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온다, 심해 탐사 와이즈만 미래과학 16
김성화.권수진 지음, 김진화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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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이즈만북스의 <미래가 온다> 시리즈의 특징은 탄탄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주제'에 관련된 특별한 이슈와 함께 장단점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편집했다는 점이다. 비록 주요 독자를 '어린이'로 설정한 탓에 각각의 주제와 관련된 어렵고 복잡한 내용은 걸러내고 '깊이 있는 문제인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단초만 제공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지만, 학생들 뿐만 아니라 학부모도 아이들과 같이 읽으며 '과학계의 최근 이슈'와 함께 '우리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점'에 대해 심도 깊고 폭 넓은 대화를 가능케 하는 유용한 책이라는 것에 많은 분들이 공감할 것이다.

 

  이번 책의 주제는 <심해 탐사>다. 인류는 공기가 희박한 고도 8000미터급 산봉우리도 정복했고, 영하 80도를 밑도는 극지방도 탐사했으며, 찌는 듯한 더위의 사막과 빽빽한 정글 속까지 탐험에 나섰고, 끝내는 지구밖 달나라를 넘어 드넓은 우주공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가보지 못할 곳'이 없을 정도지만, 의외로 아주 가깝지만 정복은커녕 탐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곳이 있다. 바로 '바다'다. 단적으로 말해 인류는 아직까지도 바다의 95%를 모르고 있다고 한다. 고작 5%!! 수심 200미터에 있는 '대륙붕'까지만 겨우 개발을 언급하고 있을 뿐, 그 밑은 햇빛조차 닿지 않아 아주 깜깜한 '암흑세상'이 펼쳐져 있을 뿐이란다. 우리는 이를 통틀어 '심해(깊은 바다)'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런 '깊은 바다'를 탐사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인류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궁무진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망간단괴를 비롯한 풍부한 지하자원은 말할 것도 없고, 결코 줄어들지 않는 먹거리가 끊임없이 제공될 뿐만 아니라, 지상과 해상 위에서 아무리 '기상이변'이 속출해도 바닷속은 '고요, 그 잡채'일 뿐이라 인류가 머물러 살기에도 아주 적당한 주거지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류의 생존에 꼭 필요한 '의식주'를 모두 제공하는 천혜의 보고가 바로 '바다'란 말이다.

 

  그런데 인류는 왜 그동안 '바닷속'을 탐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일까? 그건 바로 '압력(수압)' 때문이다. 수심 100미터만 내려가도 엄청난 압력을 견딜 수 있는 '잠수복'의 도움이 없다면 산소통을 매달고 가도 호흡을 할 수 없으며, 200미터만 내려가도 '잠수정'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활동조차 할 수 없다. 거기다 수심 300미터 이하부터는 '햇빛'조차 거의 도달하지 않아 점점 어두워지며, 수심 1000미터 이하는 그야말로 '암흑세상'이 펼쳐지며 온세상이 깜깜해지게 된단다. 그런데도 아직 바다 밑바닥까지 도착도 하지 못했다. 바다의 평균 수심은 해발 3~5000미터이며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는 1만미터 이하로 지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거꾸로 쳐박아도 모두 잠길 정도로 깊단다. 그러니 그렇게나 깊은 바닷속에서 활동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 밑에서 우리가 받는 압력은 대략 '엄지손톱 위에 황소 한 마리'를 얹어 놓은 정도라고 한다. 고작 엄지손톱의 단위면적에 황소만 한 압력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다니, 웬만한 장비로는 감히 바닷속을 활보하고 다닐 수조차 없는 것이다.

