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7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7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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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7>  히로시마 레이코 / 김지영 / 넥서스Friends (2021)

[My Review MCMXV / 넥서스Friends 7번째 리뷰] 7권의 이야기는 '이야기속에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대서사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먼 옛날 센야가 '바쿠란'이라고 불리고 쓰쿠요가 봉행소의 주인이 되기 훨씬 전에 있었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쓰쿠요와 혼인할 뻔했던 '고주'라는 요괴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깊어만 간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의 복수'가 이루어져야 이 이야기는 끝을 맺을 수 있지는 않을까? 물론 '자신만을 사랑해주길 바라서' 쓰쿠요의 부모님도 살해한 고주와 쓰쿠요와의 사랑이 완성되길 기대할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느닺없이 소설의 내용을 스포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겠지만, 이번 이야기에서는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쓰인 것을 '액자식 구성'이라고 한다. 액자 속에는 '그림'이 펼쳐지고, 액자 밖에서는 '감상자'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방식인데, 잘만 꾸며 놓으면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이 되어 굉장히 몰입도가 높아지는 효과를 내게 된다. 이를 테면, 독자가 주목하는 'A'라는 이야기를 읽다가 갑자기 'B'라는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A'의 이야기 스케일을 더욱 크게 확장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마블 시네마 유니버스(MCU)'의 세계관이 바로 이런 스타일로 이야기를 확장시켜 왔고, 지난 20여 년간 우리는 '마블 영화'를 즐겨 왔던 것이다. <아이언맨>으로 시작해서 <헐크>, <토르>, <캡틴아메리카>를 이야기하더니 느닺없이 <어벤져스>로 모든 캐릭터가 총출동하여 등장하여 영화관람자들을 열광하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 뒤에도 <앤트맨>, <블랙팬서>, <닥터스트레인지>를 등장시켜 놓고 <어벤져스 시리즈>를 흥행시키더니 빌런 '타노스'가 등장하면서 <엔드게임>으로 대서사의 마침표를 찍는 거창한 스토리를 전개시켰다.

그럼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도 이런 구성이 가능할까? 물론 주인공은 '요괴 돌보미'가 된 야스케이고, 주요 배경은 '다이코 공동주택'에서 벌어지는 육아전쟁(?)이다. 그런데 매번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주인공 '야스케'만 등장하지 않는다. 야스케를 둘러싼 '서브 캐릭터'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다시 원래의 '야스케의 육아전쟁'으로 이야기의 초점이 되돌아오길 반복해왔었다. 그러다 7권에 이르러서는 '봉행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다가 급기야 '쓰쿠요가 결혼할 뻔 했었던 사연'으로 독자들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그런데 그 결혼당사자가 그리 달가워하는 '여성'도 아니었고, 심지어 결혼을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쓰쿠요의 부모님'을 살해한 범죄자이기도 했단다. 그래서 그녀에게 벌을 주기 위해 '봉행소의 얼음감옥'에 가둬두었는데, 이번에 봉행소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 덕분에 탈옥할 수 있었고,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감옥에 잡아넣은 것에 대한 복수로 '쓰쿠요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이'를 죽여버리겠다고 선언까지 해버렸다. 그런데 그 복수의 대상자가 의외로 '요괴돌보미, 야스케'로 지목된 상황이다. 왜지? 야스케는 '쓰쿠요'가 가장 사랑하는 이도 아니고, 소중하게 여길 리 만무한 '인간'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의외의 대상 지목'이 독자의 관점에서는 신선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 까닭'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엉뚱하면 엉뚱할수록 궁금증이 더 커지는 것을 감안한 '작가의 센스'라고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의외의 대상 선정 방식'까지는 흥미롭게 진행되는데 반해, '그 감춰진 사연'이 다 밝혀지고나면 그리 깊이 몰입을 했었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매우 간결하게' 일단락이 되는 것이 매우 아쉽다. 일단 얼음감옥에서 탈옥한 요괴 '고주'의 복수는 8권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복수를 하게 이른 '원인'이 그리 심각하게 화를 낼 일인가 싶어서 아쉽다. 이렇게 싱거운 '복수의 이유'를 근거로 삼은 까닭은 애초에 작가가 '성인소설'로 구상했던 이 책이 출판사의 의견을 반영해서 '어린이소설'로 둔갑을 하면서 많이 싱거워진 것 같다. 만약 애초의 구상대로 '성인용'으로 만들어졌다면 더욱더 잔혹하고 섹시한 이야기로 독자들을 사로잡았을 것 같아서 더욱 아쉬운 대목이다. 어차피 '피가 철철 넘치는 묘사'로 가득한 소설인데, 굳이 '어린이용'으로 컨셉을 잡은 까닭이 뭔지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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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6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6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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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IV / 넥서스Friends 6번째 리뷰] 6권의 주요 줄거리는 '버림받고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와 '가짜이야기를 퍼뜨려서 재미를 보는 언령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모두 '감춰진 본 이야기'이고, 드러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고양이 요괴의 공주, 오미쓰'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고양이들의 왕인 오미쓰가 '흰 고양이'로 변신을 하고서 야스케의 요괴돌봄집에 머물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핵심이다.

