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9 : 걸리버 여행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9
김세라 글, 문성호 그림, 강서정 감수, 손영운 기획, 조너선 스위프트 원작 / 채우리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9 : 걸리버 여행기>  조나단 스위프트 / 손영운 / 김세라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VIII / 채우리 21번째 리뷰] 나는 태어나 보니 '박정희 정권' 시대였고, 살다보니 '전두환 정권' 때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군사독재'를 관통하던 시절을 살아서 <걸리버 여행기>를 그저 동화책으로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소인국'만 있는 책으로 말이다. 그때 어떤 친구가 '소인국'이 전부가 아니라 '거인국'도 있고, '천공성'도 있으며, '마인국'도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지만, '실체'를 보지 못했으니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92년에 '문학수첩'이란 출판사에서 '최초 완역본'으로 <걸리버 여행기>를 출간했더랬다. 그때 우연히 책을 손에 넣긴 했는데, 정작 완독한 것은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그리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더랬다.

첫 번째 충격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이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어른들을 위한 '풍자소설'이었고, 더 정확하게는 당시 영국 정치인들의 세태와 위선을 꼬집은 '정치소설'이었다. 그러나 더 꼬집어보면 <걸리버 여행기>는 영국인 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모두 어리석고 사악하며 탐욕스럽기 그지 없다고 모조리 다 싸잡아 비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리고 뒤이은 두 번째 충격은 왜 <걸리버 여행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아작을 냈었던가다. 비단 우리 나라 뿐만이 아니었단다. 불편한 내용은 '삭제'하고, 원래의 내용을 알 수 없게 '왜곡'했으며, 그런 부담을 덜기 위해서 아예 '소인국'과 '대인국' 정도로만 짜깁기 해서 '아동용 소설'로 출간하기에 이르렀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인국'편에선 그저 신기한 모험 이야기로만 읽히다가 '거인국'편에 들어서면서 세계 최강으로 자부했던 대영제국을 신랄하게 까댔고, 걸리버가 사는 인간세계에서는 영국이란 나라가 최강일지 몰라도, 걸리버가 한낱 소인으로 보이는 '거인국'에서는 대영제국일지라도 그저 거인들의 한 발자국만으로도 가볍게 제압 당할 수 있는 약소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걸리버가 늘어놓은 대영제국의 위상이란 것이 거인들의 눈에는 참으로 거슬리는 비열한 종족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상대를 속이는 일을 자랑 삼아 늘어놓고, 약소국과 식민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온갖 무력을 앞세워서 파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약탈과 수탈, 심지어 학살까지 자행하며 힘을 과시하는 장면에서 거인들은 진정으로 분노하기에 이른다.

'천공성'으로 올라간 걸리버는 인간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허위와 부조리, 그리고 끝없는 탐욕을 신랄하게 까댄다. 그리고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인간들이 얼마나 교만한지 따끔하게 지적하는데, 그건 '마인국'에서 휴이넘을 만나고서 극치의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걸리버는 야후(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휴이넘(말 종족)'과 비슷한 고도의 이성을 소유하고 있는 괴리감으로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왜냐면 마인국에서 살고 있는 '야후'들은 그야말로 비이성적이며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처럼 살고 있는 하찮은 종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하찮은지 휴이넘들이 '가축'으로 길들여 써먹으려 해도 제대로 통제가 되질 않아 포기했고, 야생동물처럼 풀어놓고 살게 해주려해도 '같은 종족'인 저들끼리도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폭력적인 존재라 아주 골치를 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걸리버는 '여자 야후'를 아내로 받아들여 지성을 심어주려 했으나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슬픔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걸리버는 '휴이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만, 휴이넘들은 애초에 야후를 '위험요소'로 보았기에 걸리버가 이성을 가진 야후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더 큰 위협'으로 여겼기에 마인국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걸리버는 휴이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죽으려 하지만 인간세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무사히 돌아가도 문제다. 걸리버가 영국이란 '야후'가 사는 나라에서는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걸리버는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만, 가족들에게조차 '야후의 악취'를 맡게 되자 식사도 혼자하고, 말들이 있는 마굿간에서 안식을 얻으며, 말들과 대화를 하는 것으로 안정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걸리버가 자신의 모험담을 글을 써내려 가는데, 그게 바로 이 책<걸리버 여행기>라는 식으로 끝을 맺는다.

결국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 본성'에 대한 혐오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의 세태를 비판한다. 사실 '맹비난'에 가깝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조나단 스위프트는 '성악설'에 근거해서 이 책을 썼다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위프트는 '성직자'였다. 당시 18세기 종교관으로 보면 인간은 모두 선하다는 '성선설'의 입장을 고수해야 할 위치에 있는데, 그는 인간의 본성이 이토록 추하다며 '성악설'보다 더 심한 악담을 쏟아낸 격이다. 이는 아무래도 그가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 본토'에서 성직을 구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작용(?)한 듯 싶다. 애초에 그가 원하던 대로 쉬이 '영국 본토'에서 성직자 생활을 했더라면 이런 비난을 쏟아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영국 본토'로 진입하지 못했다. 그 까닭을 당시 '성직자들의 위선과 비열한 정치질'이라고 본 스위프트는 인간의 본성을 까발리듯 <걸리버 여행기>를 써내려 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겐 도무지 '희망'이 없었던 것일까?

