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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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 문학동네 (2011)

[My Review MMCXXV / 문학동네 25번째 리뷰] 한강 소설은 나에게 버겁다. 나는 '시어(詩語)'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한강의 장편소설은 마치 '시어'처럼 흘러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에 한강이 쓴 소설이 무척 아름답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시어'가 그렇듯,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그뜻까지 해독하는데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마치 명작 그림을 눈앞에 두고도 '참 잘 그렸다'는 감상 이외에 더 많은 소회나 느낌을 내뱉지 못하고 말문이 턱 막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한강 소설은 딱 그렇다. 그런데도 작년에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 한국인으로서 자긍심도 있었고, 마침맞게 한강의 수상을 예상이나 한듯 수상자를 맞췄기에 '예스24'에서 1000원 상당의 상품권도 아주 잘 받아서 딱 그만큼 기뻐했더랬다. 그래서 한강의 책들을 줄줄이 구입했더랬다. <희랍어 시간>도 그렇게 뒤늦게 구입한 책이다.

그런데 막상 읽는데 너무 힘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면서 읽다보면 '전체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전체 줄거리를 주의 깊게 읽다보면 아름다움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며 '겉핥는' 식으로밖에 읽지 못하는 나의 독서 수준이 참으로 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더구나 중간 중간에 불쑥 튀어나오는 '외국어'는 나의 감상을 더 방해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한국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딱한 수준인데, '외국어'로 전달되는 감상까지 곁들이는 일은 무척이나 힘겨웠다.

물론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절박한 사정에서 내가 느껴야 하는 감동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해 답답했던 것이다. 그것이 중반 이후에 빛을 잃어가는 남자가 등장하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애달파지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전개하고 있음에 절박한 정황은 점점 절절한 사랑을 승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두 연인이 있는데,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손짓으로, 눈빛으로 대신하려 하지만, 남자는 빛을 잃어가서 연인의 손짓과 눈빛을 차마 볼 수 없게 된다는 슬픈 사랑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더 애끓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 되어 '표현'되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린다는 사실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시간'은 촉박하기 그지 없는데, '사랑한다'는 아름다운 말과 찬란한 빛은 참으로 오랫동안 빚어져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감정을 서로 나누는데 성공은 하지만, 결국엔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이기에 안쓰러울 따름이다.

딱 여기까지의 감상만으로 <희랍어 시간>을 이해하고 뭉클한 감정을 오래오래 간직하기만 했다면, 이 책이 난해한 소설이 되진 않았을 텐데, 나는 여기에 하릴없는 '사족'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청각과 시각의 소실로 인해 '접점'을 찾을 수 없다면 남은 감각은 '후각'과, '촉각', 그리고 '미각'이 남았는데, 후각은 좀 그렇다고 하더라도 '촉각과 미각'으로 사랑을 나누는(?) 방법이 남아 있지 않느냔 별 쓰잘데 없는 딴죽을 걸어재꼈기 때문이다. 물론 가깝게 지내는 부부사이가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사이인 까닭에 '사랑의 재확인(!)'을 하기 위한 '접촉(!!)의 편의성'이 쉽사리 성사되지 않을 거라는 '가설(?)'까지 세우고 있는 나 자신에게 참으로 대실망을 했더랬다. 이게 뭔 대환장의 파티란 말인가.

암튼, 아직은 '문학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하기엔 내공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뿐이다. 먼 훗날 '내공'을 냠냠한 다음에 다시 <희랍어 시간>에 도전해보고자 한다. 내 천박한 문학적 소양에 다시 한 번 절망을 안겨준 소설로 기억할 순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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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 - 동화를 꿀꺽해버린 꿀잼 심리학
류혜인 지음 / 스몰빅인사이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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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 : 동화를 꿀꺽해버린 꿀잼 심리학>  류혜인 / 스몰빅인사이트 (2021)