어찌보면 줄거리는 '공주의 나들이' 격으로 흘러간다. 하루종일 시중을 받고 지내는 '고귀한 신분의 삶'이 얼마나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이었겠는가. 그래서 오미쓰는 '평민들의 삶'을 즐겨보기 위해 야스케를 찾아나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요괴 공주의 일탈(?)로 이야기는 전개되지만, 요괴들이 주인공인 이상 벌어지는 사건은 '피 비린내 나는 저주'로 얼룩진다. 이른바 '고양이 머리 저주'다. 이 저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네 마리의 고양이 목숨'이 필요했다. 그 네 마리는 각각 '색깔'이 달라야 했고, 하나같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야 '저주의 효과'가 더욱 강렬할 수 있단다. 그리고 이 저주는 '저주를 거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소문이 퍼지는데, 그 때문에 마을 곳곳에서 고양이들이 끔찍한 죽임을 당하고는 '고양이 시체'가 무더기로 발견되기 시작했단다. 이런 흉흉한 소문이 들리더니 끝내 '고양이 머리 요괴'가 등장해서 원한을 산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 '고양이 요괴의 공주'가 활약을 하게 되는데...

이번 이야기에서는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안 좋은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것 같다. 고양이의 개체수가 너무 늘어나서 문제가 되는 도시에서 '고양이'에게 몹쓸 짓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라든가, '가짜뉴스'를 생산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쳤는데도, 정작 자신은 엄청난 '금전적 이득'을 챙기는 악의적인 유튜버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먼저 '고양이'는 유해 동물인지 한 번 따져 보자. 일본의 깊은 산중에는 '곰'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등산길에 곰을 마주쳤을 때 대처요령 따위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야생동물'과 만났을 때 사람들은 위험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여러 조치들을 취하곤 한다. 그런데 '고양이'를 마주쳤을 때 위험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까? 물론 사람이 길들인 고양이는 정말 귀엽다. 하지만 '야생동물'에 속하는 고양이는 '맹수의 본능'을 갖고 있어서 충분히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길고양이'가 많아지는 추세여서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길고양이 뿐 아니라 '야생동물의 개체수'가 늘어나면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는 종종 문제가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길고양이가 늘어나는 까닭은 뭘까? 하나는 사람들이 고양이를 기르다가 버리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길고양이의 번식력'이 생각보다 월등하다는 경우이다. 두 가지가 큰 원인이고, 이에 대한 대처방안도 마련하지만, 그 방안이 꽤나 끔찍하다는 것이 깨름직하다.

유기견(버려진 강아지)도 구조되었다가 주인이 찾아가지 않으면 '안락사'를 시키는 것처럼 대부분의 '야생동물'은 포획 후 다시 자연에 방사되는 경우도 있지만, 보호소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개체수가 너무 많은 경우에는 '안락사'를 시키기도 한단다. 이렇게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길고양이'는 꽤나 많다고 한다. 그밖에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많이 기르다가 열악한 환경에 처해 뜻하지 않은 '동물학대'를 하는 '애니멀 호딩 문제'도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또, 너무 많은 길고양이의 개체수를 억제하기 위해 '수컷 길고양이'만 잡아다가 '중성화 수술'을 강제로 시킨 뒤에 다시 풀어주는 경우도 있다는데...이건 좀.. 이런 방법이 정녕 '인간'을 위한 것인가? '동물'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과 동물의 공생'을 위한 위대한 결단인가? 여러 모로 '동물'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 일방적으로 동물에게만 '학대'를 가하는 것은 아닌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짜뉴스'로 재미를 좀 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책속에서는 '거짓'을 '진짜 이야기'처럼 퍼뜨려서 즐거움을 취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을 '언령사'라고 표현했다. '말의 힘'을 갖고 있어서 '하는 말'마다 사람들이 솔깃해하고, 그로 인해 거짓을 말해도 사람들은 진실로 믿게 하는 재주를 가진 이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기발한 재주를 갖고서 '좋은 일'에 쓰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런데 '나쁜 일'에 쓰고, 그렇게 실제로 벌어진 나쁜 일을 지켜보면서 한껏 즐거워하는 악당이 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이 '언령사'로 인해서 앞서 말한 '고양이 머리'라는 저주도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간절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네 마리의 고양이'를 희생시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가짜뉴스'를 퍼뜨려서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데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자신의 재주'가 참으로 신기하다며 더 많은 가짜뉴스를 퍼뜨리려 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결국 밟히는 법이다. 언령사는 고양이 요괴의 공주, 오미쓰에게 잡혀 벌을 받게 된다.