그건 아니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다보면 '인간의 이성'이 환하게 빛나는 대목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거인국의 왕이 그렇고, 휴이넘에서 걸리버가 주인으로 섬겼던 말이 그렇다. 그들의 빛나고 존경스러울 정도로 높은 이성이 바로 '최상의 인간'이 소유한 이성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스위프트가 대부분의 인간은 '야후'만도 못한 짐승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지만, 그가 이상적으로 바라본 이성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높은 이성을 대부분의 인간들은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실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래서 스위프트가 '인간 본성'의 추악함을 꼬집긴 했지만, 인간에게 아예 희망조차 없다고 체념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함으로써 이 책은 비로소 '풍자소설'로 완성이 되며, 걸리버가 겪은 이상한 모험들도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처음 쓰여진 해가 1726년이라고 한다. 무려 300년 남짓이나 지났는데도 이 책을 읽어야 할 까닭은 여전히 필요충분하다. 우리가 진보와 보수, 극좌와 극우로 갈라져서 '정치싸움'을 하는 것을 넘어서, 상대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상대를 '제거'하고 '절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갈등'으로 치닫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왜 우리는 추한 본성을 티내고 싶어 하는가? 아무리 그래도 '이성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즐기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그걸 즐기면 바보 취급하는 세상이 된 듯 싶다. 적어도 나는 그런 종자들의 비열함을 한껏 욕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이성'을 챙기길 바라고 또 바란다. 한낱 짐승도 '자기 종족'끼리는 싸우지 않는 법이다. 오직 인간만이 '같은 종족'임에도 생각이 다르고, 겉모습이 다르다고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여서 서로를 죽이는 짓을 일삼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제 그런 야만스럽고 혐오스러운 짓은 그만 하자. 제발 이성을 찾고 서로를 존중하며 높은 이성을 가진 인간답게 살아가길 바란다. 뭐, 기왕 죄 지은 놈은 달게 죄를 받고 말이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저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며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은 너무 역겹다. 애초에 인간이었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말이다. 그나마 인간으로 '대접'을 해주니 정상적인 법 절차를 거쳐서 죄를 따지고 있는 것 아닌가. 더는 추한 모습 보이지 말고 인간답게 죄값을 치루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8 : 무정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8
고재봉 글, 장우룡 그림, 손영운 기획, 이광수 원작 / 채우리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8 : 무정>  이광수 / 손영운 / 고재봉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VII / 채우리 20번째 리뷰] 나는 이광수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그는 '변절자'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다지만 '이광수'만큼은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열을 올리시던 학창시절 선생님들이 참 많았기 때문에, 나는 일찍부터 '이광수'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친일파'로 치부하고 한껏 무시하며 살다보니, '그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인들을 몇몇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최초의 근대인'이었고, '한국 근대소설의 창시자'였으며, '그의 업적'을 빼놓고 '한국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그랬고, 홍난파가 그랬으며, 서정주조차 일제를 찬미하지 않고서는 '예술의 길'을 걷는 것은 고사하고, 엄혹한 시절을 견디며 살아갈 수조차 없다는 변명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이광수, 그가 열였다는 한국 문학의 시작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처음으로 꺼내든 소설은 <단종애사>였지만, 이미 내용을 알고 있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우리의 것'을 깎아내리고, '일제의 것'을 최고라고 추켜세우는 꼬락서니가 정말 '아첨꾼'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왕위에서 끌려 내려져서 끝내 죽임을 당하는 '단종'이 조선의 운명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왕위를 찬탈하며 화려하고 강한 힘으로 조선을 바꾸어 나가는 '수양대군'이 끝없이 욱일승천하는 일제의 숙명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조선은 가망이 없고, 오직 일제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내용을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빗대어 아첨을 떨었으니, 일제가 얼마나 그를 사랑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종애사>를 읽다가 말고 내던지고 말았다. 그게 끝이었다.

그런데 그가 '변절하기 전에 쓴 소설'이 있다면 읽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접한 소설이 바로 <무정>이었다. 젊은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쓴 소설이라기에 흥미도 생겼다. 양가 부모님들이 정한 사람을 '정혼자'로 받아들여 얼굴도 보지 못한채 '혼인'을 해야만 했던 시절에, '자유연애'를 통해서 서로의 배우자를 정해나가는 줄거리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예전의 관습을 타파하지 못하고 얽매이는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차츰차츰 바꿔나가려는 모습의 등장인물들이 참 보기 좋았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21세기 독자인 내가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당시 20세기 초에 '신문연재'로 읽어나가던 독자들은 얼마나 큰 충격으로 흥분하였을까? 그런 상상만으로도 이광수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하고 위대한 감동을 선사한 장본인이 '민족'을 배반한 변절자가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그는 변한 것일까?

아니었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변절자'도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근대인'이었고, 세상을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서 무지몽매한 군중들을 일깨우기 위한 '계몽가'로 활약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민족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진정한 '애국청년'이었던 것도 분명했다. 단지, 그는 '약자의 편'에 서서 힘쓰는 것을 경멸하는 엘리트 계층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강자의 편'에 서서 군림하길 선호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찌감치 '동경유학'을 결심했고, 동경해 마지 않던 '일제의 편'에 서서 군림하며 계몽시키는 일에 앞장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 것이다. 이 소설 <무정>을 읽으니 더 확고하게 맞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은 조선이라는 낡은 껍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청춘들의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다. 남주인 '이형식'은 학교선생님이다. 그리고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김선형'을 영어과외하게 되면서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청춘남녀가 마주 앉아서 속닥속닥 함께 시간을 보내니 '사랑'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무정> 이전의 소설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전개 방식이었다. 남녀칠세 부동석을 외치던 사람들이 <무정>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을, 아니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금기시 되던 '자유연애'를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그들도 피 끓는 청춘시절을 겪어봤고, 겪고 있을테니, 이형식과 김선형의 만남이 어찌 싱숭생숭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러면서 이형식은 자연스레 '사랑'을 떠올리고, 곧이어 '결혼'이란 생각을 품게 된다. 그런데 이형식에게는 이미 정해진 정혼자가 있었다. 고아 신세였던 자신을 이렇게 어엿한 선생으로 성장하게 해준 고마운 은인 박진사의 딸 '박영채'가 바로 그녀다. 그런데 그녀와는 오래전에 헤어졌었다. 박진사가 일제의 터무니없는 방해로 '교육사업'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행동조치들이 우여곡절 끝에 범죄(?)로 이어졌고, 비록 박진사가 직접 저지른 범죄는 아니었으나 '올곧은 교육자'였기에 자신의 제자가 저지른 범죄를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연루되어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이 되어 버린 박진사의 집안 사정 때문에 박영채의 생사도 모르고 이형식은 헤어지게 되었고, 김선형과 사랑의 감정이 싹튼 바로 그날에 우연찮게 박영채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랑의 삼각관계가 하루 사이에 형성되고 이야기는 계속 된다.

