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박정은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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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인문학책으로 세 가지 논점에서 '인간다움'을 논하고 있다. 1부에선 '코로나 시대'를 맞아 달라진 일상을 맞이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그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기로움을 이야기했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어쩌면 불편한 주제인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마지막 3부에서는 '낯선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방법론을 고찰하고, 대립과 갈등이 아닌 '공존'을 모색하는 마당을 제시했다.

 

  지은이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고 있으며, 현재는 이탈리아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책을 쓸 당시에는 '로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그리고 수녀이며 학자다. 미국 홀리네임즈대학의 영성학 교수라고도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이 다분히 '종교적'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딱히 주제가 종교적이지는 않았다. 책제목조차 '인간다움'이 적혀 있으니 말이다. 그저 시종일관 '인간'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이다. 딱히 어느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논하지 않는 것이 퍽 맘에 들었다.

 

  책 속에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주제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였다. 나는 '남성'이면서 동시에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많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나에게 "남자는 페미니즘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고 공격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난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이라 얘기하지 않는다. 솔직히 까놓고 얘기를 한다면, '페미니스트'는 다분히 '백인여성만을 위한 이상주의자'로 백인여성이 아닌 유색인에 대한 편견도 심하며, 남성들은 모두 성범죄자, 아니면 예비 강간범 취급을 하는 지독한 편견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여성들이 나를 '페미니스트'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는 큰 반감이 없다. 나는 차라리 '여성주의자'라고 불리우고 싶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이를 '문제시'하고 바로 잡기 위해 운동을 펼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그런데도 그런 불평등을 눈앞에 두고서도 여성을 위한 정책을 마련할라치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느니, 남성과 여성을 '편가르기'하려는 모략이라느니...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일삼는 인간답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아주 가관일지경이다. 여성에 대한 우대정책이라고 여겨진다면 '당신네 엄마를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억울하진 않을 것 아닌가. 그리고 당신의 아내와 딸이 살아갈 사회인데, 차별로도 모자라서 모멸감을 느낄 정도의 엉망진창인 사회시스템을 계속 유지하자고 고집부릴 셈이냔 말이다. 당장 '남성'들이 손해를 보는 정책일 것 같아도 큰 그림으로 보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일뿐인 것이 훨씬 더 많다. 왜 그런 '최소한 것'조차 열린 마음으로 남성과 여성이 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단 말인가.

 