요즘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돈방석이 앉은 '극우유튜버'들이 정말 많다고 한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몇만 원씩 '후원금'이 쌓이니, 이들은 더욱더 고무되어 점점 더 심하고 과격한 언행을 일삼으며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급기야 이들은 '과격시위'를 진두지휘하고, '법원습격'을 독려하며, '판사색출'까지 나서며 사법부를 파괴하는 일까지 벌이게 되었다. 한마디로 '돈벌이'가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가짜뉴스'를 양산한 죗값을 받을 준비는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이 용케 '사법부의 준엄한 심판'을 피한다하더라도 '탄핵'과 '대법원 판결'이 결정되고 난 뒤에 우리들이 벌인 '난장'을 수습하는 단계에 들어서면, 국민들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가짜뉴스'를 퍼뜨렸던 유튜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국민들이 '후원금'이란 명목으로 날름날름 처먹은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는 꼴을 그냥 두고 보겠느냔 말이다. 하긴 '표현의 자유' 뒤에 숨어서 지금도 '일베'들은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으니, 저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내란죄'에 동조한 범죄자로 심판받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하고도 뻔뻔스럽게 살 수 있다는 착각은 어떤 '뇌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가능하다고 여기게 되는지 정말 궁금할 뿐이다.

물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믿는다. 그래서 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어 주고 싶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죄에 대한 죗값은 달게 받고 난 뒤에 개과천선한 이들만을 품어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따뜻한 품'속에서 선량한 사람들의 '사랑'을 쭙쭙 빨아먹는 악마새끼가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죗값은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죗값은 당연히 '내란죄'이니 '사형'이다. 또는 '무기징역'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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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5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5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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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III / 넥서스Friends 5번째 리뷰] 5권에서는 '요괴와 인간의 결혼식'이 펼쳐진다. 지난 권에서 '화사족의 공주님, 하쓰네'가 야스케가 머무는 다이코 공동주택 집주인의 아들인 '교조'와 연애를 하더니, 결국 결혼까지 성공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까지 아주 험난한 과정이 펼쳐진 것이 뻔하다. 왜냐면 '같은 종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종족'이 아니면 곤란한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 첫 번째로 일단 두 종족의 '시간'은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 인간의 수명은 고작해야 '60살'이다. 이 책의 배경이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시절'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대략 17세기 정도일 것이다. 그 시절에 100살을 사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대개 '환갑'을 맞이하면 정말 장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인간 종족인 '규조'가 부잣집에 살고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먹으며 건강하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기대 수명'은 고작 60살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요괴 종족은 '불멸의 존재'는 아닐지라도 기대 수명이 '수백 년'이 훌쩍 넘을 것이 분명하다. '천 년 묵은 여우'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으니 오래 살면 1000년도 넘게 살아가는 것이 '요괴의 수명'이다. 그런데 그 둘이 사랑을 하고 짝을 이룬다면 인간은 100년도 못 되어서 죽고, 요괴는 사랑하는 짝을 잃은 채 900년 이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울리지 않는 짝이다.

두 번째로 일어날 곤란한 상황은 둘의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규조는 부잣집 도련님답게 '방탕한 생활'을 하며 살아왔다. 반면에 하쓰네는 '화사족의 공주님'답게(?) 세상물정 모르고 곱게 자랐다. 이런 둘이 어우러져 짝을 이루면 어떤 부부생활이 연상되는가? 닳고 닳은 남자와 순진무구한 여자가 짝이 되면 남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가 답답할 것이고, 여자는 너무 많이 아는 남자에게 휘둘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맘고생을 하던가? 아니면 삐뚫어지던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두 사람이 부부생활을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하쓰네와 규조'가 우연히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하며, 연애를 하게 된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운명의 짝으로 굳게 믿고 '결혼'까지 결심을 하는데...마지막 걸림돌인 '하쓰네의 유모 요괴, 하기노'가 등장해서 이 둘을 갈라놓으려 한다. 바로 '사랑의 훼방꾼' 등장이다. 사실 '연애소설'에서 이 훼방꾼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 역할이 연인을 갈라서게 만드는 것인데도, 결국엔 훼방꾼 덕분에 연인의 사랑은 이루어지고 마니까 말이다. 너무 뻔한 스토리지만, 그래도 훼방꾼이 없으면 '러브스토리'는 밋밋해질 뿐이다. 그래서 유모 하기노는 규조에게 '세 가지 시련'을 주고서 아가씨를 사랑한다면 '증명'을 해야 하고, 그 증명은 '시련 극복'이라고 단언한다. 하쓰네의 부모도 아니고 유모 주제에 무슨 권한으로 이러는 것인가 싶지만, '화사족 요괴'의 부모는 원래 '사랑없이 결혼하기'로 유명한 요괴라서 하쓰네의 부모도 하쓰네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키웠다. 그렇게 버림받은 아기와 다를 바 없는 하쓰네를 '친어머니'처럼 걷어서 키운 정 때문에 '유모 하기노'는 아가씨의 짝이 될 '규조'에게 죽음의 고통보다 더 한 끔찍한 시련을 마련한 것이다. 그것도 세 가지나 말이다.

