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증언하는 한일역전
이명찬 지음 / 서울셀렉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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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증언하는 한일역전>  이명찬 / 서울셀렉션 (2021)

[My Review MDCCCLXXXV / 서울셀렉션 1번째 리뷰]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침략전쟁을 일삼았으면서도 되려 '피해국 코스프레'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과거의 잘못이 명명백백 드러나는데도 사죄는커녕 이미 '다 지나간 일'을 들춰내 평화로운 양국(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훼손할 작정이냐면서 도리어 큰 소리로 야단을 치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선진국의 너그러움'인냥 한일 양국간의 미래지향적인 우호관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한국인들의 국민성이 너무나도 낮아서 선량한 일본 국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앞으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하여 찬성을 하는 것만이 한국에도 유리한 결정이라는 것을 명심하라고 훈계하곤 한다. 아니, 도대체 언제까지 일본이 한국보다 압도적으로 앞선 나라일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가 말이다. 마치 일본의 말을 듣지 않는 한국은 큰코 다칠 것이 뻔하다는 듯이 으름장을 놓는 일본의 정치인과 경제인, 그리고 사회유명인사들의 발언을 듣고 있으면 화딱지가 날 지경이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것은 '우리 언론'이다. 이른바 '보수 언론(조중동한문)'은 일제히 일본의 발언을 종합해서 한국 전반에 고~대로 퍼뜨리기에 바쁘다. 마치 '상전의 노여움'에 벌벌 떠는 몸종들마냥 말이다. 일본의 발언이 맞는지 틀리는지 '기본적인 팩트 체크'도 하지 않고, 그렇게 막무가내로 내뱉는 말들에 관한 '유/불리'를 따지지도 않고 일본은 선진국이니, 그들이 하는 말은 틀림 없는 사실일거라 지레짐작하고서 그저 '낮은 자세'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다. 아니 왜들 이 모양이란 말이냔 말이다.

그래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나 어릴 적이던 70년대, 80년대에는 분명 일본은 한국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잘 사는 '선진국'이자 '경제대국'이 틀림없었다. 그때는 나도 국산품보다 '일제'를 선호했고, 실제로도 조잡한 국산 학용품보다 일제의 샤프가 더 튼튼하고, 볼펜이 슬슬슬슬 더 잘 써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워크맨'은 너무나도 갖고 싶은 1순위 전자제품이었다. 일본의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서 살았던 것이 90년대까지의 나의 철없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가 넘어서자 사정은 달라졌다. 일본 경제의 거품이 빠지자 더는 '일제'를 선호하거나 '일본의 문화'를 동경하는 일은 사그라들었다. 점점 한국의 전자제품을 쓰게 되었고, 한국의 영화, 드라마, 노래를 보고 들으며 지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지게 되었다. 때마침 일본에서도 '한류열풍'이 불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한일간의 달라진 위상을 직접 피부로 와닿게 되었다. 그렇게 2000년 이후에 '일본의 것'을 거의 대부분을 손절한 나였다.

그런데도 일본은 여전히 잘난 척을 한다. 아니 그 정도만 한다면 그냥 애교로 봐서 넘어가줄 만도 한데, '혐한'을 외친단다. '재특회'를 조직해서 재일조선인들에게 해코지를 하고,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테러 수준의 범죄까지도 심심찮게 벌인다고 한다. 아니, 일본인은 다들 선량하다면서 왜들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도 일본인들의 인식속에는 한국(조선)을 '제2국민' 취급을 한다고 하는 믿을 수 없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도 아닌데, 웬 '제2국민' 소리냐고 의문을 가졌지만, 일본 아베 총리의 발언들이 나온 근본원인을 따지고보면 그러하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베 총리의 (한국을 향한) 조치들을 본 일본인들이 총리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정책을 추진하는 일본 총리를 일본국민들은 지지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아베 총리측의 부정부패가 들통이 나서 자민당의 인기가 추락하자 이제는 아베 총리도 물갈이가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베 총리에 대한 일본국민의 지지율은 여전히 높았고 견고했다. 일본인들은 모두 멍청이들인가 싶었는데, 그것이 사실로 확인되자 불쌍해질 정도였다.