<무정>이 처음 '매일신보'에 연재된 해가 1917년이라고 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병탄 되어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던 시기에 난데없이 '사랑이야기'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삼각관계'다.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치열한 공방전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두고서 갈팡질팡 흔들리는 마음을 교묘하게 서술하고 있으니 '연재소설'을 읽는 신문독자들의 애간장도 하루가 다르게 녹아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어그로를 끌어놓고서 '박영채의 과거'를 보여준다. 양반가 규수로 자라 '유교적 가르침'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던 계집아이에게 집안이 풍비박산 되고, 아버지가 감옥살이하며, 친척들의 구박을 피해 달아났지만, 여인의 몸으로 돈 한 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지만 '돈'이 없으면 감옥에서 아버지를 꺼낼 수도 없고, 당장 먹고 살 수 있는 길도 마땅치 않아 박영채는 여자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인 '기생'이 되었다. 허나 그 사실을 한 아버지 박진사는 감옥에서 목을 매 자결하고, 박영채는 천애고아가 되어 경성에 있는 이형식을 찾아 만나게 된 것이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이광수가 박영채의 사정을 이리 절박하게 꾸며낸 까닭은 다름 아니라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박영채로 투영해서 보여주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광수는 박영채를 철저히 박하게 묘사했고, 애절하게 서술하여, 끝내 이형식에게조차 '버림'을 받고 죽는 인물로 쓰려 했단다. 그래야 이광수가 처음 의도했던 '낡은 조선'을 철저히 벗겨내고 '새로운 나라'로 탈바꿈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나라'가 독립한 조국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이광수는 애초에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식으로 써내려갈 뿐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생긴다. 독자들의 심금이 절절하게 울리자 '박영채를 살려내라'는 독자투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정인 즉슨, 이형식이 김선형과 혼담이 이어지고 기생이 된 박영채가 '정절'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박영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평양으로 떠나는 장면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화들짝 놀란 애독자들이 기왕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목적이라면 '박영채'도 한 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면서 영채가 자결하지 않기를 바라는 투고가 계속 이어졌단다.

그러자 이광수도 줄거리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박영채에게 '김병욱'이라는 인물을 꺼넣어서 '변화'를 꾀했다. 김병욱의 본명은 '김병옥'이다. 여자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름이 남자 같은 사연은 병옥이 당시의 '보통 여인'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신식 여성'이었고, 일찍 일본유학을 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음악가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엘리트 여성'이었는데, 여기서도 이광수의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바로 '조선의 여성'과 '일본에 의해 개화된 여성'의 다름을 확연히 보여주고, 둘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뻔한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 의도된 본보기대로 영채는 병옥과 함께 일본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이형식과 김선형이 서로 약혼을 하고 '미국유학길'에 오르던 차에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잠시 '삼각관계'를 부추기며 젊은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하지만, 어차피 이건 주제가 아니다. 결국 해묵은 감정은 일단 정리가 되면서 4명의 청춘남녀는 스러져가는 조선의 아픈 현실을 낱낱이 파헤치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몽'뿐이라며 자신들이 그 '선구자'가 되어 500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조선을 일깨우는 '선각자로서의 활약'을 다짐하며 이야기는 마무리가 된다.

그럼 이 소설의 제목은 왜 <무정>인가? 한마디로 '정(情)'이 없다는 뜻인데, 이광수는 '강한 힘'을 정의 원천으로 보았다고 한다. 강자만이 세상을 바꿀 힘도 있고, 그렇기에 세상을 바꾸려면 강한 힘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들이 베푸는 아량이야말로 진정한 '정'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의 조선은 온통 낡고 버려야 할 것들 투성이 뿐이니, 베풀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가 없으니 <무정>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는 이광수의 불우한 어린 시절이 한 몫 단단히 했다고 한다. 고아로 자란 이광수는 어려서부터 숱한 고생과 설움을 당했고, 오직 실력만으로 다녀온 '두 번의 일본 유학' 이후에는 이런 사고방식을 아예 각인 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난하고 없이 살면 당할 수밖에 없다. 당하지 않고 당차게 살기 위해선 무엇보다 '힘'을 가져야 한다. 그 힘을 가져야만 '정'을 베풀며 살 수 있다. 작금의 조선은 '무정'하다. '유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 이런 논리를 펴 나간 것 같다.

그래서 이광수는 '강한 힘'에 쉬이 굴복한다. 내가 갖지 못한 강한 힘을 가지려고 맞서 싸우는 일은 요원할 따름이다. 대신 '강자'에 빌붙어 그들이 만든 세상에 '순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괜히 무정한 세상에서 힘들게 사느니 유정한 세상에 빌붙어 사는 것이 백 번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는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는 대목이다. 여러 모로 '이광수'와 '이형식'은 닮았기 때문이다. '고아'라는 설정이 그렇고, '선생'이라는 직업도 똑같고 말이다. 이런 이형식이 박영채의 자결 소동에 충격을 먹지만, 금방 괜춘해져서 김선형과 약혼하고 미국유학길이라는 확실한 출세길을 '선택'한다. 기차에서 우연히 박영채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갈등'을 하지만, 김선형과 마주하는 순간에 그런 갈등은 눈녹듯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슬며시 '조선이 처한 비참한 현실(홍수로 인해서 모든 일상이 망가진 서민들의 모습)'로 시선을 돌리고, 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뛰어난 역량(힘)'을 과시하며, 더욱더 강한 힘을 신봉하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지몽매'하기 때문이라고 못 박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이형식은 '과학'을, 김선형은 '수학'을, 김병옥과 박영채는 '음악'을 공부해서, 무지몽매한 이들을 깨우쳐주는 선각자이자, 계몽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결말에서 그 결심은 10000% 결실을 얻고, 조선에 더 많은 학교를 세워서 어리석은 민중들을 일깨워주겠다는 사명감에 활활 불타오른다. <무정>한 세상을 '유정'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한다면서 말이다.