 

  에이, 인류가 지구밖으로 우주선도 쏘아올리는 세상인데, 고작 수심 1000미터를 정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겠지만, 우주공간은 '텅텅 비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쉬운 환경인 것이고, 바닷속은 '꽉꽉 들어차'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어려운 환경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땅 위에서도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는 뚝딱뚝딱 뭐라도 쉽게 쌓아올리지만, 땅 속으로 파고드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암튼 '바닷속'은 우리가 아직도 손을 대지 못한 '미지의 공간'임에 틀림없고, '위험천만한 공간'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다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바라를 제대로 이용하지도 못하면서 그대도 '방치'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렇게 방치라도 하고 있다면 다행일텐데, 아주 더럽게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젯거리다. 최근에는 '기후변화', '해양생태계 파괴', '유조선 침몰', '쓰레기섬', '미세플라스틱', 그리고 '핵오염수 방류' 등등 바다를 더럽히는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하고 있었고, 지금도 진행중이며, 앞으로는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문제점이 점점 더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다.

 

  몇 가지만 그 심각성을 언급하자면, 먼저, 바다에 사는 '식물 플랑크톤'은 다른 해양생물의 먹이로 제공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식물의 광합성의 결과로 생성되는 '산소의 양' 중에서 식물 플랑크톤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절반 이상이라고 한다. 만약, 식물 플랑크톤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바다의 온도가 상승하고, 그로 인해 '해류'가 멈추거나 방향을 변경하게 된다면 '식물 플랑크톤'의 분포도 크게 달라지게 된단다. 그렇다면 당장 지구 생명체가 필요로 하는 '산소의 양'이 현저히 줄어들게 될 것이고, '오존층'도 숭숭 구멍이 뚫릴 것이며, 극단적인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 생명체는 '새로운 대멸종'을 겪게 될 것이라 한다. 무시무시한가? 아직 끝이 아니다.

 

  지금도 온갖 쓰레기를 바다에 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 각국은 지상에 쓰레기를 쌓아놓을 수 없게 되자 바다에 슬쩍 버리곤 하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매일매일 날마다 버리게 되고, 그로 인해 태평양 한가운데 엄청난 크기의 '쓰레기섬'이 생겨났고, 그 섬의 크기뿐 아니라 갯수까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태평양 전체를 덮게 될 날이 다가온다고 전망하고 있으니 그 심각성은 말로 다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쓰레기들이 대부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썩지도 않은 채 계속 바닷속을 채워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런 플라스틱 쓰레기를 '해양생물'이 먹이로 착각하고 소화도 시키지 못한 채 뱃속을 채워나가다 굶어죽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고래나 갈매기의 뱃속을 들여다보니 '비닐하우스 한 채'에 해당하는 양의 어마어마한 쓰레기가 나왔다고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미세 플라스틱'이다. 바다를 떠돌면서 잘게 쪼개진 플라스틱이 썩지도 않고 둥둥 떠다니다 '플랑크톤'이 먹이로 착각하고 먹으면, 작은물고기가 플랑크톤을 먹고, 큰물고기가 작은물고기를 먹고, 결국엔 인간이 큰물고기를 냠냠 먹고서 '인간의 뱃속'에 미세플라스틱이 점점 쌓이게 된단다. 그렇게 '수산물'을 가공해서 만든 각종 비료와 사료를 '육지 동물'에게 먹이로 제공하게 되니 '육상 생태계'에까지 미세플라스틱이 점령했고, 바닷물이 증발해서 구름을 만들고 비를 뿌리니 '공기중'에도 미세플라스틱은 가득 찼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이 만든 '플라스틱'은 오래지 않아 인류에게 '또 다른 재앙'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커밍순~

 

  여기게 '핵오염수'까지 방류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전세계 '원자력발전소'에서 핵오염수를 처리해서 내보내고 있으니, 후쿠시마에서 나오는 막대한 '핵오염수'도 적당히 처리해서 그대로 방류하겠다고 한다. 이미 '2011년 사고 당시'에 아무런 조치도 할 새 없이 '방류한 경험(?)'도 있으니, 지금껏 안전하게(?) 수산물을 먹은 것처럼 계속 드셔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 '일본의 해명'이다. 고작 10년 남짓 지났을 뿐인데 '안전'을 입밖에 내놓는 담대함에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이렇게나 무책임한 발언을 일삼는 '일본정부'에 소위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이 아무런 발언을 내놓지 않고 있는 실정이고, 가장 가까운 '인접국'인 대한민국 정부조차 제대로 된 조사는커녕 뻔뻔한 일본정부의 '졸속행정'을 그저 믿고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외교적 방안이라고 떠벌리고 있는 실정이라 암담하기 이를 데가 없다.