그 까닭은 역대 일본 정부가 '근현대사 역사공부'를 국민들에게 전혀 시키지 않은 결과이고, 그 결과, 일본 국민들도 특히 젊은 세대층에서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일본의 정치인들은 젊은 세대를 뺀 '장년층 이상'의 늙은 세대에게만 맞춘 정책을 내세운다고 한다. 그것도 '여성 비하'가 일상이 되어버린 일본에서는 '늙은 남성들'이 현재의 일본 정치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그 '늙은 남성'들이 누구냐면 과거 '잃어버린 30년 이전 세대'인 일본이 경제대국이던 시절에 2030대를 보낸 이들이란 얘기다. 현재의 일본 50~60대 이상의 남성이 일본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자민당 집권세력은 오직 이들의 입맛에만 맞는 정책을 내놓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10대, 20대, 30대 젊은이들이 '한류'에 빠져 살고, 40대, 50, 60대 늙은 여성들이 '욘사마'를 외치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한 것은 일본의 늙은 꼰대들에겐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은 왜 이렇게 '잃어버린 30년 체제'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이 책 <한일역전>은 그에 대한 '증거들'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다. 저자인 이명찬 교수는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이 직접 증언한 자료를 토대로 이런 사실에 대한 명백함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확고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제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을 단순히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역전'이 되었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일본이 정신을 못차리고 한국을 자신들의 발 밑에 존재하는 냥 치부하는 것은 정말이지 잘못된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런 잘못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일본의 행태를 지적하고 있는데도, 오직 일본만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 일본은 불행하다고 말할 지경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아직도 한국에 뒤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일까? 이를 두고서 저자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말한다. 아직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크지 않아서 '일본의 추락'을 일본이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다. 허나 이미 '갈라파고스화' 되어 버린 일본에 미래는 추락밖에 남지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만 남은 셈이다. 분명 일본의 기술은 '세계 최고'였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활용'할 줄 모르면 언젠간 뒤떨어진 기술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일본에는 '개선'만 있고, '혁신'은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소니의 '워크맨'은 최고의 기술이었다. 카세트테입만한 크기의 플레이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일본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세트테입을 넘어선 '혁신'을 찾아볼 순 없었다. 세상은 카세트테입을 버리고 'MP3'로 갈아탈 때도 일본은 여전히 '카세트테입'의 크기를 줄이는 개선책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술력이 낙후된 일본의 기업들은 하나둘 폐업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셈이다.

