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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8 : 무정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8
고재봉 글, 장우룡 그림, 손영운 기획, 이광수 원작 / 채우리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8 : 무정> 이광수 / 손영운 / 고재봉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VII / 채우리 20번째 리뷰] 나는 이광수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그는 '변절자'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다지만 '이광수'만큼은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열을 올리시던 학창시절 선생님들이 참 많았기 때문에, 나는 일찍부터 '이광수'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친일파'로 치부하고 한껏 무시하며 살다보니, '그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인들을 몇몇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최초의 근대인'이었고, '한국 근대소설의 창시자'였으며, '그의 업적'을 빼놓고 '한국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그랬고, 홍난파가 그랬으며, 서정주조차 일제를 찬미하지 않고서는 '예술의 길'을 걷는 것은 고사하고, 엄혹한 시절을 견디며 살아갈 수조차 없다는 변명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이광수, 그가 열였다는 한국 문학의 시작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처음으로 꺼내든 소설은 <단종애사>였지만, 이미 내용을 알고 있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우리의 것'을 깎아내리고, '일제의 것'을 최고라고 추켜세우는 꼬락서니가 정말 '아첨꾼'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왕위에서 끌려 내려져서 끝내 죽임을 당하는 '단종'이 조선의 운명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왕위를 찬탈하며 화려하고 강한 힘으로 조선을 바꾸어 나가는 '수양대군'이 끝없이 욱일승천하는 일제의 숙명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조선은 가망이 없고, 오직 일제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내용을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빗대어 아첨을 떨었으니, 일제가 얼마나 그를 사랑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종애사>를 읽다가 말고 내던지고 말았다. 그게 끝이었다.
그런데 그가 '변절하기 전에 쓴 소설'이 있다면 읽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접한 소설이 바로 <무정>이었다. 젊은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쓴 소설이라기에 흥미도 생겼다. 양가 부모님들이 정한 사람을 '정혼자'로 받아들여 얼굴도 보지 못한채 '혼인'을 해야만 했던 시절에, '자유연애'를 통해서 서로의 배우자를 정해나가는 줄거리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예전의 관습을 타파하지 못하고 얽매이는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차츰차츰 바꿔나가려는 모습의 등장인물들이 참 보기 좋았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21세기 독자인 내가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당시 20세기 초에 '신문연재'로 읽어나가던 독자들은 얼마나 큰 충격으로 흥분하였을까? 그런 상상만으로도 이광수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하고 위대한 감동을 선사한 장본인이 '민족'을 배반한 변절자가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그는 변한 것일까?
아니었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변절자'도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근대인'이었고, 세상을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서 무지몽매한 군중들을 일깨우기 위한 '계몽가'로 활약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민족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진정한 '애국청년'이었던 것도 분명했다. 단지, 그는 '약자의 편'에 서서 힘쓰는 것을 경멸하는 엘리트 계층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강자의 편'에 서서 군림하길 선호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찌감치 '동경유학'을 결심했고, 동경해 마지 않던 '일제의 편'에 서서 군림하며 계몽시키는 일에 앞장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 것이다. 이 소설 <무정>을 읽으니 더 확고하게 맞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은 조선이라는 낡은 껍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청춘들의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다. 남주인 '이형식'은 학교선생님이다. 그리고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김선형'을 영어과외하게 되면서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청춘남녀가 마주 앉아서 속닥속닥 함께 시간을 보내니 '사랑'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무정> 이전의 소설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전개 방식이었다. 남녀칠세 부동석을 외치던 사람들이 <무정>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을, 아니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금기시 되던 '자유연애'를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그들도 피 끓는 청춘시절을 겪어봤고, 겪고 있을테니, 이형식과 김선형의 만남이 어찌 싱숭생숭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러면서 이형식은 자연스레 '사랑'을 떠올리고, 곧이어 '결혼'이란 생각을 품게 된다. 그런데 이형식에게는 이미 정해진 정혼자가 있었다. 고아 신세였던 자신을 이렇게 어엿한 선생으로 성장하게 해준 고마운 은인 박진사의 딸 '박영채'가 바로 그녀다. 그런데 그녀와는 오래전에 헤어졌었다. 박진사가 일제의 터무니없는 방해로 '교육사업'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행동조치들이 우여곡절 끝에 범죄(?)로 이어졌고, 비록 박진사가 직접 저지른 범죄는 아니었으나 '올곧은 교육자'였기에 자신의 제자가 저지른 범죄를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연루되어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이 되어 버린 박진사의 집안 사정 때문에 박영채의 생사도 모르고 이형식은 헤어지게 되었고, 김선형과 사랑의 감정이 싹튼 바로 그날에 우연찮게 박영채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랑의 삼각관계가 하루 사이에 형성되고 이야기는 계속 된다.
