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데이션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1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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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우주 대서사시를 이야기해보련다.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소설은 프랭크 허버트의 <듄>을 비롯해서 아서 클라크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그리고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으로 정점을 찍었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니 태클은 사양한다. 각각의 시리즈는 저마다 특색이 있으니, <파운데이션>만의 특별함을 언급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더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바로 '제국의 멸망'이다.

 

  거대한 제국은 언제나 모든 것을 거느리는 '거대함, 그 자체'였지만 거대해진만큼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쓸 겨늘이 없어지게 되면서 서서히 쇠락해져가게 되었고, 결국엔 '멸망'에 이르게 될 운명에 처했다. 허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제국의 한복판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조짐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강렬한 경고음'을 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해리 샐던'이라는 심리역사학자다. 그는 꽤나 정확한 셈법으로 '제국의 멸망'을 미래예측하였고, 자신의 계산은 틀림이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안 그래도 망해가는 조짐을 보이는 제국은 '독재자'가 등장해 장기집권을 하며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기에 '샐던의 지적'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허나 부패한 권력은 정당한 비판을 몹시 싫어하기 마련이라 '샐던의 무리들'은 점점 핍박을 받게 되고 정책적으로도 그들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허나 그러면 그럴수록 '해리 샐던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질 뿐이었다. 이에 제국의 법정은 샐던에게 '유죄'를 선포하고 추방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 '추방령'조차 샐던이 예측한 미래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예정대로의 진행'일 뿐이었다.

 

  그렇게 제국의 변방, 금속자원조차 태부족해서 기초적인 생활필수품조차 머나먼 제국의 지원이 없으면 생존을 위협받게 되는 외딴 행성 터미너스에 '샐던의 무리들'은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예정되었던대로 그들은 '백과사전편찬'을 숙원사업으로 삼고 그곳에서 정착해나간다. 그러던 먼 훗날, 예정대로 제국은 그 힘을 잃고 점점 쇠락해간다. 그러자 제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외곽에서부터 독립적으로 힘을 키워가는 세력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중 아나크레온 행성인들이 터미너스에 군대를 끌고 쳐들어오게 된다. 애초에 샐던이 추방되면서 '터미너스'는 제국의 보호를 받게끔 되어 있으나 제국의 힘이 미치지 못하니 변방의 반란군의 힘에 맞서 싸울 변변한 무기도 없이 외적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터미너스에 찾아온 최초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이때 '해리 샐던'이 모습을 나타낸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이가 '영상'을 통해 터미너스에 닥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보여준 것이다. 왜냐면 이런 위기조차 샐던이 예측한 미래에 다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터미너스 주민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백과사전'이나 편찬하던 외딴 행성이 생존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을 때, 짠~하고 나타난 것이다. 이런 일은 이후에도 계속 반복하게 되며 이를 '샐던 위기'라 부르며 고비 때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적확하게 제시하게 된다. 아무튼, 터미너스가 맞이한 첫 번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퍼주어라'는 것이었다. 줄 것도 없는 외딴 행성에서 도대체 뭘 줘야 한단 말인가? 그건 의외지만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는 에너지원, 바로 '원자력'이었다.

 

  '원자력'은 애초에 제국의 것이었다. 제국은 '원자력의 힘'으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그 거대한 힘으로 은하계 전체를 거느렸던 것이다. 그래서 외딴 행성인데도 터미너스에는 소소하나마 아주 작은 '원자력'을 가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너무 작아서 큰 무기를 만들거나 운용할 수는 없었고, 그저 생활용품을 만들거나 소규모 공장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원자력이었다. 바로 이것을 아나크레온이 원하면 주라는 것이었다. 근데 우습게도 아나크레온에는 '원자력'을 다룰 기술력이 없어 터미너스에서 '기술자'까지 함께 제공(?)해야만 했다. 이렇게 아나크레온의 군대는 터미너스의 소소한 조공을 챙겨 돌아가게 되고 첫 번째 샐던 위기는 이렇게 일단락이 된다.

