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단편선 1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권희정.김은경 옮김, 이일선 그림 / 인디북(인디아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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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예능프로그램 <느낌표>에선 굵직한 '교양프로그램'을 진행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그램이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25권의 책을 선정해서 온국민들에게 '독서열풍'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2003년 당시, MC 김용만이 불미스런 일로 방송계 하차를 했었고, 좋은 취지였음에도 '특정 출판사', '특정 도서'만의 판매고를 올려준다는 부작용도 낳았으며, 예능방송에 재미를 주기 위해 '팩트체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방송을 내보내 구설수에도 많이 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스마트폰도 출시되기 전인데도 선진국들과 비교해서 온국민 독서인구도 최저, 1인당 독서량도 최저였던 관계로 '독서교양예능'이 선보이자 온국민의 관심이 쏠리면서 '독서'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던 뜻깊은 방송이었다.

 

  그때 열다섯 번째로 선정되었던 책이 바로 이 책 <톨스토이 단편선>이었다. 물론 이 책은 '개정판'으로 나와 처음 선정된 책과는 '목차'가 다소 다르긴 하지만, 그 시절에 읽었던 추억과 감동은 여전할 수밖에 없었다. 온국민이 '같은 책'을 읽는다는 느낌은 그런 추억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감동을 주었다. 2002년 월드컵4강 신화와 더불어 온국민들의 마음속에 뜨겁게 남겨진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책을 20여 년만에 다시 꺼내 제자들과 함께 읽으니 색다른 추억거리를 만들게 되기도 했지만, 그 시절과 사뭇 다른 느낌이 느껴져서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소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숙이 깔려 있다. 어느 단편소설이고 그 밑바탕에는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하늘엔 영광이 있을 것이고, 땅에는 평화가 복음과 함께 널리 퍼질 것이라는 믿음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짙은 '종교색' 덕분에 읽으면 마음 따뜻해지는 감동만 어렴풋이 느꼈을 따름이었다. 헌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톨스토이의 소설에는 진한 '사회주의 사상'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노동의 가치'를 최고로 치고, '노동으로 얻은 대가'를 모두와 함께 골고루 나누어 갖는다는 골자가 아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러시아혁명'에 깊숙이 관여한 것은 아닌지 검색을 해보니, 단편소설이 쓰여지던 시기가 1885년즈음이었던데 반해, 혁명은 1917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사회주의 사상가'가 아니었던 것일까? 먼저, 그의 문학이 '러시아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러시아 귀족들이 농민들을 수탈하며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의 작품에서도 부유한 자산가는 '악'으로 그리고, 가난한 민중은 '선'으로 보여주며 당시 귀족들의 만행을 작품속에 그대로 투영시켜 폭로하는 '사실주의 작가'였다. 동시에 톨스토이는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 비판의식을 가지고 글로 쓰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옮기는 적극적인 사상가의 모습도 곧잘 보이곤 했다. 특히,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되기도 했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널리 퍼뜨리는 소설가가 어찌해서 파문이라는 불명예를 받았는고 하니, 당시 정교회가 민중을 탄압하는 귀족세력(기득권세력)을 옹호하자 이를 비판하는 저서를 출판했었고, 귀족과 정교회는 이런 책들을 '판매 금지' 시켰으나 민중들이 '필사본'과 '등사본'을 만들어 유통시켰고, 다른 나라 출판사들이 출간하여 인기를 끄는 등 적극적인 행동도 불사했었다.

 