 

  '안전제일'이라는 표어는 일본에서 나왔다. 유난히도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에서 일본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문구다. 그런데 그런 일본이 '안전'을 둘째로 치고, '비용절감'을 위해 국제적인 기구까지 들러리 세워 거짓을 일삼고 있다. 한국 정부도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일본에 '무한신뢰'를 내보이며 핵오염수 방류 결정에 대한 우려와 불안을 '괴담'으로 치부하고 꽁꽁 틀어막는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러한 '국민불안'은 당연한 귀결인데도, 이를 '야당의 정쟁수단'으로 호도하며, '국민안전'과는 별개로 '정치수단화'하고 있는 것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단언컨대, '안전'에는 그 어떤 변명도 필요없고,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도 따질 필요가 없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적절한 변명'이고, '효율적인 비용'을 치뤘다고 발표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안전은 조그만 의혹이나 의심일지라도 '반드시' 해소하고 안심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 같은 일을 또다시 반복될 뿐이다. 십수 년 뒤에 '핵오염수 참사'라는 전지구적 재앙을 맞이하고 싶은 셈인가?

 

  지금까지 '심해탐사'와 관련된 이슈에 대해서 다뤄보았다. 바다는 분명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보물창고 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바다환경'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인류의 미래가 잠들고 있는 곳을 벌써 상당부분 오염시켜놓았기 때문이다. 이젠 바다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렸다. 오직 인간만이 바다를 원래대로 깨끗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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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5 : 허클베리 핀의 모험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5
강철웅 글, 김연승 그림, 손영운 기획, 마크 트웨인 원작 / 채우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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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 시절,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재밌게 읽은 어린이 독자라면 그 후속작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자연스럽게 접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톰 소여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전개와 어려운 내용으로 끝까지 읽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개구쟁이 톰 소여의 이야기는 재미난 장난으로 가득하고 뒤이어 펼쳐질 새로운 장난은 무엇일지 상상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허클베리 핀의 이야기는 '미국 사회문제'를 비판하고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으려는 '문제의식'과 '사회비판'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등시절에 톰 소여는 여러 번 숙독하곤 했지만, 허클베리 핀은 번번히 '도중하차'하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친절한 안내가 필요한 책이다.

 

