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4 : 수레바퀴 아래서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4
백문호 글, 전현경 그림, 윤순식 감수, 손영운 기획, 헤르만 헤세 원작 / 채우리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4 :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 손영운 / 전현경 / 윤순식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XVIII / 채우리 26번째 리뷰] 영화 <위플래쉬>(2015)를 보면 '위대한 드러머'가 탄생하는 여정이 보인다. 이를 두고 우리 나라에서는 '플레쳐 교수'의 훌륭한 교육관 덕분이라며 '앤드류가 가진 재능'을 끄집어 내는 탁월한 교습법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만들어진 미국에서는 정반대다. 탁월한 교습법은커녕 입만 열면 쌍욕에, 인종차별까지 서슴지 않는 정신이상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모습 자체라면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플레쳐 교수는 자신의 커리어와 명성을 쌓아줄 '완벽한 악단'을 만들기 위해서 학생들을 그야말로 '도구'로밖에 취급하지 않은 저열함을 보여줬다. 그렇지만 이조차도 한국의 학부모들은 학생들에게 '무한 경쟁을 통한 성장'으로 보았고, 그런 혹독한 경쟁시스템을 이겨내야 진정한 넘버원이 될 수 있다며 박수갈채를 보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영화대사의 뒤침(번역) 문제'라고 꼬집기도 했다. 원래의 영어대사는 욕설과 비하, 인종차별를 서슴지 않게 쓰는 프레쳐 교수에게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한국어 자막'은 이를 꽤나 순화(?) 시킨 덕분에 욕설이 욕설로 들리지 않았고, 권위가 높은 교수가 실력도 인정 받지 못한 학생에게 '그 정도의 말'은 할 수 있는 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 같다. 나도 '한국어 자막'만 보았을 때에는 '영어 원문'을 해석한 것을 읽어보니 정말 입에 담지 못할 저열한 말들만 잔뜩 늘어놓고 있는 인간 말종 맞았다.

영화 <위플래쉬> 이야기를 먼저 꺼낸 까닭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바로 영화속 '앤드류'와 비교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한스와 앤드류는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한스는 엄격한 신학교의 규율을 견디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걸려 중퇴한 뒤에도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지만, 앤드류는 끔찍한 경쟁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다가 교수에게 이용 당한 선배의 죽음을 전해 듣고, 교수를 파면시키는데 협력하게 된다. 이에 대한 앙갚음을 당한 앤드류는 큰 무대에서 대망신을 당하게 되지만 오히려 이를 역전의 발판으로 삼아 엿 같은 교수에게조차 '인정'을 받을 정도의 환상적인 드럼 연주를 선보이게 된다. 영화는 여기서 끝을 맺었지만, 이후에 앤드류는 '전설적인 드러머'로 거듭나서 승승장구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감수한 윤순식 교수는 '한스 기벤라트'의 이름에서 뜻풀이를 해냈다. 주인공의 이름 'Giebenrath'는 독일어로 'Geben Sie mir Rat' 즉 "내게 충고를 해 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이다. 한스는 과연 어떤 충고를 듣고 싶었던 것일까? 한스는 어릴 적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곧잘 받았다. 한스에겐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적이었기에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려 애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한스의 아버지는 한스에게 '칭찬'을 해주는 것보다 '더 큰 목표'를 제시할 뿐이었다. 바로 우수한 학생들만 진학한다는 '신학교'에 당당히 입학하고 졸업해서 성공적인 삶을 보장하는 '목사'가 되라고 말이다. 물론 착하고 성실한 한스가 이런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는 짓을 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자 한스는 온 동네의 자랑이 되었고, 주위 어른들은 모두 한스가 훌륭한 목사가 될 재목이라며 엄청 기대를 하게 된다. 한스는 이런 어른들의 기대가 '부담'으로 작용했다. 왜냐면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공부에 매진해야 했고, 그 결과 한스는 또래 친구들과 놀이를 하지도 못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고, 좋아하던 '낚시'를 하는 것도 성적을 떨어뜨리는 어리석은 짓이라며 동네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몰래 다녀야 할 정도였다. 막상 신학교 입학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를 한 뒤에도 '잠깐'의 여유를 즐길새라, 신학교에서 배울 학습을 미리 '선행학습' 시키며 닦달하고 있었다. 이런 강요조차 한스는 묵묵히 따를 뿐이다. 왜냐면 한스는 '공부' 이외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어린 한스에게 그 누구도 '그걸' 가르쳐주는 이가 없었다. 딱 한 사람 '플라이크 아저씨'만 빼고 말이다. 그는 한스가 공부에 쫓겨 놀지도 못할 때, 그건 어리석은 짓이라며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라고 충고하고 놀기도 하고 운동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린 한스였지만 '플라이크 아저씨'의 말씀은 자신에게 좋은 말씀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플라이크 아저씨의 충고가 아주 적절했지만, 그 아저씨의 배움이 짧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충고'를 해줄 수는 없었다. 한스도 딱히 '그 이상의 충고'를 바라지는 않았고 말이다. 왜냐면 한스도 자신의 고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다 신학교에서 '헤르만 하일너'라는 동기를 만난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한스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건 바로 '문학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것이다. 특히 '시' 말이다. 하일너는 틈만 나면 한스에게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한스는 하일너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엄격한 규율과 뛰어난 학업 성적을 요구하는 '신학교의 학업 분위기'였다. 신학교의 수업에는 '문학'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학교의 선생들은 모두 '하일너'를 문제아로 내몰았고, 하일너는 줄기차게 주장했다. 자신의 꿈은 목사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말이다. 한스는 하일너를 친구로 사귄다. 신학교 생활의 모든 것이 한스의 숨통을 죄었지만, 하일너는 그런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헤르만 하일너'의 이름이 헤르만 헤세를 떠올리게 하고, '힐러(치유사)'라고 읽히는 것은 무리일까? 실제로 헤르만 헤세도 부모님이 원하는 목사가 아닌 '시인'이 되고파 자살을 하려 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스는 하일너와의 만남으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점점 더 심해지는 신경쇠약과 두통에 고통을 받게 된다. 어릴 적부터 공부만 해왔던 탓에 '건강'이 뒷받침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스는 '병약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신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하일너는 자주 반항을 했고, 급기야 선생들의 뒷배를 믿고 하일너를 괴롭히던 학우와 싸움을 벌이기까지 한다. 이 싸움을 결과로 학교선생들은 하일너에게 '근신'이란 벌을 내리고, 한스를 비롯한 누구도 하일너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엄금하기에 이른다. 한스는 이런 부당한 처사에 '하일너 편'을 들지도 못하고 머뭇거렸고, 그런 한스에게 배신감이 든 하일너는 한스에게 '배신자'라고 비난을 한다. 이렇게 학교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와도 사이가 틀어졌으며, 건강까지 발목을 잡자, 한스의 성적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도 이런 한스를 걱정(?)하며 여러 조언을 해주지만, 그들의 조언이란 '성적 향상'을 위해서 부지런히 공부하기 위해 '잡생각' 따윈 집어치우라는 수준이었으며, 결정타는 문제아로 찍힌 '하일너'와 가깝게 지내지 말라는 경고 뿐이었다. 여기서도 한스는 고민에 빠진다. 어른들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성적관리'를 하긴 해야겠는데, 하나 뿐인 친구인 '하일너'도 잃기 싫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스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애초에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무리를 하게 되니 성적은 더 떨어지고, 친구와도 즐겁게 지내지 못한다.