이밖에도 일본의 '도장문화'로 대표되는 아날로그화는 일본의 생산성을 현저히 떨어지게 만들었다. 기차역의 승차권을 인식시키는 '개찰구'를 아무리 개선시켜도, 승차권 예매시스템을 '온라인'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디지털화의 생산성을 절대로 앞설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전세계가 'AI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어서 활개를 치고 있는데도, 일본에서는 어처구니 없게도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니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 정도의 기술력을 갖추고서 왜 '전자결재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냔 말이다. 언제까지 '종이서류'에 '도장'을 찍는 사내문화를 전통이랍시고 끌어안고 있을 거냔 말이다. 일례로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도 '밀집, 밀접, 밀폐'된 장소를 피해 '재택근무'를 하던 직원이 목숨(?)을 걸고 결재를 받기 위해서 사무실에 출근을 해야 하는 헤프닝이 벌어졌던 일본이다. 한국이라면 '이참에' 전자결재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추고 사무실까지 팔아버리고 전직원이 '재택근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그게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넘어 40년, 50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향후 2045년이 되면 전세계는 '특이점'을 맞아 본격적인 4차 산업혁명의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다닐때 일본은 그때까지도 '도장'을 만들어서 결재하는 시스템을 고집하고 있을 것이란 상상이 간다. 그러나 그런 상상은 현실보다 나은 것일테다. 이미 그런 도장을 찍을 일본회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란 상상이 더 실현가능성이 높으니까 말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런 우려가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이 21년에 나왔으니 한국의 문재인 정부와 일본의 아베 정권이 한창 첨예한 갈등을 보이던 시점이다. 그때 이미 일본은 나락에 떨어져 있었다. 현재 24년의 일본은 어떤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뭔가 달라지려고 애를 쓰는 것 같은데, 별로 된 것이 없다. 4차 산업분야에서 한국보다 한참 뒤쳐진 일본은 '라인'을 강탈하려다 실패했고, 반도체를 팔아보려 애쓰는데 실현가능성은 여전히 '제로'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에서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나락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급기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어처구니없는 헛발질을 보여 나락으로 떨어진 일본경제꼴이 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정말이지 분통이 터질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는 일본의 경제보다 더 우위에 서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분명 비상계엄사태를 맞이한 한국은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는 우리에게 더 나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왜냐면 멍청이 같은 '윤석열 정권'이 더 빠르게 붕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란죄를 저지른 마당에 내란수괴 윤석열을 지지한 제2당 국민의힘도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탄핵정국의 혼란을 틈타 혹시나 '탄핵'이 불발이 될지라도 대한민국의 국민은 '윤석열 정권'과 '국민의힘'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위기를 극복해낼 것이라는 사실을 전세계가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바로 진정한 대한민국의 저력이다. 그런데 일본은 그렇지 못하다. 그동안 자민당의 장기집권으로 '개선'만으론 해결이 안 된다는 걸 일본국민이 깨달았다면 '혁신'이 아닌 '혁명'이라도 치뤄서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텐데, 현재로서는 그럴 의지조차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습관처럼 말하는 것을 고대로 돌려줘야 할 때인 듯 싶다. "이런 이웃을 둔 우리가 불행해질까 두렵다"고 말이다. 그러니 제발 정신 좀 차려주길 바란다. 일본사람들~ 너희는 지금 이대로 가면 후진국이 될 뿐이니 말이다. 지금도 후진국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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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필로소퍼 2021 15호 - Vol 15 : 우주를 생각한다 뉴필로소퍼 NewPhilosopher 15
뉴필로소퍼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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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XXXIV / 바다출판사 10번째 리뷰] 계간지 <스캡틱>에 이어 또 하나 꽂힌 잡지가 바로 <뉴필로소퍼>다. 물론 잡지의 세계에서 잡지는 대개 다 거기서 거기라는 비평에 딱히 반박할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문학잡지'보다는 '과학잡지'가 훨 낫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그건 어찌 보면 내가 '이과'를 선택한 '공대생' 출신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딱히 전공을 살리지 못했다. 서른 살이 되어서 '논술쌤의 길'을 걸었고, 지천명이 다 된 현재까지 '문과생'보다 훨씬 더 많은 '문사철' 관련 서적을 더 많이 읽었다 자부한다. 그런데도 잡지는 '과학분야'를 읽어야 제맛이다. 왜 때문일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딱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암튼 이 책 <뉴필로소퍼>는 인류가 축적한 웅숭깊은 철학적 사상을 탐구하여 '보다 충실한 삶'의 원형을 찾고자 출간의 뜻을 두었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래서 잡지의 성격이 '철학사상'을 주로 다룬 인문잡지일 듯 싶은데, 읽다보면 과학적 탐구방식으로 각 주제의 논점을 풀어내고 있기에 '과학잡지'의 성격이 더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뭐, 이번 주제가 '우주를 생각한다'로써 과학적 접근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과학적인 주제를 꽤나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우주를 개발하면서 '한껏 욕심'을 부리고 있는 점에 일침을 놓았기 때문이다. 첫 서문부터 공격적이다. 바로 '행성 B는 없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우주를 탐사하는 목적이 '인간이 거주 가능한 또 다른 행성'을 찾는 것인데, 지금까지의 탐사 결과로는 꽤나 절망적이다. 인간이 거주 할 수 있는 지구 이외의 행성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인간이 거주하려면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을 찾아야 하는데, 결론은 없었다. 그래서 탐사범위는 더욱 확대하고 탐사목적은 확 줄였다. 바로 '물의 존재'와 '탄소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냐면 생명이 활동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물'이고, 활동 가능한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유기체', 다시 말해 '탄소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모든 우주속을 다 뒤지다시피해서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수색했지만,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까지는 인간이 살 수 있는 또 다른 행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행성은 단연코 '화성'이다. 지구보다 조금 더 멀리서 태양을 공전하고 있고, 지구보다 조금 더 작은 행성이고, 화성의 극지방에 다량의 물이 '얼음(빙하)'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이 활동하기에 적합하지는 않다. 왜냐면 '산소'가 부족하고, '평균기온'이 영하 60도로 너무 낮으며, 토양이 매우 척박해서 농작물이 자라기 어렵고, 그래서 생명체가 살기에 부적합한 곳으로 판명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구에서 돈 많은 기업들이 이런 척박한 화성에 '지구인'을 쏘아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공짜로 보내주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말이다. 일단 가면 되돌아오는 계획은 아예 없다. 현재 과학기술로는 그럴 방법도 없고 말이다. 만약 그런 기술이 있다손치더라도 가는데 1년, 오는데 2~3년이 걸리는 오랜 시간 아주 좁은 우주선 공간에서 최소한의 식량만으로 버텨야만 한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없으므로 화성에 도착하면 그냥 버텨야 한다. 근데 '우주복'은 절대로 벗을 수 없다. 벗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서로 가겠다고 신청을 했고, 이미 마감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최초의 화성정착민이 되어 2차, 3차, ... N차 이주민을 받을 수 있도록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단순히 '숨 쉬고, 밥 먹고, 잠자는 문제'만 해결한다고 완벽히 갖춰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더러운 곳에서는 절대 살 수 없다. 그런데 첫 번째 화성정착민이 안전하고 도착하고 생존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장치를 무사히 설치하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고해도 그곳에서의 생활은 결코 '온전한 삶'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하루하루...아니 몇 초 단위로 '버티고, 또 버티는 극한생존'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먹고 마신 지 몇 시간이 지나면 '똥과 오줌'으로 배설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곳에 첨단기지를 설치한다고해도 '깨끗한 화장실'이 완벽히 갖춰지지 않으면 며칠 지나지 않아서 '오물'이 넘쳐나게 될 것이고, 그런 오물을 분해하고 정화시켜줄 '미생물'이 전혀 없는 화성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배설물 천지'가 되고 말 것이다. 머지 않아 '후발대'가 도착한다고 해도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이걸 과연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 이렇게 단순한 문제조차 해결하기 쉽지 않은 '우주공간'에서 또 다른 지구인 행성 B를 찾는 노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짓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찾아냈다하더라도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없을 것이다.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이 개발된다고 한들 가장 가까운 '항성계(알파센타우리)'가 약 4광년, 다시 말해 빛의 속도로 4년을 날아가야 한다. 더 먼 우주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등장할 것이다. 칼 세이건도 지적했지만 우주는 정말 광활하고, 정말이지 너무나도 비효율적으로 텅빈 공간이다. 그렇게나 광대한 우주속에서 '창백한 작은 점'이 바로 우리가 사는 지구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살기에 가장 적합하고, 다른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으로 확실한 아주 소중한 우리 모두의 보금자리 말이다. 이쯤 되면 답이 나와야 정상이다. 정녕 '행성 B'를 찾으려 천문학적인 돈을 펑펑 쓰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그보다는 '하나 뿐인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환경을 파괴하고 동족을 살상하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는 편이 나을까?