[My Review MMCXXIV / 스몰빅인사이트 1번째 리뷰] 심리학은 과학일까? 책 내용과는 상관없는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이는 꽤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면 우리 나라에서 '심리학'이라고 하면 마음(心)을 이치(理)를 연구(學)한다고 쉽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후 심리학은 '철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과학적 관점'의 영역으로 본격화하였다. 그래서 프로이트를 '정신분석의 대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신(생각)'을 '분석(검증)'한다는 '정신분석학'은 분명 과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심리학'이라는 명칭에 더 익숙하다. 그래서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과 생각을 탐구하는 '정신분석학'을 별개로 여기고, 전혀 다른 학문이라고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정말 별개의 학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철학적인 성향이 강한 '심리학'이란 명칭이 과학적 데이터를 모아서 검증을 하는 방식으로 연구하는 '정신분석학'으로 더 명징하게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오늘날에는 같은 뿌리에서 이어진 같은 학문으로 보는 것이 더 맞다. 즉 '심리학'은 과학적 관점으로 좀 더 객관화하며 읽고, '정신분석학'은 철학적 관점으로 더욱 넓게 바라보면서 읽는 것이 조금 더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 책 <심리학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를 읽어보니 '심리학'이 좀 더 명징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우리에게 낯익은 동화의 내용을 '기본' 바탕으로 깔고, 이를 '심리학적 관점'이라는 낯선 '이론'으로 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쉽게 말하면, '동화의 재해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말하면 이 책이 '심리학' 책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재해석'이 아닌 '과학자(심리학자)의 관점으로 바라본 동화'라고 표현해야 이해하기 쉽겠지만, 이런 제목이라면 누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겠는가? 어린이나 읽을 법한 '동화책'을 우수한 지능을 가진 '과학자의 눈높이'로 바라봤다는 것에 메리트를 느낄 독자는 정말 극소수일 것이다. 그래서 절충한 제목이 바로 <동화를 꿀꺽해버린 심리학>이다. 정말 읽고 싶어지는 제목이다.

책의 서문에서도 저자가 밝히고 있다. 많은 분들이 '심리학'에 관심을 갖지만, 정작 쉽게 풀어 쓴 '심리학책'은 많지 않다고 말이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수많은 '심리학 이론'이 꽤나 복잡한 연구과정으로 나열하고 있기에 쉽사리 이해가 되지도 않고, 툭하면 '누구의 연구결과'를 인용하고, 또 재인용하는 등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심리학 상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의 깊이'에 호기심을 갖고서 <심리학책>에 접근하려고 하면 너무 어려운 내용을 접하고 화들짝 놀라서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덮기 일쑤다. 거기다 참고해야 하는 '과학 이론'은 뭐 그리도 많은지..거기다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려는 심리학자들의 변명(?)도 웬만한 '대학논문'을 섭렵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접근조차 하기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이트'와 '칼 융'의 정신분석학 이론만 이해하려해도 얼마나 방대하고 산만하냔 말이다. 그들은 자신조차 설명하기 힘든 부분을 만나면 '무의식의 세계'로 도망가버리고 만다. 그리고서는 '그것'이야말로 자기 학문의 연구성과라고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저 황망하기만 하다. 그나마 '재미있는', '하기 쉬운', '콘서트' 등등 이런 제목을 달고 나온 '심리학 도서'들은 읽기에는 편하다. 이런 책들이 어려운 과학을 쉽게 풀어 썼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고 접하면 충분할 것이다. 물론 이를 계기로 더 깊은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세계에 도전하는 이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심리학 관점의 해설'보다는 '동화의 재해석'이 더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해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재미에 빠진 것이다. 동화 <신데렐라>에서 "그래서 신데렐라는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지만, 그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재미가 더 쏠쏠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 '부분'에 심리학적 풀이를 세세하게 써내는 정성을 쏟았지만, 그건 그거고! 동화를 그런 식으로 '재해석'하는 부분이 훨씬 더 인상 깊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다 덮고 난 지금도 '심리학자들의 연구 이론'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런 이론을 바탕으로 풀어낸 '동화의 뒷이야기'는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게 되었다. 물론 그 오래 전해지는 여운의 실체는 분명 '위대한 심리학'이 맞다. 그렇게 철저하고 적확한 '검증'을 했기에 더욱 합리적이고 인상적인 '뒷이야기'가 탄생한 배경인 것은 분명하지만, 역시나 '그건 그거고!'. 더 인상 깊은 것은 동화의 뒷이야기인 것이다.

이게 일반적인 독자들 반응일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결국 '실패'인 것인가? 그렇게 볼 순 없다. 만약 이 책에 이어진 '뒷이야기'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상상력'만의 결과였다면, 이렇게까지 깊고 오래가는 여운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심리학의 재미'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심리학 공부가 결코 쉽진 않겠지만, 심리학에 익숙해지면 비교적 '단순한 동화'조차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격한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정말 매력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은 최고의 '심리학 입문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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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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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 이세욱 / 열린책들 (2023) [원제 : L'Ultime Secre (2001년)]

