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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6 : 천변풍경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6
김성재 그림, 곽은우 글, 손영운 기획, 박태원 원작 / 채우리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6 : 천변풍경> 박태원 / 손영운 / 곽은우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VI / 채우리 19번째 리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을 한동안 읽지 못했는데,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요즘 좀처럼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는데, 손가락이라도 풀 겸 해서 말이다. 리뷰를 안 쓴다고 책을 읽지 않는 것도 아닌데, 이렇다 할 정도로 읽는 것도 아니었다. 하도 이책 저책 찝쩍거려서 '완독'한 책이 없을 뿐, 책을 읽기는 했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일 모레 어머니 '1차 수술'이라도 끝마쳐야 써질 듯도 싶다. 좌우지간에 이번 리뷰는 박태원의 <천변풍경>이다. 비록 '원작소설'이 아니라 '만화책'으로 그려진 것이긴 하지만, '서울대 선정'이란 제목을 달고 있기에, 책 내용은 '수준급'이다. 아직 원작을 만나지 못했다면 심심풀이 삼아 먼저 읽어도 '내용파악'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절판'되었긴 하지만 꽤 '좋은책'이니 발품을 팔아도 아깝지 않을 책이기도 하다.
그럼 왜 '서울대 선정'이란 제목을 달았는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 책이 출간될 즈음인 2010년대에 서울대에서 느닷없이 '책 목록'을 발표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 특히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과 사교육 시장에서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서울대에서 선정한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왜냐면 '서울대'라는 네임벨류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비록 자녀가 서울대에 갈 '성적'이 아니더라도 그 책을 읽는 '붐'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사교육계에서도 그 책 목록에 오른 책들을 중점분석하며 '대입논술'과 '내신대비'를 위해서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서울대 입시'에 그 책들이 반영될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서울대에서는 후속발표를 했다. 그 책 목록은 '시험'을 위해서 발표한 것이 아니라 '대학생들의 지적교양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그 정도 수준의 책들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교양을 길러주십사하고 발표한 것이라고 말이다. 서울대에 합격한 수재들조차 대학교수의 강의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지적교양'이 형편없어서 발표한 것이지, 수험생들의 '필독서'를 지침하기 위해 선정한 것이 아니라고 못 박은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많은 사람들은 '서울대 선정'이라는 타이틀만으로 이미 혹했으며, 결국 그 책 목록은 '시험대비'를 위해서 읽고 분석되어야 할 목록이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능 1교시에 치르는 '언어영역(국어)'의 시험범위는 '전(全) 범위'였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발표된 '문학/비문학' 모두가 지문으로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대 선정'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것이지만, 결국 발표된 목록은 일종의 '가이드 라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출간된 책들이 부지기수지만, 이 책도 그렇게 세상밖으로 나온 셈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내용을 읽다보면 '수능대비'를 위해서 분석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세계문학'에는 그런 분석이 없다. 당연하게도 '수능'에는 국내작품만 출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내문학'만 읽으면 되는 걸까? 아쉽게도 그런 목적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단 한 권도 읽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면 '수능 문제출제 제1원칙'이 바로 '기출문제'는 다시 출제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참고서'나 '문제집'에서 출제된 문제도 비슷한 유형으로라도 출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왜냐면 수능은 '사고력 시험'이기 때문에 단순암기를 해서 풀어낼 수 있는 문제는 애초에 출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디서 봤던 문제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출제의원'들은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비하여 '수능시험 문제'를 새로 만드는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그럼 이런 책은 읽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건 아니다. 문학고전을 읽고 얻을 수 있는 '교양'을 충분히 쌓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시간에 쫓기는 '수험생'에게는 불필요한 책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면 고전을 분석해서 '내것'으로 만든 교양은 '수능문제'를 풀이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출제자의 의도' 파악을 하는데 아주 좋은 훈련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이것만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시험이라도 만반의 대비를 할 수 있는 좋은 스킬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수준 높은 책을 탐독해가는 '과정'을 눈여겨 보는 것이 아주 좋을 것이다. 이건 아무리 실력 좋은 선생이라도 '직접적'으로 가르칠 수는 없는 스킬이다. 