결국, 건강이 발목을 잡자 한스는 자퇴를 하게 된다. 학교측에서도 건강해지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라고 위로를 해주지만, 한 번 뒤쳐진 '성적'을 따라잡기는 이미 글렀으니, 다시 돌아오더라도 환영해줄 것 같지 않음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이에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한스의 아버지다. 마을의 자랑이자 아버지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는데, 그런 자랑거리가 '자퇴'를 하면서 사라져버렸으니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마을에 도착하지마자 한스에게 '직장'을 알아봐주며 '돈벌이'를 배우라고 종용한다. 한스는 이마저도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직장 생활을 경험하게 된 한스는 '축하파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물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강물에 뛰어든 것인지, 발을 헛디딘 것인지는 모호하지만 말이다.

어떤가? 영화속 '앤드류'와 사뭇 다르지 않은가? 앤드류도 한스와 비슷한 학교생활을 한다. 우수한 성적을 가졌기에 '플레쳐 교수'에게 전격 발탁이 되는 영광을 받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플레쳐 교수에게 온갖 모욕과 수모를 당하며 '기량 올리기'에만 종용 당한다. 조금이라도 플레쳐 교수의 눈밖에 나면 그 길로 짐을 싸서 쫓겨나야 했고, 실력이 쫓아가지 못하면 '다른 연주자'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앤드류는 끝까지 버틴다. 정말 엿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그 엿 같은 상황을 겪은 것이 앤드류 혼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례로 인해 자살한 학생이 있었다는 '위원회' 측의 권고를 따라 '플레쳐 교수'를 고소한 뒤에 교수자리에서 파면시키는데 협조한다. 그렇게 플레쳐 교수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났지만, 앤드류는 방황을 한다. 최고의 기량을 올리기 위해서 더 많은 연습과 코칭이 필요했는데, 플레쳐 교수의 실력만큼 앤드류를 잘 지도할 교수가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대학에서 쫓겨난 플레쳐가 '개인 악단'을 만들었고, 마침 앤드류 만한 실력의 '드럼 연주자'가 필요하니 생각이 있으면 합류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함정'이었다. 연주자에게 카네기 홀 연주는 무한한 영광이지만, 망신을 당한다면 앞으로 연주자로 성공할 가능성은 완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레쳐는 앤드류를 개망신 당하게 만든다. 하지만 앤드류는 그 개망신을 극복하고 수많은 관객 앞에서 '신명나는 드럼 연주'를 보여준다. 최고 중의 최고가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명연주를 말이다.

