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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 숲으로 ㅣ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24년 6월
평점 :
[My Review MCMLXV / 이봄 7번째 리뷰] 글쓴이 마스다 미리는 1969년 생이다. 현재 50대 작가이고, 일본에서 30대, 40대 여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단다. 특히 '독신 여성'들에게 말이다. 그녀의 책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30대 중반의 독신 여성들'이다. 수짱이 그랬고, <내 누나>속 누나도 그랬고, <주말엔 숲으로>속 하야카와와 친구들의 나이가 그렇다. 심지어 '연애'도 안 한다. 아니 못한다. '애인'은커녕 '남친'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들의 대화속에서는 늘 남자가 등장한다. 잘 생겼으면 좋겠고, 부유했으면 좋겠고, 젠틀했으면 좋겠고, 요리를 잘하면 더 좋겠고, 언제나 '내편'이 되어 줄 수 있고 '따뜻하고 넓은 품'을 언제든 내어줄 수 있는 그런 멋진 남자와 '결혼'도 하고, '임신과 출산'도 하고, '가사와 육아'도 할 용의가 차고도 넘치는데, 정작 중요한 '남자'가 그녀들의 곁에 없다. 마스다 미리는 이런 여성들을 싸잡아서 '패배한 개'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언더독(underdog) : 경쟁의 패배자'에서 유래한 말인 듯 싶은데, 일본에서 '골드미스'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도 한다.
30대 독신 여성은 명백한 '사회적 약자'다. 결코 '소수자'는 아닌데 사회적 약자 취급을 하고, 사회적으로 '함부로 대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기 딱 좋은 대상이다. 분명 잘못된 인식이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중년여성'들이 이러한 잘못된 인식에 자조적인 웃음을 섞어가며 한바탕 수다를 떨기 일쑤다. "맞아, 맞아"를 연발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마땅한 대안은 없다. 심지어 '연대의식'조차 갖길 거부한다. 약자는 아무리 많이 모여도 '약자'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그래서 변변한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체념하고 푸념만 늘어놓기 일쑤다. 그래도 쌓이는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기에 끼리끼리 모여서 '누가누가 더 불행한지' 배틀이라도 열린 듯이 서로를 향해 위로 섞인 자신만의 비극을 실감난 연출과 연기를 섞어가며 풀어내고 또 풀어낸다. 불행의 끝을 모른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비참함을 느낀 '서른다섯 살의 하야카와'가 일본의 시골로 이사를 했다. 하야카와의 직업은 '뒤치미(번역가)'다. 그래서 굳이 번잡한 도시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큰 문제가 없기에 시골로 온 듯 한데, 딱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전원생활'을 꿈 꿨던 것일까? 직접 텃밭을 일구며 손수 재배한 채소와 과일로 식단을 꾸리고, 자연의 품속에서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시며 온전한 '슬로 라이프(?)'를 실천하기 위해서도, 딱히 그런 까닭도 아니란다. 왜냐면 하야카와는 텃밭 같은 것은 고사하고 필요한 물품과 음식까지 '택배'로 해결하고, 심지어 하야카와의 집앞에 '가까운 역'이 있기에 언제든 맘만 먹으면 다시 도쿄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시골로 이사를 한 까닭은 '패배한 개' 취급을 받는 스트레스에서 온전히 벗어나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딱히 전원생활이 좋아서 시골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팍팍한 도시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온갖 불안한 정서에서 탈출하고자 '시골행'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 하야카와가 시골에 정착한 뒤로 그녀의 친구인 '마이코'와 '세스코'가 거의 매주 주말에 하야카와의 집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제목도 <주말엔 숲으로>다. 물론 시골이니까 울창한 숲도 있다. 그리고 그 숲속에는 호수도 있어서 하야카와는 친구들과 '카약'을 타며 즐기기도 한다. 숲을 산책하며 나무열매도 따먹고, 나무의 이름과 새의 이름도 알아내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 삶'을 즐기고 있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매력은 '계절의 변화'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엔 만물이 성장하고, 가을엔 단풍과 낙엽 구경이 제격이고, 겨울이면 '설피'를 신고 1미터가 넘게 쌓인 눈밭 위를 걸어서 돌파하는 재미도 즐길 수가 있다. 그럼에도 하야카와는 '도시의 삶'을 완전 포기하지도 않는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친구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 친구들의 손에는 늘 '선물꾸러미'가 들려 있고, 그 선물들은 대개 '맛있는 간식'들이다. 도심지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시골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것들을 친구들에게 부탁하기 때문에 '시골행'을 한 의미가 무색해지기도 하다.