  여성 운동은 좁게 보면 '유리천장'을 없애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론 '양성평등'을 이루어 남녀차별이 없어진 세상을 만들어 '운동, 그 잡채'를 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세상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 운동'은 여성만이 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남성도 동참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페미니즘'이란 명칭을 빼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복잡하다 못해 난잡해진 개념을 다시 '단순화' 시킴과 동시에 '누구'에게나 열린 운동으로 다시 시작하기 위함이다. 물론, '여성 운동'이란 명칭도 이미 어디선가 쓰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운동가'들이 이미 활약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운동을 여자만의 전유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런 편협함을 깨고 '남성'도 동참할 수 있는 진정한 여성주의운동으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꼭 그래야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인간다움'을 이런 관점에서 출발하면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남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도 힘든 상황이지만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이다. 제주도에 낯선 이주민이 왔을 때도, 일각에선 '종교적 배타성'을 앞세워 예멘 난민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날선 주장을 했지만, 그들이 체류하고 있던 30일 남짓한 기간동안 많은 제주도민들이 그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며 잠시나마 평안함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는 소식을 듣고, 새삼 '인간다움'을 느꼈을 것이다. 심지어 AI가 지배할 미래에도 '인간다움'은 필수조건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러면서 AI가 '인간다움'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들이 인간세상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도 담았다. 하긴, '인간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입력했다고 하더라도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AI가 인간을 어찌 대할지 우려스럽기도 하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리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살아간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나도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곤 한다. 그러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곤 한다. 마치, 깨끗한 공기를 당연하게 여기다가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나서야 콜록거리며 괴로워하다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공기'도 '인간다움'도 청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다운' 당신의 도움이 절실하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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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나라 경제툰 - 만화로 배우는 돈의 원리 한빛비즈 교양툰 21
무선혜드셋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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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하는 착각이지만, '경제공부'를 하는 목적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선 '부의 축적'이 필수조건일 수는 있겠지만, [부자=행복]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게다.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한 경제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의외로 우리는 '경제공부'에 대해서 꽤나 문외한이라는 것을 쉬이 느끼곤 한다. 돈을 벌고 싶다면서 '투자'와 '투기'의 차이점도 이해하지 못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며 '로또'에 전재산을 올인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출(빚)'까지 얻어서 몰빵을 하는 등 어리석은 짓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몰이해'를 이용한 보이스피싱 같은 사기범죄에 곧잘 속아넘어가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손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둥, 어렵게 모은 재산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둥...조금만 상식적인 판단을 하면 '사기범죄'라는 것을 인지하고 당하지 않을텐데도 여전히 당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경제공부가 더욱 필요한 법이다. 또한, 경제상식이 풍부한 사람은 당연히 부자일 거라는 오해도 곧잘하곤 한다. 경제상식을 잘 알고 있으면 '유용하게' 써먹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왕창 벌 수 있는 비법을 혼자만 알고 있다거나, 재벌을 능가하는 재산을 '한 방'에 모을 수 있는 방법은 단언컨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전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다거나 전세계 사람들을 가난으로 몰아넣는 '범죄자'임에 틀림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부자가 되는 방법은 있을지 몰라도 '한 방에' 부자가 되는 비법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란다. 그리고 또 다시 말하지만, 모든 부자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너튜브로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것 같아도 놀고 먹을 수준은 아니다. 인별그램 속의 세상이 아름답고 부티나서 부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카메라 각도 조절를 조금만 바꾸어도 '실속'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본인의 삶'을 인별그램에 올리면서 더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주식이나 코인에 투자해서 엄청난 수익을 챙겼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있지만, 한 순간일 뿐, 몇 달 지나면 '연락두절'이 되는 경우가 흔해 빠졌다. 개미들의 주식투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수익을 보더라도 '보너스' 정도의 개념으로 이해해야지 생업을 팽개치고서 뛰어들만한 것이 절대 못 된다는 사실도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자, 이 정도의 상식을 알았다면 이제 제대로 '경제공부'를 해보자. 머리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이 책, <개미나라 경제툰>은 경제공부를 손쉽게 도와주는 유익한 책이다. 그동안 경제공부가 힘들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후속작도 나올 것 같으니 '경제교과서'로 삼아도 좋을 듯 싶다. 그래서 난 이 책으로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경제공부는 그 어떤 공부보다 '조기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경제감각'이 없다면 꽤나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40대 이상인 분들이 그렇다. 7080년 세대들은 공부는 죽어라했으면서도 정작 '경제공부'는 해본 적이 없기에 경제적인 호황을 맞아 죽어라 돈 벌어서 흥청망청 쓸 줄만 알지 제대로 돈을 버는 '투자방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신용카드가 처음 나왔을 때도 '카드깡'이라는 잘못된 방법으로 빚에 허덕이고 말았고, 주식투자의 바람직한 방법을 익히기도 전에 '몰빵'을 하다 어렵게 모은 전재산을 탕진하는 등 우여곡절도 참 많은 세대들이었다. 적어도 밀레니엄 세대들에겐 이런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제공부'는 탄탄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경제책'은 딱딱하고 어렵기만 하다. 경제이론을 설명하고 경제학자를 소개하면서 '경제흐름'을 가르치는 것은 좋은데, 먼 옛날의 경제지식을 달달 외워서 미래에 써먹을 수 있겠냔 말이다. 더구나 경제정책은 하루만 지나도 오락가락하고, 그에 따른 대책이나 대안조차 갈팡질팡하며 혼란스러울 지경인데, 옛날에나 통용될 낡은 지식을 달달 외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차라리 '경제적인 맥락'만이라도 쉽게 알려줘서 '오늘날의 경제흐름'을 아이들이 직접 파악하고, '경제뉴스'를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텐데 말이다.

 