이 책 <수레바퀴 아래서>는 종종 대한민국의 엄청난 학구열을 비판하는데 종종 입에 오르곤 한다. 주위 어른들의 위압적이고 학교교육의 권위적인 것에 비판을 하면서 우리 학생들에게 '위선적인 교육'을 강압할 것이 아니라, 진짜 '참교육'을 위해서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면서 어김없이 회자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작 학생들이 이 책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면 제대로 된 이해를 하지 못하고, 그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까지 한 나약한 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라 오해를 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건 영화 <위플래쉬>를 보면서 플레쳐 교수의 무자비한 교습법이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분위기와 일맥상통하다. 학생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자행 되는 '잘못된 관행'이 우리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쳐도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왜냐면 그런 잘못이 많더라도 '학생들의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된다면, '더 많은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기만 한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사회분위기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 <수레바퀴 아래서>도 바로 그런 '나쁜 사회 분위기' 아래 깔리기 직전에 놓인 아이들이란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게 하는 것이 어른들에겐 명예이고, 영광일지 모르지만, 그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 신음하고 고통 받으며, 심지어 깔려 죽어나가는 아이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도 '나쁜 수레바퀴' 탓을 하지 않고 '깔려 죽은' 아이들만 탓하는 억눌린 사회의 문제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그런 '배경지식'을 알려주고서 이 책을 우리 어린이들에게 읽어보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자신들이 경험하는 학창시절에 '문제'가 많구나 싶을 것이다. 물론 그걸 깨달은 학생들이 그 문제를 당장 바로 잡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그런 '문제의식'을 깊이 고민해본 어린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된다면, 그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해결법'을 분명히 찾아낼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어른들이 그런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 수가 너무 적다. 더 많은 어른들이 깨우쳐야만 한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을 '올바른 가치관'을 경험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정말이지 읽을 때마다 깊은 감명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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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3 : 어머니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3
조익상 글, 이도현 그림, 박선영 감수, 손영운 기획, 막심 고리키 원작 / 채우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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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3 : 어머니>  막심 고리키 / 손영운 / 조익상 / 박선영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XVII / 채우리 25번째 리뷰] 막심 고리키가 쓴 <어머니>는 유명하지만, 막상 읽은 독자들은 그닥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러시아 혁명(볼세비키)'이 일어나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탄생하는데 크게 기여한 소설이자, '사회주의 실현'에도 크게 기여한 소설이기 때문에 '공산당'에 크나큰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 독자들이 거리낌 없이 손을 대기에 어려운 소설이기 때문이다. 허나 막상 읽어보면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주인공 파벨을 중심으로 "노동자에게 권력을! 농민에게 땅을!" 돌려달라며 혁명을 이끌어나가는 주동적 인물들 모두가 '지극히 당연한 인권'을 존중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너무도 인간적인 내용에 큰 감동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벨의 어머니는 '사회주의'인지, '공산주의'인지 아무 것도 몰랐지만, 아들(파벨)과 함께 혁명을 꿈꾸고, 차르 정부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저항을 하는 이들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며,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차츰차츰 깨닫게 되면서, 나중에는 감옥에 들어간 아들을 대신해서 '전단'을 나르고, 쫓기는 혁명 '동지'들을 감추고 돌봐주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우리네 민주투사들의 모습과 상당히 겹쳐 보이기도 한다. 4·19 혁명과 5·18 민주화 운동, 그리고 6월 항쟁과도 일맥상통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리고 평화시장에서 어린 여공들이 받던 부당한 처우를 시정해달라고 요청한 '전태일 열사'의 모습도 떠오르게 될 것이다. 1900년대 당시 '제정 러시아'도 딱 그랬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면서 벌어들인 이득을 '산업혁명'에 재투자하며 더 많은 수익을 챙기자 당시 왕과 귀족, 그리고 사제 같은 '고위 계층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호의호식을 하며 살았더랬다. 거기에 초기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급성장한 '자본가'들은 공자에 기계를 가동시키며 노동자들은 하루 14~16시간의 노동을 요구했고, 심지어 20시간이 넘는 노동도 강요하면서 월급은 정말이지 쥐꼬리만큼 주었고, 병들거나 다쳐서 일을 하지 못하면 돌봐주기는커녕 '새 노동자'로 교체하고서 아무런 보상도 없이 해고를 남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쥐꼬리만한 월급일망정, 그조차 받지 못할까봐 사장(자본가)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고된 노동을 이어갈 뿐이었다. 농촌도 지주들의 횡포에 땅을 빌리지 못해 굶주리는 농민들이 허다했고 말이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력 1905년 1월 9일' 일요일에 20만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차르 황제의 궁전을 향해 행진을 했다. 자본가들의 몰염치한 행동에 성난 노동자들은 차르 황제가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고, 굶주리는 노동자들을 위해 빵도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전 앞에서 이들을 마중 나온 이들은 황제의 궁전을 지키는 군대였다. 마침 차르는 외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성난 군중들은 차르가 없는 궁전 앞에서 애원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총알세례였다. 이 사건이 '피의 일요일'이었고 이때 죽고 다친 러시아 민중이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끔찍한 사건을 지켜본 이가 바로 '막심 고리키'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였지만, 이때 '엄청난 괴로움'을 맛본 그는 '막심(엄청난) 고리키(괴로움, 고통)'를 필명으로 삼고 <어머니>를 집필한 것이다.