 

  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제국이 멸망한 뒤에 '야만의 시대'가 찾아온다는 샐던의 예측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애초에 샐던은 이 야만의 시대가 무척이나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파운데이션(백과사전)'이 그 야만의 시대를 획기적으로 줄여 1000년이면 끝맺고 다시금 온 은하계에 문명을 건설하고 평화가 안착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래서 '파운데이션'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허나 다른 사람들에겐 허무맹랑한 예언일 뿐이었다. 고작 백과사전편찬을 하면 야만의 시대가 비교적 짧게 지나갈 수 있다니 무슨 황당한 말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샐던의 예언은 하나씩 차례대로 착착 맞아떨어지며 진행되고 있었다. 정작 '파운데이션'을 제작하는 터미너스의 주민들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파운데이션'은 몇 차례의 '샐던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해나가며 점차 많은 사람들이 '파운데이션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파운데이션의 진정한 힘은 '백과사전,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 안에 담긴 '지식'이 힘의 근원이었고, 그 지식으로 펼쳐보이는 '사람의 힘'이 그 막강한 전력을 보여주었고, 끝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랑의 힘'이 현현할 때, 그 어떠한 힘일지언정 그보다 더욱더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사랑의 힘'이 구현되기 위해서 겉으로는 맹목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한 '종교의 힘'을 빌어야 했고, 탐욕스런 물욕이 내제된 '경제의 힘'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어떤 힘이든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아시모프는 평생에 걸쳐 집필한 이 소설을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초해서 써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모든 것을 예측한 기반도 '심리역사학'이 된 것이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에 따라 <파운데이션>에서 펼쳐지는 장엄한 이야기도 이러한 '반복되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역사'를 통해 배운 지식을 알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어처구니 없이 계속 반복하곤 한다. 폭력은 결코 현명한 해법이 아니고, 일을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기록'해놓았음에도, 그런 어리석음은 무한반복되기 일쑤니 말이다. 마치 인간은 '필멸이 필연'인 것처럼 우매한 행동을 영원히 반복할 뿐이다.

 

  이러한 '야만'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직까지는 '없는 것'이 기정사실인 듯 싶다. 20세기에 수많은 전쟁을 일삼으며 그 아픔과 슬픔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21세기가 되어서도 그 아픔과 슬픔을 '나름의 방식으로 종식시키겠다'면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다 다 죽어"라는 <오징어게임>의 명대사는 어차피 단 한 명만 남을 때까지 승부를 펼치는 참혹한 현장에선 공허한 외침이었을 뿐이다. 죽어가는 이들의 처절한 싸움을 지켜보며 희희낙락하는 '저들' 앞에선 말이다. '저들의 야만'을 멈출 수 없다면 전쟁은 어쩔 수 없이 '필연'이 되고 만다. 암튼, 소설로 돌아와서, 지난 100년 간 '샐던 위기' 때마다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낸 터미너스의 주민들은 과연 남은 900년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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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목표한 리뷰가 150편인데..많이 부족하다

남은 달에 올인을 한 번 해보련다.

 

지난 달에 비해 달라진 점은 '오프라인 12%'가 순위에서 밀리고

'온라인 11%'가 순위에 진입한 것이다.

이건 그간 리뷰한 책 가운데

책구매 방식이 '오프라인'에 치중해 있다가

이번에 '온라인 구매'가 훨씬 더 많이 늘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논술수업을 하다보니 대량구매를 했던 터라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 발품을 팔았더랬었는데

이젠 논술수업을 하더라도 거의 '온라인'으로 소구매를 하니...쩝

 

그런 탓에 리뷰한 책들이 거의 대부분 '어린이책'이기도 하다.

그마저도 27%에서 26%로 하향하였다.

이런 경향은 점점 심해질 듯 싶다.