  그런 탓에 그의 작품에서는 '사상가의 느낌'이 물씬 풍기곤 한다. 이 책에 수록된 <바보 이반>에는 그런 내용이 담뿍 담겨 있다. 첫째는 군인이었고, 둘째는 상인이었지만, 셋째인 이반은 농부의 삶으로 만족한다. 이에 악마가 등장해서 첫째와 둘째를 패가망신시켰지만,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아가는 이반은 어찌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반이 잘 먹고 잘 사는데 밑거름(?)이 되고 마는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따뜻한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여기서 작가인 톨스토이가 지배층에 해당하는 '부유한 권세가'에 대해 얼마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파멸해나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과정'을 낱낱이 거론하며 가난하지만 거룩한 민중들의 삶에 아낌없는 찬사를 늘어놓는다. 이는 여타의 소설에서도 곧잘 등장하는 구도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톨스토이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것이 '사랑'이고, '평화'이며, 누구나 욕심을 버리고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삶이 가장 위대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러시아의 대문호를 두고서 러시아인들은 스탈린과 푸틴과 같은 '독재자의 등장'을 막지 못했던 것일까? 모두들 '하나님의 사랑'을 등한시하고, 가난하지만 복된 삶을 마다하고 제 욕심을 챙기기 위해 이웃을 해치는 나쁜 짓을 일삼는 것일까? 비단 러시아 사람에게만 던질 질문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말하는 입술로, 남을 해치는 결단을 이리도 쉬이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호의'를 베풀면 '호구'로 취급하는 못된 습성을 갖게 되었다. 개인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남을 짓밟고서라도 '나만' 성공하는 것이 최우선순위가 되어버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비양심적으로 살면서도 주둥이만 살아서 '도덕적인 말본새'를 주어섬기며 저혼자 착한 척은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는데, 제 곳간을 그득히 채우고서도 만족할 줄을 모르는 세태에 정나미가 떨어진 지 오래되었다. 도대체 착한 사람은 살 수 없을 정도로 '오염수' 가득한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만 셈이다. 하긴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도 '착하게 살라'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가난하게 사는 것'은 몸서리치게 싫다고 '양심고백(?)'을 하기도 한다. 얘들이 말하는 가난이란 것이 '똥꼬' 찢어지는 정도는 물론 아니고, 부족할 것 없이 처묵고 잘 살면서도 '남들보다 부티나지 않게 사는 찌질함'이 정말정말 싫다는 것이었다.

 

  얼마전에 '유명일타강사'가 SNS에 올라온 사진을 보며 불행에 빠지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한 동영상이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켰다고 하던데, 이런 세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 싶다. 남들이 올린 사진을 보며 '왜 나는 이렇게 살지 못하지?'라는 불행을 곱씹는 일을 날마다 반복하는 짓은 정말 어리석기 그지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리뷰를 쓰면서도 '사진'을 올리지 않는...쿨럭쿨럭

 

  암튼, 톨스토이의 책을 오랜만에 펼쳐보고서 새삼스럽게 '사랑'을 실천하고, '욕심'을 버리는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정말로 시급해진 이때, 톨스토이가 전하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어이 우리 모두가 소중히 여겨야 할 바다에 '방사능 수도꼭지'를 기어이 틀고야 말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이 결국 자신들의 터전이자 우리 모두의 고향을 망치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걸 어찌하여 '모른척'하는 것일까? 앞으로 10년, 100년 뒤에 어떤 재앙이 펼쳐질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인걸까? 망가진 원자로 핵연료봉에서는 끊임없이 방사능을 뿜어낼 것이고, 아무리 걸러내고 희석시킨다고 해도 단기간에 없어지지 않을 방사능일진데, 온지구가 방사능 피폭을 당하고 난 뒤에 무슨 수로 회복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결국은 '지구적인 문제'다. 전세계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 반드시 해결해내야만 할 문젯거리다. 그럼 결론은 딱 하나다. 전세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해법을 제시하고, 몸소 실천해야 한다. 당연한 일 아닌가? 이런 와중에 돈 몇 푼 더 손에 쥔들 무엇이 더 나을 것이며, 얼마나 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느냔 말이다. 오염수 배출도 안 되고, 너네가 감당하라고 강요해도 안 된다. 모두가 함께 뛰어들어 해결해야만 한다. 바보 이반의 지혜가 절실한 때다. 욕심 따윈 버리고 무엇이든 베플면 모두가 넉넉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진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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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이 이렇게나 재밌을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는 책이다.

그동안 '인체의 해부'는 의학실험실에서 은밀히 벌이는 의사들만의 전유물처럼 여기곤 했다.

그렇기에 비밀스럽고 신비한 '해부의 세계'는

코를 막아야만 했고

피가 철철 흘러넘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몸속 장기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끔찍한 일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그토록 공포스런 해부학이 유쾌하다 못해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대폭소를 터뜨리는

만화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면 어떻겠는가?