물론, 고마운 마음가짐이다. 자신들이 '강대국'에서 뛰어난 교육을 잘 받고 와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일깨워 '무정'한 세상을 '유정'한 세상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실제로 당시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도 학교를 세워 '근대화'를 이뤄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사상가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오산학교, 대성학교를 비롯해서 수많은 학교들이 '민족자본'에 의해 세워지고 조선의 학생들을 가르쳤던 것이 유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독립'이 교육만으로 달성될 일일까? 무엇보다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못하면 '독립운동'을 실행에 옮기기도 힘들었으며, '무장투쟁'을 하려해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크게 활약하곤 했지만, 결국 '군자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1920년대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이후로 1930년대에 접어들면 변변한 '무장투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았다. 딴에는 강대국의 힘을 빌려서 독립(또는 자치)을 이루자는 노력도 보였으나, 결국 이승만 같은 괴물만 만들어냈을 뿐, '외교독립론'은 빛 좋은 개살구 격이었다. 그러니 '교육'만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원천적'이고 '근원적'인 행동(또는 운동)을 해나갔어야 한다. 그런데 <무정>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저 쉽디 쉬운 꿈만 꾸는 것으로 그칠 뿐이다.

그리고 정작 이광수 본인도 '교육자'로 별다른 활약도 하지 않고서 쉬이 '변절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쓴 글로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방점을 찍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래서는 결코 '유정'한 세상을 맞이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조선이 수탈 당해 일제의 배를 불려주는 것으로 조선땅에 '유정'한 세상이 만들어졌느냔 말이다. 그게 아님을 잘 알면서 그는 '조선의 무정'만을 탓할 뿐이다. 그래서 근대 한국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이 참으로 무색할 따름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이광수를 '애증의 대상'으로 표현했는데,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이 이광수에게서 '근대의 희망'을 품고서 그를 사랑하고 조국이 발전할 모습에 기대를 많이 부풀렸을 터이니 딱 맞는 표현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배경지식을 싹 제거하고 소설 자체만 놓고 따진다면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로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 면면으로만 보면, 분명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한국 문학의 쾌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것들을 싹 다 제외하고서 읽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광수의 '위를 향한 욕망'까지 제거할 수는 없고, 그 욕망의 면면을 파고 들다보면, 그가 친일부역자였다는 사실에 다다르고 만다.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인 것일까? 아니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췄어도 '배신의 아이콘'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경멸해야 할 대상인 것일까? 요즘 전세계적으로 '극우또라이들'이 활개를 치며 난장을 만드는 것을 보면, 단순히 '똑똑하다'고 추켜세워줄 까닭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들의 똑똑함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리 없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하고 '경각심'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도 남을 배려하고 함께 더불어서 잘 살려는 착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절대로 '강한 힘(권력)'을 갖지 못하게 단절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무정>을 읽다보니, 그런 꼴통들이 떠올랐다. 그런 까닭에 이광수의 소설도 읽어야 하는 걸까? 경각심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6 : 천변풍경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6
김성재 그림, 곽은우 글, 손영운 기획, 박태원 원작 / 채우리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6 : 천변풍경>  박태원 / 손영운 / 곽은우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VI / 채우리 19번째 리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을 한동안 읽지 못했는데,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요즘 좀처럼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는데, 손가락이라도 풀 겸 해서 말이다. 리뷰를 안 쓴다고 책을 읽지 않는 것도 아닌데, 이렇다 할 정도로 읽는 것도 아니었다. 하도 이책 저책 찝쩍거려서 '완독'한 책이 없을 뿐, 책을 읽기는 했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일 모레 어머니 '1차 수술'이라도 끝마쳐야 써질 듯도 싶다. 좌우지간에 이번 리뷰는 박태원의 <천변풍경>이다. 비록 '원작소설'이 아니라 '만화책'으로 그려진 것이긴 하지만, '서울대 선정'이란 제목을 달고 있기에, 책 내용은 '수준급'이다. 아직 원작을 만나지 못했다면 심심풀이 삼아 먼저 읽어도 '내용파악'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절판'되었긴 하지만 꽤 '좋은책'이니 발품을 팔아도 아깝지 않을 책이기도 하다.