<무정>이 처음 '매일신보'에 연재된 해가 1917년이라고 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병탄 되어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던 시기에 난데없이 '사랑이야기'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삼각관계'다.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치열한 공방전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두고서 갈팡질팡 흔들리는 마음을 교묘하게 서술하고 있으니 '연재소설'을 읽는 신문독자들의 애간장도 하루가 다르게 녹아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어그로를 끌어놓고서 '박영채의 과거'를 보여준다. 양반가 규수로 자라 '유교적 가르침'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던 계집아이에게 집안이 풍비박산 되고, 아버지가 감옥살이하며, 친척들의 구박을 피해 달아났지만, 여인의 몸으로 돈 한 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지만 '돈'이 없으면 감옥에서 아버지를 꺼낼 수도 없고, 당장 먹고 살 수 있는 길도 마땅치 않아 박영채는 여자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인 '기생'이 되었다. 허나 그 사실을 한 아버지 박진사는 감옥에서 목을 매 자결하고, 박영채는 천애고아가 되어 경성에 있는 이형식을 찾아 만나게 된 것이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이광수가 박영채의 사정을 이리 절박하게 꾸며낸 까닭은 다름 아니라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박영채로 투영해서 보여주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광수는 박영채를 철저히 박하게 묘사했고, 애절하게 서술하여, 끝내 이형식에게조차 '버림'을 받고 죽는 인물로 쓰려 했단다. 그래야 이광수가 처음 의도했던 '낡은 조선'을 철저히 벗겨내고 '새로운 나라'로 탈바꿈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나라'가 독립한 조국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이광수는 애초에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식으로 써내려갈 뿐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생긴다. 독자들의 심금이 절절하게 울리자 '박영채를 살려내라'는 독자투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정인 즉슨, 이형식이 김선형과 혼담이 이어지고 기생이 된 박영채가 '정절'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박영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평양으로 떠나는 장면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화들짝 놀란 애독자들이 기왕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목적이라면 '박영채'도 한 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면서 영채가 자결하지 않기를 바라는 투고가 계속 이어졌단다.
그러자 이광수도 줄거리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박영채에게 '김병욱'이라는 인물을 꺼넣어서 '변화'를 꾀했다. 김병욱의 본명은 '김병옥'이다. 여자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름이 남자 같은 사연은 병옥이 당시의 '보통 여인'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신식 여성'이었고, 일찍 일본유학을 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음악가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엘리트 여성'이었는데, 여기서도 이광수의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바로 '조선의 여성'과 '일본에 의해 개화된 여성'의 다름을 확연히 보여주고, 둘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뻔한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 의도된 본보기대로 영채는 병옥과 함께 일본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이형식과 김선형이 서로 약혼을 하고 '미국유학길'에 오르던 차에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잠시 '삼각관계'를 부추기며 젊은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하지만, 어차피 이건 주제가 아니다. 결국 해묵은 감정은 일단 정리가 되면서 4명의 청춘남녀는 스러져가는 조선의 아픈 현실을 낱낱이 파헤치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몽'뿐이라며 자신들이 그 '선구자'가 되어 500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조선을 일깨우는 '선각자로서의 활약'을 다짐하며 이야기는 마무리가 된다.
그럼 이 소설의 제목은 왜 <무정>인가? 한마디로 '정(情)'이 없다는 뜻인데, 이광수는 '강한 힘'을 정의 원천으로 보았다고 한다. 강자만이 세상을 바꿀 힘도 있고, 그렇기에 세상을 바꾸려면 강한 힘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들이 베푸는 아량이야말로 진정한 '정'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의 조선은 온통 낡고 버려야 할 것들 투성이 뿐이니, 베풀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가 없으니 <무정>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는 이광수의 불우한 어린 시절이 한 몫 단단히 했다고 한다. 고아로 자란 이광수는 어려서부터 숱한 고생과 설움을 당했고, 오직 실력만으로 다녀온 '두 번의 일본 유학' 이후에는 이런 사고방식을 아예 각인 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난하고 없이 살면 당할 수밖에 없다. 당하지 않고 당차게 살기 위해선 무엇보다 '힘'을 가져야 한다. 그 힘을 가져야만 '정'을 베풀며 살 수 있다. 작금의 조선은 '무정'하다. '유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 이런 논리를 펴 나간 것 같다.