  그래서 이 책에선 그런 '낡은 지식'을 외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기존에 쓰이던 경제용어'를 대신해 '개미왕국'에서나 쓰일 법한 용어로 대신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개미나라에서 쓰이는 화폐는 '사탕'이고, 꿀벌나라에서는 '벌꿀'이다. 왜냐면 개미와 꿀벌에게는 사탕과 벌꿀이 '실물가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서는 '금'일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탕과 벌꿀은 '들고 다니기 힘들다'는 단점 때문에 '돈'이라는 지폐를 만들게 되었다. 또한, 이 지폐를 '은행'이라는 곳에서 언제든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자 수많은 개미들은 '사탕'을 은행에 맡기고 '지폐'를 사탕 대신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은행개미'는 꼼수를 부린다. 수많은 개미들이 '사탕'을 대신해서 '지폐'에 쓰인 숫자를 믿고 거래를 하게 되니, 개미들이 맡긴 '사탕'보다 훨씬 더 많은 '지폐'를 시장에 유통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왜냐면 은행에 한 번 맡긴 '사탕'을 개미들이 바로 빼내어가지 않는다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개미'는 보유하고 있는 사탕보다 훨씬 더 많은 지폐를 찍어내서 시장에 뿌렸다. 그로 인해 경제가 활성화 되고 '경제호황'을 맞이하니 '은행개미'의 개인적인 이득 뿐만 아니라 개미나라의 경제까지 덩달아 좋아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은행개미'가 자신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개미들이 맡긴 사탕을 '제것'처럼 사용하면서 엄청난 이득을 챙기는 것을 다른 개미들이 알게 되자, 수많은 개미들이 너도나도 '은행개미'가 되려고 했고, 그로 인해 은행간 경쟁이 붙어 '실속이 없는 은행'들이 우후죽숙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 수많은 은행에서 저마다 지폐를 발행해서 시장에 유통시킨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말이다. 그러다 문제가 발생했다. 새로 생긴 은행들이 너나할 것 없이 유통시킨 '지폐'를 가지고 은행에서 사탕을 되찾으려 했을 때, 은행이 사탕 지급을 할 수 없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감이 개미들에게 '뱅크런(은행에 맡긴 예금을 빼가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드는 것)'을 유발시켰고, 지급하지 못하는 예금이 발생하자 결국 은행이 망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에 '개미나라 정부'는 은행을 믿지 못해 발생한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보유한 사탕'의 일정액 이상을 대출하지 못하게 만들고, 만약 은행이 망하더라도 '일정금액'까지는 지급을 보장하는 제도를 만들게 된다. 이른바 '예금자보호제도'다. 그렇다면 이런 예금자의 돈을 반드시 지급하기로 만든 제도는 예금자를 위한 제도인 걸까? 곰곰이 따져보면, 예금자보다는 '은행'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면 은행이 망하는 까닭은 '뱅크런'이 생길 때일데, 예금자보호제도를 통해 '뱅크런'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은행은 마음 놓고 '보유한 예금'보다 더 많은 금액을 대출해줌으로써 이익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공부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실제로 벌어지는 사회현상을 보여주며 사회시스템이 돌아가는 '원리'를 설명해주고, 그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어떤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게 만드는 공부 말이다. 바로 이런 공부법이 '감각'을 키워주게 되고, 그 감각을 익혀서 바로 써먹을 수 있게 만드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영어공부를 10년 넘게 공교육에서 배우지만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마는 어리석음을 다른 과목에서도 반복할 수는 없지 않겠느냔 말이다. 또한, 국어공부를 하면 할수록 소설책 한 권 '제 입맛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정답'만 찾으려 하고, '권위자의 해석'에만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도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경제공부는 더욱더 그렇다. 어릴 적부터 '수입과 지출'을 계획적으로 실천하며 '나에게 딱 맞는 소비수준'을 배우고 익혀 습관으로 만든다면, 어른이 되어서 경제활동을 잘 할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경제정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떤 도움을 받고,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큰 보탬이 될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어른들도 '경제공부'는 필요하다. 부유하게 살아야만 행복하고, 일하지 않아도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비법만을 목이 빠져라 탐구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경제책들이 이렇게 하면 부자가 된다. 저렇게 하면 돈을 쉽게 번다고 현혹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이 한가하게 '책'이나 출간하고 있지 않을 거라는 건 '상식' 아닌가? 그렇게 출간하는 목적 또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행복해지기 위한 경제공부를 하길 바란다. 이 책도 그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떠올리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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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 미국 문학의 꺼지지 않는 ‘초록 불빛’ 클래식 클라우드 12
최민석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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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늦게나마 부족한 '문학적 소양'을 쌓을 요량으로 닥치는대로 고전문학을 섭렵하다보니 결국 '작가의 삶'이 궁금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문학의 배경지식'과 '글쓴이의 뒷이야기'가 더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돌고 돌아 다시 '아르테'의 <클래식 클라우드>를 다시 손에 들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가 애초에 100권을 목표로 잡았다고 해서 '관심도서'에 올려두었는데, 코로나가 대유행을 하고 난 뒤에 뜸해지더니 목표에 다다르기도 전에 멈춰서고 말아서 참 아쉬웠더랬다. 다시 '시작'할 것을 의심치 않으니 더 기다리면서 '완간'을 기원해본다.