규조가 겪어야 할 시련은 '야스케'처럼 '요괴 돌보미'가 되어 요괴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물론 야스케의 도움을 받아선 안 된다. 오직 규조 혼자만의 힘으로 극복(?)..아니, 요괴의 아이들을 돌봐야만 한다. 그리고 요괴들의 만족도 조사에서 아주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시련의 극복 여부를 판가름하겠다고 한다. 그럼 규조를 찾아간 첫 번째 요괴 아이는 누구였을까? 그건 바로 '가난뱅이 신, 신보'였다. 완전 상거지 꼴로 나타난 신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두침친하고 음산할 뿐만 아니라 냄새까지 지독해서 집으로 들이는 것조차 꺼릴 정도의 아이였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 두 번째 요괴 아이는 '거미 야차의 딸, 쓰야'였다. 규조는 이 요괴 아이를 딱 삼일동안만 잘 데리고 있으면 되는데, 조건은 '쓰야의 몸무게'가 절대로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쓰야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이 참으로 곤란한 것이었다. 인간인 규조에게는 더욱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요괴 아이는 '그림자 요괴'였다. 하지만 규조는 그 요괴를 만남과 동시에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데...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는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으로 유명한 히로시마 레이코의 소설이다. 하지만 '전천당'보다는 이 소설이 훨씬 더 낫다고 본다. '전천당'은 너무 황당한 이야기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개연성'이라도 있어야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겠구나하고 예상이라도 될텐데, 생뚱맞게도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괴상망측한 설교(교훈)'로 끝맺음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는 그런 엉뚱한 '개연성'은 없다. 그리고 요괴일지라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해치거나 하지 않고, 반드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밝혀진 이유가 공감이 가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들었던 셈이다. 물론 요괴들의 행동들이 '전천당의 과자'만큼이나 해괴망측하게 일어나곤 하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 '해괴망측함'이 레이코 소설의 매력이 아닐런지 싶다.

우연한 만남으로 인간아이와 대요괴가 함께 살게 되지만, 그 둘의 인연으로 인해 '인간 아이가 요괴 아이를 돌보는 일'이 펼쳐진다. 이를 '메타포(은유)적인 해석'으로 풀이해보자면, 레이코가 그려낸 '요괴'는 일본인들의 마음속에서 그려진 '외국인들의 모습'은 아닐런지...섬나라에 살다보면 '외국문물'과 조우하는 일이 극히 제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연찮은 계기로 '외국인'과 만나게 되었을 때, 일본인들은 그들을 '외계인'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따위의 양갈래의 감정이 '요괴의 모습'으로 투영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렇게 분석을 하고 보면 히로시마 레이코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 21세기 일본인들이 보여주는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마땅한 이유가 없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일본인들에게 친근한(?) 요괴를 보여주면서, "요괴도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일본인들이 어찌 하여 '외국인'은 요괴보다 덜 이상할텐데, 더 극렬한 반감을 내보이는 건가요? '외국인'에 대한 이유 없는 미움을 거두어 들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들'도 '일본인'과 그렇게 다를 것이 없답니다. 마치 '요괴'와 '인간'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라고 말이다.

암튼, 요괴와 결혼을 하게 된 '규조'의 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질까? 6권에서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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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통 만화 삼국지 3 - 군웅할거 시대에 천하를 다투다
나관중 원작, 천웨이동.량샤오롱 글.그림 / WISDOM(위즈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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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II / 위즈덤(Wisdom) 3번째 리뷰] 지난 2권에서 조조의 손에 붙잡힌 여포는 끝내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하지만 '인재경영'으로 천하를 제패하려 했던 조조가 왜 여포와 같은 천하무적의 무장을 포기하려 했을까? 여포를 죽음으로 내몬 결정적인 역할은 바로 '유비의 한마디'였다. 여포는 조조에게 붙들리자 걸출한 영웅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조조 앞에서 목숨을 구걸한다. 그리고 조조의 충직한 부하가 되겠으니 자신을 무장으로 써달라고 간청한다. 이에 '비장(飛將: 전장에서 날아다닐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장수)'으로 활약한 여포의 실력을 아끼는 마음에서 살려주려는 의도를 보이자, 유비가 조조 앞에 나서며 조언을 한다. "여포에겐 세 명의 아버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정원, 두 번째는 동탁, 세 번째는 왕윤이었다. 그리고 모두 여포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제 조조, 당신이 여포의 네 번째 아비가 되려는가? 나라면 그러지 않겠다"라고 말이다. 이 말은 들은 조조는 여포를 참수해버린다.