그럼 왜 '서울대 선정'이란 제목을 달았는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 책이 출간될 즈음인 2010년대에 서울대에서 느닷없이 '책 목록'을 발표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 특히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과 사교육 시장에서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서울대에서 선정한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왜냐면 '서울대'라는 네임벨류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비록 자녀가 서울대에 갈 '성적'이 아니더라도 그 책을 읽는 '붐'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사교육계에서도 그 책 목록에 오른 책들을 중점분석하며 '대입논술'과 '내신대비'를 위해서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서울대 입시'에 그 책들이 반영될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서울대에서는 후속발표를 했다. 그 책 목록은 '시험'을 위해서 발표한 것이 아니라 '대학생들의 지적교양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그 정도 수준의 책들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교양을 길러주십사하고 발표한 것이라고 말이다. 서울대에 합격한 수재들조차 대학교수의 강의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지적교양'이 형편없어서 발표한 것이지, 수험생들의 '필독서'를 지침하기 위해 선정한 것이 아니라고 못 박은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많은 사람들은 '서울대 선정'이라는 타이틀만으로 이미 혹했으며, 결국 그 책 목록은 '시험대비'를 위해서 읽고 분석되어야 할 목록이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능 1교시에 치르는 '언어영역(국어)'의 시험범위는 '전(全) 범위'였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발표된 '문학/비문학' 모두가 지문으로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대 선정'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것이지만, 결국 발표된 목록은 일종의 '가이드 라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출간된 책들이 부지기수지만, 이 책도 그렇게 세상밖으로 나온 셈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내용을 읽다보면 '수능대비'를 위해서 분석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세계문학'에는 그런 분석이 없다. 당연하게도 '수능'에는 국내작품만 출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내문학'만 읽으면 되는 걸까? 아쉽게도 그런 목적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단 한 권도 읽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면 '수능 문제출제 제1원칙'이 바로 '기출문제'는 다시 출제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참고서'나 '문제집'에서 출제된 문제도 비슷한 유형으로라도 출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왜냐면 수능은 '사고력 시험'이기 때문에 단순암기를 해서 풀어낼 수 있는 문제는 애초에 출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디서 봤던 문제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출제의원'들은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비하여 '수능시험 문제'를 새로 만드는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그럼 이런 책은 읽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건 아니다. 문학고전을 읽고 얻을 수 있는 '교양'을 충분히 쌓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시간에 쫓기는 '수험생'에게는 불필요한 책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면 고전을 분석해서 '내것'으로 만든 교양은 '수능문제'를 풀이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출제자의 의도' 파악을 하는데 아주 좋은 훈련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이것만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시험이라도 만반의 대비를 할 수 있는 좋은 스킬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수준 높은 책을 탐독해가는 '과정'을 눈여겨 보는 것이 아주 좋을 것이다. 이건 아무리 실력 좋은 선생이라도 '직접적'으로 가르칠 수는 없는 스킬이다. 오직 학생 스스로 '직관적'으로 갈고 닦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참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학력고사 세대'이긴 하지만, 국어 시험만큼은 늘 만점을 받곤 했다. 그 비결은 바로 '출제자의 의도'를 거의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비결은 간단하지 않았지만, 단순했다. 정답을 맞추기 위해서 문제집을 푼 것이 아니라 '문제집'을 만든 사람의 의도를 분석하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으로 문제집을 푸는 습관을 들이다 얻은 것이 바로 '지문 분석 스킬'이 향상된 것이다. 지문만 읽어도, 그 지문에서 '출제'될 문제의 경향이 좌르륵 머릿속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나라면 이 지문에서 이런 문제를 출제하겠다'라는 판단력까지 길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거의 대부분 일치 했더랬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국어시험은 어렵지 않았고, 간혹 틀린 문제가 있어도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기까지 했다. 내 판단 밖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예상밖의 반전을 마주한 것처럼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실력이라면 '명문대'에 쉽게 들어갔을 거라 착각(?)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능력이 '영어'만 만나면 여지없이 빗나갔다. 그래서 나는 국어는 최상, 영어는 최하의 점수를 받으며 '평범한 학생'으로 만족해야 했다.

암튼, 박태원의 <천변풍경>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매우 생소한 느낌을 받는다. 딱히 주인공도 없이 그저 '1930년대 서울 청계천'을 풍경으로 삼은 서민들이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고, 각자의 삶이 특별한 연결도 없이 주욱 '나열'될 뿐인 소설이란 말이다. 그런데 등장인물만 무려 70여 명이다. 그 수많은 인물들이 펼쳐내는 1년 동안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다. 그래서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 책을 마주하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보통의 소설처럼 '기승전결'도 없고, '클라이막스'는 더더군다나 없으며, 하다 못해 '주제의식'조차 뚜렷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그 수많은 등장인물을 묶어주는 단 하나는 바로 '서울 청계천'이라는 배경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소설을 '세태소설'의 한 갈래로 분류하기도 한다. 톡톡 튀는 표현 기법과 서술 방법, 문체의 특성 따위에 흥미를 둘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고상한 분석을 가미하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처럼 '의식의 흐름 기법'을 차용한 소설이라 고풍스런 분석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소설가 박태원이 원래 '그런 의도'로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

한편, 수많은 소설가 가운데 '박태원'이란 이름도 낯설고, <천변풍경>을 교과서에서 마주한 적도 없다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박태원이 '월북작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에 박태원은 월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해방 이후 '금지된 도서'였고, 1988년 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 조치'를 받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천변풍경>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처럼 70년대생이었던 이들은 소설가 박태원을 그저 '이름'으로만 들어서 알고, 정작 그의 소설이나 작품을 마주할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무리 '해금 조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을 당시 학생들에게 바로 내놓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천변풍경>을 처음 접한 것은 서른이 훌쩍 넘어 '독서논술선생'이 되고 난 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또래 선생들도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그저 새롭고 새로울 뿐이었다. 등장인물이 아니라 '풍경'이 중심이 되는 소설 말이다.

그럼 1930년대 서울 청계천으로 가보자. 지금의 청계천은 맑은 물이 흐르고 수많은 서울시민들의 쉼터가 되었다. 그리고 외국 방문객들이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의 이색적인 풍경에 새삼 놀라고, 늦은 밤에도 환한 조명을 받아 아름다운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관광명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일제시대 서울 청계천은 사뭇 다르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툭하면 범람을 해서 일상적인 삶조차 힘겹게 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런 '청계천'을 품고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더럽고 지저분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본시 '환경의 지배'를 당하며 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청계(淸溪 : 조선시대에는 '청계'로 불렀다고 한다. 일제가 '청계천'으로 개칭되었다고 함)는 이름 그대로 '맑은 시내'로 아주 잘 관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가 강점한 뒤에는 아무런 정비로 하지 않고, 청계 주변에 우후죽숙으로 공장과 상가를 지으며 '공업용수'와 '생활하수'를 그냥 흘려보내서 더럽고 악취가 나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곳에서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청계천'은 빈민들의 소굴로 전락했고, 그 힘겨운 삶이나마 '장마철'이 되면 물에 떠내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풍경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생한 풍경을 박태원은 <천변풍경>에 담아냈다. 그 풍경속에도 '삶'은 있고, '희망'도 있으며, 희노애락을 한껏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고 그윽하게 써내려갔다.