 

  작가 분야에서는 코난 도일로 시작해서 헤세와 단테를 지나 네 번째 순서로 '피츠제럴드'를 읽게 되었다. 이 시리즈의 장점이라면 무엇보다도 '작가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을 읽을 수 있어서 '한 편의 기행문'을 읽듯 '견문'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더구나 풍부한 사진이 실려 있어서 '글'로만 남긴 기행문과는 달리 '시각적인 정보' 또한 함께 읽을 수 있기에 막연한 감상이 아닌 '사실적인 느낌'으로 작가의 삶에 다가갈 수 있어서 참 좋다. 뿐만 아니라 '사진' 곳곳에 감춰진 작가의 뒷이야기도 '저자의 세련된 글'을 통해서 접할 수 있기에 견문을 넘어 '풍부한 배경지식'까지 쌓을 수 있기에 좋았다.

 

  그래서 <피츠제럴드>를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피츠제럴드의 소설들은 대부분 '자전적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단언컨대, <위대한 개츠비>를 비롯해서 <낙원의 이편>, <밤은 부드러워>, 그리고 <리츠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등의 단편소설들까지 거의 대부분 피츠제럴드가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대다수의 소설가들이 이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피츠제럴드의 경우엔 좀 특별한 무엇이 있었다. 그건 바로 거의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의 삶은 화려했고, 늘 '사교계'에 주목받는 스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게 바로 이 책에 담긴 '호기심'이었고, 그것이 또한 '매력적인 서술'로 담겨 있었다.

 