  먼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풍자소설이다. 19세기 미국 사회는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아도 문제가 많은 사회였다. 이 소설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제만 보아도 '노예인권 문제', '인종차별 문제', '사회지배계층의 도덕적 해이' 등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은 이런 미국사회의 문제를 '순수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사회고발을 하면서 그 심각성을 더욱 부각시킴과 동시에 풍자와 해학 속에 담아내어 미국사회 스스로 성찰하는 계기로 삼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이렇게나 무거운 주제를 담았으니 어린 독자들이 '안내' 없이 이야기를 소화하고 이해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처럼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기 위해선 '배경지식'도 충분히 쌓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거나 '문학적 이해'를 위해 문학사조를 달달 외워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도덕과 사회윤리'에 관한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줘야 한다는 말이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 소설에는 '인권 / 차별 / 도덕적해이'와 같은 윤리인식의 문제를 소상히 다루고 있다. 그러니 19세기 미국사회에서 '당연시' 여기던 것들이 사실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첫 번째, '인권문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평등할 권리를 가진다. 그런데도 19세기 미국사회에서는 '흑인노예'를 사유재산으로 삼아 '사고 팔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고, 심지어 흑인노예가 자식을 낳으면 그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노예'가 되어 버리는 악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과거 '신분사회'를 당연하게 여겼던 '전제왕권시대'처럼 말이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왕조국가'가 아니라 '민주국가'였는데도, 흑인노예들은 민주시민으로서 권리를 박탈 당하고 미국 경제의 근간인 '노동력 제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두 번째, '인종차별 문제'다. 19세기 미국은 철저한 '백인우월주의'에 입각한 '백인사회'였다. 한마디로 백인들은 '모든 것'을 누리는데 반해서 유색인종은 백인들이 당연히 누리는 것들에서 철저히 '소외'시켜버리는 차별화 된 사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차별은 자연스레 '불평등'을 낳는다. 오늘날에도 미국사회는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유색인'을 지배(?)하는 형태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어떻게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을까? 그건 '경제력'을 쥐고 사회 전체를 흔들며 '소수의 백인'에게 유리하게끔 정치, 사회, 전반적인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더구나 19세기에는 백인이 '소수'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러한 '인종차별 문제'는 대단히 심각했고 철옹성처럼 견고했기에 더욱더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그런데도 '백인'들은 인종차별을 사회문제로 인식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유색인종'들의 피해는 끔찍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지배계층의 도덕적해이'다. 백인이 우월한 사회라 하더라도 그 백인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고, 올바르게 이끌어나갔다면 크게 문제 삼을 것도 없다. 전제왕권시절에도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이끌던 시절에는 많은 백성들이 평안하고 태평하게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19세기 미국의 백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 소설에서 '허클베리 핀의 아버지'나 '황제와 공작이라 불리는 사나이들',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처럼 사소한 원한 관계로 서로의 목숨을 뺏고 빼앗는 어리석은 백인들이 널리고 샜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부도덕한 백인들'이 미국 사회를 이끌고 있는 것에 마크 트웨인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도 어린 아이의 시선을 통해서 말이다.

 

  이처럼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다루는 주제를 이해하고 읽으면, 이 소설이 단순한 '어린이문학책'이 아니라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그보다는 사회고발을 하는 날카로운 '비평소설'에 가깝고, 사회의 고질적 문제점을 풍자와 해학으로 비꼬집은 '풍자소설'이라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고 자국 사회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비판하는 '뜨거운 감자'였기에 올바른 비판의식을 갖춘 어른들의 친절한 안내(?) 없이는 이 책의 진면목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어린 독자'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 틀림없다. 나 역시 그런 '어린 독자'였으며, 아무런 안내도 받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게 된 '어린 독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솔직히 어른 독자들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친절한 안내' 없이 제대로 된 주제를 이해하기란 어렵기 마찬가지다. 그래서 적절한 '해설서'와 함께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 책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이 훌륭하다 여기는 까닭이다. 물론, 이 책에 소개한 내용이 모두 흡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나마 '기본적인 개요'를 잡기에 적절한 책도 드문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명작고전소설'에 깊이를 느껴보고 싶은 청소년독자들에게 강추하고 싶다. 청소년시절에는 '원작소설'을 읽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을 '마중물'로 삼아 암반 깊이 감춰진 주제를 '미리' 맛보는 것도 아주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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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3 아르테 오리지널 3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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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과 2권에 이어 3권에서도 '양숭고의 추리'가 기본 스토리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1권에서는 '왕비의 딸 살인사건'을, 2권에서는 '그림속 연쇄살인사건'을, 그리고 3권에서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각각 3개의 별개 살인사건들이 모두 '하나의 증거물'과 연관되어 있으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살인사건의 비밀을 풀어낼 '결정적 증거'라는 점에서 앞선 사건들보다 더욱 확장되어 긴박감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첫 번째 살인사건은 다름 아닌 '기왕 이서백'을 죽이려는 궁궐 음모와 관련되어 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순간 극적인 효과가 벌어지며 이서백은 살아남게 되지만, 독에 중독되어 거의 죽은 목숨과 다를 바가 없는 신세가 되어 양숭고와 함께 단 둘만이 살아남게 된다.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두 남녀는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며 살갗이 부딪히고 맨몸을 보여주며 더욱더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여느 '로맨스소설'이었으면 두 사람의 애정이 점점 짙어지다 떨어질 수 없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지만,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자객에게 뒤를 쫓기는 급박한 상황이라 한가하게 달콤한 사랑에 빠져들 시간적 여유마저 없게 된다. 그렇게 필사의 탈출을 한 뒤에야 '둘의 관계'가 더욱더 밀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아직 풀어야 할 살인사건이 남아 있었다. 바로 '황재하의 일가족 살인사건'의 증거를 찾는 일이다.