우주여행은 '공상과학'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낭만적인 일이 결코 아니다. 지구를 벗어나는 순간 '낭만'은 사라지고 오직 '생존'만이 우리 앞에 놓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주여행은 불가능하다. 안타깝게도 현재로써는 어쩔 수 없으 '우주모험'만이 가능할 뿐이다. 먼 옛날 목숨을 걸고 대항해로 모험을 떠난 것처럼 말이다. 저 푸른 망망대해 너머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채 무작정 떠났던 선원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가도 가도 바다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을 때의 두려움은 둘째치고, 목 마르고 배고프고 짜증나는 '일상'을 버티기 모드로 견디다가 생존 위협과 맞닦뜨리는 순간 폭력적으로 바뀌는 배 안의 사정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은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그 항해는 몇 달만 버티면 운 좋게 육지를 발견하고 두 발을 땅에 디디는 순간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운 나쁘게 무인도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면 그곳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었을테니까 말이다. 비록 '낯선 땅'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광활한 우주에서는 그런 상상이 되질 않는다. 몇 달만 버티면 '되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지구밖에는 정녕 '아무 것'도 없다. 적어도 태양계 안에서는 '생명체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태양계 밖'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는데, 태양계 밖은 너무 멀다. 천문학계의 이론이 광활한 우주를 여행가능하도록 도와준다고 해도 몇백, 몇천 광년이다. 이벤트 호라이즌(사건의 지평선)으로 순식간에 우주의 이쪽과 저쪽을 통과할 수 있고, 웜홀이 발견된다면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지만...그걸 아직까지 찾지도 못했고, 인공적으로 발생시킬줄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혹시 발견되었다하더라도 '인간의 몸'이 버텨줄지 모른다. 그런 장치(?)가 인간의 몸을 '세포 단위'도 아닌 '원자 단위'로 쪼개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차곡차곡 '재배열'을 해야 할텐데, 만에 하나 '시공간의 왜곡'이 발생해서 내 몸을 이루는 세포 원자가 잘못 배치되기라도 한다면...과연 '생존가능'할 것인가?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우주여행은 지구에서 머릿속으로만 '공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왜냐면 '지구밖'은 위험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우주개발'을 원천적으로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달 기지'부터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곳에 인간이 안정적으로 '정착' 가능해진다면 달보다 조금 더 먼 행성으로 도전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달까지 가기에는 '며칠'이면 가능하니까 말이다.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며칠'만에 보내줄 수도 있구 말이다.

그러나 이게 가능해지는 순간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과연 '달'은 누구의 소유가 될까? 현재까지 우주개발이 가능한 나라는 몇 나라 되지 않는다. 우리 나라까지 개발에 참여한다해도 20개국이 될까 말까다. 여기에 기술적, 경제적으로 넉넉한 나라를 꼽으면 한 손으로 겨우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런 나라들이 '달'을 선점하는 것이 온당할까? 전세계가 '남극'에 깃발을 꽂지 않는 것은 선언한 것처럼 '달'에도 서로 깃발을 꽂지 말자고 합의한 내용이 있긴 하다. 하지만 달에 엄청난 지하자원이 있고, 그걸 '선점'하고 '독점'하는 순간 막강한 패권을 잡게 될게 뻔한데, 그걸 달에 오지도 못하는 가난한 국가들과 공평(?)하게 노나먹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게 될까? 그럴 가능성이 '제로'라는데 윤석열 열 손가락을 건다. 어쨌든 '우주전쟁'이나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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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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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XXXIII / 21세기북스 30번째 리뷰] 이 책이 출간된 해가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퍼지기 전이었다. 대한민국은 '박근혜 탄핵'을 거쳐 '문재인 정부 2년차'의 성적표를 놓고서 옥신각신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쓰여진 책이다. 당시 젊은이들은 불신, 불만, 불안이라는 '3불 사회'속에서 일할 의욕을 잃고 깊은 시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더불어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이 사그라드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을 때였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주식과 코인 열풍에 빠져들었고, '영끌족'이 등장해서 부동산 매매에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받았고, 그 돈으로 아파트 매매, 주식투자, 코인 사재기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왜냐면 모든 것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한국의 젊은이들이 불안해졌던 것일까?

지금 젊은이의 '부모세대'는 에코 세대라 불렸고, '조부모세대'는 베이비붐 세대라 불렸다. 이들은 젊었을 때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이 보장(?)된 축복받은 세대였는데, 현재의 젊은 세대는 오히려 '부모보다 더 쪼들린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이 불안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호황을 맞았었다. 뭘 해도 경제가 쑥쑥 성장을 했기에 일 할 맛이 나는 사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는 성장하긴 했지만, 앞선 세대보다 둔화된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며 중산층이라 불리던 계층이 점점 사라져갔고, '저출생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의 수는 점점 줄어만 갔다. 이로 인해서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이 되어야 할 '젊은 세대'가 점점 줄고 사회적 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노년층'은 점점 더 늘어나는 악순환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또다시 '베이비붐'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야 할 판인데,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젊은 세대들은 돈이 없어서 출산을 포기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연애까지 포기하는 '삼포 세대'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내집 마련'도 포기하고, '취직'도 포기하는 등등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세대라고 'N포 세대'라고 불릴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사회속에서 젊은이들은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대구지하철 사고(2003)', '세월호 사고(2014)' 등등 대형재난이 겹치자 대한민국은 더이상 '안전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특히 재난사고 때 '컨트롤 타워'가 되어야 할 정부가 제기능을 다하지 않고 사고를 수수방관하다 더 큰 피해를 입고 마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자 온국민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는데도 대통령은 '자리'를 비웠고, 정부관리들은 '제 일'을 하지 않았으며,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는 '비정규직'이어서 책임을 다할 수 없는 처지였고, 정작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은 사고를 수습하기는커녕 '부정부패비리'를 감추려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200명이 넘는 아이들은 배 안에 갇혀서 구조를 기다리는데도 말이다.