현재는 초등수업보다 중고등수업에 치중하고 있고,

아이들 책보다는 '내 취향의 책'들을 먼저 리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새로 목표를 잡아

집에 쌓인 책들을 좀 섭렵해야겠다. 그럼 다시 어린이책 리뷰가 더 늘어날 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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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영화 공식 원작 소설·오리지널 커버)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강미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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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들이 성장하는 드라마를 품은 소설을 꼽으라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도 있지만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21세기를 사는 소녀들에게는 고루한 느낌을 주는 '오래된 소설'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20세기 문학소녀들에게는 정말 손에 꼽을 명작소설이었고, 지금은 어른이 되어버린 '그 시절의 소녀'들의 추억거리가 되어버렸지만, 난 지금의 소녀들에게도, 아니 소년들을 포함해서, 꼭 읽어보아야 할 소설로 꼽고 싶다. 그 까닭은 바로 '가난한 삶이 주는 행복'을 음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은 오직 '돈'이 유일한 목적인냥 행복한 삶의 조건에 '돈'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물론 도덕교과서 덕분(?)에 돈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것에는 다들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돈'이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푸념만 늘어놓는 세대가 전부인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차라리 대한민국 국민의 대다수가 못살던 6, 70년대가 더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라는 어르신도 정말 많다. 분명 대한민국은 경제발전과 성장을 모두 이루었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풍요로운을 만끽하며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이전의 젊은 세대들보다 더욱 빈곤하고 쪼들리며 살고 있고, '무언가'에 쫓기듯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듯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는 '기성세대'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적인 풍요'에만 집중했을 뿐, '삶의 질' 따윈 살피지 못하고 무작정 '경제성장'에만 올인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긴 했는데, 정작 그 풍요로움 속에 '여유'를 담지 못하고, 한껏 끌어올린 풍요로움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애먼글먼 걱정만 하는 모습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리석음도 모자라서 물려주어선 안 될 '걱정거리'만 잔뜩 물려주고선 정작 '경제적 풍요로움'에서 안락하게 즐기며 걱정없이 학업을 정진하고 다채로운 꿈을 펼쳐내는 향연을 누리는 멋진 삶 대신에 어릴 적부터 '부자'가 꿈이라는 둥, '건물주'가 되어 놀고 먹고 살고 싶다는 둥, 그도 아니면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꿈이랍시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채찍질만 해대었으니,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뭐가 되겠냔 말이다. 물론 그런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건실하게 성장하는 올곧은 아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가난한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백번 낫지 않을까 싶다. 결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깨우치는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시기적절한 '경험'을 선사해주고,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코칭'해주는 선생님으로 가득한 나라를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소설에서나 나올 법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긴 하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그래야만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현실이 비극적이라고 꿈조차 '비극'으로만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이책 <작은 아씨들>에는 그런 '학교'가 실현되었다. 조가 어릴 적 '꿈꾸던 집'이 바로 그것인데, 시작은 '마치(March)가의 다섯 식구'가 펼쳐보이는 소박한 가정의 모습으로 선보인다.

 

  바로, 첫째 딸 메그, 둘째 딸 조, 셋째 딸 베스, 막내 딸 에이미, 그리고 네 자매의 어머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다섯 명의 등장인물은 한때는 남부럽지 않을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아버지가 사업에서 실패하고 전쟁에 참전을 하며 오래도록 가정을 비우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풍요로웠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참으로 옹색한 살림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쪼들린 삶을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조금의 여유가 생기면 자신들보다 더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고 베푸는 선량한 가풍을 잃지 않았다.

 

  물론, 꿈 많은 소녀들이었기에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것들을 갖고 싶은 욕구는 넘쳤다. 첫째 메그는 맏딸답게 부잣집 남자와 결혼을 해서 엄마가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드리려고 했다. 그래서 메그 자신도 '사교모임'에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외모가 출중했기에 누구라도 좋은 혼처를 소개해주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허나 '사랑' 없는 결혼은 '영혼'을 팔아버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되자 메그는 돈 많은 남자보다는 진실한 사랑을 찾으려 노력하였고, 그에 걸맞는 참한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 조는 아버지가 없는 동안은 자신이 아버지 '대신'이라는 생각을 하는 씩씩한 소녀였기에 누구보다 진취적이었으며 '정숙한 아내'가 되기보다는 '경제적 독립'을 이루려 한다. 물론 자기 혼자만 부를 누리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자신이 직접 챙기겠다는 당찬 포부였다. 실제로 조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 '작가'로 등단하였으며 고액의 원고료를 받으며 가족들의 생계에 보탬이 되었으며, 진실한 사랑도 이루고 '훌륭한 학교'도 운영하며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당찬 여성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막내 에이미는 자존심과 고집이 센 소녀로 천방지축처럼 사고를 일삼기도 했지만, 한번 마음 먹은 것이 있으면 기필코 마음 먹은대로 이루고야 마는 집념의 소녀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할 줄도 알고 참고 견디는 인내심도 대단한 소녀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사랑스러운 소녀였던 베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사처럼 사랑을 베풀며 사랑을 받았지만 심한 병에 걸려 일찍 건강을 잃고 안타깝게도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베스가 꿈꾸던 소망은 스스로 실현하지는 못하지만 남은 가족들이 대신 실현을 하며 가족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된다. 비록 육신은 차갑게 식어 땅에 묻혔지만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더 따뜻한 사랑은 가족과 이웃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게 된 셈이다.