이 책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가난과 남편의 폭력으로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던 어머니가 엉망이 된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아들을 지켜보다 점차 '혁명가'로 변해 가는 과정을 그린 뛰어난 작품이라고들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소설은 러시아에 '혁명'과 노동 운동'을 선사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전세계 혁명가들이 자본주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실제로 소비에트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사회주의 혁명'에 초석을 다진 작품으로 추앙 받기도 했다. 더구나 소설의 제목인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 주부에서 혁명가로 변신한 파벨의 어머니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혁명동지들 '모두의 어머니', 더 나아가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고, 소설속에서 파벨이 겪는 고통과 고난을 '그리스도가 겪은 고난'으로 비유하게 되면서 파벨의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고리키는 이 모든 의미를 다 담아서 <어머니>로 불렀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메이데이'로 부르는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노동절)'이다. 시작은 미국의 노동자들이 큰 희생을 치르고 난 뒤에 전세계에서 그 의미를 새겨 총파업을 거행한 날, 5월 1일을 기념일로 삼았지만, 정작 '노동절'의 발상지인 미국에서는 소련과 똑같은 날을 기념할 수는 없다며 9월로 날짜를 옮겨버리고 말았다. 우리 나라도 날짜까진 바뀌지 않았지만, 박정희 정권 때 '노동절'이란 명칭을 대신해서 '근로자의 날'로 바꿔버리고 말았다. 역시나 북한을 의식해서 '인민'이니 '노동'이니 하는 낱말을 쓰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회분위기 덕분에 우리는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도 마음껏 읽지 못하는 분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작이 바로 이 소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로 가슴 설레게 만든다. 그리고 파벨과 그의 어머니가 겪는 고통과 고난에 감정이입을 하며 열렬히 응원하게 되고, 파벨이 꿈꾸는 혁명이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기도 한다. 왜냐면 파벨이 꿈꾸던 것이 사실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억압 받지 않고 인간다운 대우를 받으면서, 열심히 노동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것을 현재를 사는 우리는 정말 잘 알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착하고 부지런한 노동자와 농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본가'와 그들을 옹호하는 '권력자'들의 부정부패가 진정한 사회 문제라를 사실도 너무 잘 알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런 문제들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비롯해서 전세계 민주국가에서 '마땅히 보장 받아야 할 마땅한 권리'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단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명칭이 나오고, 실제로 '공산주의 정권'에서 호평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어머니>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에 필적하는 우리 소설 강경애의 <인간 문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에도 그런 이유를 들이대려고 하는가? 아닌 게 아니라 내 어릴 적 학교선생님 가운데 <난쏘공>에 대해 유난히 비난을 일삼고 학생들에게 읽지 못하게 강변하던 분이 계셨다. 당시엔 그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지만, 그 책의 내용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선생님도 그리 많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오직 딱 한 분만이 <난쏘공>에 대한 풀이를 넋두리처럼 읊어주시던 기억이 나는데, 워낙 횡설수설하며 요점정리를 하지 못하셔서 무슨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때가 전두환 정권이라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어머니>와 <인간 문제>, <난쏘공>을 모두 읽어보았지만 딱히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발견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깊은 고뇌를 할 뿐이었고,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방치하는 사회는 오래 존속 되지 못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투쟁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함께 깨우치게 되었다. 이는 우리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 나라의 노동자와 농민들도 똑같은 길을 걸었다.

그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알아 두는 것이 좋다. 막연하게 둘이 똑같으며 '북한'과 연관 되어 있으니 무조건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없어 보이지 않은가? 먼저 반대말부터 알면 이해가 빠르다. 사회주의의 반대는 '개인주의'이고, 공산주의의 반대는 '자본주의'다. 그럼 사회주의는 '공동체주의'로 이해할 수 있고,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이 아닌 '공유재산'만을 인정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모두가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는(공유하는) 사상'이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인 것이다. 둘의 차이점은 사회주의는 '과정'이고, 공산주의는 '최종 목적지'라고 보면 좋다. 그렇기에 진정한 '공산주의 국가'는 지구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고, '공산국가'라고 말하는 나라들은 이 세상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지 그런 이념을 지향할 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도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산당(공산주의) 선언'을 하며 전세계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주장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했다.

그렇기에 지금 전 세계에서 '공산국가'를 꿈꾸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이들은 '독재자가 싫어요'라는 말을 해야 할텐데, 이를 살짝 변형시켜 "(내가 원하지 않는) 권력자가 싫어요. 그러니 내가 싫어하는 이들은 다 공산당이고 빨갱이어야만 해"라고 억까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정말 수준 떨어지는 족속들이다. 이런 무지한 이들이 '사회'나 '공산'이라는 말만 나오면 거품을 물고 막되먹은 소리로 요란을 떠는 꼬락서니가 정말 꼴불견일 따름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분들 가운데 '사회주의 계열'도 상당히 많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둔 '홍범도 장군'과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도 바로 그 사회주의 노선에서 열성을 다해 조국의 독립을 꿈꿨던 분들이다. 이런 분들이 일제의 탄압과 매국노와 변절자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소련 연해주와 중국, 만주 등지에서 목숨을 걸고 일제에 저항하신 분들 아닌가 말이다. 우리가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이들의 업적을 제대로 논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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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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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 13 : 중국 1 - 근대편>  이원복 / 김영사 (2018)

[My Review MMCXVI / 김영사 32번째 리뷰] 내 기억으로 <먼나라 이웃나라>는 1987년에 첫 선을 보였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학교 교실에서 한 친구가 보기 시작했는데, 쉬는 시간마다 10여 명이 둘러싸고서 한장 한장 넘기며 보았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당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차례대로 개최하면서 외국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때문인지 그 당시에는 듣도 보도 못한 나라 이름까지 외우며 세계지도를 뚫어져라 보기를 강요받던 기억도 함께 난다. 물론 '부루마블'이란 보드게임이 있어서 웬만한 나라와 수도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암튼 세계적인 축제를 개최하기에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와 '역사'도 우리 어린이들이 알고 좋겠다는 취지에서 기획하고 출간한 학습만화로 기억한다.

그러다 한 동안 잊고 지내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하며 받은 월급으로 어릴 적에 제대로 읽지 못한 <먼나라 이웃나라>를 구입해서 읽었는데, 아쉽게도 '초판본'이 아니라 '개정판'이었다. 더 아쉬웠던 것은 '개정판'을 구입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개개정판'이 나와 '완전 컬러판'으로 출간이 되었다는 점이다. 초판본은 '손글씨'였고, 개정판은 '활자본'이었는데, 모두 흑백이었다. 그런데 '개개정판' 이후부터는 총천연색으로 출간되었으니 솔직히 억울하기도 했다. 암튼 이런 옛 기억을 꺼낸 까닭은 이 책 <먼나라 이웃나라>가 출간한 지 30여 년이 넘었는데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 '중국편(전 2권)'만 해도 처음 선보인 것이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2010)이었고, 그 다음 개정판이 <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2012), 또 개정판이 바로 이 책 <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2018), 그리고 작년에 <먼나라 이웃나라 시대를 넘어 세대를 넘어>(2024)이 출간되었다. 굉장하지 않은가? 보통 '개정판'이 나오면 본문의 내용은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오탈자 교정'을 약간 손 본 뒤에 '표지갈이'만 하고서 나오거나, '개정증보판'이라고 하고서는 '첫머리'에 등장하는 '서문'만 새로 쓴 것이 대부분의 관행인데, <먼나라 이웃나라>는 '개정증보판'이라고 하면 꽤 정성스럽게(?) 수정할 것은 수정하고, 생략할 것을 과감히 빼버리며, 새로 보충할 것은 확실히 증강시키는 공을 정말 세심하게 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매번 새로 '개정증보판'이 나올 때마다 이 책을 읽고 또 읽곤 한다.

