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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ㅣ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12
어네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홍택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1년 9월
평점 :
품절
앞서도 여러 번 밝혔지만, 문학적 소양을 넓고 깊게 하기 위해서 '같은 책'을 '여러 출판사'의 책으로 읽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같은 듯' 하지만 책마다 조금씩 '다른 점'을 발견하곤 하지만, 그 다른 점을 가지고 이렇다저렇다 할 깜냥이 나에게 '있는냐?'고 되묻곤 한다. 혹여나 '나만의 착각'은 아닐런지 조심스러워지고 어줍잖은 실력으로 '섣부르고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도 던지곤 한다.
요컨대, <위대한 개츠비>를 예로 들자면, 대다수의 평론가들은 작가인 '피츠제럴드'의 신분상승 욕구를 반영하여 소설을 쓴 탓에 '개츠비'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데이지라는 부잣집 여자를 꼬시려했다며, 그의 욕망에 주목하고 있고, 다수의 독자들은 남편의 불륜을 알고 상심한 데이지 앞에 첫사랑이 나타나자 다시 불 같이 타오르는 불륜녀를 꼬시려하는 찌질남(그만한 재력으로 고작 유부녀에 올인하는 멍청이라면서 말이다)으로 보았지만, 나는 개츠비의 사랑이 '순수, 그 잡채'라고 평가하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개츠비의 삶'이 신분상승이나 재산을 모으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데이지'라는 여성에게 쏟아부으면서 '미완의 첫사랑'을 '완벽한 사랑'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순수함이 바로 '개츠비식 사랑'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재즈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급작스런 경제부흥으로 쌓은 부를 누구라도 흥청망청 쓰던 시대였는데, 개츠비는 당대 '최고의 파티'를 주최하면서도 단 한 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는 말짱한 정신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무던히도 애를 썼기 때문이다. 모두가 취해버린 와중에도 홀로 말짱한 정신으로 그가 하는 일이라곤 강 건너 '데이지의 집'을 가리키는 녹색 등대였으니 말이다.
암튼, 내 방식대로의 해석이 당연하게도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의 견해도 따르지 않는 '나의 해석'이 색다른 흥미를 불러일으켜 '꾸준한 독서'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음을 밝힌다. 고로 나의 리뷰를 누가 읽어주면 더할나위 없이 고맙지만, 딱 잘라 외면을 당한다하더라도 '결코 멈추지는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적어도, 스스로 싫증이 나거나 더는 해석할 능력이 안 된다고 느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또다시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쿠바의 어느 바닷가에 84일 동안이나 쌩꽝을 친 늙은 어부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 어부가 너무 늙었고, '운'도 다했기에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거라며 수근거렸고, 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매일 같이 큰물고기를 낚을 채비를 하고 바다로 나갔다. 이런 어부의 곁을 지켜주는 이는 작은 소년 하나 뿐이었다. 소년은 물고기를 잡는 법을 늙은 어부에게 배웠고, 얼마 전까지도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지만, 허탕을 치는 나날이 늘어나자 소년의 부모가 '다른 배'를 타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은 부모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다른 배를 타고 물고기잡이에 나섰지만,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늙은 어부의 시중을 들며 곁을 지켜주며 말벗을 해주곤 했다.
그날도, 늙은 어부와 소년은 맥주 한 잔과 커피 한 깡통을 마시며 수다를 안주(?) 삼아 물고기잡이 채비를 함께 하고 있었다. 노인은 그런 소년이 기특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벌써 세 달째 꽝을 친 덕분에 가진 것이라곤 별로 없어서 오히려 소년이 미끼로 쓸 정어리를 챙겨주었다. 오늘은 행운이 가득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소년 없이 홀로 늙은 어부는 출항을 했다. 날씨는 좋았고 태풍은 서너 날이나 지나야 찾아올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면서 말이다.