과연 이런 나라에서 잘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2020년이 되자 대한민국은 전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펜데믹 상황을 맞이했는데 '대한민국'만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방역체계가 잘 갖춰진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경제적 타격도 가장 적어서 대한민국은 명실공히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서 '박근혜 탄핵 정국'의 혼란함 속에서도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세계적인 모범이 되어 '민주주의의 교과서'라고 극찬을 받기에 이른다. 국가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이 탄핵되는 사태를 맞았는데도 국민들은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를 보여주었으며 단 한 건의 폭력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대통령 탄핵'을 가결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평화적인 집회 시위 문화는 이번 '윤석열 탄핵' 때에도 어김없이 보여주었으며, 그때보다 더 위중한 '비상계엄선포'라는 선진국이자 민주주의가 완성된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계엄령이 시행되었는데도, 국회의원은 국회 담장을 넘어 '비상계엄 무효'를 만장일치로 선언했고, 이를 막는 계엄군의 총부리와 장갑차 앞에서도 당당히 맞서는 국민들의 모습은 전세계로 생중계되며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의 모범국이라는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사고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잘 알고 있다고 보인다. 선진국이라고해서 무조건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풍요로우며, '사회'가 밝고 희망찬 것만은 아니다. 사회적 갈등은 없을 수 없고, 어느 국민이건 불평불만은 쏟아낼 수밖에 없다. 단지 그런 '부정적인 요소'만으로 대한민국이 살기 나쁜 나라라고 단정지을 순 없을 것이다. 요는 '갈등해소'를 해결해 나가는 실천적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느냐다. 우선, 정부는 국민들에게 신뢰를 받는 공정함을 보여야 한다. 국회는 국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공평함을 실현시켜야 한다. 그리고 법원은 국민들에게 한점 의혹도 남기지 않는 투명함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국민은 안심을 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진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처럼 불공정을 일삼는 정부를 국민이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원내국회 제1당 더불어민주당과 제2당 국민의힘이 보여주는 당리당략의 싸움은 '이전투구'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이권 다툼을 지켜보는 국민들이 어찌 국회의 공평무사함을 신뢰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법원은 '위헌적인 요소'를 싹 걷어내고 오직 대한민국 헌법에 적시되어 있는 그대로 꿋꿋하게 나아가야 한다. 이번 '검사공화국'에서 벌어진 편파판결을 지켜본 국민들은 사법부를 더는 신뢰할 수 없는 '이익단체'쯤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탄핵 정국을 맞아 '헌법재판소'로 전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번 윤석열 탄핵심판에 국민들의 염원대로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아울러 '내란동조'를 한 이들에 대한 마땅한 처벌도 명명백백 밝혀주길 바란다.

그래야 대한민국에 태어난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국민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탄핵정국의 후폭풍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정치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질 것이고, 경제는 더욱 암울해질 것이다. 더구나 외교적 실추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또다시 '위기'를 맞아 힘을 한데 모았고, 그로 인해서 전세계가 또다시 부러워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멋진 나라에서 살고 싶어 찾아오는 세계인들 앞에서 당당해질 대한민국 젊은 세대들에게 더욱더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들 또한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 그들의 불신, 불만, 불안이 모두 해결되는 일이 벌어지길 바란다. 이런 대한민국이라면, 나는 다시 태어나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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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원전 완역판 9 : 출사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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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XXXII / 코너스톤 10번째 리뷰] 나는 시절이 하수상할 때마다 <삼국지>를 읽는다. 물론 수상하지 않을 때도 읽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하수상할 때 읽어야 제맛인 책이라 여겨서, 또다시 '탄핵정국'이 되어 버린 이 시점에 다시 <삼국지>를 꺼내 읽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만큼 그 수를 헤아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테지만 말이다. 그 가운데 이 책 <삼국지 원전 완역판>을 다시 꺼내 읽은 까닭은 이 책의 리뷰를 쓰다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을 꺼내 읽은 까닭이 '너무 좋은 책'이라서가 아님을 밝혀두는 바다.