 

  이렇게 얼핏보면 그저 아름다운 소녀들의 꿈과 사랑이야기로만 보이는 소설속에는 '지독한 가난'이 불편한 진실로 드러나며 소녀들의 꿈과 희망을 좌절시키는데 한몫 단단히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소녀들은 '가난'보다 더 큰 어려움이 얼마든지 많고, '가난'보다 더욱 불편한 것들도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 덕분에 가난하지만 행복할 수 있었고, 가난으로 불편을 겪는 와중에도 가족들간에 더욱 화목하고 사랑으로 뭉칠 수 있었다. 물론 가난으로 인해 '여성의 삶'이 아름다울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예쁜 옷을 입을 수도 없을 것이고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도 하지 못해 초라하고 볼품없어 아무에게도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지혜로운 여자라면 값비싼 옷과 장신구로 치장하지 않고도 품위로 돋보이게 하고, 예의바른 행동과 고운 말씨, 그리고 남을 돕는 상냥함과 배려심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까지는 여느 '교훈적인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레파토리일 것이다. 허나 가난한 여성이 선량한 마음씨와 사랑스런 외모로 위기를 극복하는 뻔한 스토리를 뻔하지 않게 만드는 힘은 바로 '가난극복을 위한 경제적 독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19세기에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쉽지 않았고, 실제로도 전문직은 '여성작가나 여선생님'까지였고 아이들 뒤치닥거리나 하는 보모와 다를 바 없는 '가정교사'나 '바느질감'을 얻어와서 푼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고작이었고,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공장 노동자나 농사일은 여성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작은 아씨들>속에서도 네 자매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그나마 현실적인 경제적 보탬을 할 수 있는 것은 '숙녀'가 되어 사교모임에 겉모습을 최대한 꾸며서 '돈 많은 남자'를 낚아내어(?) 친정에 경제적 이득을 보태던가, 적어도 자기 자신이라도 쪼들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방식이었던 것이다. 조를 제외한 세 자매도 처음엔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올컷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평범하게 끌고 가지 않았다. 조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우뚝 내세웠고, 메그는 사랑없는 부유함을 걷어차고 사랑이 넘치는 가난을 스스로 선택했으며, 에이미는 고르고 골라 자신의 꿈과 허영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돈 많고 멋진 남성을 길들였(!)으며,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한없이 아름다웠던 소녀는 무능하고 무뢰한 남성이 채가기 전에 차리리 희생(?)시켜버리는 과격함(!)까지 선보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올컷이 선보이고자 했던 여성상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여성의 꿈인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허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여성들에게 무한한 희생만을 강요하던 '교훈적인 이야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는 '마치 대고모'라는 인물을 통해서 여설히 드러난다. 당시의 바람직한 여성상을 대변하는 이가 고루하기 짝이 없는 '마치 대고모'와 한없이 자애로운 '네 자매의 엄마'였지만, 네 자매는 부유하기만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마치 대고모를 '쓸쓸함의 대명사'로 만들었고, 가난이란 현실 앞에 숙명처럼 수긍하기만 했던 '엄마'와는 달리 네 자매는 적극적으로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지가 없었더라면 네 자매도 당시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평범한 여성처럼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네 자매는 달랐다. 진취적으로 살지 않으면 끝내 베스처럼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게 될 것이니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하는 당찬 여성으로 살아가라고 교훈을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다면 또 다른 소설인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서 순례자가 온갖 역경을 딛고 천국으로 향하는 것처럼 당당히 맞서라고 귀띔해주고 있다. 딴에는 종교적인 색채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청교도 정신'까지 끌여들이지 않고 '극복의지'로 이해를 해도 좋을 것이다. 가난한 삶이 여성에게 끼치는 영향이 <천로역정>에 비유될 정도로 큰 고통일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꿈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라고 말이다.

