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영화 공식 원작 소설·오리지널 커버)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강미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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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들이 성장하는 드라마를 품은 소설을 꼽으라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도 있지만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21세기를 사는 소녀들에게는 고루한 느낌을 주는 '오래된 소설'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20세기 문학소녀들에게는 정말 손에 꼽을 명작소설이었고, 지금은 어른이 되어버린 '그 시절의 소녀'들의 추억거리가 되어버렸지만, 난 지금의 소녀들에게도, 아니 소년들을 포함해서, 꼭 읽어보아야 할 소설로 꼽고 싶다. 그 까닭은 바로 '가난한 삶이 주는 행복'을 음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은 오직 '돈'이 유일한 목적인냥 행복한 삶의 조건에 '돈'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물론 도덕교과서 덕분(?)에 돈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것에는 다들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돈'이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푸념만 늘어놓는 세대가 전부인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차라리 대한민국 국민의 대다수가 못살던 6, 70년대가 더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라는 어르신도 정말 많다. 분명 대한민국은 경제발전과 성장을 모두 이루었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풍요로운을 만끽하며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이전의 젊은 세대들보다 더욱 빈곤하고 쪼들리며 살고 있고, '무언가'에 쫓기듯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듯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는 '기성세대'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적인 풍요'에만 집중했을 뿐, '삶의 질' 따윈 살피지 못하고 무작정 '경제성장'에만 올인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긴 했는데, 정작 그 풍요로움 속에 '여유'를 담지 못하고, 한껏 끌어올린 풍요로움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애먼글먼 걱정만 하는 모습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리석음도 모자라서 물려주어선 안 될 '걱정거리'만 잔뜩 물려주고선 정작 '경제적 풍요로움'에서 안락하게 즐기며 걱정없이 학업을 정진하고 다채로운 꿈을 펼쳐내는 향연을 누리는 멋진 삶 대신에 어릴 적부터 '부자'가 꿈이라는 둥, '건물주'가 되어 놀고 먹고 살고 싶다는 둥, 그도 아니면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꿈이랍시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채찍질만 해대었으니,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뭐가 되겠냔 말이다. 물론 그런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건실하게 성장하는 올곧은 아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가난한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백번 낫지 않을까 싶다. 결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깨우치는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시기적절한 '경험'을 선사해주고,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코칭'해주는 선생님으로 가득한 나라를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소설에서나 나올 법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긴 하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그래야만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현실이 비극적이라고 꿈조차 '비극'으로만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이책 <작은 아씨들>에는 그런 '학교'가 실현되었다. 조가 어릴 적 '꿈꾸던 집'이 바로 그것인데, 시작은 '마치(March)가의 다섯 식구'가 펼쳐보이는 소박한 가정의 모습으로 선보인다.

 

  바로, 첫째 딸 메그, 둘째 딸 조, 셋째 딸 베스, 막내 딸 에이미, 그리고 네 자매의 어머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다섯 명의 등장인물은 한때는 남부럽지 않을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아버지가 사업에서 실패하고 전쟁에 참전을 하며 오래도록 가정을 비우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풍요로웠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참으로 옹색한 살림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쪼들린 삶을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조금의 여유가 생기면 자신들보다 더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고 베푸는 선량한 가풍을 잃지 않았다.

 

  물론, 꿈 많은 소녀들이었기에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것들을 갖고 싶은 욕구는 넘쳤다. 첫째 메그는 맏딸답게 부잣집 남자와 결혼을 해서 엄마가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드리려고 했다. 그래서 메그 자신도 '사교모임'에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외모가 출중했기에 누구라도 좋은 혼처를 소개해주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허나 '사랑' 없는 결혼은 '영혼'을 팔아버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되자 메그는 돈 많은 남자보다는 진실한 사랑을 찾으려 노력하였고, 그에 걸맞는 참한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 조는 아버지가 없는 동안은 자신이 아버지 '대신'이라는 생각을 하는 씩씩한 소녀였기에 누구보다 진취적이었으며 '정숙한 아내'가 되기보다는 '경제적 독립'을 이루려 한다. 물론 자기 혼자만 부를 누리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자신이 직접 챙기겠다는 당찬 포부였다. 실제로 조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 '작가'로 등단하였으며 고액의 원고료를 받으며 가족들의 생계에 보탬이 되었으며, 진실한 사랑도 이루고 '훌륭한 학교'도 운영하며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당찬 여성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막내 에이미는 자존심과 고집이 센 소녀로 천방지축처럼 사고를 일삼기도 했지만, 한번 마음 먹은 것이 있으면 기필코 마음 먹은대로 이루고야 마는 집념의 소녀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할 줄도 알고 참고 견디는 인내심도 대단한 소녀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사랑스러운 소녀였던 베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사처럼 사랑을 베풀며 사랑을 받았지만 심한 병에 걸려 일찍 건강을 잃고 안타깝게도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베스가 꿈꾸던 소망은 스스로 실현하지는 못하지만 남은 가족들이 대신 실현을 하며 가족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된다. 비록 육신은 차갑게 식어 땅에 묻혔지만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더 따뜻한 사랑은 가족과 이웃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게 된 셈이다.