하지만 이원복 교수의 저서 가운데 오직 <먼나라 이웃나라>만 읽을 만하다. 왜냐면 이 분의 저서가 '보수적인 관점'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먼나라 이웃나라>는 우리 나라의 '우익 정당'의 인식으로 기울어진 가치관으로 편향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좌파'나 '진보'적 가치관을 폄훼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애매할 정도로 '기울어진 가치관'으로 저술된 까닭에 어린이들에게 무작정 읽히기에 유익한 책이라고 권하기를 꺼리는 책이라는 얘기다. 애초에 초판본이 나온 해도 87년 '군사독재 정권' 시기였기에, 그들의 입맛에 딱 맞게..아니 그들의 눈치(검열 등)를 보면서 써내려 갔고, 2010년, 2012년 개정판은 '이명박 정권 시기(2008~2013)'였으며, 2018년 개정판은 '박근혜 탄핵 이후'에, 2024년 개정판은 '윤석열 정권 비상계엄 직전'에 출간되었다. 대부분 '보수정권의 시기'에 기획되고 개정을 거쳐 출간된 것이 묘하지 않은가? 책 내용을 봐도 어렵지 않게 그런 뉘앙스를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읽는 까닭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학습만화'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외국의 것을 베끼지 않고서 직접 펴낸 '우리 나라 학습만화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품격을 꾸준히 지켜오고 있다. 그렇기에 '내 역사가치관'과는 살짝 엇나가는 내용으로 적혀 있다하더라도 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나름 '균형'을 잡아가는 스토리텔링을 높이 사서 꾸준히 애독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원복 교수의 '다른 저서'는 좀 별로다.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힌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학습만화라 해도 초등학생 어린이가 읽기에는 벅찬 내용이 담겨 있다. 단지 '만화형식'이란 이유만으로 초등생들에게 무작정 읽히는 학부모들도 많이 있을텐데, 적절한 '학습코칭'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정말 수박 겉핥기밖에 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내 학창시절(중등)에 첫 선을 보였을 때에도 많은 학생들이 '쉬는시간'에 읽고 '사회수업'시간에 선생님에게 폭풍질문을 던지곤 했다. 외국문화에 익숙치 않은 시절이라 궁금증이 많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책 내용이 너무 수준 높았기 때문에 '읽는 것'만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원복 교수도 만화 중간중간에 '에드립(!)'을 많이 넣어 웃음을 유발시키고 있는데, 대부분 '반어적', '은유적', '풍자적' 표현이 많기 때문에 활자와 그림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화적인 저변(배경지식)'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어 더욱 어렵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 '중국 1 - 근대편'에서도 똑같이 작용했다. 중국은 청 말기에 접어들면서 '외세의 침탈'을 무수히 많이 받기 시작하는데, 그 이전의 역사는 과감히 생략하고, 대뜸 '아편전쟁'부터 서술을 하고 있다. 물론 웬만한 세계사 책이 중국의 근대를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역사도 얼추 설명한 뒤에 '중국의 근대 시작'을 알리는 아편전쟁을 서술하지 않느냔 말이다. 사실 '중국사 5000년'을 모두 담으려면 10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것이라서 <먼나라 이웃나라>는 '근대편'과 '현대편'만으로 압축하고, 집중하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이렇게 어려운 책을 '초등생'에게 읽으라고 권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적 배경지식'을 수준급으로 쌓은 독자에게 권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 이 책에서 눈여겨 볼 대목을 짚어 보자. 중국의 근대화는 엄청난 실패를 거듭한다. 아니 하는 족족 다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다 '일본의 근대화 성공'을 기회로 삼아 '일본 베끼기'에 돌입하지만,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친절한 이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방법을 그대로 '이웃나라'에 써먹으며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편에 서서 중국을 비롯해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고, 약탈하는데 열을 올린다. 이런 비운의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은 서서히 '근대화'에 눈을 뜨지만, 몇몇 소수 엘리트 계층만 움직일 뿐 제대로 성과를 얻는 근대화 시도는 없었다. 10억 인구의 거대한 중국이 왜 이 모양이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이 이 책에 아주 잘 드러난다. 그건 바로 '위로부터의' 개혁시도는 민중들의 동참을 이끌어내지 못했기에 실패로 끝났던 것이다.

