915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 당시에는 '식민지 약탈자본주의'가 심각하게 펼쳐지던 때였기 때문이다. 서구열강들의 '시장 강탈'로 인해 전세계는 전쟁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부가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자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노동자(무산자)와 자본가(유산자)의 계급적 갈등은 날로 심해졌으며, 노동자는 생계를 위해선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시달렸는데도 변변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진정한 '노동의 가치'가 사라지고 오직 '돈의 노예'가 되버렸다는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사회고발이 절실한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신>에서는 경제적 능력을 상싱한 것으로도 '인간 존재'조차 의심받고 내버려야만 하는 비정한 가족관계를 고발한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변신>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현대인들도 여전히 '경제적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인간 존중'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을 평가할 때 '경제적 능력'만이 아닌 다양한 가치를 고려해서 인간의 '존재가치'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고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일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경제적 무능력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연애도 포기하고, 결혼도 포기하고, 출산까지 포기해서 더는 '인간답게' 살아갈 최소한의 욕구 또는 품위를 지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적 능력이 충족된다면 어떠한 것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 능력'은 그 어떤 가치보다 상위에 있으며,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해 '자유 의지'마저 포기하라면 할 정도로 더욱 비참한 '노예적인 인간'으로 퇴화되고 말았다. 물론 나름의 방식으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며 인간다움의 다양성을 선보이는 사람들도 늘고 있지만,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는 그 어느 곳이건 간에 '경제적 능력'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면 '살아갈 가치'조차 없는 존재인 것일까? 우리는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물질만능주의'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의 고질병일지도 모르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는 까닭도 인류진화적인 차원에서 늘 배고프던 시절에 생존확률을 높이는 쪽으로 진화한 탓이다. 인간은 '배고픔'에 길들여져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배부름'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과거에는 없던 병을 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면 대부분 '배곪음'으로 일상을 개선하면 호전되는 경우가 흔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각종 성인병을 겪으면서도 '배부름'을 부러워하고,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을 부러워하는 지경에 다달았다. 배고픈 시절에는 굶어죽기 딱 좋을 체질(!)이었는데 말이다. 암튼 현대인들에게 <변신>은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케하는 명작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