[My Review MMCXXIII / 열린책들 24번째 리뷰] 베르나르의 소설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지금까지 <타나타노트>, <나무>, <고양이>, <죽음> 등을 읽었지만, 그의 소설은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말이다. 매번 흥미로운 소재를 갖고 톡톡 튀는 이야기 이끌어가는 만담꾼이지만, 그의 소설에서 '성(性)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나면 그저 그런 이야기만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오르가슴' 같은 묘사가 난무하기에 읽기에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늘 들곤 한다. 물론 그게 그렇게까지 '불편'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이야기 전개에 '몰입'을 하는데 방해하는 요소인 것은 분명했다. "거기서 꼭 그렇게 노골적인 넝담이 필요했나?" 베르나르의 소설을 읽다 보면, 종종 이런 말을 넋두리처럼 내뱉게 된다. 뭐, 비단 베르나르 소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노통브를 비롯한 대개의 '프랑스 소설'이 쫌.. 그런 경향을 보이는 듯 싶다. '불필요한' 성애 묘사..이런 거 말이다. 꼭 그런 묘사가 아니어도 충분히 재미있을 텐데, 굳이 그런 뉘앙스를 풀풀 풍겨서 '더 재밌을 소설'이 그저 평범하고 그저 그런 소설로 만드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뭐, 내 취향이 그렇다는 얘기다. 아직 <개미>는 읽지 않았는데, 설마 곤충을 묘사하면서도 그런 식의 썰렁한 성적 넝담을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 의뭉스럽다.

암튼, <뇌>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요즘 부쩍 '뇌과학'과 '인공지능'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어서 불현듯 이 소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려 20여 년 만에 다시 읽으니, 그때에는 '구현'되지 못했던 첨단기술이 '지금'은 일상의 일부로 흔하게 쓰이고 있어서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 당시에 읽을 때에는 '우와~'스러웠던 내용이 지금은 '그러네' 하면서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삼 '소설가'라는 직업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의 상상력이 멀지 않은 미래에 일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쥘 베른의 소설'도 경이롭게(!) 즐겨 읽곤 한다. 잠수함도, 우주선도, 세계일주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쥘 베른은 마치 '미래'를 구경이라도 한 것처럼 놀라운 묘사를 해냈기 때문이다. 베르베르의 <뇌>도 그랬다.

소설의 시작은 슈퍼컴퓨터 '딥 블루 IV'와 '사무엘 핀처'라는 인간이 두는 체스 대결로 펼쳐진다. 그리고 숨막힌 승부 끝에 최종적으로 '인간'이 이기게 된다. 2025년인 지금은 한낱 인간이 '인공지능'과 체스 대결을 벌인다면 완전한 패배만 경험하게 될 테지만, 20세기 말이 시대적 배경인 이 소설에서는 '인간'이 승리를 거두는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뭐, 그 당시만 해도 '인공지능'을 구현하기가 쉽지 않았고, 2016년 '알파고 vs 이세돌'의 바둑 대결에서 이세돌이 4:1로 패배를 함으로써 체스나 바둑을 두는 '인공지능'을 상대로 인간이 더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딥 러닝' 프로그램으로 인해 인공지능의 성능은 큰 도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인공지능(슈퍼컴퓨터)과 인간 간의 대결에서 왕왕 인간이 '슈퍼컴퓨터'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컴퓨터의 성능'을 시험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음을 추억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설의 이야기는 곧바로 '사무엘 핀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것도 세계적인 모델과 섹스를 나누다가 말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뉴스에서는 이렇게 타이틀을 내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는 별명을 가진 여성이 '세계 최고의 두뇌'를 쓰러뜨렸다. 사무엘 핀처 박사는 '사랑에 치여 죽은' 셈이다. 라고 말이다.

이보다 행복한 죽음이 있을까? 하지만 소설에서 사무엘 핀처 박사는 다시 살아난다. 물론 핀처 박사의 '과거의 행적'을 서술하면서, 그가 '어떤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게 한다. 박사는 '정신 병동'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며, 그곳에 불행한 교통사고로 인해 전신이 마비되었지만, '의식'은 살아 있으며, 거의 모든 감각을 상실했지만, '한 쪽 시력'과 '한 쪽 청력'은 기능했지만,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이라고는 오직 '눈꺼풀'밖에 남지 않은 희귀한 질환을 앓게 되었다. 전문 용어로 '리스'라고 부르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보통은 '식물인간'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오직 눈꺼풀만 움직일 있는 사람을 과연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환자는 결국 사랑하는 가족에게조차 '외면'을 당하고 만다. 왜냐면 '리스 환자'는 회복불가능한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기적처럼 깨어나 일상으로 되돌아온 케이스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그 환자(이름은 '장루이 마르탱'이다)는 결국 '온전한 의식'을 한 채, 죽은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소설의 전반부에서 '행복한 죽음'과 '불행한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환기시켜 준다.