자, 중간생략을 하고, 노인은 드디어 '큰물고기'를 낚시줄에 거는 것에 성공했다. 노인의 실력이 아직 줄어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물고기가 늙은 노인의 배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었다. 배보다 더 큰 물고기를 낚다니, 노인은 단번에 뱃전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큰물고기와 팽팽한 싸움을 벌이며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물고기는 수면으로 오르지도 않고 더 깊이 내려가지도 않으면서 늙은 어부와 힘겨루기를 하더니 급기야 '노인의 배'를 끌고 '먼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북서쪽으로, 다음엔 북쪽으로,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물고기는 자신의 덩치와 힘을 증명이라도 하듯 노인의 배를 끌고 이러저리 나아갔다.
노인도 만만치 않았다. 놈의 입에 걸린 낚시바늘이 빠지지 않게 재빨리 낚싯줄을 '한쪽 어깨'에 둘러매고서 몸을 기둥 삼아 버티면서 '두 손'으로 단단히 고쳐쥐고서 물고기와 힘겨루기를 했다. 물고기의 미끼와 함께 낚시바늘을 삼킨 것이 '한낮'이었는데 벌써 해가 저물어가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반나절이나 '두 손'으로 버텼으니, 결국 '노인의 왼손'에 쥐가 나서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재빨리 낚싯줄을 오른쪽 어깨로 고쳐매고서 오른손으로 단단히 쥐었지만, 왼손에 난 쥐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노인은 큰물고기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며 이틀 낮밤은 꼬박 새운다. 그러다 사흘째, 큰물고기의 힘도 다했는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게 되었고, 노인은 노련한 솜씨로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물고기를 뱃전에 낚아올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만선의 기쁨을 간직한 채 항구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폭풍우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도 늙은 어부는 항구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항구가 내뿜은 빛을 찾아내고 반드시 돌아갔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엔 너무 멀리 온 것이 문제였다. 큰물고기(머린, 청새치과 몸집이 큰 다랑어 종류)에게 끌려다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요령껏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 오랜만에 찾아온 행운에 기쁨을 만끽한 덕분인지 그만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배보다 더 큰 큰물고기를 요령껏 배옆에 단단히 묶어두고 곧장 항구로 향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생명을 잃은 다랑어의 비린맛을 맡은 것인지, 상어가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노인은 첫 번째 상어를 보기 좋게 물리쳤지만, 다랑어의 1/3을 낼름 뜯어가버린 뒤였다. 두 번째 상어의 공격은 더 거셌다. 살점이 뜯긴 다랑어가 흘린 피냄새를 맡고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노에 칼을 매달고서 상어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또다시 다랑어의 살점은 뜯겨져버린 뒤였다. 기진맥진해진 노인은 세 번째 상어떼의 공격을 받았고, 이전 싸움에서 칼을 잃어버린 노인은 배 뒷전의 키를 뜯어내어 휘두르며 겨우 상어떼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노인도 다랑어도 기진맥진해서 더는 싸울 힘도 없었고, 마지막 상어떼의 공격은 그저 견디면서 항구로 달아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결과, 다랑어의 살점은 상어가 다 뜯어가버렸고, 남은 것이라곤 단단한 대가리와 꼬리 뿐이고, 그 사이에는 굵지만 앙상한 뼈만 남아버렸다. 노인은 그 장면은 보고서 허탈해할 뿐이다. 모처럼 찾아온 행운이 다 날아가버린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행운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비참함마저 느껴버렸다.
드디어 도착한 늙은 어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배를 모래사장에 끌어올렸고, 돛을 정리해 어깨에 들쳐매고서 집을 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쓰러지듯 엎드려 낚싯줄에 쓸리고 상어의 이빨자국이 선명한 손바닥을 하늘을 향한 채, 날짜가 지난 신문지를 몸에 덮고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에 노인의 곁에서 울먹이는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노인이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뒤 안심했지만, 노인의 손바닥을 본 뒤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노인의 배 앞에서 웅성거리는 것도 보았다. 소년은 이미 보았던 장면이다. 엄청나게 큰 물고기의 잔해(?)가 노인의 배에 단단히 묶여있는 것을 보면서, 노인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기에 경탄을 금치 못한 웅성거림이었다. 그 사이 노인은 깊은 잠에 빠져든다. 작가는 그 꿈을 '사자의 꿈'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치고는 비교적 짧은 소설이지만 '읽는 맛'은 최고다. 헤밍웨이의 문장이 간결하면서 힘찬 남성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를 '하드보일드'라고 지칭하지만, 나에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왜냐면 내 눈에 띤 매력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소년의 믿음'이다.