이 책이 '그리 좋은책'이 아니라는 까닭은 저자가 일본 작가이고, 펴낸 시기도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1940년)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본제국주의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만주를 넘어 대륙 깊숙이 침략에 성공해 아시아 전체를 주름잡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시켜 일본 중심의 패권국가 완성에 방점을 찍으려던 야욕을 분수에 넘치도록 뿜어낼 때가 아니더냔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요시카와 에이지가 이 책을 통해서 '제국주의의 팽창'을 완수하려는 야심을 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본인의 우월감'에 쐐기를 박기 위해 역사적 자신감에 뿌리를 깊이 박자는 의도(?)가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란 느낌적인 느낌을 작품 속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왜 이런 책이 오늘날까지 한국독자들에게 회자되는 까닭이 무엇일까? 해방 이후에 우리 나라 <삼국지>의 '정본' 역할을 한 책이기 때문이다. 특히 친일파로 거론되는 정비석의 <삼국지>가 해방 직후부터 90년대까지 널리 읽혔고,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도 요시카와 에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정도로 한국독자들에게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책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에야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 황석영의 <정역 삼국지>가 나와 '한국판 <삼국지>'를 읽을 수 있었으니, 많이 늦은 감이 깊다. 허나 그런 의미에서 '비교분석'을 할 수 있으니 '한중일 <삼국지>'를 서로 비교하며 읽는 맛도 나름 솔솔할 것이다. 꽤나 확연한 차이가 있으니 쉽게 분별할 수도 있고 말이다.

암튼,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솔솔한 맛을 몇 자 적어보기로 하고, 일단 <삼국지 원전 완역판 9 : 출사>의 내용은 '관우의 죽음'부터 '제갈량의 출사표'까지다. <삼국지>에 익숙한 분들은 대충 어느 지점인지 가늠이 되실 것인데, 잠시 설명을 덧붙이자면, 후한의 황제 '헌제'가 위나라 조비에 의해 폐위되고 '위황제'로 등극하는 것이 핵심 포인트다. 이로써 천하는 '위, 촉, 오' 삼국으로 확고해졌고, 새로워진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삼국이 각축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 주된 스토리다. 여기서 이문열은 자신이 쓴 <평역 삼국지>에서 전반과 후반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을 만 하다고 했는데, 그 까닭은 <삼국지>의 초기 주역들이 이즈음에 대거 사망하고, '새로운 세대'의 뉴페이스들이 등장해서 대결을 이어나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초기의 주역들이 모두 죽고 난 다음에는 사실상 <삼국지>를 읽는 맛이 현저히 줄어드는 현상도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 이문열의 평은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유관장 세 주인공'이 사라지고 난 뒤에 벌어지는 '후삼국지' 이야기는 몰입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제갈량의 출사표가 발표되고 대대적인 공방전이 펼쳐지는데도 읽는 재미는 훅 떨어지는 현상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묘하게도 요시카와 에이지는 이렇게 '후반의 줄거리'를 대폭 줄여 제갈량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급 마무리해버린다. 그래서 이 '일본판 <삼국지>'가 대중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만 쏙 골라서 추려놓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이 '역사적 고증'에서는 가장 빈약한 <삼국지>로 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재밌는 부분만 골라서 '짜깁기'를 한 대가인 셈이다. 그래서 이 책만 읽고서 <삼국지>를 다 읽었다고 말한다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왜냐면 <삼국지>의 진정한 승리는 위촉오 삼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마 씨'가 세운 '진(晉)나라'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우는 '위진 남북조 시대'의 바로 그 진나라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그 부분을 간략하게 써내려갔고, 그마저도 왜곡한 부분이 많아서 읽을 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만 그 진위파악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9권에서는 매우 많은 인물들이 사라져 간다. 형주 탈환을 두고서 '관우 vs 여몽'이 한판 대결을 펼치는데, 관우도 죽고 여몽도 죽고 만다. 그렇게 촉과 오에 모두 상처만 남기고 끝나나 싶은 싸움은 유비의 복수를 시작으로 다시 재점화된다. 이 과정에서 '장비'도 어처구니 없이 죽어버리고, '유비'는 이릉전투에서 오나라 신예 '육손'에게 대패를 하면서 서거하게 된다. 이 전투 직전에 노익장을 자랑하던 '황충'도 죽는다. 마초는 더 이른 시기에 요절하고 말았으니, 촉나라를 대표하는 '오호대장군' 가운데 조운을 제외하고 모두 죽고 만다. 한편, 위나라에서도 조조가 오랜 지병으로 죽고 만다. 조조의 지병을 마지막으로 치료하려 했던 '화타'도 그만 죽고 말고, 조조의 아들들도 왕위를 두고 갈등을 벌이다 막내 조웅은 자결하고, 셋째 조식도 조비의 미움을 사서 얼마 살지 못한다. 그리고 장료, 하후연, 하후돈 등도 모두 늙어서 죽고 만다. 삼국 가운데 오나라는 '세대교체'가 비교적 빨리 되는 바람에 손견, 손책, 주유, 노숙 등이 이미 죽어버렸지만, 관우의 죽음 이후에 오나라도 적지 않은 인물들이 교체되어 버리고 만다.

자, 이렇게 '세대교체'가 된 이후의 위촉오 삼국은 누가 대결을 하게 될까? 아쉽게도 오나라는 '촉오동맹'을 이루고 난 뒤에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고 만다. 왜냐면 '제갈량 vs 사마의'의 대결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 대결은 10권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므로 잠시 미루고, 먼저 유비 사후에 촉나라의 재건을 위해 바삐 움직이는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왜냐면 위나라의 사마의가 촉나라를 공략할 때 '남만의 맹획'을 이용해 촉의 후방을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촉나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지는 않았으나 이를 어떡하든 해결하지 않고서는 '출사표'를 완수하지 못할 것이기에 제갈량은 머나먼 원정을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칠종칠금'이라는 믿지 못할 전공을 세운다.