 

  이런 <작은 아씨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은 없을까? 비록 오래된 소설이라 '이야기, 그 자체'에 깊이 공감되지는 않을지라도 '가난한 삶'을 대하는 네 자매의 자세를 통해 오직 돈만 바라며 살아가는 어리석음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어릴적에 '돈보다 더 소중한 것'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미 배워서 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경험을 통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돈돈돈'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줄 만능열쇠로 굽신거리는 까닭을 모르겠다. 그렇게 굽실 거릴바에는 차라리 '가난'에 당당히 맞서고 '가난'을 친구로 삼는 현명함을 뽐내는 것은 어떨까? 나도 여기껏 살다보니 '풍족함'보다는 가난에 쪼들리는 '부족함'에 더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래서 가난이 주는 '불편함'을 누구 못지 않게 잘 안다. 허나 가난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다. 지금의 젊은 세대로 '가난'이 가르쳐주는 소중한 교훈을 통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멋쟁이가 되길 바란다. 결코 '가난한 삶'이 두려워서 몹쓸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멍청이가 되지 말길 바란다. 그런 멍청이들이 부자가 되어 저지르는 짓은 정말 눈뜨고 못봐줄 정도로 천박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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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8 : 양철북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8
곽은우 글, 팽현준 그림, 손영운 기획, 귄터 그라스 원작 / 채우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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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가 세계대전을 일으키던 시절에 '나치'에 협력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탔다면 말이 된다고 보는가? 사실 독일인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마냥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무엇'이 옳은 일인지 판단조차 하기 힘든 상황에서 조국을 배신하고 국가권력에 대항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역할'이 자랑스럽지 못했고, 옳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일을 더욱 힘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양철북>은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인들의 뒤늦은 뉘우침과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처절한 반성이 담긴 역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심지어 '나치'에 협력했었기에 더욱 생생한 증언과 잘못으로 얼룩진 과거를 정확하게 회고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임에 틀림없지만, 2차 세계대전 뒤에 '이념의 대결'이라는 냉전체제 속에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마샬플랜)으로 인해 빠르게 회복한 뒤 거침없이 성장과 발전을 거듭한 나라다. 그럼에도 '유대인 학살'과 같은 과거의 짐이 발목을 잡히 않도록 확실한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서 '유럽공동체'의 리더를 맡을 정도로 신뢰를 얻는 나라로 거듭났다. 이는 '또 다른 전범국가'인 일본의 행보와 사뭇 다른 모습이라 일제의 피해당사국인 우리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암튼, 그런 독일의 '과거사죄와 반성'의 일환을 배경으로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인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 쓰인 '전후문학' 가운데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은 '사회고발'이라는 의도와는 다르게 야한 소설, 혹은 불륜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기도 하다. 이는 영화 <양철북>의 상영이후 '그런 부분'만을 부각시켜 영상화한 탓도 있지만, 소설속에서도 다분히 그런 내용이 적나라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난해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소설속에 담겨진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 큰데, 독일의 침공으로 나라를 잃은 폴란드의 비극, 나치 독일의 탄압으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유대인과 유대계 유럽인들, 그리고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폭력인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나치협력자들과 무도한 권력이 저지르는 폭력이 두려워 알고도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나치부역자들, 그리고 그러한 나치에 끝까지 저항하던 이들과 그들을 응원하지만 끝내 '표면화'하지 못하고 그저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벅차서 우물쭈물하던 평범한 독일인들까지 모두 그 '상징성'에 담겨 서술되고 있기에 난해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징성을 '모범답안'처럼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만이 가장 바람직한 독서법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오직 '하나의 정답'만을 이해하기 위해서 강조하는 독서법이 학창시절에는 '높은 성적'을 얻기 위해 당위성을 갖출 수 있을지언정, 정답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문학을 오랫동안 널리 읽고 읽히는 까닭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고 '새로운 감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면 <양철북> 또한, 그렇게 읽혀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도 '자유'롭게 읽어야 할 것이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난쟁이를 '보는 시선'에 따라 얼마든지 색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스카'는 스스로 성장하길 거부했다. 그리고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기도 싫었는데, 딱 하나 '양철북'을 선물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탄생을 '선택'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상징성이 가득한 이 소설의 관점에서 풀이하자면, 오스카는 '독일, 그 자체'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광기로 가득한 독재자가 다스리는 혼돈스러운 시대는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서 '야만의 시절'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몰염치와 이기적인 모습을 그대로 대칭시켰던 것일테다. 다시 말해,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독재자의 광기를 아직 미성숙한 오스카의 겉모습을 통해 '비정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테다. 허나 오스카에겐 '양철북'이 있다. 당시 성숙한 독일 어른들이 일삼던 행위들도 얼마간 '정상적'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미쳐돌아가는 세상속에서 맹목적으로 '히틀러'를 따르던 이들도 바로 독일인,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오스카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시선'으로 양철북을 두드려 정화하려 들었다. 이를 테면, '사회고발'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던 오스카의 '양철북'만으론 나치라 불리던 폭주기관차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런 '폭주기관차'에 올라탄 수많은 독일인들은 타고 있자니 불안했고, 내리자니 그 또한 목숨을 걸어야할 판이었다. 어찌해야 좋을까? 오스카는 수차례 '찣어지고 망가진 양철북'을 대신할 '새 양철북'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회고발의 명맥'을 유지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만 펼쳐졌을 뿐이다. 한편, 독일이 전쟁을 한창 진행하던 중에 오스카는 첫사랑을 만난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오스카가 '정상적인 사랑'을 할 수는 없었다. 사랑이란 '정신적 성숙'뿐만 아니라 '육체적 성숙'도 함께여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카에게 '육체적 성숙'은 아직 일렀다. 오스카의 성장은 '독일의 성숙'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독일은 미쳐돌아가고 있었고, 광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스카는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자신의 첫사랑을 아버지 마체라트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독일의 패망 직전 소련군의 침공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아버지를 '나치'라고 고발하며 소련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만들고, 그의 무덤에 '양철북'도 함께 묻으며 '성장'을 결심한다. '사회고발'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무뎌지고 만 것일까?