그럼 일제시대의 일본인들은 '청계천'을 어떻게 했을까? 일본 속담에 '더러운 똥이 있으면 그릇으로 덮어 놓는다'는 말이 있단다.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있으면 응당 깨끗이 치우면 될 일인데, 굳이 '그릇'으로 덮어놓는 수고를 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청계천을 그렇게 했던 것이다. 저들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더러워진 청계천을 두고, '복개공사'를 해서 청계천을 덮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해방 뒤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청계고가도로'가 시내 한복판에 세워졌던 것이고, 그렇게 방치된 청계천은 수십 년 동안 '썩은 내'를 풍기다가 이명박 정부 때 '복원사업'을 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암튼 1930년대 청계천의 풍경은 그닥 좋은 풍경은 아니다.

그렇담 <천변풍경>을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1920년대 한국 문학은 '리얼리즘'이 뚜렷했다. 1920년대 일제는 '문화통치'로 조선인들을 살살 구슬리던 때였으므로 조선인들이 날개를 펴고 활개짓을 힘차게 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럴 뿐, 실상은 '이룰 수 없는 꿈'으로 종지부를 짓는 경우가 숱했기에 '지식인'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그래서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며 쓴 '사실주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공허하기만 했다. 변혁 되어야 할 '일제'가 바뀔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0년대를 풍미했던 민족주의, 카프, 사회주의 등의 사상은 점차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허무한 분위기는 '리얼리즘의 강한 부정'으로 나타났고, 이는 '모더니즘'으로 점차 대체되어 갔다. 합리적인 질서, 전통적인 신념 따위를 부정하고, 극단적인 개인주의, 도시 문명이 가져다 준 인간성 상실 등등 당시의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각자의 예술 양식으로 담아내던 시대가 바로 1930년대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 박태원은 '청계천'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과학적 합리주의의 파괴, 도덕과 질서의 파괴 등에 대한 반성과 비판 정신을 담아서 우리 서민들의 삶을 집중 조명하는 소설을 써내려 간 셈이다. 그런 까닭에 <천변풍경>은 1930년대 서울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아주 잘 드러난 소설이다. 그리고 우리는 <천변풍경>을 통해서 그 시대를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고 말이다. 솔직히 재미는 없는 책이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돌아보아야 할 시대이기는 하다.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통치'와 '민족말살기'의 틈바구니에서 살짝 숨통이 트였던 시절이 바로 1930년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절조차 숨통이 '트인 시대'가 아니라 겨우 '목숨만 살고' 있던 애달픈 시대였고, 그 '슬픈 시절'을 살아간 우리 선조들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살고 있으나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엿볼 수 있다면, '출제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셈이다. 평범하고 대수로울 것 없는 일상이 펼쳐지지만, 그 시절이 '일제시대'였다는 것을 상기시키면, 결코 평범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부서질대로 부서진 삶일 망정 꿋꿋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끈질김이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그저 그런 소설에 지쳤다면 일독을 권한다. <천변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풍경'이 사뭇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책 속에서는 '청계천'이 풍경으로 펼쳐지지만, 책을 덮고 나면 '나'를 둘러싼 풍경이 새삼 다르게 다가오는 느낌도 받게 될 것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면서 읽다보면 '나의 일상'은 어떤 문제로 출제하게 될지도 흥미롭게 예상할 수 있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이퍼케이션 1 - 하이드라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바이퍼케이션 1 : 하이드라>  이우혁 / 해냄 (2010)

[My Review MMCV / 해냄 6번째 리뷰] 이우혁 작가를 <퇴마록>, <왜란종결자>, <치우천왕기>로만 기억하고 있을 때에는 잘 몰랐다. 그가 쓴 작품이 또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가 <퇴마록 : 말세편>을 마무리 한 뒤에 내놓은 <치우천왕기>가 종결되지 않고 자꾸 미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느슨하게 이어지던 출간이 돌연 뚝 끊기더니 2011년에 느닷없이 '출판사'를 바꾸어서 완결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작품이 출간되어서 기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책을 구매할 수도 없었다. 일종의 배신감 때문이었다. 아니 1권부터 9권까지 버젓이 내놓은 소설책이 있는데, 굳이 '출판사'를 바꿔서 6권짜리 완간을 내놓는 사정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 당시만해도 무척 심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와 출판사 간의 사정은 둘째치고, 팬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이우혁 작가는 잊고 지냈었다. 그래서 97년~98년에 스포츠신문에 연재했다던 <파이로 매니악>(미완결)은 그런 소식만 알고 있었고, '단행본' 출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 <바이퍼케이션>(2010), 쾌자풍(2012)(미완결), 고타마(2012)의 출간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2006년 이후로는 '관심'이 사라졌던 듯 싶다.