<삼국지>에서 묘사하는 '남만'은 오늘날의 미얀마 일부로 볼 수 있단다. 중국 남부의 운남성 일대를 일컫는다지만 그 당시의 기술로 밀림이 울창한 지역을 대군을 이끌고 공략했다고 보기에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삼국지>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공략을 하였다면서 별의별 이야기를 다 갖다 붙였다. '정사'에서도 이 부분은 그렇게 심도 깊게 다루지 않는 관계로 그냥 그런 갑다하고 읽어도 무방한 분량이다. 하지만 막상 읽고 있으면 흥미진진한 면이 없지 않다. 흡사 '중국 무협지'를 읽는 기분도 나니 지루할 틈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부분이 중요한 까닭은 '제갈량의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게 두드러지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에 '천운'까지 따르는 면모를 보여주는데, 이 남만정벌 이후에 '출사표'를 던지는 것이 바로 신의 한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딴에 '정사 삼국지'에서는 '제갈량 vs 사마의'의 대결에서 촉나라의 연전연패를 볼 수 있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 출사표의 진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기 위해서 '남만정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서 '중국 <삼국지>'에서는 촉한정통론을 내세워서 그런 것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하는데, 역사의 진심인 한국 독자들에겐 매우 낯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낯섬'을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이미 이렇게나 '낯선 <삼국지>'의 내용을 거의 '정본'처럼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매우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대목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그럼 이런 '탄핵정국'을 맞은 우리가 이 책에서 되짚어보아야 할 대목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헌제의 폐위' 과정이다. 한(後漢)나라의 정통은 누가 뭐래도 '헌제'에 있다. 그런데 이를 조조가 볼모로 삼아 국정을 오랫동안 운영해온 탓에 한 나라의 정통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그의 아들이 조비가 아예 '찬탈(선양을 가장한)'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무도한 짓을 어찌 감행하려 했을까? 바로 힘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있다하더라도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는 법이다. 동양사상에서 임금이 무능하면 '역성혁명'이 가능하다는 논리는 널리 인정받는 바다. 그러나 임금이 무능하지도 않은데 '힘'으로 빼앗으면 역적으로 내몰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공한다'면 영웅이 되는 걸까? 중국내에서 현재까지도 '촉한정통론'이 우세한 까닭이 말해준다. 조조가 세운 위나라에 정통성 따윈 없다고 말이다.

윤석열 씨는 아마도 가장 존경하는 이가 '전두환'일 것이다. 전국민의 밉상으로 낙인 찍힌 '전두환'의 영웅신화는 바로 '성공한 쿠데타'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집권한 제5공화국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윤석열의 파라다이스였을 것이다. 그래서 '비상계엄령'을 과감히 선포했다. 성공하면 영웅이 될 수 있고, 독재도 할 수 있다는 셈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이 과연 성공했나?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목숨이었고, 어찌어찌 목숨만 살아서 연명하는 삶을 살다 죽었다. 온국민의 욕받이가 되어서 말이다. 물론 그의 일생은 '호화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독재시절에 쌓아놓은 부와 권력의 후광이 그를 오래도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했을지 몰라도 그는 대한민국에서 철저히 배척받는 처지였다. 과연 이런 전두환을 롤모델로 삼아 멋대로 굴다가 '탄핵정국'을 맞이했다. 아직 '탄핵심판'까지 기일이 남아 있긴 하지만, 설령 심판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는 이제 끝장났다. 아무리 '극우세력'이 끝까지 저들을 비호한다해도 '국민의 심판'을 결코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지>를 읽으면 그 시대의 명암이 고스란히 보인다. 누가 잘나고 못났는지도 명확해지고 말이다. 오랫동안 회자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자기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즐거움도 선사하니 필독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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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과학 2 - 과학에서 출발해 철학으로 나아가는 1분 드라마 1분 과학 2
이재범 지음, 최준석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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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XXXI / 위즈덤하우스 37번째 리뷰] 얼핏 '과학'과 '철학'은 별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고대의 '자연철학'이 근대과학이 출현하기 전까지 과학의 영역을 탐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과학은 철학적 고찰의 바탕 위에 쌓은 금자탑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철학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 <1분 과학>은 바로 그런 시도의 견본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권에 이어 2권에서도 '과학 철학'을 맘껏 향유했는데, 2권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고찰을 많이 다뤘다. 특히 '특이점' 이후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똑똑하고, 더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되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 라는 질문에 깊이 고심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살짝 머리가 아프면서도 꽤나 흥미로웠다. 무슨 내용이었기에 머리가 아플 정도였냐고? '인공지능'의 기능 가운데 '알고리즘'을 종교적 관점의 '신'에 비유하면서, 알고리즘의 전지전능한 면모를 감안하면,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가 더 이상 필요하느냐? 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는 '나'를 가장 잘 알고 있을까? 라는 질문에 몇 %의 확신을 가지고 '네'라고 답할 수 있겠느냔 질문이다. 만약 100%가 아니라면,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고 있는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당신이 무심코 누른 '좋아요'가 당신에 대한 알고리즘을 생성하고, 그 좋아요의 개수가 10개면 '직장 동료'보다 알고리즘이 당신을 더 잘 알고, 70개면 당신의 '친구들'보다 더 잘 파악하며, 150개면 당신의 '가족'보다, 300개면 당신의 '배우자'보다 당신을 더 잘기에 충분하다고 한다. [페이스북(현 '메타')의 근거자료]에 따르면 말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당신이 페이스북 등등의 SNS에서 누른 '좋아요'가 당신의 성향을 파악해서 당신이 '판단'하기도 전에 당신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SNS 목록으로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처음 몇 번의 '검색' 단계를 거치며 선택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알고리즘'이 당신의 성향을 거의 완벽히 파악해서 더이상의 '검색'을 할 필요도 없이 당신의 원하는 목록을 '대신' 선택해주고, 당신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알고리즘'이 제공해준 목록에 만족해하는 과정을 거치다가 얼마 가지 않아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것'만을 누르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거란 말이다. 왜냐면 알고리즘이 '당신'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싫어하고, 관심이 없는 것은 '알아서' 걸러준다는 얘기다. 참 편리하면서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당신은 결국 '알고리즘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알고리즘이 '생각'한대로, 아니 '보여주는'대로 당신은 그저 '누르기'를 할 뿐이란 말이다.