아직 <해부학 만화>의 1권을 읽지 않았다면, 당장 읽어보시고

이미 읽으셨다면, 2권 또한 망설이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예막구매자들엑 주어지는 빵빵한 선물도 가득하다니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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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3 - 청불전쟁과 갑신정변 본격 한중일 세계사 13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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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일제식민통치'에 의한 강제적인 것으로 시작하였다. 허나 이는 '일본제국'을 위한 것이었을뿐, 우리를 위한 근대화는 아니었으니 말할 건덕지도 없다. 그런 탓에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작은 '해방 이후'로 잡고 있으나, 그마저도 친일독재, 군사독재, 반민족적인 독재정권 들이 연이어 들어서는 바람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고, 21세기 초반에야 겨우 '근대화의 틀'이 잡혀나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뼈아픈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진정 '조선의 근대화'는 허상일 뿐이었고,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던가? 이번 편에서 '갑신정변'에 대해 풀어놓았으니 살펴볼 일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시작을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보고 있는 시각이 참 새삼스러울 지경이다. 그 이전까지 '세도정치'로 지배계층이 뿌리까지 썪어 문드러져 있었으니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들이 뒤늦기는 했지만, 눈여겨볼 만한 탓이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고,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 개혁세력들이 타격을 입고, '동학혁명'으로 새나라를 꿈꿨으나, 뒤이어 벌어진 '청일전쟁'으로 우리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모든 시도와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온국토와 백성들이 쑥대밭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결국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있었다면 그건, '민중봉기'로 싹튼 '민주국가에 대한 열망'이었고, '항일의거'로 보여준 '우리 민족의 불굴의 의지'였으며, 훗날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의 정신적 기틀'을 바로 세운 것이 전부였다. 뼈아픈 근현대사는 이렇듯 물적으로도, 인적으로도 '절대적인 자원부족' 상태에서 다시 세워 나아간 것이다. 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기적을 이뤄냈고, 어떤이는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끌어간 주역은 누구라고 보아야 할까?

 

  조선후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개화사상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겠다. 흔히 '북학파'라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적인 세계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생각을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사대부)들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이들이다. 꽤나 개방적인 사상을 갖췄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엄연한 '유학자'들일 뿐이었다. 유교라는 큰틀 안에서 '조그만 창'을 내어 세상밖을 살펴볼 뿐, 조선이라는 나라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개혁가들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개혁가를 꼽자면,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홍영식 등의 개화사상가들이 주목한 '롤 모델'은 일본의 '명치유신(메이지유신)'이었다. 일본의 개화가 성공적으로 보였던 이들은 일본과 손잡고 '조선의 근대화'를 서두르려 하였고, 나아가 서구열강들의 침탈에 맞서 '동양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 일본을 파트너로 삼는데 거침이 없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내부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일본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 '외향적 분출(침략전쟁)'을 일삼던 나라라는 것을 이들은 잊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후쿠자와 유키치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은 '김옥균과 그 일당들'의 철저한 오판이었던 것일까? 암튼 '갑신정변'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조선의 민중들을 철저히 외면한 채, 지도부의 교체(?)만으로 개혁이 성공하리라 철떡같이 믿고 있었으며, 조선의 개혁을 은근히 바라는 서구열강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돕기 위해 견마지로를 다할 것이라 믿었고, 가장 큰 오판은 일본이 '조선의 개혁'을 위해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혁성공 이후, 개혁세력들이 정치적 안정을 찾을 때까지 일본정부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퍼줄 것이라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무려 '청나라'를 상대로 말이다.

 

  그렇다. 고종임금이 다스리고 있던 그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간섭'이 너무나도 심했던 시절이었다. 가뜩이나 조선을 '청의 속국'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서구열강들의 의심스런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고종과 민씨일파들은 '임오군란'이라는 위기를 맞아 너무나도 쉽사리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이는 졸속적이고 졸렬한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조선은 청나라 군사에 의해 내정간섭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고,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조선정부를 향해 막대한 보상금과 피해재발을 막을 수 있는 선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일쑤였다. 이렇게 고종과 민왕후는 '청의 간섭'으로도 모자라 '일본의 간섭'까지 받게 되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다.

 

  거기다 구세력(친청)과 신세력(친일)간의 마찰은 더욱 심화되어만 갔다. 애초에 임오군란의 원인이 이 둘의 갈등이었는데, '구세력의 불만'이 폭발한 뒤에 제대로 해소되지도 못하고 '청나라의 간섭'만 더욱 심해진 꼴이 되었으니 나라꼴이 엉망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신세력들은 나라꼴을 우습게 만든 세력이 볼짱사납게도 '재집권'을 하게 된 상황이 더욱 눈꼴 시린 것도 말할 것 없고 말이다. 이에 '갑신정변'이라는 새판을 짜기 위해 물밑작업을 시작했고, 결행의 시기까지 무리하게 앞당겼던 것이다. 그렇게 무리하게 결행한 결과가 고작 '삼일천하'였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이렇게 구세력도 별볼일 없었고, 신세력도 변변찮으니 나라꼴이 점점 우습게 된 것도 '당연지사'였으리라.