그럼 중국은 왜 공산화가 되었을까? 그건 바로 '밑으로부터의' 혁명 시도가 적확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바로 힘 없고 무식했던 농민, 노동자 들이 썩어빠진 나라를 싹다 뜯어고쳐 새롭게 만들어야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 수 있겠다는 '대오 각성'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큰 각성을 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이 되고 난 뒤에 '베르사유 조약'에 중국의 이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폭발력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바로 '5·4 운동'이 바로 그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렇게 깨어난 민중들이 민주주의를 찾고, 진정한 자유를 보장 받길 원했지만, 중국 스스로의 힘이 열악했기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안으로 썪어들어간 정치인과 군벌 들에 의해 나라꼴이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거대한 민족적 운동으로 '한 마음'이 되었지만, 서구열강의 힘은 더 셌다. 이때 마침맞게 러시아에서는 '공산혁명(볼세비키)'이 성공해서 공산국가 소련이 탄생했다. 그리고 소련은 '공산국가'를 늘리기 위해 유럽 각국에 발을 들이려 했지만, 이미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유럽국가들은 '식민지'에서 약탈한 이득을 그들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나눠주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상'이 스며들 틈이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소련은 아시아로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왜냐면 아시아 국가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심어줌과 동시에 '공산혁명'을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유럽의 식민지'를 줄이는 결정적 트리거로 작용할 것이고, 그렇게 아시아 각국을 독립시키는데 성공하면, 유럽의 국가들도 더는 '식민지'에서 이득을 챙길 수 없을 테니,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사상이 파고들 틈이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은 '카라한 선언(1919년 7월)'을 하며, 혁명 이전에 맺었던 모든 비밀조약을 무효화 한다는 조치를 실시한다. 이로써 소련은 제국주의 국가(자본주의)들과는 다른 도덕성 우위를 확보하며,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 청년들의 마음을 일거에 사로잡게 된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중국에 '공산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 셈이다.

이 책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가장 눈에 띄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물론 '중국의 근대화 실패와 공산혁명의 성공 과정'은 더욱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맥락만 이해하고 있어도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데에는 큰 고비 하나를 넘은 것과 맞먹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효과는 '학습만화'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단박에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중국사'가 정말 만만치 않다. 어려운 것은 둘째 치더라도 '너무 방대해서' 더욱 힘들다. 그걸 간추리고 생략하면서 이 정도로 '정리'해낸 것만으로도 엄청 대단한 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우리가 인식하는 '우익과 보수'는 과거 국민당의 후예를 자처하는 '대만'쪽이고, 그 반대인 '좌익과 진보'는 과거의 공산당인 '중국 본토'쪽이다. 그래서 읽다 보면 '중국공산당'이 꽤나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행보를 걷고, '국민당'이 허술하고 답답한 행보를 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어느 쪽이 더 객관적으로 균형잡힌 가치관인지 살짝 헷갈리곤 한다. 물론 진보와 보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서로의 입장이 달라질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닐지라도 '중국 근현대사'에 배경지식이 부족하고, 우리 나라와의 관계(독립운동)까지 확장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다. 그것까지 아우르지 못하고 '따로국밥'으로 저술되어 있는 점이 살짝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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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9 : 인간의 선택은 엉망진창이다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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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탐구보고서 9 : 인간의 선택은 엉망진창이다>  정재승 / 정재은, 이고은 / 아울북 (2022)

[My Review MMCXV / 아울북 34번째 리뷰]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를 담아 놓은 책이다. 쉽게 말해, 비문학적인 책이고, 과학분야의 책인 것인데, 이런 '고도의 과학지식'을 그냥 담아 놓으면 몇몇 과학에 찐 관심을 갖고 있는 어린이말고는 절대 읽지 않을 책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린이도 쉽게 접하고 읽을 수 있도록 '한 편의 이야기' 속에 뇌과학 지식을 우겨 넣은 책이라고 소개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이런 책이 상당히 '유익하다'는 점에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인데, 정작 읽기에는 살짝 아쉽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발견된다. 바로 '이야기'와 '과학지식'이 따로국밥을 말아놓은 것처럼 이질적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따로국밥'도 맛있다. 하지만 맛있는 것과는 별개로 '영양가'도 높고, 애써 담아 놓은 영양이 '우리 몸'에 골고루 섭취까지 되었으면 참 좋을 텐데, 정말 이 책을 읽고 '뇌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질 어린이들이 있겠는가 싶은 의문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이야기는 '외계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지구인 탐구 내용'을 보고서 형태로 기록하면서 '인간의 뇌'에 관한 전반적인 과학지식을 쏙쏙 알려 준다. 어린이책이 대부분 이런 형식으로 짜여져 있으니 그닥 이채로울 까닭은 없다. 근데 막상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이 '뇌과학' 책인지, '외계인' 책인지 알쏭달쏭해지기 시작한다. 그 까닭은 책을 읽고 기억에 남는 것은 '지구인'이 아니라 '외계인'이기 때문이다. 1권부터 9권까지 쭈욱 제목만 살펴보아도 그렇다. 인간은 거짓말쟁이다. 인간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인간은 선택도 엉망으로 한다...등등 지구인은 온통 '비이성적'이고, 외계인이 오히려 '이성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식이니 인간은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고, 외계인은 '긍정적' 이미지를 취하게 되고 말았다. 물론, 책을 깊이 읽다보면 인간의 이런 '불완전'하고 '불명확'한 특성들이 오히려 현재 인류가 지구를 장악한 유일한 생물종이 된 필연적인 이유라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긴 하지만, 이를 파악하기란 어른들도 힘든 마당에 어린이 독자들이 스스로 읽고서 깨우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인지 의문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과학은 결코 쉬운 학문이 아니다. 학창시절에는 그저 '암기과목'으로 치부하며, 달달 외우기만 해도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과목으로 매도하기 십상이지만, 그렇게 성적을 올릴 수 있을지언정 뒤돌아서면 다 까먹기 마련이다. 그런 식으로 과학공부를 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수많은 전문가들이 새로운 '코칭 방법'을 고민하며 내놓은 방식이 '스토리텔링'과 '학습만화'를 결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책들이 더욱더 많이 어린이 독자들에게 '관심'을 끌고, '사랑'을 받길 바란다. 그렇기 위해서 조금만 더 노력해주길 바란다.