이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이지도르'라는 전직 경찰 출신 '프리랜서 기자'와 '뤼크레스'라 불리는 신문사 '객원 기자'다. 이 두 인물은 전작에 해당하는 <아버지의 아버지>에서도 출연했다는데, 아직 읽지 못해서 무슨 내용인지는 모른다. 암튼, 두 기자는 '사무엘 핀처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내려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은 '행복한 죽음'이 아니라 '의도된 살해'라고 확신하고 수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핀처의 죽음은 과연 '무엇' 때문인지 알아내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그렇게 수사를 진행하다보니 살아생전에 핀처가 '에피쿠로스 학파'의 열렬한 추종자라는 사실을 파헤치게 된다. 흔히 '쾌락주의'를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은 것으로 많이들 오해를 하는 학파인데, 이 학파를 창시한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쾌락이란 실상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고, 쾌락이라 지칭한 것들도 온몸을 짜릿하게 해주고 전율이 일어난 만큼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말초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감'을 느낄 때 찾아오는 내면의 평온함을 충만에 이르도록 '경건한 삶'을 주장했던 것인데, 그의 후계자들은 그저 인생을 즐기는 데에만 열을 올리는 바람에 그저 그런 '쾌락주의'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 핀처가 참여한 '시엘(CIEL)'이라는 모음에는 그런 추종자들만 가득한 사람들이 즐비하다. 핀처의 아내도 바로 이 모임에서 만난 아리따운 여성이었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사무엘 핀처'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섹스를 하면서 죽었다면, '죽을만큼 강렬한 오르가슴'을 만끽하다 심장이 멈출 정도로 짜릿한 쾌락을 맛보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냐는 논리다. 원, 세상에! 부러울 것이 겨우 그거란 말인가. 하지만 두 사람은 '그것'이 결정적인 죽음의 '동기'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보다 심장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쾌락'에 빠져들게 만드는 뭔가 강력한 원인(동기)이 따로 있을 거라고 파고 들게 된다. 그래서 사무엘 핀처가 일을 하는 장소인 '정신 병원'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뭔가 비밀스런 실험을 했거나, 뭔가 다른 동기가 될만 한 것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찾아낸다. 아니, 아직 정확히 찾지는 못했다. 다만, 그렇게 찾아간 '정신 병원'에 뤼크레스가 갇혀서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아직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비밀은 '2권'에서 밝혀질 것이다.

베르나르는 <뇌>를 통해서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서 산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뇌가 '행복함'을 느낄 때 발생하는 현상들은 새로운 의문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뇌에서 분비되는 '어떤 것'이 있는지는 밝혀냈는데, 그것이 '어떻게' 작용해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아니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를 밝혀내려는 노력을 '뇌과학'쪽에서 많이 하고 있고, 현재에는 상당부분 밝혀내긴 했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것'을 뇌가 분비하게끔 만들고, 그렇게 분비된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확인된다면, 인위적으로 그 '어떤 것'을 합성해서 외부에서 뇌속으로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절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예스'라는 것이다. 물론, 뇌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반응'은 아니며, 정확하고 적절한 용량이 아니라면, 그에 따른 '부작용'도 엄청나게 심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뇌과학이 발전한 오늘에도 말이다.