 

  이런 판국에 '갑신정변'의 진행과정부터 결과까지 '청과 일본의 대결' 양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모양새는 더욱 빠지게 되고 말았다. 만약 '프랑스'라는 변수만 없었더라면, 갑신정변으로 인해 '청일전쟁'이 곧바로 시작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 '응우옌 정권'을 독차지 하려다 청의 간섭을 받자, 곧장 '청불전쟁'을 시작했더랬다. 그렇게 프랑스와 청이 대판 싸우자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에 '청과 일본' 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꺼렸던 탓이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일어날 당시, 청나라는 청불전쟁에서 발을 빼기 쉬운 상황이 아니었고, 일본은 청불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가 확실히 이길 거라는 보장도 없었기에 깊숙이 간섭하기 곤란했던 것이다. 그래서 '갑신정변'으로 청군 3명 사망, 일본군 2명 사망이라는 나름의 성적표(?)를 가지고 치열한 협상을 벌인 끝에 양국군 모두 조선에서 철군하기로 '텐진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로써 조선은 '갑신정변'이후 개화세력(민씨척족) 제거와 동시에 외국군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다. 이런 결과를 가장 반긴 이는 다름 아닌, '고종'이었다. 모처럼 '아버지 눈치'도 보지 않고, '아내의 간섭'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는데,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철수해버렸으니, 드디어 '고종의 친정'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종은 이 틈을 이용해 '청과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외교관계'를 바라마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청나라와 일본과 한판 붙어도 결코 쫄지 않는 '새로운 힘'과 손을 잡고 싶었던 것이다.

 

  이쯤해서 '고종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만다. 고종은 조선백성의 주인이면서도 백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스스로 힘을 기르겠다는 '자주국방'이라는 기본조차 망각한 무능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봄을 맞이한 기간이 너무나도 짧아 무슨 노력을 기울였어도 달콤한 결과를 맛보기 힘들었겠으나, 겨우 맞이한 봄이 무색할 정도로 곧바로 겨울을 불러들이는 무능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음 권에서 다룰 내용이겠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혁세력(친일)들이 모두 사라진 때에 '구세력(친청)들'만으로 무슨 기회를 엿볼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전통적인 구세력들이 믿을구석이라고 해봤자, 결국 '또다시 청나라'에 굽신거리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뭔가 노력을 하긴 했었는데, 다름 아니라 '러시아 세력'을 끌여들인 것이다. 그간 러시아가 보여준 저력은 엄청난 영토확장과 더불어 '대영제국'과도 과감히 맞짱을 뜨는 힘, 청나라를 상대로 만주와 연해주를 뜯어내는 힘, 태평양을 넘어 미국까지 경계하게 만드는 저력, 그리고 일본을 상대로도 말 한마디로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가공함에 고종은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리라. 허나 러시아 입장에서는 '조선'이라는 머나먼 왕국은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아직 '시베리아철도'가 개통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는 와중이라 러시아의 육군과 해군이 '조선'에 다다르기 위해선 얼어붙은 시베리아땅을 뚫어야 하고, 영국의 견제를 피해 대서양과 인도양을 끝에서 끝까지 종단과 횡단해야만 했기에 조선이 아무리 매력적인 제안을 하더라도 '당장'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허나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이 급변하면서 조선에 '러시아'와 '영국'이 발을 들이게 된다. 그로 인해 '거문도 점령'이라는 달갑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되니, 다음 권에서 펼쳐질 내용이다.