소설속에서 소년의 '주위 어른들'은 노인이 어부로서 '은퇴'해야할 시점이라고 수근거리길 망설이지 않는다. 나이도 적지 않고 84일째 쌩꽝을 치면서 실력조차 '증명'이 된 셈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늙은 어부의 실력은 마을사람들이 다 아는 바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젊은 덩치와 한 '팔씨름 대결'에서 대역전극을 펼쳐내 유명세를 떨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은 늙은 어부의 '실력'을 크게 의심치는 못하고서 '행운'이 다했다고 떠벌린 것이다. 그래서 소년의 부모도 더는 늙은 어부와 함께 배를 타지 못하게 한 것이다. 84일간의 쌩꽝이 그 불운의 증거라면서 말이다. 늙은 어부도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자신조차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좀처럼 큰물고기를 낚아내지 못하고 있으니 변명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소년은 자신에게 '낚는 법'을 가르친 늙은 어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실력도 좋고, 행운도 가득하니 언제고 다시 '큰물고기'를 낚아낼 거라 믿었던 것이다.
소년이 늙은 어부를 '믿어 의심치 않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건 소년의 눈에 비친 '찐실력'이었을 것이다. 그건 소년이 '다른 배'를 타고 '물고기'를 낚아올리면서 더욱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언급은 하지 않지만 '다른 배'의 어른들의 실력이 그닥 좋지 않음을 한 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형편없는 실력에도 큰물고기를 척척 낚아내는 것을 본 소년은 그들이 운이 좋았을 뿐, '찐실력'을 갖추진 못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일테다. 흔히 '어린이의 눈'에는 거짓도 없고 순수하기 그지 없다고 표현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니 소년은 딱 알아본 것이다. '노인의 실력'은 아직 죽지도 낡지도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단지, '운'이 따르지 않아 '꽝'을 치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런 소년의 믿음은 맞아떨어졌다. 앙상한 뼈밖에 남지 않은 물고기의 위용이 바로 그 증거다. 그것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을 때, 자신이 함께 할 수 없었다는 것이 한없이 미안했기에 소년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구도 도움도 없이 그 큰물고기를 기어코 낚아올린 늙은 어부는 또 얼마나 자랑스럽냔 말이다. 그 증거는 바로 '손바닥'이다. 망신창이가 된 그의 손바닥을 보면서 '그날'의 긴박한 현장이 생생히 그려진 탓에 소년은 또다시 눈물을 흘린다. 이번엔 감동 섞인 울음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눈물을 멈추게 한 것은 마음사람들의 입벌어지게 만드는 칭찬과 감탐이었다. 그제서야 소년은 눈물을 멈추고 한껏 미소는 짓는다. '내 말이 맞았잖아요'라는 외침이 환한 웃음과 함께 온동네에 울려퍼질 듯이 말이다.
이제 늙은 어부는 '사자의 꿈'을 꾼다. 언제 깨어날지는 몰라도 사냥을 마치고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는 동물의 왕, 사자처럼 기나긴 낮잠을 즐길 것이다. 다시 해 질 녁이 되어 큰물고기들이 활동을 시작하면 늙은 어부도 다시 깨어날 것이다. 비록 지쳐쓰러져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지만 '소년의 믿음'을 배신하진 않을 것이다. 다시 깨어나 소년의 기대에 응답할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자라나 '최고의 어부'가 될 것이다. 소년에게 꿈과 희망이 되어준 '늙은 어부'가 소년과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