그럼 다시 질문을 되돌려서,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쾌락이 행복하게 해주는가? 욕구충족이 되기만 한다면 행복한 귀결을 맞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욕구를 가지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동기가 존재한다면, '어떤' 동기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질문을 하다보면, 자꾸 돌고 도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쾌락=행복=동기'라고 하는 묘한 등식이 성립하는 것도 깨닫게 된다. 즉, 우리가 왜 쾌락을 추구하는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럼 행복해지려면 쾌락을 즐기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가? 막연한 쾌락보다는 '강력한 동기'를 충족시키면서 얻는 쾌락에서 더 강렬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단순히 '마약' 같은 것을 인위적으로 몸 안에 주입하는 것으로도 쾌락을 얻을 수 있지만, 바라고 바라던 것을 엄청난 노력을 해서 성취했을 때에 더 큰 쾌락을 얻을 수 있고, 더 많은 행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행복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뇌의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이 바로 <뇌 2>에서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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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6 : 삼국지 2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6
허경대 글, 정규하 그림, 손영운 기획, 나관중 원작 / 채우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6 : 삼국지 2>  나관중 / 손영운 / 허경대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XXII / 채우리 27번째 리뷰] 2권은 '적벽대전'부터 '사마염의 진(晉) 건국'까지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전히 오타가 많아서 눈에 거슬렸고, 워낙 빠른 전개 때문에 <삼국지연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초심자들에게는 오히려 더 읽기 어려운 책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수준 높은 독자가 읽기에 좋은 것도 아니었다. 중간 중간에 달린 '주석의 내용'은 유일하게 읽을 만한 정도였지만, 정작 핵심적인 '만화내용'이 매력을 깎아먹고 있는 듯 해서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숱한 <삼국지>를 읽었지만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요즘엔 '어린이를 위한' 책들도 꽤나 수준 높게 나오고 있는데, '서울대 선정'이란 타이틀을 달았으면서 이 정도인 것은 많이 아쉬웠다. 저자의 변명처럼 '2권'에 <삼국지연의>를 다 담기에 너무 벅찼다는 말이 십분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다른 '어린이용 만화책'처럼 '3~5권' 정도로 기획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정말 2권 이상으로 기획하기 힘들었다면, 1권으로 줄여서라도 '핵심 사건'만 나열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유비'와 '조조' 중심에서 벗어나 '동오의 인물들'이 많이 소개된 점이다. 이 책의 시작이 '적벽대전'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적벽대전'의 주인공은 제갈량이 아니라 '주유와 황개'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화공작전'을 구상한 것도 황개가 조조의 대선단이 빽빽하게 뭉쳐 있는 것을 염탐하고서 '화공'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도독인 주유에게 보고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한 역할은 조조의 80만 대군이 남하했을 때 손권의 신하들은 전쟁은 피하고 항복과 다를 바 없는 '강화회담'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젊은 손권의 혈기를 자극해서 '전쟁'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전부였다. '화살 10만 개'나 '손바닥에 불 화(火)자 쓰기', '동남풍 기원제' 같은 것은 나관중이 창작한 내용일 뿐이다. 정사 <삼국지>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적벽대전'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전쟁이라는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실제 '적벽대전'이 일어났다는 지역을 답사하면 생각보다 협소하고, 도저히 조조의 80만 대군이 대선단을 이끌고 쳐들어왔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얕은 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사 <삼국지>에서도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조조군 측에 '역병'이 돌아 많은 군사들이 병들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에 조조군 군영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점, 유비군에 쫓겨 퇴각했다는 점이 눈에 띨 뿐이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적벽대전'과 같은 대대적인 싸움의 흔적이 당췌 보이질 않는다. 이를 정리하면, '적벽대전'은 실제 벌어진 전쟁이라기보다는 풍토병과 같은 '지리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조조군이 '자진퇴각'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결과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만약 조조군영 쪽에서 일어난 화재가 '황개의 화공'인 것으로 본다면 적벽대전의 일등공신은 '황개'에게 돌아가야 하고, 유비는 고작해야 패퇴하는 조조군을 쫓아 이득을 챙긴 것뿐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암튼,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라고 하는 든든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갈량이 주장했던 '천하삼분지계'를 실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그럼 유비는 그토록 바랐던 '영토'도 얻었고, 와룡과 봉추 등 걸출한 인재도 영입했는데, 어찌하여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는 못했던 것일까? 