사실 정사(正史)에서 여포는 '몽골족 출신'으로 정통 한족은 아니다. 그래서 한족 출신인 조조나 원소와 같은 인물에 비해서 그렇게 뛰어난 인물로 묘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포의 실력이 너무도 출중한 까닭에 '이민족 출신'인데도 여포에 대한 묘사는 '비장'으로 표현할 정도다. 싸움에 있어서 당할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반동탁 연합군'이 출정했을 때에도 여포, 단 한 명의 장수 때문에 18개의 연합군이 '사수관'에서 꼼짝도 못하고 나아가질 못할 정도였다. 그런 여포를 '유관장 삼형제'가 싸워서 물러나게 했다고 묘사했으나, 이는 '정사'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더구나 한 명의 무장을 상대로 '세 명'이 나서서 겨우 도망가게 했다는 것이 전부였다는 묘사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싸움에 적수가 없던 여포가 끝내 조조에게 붙잡혀서 죽임을 당한 원인은 '조조 진영'에 뛰어난 장수와 책사 등의 인재가 차고도 넘쳤다는 사실로 볼 수도 있었지만, '인해전술'로 인한 '중과부적'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이를 '한족의 입장'에서 여포는 무력에서는 당할 자가 없지만 지력은 한참 부족해서 '진궁'과 같은 뛰어난 책사와 '장요' 같은 훌륭한 무장을 부하로 두고서도 조조에게 사로잡히고 마는 어리석은 '이민족'이라는 프레임을 뒤집어 씌운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여포의 죽음'으로 유비는 자기 진영을 잃어버리고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조조가 모시고 있는 '헌제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유비는 헌제로부터 '황숙'이라는 칭호와 몰래 '혈서'를 받아들고 '역적 조조'를 처단하는 명분을 얻게 된다. 여기에 조조가 천자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무엄한 행동이 점점 도를 지나치자 '동승'을 비롯한 충신들이 조조를 역적으로 삼고 '처단'하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여기에 유비도 합류하지만, 유비는 오히려 동탁의 폭정을 상기시키며 '때를 기다리라'고 지금은 자중해야 하는 의견을 내놓고, 모두의 동의를 얻는다. 하지만 이런 모의 사실이 '동승의 노비'에게 발각이 되어 조조에게 밀고를 해버리니 '헌제의 혈서'는 쓰여지지도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고, 헌제의 자식을 임신하고 있던 '동승의 딸, 동 귀비'를 내전에서 목 매달아 죽이고, 동승을 비롯한 반란모의 가담자 700여 명을 모두 처형하니, 그 끔찍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이런 참극을 피한 사람은 '마등'과 '유비'였다. 마등은 서량에 머물고 있어서 화를 피했고, 유비는 마침맞게 조조에게 군사 5만을 빌려 '원술토벌'에 나섰다가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조는 유비도 반란가담자라는 사실을 알고 유비를 처단하러 군사를 이끌고 나선다.

이에 유비는 서주성에서 조조와 맞서며 원소와 손을 잡기로 하고, 조조가 '허도'를 비운 사이에 원소가 조조의 빈집을 털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이로써 조조를 양쪽에서 협공하며 우세를 점치려 했으나 원소는 출정날이 다가왔는데도 미적거리더니 끝내 '막내아들의 질환'을 핑계 삼아 출병하지 않는다. 원소의 우유부단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훗날 '관도대전'에서 조조보다 10배가 더 많은 병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결국 패배하는 원인으로 삼고 있다. 암튼 유비는 원소만 믿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이에 장비를 선봉으로 세우고 유비도 중간에 매복을 하려 했지만, 조조의 뛰어난 용병술에 막혀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도망 가버리고, 관우만이 홀로 '하비성'에 남아 조조군의 포위망에 둘러싸이게 된다. 그렇지만 조조는 '관우'라는 인재를 탐냈기에 관우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고 항복을 받아낸다. 관우도 유비의 아내들을 지켜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었기에 유비 형님의 살아 있음이 확인되면 지체 없이 달려가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조조에게 투항을 한다. 이렇게 조조는 1차적으로 자신의 집권을 안정시킨다. 이제 남은 건 화북 지역의 제패를 위한 '원소 토벌'이 남았다. 바로 '관도대전의 시작'이다.