 

  전쟁이 끝나고 오스카도 '성장'을 한 뒤라 '한 사람의 몫'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다. 특히, 사랑하는 마리아와 그녀의 아들의 생계를 책임지려는 모습에서 안타까움마저 느낄 정도다. 그러다 미술대학 교수의 의례로 '누드모델'을 하면서 엄연한 가장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다. 발가벗겨진 몸도 '독일,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뒤늦은 성장으로 '꼽추'가 되어 버렸지만, 전쟁의 상흔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독일의 기형적인 성장'을 한 몸에 보여준다는 일념에 돈벌이는 쏠쏠해진다. 그러나 끝내 '사랑'은 이루지 못하고 만다. 마리아에게 청혼을 하지만 마리아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리아와 헤어진 뒤, 오스카는 음악적 성공으로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다. '양파주점'에서 '북 연주가'로 데뷔해 독일인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허나 간호사 도로테아를 사랑하게 되면서 오스카에겐 '새로운 삶'을 살아갈 계기가 된다. 과연 그 삶은 어떤 모습일까? 깨끗한 반성과 뉘우침으로 '성장을 부정했던 잘못'을 씻고 아름답고 찬란한 행복을 꾸리며 살아가게 될까? 아니면 성장하려 노력했으나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좌절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광기'가 탄생해버리게 될까?