  그 가운데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인 개츠비와 작중화자인 닉은 '피츠제럴드'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고 한다. 또 <밤은 부드러워>에서 남자 주인공은 '피츠제럴드'였고, 여자 주인공은 그의 아내인 '젤다'가 모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의 소설 곳곳에서 '피츠제럴드'라는 자신을 등장시키고, 그것이 마치 유명화가들이 그림 속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려넣는 것 같은 '시그니처'처럼 느껴지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평가들은 모두 그가 '심장마비'로 죽고 난 뒤에야 관심을 받게 된 것들이란다. 그의 유일한 히트작은 <낙원의 이편>이라는 장편소설 하나뿐이었고, 너무나도 유명한 <위대한 개츠비>도 그가 죽은 지 10년 뒤에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그의 삶은 '가난, 그 잡채'였다. 더구나 그의 아내 젤다가 '정신병'을 앓고 정신병원은 전전했던 탓에 '병원비'에 쪼들리는 상태였고, 그나마 '원고료'를 받으면 겨우 병원비를 충당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작정 글을 써냈고, '단편소설'도 뚝딱뚝딱 써냈고, 말년엔 헐리우드 상영목적의 대본을 '각색'하는 일에 참여했지만 대부분 '엔딩크레딧'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는 수모(?)를 견뎌야 한다고 했다. 그랬는데도 그는 단 한 번도 '집'을 산 적이 없고, 대부분 월세를 전전하거나 여러 호텔에 투숙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것도 꽤나 유명한 호텔들에서 말이다. 평생 가난했다던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그의 '상승욕구'에서 찾아볼 수 있단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고상하고 품격 있는 집안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품격과는 거리가 멀지만 돈 많은 상인가문이었다고 한다. 피츠제럴드가 어렸을 적에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에에게 곧잘 "나 없었으면 너의 아버지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살았겠니"라는 말을 떠벌릴 정도였다고 하니, 집안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였으니 그가 처음으로 입을 뗀 단어도 '엄마'가 아닌 'UP'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두고 호사가들은 그가 품었던 '상승욕구'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호들갑을 떨곤 한단다. 실제로 피츠제럴드는 작가로 성공해서 부자가 되어 '화려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그가 그런 의지를 불태운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의 첫사랑이었던 '지네브라 킹'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라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가난'을 들먹이며 헤어지라고 강요했기에 젊은 피츠제럴드는 '반드시' 부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한편, 첫사랑에 실패한 피츠제럴드는 두 번째 사랑인 '젤다'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또 다시, 젤다의 아버지가 그의 가난을 들먹이며 '파혼'하기에 이른다. 피츠제럴드는 절치부심하여 그의 첫 장편소설인 <낙원의 이편>을 대히트시키며 '유명작가의 대열'에 끼자 젤다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는 피츠제럴드가 유명작가가 된 뒤였고, 엄청난 인세를 챙기던 때였기에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찾아온 행복을 '화려한 삶'으로 보상받으려 했는데, 그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고 한다. 뒤이어 쓴 책들이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출판시장에서도 별로 팔리지 않자 그는 곧 쪼들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의 씀씀이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급기야 아내인 젤다가 정신병원을 전전하게 되니 '막대한 빚'까지 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말년은 호텔이 아닌 여인숙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고, 그가 동경해마지 않던 뉴욕을 떠나야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거물>이라는 작품을 쓰는 도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소설들은 그가 죽고난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고, <위대한 개츠비>는 현재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렇게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지만, 그의 삶은 개츠비가 맞이한 비극과 거의 다를 바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의 책이 이처럼 사랑받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를 더해가고,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묘한 문장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들 한다. 이는 '원작'을 접한 이들이 말하는 공통된 주장이기도 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셀린져, <노르웨이의 숲>의 무라카미 하루키 등 유명작가들의 한결같은 이유다. 물론, 피츠제럴드라면 뭐든 까기만하던 헤밍웨이조차 '그의 문장력'만큼은 인정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극찬의 이유로 [피츠제럴드의 문장은 '중의적 표현'으로 가득하다]고 표현했는데, '원작'을 직접 접할 수 없는 나같은 독자들에겐 참으로 아쉬운 평론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뒤침(번역)'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일반독자들은 <위대한 개츠비>가 왜 '위대한 것'인지 그 까닭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긴, 엄청난 부를 쌓고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 뿐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심지어 그렇게 부를 쌓을 목적이 고작 유부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였으며, 끝내 그녀에게 뒤통수를 맞고 어이 없는 죽음을 맞이했으니...개츠비를 '최고의 찌질남'이라고 평한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영어권에서 'great'의 뜻은 대단하다는 긍정적인 뜻도 있지만 '너 잘났다'는 부정적인 뜻도 내포하고 있기에 개츠비를 향한 두 가지 시선을 '원작'에서는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비영어권에서는 이런 이중적인 표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탓에 독자들이 느끼는 '한계'가 극명할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하지만 '중의적인 표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뒤침책'이라하더라도 <위대한 개츠비>를 곰곰이 곱씹으며 읽다보면, 그 대단함을 엿볼 수 있다. 한 여인을 향한 순정을 품고 '엄청난 부'를 단단히 거머쥐며 '한 시대'를 주름잡은 시대의 풍운아, 개츠비. 그는 온 도시의 유명인사를 쥐락펴락하며 자신의 파티에 끌여들일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정작 그가 가장 원하는 단 한 명을 초대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품고 있다. 그 아쉬움은 바로 '데이지'다. 아름다운 여성이자 개츠비의 단 하나뿐인 사랑이다. 그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부를 쌓은 것도 바로 데이지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렸다고해도 멈출 수가 없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개츠비' 자신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엄청난 자신감 아닌가? 단 한 명의 여자를 위해 온 인생을 건 남자. 그 순수성에 놀라고.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도 오직 자신 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 그 순진함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리고 그가 뿌려대는 엄청난 부에 다시 한 번 놀랄즈음, 교통사고 한 번에 어렵게 쌓아올린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에게까지 '철저한 외면'을 당하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도대체 그의 인생은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살아서는 엄청난 관심을 받던 그가 죽어서는 철저한 외면을 받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아무리 그가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고는 하나 그의 평소의 품행을 보았을 때 '결코 그랬을리 없을거야'라고 믿어주는 친구 한 명이 없다는 사실이 정말로 놀라울 따름이다. 개츠비는 이런 푸대접을 받을 위인이 아니었다. 정작 '살인자'는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개츠비는 그 살인자까지도 품고서 홀로 저 세상으로 가버린다. 그 살인자가 다름 아니라 '단 하나 뿐인 사랑, 데이지'였던 탓에 말이다.

 

  이쯤되면, 긍정적으로돈 부정적으로든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위대한 개츠비>였던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이 책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절대로 그냥 찌질한 남자는 아니었던 탓에 말이다. 그런데 그런 개츠비의 원래 모델이 '피츠제럴드, 자기 자신'이었단다. 엄청난 부를 이루고픈 갈망과 단 하나뿐인 사랑을 되찾고 싶은 욕망을 자신의 소설속에 '투영'시키고 써낸 걸작이었단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갈망과 욕망은 살아생전에는 이루지 못하고 죽고난 뒤에야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로 꼽히게 되었다니, 죽어서나마 그는 만족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아직 접하지 못한 <낙원의 이편>과 <밤은 부드러워>, 그리고 다수의 단편소설들을 읽어보고 싶다. 이런 것이 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읽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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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를 마무리한다.

내년엔 계획대로 '한 살 어려질 것'이다.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마음만이라도 젊어져야 할 것 아닌가.