한편, 조조가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서 내세웠던 '인재경영'은 어찌하여 성공했는지 이야기 해보자. 사실 정통성으로 본다면 '한 황실의 후예'인 유황숙에게 인재가 집중되어야 마땅하고, 실력으로 본다면 '4대 삼공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의 원소가 권력을 잡아야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조조진영에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것일까? 물론 조조도 어릴 적에 '원소'와 친분관계를 쌓았을 정도로 나름 높은 가문의 집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조부는 '환관 출신'이었고, 조조는 어릴 적에 환관의 아들(?)이었던 조숭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래서 조조의 원래 성씨는 '하후씨'다. 조조가 '하후돈', '하후연'과 친척관계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조조 진영에는 이런 '친척관계'를 이루고 있는 인재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순욱, 정욱, 곽가, 가후, 전위, 허저, 서황, 장료, 만총, 우금 등등 엄청난 실력을 갖춘 인재들이 일찌감치 조조의 품안으로 합류했다. 심지어 적대적인 관계였던 '가후'와 '장료'도 기꺼이 조조의 편이 되어 충성을 받치는 모습을 보면 조조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궁금해진다. 반면에 유비와 원소 진영에는 '인재의 빈곤함'이 느껴질 정도로 허술해 보일 정도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난 것일까?