 

  정리하면, '갑신정변'으로 인해 우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다. 첫째, 소수일망정 개혁세력을 깡끄리 잃어버리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자주적인 근대화'는 물 건너갔다. 둘째, 무리한 개혁이었을망정 구세력(친청 사대부)들에게 감동과 각성을 주는 계기로 작용했어야 하는데, 되려 '개혁의 필요성'마저 망각하게 만들어버리는 비호감만 전해주었을 뿐이다. 셋째, 일시적이나마 '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그 절호의 기회를 맞아 '뭔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조차 없이 그저 '헤프닝'에 불과한 사건으로 일단락이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나 아무런 영감도 불어넣어주지 못할 '정변'을 왜 했던 것일까? 아니 '누구'를 위한 개혁이었단 말인가? 단지 '불만표출'에 그칠 요량이면, 도끼를 매고서 상소를 올리는 유생들의 행위를 따르고 말 일이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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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현의 친절한 사회과학 - 고전 20권 쉽게 읽기
임수현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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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백년을 살고 나서야 내 취향이 '인문사회과학'이었다는 걸 깨닫다니, 늦은 걸까? 이른 걸까? 어릴 적엔 '과학'에 흥미를 느껴 과학만 주야장천 파고 들어 과학도를 꿈꿨으나, 사알짝 기술직으로 비켜나가 공대를 졸업한 뒤엔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질을 하고 있다. 그렇게 논술쌤으로 살면서 슬며시 발을 들여놓게 된 '인문사회과학책'에 날이 갈수록 빠져들고 말았다. 물론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읽기 시작했고, 그렇게 20년동안 읽으니 이제 겨우 깨달음의 문턱을 넘어선 것 같지만, '인문사회과학의 매력'의 끝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모든 학문의 길이 넓고 깊기 마련이지만, 특히나 '사회과학'이 그런 까닭은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라는 게 아니라 '같은 문제', '같은 현상'이라도 이렇게 보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게 맞는 것 같아, 딱히 '이것만'이 정답이라거나 '저것만'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케인즈의 경제학'이 20세기 대공황에는 옳은 해법이었으나 뒤이어 찾아온 '석유파동'에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다시 '케인즈의 해법'이 주목받고 있는 요즘을 보면 '사회과학은 이랬다 저랬다' 줏대없는 학문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회과학의 진짜 매력'이었다는 것을 느즈막한 나이에 깨닫게 되었단 말이다.

 

  어찌보면, 사회과학은 요란한 '진단'에 비해 뚜렷한 '결론'이 없어 헤매기 딱 좋은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문제의식'이라는 틀을 들이댄 뒤에 나름의 가설을 세운 뒤, 검증을 하며 '자기만의 이론'을 정립한 뒤에 '모범답안'이 나오면 '사회문제의 해법'으로 제시하게 된다. 이를 두고 수많은 학자들이 '그 이론'을 토대로 현실문제를 해소하는 실용적인 학문이 '사회과학'이기도 하다. 허나 많은 경우에는 이론상에서만 검증되고 실제로 적용된 뒤에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비판을 넘어 비난을 받기도 하는 것도 다름 아니라 '사회과학'이다. 이는 '과학이론'이 만들어지는 과정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회현상이라는 것이 워낙 변수가 많아 제대로 검증을 하기에 '객관성'이 떨어진 탓이고, 또한, 시간이 흘러 '상황'이 급변하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에 '예전엔 맞았던 이론이 지금은 틀리는 경우'도 많고, 그 반대의 경우도 정말 많다. 이렇게나 '불확실한 학문'이 있는가 싶지만, 이 또한 '사회과학만의 매력'이었던 것이다.

 