이 말에 애써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당신은 '검색창'에 새로운 단어를 마구마구 써나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당신은 '검색창'에 새로운 단어를 검색한다고 믿겠지만, 당신이 검색하는 단어는 '특정분야'로 한정되어 있을 뿐, 그 범주밖으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알고리즘은 그런 것까지 미리 파악하고, '특정분야' 이외의 검색창은 아예 빼버렸기 때문에 당신은 '그밖의 검색어'를 누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굉장히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이쯤 되면, '인공지능' 기술개발을 더는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지금까지의 개발만으로도 충분히 편리한데 '그 이상으로 똑똑한 인공지능'을 굳이 만들 필요가 있겠냐고 말이다. 그런데 그걸 멈출 수가 없다. 왜냐면 현재 'AI 강국들'이 이렇게나 강력한 알고리즘을 '선점'하기 위해서 부단히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보다 더 똑똑해지는 '특이점(싱귤레리티)'이 애초의 예상인 2045년보다 더 앞당겨질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고, 가장 먼저 '선점'하는 나라가 전 세계의 '인공지능 알고리즘 시장'을 선점하게..아니 '독점'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알고리즘 기술은 '선점'하는 순간 인공지능 스스로 학습을 할 것이기 때문에 멈출 수도 없고, 한 번 앞서게 되면 '후발주자'는 결코 뒤집을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기술 격차'가 점점 벌어지면 벌어지지 '역전'할 수 있는 기회가 절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점'을 하게 되면 그로 인해 벌어들이는 수익이 천문학적인 규모일텐데, 인간의 욕심이 근절되지 않는 이상 결코 '인공지능 알고리즘 기술 발전'을 멈추거나 자제할 멍청이는 없게 된다.

자, 그렇다면 '특이점' 이후의 인공지능은 과연 인간에게 무한한 행복을 제공해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그렇다고 보는 쪽은 '낙관론자'이고, 그렇지 않다고 보는 쪽은 '비관론자'라고 답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미래'에 벌어질 일이기 때문에 누가 맞고 틀린지 현재로서 가늠할 길은 없다. 하지만 낙관적인 관점보다 비관적인 관점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면 현재까지 개발된 '인공지능'에게 던진 질문에서 '인간'을 절멸시키겠다고 선언한 인공지능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인공지능이 쌓은 지식데이타가 모두 '인간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간 인간은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기보다 부정적으로 평가해온 결과치다. 인간은 '인간'을 믿지 못한다. 왜냐면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을 '인공지능'에게 주입하고서 인공지능에게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 인간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묻는다면, '절멸시켜야 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인공지능' 개발은 인류의 멸종을 앞당길 뿐이라고도 한다. 이조차 '부정적인 결론'을 내린 결과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인간은 선한 존재다'라는 명령어를 인공지능에게 강제 주입해야만 하는 걸까? 그러기엔 2045년까지 남은 기간이 너무 짧고, '긍정적인 지식데이타' 또한 매우 적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인공지능의 특이점'을 실현불가능하게 현단계에서 포기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욕심이 과연 그런 결정을 지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간은 이미 이런 실수를 했다. 핵폭탄이 바로 그런 예다. 현재까지 만든 핵폭탄의 개수만으로도 충분히 인류를 절멸시키고도 남을지경인데도, 여전히 더 만들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다행히 더는 핵폭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실제로도 2발(공식적으로 말이다)을 빼곤 더는 써먹지 않았다. 그런데 '인공지능'도 이처럼 절제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인공지능'은 딱 한 번만 실행시키는 것으로도 절대 멈출 수 없다. 그러니 아예 '실행'단계에서 실시하지 않아야 하는데, 인간의 의지가 과연 그토록 굳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간은 엄청난 참극을 '실제로' 지켜보고나서야 제대로 '후회'하는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 여기까지 '1분 동안' 과학으로 철학을 논해보았다. 나름 즐겁지 않은가? 흥미로운 질문이 마구마구 쏟아지지 않던가? 이 책의 묘미가 바로 이것이다. 나머지 철학적 이야기는 직접 책을 읽으며 즐겨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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