그렇지만 하야카와와 친구들은 이렇게 '주말마다' 모여서 수다를 떨고 난 뒤에 '자존감'을 얻게 된다. 30대 직장여성이 겪는 수많은 열받는 일 때문에 떨어진 자존감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되살리는 셈이다. 그녀들에겐 '힐링 공간'이고, 동시에 '힐링 타임'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긍정적이고 유익한(?) 수다를 소중한 친구끼리 떠드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임에 분명한데, 정말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것인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왜냐면 '수다'만으로 불평부당한 처우가 개선되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상사의 폭언, 욕설 등과 같은 언어폭력과, 성희롱, 성추행 등과 같은 성폭력을 받았다면 과연 '수다'로 분풀이하고 위로 받는 것으로 해결이 되느냔 말이다. 또한, 동료 직원과 선후배들에 의해 받는 '스트레스'도 장난이 아닐 것이다. 자신은 빈둥빈둥 놀면서 남에게 일을 떠넘기거나, 실수를 저질러 민폐를 끼쳐놓고도 '성과'만 쏙쏙 챙기거나 '똑같은'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정말 화가 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런 화가 나는 상황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한다는 식으로 눈치를 주는 직장이라면,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것을 넘어 '복수'라도 하여 정의구현을 실천하고 싶을 정도로 열받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그저 '여자들끼리의 수다'로 퉁치려고 한다. 그래도 어쩌겠어? 여자가 무슨 힘으로 불편부당한 일을 '개선'할 수 있겠어. 그저 감수하고 감내하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마음가짐으로 해탈하고 득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뉘앙스가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글쓴이의 '나이'가 궁금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분명히 그러한 '전근대적으로' 여성의 인권을 당연히 무시하고, 개선하기보다 퇴사를 강요하는 것이 더 쉬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게 우리 나라에서는 80년대까지였고, 90년대부터는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해서 2000년대가 넘어서면서 여성인권을 유린하는 직장과 사업주 들에게 '법적 철퇴'를 가하자, 비교적 '여성인권'을 확실히 보장받는 쪽으로 직장문화가 달라지긴 했다. 그럼에도 완벽히 달라지고, 보장할 수는 없었다. 인권의 사각지대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한 직장에서는 '사내 내규'에 여성 인권 보장을 명시하고, 어길 시에 중대범죄에 해당하는 무거운 책임을 묻는 일이 꽤나 많아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직장여성'들이 직간접으로 불편부당한 일을 당하게 되면 쉬쉬하며 감내하는 일이 없이 당당히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나가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아직도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간주하고 여성의 연대를 무시하며, 그로 인해 일본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눈치 보며 포기하고 마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실제로 전세계적으로 이슈를 불렀던 '미투 운동'도 일본에서만큼은 소리 소문 없이 잠잠해졌던 일도 있었다. 그 가운데 '퍼스트 펭귄'을 맡았던 한 일본 여성만 '이상한 여자'로 낙인 찍혀 사회생활조차 포기하고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뒤안길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
실제로도 일본에선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법정에서 승소하여 피해보상을 받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다고 한다. 도리어 '가해자'가 법정에서 진술하기로 "여성이 너무 섹시한 옷을 입고 있어서 참을 수 없어 강간을 했다"고 말했는데, 무죄 판결이 나오기도 했단다.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가 도리어 섹시한 여성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어서 강간을 저질렀는데, 이것은 도리어 여성이 남성을 '대놓고(?) 강간을 저지르라고 한 셈'이고, 남성은 여성의 야한 옷차림을 보면 '성적 본능'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남성이 강간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여성이 강간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기에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90년대 일본의 법정 판결 중 하나란다. 이런 선례가 있으니 이후로 '성폭력 사건'은 죄다 무죄 판결이 남발되었고, 일본은 아직도 여전히 '남성 가해자'보다 '여성 피해자'가 알아서 자기 몸을 보호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성범죄에 대한 인식조차 이런데, 다른 '여성 인권'은 제대로 보장이 되겠는가. 더구나 일본은 전국민이 상대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최고로 여기기 때문에, 사소한(?) 분란을 일으켜 시끄럽게 만드는 것보다 자신이 참고 견디는 것이 더 낫다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가 불편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도 주위에서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일지라도 당사자가 '인내'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면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달지 않는 사회분위기가 만연해 있다고 한단다. 이러니 '30대 독신 여성'이 패배한 개에 비유를 당해도 모멸감을 느끼기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래'라는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 전부라고 한단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30대 독신 여성'을 패배한 개에 비유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적어도 '자신'을 패배한 개라고 절대 수긍하지 않고 연대의 목소리를 높여 그런 표현을 한 주체를 향해 고소와 시위를 했을 것이다. 안 그런가?
마스다 미리의 책이 주는 '위안'은 분명하다. 읽고 있으면 절로 '공감'이 되고 팍팍한 삶의 지혜가 되는 부분도 분명이 존재한다. 그런데 곰곰이 곱씹어보면 은근히 '화딱지'가 난다. 왜 죄다 '참고 넘기는 지혜'로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상사가 있다면 '부당하다'고 말을 속시원히 하고, 뺀질거리는 동료가 있다면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고 네 몫의 일은 네가 하라고 당당히 말하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또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렵고 힘든 일도 감수하고 일하라고, 그리고 여자가 결혼하고 임신, 출산, 육아를 하게 되면 알아서 '퇴사'를 해주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고, 이런 모든 밥맛 같은 일을 겨우 '수다'로 해결하려 들지 말고, 당당히 목소리를 높이고, 여성들끼리 자연스런 연대를 통해서, 인간이기에 당연히 누려야 하는 '인권'을 당당히 되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소중한 내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발생하면 참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챙길 건 챙긴 뒤에 '수다'를 떨고 불행 배틀을 하면서 위로를 나누는 것이어야 순서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