 

  그래서 두 번째 살인사건은 당연히 '황재하 일가'와 연관이 있는 증거물을 찾기 위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마침맞게 또 다른 살인사건이 벌어졌으니, 바로 '두 남녀의 동반자살 사건'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연 때문에 헤어졌었는데,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사라지고 다시 만난 두 남녀가 홀연히 '동반자살'을 한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연인이 다시 만나서 자살을 했다는데, 두 사람이 얌전히 누워있는 자세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이 '독 중독'이라고 하는데, 분석을 한 결과 '짐독'이라는 궁중에서만 비밀리에 쓰이는 극약으로 밝혀졌다는 점이다. 평범한 두 남녀의 죽음에 궁궐의 극약이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건을 풀어내는 와중에 '또 다른 살인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 죽음 역시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모두가 공연을 지켜보는 와중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밀실살인'인데, 모두가 용의자인데도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던지라 누구도 살인을 저지를 수 없는 상황에서 피의자가 심장에 비수를 찔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더욱이 이 두 사건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었으니, 양숭고의 추리를 따라가다보면 그 비밀이 기막히게 해결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살인사건에서 드디어 '황사군 일가 독살사건'에 감춰진 비밀이 모두 밝혀지고, 양숭고가 사실은 '황재하'라는 사실도 만천하에 밝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진실은 또다시 '기왕 이서백'을 암살하려는 세력과도 연결이 되어 있으니, 이런 거대한 흑막이 4권에서 낱낱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거기다 신분이 밝혀진 황재하는 '여자의 몸'으로 기왕 이서백과 함께 지낼 수 없게 되었고, 아직 혼약의 파기하지 않은 정혼자 왕온이 발빠르게 움직여 모든 누명을 벗게 된 황재하와의 혼인을 서두르고 있으니, 맨살을 부비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서백과 황재하의 로맨스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도 4권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다. 더욱더 흥미진진해지는 이야기에 퐁당 뛰어들면 좋을 듯 싶다.

 