오직 학생 스스로 '직관적'으로 갈고 닦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참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학력고사 세대'이긴 하지만, 국어 시험만큼은 늘 만점을 받곤 했다. 그 비결은 바로 '출제자의 의도'를 거의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비결은 간단하지 않았지만, 단순했다. 정답을 맞추기 위해서 문제집을 푼 것이 아니라 '문제집'을 만든 사람의 의도를 분석하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으로 문제집을 푸는 습관을 들이다 얻은 것이 바로 '지문 분석 스킬'이 향상된 것이다. 지문만 읽어도, 그 지문에서 '출제'될 문제의 경향이 좌르륵 머릿속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나라면 이 지문에서 이런 문제를 출제하겠다'라는 판단력까지 길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거의 대부분 일치 했더랬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국어시험은 어렵지 않았고, 간혹 틀린 문제가 있어도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기까지 했다. 내 판단 밖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예상밖의 반전을 마주한 것처럼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실력이라면 '명문대'에 쉽게 들어갔을 거라 착각(?)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능력이 '영어'만 만나면 여지없이 빗나갔다. 그래서 나는 국어는 최상, 영어는 최하의 점수를 받으며 '평범한 학생'으로 만족해야 했다.
암튼, 박태원의 <천변풍경>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매우 생소한 느낌을 받는다. 딱히 주인공도 없이 그저 '1930년대 서울 청계천'을 풍경으로 삼은 서민들이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고, 각자의 삶이 특별한 연결도 없이 주욱 '나열'될 뿐인 소설이란 말이다. 그런데 등장인물만 무려 70여 명이다. 그 수많은 인물들이 펼쳐내는 1년 동안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다. 그래서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 책을 마주하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보통의 소설처럼 '기승전결'도 없고, '클라이막스'는 더더군다나 없으며, 하다 못해 '주제의식'조차 뚜렷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그 수많은 등장인물을 묶어주는 단 하나는 바로 '서울 청계천'이라는 배경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소설을 '세태소설'의 한 갈래로 분류하기도 한다. 톡톡 튀는 표현 기법과 서술 방법, 문체의 특성 따위에 흥미를 둘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고상한 분석을 가미하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처럼 '의식의 흐름 기법'을 차용한 소설이라 고풍스런 분석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소설가 박태원이 원래 '그런 의도'로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
한편, 수많은 소설가 가운데 '박태원'이란 이름도 낯설고, <천변풍경>을 교과서에서 마주한 적도 없다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박태원이 '월북작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에 박태원은 월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해방 이후 '금지된 도서'였고, 1988년 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 조치'를 받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천변풍경>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처럼 70년대생이었던 이들은 소설가 박태원을 그저 '이름'으로만 들어서 알고, 정작 그의 소설이나 작품을 마주할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무리 '해금 조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을 당시 학생들에게 바로 내놓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천변풍경>을 처음 접한 것은 서른이 훌쩍 넘어 '독서논술선생'이 되고 난 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또래 선생들도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그저 새롭고 새로울 뿐이었다. 등장인물이 아니라 '풍경'이 중심이 되는 소설 말이다.
그럼 1930년대 서울 청계천으로 가보자. 지금의 청계천은 맑은 물이 흐르고 수많은 서울시민들의 쉼터가 되었다. 그리고 외국 방문객들이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의 이색적인 풍경에 새삼 놀라고, 늦은 밤에도 환한 조명을 받아 아름다운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관광명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일제시대 서울 청계천은 사뭇 다르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툭하면 범람을 해서 일상적인 삶조차 힘겹게 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런 '청계천'을 품고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더럽고 지저분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본시 '환경의 지배'를 당하며 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청계(淸溪 : 조선시대에는 '청계'로 불렀다고 한다. 일제가 '청계천'으로 개칭되었다고 함)는 이름 그대로 '맑은 시내'로 아주 잘 관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가 강점한 뒤에는 아무런 정비로 하지 않고, 청계 주변에 우후죽숙으로 공장과 상가를 지으며 '공업용수'와 '생활하수'를 그냥 흘려보내서 더럽고 악취가 나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곳에서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청계천'은 빈민들의 소굴로 전락했고, 그 힘겨운 삶이나마 '장마철'이 되면 물에 떠내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풍경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생한 풍경을 박태원은 <천변풍경>에 담아냈다. 그 풍경속에도 '삶'은 있고, '희망'도 있으며, 희노애락을 한껏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고 그윽하게 써내려갔다.