 

  어쩌면 <양철북>은 미성숙한 사람들이 벌인 끔찍한 일들을 나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양태의 '미성숙함'을 보며 자신에게 딱 맞는 '미성숙'을 발견하고 관찰하며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궁극적으로 '나치의 만행'에 대한 고발을 하면서, 그런 부정함과 부도덕함에 알게 모르게 동참했던 사람들을 비판하는 소설이지만, 그러한 '독일'과 아무런 연관도 없고, 배경지식도 없는 독자들마저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바로 '미성숙'이란 말이다. 그리고 '바람직한 성장'이 얼마나 힘들며,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점에서 개개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어야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걸작이라는 말도 된다. 과연 우리사회는 개개인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개인 스스로도 '바람직한 성장'을 위해 갖춰야 할 조건들을 얼마나 충족시키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른다. 중요한 것은 반성과 성찰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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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피스톨 스토리 - 권총으로 꿰뚫는 역사적 순간들 한빛비즈 교양툰 26
푸르공 지음, 이세환 감수 / 한빛비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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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은 '총기소지'가 불법인 나라이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들은 합법적으로 '군대'를 경험하였기에 총을 다루는 것에 매우 능숙(?)한 편이다. 물론 소총과 같은 '소화기'에 한해서 하는 이야기지만, 나처럼 '주특기'를 경험한 이들은 박격포 급 이상의 '중화기'를 경험한 이들도 꽤나 있을테다. 그러나 군대를 경험했더라도 대한민국 군인..특히 사병은 '권총(피스톨)'은 구경조차 못해본 이들이 꽤나 많다. 그래서 권총에 대한 묘한 동경심 같은 것을 같고 있기도 하고, 총기소지나 사격훈련을 경험할 수 있는 나라로 여행을 가서 '사격연습'을 여행코스에 넣는 분들도 꽤나 많다고 들은 바 있다. 그런 경험조차 없는 나는 그저 '비비탄'이나 쫌 쏴봤을 뿐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명중률'로 따지자면 권총은 소총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고, 사격훈련을 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이 '권총'의 슬픈 현실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명사수' 장면은 거의 대부분 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는데, 그 까닭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가 이 책 <피스톨 스토리>를 읽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까닭인 즉슨, 총신이 짧기 때문에 '가늠자와 가늠쇠'로 정교한 조준을 하고서 쏴봤자 제대로 날아가는 것이 드물고, 총알이 발사된 뒤에 전해지는 충격과 반동으로 인해 총을 쥔 손이 올려지게 되고 겨냥이 틀어지게 되어 '목표물(표적)'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리는 것이 당연지사라고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사격술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하며, 올바른 '파지법'으로 사격을 해야 부상도 줄이고 정교한 사격이 가능해진다고 하니...어찌보면 이 때문에 더욱 '권총'에 대한 호기심이 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맛'이 덕질 중에 덕질이니까 말이다.

 

  암튼, 그런 까닭에 '권총'은 공격용으론 적당한 무기가 아니고 '호신용(방어용)' 무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원거리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기에 말이다. 하지만 '초근접'에서 써야할 상황이 펼쳐진다면 어떨까? 물론 '칼'이라는 정답이 있긴 하지만, 스파이들의 낭만은 '권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007 영화> 시리즈에 등장하는 제임스 본드 덕분에 생겨났다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만, 실제로도 국가간 첩보전이나 암살, 경호를 할 때 '무기'를 드러내놓고 할 수는 없으니 몸에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딱 적당한 크기의 무기'로도 권총은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평소에는 품 안에 '은닉'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딱' 꺼내서 쏜 뒤에 유유히 사라지는 명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 낭만(?)이 가득한 '권총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 바로 <만화로 보는 피스톨 스토리>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작가에 의해서 쓰였기에 '우리 역사의 에피소드'가 담겼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미국과 독일 같은 '제조국의 관점'으로 쓰여진 책들은 대부분 권총에 관한 '제원'이나 '부품소재', '살상력(분당속도, 파괴력 등)' 등과 같은 정보만 나열하기 십상이지만, 아직까지 권총에 관해서 이렇다할 생산을 하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이기에 '하드웨어'나 '피지컬' 쪽의 서술방식이 아닌 '소프트웨어'나 '쏘울' 쪽의...아무튼 권총에 대한 정신적인 면의 접근 양상을 선보이는 서술방식이 꽤나 맘에 들었다.