사실 유비가 차지한 '형주와 서천(파촉)' 지역은 천하를 도모할 정도로 유리한 지역은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중원을 차지해야 천하를 얻은 것'이라고 말할 때 '중원'은 황하의 중하류 지역을 이르는 말이고, 이 지역은 이미 조조가 다 차지했다. 그리고 양자강(장강) 유역의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하는 알짜배기 땅은 손권이 차지하고 있으니, 유비는 감히 '천하'를 도모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천하의 제갈량도 '천하통일'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겨우 '천하삼분'을 이야기하며 조조와 손권의 싸움을 관망하며 어느 한 쪽이 너무 우세해지는 것을 '견제'하는 위치를 차지하며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이야기를 골자로 담아 '천하삼분지계'를 내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40대를 넘어선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는 너무도 요원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유비는 다리 한 번 쭉 뻗을 수 있는 '영토 한 뼘'도 없는 처지였으니, 일단은 수락했던 것이고, 그런 뒤에 '유표와 유장의 영지'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절반의 성공'을 얻은 셈이다. 그러나 유비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레(?) 넓어진 영토를 다스릴 만큼 수많은 인재를 얻기도 전에 '방통', 관우'를 잃은 것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아직 나라를 안정시키지도 못한 상황에서 제갈량 한 명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길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주'를 잃어버린 것까지는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서촉에 들어가서 천천히 '권토중래' 기다렸다면 <초한지>에서 유방이 서초패왕으로 불린 항우를 사면초가로 몰아서 '한 나라'를 건국한 위업을 달성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유비는 '유방'과 참 많이 닮았다. 그가 서촉을 다스리면서 스스로 '한중왕'이라 칭한 것도 유방이 진(秦)나라를 멸망한 뒤에 서촉땅에 유폐(?) 되면서부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방이 세운 나라 이름이 '한(漢)'이 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비는 관우를 잃은 슬픔이 컸던 것인지 제갈량의 만류를 무릅쓰고 '동오 정벌'에 나선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릉전투'에서 대패를 한 뒤 백제성에서 쓸쓸한 퇴장을 하고 만다. 그렇게 유비까지 죽고 나자 '촉한'에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제갈량과 어깨를 나란히 할 방통도 이미 죽고 없고, 관우, 장비, 황충, 마초 등 걸출한 명장도 속절없이 죽어나갔고, 조운, 마속과 같은 인재도 운이 따르지 않아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기도 전에 퇴장 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선주의 유명을 충심으로 실천하며 열심히 '출사표'를 내보였지만, 번번히 사마의에게 막혀 별다른 수를 짜낼 수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다'면서 사마의를 깍아내리고 제갈량을 드높였지만, 실제 역사기록에서는 제갈량의 압도적인 패배만 남아 있다. 이런 면에서 사마의는 <삼국지연의>가 만든 이미지 때문에 두고두고 '저평가'를 받고 만다. 사마의의 제대로 된 실력은 그의 후손인 사마염이 위나라를 물려 받아 황제에 오르는 위엄으로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도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에게 번번이 골탕을 먹는 인물로 등장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이 살았던 '원말명초'의 시대적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원나라가 기울고 사회가 혼란해지자 도적떼가 기승을 부렸는데,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홍건적'이었다. 이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진 가난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세력인데, 후한말에 활약했던 '황건적'과 흡사했던 것이다. 나관중은 이런 혼란한 시기에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생각하다가 <삼국지>를 떠올렸을 것이고, 위촉오 세 나라가 들어서 각축전을 벌이던 '영웅담'이 민중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다랐을 것이다. 그럼 역사적 사실을 감안해서 '조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했을텐데, 그러기에는 조조는 마땅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행적 가운데 '충'과 '의'를 내세우지 못할 정도로 비열한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조조가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굉장히 '실리'를 중시하고, '효율'이 좋은 것을 따박따박 잘 챙기는 엄청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조조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조조의 세력은 결국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조조는 민중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관중은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조조에게 협조했던 세력들 전체를 깎아내렸다. 여기에 반사적 작용으로 덕을 본 인물이 바로 '유관장 삼형제'였던 것이다.