  왜냐? '사회과학책'은 그 자체로 '정답'일 수는 없지만, 심지어 '오답'일 확률도 높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도 막대하기 때문이다. 맥루한이 60여 년전에 '미디어가 메시지다'라고 얘기했을 때, 21세기 '스마트폰'은 구경도 못했을 것이다. 아니 상상도 못했을텐데, '스마트폰, 그 잡채'가 전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메시지'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볼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뜻만이 아니다. '스마트폰'이라는 기기가 우리 사회를 변혁시킨 것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면, 맥루한이 말한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글러가 말한 '가난의 이유'도 되새김질 해보면 전지구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이기주의'로 인해 얼마나 많은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지 단박에 보여준다. 그러나 진단과 분석을 날카롭고 예리하게 했더라도 '해법'은 마땅히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맥루한이 '미디어 파워'을 예측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힘을 어디에, 어떻게, 누구를 위해 써야할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 지글러가 '가난의 이유'을 밝혀냈지만, 그 해법이나 대안을 적절히 제시하지는 못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은 무력한 학문일까? 그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 '관심'을 끌어내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사회의 '백인우월주의'가 만연하자,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를 펴내서 '백인들이 저지른 만행'을 낱낱히 밝혀내어 서구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레비스트로스도 <슬픈 열대>를 펴내며 문명과 미개의 '종이 한 장 차이'를 사회구조적 관점으로 증명하며 서구사회의 편견과 잘못된 선입견을 직시하라고 조언했다. 물론, 정답은 없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반문과 비난도 사회과학분야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옳은 지적'이라는 사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게 '사회과학의 진짜 힘'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자'는 정답 제시에 게으를 수밖에 없다. 모르는 걸 어떡하냔 말이다. 대신에 우리가 직면한 사회현상이나 문제에 앞에 당당히 '마주서기'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소크라테스도 말했다. 진정한 용기란 백만 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장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무릅쓰고 당당히 적 앞에 '마주 설 수 있는 자'가 진정 용감한 자라고 말이다. 해법은 그 뒤에 나온다. 명량대첩은 '133 vs 13'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133 vs 1'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한 이순신이 버티고 또 버틴 뒤에야 비로소 기적과도 같은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자'는 만능공식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생각의 물꼬'를 열어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도 바로 '생각의 물꼬'다. 다시 말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항상 현실에 놓인 사회문제를 앞에 두고 당당히 '마주서기'할 때 잡애챌 수 있는 법이다. 때로 그 실마리가 '잘못'되었다고한들 실망할 까닭이 없다. 또다시 '마주서기'한 다음 '또 다른 실마리'를 찾고, 잡아채길 주져하지 않으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 <친절한 사회과학>도 바로 그런 '마주서기'와 '실마리 찾기'를 도와주는 길라잡이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 감히 범접하기도 힘든 '벽돌책'들을 말랑말랑하고 한입에 먹기 좋게 잘라주어 독자들이 '사회과학의 매력'에 흠뻑 빠지는데 어려움이 없게 해주기 때문이다. 거기다 자칫 책내용이 어려운 탓에 '생각의 물꼬'를 찾지 못하고 헤맬 독자들을 위해 '천절한 가이드' 역할까지 해주고 있다. 물론, 그 '가이드'만이 올바른 정답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니 안심하길 바란다. 어디까지 '물꼬'를 내어줄 정도이니 독자의 취향에 따라 '생각의 방향'을 달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선 <친절한 인문학>과는 또다른 매력을 선보이고 있으니, 서로 비교하며 읽는 것도 색다른 재미일 것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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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2 : 돈키호테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
백원흠 그림, 김형주 글, 손영운 기획, 미겔 데 세르반테스 원작 / 채우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돈 키호테>에 대한 극찬은 대단하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1616년 4월 23일)'에 사망하였기에 '책의 날'로 지정해서 기리고 있고, 유명작가와 평론가 들에게 '거의 모든 현대 소설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돈 키호테>에 나오는 '소설기법'은 수없이 많이 차용되었으며, '돈 키호테형 인간'이라는 대명사가 나올 정도로 오래도록 회자되며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면 밋밋하기 그지 없다. 400여 년전에는 배꼽을 잡고 웃어재낄만한 장면이었을지 몰라도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돌진하거나 양떼를 군대로 착각하고 묘사하는 장면이 도통 웃기질 않는다. 거기다 늙고 비쩍 마른 말을 타고 세숫대야를 머리에 쓴 기사가 저지르는 엉뚱한 짓거리들이 무엇을 풍자하는 것인지 가물가물해진 요즘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고 느껴지질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상하는 재미'까지 반감시켜버리는 '만화형식'이라 더욱더 명성에 비해 벅찬 감동이 다가오질 않아 아쉽기 그지 없었다. 실제로 제자들도 침을 튀어가며 <돈 키호테>가며 명작이라 썰을 푸는 선생님을 안쓰럽게 바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돈 키호테>를 어떻게 즐겨야 하는 것일까?

 

  먼저 '돈 키호테형 인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듯 싶다. 러시아 소설가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는 자신의 책에서 '햄릿형 인간'과 '돈 키호테형 인간'으로 구분하여 소개하였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주인공인 그는 아버지를 죽인 숙부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음에도 망설이고마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대명사로,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의 주인공인 그는 흘러간 옛 기사소설에 흠뻑 빠져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돌진하는 '무모한 성격'의 대명사로 분석했었다. 여기에 덧붙여 햄릿은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돈 키호테는 앞뒤 잴 것도 없이 거침없이 달려드는 '이상적인 인물'로 평가했다. 이런 식으로 분석을 하고나니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현실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선 고민하는 '햄릿'보다 거침없는 '돈 키호테'가 더 인기있을 것 같지 않은가.