  그런데 말이다. 이 책이 <로맨스소설>인지 <추리소설>인지 점점 더 헷갈리기 시작했다. 두 장르가 섞여서 <미스테리로맨스소설>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지만, '살인사건'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이야기가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체검안'을 서술하면서 동시에 '연애감정'을 녹여내고 있는 작가의 서사가 생뚱맞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물론, '범죄스릴러' 장르에서도 '사랑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살인사건추리'를 하면서 '연애감정'에 빠져드는 등장인물이 황제의 아우와 환관으로 신분을 감춘 여인이라는 설정은 <로맨스소설>을 즐기는 독자로서 쉽사리 빠져들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뭐, 국경도 초월하고, 죽음도 극복해내는 사랑이야기가 흔해 빠진 와중에 '살인사건' 속에서 핏빛 로맨스가 펼쳐진다고 한들 그닥 어색할 것 없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허나 내가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여성작가, 특유의 장황한 묘사' 때문이다. 마치 '순정만화'에 그려지는 '꽃배경'이 연상되는 듯한 달콤한 배경묘사와 달달한 심리묘사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난 뒤에 어김없이 '시신'을 부검하는 주자진과 '살인사건'의 증거를 찾아내 비밀을 풀어내는 양숭고의 행동묘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기왕과 여자환관 사이에 찐한 '러브라인'을 풀어내고, 옛연인이었던 '우선'과의 묘사에서는 '미소년과 미소녀'를 등장시키곤 하니, 마치 냉탕과 온탕을 왔다갔다는 서사에 차갑고 뜨거운 감성이 두서없이 오고가는 지경에 이르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한단 말인가? 자고로 <로맨스소설>이라하면 두 남녀의 끈적끈적한 애정묘사에 한없이 달달해지는 감성에 푹 빠져들어야 제맛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로서 <잠중록>은 기상천외하다 못해 기괴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과연 <미스테리로맨스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걸까? 난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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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 기행문 겨레고전문학선집 15
강항 지음, 김찬순 옮김 / 보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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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6대 임금 성종 때 거란이 침략을 하였다. 거란은 국력을 갖추자 나라이름을 '요'로 고치고, 송 침략에 앞서 고려를 압박하기 위해 침략을 하였는데, 첫 번째 침략에서는 '옛고구려땅을 내놓아라'고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펼친 것이다. 이에 고려는 창졸지간에 침략을 당한 터라 거란장수 소손녕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고, 이들의 요구에 전전긍긍하며 맞서 싸우거나 땅을 내어주거나 하자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서희는 거란의 침략이 '80만 대군'이라는 일방적인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대군을 몰고 왔으면 속전속결을 할터인데, 그러지 않고 '협상' 따위나 하고 있으니, 필시 허풍이 틀림없을 것"이라며 담판을 한 연후에 결정을 하라며 임금께 주장을 올렸다. 이에 성종이 강화에 서희를 내려보내니, 거란의 주장은 거짓이었고, 속셈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회담을 고려에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이것이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거란 1차침략'에 대한 '서희의 외교협상'의 내용이다. 이처럼 외교와 전쟁 등과 같은 중요한 국가대사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정보력'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선조에 벌어진 전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그렇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똑똑하기로 유명했던 임금과 신하들이 즐비하던 시절이었는데도 '일본의 침략야욕'을 제대로 간파하지도 못하고, '전쟁대비'도 적절히 하지 못하고, '전후처리'조차 공정하지 못했던 엉망진창이었던 '치욕의 역사'였다. 과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희의 외교협상'은 적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낸 덕분에 고려는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되었다. 거란측의 허장성세에 맞서 주눅 들지 않는 자세로 당당하게 회담을 이어나간 결과, 고려는 '강동6주'라는 어마어마한 땅을 얻게 되었고, '거란군의 철군 약속'도 받아냈으며, 고려의 변방을 괴롭히던 '여진족 토벌'까지 보장받았다. 고려가 거란측에게 내어준 것은 '송과의 교류 단절'과 '거란과의 통교' 뿐이었으니, 외교협상으로 전쟁도 막고 이득도 챙기는 대단한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반면에 임진왜란 때에는 전쟁직전에 '통신사'를 보내 일본측을 염탐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벌었는데도, 통신사가 가져온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일본의 침략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랜 전란을 거쳐 '고도의 정규군'을 보유했던 일본군에 비해 오랜 평화로 소홀해진 국방력과 실전 경험이 전무한 군사시스템으로 '계획적인 침략'에 적절히 대비하지 못한 조선군이라는 '현실'을 고작 1년이라는 시간으로 어찌 해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외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외적을 정확히 간파했더라면 짧은 시간이었더라 하더라도 그처럼 속절없이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라 안타까운 것이다.

 