그러다 재작년부터 추억에 묻어 두었던 <퇴마록>을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고, 다 읽었을 즈음에 '애니메이션' 개봉소식에 다시 들뜨기 시작했으며, 감회에 무르익었을 때 <퇴마록> 재출시 소식과 <외전 3권> 출간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나니, 이우혁 작가의 '다른 소설'에 대한 언급이 있어 부득이 다시 '이우혁 읽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파이로 매니악>을 처음 접했고, <쾌자풍>도 읽었다. 그리고 이 책 <바이퍼케이션>을 읽으니...그간 이우혁 작가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했던 이들의 목소리가 이해되지 시작했다. 하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작가라는 얘기였고, 또 하나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너무 심한 폭력성을 묘사하는 괴팍한 작가라는 얘기였다. 그의 대표작인 <퇴마록>만 놓고 보자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그는 <퇴마록> 완간을 지켰고, 다소 폭력적인 장면묘사가 있긴 하지만, 애초에 '악령퇴치'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런데 <파이로 매니악>, <쾌자풍>, <바이퍼케이션>을 보니, 딱 맞는 소리였다. 그는 '미완결'로 약속을 지키지도 못했고, 범죄심리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묘사하다보니 과격을 넘어 파격적일만큼 잔혹한 장면묘사가 대량학살의 끔찍한 현장마냥 널려 있었고, 사건이 펼쳐질 때마다 피와 살점이 화려하게 흩날리고 흐드러지게 뿌려지는 참혹함이 어지럽게 묘사되었다.

내가 이우혁 작가를 좋아한 까닭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하더라도 주인공인 '퇴마사'들은 선악의 구분 없이 모두를 '안식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자기희생'조차 마다하지 않는 숭고한 행동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실행에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퇴마사들에게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파이로 매니악>의 주인공들은 '선한 의도'가 엿보이긴 하지만 악당(?)들을 폭탄으로 터뜨려 가루로 만들어버렸고, <쾌자풍>에서는 장난질이 심한 주인공을 등장시켜서 '폭력'조차 장난으로 치부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이 책 <바이퍼케이션>에서는 '범죄소설'임을 감안해도 구역질이 날만큼 끔찍한 '살인행각'을 일삼는 등장인물들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런 극악한 범죄자를 쫓는 '선한 등장인물'조차 자신들이 경찰과 FBI가 된 목적이 '끔찍한 살인행각의 피해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서 그 당시의 정황묘사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써내려갔다. 이건 뭐 '아수라장'이나 다를 바가 없다. 살육과 파괴의 현신인 '아수라'처럼 말이다. 이렇게 과격하게 써내려갈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물론, 처지해야 마땅한 괴물을 묘사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지도 모른다. 피해자, 그것도 연약한 여자만을 희생자로 삼아 내장을 갈갈이 찢어서 허공에 흩날리고, 피를 단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마셔버리는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는 '인간 같지 않은 괴물'을 쳐죽이고 싶게 만들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 살인자조차 법정에 세워서 '사형'이나 '종신형'을 받게 하는 것은 너무 곱다시한 방법이고, '괴물'은 괴물답게 더 끔찍하고 참혹하게 처단하는 것이 더 속시원하지 않겠는가? 허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독자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강제동의(?)라도 받는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써내려갈 건 또 뭐란 말인가? 이 부분에서 심한 불쾌감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범죄소설'이라도 끔찍한 살육의 현장속으로 밀어넣은 채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그속에서 참담함을 느낀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책을 던져버려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내가 알던 이우혁 작가는 이 책속에서 찾아볼 수는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일단, 각설하고 책 소개를 해보자. 제목인 '바이퍼케이션'은 수학용어로 파라미터(변수) 변화에 따른 갑작스런 변화 시스템을 일컫는데, 근래에는 '카오스 이론'에서 불확실적인 결과를 뜻하는 용어로 더 많이 쓰인다고 한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뜻으로는 '분기점'을 뜻하며, 이 소설에서는 인간의 '광기'와 '사이코패스'의 미묘한 차이점을 뜻하며, 거기에 '인간'과 '괴물'을 구분하는 새로운 시도(?)를 암시하는 뜻으로 사용한 듯 싶다. 결론적으로 '광기'든, '사이코'든, '괴물'이든 살인자들이 벌이는 파티는 매한가지다. 그런데 이를 뒤쫓는 경찰과 FBI 수사관은 '살인사건의 본질'을 파악해서 다시는 이따위 끔찍한 살인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보인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끔찍하게 살해 당하는 '결과'는 같다. 그러나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그 '원인분석'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런 끔찍한 살인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핵심이다. 왜냐면 모든 인간에겐 '자유의지'를 보장해야 한다는 기본권 보장을 저변에 깔아두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선한 인간'은 '악한 인간'이 저지르는 괴랄스런 범죄행각을 미연에 막을 수 없다는 얘기다. 늘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수습'하는 방법만이 최선인 듯 행동할 따름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또 하나의 '분기점(바이퍼케이션)'을 마련했다. 악한 인간이 저지른 범죄가 '하이드라'라는 괴물같은 존재에 의해서 벌어지게 되었고, 이 괴물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서 신화적 존재인 '헤라클레스'를 다시금 현신(아바타라)하게 만들었다. 1권의 내용만으로는 이를 정확히 판별할 수 없으니, 2권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1권의 후반부에 나온 '헤라클레스의 변명(?)'을 듣자하니 대략 그런 의도인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이 부분이 나오기 전까지는 지루하고 끔찍한 '범죄이야기'에 불과 했다. 다른 범죄소설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 '더 끔찍한 살인사건 묘사'를 택했고, '더 적나라한 범죄심리 묘사'를 해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우혁 작가의 '장광설'은 정말이지 일품이다. 이것만 놓고 보면 <바이퍼케이션>도 대략 6~7권 정도 분량의 '대하소설'이 될 것만 같은데, 고작 3권까지라니, '완결'일지 '미완결'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샘 올트먼, 더 비전 2030 - AI부터 생명공학까지, 오픈AI가 설계하는 미래
이재훈 지음 / 한빛비즈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샘 올트먼, 더 비전 2030 : AI부터 생명공학까지, 오픈AI가 설계하는 미래> 이재훈 / 한빛비즈 (2025)

[My Review MMCIV / 한빛비즈 172번째 리뷰] AI 인공지능과 관련된 주가가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게 앞으로의 전세계 정치, 경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벌어질 일이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선보일 가능성이 점쳐지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미래이고, 그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도 없기 때문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과연 AI가 펼쳐보일 미래 세상은 낙관적일까? 비관적일까?