 

  이렇게 얼핏보면 그저 아름다운 소녀들의 꿈과 사랑이야기로만 보이는 소설속에는 '지독한 가난'이 불편한 진실로 드러나며 소녀들의 꿈과 희망을 좌절시키는데 한몫 단단히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소녀들은 '가난'보다 더 큰 어려움이 얼마든지 많고, '가난'보다 더욱 불편한 것들도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 덕분에 가난하지만 행복할 수 있었고, 가난으로 불편을 겪는 와중에도 가족들간에 더욱 화목하고 사랑으로 뭉칠 수 있었다. 물론 가난으로 인해 '여성의 삶'이 아름다울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예쁜 옷을 입을 수도 없을 것이고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도 하지 못해 초라하고 볼품없어 아무에게도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지혜로운 여자라면 값비싼 옷과 장신구로 치장하지 않고도 품위로 돋보이게 하고, 예의바른 행동과 고운 말씨, 그리고 남을 돕는 상냥함과 배려심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까지는 여느 '교훈적인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레파토리일 것이다. 허나 가난한 여성이 선량한 마음씨와 사랑스런 외모로 위기를 극복하는 뻔한 스토리를 뻔하지 않게 만드는 힘은 바로 '가난극복을 위한 경제적 독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19세기에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쉽지 않았고, 실제로도 전문직은 '여성작가나 여선생님'까지였고 아이들 뒤치닥거리나 하는 보모와 다를 바 없는 '가정교사'나 '바느질감'을 얻어와서 푼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고작이었고,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공장 노동자나 농사일은 여성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작은 아씨들>속에서도 네 자매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그나마 현실적인 경제적 보탬을 할 수 있는 것은 '숙녀'가 되어 사교모임에 겉모습을 최대한 꾸며서 '돈 많은 남자'를 낚아내어(?) 친정에 경제적 이득을 보태던가, 적어도 자기 자신이라도 쪼들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방식이었던 것이다. 조를 제외한 세 자매도 처음엔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올컷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평범하게 끌고 가지 않았다. 조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우뚝 내세웠고, 메그는 사랑없는 부유함을 걷어차고 사랑이 넘치는 가난을 스스로 선택했으며, 에이미는 고르고 골라 자신의 꿈과 허영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돈 많고 멋진 남성을 길들였(!)으며,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한없이 아름다웠던 소녀는 무능하고 무뢰한 남성이 채가기 전에 차리리 희생(?)시켜버리는 과격함(!)까지 선보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올컷이 선보이고자 했던 여성상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여성의 꿈인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허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여성들에게 무한한 희생만을 강요하던 '교훈적인 이야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는 '마치 대고모'라는 인물을 통해서 여설히 드러난다. 당시의 바람직한 여성상을 대변하는 이가 고루하기 짝이 없는 '마치 대고모'와 한없이 자애로운 '네 자매의 엄마'였지만, 네 자매는 부유하기만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마치 대고모를 '쓸쓸함의 대명사'로 만들었고, 가난이란 현실 앞에 숙명처럼 수긍하기만 했던 '엄마'와는 달리 네 자매는 적극적으로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지가 없었더라면 네 자매도 당시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평범한 여성처럼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네 자매는 달랐다. 진취적으로 살지 않으면 끝내 베스처럼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게 될 것이니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하는 당찬 여성으로 살아가라고 교훈을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다면 또 다른 소설인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서 순례자가 온갖 역경을 딛고 천국으로 향하는 것처럼 당당히 맞서라고 귀띔해주고 있다. 딴에는 종교적인 색채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청교도 정신'까지 끌여들이지 않고 '극복의지'로 이해를 해도 좋을 것이다. 가난한 삶이 여성에게 끼치는 영향이 <천로역정>에 비유될 정도로 큰 고통일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꿈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라고 말이다.

 

  이런 <작은 아씨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은 없을까? 비록 오래된 소설이라 '이야기, 그 자체'에 깊이 공감되지는 않을지라도 '가난한 삶'을 대하는 네 자매의 자세를 통해 오직 돈만 바라며 살아가는 어리석음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어릴적에 '돈보다 더 소중한 것'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미 배워서 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경험을 통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돈돈돈'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줄 만능열쇠로 굽신거리는 까닭을 모르겠다. 그렇게 굽실 거릴바에는 차라리 '가난'에 당당히 맞서고 '가난'을 친구로 삼는 현명함을 뽐내는 것은 어떨까? 나도 여기껏 살다보니 '풍족함'보다는 가난에 쪼들리는 '부족함'에 더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래서 가난이 주는 '불편함'을 누구 못지 않게 잘 안다. 허나 가난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다. 지금의 젊은 세대로 '가난'이 가르쳐주는 소중한 교훈을 통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멋쟁이가 되길 바란다. 결코 '가난한 삶'이 두려워서 몹쓸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멍청이가 되지 말길 바란다. 그런 멍청이들이 부자가 되어 저지르는 짓은 정말 눈뜨고 못봐줄 정도로 천박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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