  이런 안타까움에 전쟁 이후에 쓰여진 책이 바로 류성룡이 쓴 <징비록>이다. 이 책에는 '전쟁의 참상'이 이토록 무섭고 전쟁을 '대비'하지 않은 대가가 이처럼 비참하니, 비극적인 전쟁의 기록을 철저히 남겨 만일을 대비하고 후대에 경계로 삼길 바라는 마음이 간곡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징비록>은 제대로 읽히지도 못하고 또다시 '호란'을 겪게 되었으며, 그런 굴욕을 당한 뒤에도 오래도록 외면을 받고 있다가 침략국인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역수입된 뒤에야 유명세를 받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단다. 이런 <징비록>에 버금가는 책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극적생환을 한 강항선비가 쓴 <간양록>이다. 이 책의 내용도 '왜국의 정세'가 자세히 적혀 있고, '왜국의 지리, 문물, 풍습' 따위도 굉장히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특히, 왜국의 유명 인물에 대한 나름의 평가가 실려 있어 현지에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본의 정보'가 낱낱이 보고되어 있는 소중한 '기록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 책 역시 널리 읽히지 못한 신세였으며, 오늘날에는 이름이라도 널리 알려진 <징비록>과는 반대로 <간양록>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해져 버리고 말았다. 실제 나도 이 책의 존재에 대해서 꽤나 최근에 알게 되었고, 뒤늦게 읽어보게 되었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정보력'에 대해서 둔감한 것일까?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하고 있다. 주변국들이 중국과 일본, 러시아, 미국이라는 강대국인 탓에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형국이란 말이다. 이런 유리한 곳에 위치한 우리가 '강대국들의 정보'에 빠삭하고 민감하며 신속하게 대처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춘다면, 고려를 침략했던 거란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 서로 선물공세를 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무던한 애를 경쟁적으로 쓸 수밖에 없게 만들 수도 있다. 헌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미중 갈등이라는 첨예한 대립에 '실리외교'는커녕 '중립외교'도 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 바쁘고, 우리보다도 약해빠진 나라로 전락한 러시아와 일본에게조차 떳떳하고 당당한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굽신대는 꼬락서니가 정말 우습지 않느냔 말이다.

 

  멍청한 이들은 말한다. 이것은 '약소국의 현실'이니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고려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강대국'이었나? 거대한 땅을 차지한 송에 비해서도, 신흥강국으로 영토를 넓히며 옛고구려땅과 발해까지 멸망시키며 송나라를 침략하던 거란에 비해서도 조막만한 고려는 그 힘을 크게 발휘하지도 못하고, 외교적 발언도 크게 내어보지 못한 '약소국'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서희는 외교협상만으로 '고려의 이익'을 최고를 끌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주변의 정세를 정확히 간파해서 '고려가 나아갈 길'을 명확히 제시한 덕분에 고려는 그 어떤 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로 자존심은 물론이고, 국력도 크게 위명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간양록> 같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정보의 힘'이 가져다줄 고마운 선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비록 왜적의 포로로 끌려갔으나 일본의 전후사정을 비롯해서 일본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간파한 소중한 정보를 남겨 놓았으니, 그 소중한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이 취해야 할 자세'를 갖춰나가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여기에 '정보의 업그레이드'도 대단히 중요하다. 항상 '최신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눈독을 들여서 '외적의 정세'를 새로 파악해야만 그에 알맞은 새로운 대응을 세우고 전략을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을 오늘날의 국제정세에 적용시키면 대한민국도 더는 '약소국' 신세에서 벗어나 '강대국의 자세'를 취하며 외적의 입맛과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적절하게 전략을 짜아낸 뒤에 국익을 최고수위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 아니냔 말이다.

 