 

  물론, 복잡다단한 현대사회를 지혜롭게 살려면 '햄릿'과 '돈 키호테'를 적절히 섞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쪽은 '자신의 이상(꿈)'을 향해 돌진하는 인물이다. 때론 실패를 할 수도 있고, 잘못된 길인줄 나중에 깨닫게 될 때도 있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절대 흔들리지 않은 뚝심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양떼를 적군으로 오해하는 '비이성적인 행태, 그 잡채'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또한, 낡아빠진 '관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옳다'고 박박우기는 어리석은 짓은 말할 가치도 없다. 이런 미치광이 짓거리를 하는 돈 키호테를 보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강자'에게 비굴하지 않고 '약자'를 도와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모습이다. 바로 이런 '인물'이 우리의 눈에 '광인(미치광이)'으로 보일지언정 '나쁜놈'으로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우리 모두는 '완벽한 인간'일 수 없다.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기준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평소에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인권 따위를 주어섬기는 인물이 '권력자와 가진자의 횡포' 앞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여기면서, 평상시에 미치광이처럼 보이던 엉뚱한 인물이 '약자가 짓밟히는 상황'을 부당하고 불의하다여겨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이들에게 '분노의 주먹'을 날리는 모습에는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자유'라는 이름을 남발하며 '약자의 인권'을 짓밟는 권력자를 향해 주먹감자조차 아끼며 움추려들면 안 된다. 강철보다 더 단단할 것처럼 보이는 '부정한 권력'도 결국엔 달려들어보지 않고선 강철같이 단단한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법이다.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력'이 원래는 '주권자'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 '주권자'가 권력이 잘못 쓰이고 있다고 판단해서 시위를 하고, 구호를 외치는데 '강제해산'과 '캡사이신' 운운 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행해졌다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쓰지 않던 방법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도 그런 '낡은 유물'을 다시 꺼내어 '부패한 권력'을 옹호하기 위해 또다시 써먹겠다니...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제 우리에게 '햄릿'할 시간은 지나갔다. 지금은 '돈 키호테'할 시간인 것이다. 풍차 같은 용산대통령실과 양떼로 둔갑한 국민의힘에게 정신 차릴 수 있는 '깨몽펀치'를 날려야 할 때다. 이젠 꺼낼 '낡은 유물'도 없지 않은가? '유신시대'보다 더욱 시간을 되돌려 '일제시대'로 회기할 참인가 말이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대한민국에게 '이상(꿈)'이 필요하다.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가로 우뚝서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이 되기에도 바쁜 시간에 자꾸 발목을 잡는 '과거지향적인 놈들'을 깨부술 '돈 키호테'가 절실한 까닭이다.

 

  이 시리즈가 '서울대 선정'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왜냐면 작금의 '자칭 엘리트'라는 집단이 어찌 이리도 부정하고 부패하였는지 명명백백히 밝혀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 엘리트들 가운데 어찌 그리도 '지들'밖에 모르는 덜된 인간들이 그리도 모여 있는 것인지 다시금 되새김해볼 시기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지성이라는 '서울대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서도 이리도 조용할 수 있느냔 말이다. 자신들의 선배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의 짓거리를 보면서도 뭔가 깨닫는 것이 없단 말인가? 아니면 서울대쯤 들어가서 보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란 말인가? 똑똑하다는 당신네들이 "이건 잘못되었다"라고 외쳐야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실현되는 것 아니냔 말이다. 약자들을 위해 제목소리도 낼 줄 모르는 위인들이 '기득권의 반열'에 올라 온갖 것을 누릴 생각만으로 가득하다면, '서울대'라고 자랑스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분명 서울대에도 똘끼(?) 충만한 '돈 키호테형 인간'이 득실득실할 거라 믿는다. 제발 그렇다면 어떤 '미치광이 짓'을 할까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지 말고, 이상을 실현하고 약자를 수호하는 정의의 '기사도 정신'을 되살려 대한민국이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앞장서길 바란다. 그정도는 되어야 '서울대생'이라 자랑질 뿜뿜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서울대생은 그저 '기득권의 수호자' 지망생으로 남을 것인가. 선택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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