실제 정사 <삼국지>에 유비는 말할 것도 없고, 관우와 장비는 진짜 몇 줄 나오지도 않는다. 촉한 출신이었던 진수는 꽤나 '객관적인 관점'으로 <삼국지>를 기술했다고 평가를 받기에 이런 '몇 줄 안되는 기록'은 그들의 평가가 나쁘지도 않지만, 그닥 좋지도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관중은 다르게 본 것이다. 유비를 '한고조 유방'과 동급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으면서, 관우와 장비가 '복숭아밭(도원)'에서 한 목숨을 다 받쳐서 혼란한 정국을 바로 잡겠다는 '결의'를 다진 내용을 선보일 정도로 이미지를 급상승 시켰던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복숭아가 무슨 의미였겠는가? <서유기>에서도 손오공이 복숭아를 먹고 불로장생의 삶을 살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게 성스러운 장소에서 누가 보아도 멋짐이 폭발하는 충성과 의리를 다지며 굳센 결의를 하였다는데, 이들이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누가 주인공이 될 것이냔 말이다. 그렇게 '도원결의'가 꽃을 피우면서 <삼국지연의>는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사 <삼국지>보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깊고 오래 가는 까닭이다. 명나라가 건국한 14세기부터 21세기 지금까지 '유관장 삼형제'가 주인공인 소설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것만 보아도 나관중의 기획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이렇게 유비 세력이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장하다. 덩달아서 드높여진 인물이 바로 '제갈량'이다. 정사 <삼국지>에서도 뛰어난 인재로 표현되는 제갈량이지만, 사마의는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면모를 보여준다. 단지,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은 조조가 '사마의'를 중요하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던 탓에 사마의에 대한 평가도 어쩔 수 없이 많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를 아예 '축소'하기까지 하면서 야심만 가득한 '이리'처럼 비열한 인물로 그려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마의에 대한 인상이 그리 썩 좋지 못하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당대 최고였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는 점은 빼박이다.

사실 <삼국지연의>는 너무 많은 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읽고 난 뒤에는 '누가 쓴 책'을 읽었는지 꼭 기억해두길 바란다. 기회가 되어 다른이가 쓴 책도 읽는다면 그 느낌이 정말 많이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한중일 삼국의 '서술 관점'도 사뭇 다르다고 볼 수 있다. 600여 년이 넘도록 널리 읽힌 소설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삼국지 이야기'는 해도 해도 재밌다. 기회가 되면 또 들려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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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5 : 삼국지 1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5
허경대 글, 정규하 그림, 손영운 기획, 나관중 원작 / 채우리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5 : 삼국지 1>  나관중 / 손영운 / 허경대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XXI / 채우리 27번째 리뷰] 수많은 <삼국지>를 읽었지만, 이 책만큼 허섭한 책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제한'이 많이 따랐다고 하더라도, '삼국지의 매력'은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줘야 했을 텐데, 어느 것 하나 '장점'이라고 꼽을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서울대 선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서 '책의 해설'에 관한 내용은 꽤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조차 웬만한 <삼국지> 마니아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뻔한 내용들로 가득했다. 그만큼 우리 나라에 <삼국지> 독자팬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을 텐데, 그런 점에서 많이 미흡한 것 같아 매우 아쉬웠다. 수천 명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삼국지>이기에 수많은 '등장인물의 얼굴'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은 힘들었을지 몰라도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위촉오 각각 10명 씩(총 30명) 정도의 인물은 특징을 좀 잘 살렸어야 했으면 좋았으련만, 그것도 많이 부족했다. 그 가운데 가장 아쉬운 점은 '유관장 삼형제' 가운데 유비가 가장 나이가 많다(?)도 했으면서도 유비만 수염이 없는 캐릭으로 그렸다. 심지어 '삼고초려' 때에는 유비 40대, 제갈량 20대인데, 유비는 여전히 수염 하나 없고, 더 어린 제갈량이 오히려 수염을 그려 넣어서 더 늙어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오타는 '하후돈'을 '하 장군'이라고 호칭하는 것이었다. 아니 '하후 씨 가문'인데, 왜 '하 씨'로 호칭한 것일까? 이런 자질구레한 실수까지 곳곳에 보이니 전혀 몰입할 수도 없었고 말이다.