  누가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다시 새겨야 할 때다. 우리 역사가 늘 자랑스럽지는 않을지라도 '수난과 고난' 뒤에 다시 일어나 지금의 위상을 갖추게 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정보의 중요성'을 명심하고, 적절하고, 신속하고, 적확하게 대처해나갈 때에만 자랑스런 역사를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강대국이 강대국일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도 '정보력'이고, 약소국이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이유도 '정보력'이다. 이 책의 내용이 비록 '과거의 정보'이고, 그나마 오랫동안 묻혀 있어 잘 알지 못했다하더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간양록>을 통해 얻을 '정보력'은 낡아서 별로 쓸모가 없겠지만, 이 책에 담긴 '정신'은 지금 현재에도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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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온다, 탄소 혁명 와이즈만 미래과학 17
김성화.권수진 지음, 백두리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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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는 '탄소중립' 또는 '탄소제로'가 크게 이슈다. 205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최대한 줄여서 멈출 수 없는 재앙을 막아보자는 의도로, 어쩌면 인류의 절멸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탄소와 인류절멸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아한 분들도 많을 텐데, 현재 대기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매우 심각한 단계에 다달았기 때문이다. 2020년 현재 전체 공기를 10000개라고 했을 때, 그중 이산화탄소가 4개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만 개중에 4개면 별문제 없겠네 싶겠지만, 이 숫자가 5가 되면 '지구온난화'는 멈출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단계로 접어들어 재앙에 버금가는 '기후변화'를 반드시 겪게 될 것이며, 인간이 곡창지대로 삼고 있는 모든 농경지와 목장이 황폐화될 정도로 살인적인 더위와 추위가 끝없이 반복되어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비극을 반대하는 과학자들도 있긴 있다. 지구 기온이 상승하는 것은 지구역사상 흔한 일이며 크게 올랐다고 해서 생명체가 절멸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 단언하고, 오히려 온난해진 기후 덕분에 더욱더 풍족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는 학자들도 꽤나 많다. 그러나 그렇게 낙관만 할 수 없는 것이 '10000개 중의 4개'인 지금도 극심한 기후변화를 실감하며 주위 환경의 변화에 우려가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일상생활의 불편함이 속출하고 있는데, 고작 30년 뒤에 '10000개 중의 5개'에 도달해버리고 지구 스스로 자정작용을 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망가뜨리고 나서 "아이쿠, 우리의 예측이 틀렸네요. 미안합니다"라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냔 말이다.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지구온난화'는 전지구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확실히 비정상적인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탄소'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하나 뿐인 생명에 이르기까지 '탄소'는 너무나도 밀접하게 작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의 주성분이 '탄소'이고, 우리가 주위의 살아움직이는 것 모두가 '탄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런 '탄소'로 이루어진 식물과, 그 식물을 먹거리로 삼은 동물, 그리고 이런 식물과 동물을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도 모두 '탄소'를 기본성분으로 삼아 구성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거의 모든 물건들도 '탄소화합물'의 결실이다. 석탄과 석유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석유에서 뽑아내서 만든 '플라스틱' 또한 '탄소화합물'의 결정체인 셈이다. 심지어 우리 건강을 위해서 먹는 '약'의 주요성분도 대부분 탄소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우리 몸이 '탄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화학작용'인 소화를 하고, 잘 흡수가 되어 약의 효능이 잘 듣기 위해서 '탄소화합물'을 주성분으로 삼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단한 탄소가 우리에게 치명적인 대명사로 다가온 까닭은 바로 '지구온난화' 덕분이다.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땅속 탄소를 꺼내 공기중으로 뿜어낸 결과, '10000개 중의 4개' 상태로 만들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기중에 배출한 '이산화탄소'를 다시 땅속으로 되돌려놓으면 해결될 일일텐데, 그게 녹록치 않다. 왜냐면 공기중의 구성성분들은 좀처럼 변화하질 않기 때문이란다. 그런데도 '지구온난화'를 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상황으로 만든 인간이 참으로 대단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기중의 이산화탄소'를 다시 흡수할 수 있는 능력자는 오직 '식물'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런 식물의 복합체인 '숲'을 파괴하고 불태워서 농경지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왜냐면 공기중의 이산화탄소를 감소하는데에는 '경제적 이득'이 없지만, 당장 숲을 밀어버리고 농경지를 만들면 '경제적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자신들의 목숨줄을 끌어당겨 수명을 깎아먹는 일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당장 숲을 되살릴 수 없다면 '인위적인 방법'으로라도 '공기중의 이산화탄소'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 나라 아주대학교에서 '공기중의 이산화탄소'를 '플라스틱'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를 상용화하면 우리가 내뿜은 '이산화탄소'를 다시 수거할 수 있게 되고, 배출한만큼 다시 되돌려 쓸 수 있으니 비로소 '탄소중립'에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 지구환경을 되돌리고 에너지를 덜 쓰는 방향으로 노력해나간다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가 '탄소'에 큰 관심을 두어야 하는 까닭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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