22년에는 축하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드디어 '100리뷰 출판사(한빛비즈)'도 생겼고,

개인 통산 1500리뷰도 돌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정'을 조금 찾았다는 점을 축하해야 할 것이다.


아직 '고용불안'과 '건강 적신호', 그리고 '부모님 걱정' 등등

여전히 다사다난한 일들이 내년에도 지속될 것 같지만,

심적으로는 부담을 조금쯤 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독서량'과 '리뷰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녀에 찍은 '300리뷰 돌파'는 코로나 여파로 실직과도 같은 일상을 보냈던 탓이다.

할 일이 줄어드니 책만 읽고 리뷰만 쓴 셈인데, 어쨌든 씁쓸한 '기록'이었다.

그 기록이 이듬해 현저히 줄어든 까닭은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한 탓이다.

달라진 생활패턴에 활발히 '적응'하다보니 독서량과 리뷰수가 줄어든 것이다.


그러다 21년에 모진 나날들을 극복하고 야심차게 22년을 맞이했지만

연초부터 '건강 적신호'가 켜지고, 6월 이후에는 '부모님의 와병'이 겹치면서

실직과 투병, 간병과 구직 등등 개인사의 대혼란이 찾아오고 만 것이다.

그래서 6월 이전에는 10리뷰도 제대로 찍지 못했고,

7월 이후에도 '고용불안'으로 독서기록이 들쭉날쭉해진 것이다.


23년에는 다시금 왕성한 독서와 리뷰를 할 작정이다.

새해 목표는, 가을이 오기 전에 150리뷰를 찍고, 겨울에 200리뷰를 돌파하는 것이다.

검은 토끼의 해는 내 독서와 리뷰를 다시 시작하는 '디딤돌'로 삼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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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12
어네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홍택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1년 9월
평점 :
품절


  앞서도 여러 번 밝혔지만, 문학적 소양을 넓고 깊게 하기 위해서 '같은 책'을 '여러 출판사'의 책으로 읽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같은 듯' 하지만 책마다 조금씩 '다른 점'을 발견하곤 하지만, 그 다른 점을 가지고 이렇다저렇다 할 깜냥이 나에게 '있는냐?'고 되묻곤 한다. 혹여나 '나만의 착각'은 아닐런지 조심스러워지고 어줍잖은 실력으로 '섣부르고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도 던지곤 한다.

 

  요컨대, <위대한 개츠비>를 예로 들자면, 대다수의 평론가들은 작가인 '피츠제럴드'의 신분상승 욕구를 반영하여 소설을 쓴 탓에 '개츠비'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데이지라는 부잣집 여자를 꼬시려했다며, 그의 욕망에 주목하고 있고, 다수의 독자들은 남편의 불륜을 알고 상심한 데이지 앞에 첫사랑이 나타나자 다시 불 같이 타오르는 불륜녀를 꼬시려하는 찌질남(그만한 재력으로 고작 유부녀에 올인하는 멍청이라면서 말이다)으로 보았지만, 나는 개츠비의 사랑이 '순수, 그 잡채'라고 평가하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개츠비의 삶'이 신분상승이나 재산을 모으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데이지'라는 여성에게 쏟아부으면서 '미완의 첫사랑'을 '완벽한 사랑'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순수함이 바로 '개츠비식 사랑'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재즈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급작스런 경제부흥으로 쌓은 부를 누구라도 흥청망청 쓰던 시대였는데, 개츠비는 당대 '최고의 파티'를 주최하면서도 단 한 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는 말짱한 정신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무던히도 애를 썼기 때문이다. 모두가 취해버린 와중에도 홀로 말짱한 정신으로 그가 하는 일이라곤 강 건너 '데이지의 집'을 가리키는 녹색 등대였으니 말이다.

 

  암튼, 내 방식대로의 해석이 당연하게도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의 견해도 따르지 않는 '나의 해석'이 색다른 흥미를 불러일으켜 '꾸준한 독서'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음을 밝힌다. 고로 나의 리뷰를 누가 읽어주면 더할나위 없이 고맙지만, 딱 잘라 외면을 당한다하더라도 '결코 멈추지는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적어도, 스스로 싫증이 나거나 더는 해석할 능력이 안 된다고 느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또다시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쿠바의 어느 바닷가에 84일 동안이나 쌩꽝을 친 늙은 어부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 어부가 너무 늙었고, '운'도 다했기에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거라며 수근거렸고, 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매일 같이 큰물고기를 낚을 채비를 하고 바다로 나갔다. 이런 어부의 곁을 지켜주는 이는 작은 소년 하나 뿐이었다. 소년은 물고기를 잡는 법을 늙은 어부에게 배웠고, 얼마 전까지도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지만, 허탕을 치는 나날이 늘어나자 소년의 부모가 '다른 배'를 타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은 부모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다른 배를 타고 물고기잡이에 나섰지만,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늙은 어부의 시중을 들며 곁을 지켜주며 말벗을 해주곤 했다.