더욱이 멀지 않은 미래세대에는 '과학지식'을 상식으로 갖지 못한 이들에게 매우 불편한 사회가 펼쳐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은 이제 두 달이 멀다하고 '신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그 기술에 익숙해질 즈음에는 이미 '낡은 과학지식'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첨단과학 분야는 하루가 다르게 업그레이드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새로 나온 가전제품이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는 까닭도 바로 '첨단과학'을 탑재해서 '엄청난 기능'을 선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화기는 전화만 걸 수 있으면 되고, 밥솥은 밥만 지을 줄 알면 되고, 세탁기나 청소기도 그저 대충 기본적인 설정만 숙지하고서 달랑 '버튼 두 개(전원/시작)'만 누르면서 사용하고 있다. 훨씬 더 많은 기능을 쓸 수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전기밥솥으로 밥만 지을 뿐이지만, 쌀이 주식이 아닌 외국에서는 '음식조리'를 하는데 한국의 전기밥솥이 최고라고 극찬을 늘어놓는다. 이게 바로 '신기술'이 등장했지만, 과학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애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과학공부'를 꾸준히 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어린 자녀에게 읽으라 강요하기에 앞서 학부모들이 먼저 읽고 그 의미를 먼저 '되새겨' 주길 바란다. 그게 독서교육의 첫걸음이니까 말이다.

자, 이쯤하고, 지구에 도착한 아우린들의 갈등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멸망해가는 아우레 행성을 대신해서 아우린들이 거주가능한 행성으로 지구를 물색했는데, 저 멀리 다른 은하계에 '아우린 거주 가능한 행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가는데 230년이 걸렸으니, 오고 가는데 또 얼마나 걸릴 지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새로 발견한 행성에는 아우린들이 살기에 적합하지만, 다른 지적생명체가 없기에 모든 것을 새로 건설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에 지구는 아우린들이 살기에 적합하지만, 이미 '지구인'이라는 지적생명체가 있어 이들과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한지 먼저 탐색해봐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만약 지구인이 공존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면 '전멸'시켜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지구인이 저항이라도 한다면 '전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자, 아우린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솔직히 이성적인 판단을 우선하는 아우린들이라면 '선택'을 위해서 고민을 그리 오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는 그리 큰 문젯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지구인과 '공존'이냐, '전쟁'이냐를 선택하는 문제만큼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지구인의 특성이 매우 '비이성적'이고, '오락가락'하며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똑같은 지구인'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몇몇 지구인을 관찰하고 난 보고서로 '모든 지구인'과 공존할 것인지, 전쟁할 것인지 결정 내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선택'은 정말이지 엉망진창이다. 자기가 선택을 '결정'하지 못해 남에게 맡겨버리거나 심지어 "코카콜라 맛있다~"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점괘(?)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요즘에는 인공지능 AI의 '추천'을 받아 선택의 가짓수를 줄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추천을 받아도 '결정'을 쉽사리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지구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정'을 내렸다고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자기가 내린 결정이 아닌 까닭에 결국에는 그 선택에 대한 '후회'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물건 하나 고르는 것도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어렵사리 결정을 해도 쉬이 후회를 하고 마는 인간은 비정상적인 것인가?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지극히 정상이다. 선택이 쉽지 않고, 후회도 빠른 것은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 인간의 뇌가 처리하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더라도 '어느 쪽'이 더 이득이 될 것인지 분별하는 것이 매우 애매하기 때문이다. 뭐, 계측장비나 정보처리기의 도움을 받으면 여러 가지 항목별 통계를 내어서 어느 쪽이 더 이득일 것이라는 결론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겠지만, 그런 도움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의 뇌'는 이성과 감성, 그리고 과거의 경험까지 온갖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혼란해지기 십상이란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에만 따른다면 쉬이 결정 날 것을, 조금의 손해를 보더라도 '그때의 감정상태'를 고려하게 된다면 결과는 정반대로 나오기도 한다. 거기다 '과거의 경험'까지 작동해서 최종판단을 내리게 된다면 더욱더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과거의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결론적으로 손해를 봤었다...는 경험이 누적될수록 '선택'은 느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판단의 지름길'이라는 뇌회로를 가동했다. 빨간 구두를 살 것이냐, 하얀 구두를 살 것이냐와 같은 선택은 '시간의 제약'이 없겠지만, 횡단보도를 걷는데, 자동차가 달려오는 상황이라면 '오른쪽으로 피할 것인지, 왼쪽으로 피할 것인지'와 같은 빠른 선택이 필요한 경우에는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대충 이런 상황'이라면 '이런 선택'을 해야 한다는 지름길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쌓이고 또 쌓이면 '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은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뒤따라 오는 '후회'는 당연한 덤이다.

이렇게 우리의 뇌는 꽤나 신비한 영역을 품고 있다. 그리고 뇌과학이 풀어야 할 숙제도 무궁무진하다. 다른 과학분야에서는 이제 더 연구할 거리가 없어서 특기할 만큼 진척이 없지만, 뇌과학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우리의 미래세대가 뇌과학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까닭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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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유람기
김연수 지음, 강혜숙 그림, 조너선 스위프트 원작 / 대한출판문화협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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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늬버 유람긔 : 걸리버 유람기>  조너선 스위프트 / 김연수 /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My Review MMCXIV / 대한출판문화협회 1번째 리뷰] <걸리버 여행기>는 워낙 많이 읽었기 때문에 특별할 것이 없을 정도지만, '제목'이 참 옛스러워서 꺼내들었다. 문득 '신사유람단'이 떠올랐는데, 아닌 게 아니라 최남선이 우리 나라 최초로 <걸리버 여행기>를 뒤쳐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최남선은 특이하게 '소인국'이 아니라 '거인국'부터 썰을 풀어낸 뒤, 나중에 '소인국'도 써냈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순서에 맞게 고쳐 '알사람 나라 구경', '왕사람 나라 구경'이라고 풀어서 썼다. 하지만 아쉽게도 최남선도 '소인국과 거인국' 편만 뒤쳐내는데 그쳤다고 한다. 그럼 그 뒤의 이야기는 '어떻게' 썼을까? 그게 이 책을 읽는 핵심일 것이다.

