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3 : 어머니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3
조익상 글, 이도현 그림, 박선영 감수, 손영운 기획, 막심 고리키 원작 / 채우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3 : 어머니>  막심 고리키 / 손영운 / 조익상 / 박선영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XVII / 채우리 25번째 리뷰] 막심 고리키가 쓴 <어머니>는 유명하지만, 막상 읽은 독자들은 그닥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러시아 혁명(볼세비키)'이 일어나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탄생하는데 크게 기여한 소설이자, '사회주의 실현'에도 크게 기여한 소설이기 때문에 '공산당'에 크나큰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 독자들이 거리낌 없이 손을 대기에 어려운 소설이기 때문이다. 허나 막상 읽어보면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주인공 파벨을 중심으로 "노동자에게 권력을! 농민에게 땅을!" 돌려달라며 혁명을 이끌어나가는 주동적 인물들 모두가 '지극히 당연한 인권'을 존중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너무도 인간적인 내용에 큰 감동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벨의 어머니는 '사회주의'인지, '공산주의'인지 아무 것도 몰랐지만, 아들(파벨)과 함께 혁명을 꿈꾸고, 차르 정부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저항을 하는 이들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며,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차츰차츰 깨닫게 되면서, 나중에는 감옥에 들어간 아들을 대신해서 '전단'을 나르고, 쫓기는 혁명 '동지'들을 감추고 돌봐주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우리네 민주투사들의 모습과 상당히 겹쳐 보이기도 한다. 4·19 혁명과 5·18 민주화 운동, 그리고 6월 항쟁과도 일맥상통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리고 평화시장에서 어린 여공들이 받던 부당한 처우를 시정해달라고 요청한 '전태일 열사'의 모습도 떠오르게 될 것이다. 1900년대 당시 '제정 러시아'도 딱 그랬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면서 벌어들인 이득을 '산업혁명'에 재투자하며 더 많은 수익을 챙기자 당시 왕과 귀족, 그리고 사제 같은 '고위 계층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호의호식을 하며 살았더랬다. 거기에 초기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급성장한 '자본가'들은 공자에 기계를 가동시키며 노동자들은 하루 14~16시간의 노동을 요구했고, 심지어 20시간이 넘는 노동도 강요하면서 월급은 정말이지 쥐꼬리만큼 주었고, 병들거나 다쳐서 일을 하지 못하면 돌봐주기는커녕 '새 노동자'로 교체하고서 아무런 보상도 없이 해고를 남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쥐꼬리만한 월급일망정, 그조차 받지 못할까봐 사장(자본가)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고된 노동을 이어갈 뿐이었다. 농촌도 지주들의 횡포에 땅을 빌리지 못해 굶주리는 농민들이 허다했고 말이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력 1905년 1월 9일' 일요일에 20만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차르 황제의 궁전을 향해 행진을 했다. 자본가들의 몰염치한 행동에 성난 노동자들은 차르 황제가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고, 굶주리는 노동자들을 위해 빵도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전 앞에서 이들을 마중 나온 이들은 황제의 궁전을 지키는 군대였다. 마침 차르는 외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성난 군중들은 차르가 없는 궁전 앞에서 애원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총알세례였다. 이 사건이 '피의 일요일'이었고 이때 죽고 다친 러시아 민중이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끔찍한 사건을 지켜본 이가 바로 '막심 고리키'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였지만, 이때 '엄청난 괴로움'을 맛본 그는 '막심(엄청난) 고리키(괴로움, 고통)'를 필명으로 삼고 <어머니>를 집필한 것이다.