 

  그날도, 늙은 어부와 소년은 맥주 한 잔과 커피 한 깡통을 마시며 수다를 안주(?) 삼아 물고기잡이 채비를 함께 하고 있었다. 노인은 그런 소년이 기특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벌써 세 달째 꽝을 친 덕분에 가진 것이라곤 별로 없어서 오히려 소년이 미끼로 쓸 정어리를 챙겨주었다. 오늘은 행운이 가득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소년 없이 홀로 늙은 어부는 출항을 했다. 날씨는 좋았고 태풍은 서너 날이나 지나야 찾아올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면서 말이다.

 

  자, 중간생략을 하고, 노인은 드디어 '큰물고기'를 낚시줄에 거는 것에 성공했다. 노인의 실력이 아직 줄어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물고기가 늙은 노인의 배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었다. 배보다 더 큰 물고기를 낚다니, 노인은 단번에 뱃전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큰물고기와 팽팽한 싸움을 벌이며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물고기는 수면으로 오르지도 않고 더 깊이 내려가지도 않으면서 늙은 어부와 힘겨루기를 하더니 급기야 '노인의 배'를 끌고 '먼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북서쪽으로, 다음엔 북쪽으로,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물고기는 자신의 덩치와 힘을 증명이라도 하듯 노인의 배를 끌고 이러저리 나아갔다.

 

  노인도 만만치 않았다. 놈의 입에 걸린 낚시바늘이 빠지지 않게 재빨리 낚싯줄을 '한쪽 어깨'에 둘러매고서 몸을 기둥 삼아 버티면서 '두 손'으로 단단히 고쳐쥐고서 물고기와 힘겨루기를 했다. 물고기의 미끼와 함께 낚시바늘을 삼킨 것이 '한낮'이었는데 벌써 해가 저물어가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반나절이나 '두 손'으로 버텼으니, 결국 '노인의 왼손'에 쥐가 나서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재빨리 낚싯줄을 오른쪽 어깨로 고쳐매고서 오른손으로 단단히 쥐었지만, 왼손에 난 쥐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노인은 큰물고기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며 이틀 낮밤은 꼬박 새운다. 그러다 사흘째, 큰물고기의 힘도 다했는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게 되었고, 노인은 노련한 솜씨로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물고기를 뱃전에 낚아올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만선의 기쁨을 간직한 채 항구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폭풍우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도 늙은 어부는 항구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항구가 내뿜은 빛을 찾아내고 반드시 돌아갔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엔 너무 멀리 온 것이 문제였다. 큰물고기(머린, 청새치과 몸집이 큰 다랑어 종류)에게 끌려다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요령껏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 오랜만에 찾아온 행운에 기쁨을 만끽한 덕분인지 그만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배보다 더 큰 큰물고기를 요령껏 배옆에 단단히 묶어두고 곧장 항구로 향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생명을 잃은 다랑어의 비린맛을 맡은 것인지, 상어가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노인은 첫 번째 상어를 보기 좋게 물리쳤지만, 다랑어의 1/3을 낼름 뜯어가버린 뒤였다. 두 번째 상어의 공격은 더 거셌다. 살점이 뜯긴 다랑어가 흘린 피냄새를 맡고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노에 칼을 매달고서 상어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또다시 다랑어의 살점은 뜯겨져버린 뒤였다. 기진맥진해진 노인은 세 번째 상어떼의 공격을 받았고, 이전 싸움에서 칼을 잃어버린 노인은 배 뒷전의 키를 뜯어내어 휘두르며 겨우 상어떼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노인도 다랑어도 기진맥진해서 더는 싸울 힘도 없었고, 마지막 상어떼의 공격은 그저 견디면서 항구로 달아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결과, 다랑어의 살점은 상어가 다 뜯어가버렸고, 남은 것이라곤 단단한 대가리와 꼬리 뿐이고, 그 사이에는 굵지만 앙상한 뼈만 남아버렸다. 노인은 그 장면은 보고서 허탈해할 뿐이다. 모처럼 찾아온 행운이 다 날아가버린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행운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비참함마저 느껴버렸다.