 

  이를 테면, 안중근과 김상옥이 일제의 침략과 야욕에 항거하기 위해 '정의의 방아쇠'를 당긴 이야기로 권총에 대한 스토리를 풀어나간 점이다. 그리고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도 선보인 에피소드였던 '신미양요 씬'은 총에 관한 우리의 정서를 담뿍 담은 역사적인 사건이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비록 권총이 아닌 '화승총'이긴 했지만 '총잡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으로 '조선의 산포수(호랑이사냥꾼)'가 단연 최고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화승총의 유효사거리는 고작해야 50미터 정도였으니 호랑이사냥꾼들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호랑이가 운동장 절반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올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그 정도의 거리라면 호랑이가 대여섯 발자국 뛰면 사냥꾼에게 닿을 거리였고 실제로 산포수들은 호랑이를 단 한 방에 쏘아 죽이기 위해서 호랑이가 마지막 일격을 위해 몸을 띄워 달려들 때까지...다시 말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참고 기다리다가 호랑이의 머리 한가운데를 정확히 맞춰서 잡았다고 한다. 화승총은 연달아 쏠 수 없고 다시 재장전한 뒤에 쏘기까지 1분가냥 소요가 된다고 하니 단 한발로 승부를 보지 못하면 그야말로 저세상 구경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정신자세'로 무장한 산포수들이 신미양요 당시 남북전쟁에서 활약한 군인들과 맞서 싸웠고, 비록 승패는 '3 대 344'라는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는 명백한 패배였지만, 미국측 기록에는 "학살에 가까운 일방적인 전투에도 조선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리며 전장을 지켰다"라고 남겼다고 한다. 어쩌면 신미양요를 이후 미국은조선을 향한 제국주의 침략의욕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여야 할까? 2023년 현재, 우크라이나 vs 러시아, 팔레스타인 vs 이스라엘 '두 개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마당에 한갓지게 '무기예찬'이나 늘어놓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총은 다른 무기에 비해 '살상력'이 작다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무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화'를 파괴하고 '생명'을 해치는 무기를 우리 곁에서 될수록 멀리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당연하다는 데에 한표를 던질 것이다. 아무리 '방어수단'이라고 하더라도 그 또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기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표하는 바다. 그렇지만 적들의 무차별 침공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총'을 드는 것까지 반대해야 하는 걸까? 적에 비해 우리의 화력이 현저히 낮아지면 적들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고 마구 대하는 것에도 '무기력'으로 대응하며 우리쪽의 피해만 커지게 방치해야 하는 걸까?

 

  이처럼 '총'은 우리에게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를 선사하곤 한다. 비교적 총기에 관한 법률이 우리보다 자유로운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으로 '민병대'를 꼽고 있다. 당시 영국군보다 열세였던 미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으로 '미국시민들의 자발적 무장투쟁'을 꼽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외부의 적'이 침입했을 때 경찰이나 군대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자기 방어는 스스로 한다'는 정서가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집안에 '무기'를 갖추고 적극적인 자기 방어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한 까닭에 '총기사용'에 관대한 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총기사고'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뉴욕시에서는 '평균 1초마다 1명꼴'로 총기사고가 벌어지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일상의 평화와 안전'과 맞바꾼 '자유와 독립'이 자랑스러운 것인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해서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무기제작을 포기할 정도로 멍청한 짓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방어포기'가 아니라 '철저한 관리'가 중요할 것이다. 외적의 침략을 막고 자국의 안녕과 평화, 그리고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대량살상무기' 따위가 필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하더라도 그토록 '위험한 무기'를 적절히 관리하여 함부로 쓰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다. 아울러 '최상의 무기'만 갖추는데 열을 올리기보다 '그 무기'를 다루는 사람의 정신적인 자세를 갖출 수 있도록 철저하게 운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총' 자체에는 선함도 악함도 없다. 오직 다루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평화가 위협받는 시기일수록 '아는 것이 힘'이라는 진리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밀리터리'에 관한 지식을 쌓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혜가 없는 지식'은 쓸데 없고, '반성과 성찰을 모르는 지혜'는 더 큰 희생을 불러오는 재앙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 '사실상, 저승사자'라는 점을 유념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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