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유람기
김연수 지음, 강혜숙 그림, 조너선 스위프트 원작 / 대한출판문화협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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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늬버 유람긔 : 걸리버 유람기>  조너선 스위프트 / 김연수 /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My Review MMCXIV / 대한출판문화협회 1번째 리뷰] <걸리버 여행기>는 워낙 많이 읽었기 때문에 특별할 것이 없을 정도지만, '제목'이 참 옛스러워서 꺼내들었다. 문득 '신사유람단'이 떠올랐는데, 아닌 게 아니라 최남선이 우리 나라 최초로 <걸리버 여행기>를 뒤쳐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최남선은 특이하게 '소인국'이 아니라 '거인국'부터 썰을 풀어낸 뒤, 나중에 '소인국'도 써냈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순서에 맞게 고쳐 '알사람 나라 구경', '왕사람 나라 구경'이라고 풀어서 썼다. 하지만 아쉽게도 최남선도 '소인국과 거인국' 편만 뒤쳐내는데 그쳤다고 한다. 그럼 그 뒤의 이야기는 '어떻게' 썼을까? 그게 이 책을 읽는 핵심일 것이다.

사실, '알사람'과 '왕사람' 나라의 이야기는 크게 주목할 것이 없다. 단지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으로 넘어가던 시기의 어투로 익살 맞게 풀어 쓴 노력이 엿보이긴 하지만, 애초의 '원작 내용'을 익히 알고 있는 현시점에서 보자면 그저 '축약본의 내용'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날사람 나라 구경'과 '말사람 나라 구경'은 완전히 새로 창작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완연한 특색을 드러냈다. 앞서 나왔던 '최남선이 구연한 어투'에서 벗어나 '현대말(어투)'로 고쳐 쓰면서 주위환기를 시키더니 줄거리도 과감하게 들어낼 것은 들어내면서 빠르게 진행하더니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등장인물'을 하나 등장시켰다. '날사람 나라'에서 걸리버의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일본'을 거쳐 지나가면서 잠깐 '율도국'을 찍고 간다는 설정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 율도국에서 누굴 만났겠는가? 바로 '홍길동'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걸리버가 정상적인 율도국 방문은 아니었지만, 홍길동이 누군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신출귀몰한 초능력의 소유자 아니겠는가. 그러니 걸리버가 일본에서 서쪽으로 향하면서 그 사이 어디쯤엔가 있었다던 '율도국'을 방문했다는 것이 그리 크지 않은 어색함이었기에 큰 무리도 없었다. 그런데 '말사람 나라 구경'을 하면서 홍길동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책에서는 '말사람 나라'의 이야기도 대폭 축약해서 빠른 속도로 진행한다. 그 결과 걸리버는 후이늠 사회에서 추방을 당할 바에야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그렇게 죽었으면 이야기는 끝이 났을 텐데, 난데 없이 홍길동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딴 데로 새고 만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렇게 딴 데로 새는 바람에 이 책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조나단인지, 조너선인지, 암튼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걸리버 여행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분명 <걸리버 여행기>는 맞는데, <걸리버 여행기>가 아닌 책이란 것이다. 하긴 홍길동이 난데 없이 등장했으니 분명 그럴 수밖에 없긴 할 것이다. 그렇다면 걸리버는 홍길동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그것까지 다 까발린다면 그냥 '스포일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 책을 읽는 독자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풀어가게 될 흥밋거리로 남겨두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니 이쯤 해서 그만하려 한다.

다시 최남선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최남선은 애초에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 선 위인이기도 하다. 당시 상당수의 '근대화에 애쓴 인물들'이 죄다 '친일매국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정말 안타깝지 그지 없지만, 그 당시의 현실을 감안하면 '쇄국이냐, 개항이냐'를 두고 논박을 이어나가던 상황이었으니, 그들 눈에는 '외세의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 꽉 막힌 조선의 문을 열고 더욱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할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이런 행보를 걸은 최남선은 당시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신문물'을 맛볼 수 있는 '세계문학전집(총10권)'을 구상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껄리버 유람긔>(거인국)였던 것이다. 하지만 최남선은 이 책 한 권 달랑 써내는 데 그쳐버리고 말았단다. 당시 혼란하고 급변하던 정국에서 뭔들 제대로 돌아갔을 턱이 있겠는가. 그러다가 훗날 새롭게 출간한 '세계문학'이 있었는데, 그때 '제2권'으로 <홍길동전>을 소개했었다고 한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바로 이 책의 저자 김연수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숱하게 많은 <걸리버 여행기>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걸리버 여행기>를 창작해낼 원동력이 되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원래 <걸리버 여행기>의 핵심은 '정치풍자'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정치풍자'는 쏘옥 뺐다. 애초에 최남선이 펴낸 책조차 그런 '정치풍자'의 내용은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상당부분 덜어내었다. 대신 '세태풍자'로 두루뭉실 넘기더니 '인간 본연의 욕망'이 드러내는 어두운 면은 신랄하게 비난하던 것에 편승해서 살짝 수위는 낮춰 누가 읽더라도 재미와 흥미를 잃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한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이는 최남선이 참고했다는 '일본어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도 '정치풍자'의 내용은 부담스러웠는지 '천공성'과 '마인국' 편은 뒤쳐내지 않았고, 당시 권력자들의 허세를 신랄하게 비난하던 내용도 대부분 삭제한 채 출간했더랬다. 그래도 천재와 신동 소리를 밥 먹듯이 듣던 최남선이었기에 '영문판'을 읽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니 그도 '원본'의 내요이 어떠한지는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어린이(청소년)에게 읽혀서 좋지는 않겠다 싶어서 자체적으로 들어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이 책도 '정치풍자'적인 내용은 그닥 들어내지 않았다. 다만 '걸리버'가 우리 미래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칠 위인이라는 점을 '홍길동'의 말을 빌어서 강조하는 방식을 썼다. <홍길동전>의 주제도 세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적서차별'을 시작으로 '능력'이 있어도 '신분'이 따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세상에 대한 한 맺힌 목소리를 담아내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꾼 위인으로 '홍길동'을 거론하기도 한다. 정작 홍길동은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마찬가지로 '걸리버'도 허구 속 인물이긴 하지만 '위인'으로 삼을 만하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이것이 '문학이 지닌 힘'이다. 비록 현실세계에서 있지는 않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를 통해서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대에 걸맞는 이야기가 꾸준히 새롭게 창작되어야 할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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