 

  드디어 도착한 늙은 어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배를 모래사장에 끌어올렸고, 돛을 정리해 어깨에 들쳐매고서 집을 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쓰러지듯 엎드려 낚싯줄에 쓸리고 상어의 이빨자국이 선명한 손바닥을 하늘을 향한 채, 날짜가 지난 신문지를 몸에 덮고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에 노인의 곁에서 울먹이는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노인이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뒤 안심했지만, 노인의 손바닥을 본 뒤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노인의 배 앞에서 웅성거리는 것도 보았다. 소년은 이미 보았던 장면이다. 엄청나게 큰 물고기의 잔해(?)가 노인의 배에 단단히 묶여있는 것을 보면서, 노인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기에 경탄을 금치 못한 웅성거림이었다. 그 사이 노인은 깊은 잠에 빠져든다. 작가는 그 꿈을 '사자의 꿈'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치고는 비교적 짧은 소설이지만 '읽는 맛'은 최고다. 헤밍웨이의 문장이 간결하면서 힘찬 남성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를 '하드보일드'라고 지칭하지만, 나에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왜냐면 내 눈에 띤 매력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소년의 믿음'이다.

 

  소설속에서 소년의 '주위 어른들'은 노인이 어부로서 '은퇴'해야할 시점이라고 수근거리길 망설이지 않는다. 나이도 적지 않고 84일째 쌩꽝을 치면서 실력조차 '증명'이 된 셈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늙은 어부의 실력은 마을사람들이 다 아는 바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젊은 덩치와 한 '팔씨름 대결'에서 대역전극을 펼쳐내 유명세를 떨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은 늙은 어부의 '실력'을 크게 의심치는 못하고서 '행운'이 다했다고 떠벌린 것이다. 그래서 소년의 부모도 더는 늙은 어부와 함께 배를 타지 못하게 한 것이다. 84일간의 쌩꽝이 그 불운의 증거라면서 말이다. 늙은 어부도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자신조차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좀처럼 큰물고기를 낚아내지 못하고 있으니 변명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소년은 자신에게 '낚는 법'을 가르친 늙은 어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실력도 좋고, 행운도 가득하니 언제고 다시 '큰물고기'를 낚아낼 거라 믿었던 것이다.

 

  소년이 늙은 어부를 '믿어 의심치 않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건 소년의 눈에 비친 '찐실력'이었을 것이다. 그건 소년이 '다른 배'를 타고 '물고기'를 낚아올리면서 더욱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언급은 하지 않지만 '다른 배'의 어른들의 실력이 그닥 좋지 않음을 한 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형편없는 실력에도 큰물고기를 척척 낚아내는 것을 본 소년은 그들이 운이 좋았을 뿐, '찐실력'을 갖추진 못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일테다. 흔히 '어린이의 눈'에는 거짓도 없고 순수하기 그지 없다고 표현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니 소년은 딱 알아본 것이다. '노인의 실력'은 아직 죽지도 낡지도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단지, '운'이 따르지 않아 '꽝'을 치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런 소년의 믿음은 맞아떨어졌다. 앙상한 뼈밖에 남지 않은 물고기의 위용이 바로 그 증거다. 그것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을 때, 자신이 함께 할 수 없었다는 것이 한없이 미안했기에 소년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구도 도움도 없이 그 큰물고기를 기어코 낚아올린 늙은 어부는 또 얼마나 자랑스럽냔 말이다. 그 증거는 바로 '손바닥'이다. 망신창이가 된 그의 손바닥을 보면서 '그날'의 긴박한 현장이 생생히 그려진 탓에 소년은 또다시 눈물을 흘린다. 이번엔 감동 섞인 울음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눈물을 멈추게 한 것은 마음사람들의 입벌어지게 만드는 칭찬과 감탐이었다. 그제서야 소년은 눈물을 멈추고 한껏 미소는 짓는다. '내 말이 맞았잖아요'라는 외침이 환한 웃음과 함께 온동네에 울려퍼질 듯이 말이다.

 

  이제 늙은 어부는 '사자의 꿈'을 꾼다. 언제 깨어날지는 몰라도 사냥을 마치고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는 동물의 왕, 사자처럼 기나긴 낮잠을 즐길 것이다. 다시 해 질 녁이 되어 큰물고기들이 활동을 시작하면 늙은 어부도 다시 깨어날 것이다. 비록 지쳐쓰러져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지만 '소년의 믿음'을 배신하진 않을 것이다. 다시 깨어나 소년의 기대에 응답할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자라나 '최고의 어부'가 될 것이다. 소년에게 꿈과 희망이 되어준 '늙은 어부'가 소년과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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