암튼, 아쉬움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그래도 <삼국지>이기 때문에 짚어 볼 것이 있기는 하다. 다른 <삼국지>에서는 접하기 힘든 '내용'을 중심으로 몇 가지 정리하려 한다. 먼저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는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보통 <삼국지>라고 읽는 것들은 대부분 '모본(毛本)'이라 부르는 것으로 청나라 강희제 때, 모성산(毛聲山)과 그의 아들 모종강(毛宗岡)이 당시에 출간된 모든 <삼국지통속연의>를 모아서 '통일성'을 높이고, '간결한' 문체로 다듬어 새로운 책으로 간행한 것이라고 한다.

아시다시피, 정사 <삼국지>는 서기 280년 진(晉)나라 때 촉한 출신의 인물 '진수'가 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는 무려 1100여 년이 지난 명나라 초기다. 실로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정사'가 어찌 '연의소설'로 쓰여지게 되었을까? 그건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던 것을 훗날 나관중에 의해 '집대성'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 송 시절에는 '서민문학'이 발달하기보다는 시와 같은 고급진 '귀족문학'이 발달하였다. 그래서 역사서의 내용을 그대로 달달 외울 정도로 학식이 높은 분들에 의해 향유 되었으나, 명나라 시대가 되면서 귀족적, 사대부적인 고급스러움은 퇴색하고, '연의소설(장편소설)' 같은 서민문학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지연의> 같은 방대한 내용은 '한 꼭지씩' 흥미롭고 재밌는 부분만 따로 뽑아 '장(章)'이나 '회(回)'로 구분하는 '장회소설'로 만들어져서 전기수(이야기꾼)나 설화인(舌話人)이 입담을 섞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나관중은 이를 한데 모아 '집대성'할 생각을 떠올렸고, 수없이 많은 '장회소설'을 모으고, '역사기록(진수의 <삼국지>, '삼국지'에 주석을 달아 놓은 <배송지서>, <자치통감> 등등)'을 참고하여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기도 하며 새롭게 총정리를 했던 셈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나관중이 썼다는 '원본'은 사라졌고, 훗날 명나라 가정제 때 세간에 떠도는 <삼국지연의>를 모아서 정리를 했고, 청나라 때 '모본'이 등장하면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진수가 쓴 <삼국지>와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는 판이하게 다른 책이다. 가장 큰 차이는 진수는 '조조'가 위업을 닦은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았고, 나관중은 충과 의를 따져서 유비가 세운 '촉한'을 정통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까닭은 1100여 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조조의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뛰어난 재능과 빛나는 업적만 놓고 본다면 당대 '조조'를 따를 자가 없었지만, 그가 행한 행동들이 '황제(헌제)'를 볼모로 삼고 권력을 함부로 찬탈한 '패자'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조는 '명예'보다 '실리'를 더 중시하였다. 그 덕분에 위촉오 세 나라 가운데 '천하통일의 대업'을 위나라가 이루는 큰 업적을 쌓았지만, 그 이미지가 그닥 좋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유비는 실제 '역사기록'에 도덕군자로 소개될 정도로 인자한 면모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리고 실제로도 유비를 따르는 백성들이 꽤나 많았다고 한다. 유비는 '군웅할거의 시대'에 변변한 영지도 얻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유비를 따르는 신하들도 다른 군웅집단에 비해 '배신'을 하는 인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똘똘 뭉치는 양상을 보일 정도다. 그래서 훗날 사마염이 세운 진(晉)나라의 신하가 되지만 '촉한 출신'이었던 진수도 유비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해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천 년이 지나는 동안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가장 인기가 높은 위인'은 누구였을까? 두 말 하면 입 아플 정도로 '유비쪽 인물들'이었다. 더구나 나관중이 살던 '원말명초' 시기에 '홍건적'이 횡포를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후한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의 일화를 입에 올릴 때면 비슷한 느낌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인기에 불을 붙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도원결의'다. 실제 역사에는 없는 기록이지만, <삼국지연의>를 읽으면서 가슴 뜨거워지고 뭉클해지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주인공이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유관장 삼형제가 단연코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삼국지>는 '도원결의'로 시작해서 '오장원에 지는 별'로 마무리하는 '촉한정통론'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정석(?)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더구나 '원나라 몽골족'에게 큰 피해를 본 '한족'들은 <삼국지연의>를 읽으며 자신들의 뿌리가 '한고조가 세운 한나라'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고조 유방의 혈통을 '정통'으로 보기 시작했고, 비록 무능한 황제였지만 '헌제'를 핍박해서 황위를 찬탈한 '조조 가문'을 곱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편향된 인식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유비'를 헌제의 숙부로 퉁치고 '유황숙'이라는 네임벨류를 단단히 심어준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나라의 계보를 보면, 유비가 경제의 아홉 번째 아들인 '중산 정왕 유승'의 아들로 나온다. 6대 경제는 '전한 시대'의 사람이었다. 훗날 광무제가 '후한 시대'를 열었고, 명제, 장제, 화제, 상제, 안제, 소제, 순제, 충제, 질제, 환제, 영제, 소제, 그리고 헌제로 이어져서 '전한 경제부터 후한 헌제까지' 무려 300여 년의 세월의 간극이 있는 셈이다. 이 지난한 세월동안 '직계 혈통'일지라도 엄청나게 먼 사이가 될 터인데, 헌제와 유비는 '직계' 혈통 사이도 아니었다. 만약 직계 혈통이었다면 유비가 돗자리나 짜며 연명했을 턱이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유황숙'이란 호칭은 나관중이 '조조'와 맞설 수 있는 세력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당대에 형주의 유표, 서촉의 유장도 '같은 유씨'이고, '황족 출신'이었는데, 왜 '유황숙'이란 호칭을 유비만 줬겠는가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유표가 <삼국지연의>에서 홀대 받은 까닭도 살펴보자. 유비가 별다른 '영지'도 얻지 못하고 빌빌 거리고 있을 때, 유표는 알짜배기 땅이었던 '형주'를 다스리고 있었다. 우리는 <삼국지연의>만 읽으면 유표를 별별 일 없는 무력한 군주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유표는 원술과도 맞짱을 떴고, 손견을 궁지로 내몰 정도로 실력자였으며, 조조가 원소와 '관도대전'을 치를 때에는 원소와 함께 조조를 공략할 정도로 큰 세력을 갖추고 있던 대단한 능력자였다. 그리고 그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준은 바로 그의 영지에서 제갈량, 방통, 서서, 사마휘, 최주평 등과 같은 걸출한 위인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유표가 얼마나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잘 키우려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왜 <삼국지연의>에서는 유표를 형편없이 저평가 했을까?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유표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 활약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토록 뛰어난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었으면서, 왜 그 인재들이 유표를 도와 대업을 이루려 하지 않았던 걸까? 그게 바로 '유표의 한계'였던 것 같다. 장자였던 '유기'는 허약했고, 서자였던 '유종'은 어리고 나약했다. 더구나 유종의 생모인 '채씨'는 아주 못됐다. 그래서 나라꼴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서 꿍꿍이를 벌이다 끝내 나라가 망하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유표가 진정 실력이 뛰어난 위인이었다면, 이런 못된 아내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유표가 늙고 건강까지 나빠지자 젊은 시절의 실력만큼 발휘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점점 저물어가는 유표 세력이었기에 수많은 인재들이 유표에게 기대지 않았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원소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능력자'였던 원소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끝내 조조에게 패배를 하면서 몰락의 길로 가고 말았다. 그래서 그 결과만 놓고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원소에게 부족한 딱 한가지는 바로 '결단력'이라고 폄하하곤 하는데, 이는 <삼국지연의> 속에서 너무 잘 그려 놓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원소를 저평가하기에는 너무 안타깝다. 결단력도 없고 우유부단하며 팔랑귀를 갖고 있어 '좋은 말'을 귀담아 들을 분별력까지 없는 인물이 '반동탁연맹'에선 총대장을 역임했고, 적시적기에 공략을 해서 '공손찬의 알짜배기 땅'을 차지하며 하북 일대의 일인자로 군림할 수 있었겠는가?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한 것은 조조가 잘 나서라기보다는 '천운'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객관적일 것이다. 패자는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삼국지연의>에서 원소의 못난 점만 부각한 것도 참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못다한 이야기는 <삼국지 2>에서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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