이는 조조의 '인재경영전략'이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원소는 자신의 높은 가문에 대한 자존심 때문에 '높은 신분의 인물'이 아니면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원소가 놓친 인재가 바로 '조자룡'이다. 그는 상산 출신이지만 한미한 가문이었던 탓에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는데도 원소는 그를 잡지 않았다. 반면에 유비는 '의리'로만 똘똘 뭉친 집단이다. 이런 집단의 특징은 '조폭'과 같은 무리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래서 실력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의리'를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먼 옛날이었으니 이런 '의리'를 지키는 집단에 대한 매력도 굉장히 뛰어났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유비진영에는 결정적으로 '의리'를 지키는 사람에게 베풀어줄 '물질적인 것'이 태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의리를 지켜도 줄 수 있는 게 '의리(?)'밖에 없었다. 이렇게 목숨 받쳐 유비에게 충성을 다해도 얻는 것이라곤 '의리'밖에 없는 집단에 뛰어난 인재가 구름처럼 몰려들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조진영은 달랐다. 무엇보다 조조가 '인재'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으며, 조조의 눈에 쏙 들어온 인재라면 조조는 결코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선택한 인재'가 공을 세우면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푸짐한 보상을 주곤 했다. 왜냐면 조조는 '헌제'를 볼모로 삼고 '헌제의 것'을 제것처럼 마음대로 퍼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헌제를 볼모로 삼기 이전에도 조조는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보상'으로 내놓으면서 인재를 거침없이 등용했으며, 인재들이 실력을 뽐내면 어김없이 '칭찬'을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지 않은가? 조조진영의 인재들은 그 '칭찬, 한마디'를 듣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장에서 공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이러니 조조진영은 늘 활력이 샘 솟았다. 이것이 바로 조조가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조조도 '인재등용'에 실패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관우'와 '예형'이다. 둘 다 비범한 실력을 갖춘 인재인데 조조는 왜 이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던 것일까? 관우는 '의리'를 지키는 고지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예형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강한 성품의 선비였기 때문이다. 이는 조조에게 없는 것들이었기에 결국 관우와 예형은 조조의 품에 안기질 않았다. 조조의 의리 없음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니, 둘째치고, 조조도 한 지식을 자랑하는 '지략가'인데, 어찌하여 예형 같은 불세출의 책사를 얻지 못한 것일까? 그건 조조나 예형이 서로 지고 싶지 않을만큼 '자존심'이 강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승상'이라는 지위에도 뻣뻣하게 구는 예형의 콧대를 한 번 꺾고 싶었고, 예형도 선비답게 절대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꼿꼿한 자세로 버텼으니, 둘은 애초에 MBTI(?)가 맞지 않는 상극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조는 끝내 관우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고, 예형은 죽음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조조와 원소의 한판 대결인 '관도대전'을 이야기할 차례다. 이는 4권에서 다루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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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당신을 구할 철학 수업 서가명강 시리즈 18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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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I / 21세기북스 31번째 리뷰] 각설하고, '사는 게 고통의 연속이다. 오히려 죽는 게 축복이다'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말이 절로 공감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엄마와 대판 싸웠기 때문이다. 정말 맘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고, 대화는 통하지 않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싸움의 원인은 별 것도 아니다. 발단은 '잔소리'였고, 절정은 '잔소리, 듣기 싫다'였다. 그리고 결말은 '냉전'이다. 이와 같은 별 것 아닌 싸움이 왜 지속되는가? 그건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다르고, '서툰 표현'으로 서로의 감정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엄마는 바닷가가 고향이라 '생선요리'를 좋아한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돼지고기요리'를 좋아한다. 하지만 난 '생선요리'가 싫다. 첫째 '비린내', '비린맛'이 나기 때문이다. 비위가 약한 나는 그런 요리가 너무 싫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생선요리'면 다 좋아한다. 대신 '고기요리'는 소화가 안 된다며 싫어하신다. 심지어 '소시지, 햄요리'도 건강에 좋지 않다며 싫어한다. 그런데 난 좋아한다. 어릴 적에 넉넉히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나이가 오십이 넘었는데도 햄반찬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그런데 엄마는 일절 그런 음식을 해준 적이 없다. 이렇게 두 식구가 조촐하게 사는 집인데,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일조차 너무 다르다. 그러니 '반찬투정'조차 싸움의 원인이 된다. 다 늙어서 반찬투정을 하는 것도 그렇고, 식사를 간단하게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오면, 집에서 밥을 먹고 다닌다고 '한 소리'를 하신다. 그래서 다음 날엔 집에서 식사를 하면, 내가 싫어하는 '생선요리'를 내놓는다. 싫다면서 '고기요리'를 해달라고 하면 엄마는 젓가락도 대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라고 하면 좋아서 만들어놓고, 정작 내가 먹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신다. 그래서 싫은 음식 좀 강요하지 말라고 하면, 그때부터 '잔소리' 시작이다. 평생을 이러고 산다. 오늘 아침도 이런 식으로 '했던 얘기' 또 하며 잔소리를 하다가 엄마가 자식한테 얘기하는 걸로 아들은 화만 낸다고 또 역정이다. 이렇게 또 당분간 '냉전'이다. 정말 사는 게 고통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다'라면서 엿 같은 세상을 살아주는 것도 황송할 따름인데, 고통을 주다가 권태(지겨움)까지 주니 더욱더 엿 같다고 말했다. 깊이 공감하는 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는 게 고통, 아니면 권태인 것인가? 그건 바로 인간이 지닌 '욕망'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통과 권태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욕망이 발생하면,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해 고통이 생기고, 그 욕망을 충족시킨 순간의 잠시동안 '행복'했다가, 곧이어 지독한 '권태'를 느낀다고 지적한다. 그러다 새로운 욕망이 생기면 또다시 이루지 못해서 고통을 수반하고, 이루는 순간 잠시 잠깐의 행복을 누리다, 금세 영원할 것 같은 권태를 느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독한 가난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부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지만 일만 해서 부자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할 뿐이다. 그래서 매주 '로또'를 산다. 그리고 1등 당첨을 바라고 또 바란다. 이렇게 이 남자는 일상이 고통이다. 가난하기에 하고 싶을 것 다 하지 못한다. 세상은 가난한 그에게 더욱더 큰 고통과 시련을 주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게 만든다. 