여기 샘 올트먼이라는 사람은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오픈AI'의 CEO로 현재도 직접 경영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AI와 관련된 모든 사업에서 '선도적 업적'을 남긴 유일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챗GPT'를 세상에 내놓았으며, 그 지능에 걸맞는 몸체를 만들기 위해 '휴머노이드 로봇(피규어 AI)'를 개발했으며, AI 시대의 본격화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로 인프라 구축을 꾀했으며, 수많은 AI와 AI 로봇을 원활히 작동시키기 위한 충분한 에너지를 마련하기 위해 '핵융합 기술(헬리온)'에 투자하고 있으며, AI가 탑재된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가 도래했을 때에도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조성하기 위해서 '기본소득, 월드코인, UBC(범용 기본 컴퓨터)'와 같은 프로젝트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삶 자체를 연장하고 재정의하기 위한 '생명과학 스타트업(레트로 바이오사이언스, 포메이션 바이오)' 등 다양한 영역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 샘 올트먼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지만, 그 이유를 알고 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왜냐면 그가 주장하는 '낙관적인 미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실 나도 AI가 인간을 '대신'하는 세상이 도래하면 굉장히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AI가 도래하면, 인간이 힘들게 했던 일들이 '아주 쉬운 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AI가 탑재된 로봇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한다면 단순반복 노동으로 일정한 소득을 올리던 노동자들이 생계를 꾸리지 못하고, 기업은 인건비를 획기적으로 줄여서 '생산단가 0원'으로 제품을 엄청나게 만들어 내겠지만, 그 제품을 사줄 '소비자'가 현저히 줄어들어서, 결국은 기업도 망하게 되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을 어찌어찌 해결했다손 치더라도 AI 정보처리를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될텐데, 이를 충당할 에너지원은 무엇으로 마련할 것이냔 말이다. 거기에 인간의 삶을 좌우할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가진 '기억'을 정보화하여 '컴퓨터 저장장치'에 보존하고, 기계(로봇)의 몸으로 바뀐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해진 미래사회가 펼쳐진다면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지게 될까?

이런 비관적인 전망들에 샘 올트먼은 조목조목 반박하며 앞서 언급한 '대안'들을 제시하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샘 올트먼, 더 비전 2030>은 한마디로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설명한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낙관적인 전망'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뛰어난 천재이고, 전도유망한 사업가라 할지라도 결코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그 비결은 바로 그가 '좋은 투자자'이기 때문이란다. 단지 떼돈을 벌기 위해서 '투자'를 하는 사람은 좋은 투자자라 하지 않는다. 그런 투자자는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 단지 개인적인 영달만을 꿈꾸는 것이기에 그저 돈 많은 부자 한 사람 생겼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좋은 투자자는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는 '떼돈'을 벌기 위해서 '미래'에 과감히 투자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좋은 미래'를 꿈꾸면서 말이다. 그렇게 꿈꾼 '좋은 미래'가 실현이 된다면 한 개인의 부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전 지구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미쳤기에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풍요를 선사하는 이상적인 삶이 실현되도록 무던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좋은 투자자는 성실한 일꾼이기도 하다. 단지 돈만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좋은 미래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위대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샘 올트먼은 바로 이런 선구자에 해당하기 때문에 '좋은 투자자'인 셈이다.

그럼 우리는 샘 올트먼이 추진하는 일에 '동참'하기만 하면 될까? 그가 뛰어난 천재이고, 위대한 사업가이며, 좋은 미래를 꿈꾸는 현명한 투자자라면 그래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남는다. 과연 '인간보다 더 똑똑한 지능을 가진 AI'의 등장이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샘 올트먼은 '낙관적인 미래'를 점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비관적인 미래'를 전망하는 이들의 주장도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꼽으라면, 과연 AI는 윤리적 판단을 스스로 할 수 있겠느냔 질문이다. 인간이라면 어렵지 않게 판단하는 '도덕적, 윤리적, 양심적 판단'을 AI는 '확률적(?)'으로 계산을 하여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라는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생각하면, 인간도 결론 내리기 곤란하고 난감한 상황에서 AI는 과연 공정하고 명확한 판단을 내리고 인간보다 나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지 '누가' 최종결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AI 스스로? 아니면, 인간이? 만약 인간이 최종결정권을 갖는다면, 도대체 인간보다 더 뛰어난 AI를 만들 필요가 뭐란 말인가? 혹은 '분야'에 따라서 AI와 인간 중에 더 잘하는 영역을 새로 정하고, 각각 분류한 영역에서 '따로' 적용하는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 그렇게 분류할 '기준'은 무엇으로 정할 것이며, 어떻게 나누며,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와서 '최종결정'은 누가 내릴 것이냔 말이다.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단지 장밋빛 미래만 낙관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개인적으론 '디스토피아'적인 근거가 더 타당하다는 생각을 해서 AI에 대해서 그리 달갑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샘 올트먼의 미래 전망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을 이 책을 통해서 살펴본 다음에는 '나쁘지 않다'는 쪽으로 선회하는 경험을 했다. 그의 선도적인 실행력과 투자관점이 상당히 인상적이고, 좋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전부 AI에 올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AI는 그저 인간을 돕는 '보조역할'로 개발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라도 AI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면 인류는 절멸하게 될 것이라 경고하는 '전문가(특히, 과학자)'의 지적도 타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비관적인 근거'까지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AI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샘 올트먼의 위대한 행보와 함께 생각하며 이 책을 일독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가 제시하는 미래가 무척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