그럼 일제시대의 일본인들은 '청계천'을 어떻게 했을까? 일본 속담에 '더러운 똥이 있으면 그릇으로 덮어 놓는다'는 말이 있단다.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있으면 응당 깨끗이 치우면 될 일인데, 굳이 '그릇'으로 덮어놓는 수고를 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청계천을 그렇게 했던 것이다. 저들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더러워진 청계천을 두고, '복개공사'를 해서 청계천을 덮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해방 뒤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청계고가도로'가 시내 한복판에 세워졌던 것이고, 그렇게 방치된 청계천은 수십 년 동안 '썩은 내'를 풍기다가 이명박 정부 때 '복원사업'을 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암튼 1930년대 청계천의 풍경은 그닥 좋은 풍경은 아니다.
그렇담 <천변풍경>을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1920년대 한국 문학은 '리얼리즘'이 뚜렷했다. 1920년대 일제는 '문화통치'로 조선인들을 살살 구슬리던 때였으므로 조선인들이 날개를 펴고 활개짓을 힘차게 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럴 뿐, 실상은 '이룰 수 없는 꿈'으로 종지부를 짓는 경우가 숱했기에 '지식인'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그래서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며 쓴 '사실주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공허하기만 했다. 변혁 되어야 할 '일제'가 바뀔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0년대를 풍미했던 민족주의, 카프, 사회주의 등의 사상은 점차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허무한 분위기는 '리얼리즘의 강한 부정'으로 나타났고, 이는 '모더니즘'으로 점차 대체되어 갔다. 합리적인 질서, 전통적인 신념 따위를 부정하고, 극단적인 개인주의, 도시 문명이 가져다 준 인간성 상실 등등 당시의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각자의 예술 양식으로 담아내던 시대가 바로 1930년대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 박태원은 '청계천'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과학적 합리주의의 파괴, 도덕과 질서의 파괴 등에 대한 반성과 비판 정신을 담아서 우리 서민들의 삶을 집중 조명하는 소설을 써내려 간 셈이다. 그런 까닭에 <천변풍경>은 1930년대 서울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아주 잘 드러난 소설이다. 그리고 우리는 <천변풍경>을 통해서 그 시대를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고 말이다. 솔직히 재미는 없는 책이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돌아보아야 할 시대이기는 하다.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통치'와 '민족말살기'의 틈바구니에서 살짝 숨통이 트였던 시절이 바로 1930년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절조차 숨통이 '트인 시대'가 아니라 겨우 '목숨만 살고' 있던 애달픈 시대였고, 그 '슬픈 시절'을 살아간 우리 선조들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살고 있으나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엿볼 수 있다면, '출제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셈이다. 평범하고 대수로울 것 없는 일상이 펼쳐지지만, 그 시절이 '일제시대'였다는 것을 상기시키면, 결코 평범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부서질대로 부서진 삶일 망정 꿋꿋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끈질김이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그저 그런 소설에 지쳤다면 일독을 권한다. <천변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풍경'이 사뭇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책 속에서는 '청계천'이 풍경으로 펼쳐지지만, 책을 덮고 나면 '나'를 둘러싼 풍경이 새삼 다르게 다가오는 느낌도 받게 될 것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면서 읽다보면 '나의 일상'은 어떤 문제로 출제하게 될지도 흥미롭게 예상할 수 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