이 책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가난과 남편의 폭력으로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던 어머니가 엉망이 된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아들을 지켜보다 점차 '혁명가'로 변해 가는 과정을 그린 뛰어난 작품이라고들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소설은 러시아에 '혁명'과 노동 운동'을 선사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전세계 혁명가들이 자본주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실제로 소비에트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사회주의 혁명'에 초석을 다진 작품으로 추앙 받기도 했다. 더구나 소설의 제목인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 주부에서 혁명가로 변신한 파벨의 어머니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혁명동지들 '모두의 어머니', 더 나아가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고, 소설속에서 파벨이 겪는 고통과 고난을 '그리스도가 겪은 고난'으로 비유하게 되면서 파벨의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고리키는 이 모든 의미를 다 담아서 <어머니>로 불렀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메이데이'로 부르는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노동절)'이다. 시작은 미국의 노동자들이 큰 희생을 치르고 난 뒤에 전세계에서 그 의미를 새겨 총파업을 거행한 날, 5월 1일을 기념일로 삼았지만, 정작 '노동절'의 발상지인 미국에서는 소련과 똑같은 날을 기념할 수는 없다며 9월로 날짜를 옮겨버리고 말았다. 우리 나라도 날짜까진 바뀌지 않았지만, 박정희 정권 때 '노동절'이란 명칭을 대신해서 '근로자의 날'로 바꿔버리고 말았다. 역시나 북한을 의식해서 '인민'이니 '노동'이니 하는 낱말을 쓰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회분위기 덕분에 우리는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도 마음껏 읽지 못하는 분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작이 바로 이 소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로 가슴 설레게 만든다. 그리고 파벨과 그의 어머니가 겪는 고통과 고난에 감정이입을 하며 열렬히 응원하게 되고, 파벨이 꿈꾸는 혁명이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기도 한다. 왜냐면 파벨이 꿈꾸던 것이 사실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억압 받지 않고 인간다운 대우를 받으면서, 열심히 노동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것을 현재를 사는 우리는 정말 잘 알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착하고 부지런한 노동자와 농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본가'와 그들을 옹호하는 '권력자'들의 부정부패가 진정한 사회 문제라를 사실도 너무 잘 알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런 문제들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비롯해서 전세계 민주국가에서 '마땅히 보장 받아야 할 마땅한 권리'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단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명칭이 나오고, 실제로 '공산주의 정권'에서 호평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어머니>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에 필적하는 우리 소설 강경애의 <인간 문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에도 그런 이유를 들이대려고 하는가? 아닌 게 아니라 내 어릴 적 학교선생님 가운데 <난쏘공>에 대해 유난히 비난을 일삼고 학생들에게 읽지 못하게 강변하던 분이 계셨다. 당시엔 그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지만, 그 책의 내용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선생님도 그리 많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오직 딱 한 분만이 <난쏘공>에 대한 풀이를 넋두리처럼 읊어주시던 기억이 나는데, 워낙 횡설수설하며 요점정리를 하지 못하셔서 무슨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때가 전두환 정권이라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어머니>와 <인간 문제>, <난쏘공>을 모두 읽어보았지만 딱히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발견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깊은 고뇌를 할 뿐이었고,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방치하는 사회는 오래 존속 되지 못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투쟁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함께 깨우치게 되었다. 이는 우리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 나라의 노동자와 농민들도 똑같은 길을 걸었다.

그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알아 두는 것이 좋다. 막연하게 둘이 똑같으며 '북한'과 연관 되어 있으니 무조건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없어 보이지 않은가? 먼저 반대말부터 알면 이해가 빠르다. 사회주의의 반대는 '개인주의'이고, 공산주의의 반대는 '자본주의'다. 그럼 사회주의는 '공동체주의'로 이해할 수 있고,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이 아닌 '공유재산'만을 인정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모두가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는(공유하는) 사상'이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인 것이다. 둘의 차이점은 사회주의는 '과정'이고, 공산주의는 '최종 목적지'라고 보면 좋다. 그렇기에 진정한 '공산주의 국가'는 지구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고, '공산국가'라고 말하는 나라들은 이 세상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지 그런 이념을 지향할 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도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산당(공산주의) 선언'을 하며 전세계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주장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했다.

그렇기에 지금 전 세계에서 '공산국가'를 꿈꾸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이들은 '독재자가 싫어요'라는 말을 해야 할텐데, 이를 살짝 변형시켜 "(내가 원하지 않는) 권력자가 싫어요. 그러니 내가 싫어하는 이들은 다 공산당이고 빨갱이어야만 해"라고 억까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정말 수준 떨어지는 족속들이다. 이런 무지한 이들이 '사회'나 '공산'이라는 말만 나오면 거품을 물고 막되먹은 소리로 요란을 떠는 꼬락서니가 정말 꼴불견일 따름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분들 가운데 '사회주의 계열'도 상당히 많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둔 '홍범도 장군'과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도 바로 그 사회주의 노선에서 열성을 다해 조국의 독립을 꿈꿨던 분들이다. 이런 분들이 일제의 탄압과 매국노와 변절자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소련 연해주와 중국, 만주 등지에서 목숨을 걸고 일제에 저항하신 분들 아닌가 말이다. 우리가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이들의 업적을 제대로 논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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