그러다 운 좋게 1등에 당첨이 되었다. 10억 원이란 큰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하루 아침에 그 남자는 가난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이 되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밥 한 끼 먹는 것도 아끼고 아끼던 나날을 걷어치우고 푸짐한 한 상을 차려서 넉넉하고 배불리 먹게 되니 분명 쫄쫄 굶던 과거보다 지금이 행복해진 것이 틀림없는데 그런 나날이 계속되자 금세 그 행복은 느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사치'와 '과소비'를 해댄 것도 아니다. 알뜰살뜰하게 사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에 흥청망청 돈을 쓰는 일도 없이 적당히 검소하게 살아갈 뿐이다. 통장잔고도 넉넉하기에 쪼들리게 살지는 않을 뿐이다. 그런데 새로운 욕망이 생겼다.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날 그 욕망은 다름 아닌 평소에 맘에 두고 있던 '예쁜 아가씨'다. 가난했던 과거에는 그 아가씨에게 말조차 건낼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이제 통장잔고가 두둑한 지금은 용기 백배해져서 커피를 사들고 우연을 가장해서 만남을 추진했다. 그리고 둘은 어느덧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남자는 행복했지만, 결혼을 승낙해줄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당장 10억이란 돈은 있지만, 그 돈으로 서울에서 집을 마련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을 벗어나 시골에서 시작한다면 조금은 여유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업 계획도 짰고, 전원주택도 마련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여자는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시골은커녕 도시 외곽으로 나가는 것도 싫어하고, 20억이 넘는 아파트에서 '신혼'을 꾸리고 싶어한다. 그게 자신의 꿈이란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 분명 과거보다 훨씬 넉넉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는데도 다시 '20억 아파트'를 구하지 못해 무능력자로 전락할 판이다. 예쁜 아가씨를 사랑하지만, 그 아가씨의 욕망을 충족시킬 능력이 안 되어서 이 남자는 또다시 고통의 늪에 빠졌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욕망'을 버리라고 말한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무욕'의 경지를 말하는 것과 같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가 없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여타의 서양철학자들과는 다르게 '이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냉철한 이성보다 '욕망'이 인간을 더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쇼펜하우어는 그 해결방법을 '이성'에서 찾고 있다. 왜냐면 욕망은 '본능'에 가깝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은 거의 통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성'밖에 없지 않느냐는 다른 철학자들의 충고를 쇼펜하우어도 어느 정도 수용한 셈이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이성'에 충실하라고 권고할 수 없던 쇼펜하우어는 이성을 살짝 비틀어 '의지'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하려고자 하는 '의지'만이 끔찍한 고통과 지긋한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의지'는 오히려 욕망에 충실한 노예 상태로 만들기도 한다. 살려는 '의지', 부자가 되려는 '의지', 결혼을 성공시키려는 '의지' 따위는 각각 '생존욕구', '안정욕구', '성욕구' 등등 탐욕적인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정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선한 의지'를 표방해야 한다. 탐욕과 같은 '나쁜 의지'는 벗어던지고 세상이 주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착한 의지'를 앞세우는 냉철한 이성을 갈구해야만 진정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와도 참 닮았다. 불교에서는 '해탈하려는 욕구'마저 해탈해야 진정한 해탈에 이룰 수 있다고 더욱 경건한 자세를 요구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선한 의지'로 고통과 권태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도 능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니, 쇼펜하우어는 '실행 가능성'이 높은 방법을 제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나에게 쇼펜하우어의 지혜는 어떻게 완성해야 할 것인가? 내 고통의 원인은 '내가 싫은 것을 강요하는 엄마의 욕구'이고, 툭하면 나오는 '엄마의 잔소리'다. 정말 생각만해도 끔찍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쇼펜하우어적인 해법은 '내 욕망을 잠재우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생선요리를 군소리 없이 잡숴주는 것이고, 백만 번 했던 얘기라도 '백만 한 번'째를 더 들어주며 마음속으로 '참을 인'자를 새기는 것이다. 그렇게 내 욕망을 '엄마와의 관계를 좋게 만들겠다'는 선한 의지로 나를 '착한 아들'로 만드는 순간, 나에게 수반된 고통은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그렇게 '억누른 욕망'이 언제고 또 다시 박차고 나올 때라는 사실이다. 싫은 요리를 계속 먹을 수는 없지 않느냔 말이다. 또 '백만 한 번째'는 참을 수 있어도 '백만 서른한 번째'에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릴 수 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참고 또 참는 일'을 무한히 반복해야만 한단 말인가? 이건 진정한 해결방법이 아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쇼펜하우어는 '타고난 성격'을 극복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욕망에 충실한 상태에서 벗어나, 과연 '내 욕망'은 바람직한 것인지 진지한 고찰에 들어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내가 좋아하는 '고기반찬'만 먹고 '엄마 잔소리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엄마'가 없는 세상이라는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도 먹을 수 있는 '생선요리'를 추천하고, '똑같은' 잔소리가 반복되지 않도록 나의 '라이프 스타일'에 변화를 주던가? '똑같은' 잔소리를 들어도 안 들리는 척, 못 들은 척, 딴짓을 해서 엄마의 주의를 돌리는 방법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노력을 '나' 뿐만이 아닌 '상대(엄마)'도 함께 해주면 좋으련만, 고령의 엄마가 그런 방법을 스스로 찾도록 강요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테니, 내가 2배 이상으로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딴에는 거의 '성자'와 같은 성스런 삶처럼 경건한 '욕망 제어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을 찾아내 '고통'을 벗겨내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시도해봄직하지 않은가.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고통보다 더한 시련이 주어졌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는 '서로의 욕망'을 이해해주고 '공통의 욕망'으로 함께 추구하며 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대화와 타협'만이 대한민국 사회에 닥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다면 이런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이런 고통을 참아내며 그저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엿 같은 세상'이지만 조금이라도 '나의 욕망'에 딱맞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서 '대타협의 장'으로 뛰어들 것인가? 그 타협을 하는 동안 진정으로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과 상종을 할테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세상은 그런 악의 구렁텅이에 불과하다고 쇼펜하우어가 지적했는데 말이다. 그런 악의 구렁텅이속에서도 진정 '선한 의지'를 발현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는 민주시민으로 거듭나는 것,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우리가 마주한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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