그래서 이광수는 '강한 힘'에 쉬이 굴복한다. 내가 갖지 못한 강한 힘을 가지려고 맞서 싸우는 일은 요원할 따름이다. 대신 '강자'에 빌붙어 그들이 만든 세상에 '순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괜히 무정한 세상에서 힘들게 사느니 유정한 세상에 빌붙어 사는 것이 백 번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는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는 대목이다. 여러 모로 '이광수'와 '이형식'은 닮았기 때문이다. '고아'라는 설정이 그렇고, '선생'이라는 직업도 똑같고 말이다. 이런 이형식이 박영채의 자결 소동에 충격을 먹지만, 금방 괜춘해져서 김선형과 약혼하고 미국유학길이라는 확실한 출세길을 '선택'한다. 기차에서 우연히 박영채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갈등'을 하지만, 김선형과 마주하는 순간에 그런 갈등은 눈녹듯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슬며시 '조선이 처한 비참한 현실(홍수로 인해서 모든 일상이 망가진 서민들의 모습)'로 시선을 돌리고, 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뛰어난 역량(힘)'을 과시하며, 더욱더 강한 힘을 신봉하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지몽매'하기 때문이라고 못 박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이형식은 '과학'을, 김선형은 '수학'을, 김병옥과 박영채는 '음악'을 공부해서, 무지몽매한 이들을 깨우쳐주는 선각자이자, 계몽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결말에서 그 결심은 10000% 결실을 얻고, 조선에 더 많은 학교를 세워서 어리석은 민중들을 일깨워주겠다는 사명감에 활활 불타오른다. <무정>한 세상을 '유정'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한다면서 말이다.
물론, 고마운 마음가짐이다. 자신들이 '강대국'에서 뛰어난 교육을 잘 받고 와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일깨워 '무정'한 세상을 '유정'한 세상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실제로 당시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도 학교를 세워 '근대화'를 이뤄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사상가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오산학교, 대성학교를 비롯해서 수많은 학교들이 '민족자본'에 의해 세워지고 조선의 학생들을 가르쳤던 것이 유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독립'이 교육만으로 달성될 일일까? 무엇보다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못하면 '독립운동'을 실행에 옮기기도 힘들었으며, '무장투쟁'을 하려해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크게 활약하곤 했지만, 결국 '군자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1920년대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이후로 1930년대에 접어들면 변변한 '무장투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았다. 딴에는 강대국의 힘을 빌려서 독립(또는 자치)을 이루자는 노력도 보였으나, 결국 이승만 같은 괴물만 만들어냈을 뿐, '외교독립론'은 빛 좋은 개살구 격이었다. 그러니 '교육'만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원천적'이고 '근원적'인 행동(또는 운동)을 해나갔어야 한다. 그런데 <무정>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저 쉽디 쉬운 꿈만 꾸는 것으로 그칠 뿐이다.
그리고 정작 이광수 본인도 '교육자'로 별다른 활약도 하지 않고서 쉬이 '변절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쓴 글로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방점을 찍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래서는 결코 '유정'한 세상을 맞이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조선이 수탈 당해 일제의 배를 불려주는 것으로 조선땅에 '유정'한 세상이 만들어졌느냔 말이다. 그게 아님을 잘 알면서 그는 '조선의 무정'만을 탓할 뿐이다. 그래서 근대 한국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이 참으로 무색할 따름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이광수를 '애증의 대상'으로 표현했는데,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이 이광수에게서 '근대의 희망'을 품고서 그를 사랑하고 조국이 발전할 모습에 기대를 많이 부풀렸을 터이니 딱 맞는 표현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배경지식을 싹 제거하고 소설 자체만 놓고 따진다면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로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 면면으로만 보면, 분명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한국 문학의 쾌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것들을 싹 다 제외하고서 읽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광수의 '위를 향한 욕망'까지 제거할 수는 없고, 그 욕망의 면면을 파고 들다보면, 그가 친일부역자였다는 사실에 다다르고 만다.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인 것일까? 아니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췄어도 '배신의 아이콘'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경멸해야 할 대상인 것일까? 요즘 전세계적으로 '극우또라이들'이 활개를 치며 난장을 만드는 것을 보면, 단순히 '똑똑하다'고 추켜세워줄 까닭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들의 똑똑함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리 없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하고 '경각심'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도 남을 배려하고 함께 더불어서 잘 살려는 착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절대로 '강한 힘(권력)'을 갖지 못하게 단절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무정>을 읽다보니, 그런 꼴통들이 떠올랐다. 그런 까닭에 이광수의 소설도 읽어야 하는 걸까? 경각심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