사실, '알사람'과 '왕사람' 나라의 이야기는 크게 주목할 것이 없다. 단지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으로 넘어가던 시기의 어투로 익살 맞게 풀어 쓴 노력이 엿보이긴 하지만, 애초의 '원작 내용'을 익히 알고 있는 현시점에서 보자면 그저 '축약본의 내용'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날사람 나라 구경'과 '말사람 나라 구경'은 완전히 새로 창작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완연한 특색을 드러냈다. 앞서 나왔던 '최남선이 구연한 어투'에서 벗어나 '현대말(어투)'로 고쳐 쓰면서 주위환기를 시키더니 줄거리도 과감하게 들어낼 것은 들어내면서 빠르게 진행하더니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등장인물'을 하나 등장시켰다. '날사람 나라'에서 걸리버의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일본'을 거쳐 지나가면서 잠깐 '율도국'을 찍고 간다는 설정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 율도국에서 누굴 만났겠는가? 바로 '홍길동'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걸리버가 정상적인 율도국 방문은 아니었지만, 홍길동이 누군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신출귀몰한 초능력의 소유자 아니겠는가. 그러니 걸리버가 일본에서 서쪽으로 향하면서 그 사이 어디쯤엔가 있었다던 '율도국'을 방문했다는 것이 그리 크지 않은 어색함이었기에 큰 무리도 없었다. 그런데 '말사람 나라 구경'을 하면서 홍길동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책에서는 '말사람 나라'의 이야기도 대폭 축약해서 빠른 속도로 진행한다. 그 결과 걸리버는 후이늠 사회에서 추방을 당할 바에야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그렇게 죽었으면 이야기는 끝이 났을 텐데, 난데 없이 홍길동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딴 데로 새고 만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렇게 딴 데로 새는 바람에 이 책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조나단인지, 조너선인지, 암튼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걸리버 여행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분명 <걸리버 여행기>는 맞는데, <걸리버 여행기>가 아닌 책이란 것이다. 하긴 홍길동이 난데 없이 등장했으니 분명 그럴 수밖에 없긴 할 것이다. 그렇다면 걸리버는 홍길동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그것까지 다 까발린다면 그냥 '스포일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 책을 읽는 독자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풀어가게 될 흥밋거리로 남겨두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니 이쯤 해서 그만하려 한다.

다시 최남선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최남선은 애초에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 선 위인이기도 하다. 당시 상당수의 '근대화에 애쓴 인물들'이 죄다 '친일매국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정말 안타깝지 그지 없지만, 그 당시의 현실을 감안하면 '쇄국이냐, 개항이냐'를 두고 논박을 이어나가던 상황이었으니, 그들 눈에는 '외세의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 꽉 막힌 조선의 문을 열고 더욱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할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이런 행보를 걸은 최남선은 당시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신문물'을 맛볼 수 있는 '세계문학전집(총10권)'을 구상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껄리버 유람긔>(거인국)였던 것이다. 하지만 최남선은 이 책 한 권 달랑 써내는 데 그쳐버리고 말았단다. 당시 혼란하고 급변하던 정국에서 뭔들 제대로 돌아갔을 턱이 있겠는가. 그러다가 훗날 새롭게 출간한 '세계문학'이 있었는데, 그때 '제2권'으로 <홍길동전>을 소개했었다고 한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바로 이 책의 저자 김연수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숱하게 많은 <걸리버 여행기>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걸리버 여행기>를 창작해낼 원동력이 되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원래 <걸리버 여행기>의 핵심은 '정치풍자'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정치풍자'는 쏘옥 뺐다. 애초에 최남선이 펴낸 책조차 그런 '정치풍자'의 내용은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상당부분 덜어내었다. 대신 '세태풍자'로 두루뭉실 넘기더니 '인간 본연의 욕망'이 드러내는 어두운 면은 신랄하게 비난하던 것에 편승해서 살짝 수위는 낮춰 누가 읽더라도 재미와 흥미를 잃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한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이는 최남선이 참고했다는 '일본어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도 '정치풍자'의 내용은 부담스러웠는지 '천공성'과 '마인국' 편은 뒤쳐내지 않았고, 당시 권력자들의 허세를 신랄하게 비난하던 내용도 대부분 삭제한 채 출간했더랬다. 그래도 천재와 신동 소리를 밥 먹듯이 듣던 최남선이었기에 '영문판'을 읽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니 그도 '원본'의 내요이 어떠한지는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어린이(청소년)에게 읽혀서 좋지는 않겠다 싶어서 자체적으로 들어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이 책도 '정치풍자'적인 내용은 그닥 들어내지 않았다. 다만 '걸리버'가 우리 미래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칠 위인이라는 점을 '홍길동'의 말을 빌어서 강조하는 방식을 썼다. <홍길동전>의 주제도 세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적서차별'을 시작으로 '능력'이 있어도 '신분'이 따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세상에 대한 한 맺힌 목소리를 담아내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꾼 위인으로 '홍길동'을 거론하기도 한다. 정작 홍길동은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마찬가지로 '걸리버'도 허구 속 인물이긴 하지만 '위인'으로 삼을 만하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이것이 '문학이 지닌 힘'이다. 비록 현실세계에서 있지는 않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를 통해서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대에 걸맞는 이야기가 꾸준히 새롭게 창작되어야 할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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