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당신을 구할 철학 수업 서가명강 시리즈 18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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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I / 21세기북스 31번째 리뷰] 각설하고, '사는 게 고통의 연속이다. 오히려 죽는 게 축복이다'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말이 절로 공감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엄마와 대판 싸웠기 때문이다. 정말 맘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고, 대화는 통하지 않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싸움의 원인은 별 것도 아니다. 발단은 '잔소리'였고, 절정은 '잔소리, 듣기 싫다'였다. 그리고 결말은 '냉전'이다. 이와 같은 별 것 아닌 싸움이 왜 지속되는가? 그건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다르고, '서툰 표현'으로 서로의 감정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엄마는 바닷가가 고향이라 '생선요리'를 좋아한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돼지고기요리'를 좋아한다. 하지만 난 '생선요리'가 싫다. 첫째 '비린내', '비린맛'이 나기 때문이다. 비위가 약한 나는 그런 요리가 너무 싫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생선요리'면 다 좋아한다. 대신 '고기요리'는 소화가 안 된다며 싫어하신다. 심지어 '소시지, 햄요리'도 건강에 좋지 않다며 싫어한다. 그런데 난 좋아한다. 어릴 적에 넉넉히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나이가 오십이 넘었는데도 햄반찬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그런데 엄마는 일절 그런 음식을 해준 적이 없다. 이렇게 두 식구가 조촐하게 사는 집인데,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일조차 너무 다르다. 그러니 '반찬투정'조차 싸움의 원인이 된다. 다 늙어서 반찬투정을 하는 것도 그렇고, 식사를 간단하게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오면, 집에서 밥을 먹고 다닌다고 '한 소리'를 하신다. 그래서 다음 날엔 집에서 식사를 하면, 내가 싫어하는 '생선요리'를 내놓는다. 싫다면서 '고기요리'를 해달라고 하면 엄마는 젓가락도 대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라고 하면 좋아서 만들어놓고, 정작 내가 먹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신다. 그래서 싫은 음식 좀 강요하지 말라고 하면, 그때부터 '잔소리' 시작이다. 평생을 이러고 산다. 오늘 아침도 이런 식으로 '했던 얘기' 또 하며 잔소리를 하다가 엄마가 자식한테 얘기하는 걸로 아들은 화만 낸다고 또 역정이다. 이렇게 또 당분간 '냉전'이다. 정말 사는 게 고통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다'라면서 엿 같은 세상을 살아주는 것도 황송할 따름인데, 고통을 주다가 권태(지겨움)까지 주니 더욱더 엿 같다고 말했다. 깊이 공감하는 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는 게 고통, 아니면 권태인 것인가? 그건 바로 인간이 지닌 '욕망'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통과 권태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욕망이 발생하면,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해 고통이 생기고, 그 욕망을 충족시킨 순간의 잠시동안 '행복'했다가, 곧이어 지독한 '권태'를 느낀다고 지적한다. 그러다 새로운 욕망이 생기면 또다시 이루지 못해서 고통을 수반하고, 이루는 순간 잠시 잠깐의 행복을 누리다, 금세 영원할 것 같은 권태를 느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독한 가난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부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지만 일만 해서 부자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할 뿐이다. 그래서 매주 '로또'를 산다. 그리고 1등 당첨을 바라고 또 바란다. 이렇게 이 남자는 일상이 고통이다. 가난하기에 하고 싶을 것 다 하지 못한다. 세상은 가난한 그에게 더욱더 큰 고통과 시련을 주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게 만든다. 그러다 운 좋게 1등에 당첨이 되었다. 10억 원이란 큰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하루 아침에 그 남자는 가난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이 되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밥 한 끼 먹는 것도 아끼고 아끼던 나날을 걷어치우고 푸짐한 한 상을 차려서 넉넉하고 배불리 먹게 되니 분명 쫄쫄 굶던 과거보다 지금이 행복해진 것이 틀림없는데 그런 나날이 계속되자 금세 그 행복은 느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사치'와 '과소비'를 해댄 것도 아니다. 알뜰살뜰하게 사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에 흥청망청 돈을 쓰는 일도 없이 적당히 검소하게 살아갈 뿐이다. 통장잔고도 넉넉하기에 쪼들리게 살지는 않을 뿐이다. 그런데 새로운 욕망이 생겼다.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날 그 욕망은 다름 아닌 평소에 맘에 두고 있던 '예쁜 아가씨'다. 가난했던 과거에는 그 아가씨에게 말조차 건낼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이제 통장잔고가 두둑한 지금은 용기 백배해져서 커피를 사들고 우연을 가장해서 만남을 추진했다. 그리고 둘은 어느덧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남자는 행복했지만, 결혼을 승낙해줄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당장 10억이란 돈은 있지만, 그 돈으로 서울에서 집을 마련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을 벗어나 시골에서 시작한다면 조금은 여유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업 계획도 짰고, 전원주택도 마련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여자는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시골은커녕 도시 외곽으로 나가는 것도 싫어하고, 20억이 넘는 아파트에서 '신혼'을 꾸리고 싶어한다. 그게 자신의 꿈이란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 분명 과거보다 훨씬 넉넉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는데도 다시 '20억 아파트'를 구하지 못해 무능력자로 전락할 판이다. 예쁜 아가씨를 사랑하지만, 그 아가씨의 욕망을 충족시킬 능력이 안 되어서 이 남자는 또다시 고통의 늪에 빠졌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욕망'을 버리라고 말한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무욕'의 경지를 말하는 것과 같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가 없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여타의 서양철학자들과는 다르게 '이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냉철한 이성보다 '욕망'이 인간을 더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쇼펜하우어는 그 해결방법을 '이성'에서 찾고 있다. 왜냐면 욕망은 '본능'에 가깝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은 거의 통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성'밖에 없지 않느냐는 다른 철학자들의 충고를 쇼펜하우어도 어느 정도 수용한 셈이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이성'에 충실하라고 권고할 수 없던 쇼펜하우어는 이성을 살짝 비틀어 '의지'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하려고자 하는 '의지'만이 끔찍한 고통과 지긋한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의지'는 오히려 욕망에 충실한 노예 상태로 만들기도 한다. 살려는 '의지', 부자가 되려는 '의지', 결혼을 성공시키려는 '의지' 따위는 각각 '생존욕구', '안정욕구', '성욕구' 등등 탐욕적인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정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선한 의지'를 표방해야 한다. 탐욕과 같은 '나쁜 의지'는 벗어던지고 세상이 주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착한 의지'를 앞세우는 냉철한 이성을 갈구해야만 진정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와도 참 닮았다. 불교에서는 '해탈하려는 욕구'마저 해탈해야 진정한 해탈에 이룰 수 있다고 더욱 경건한 자세를 요구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선한 의지'로 고통과 권태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도 능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니, 쇼펜하우어는 '실행 가능성'이 높은 방법을 제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나에게 쇼펜하우어의 지혜는 어떻게 완성해야 할 것인가? 내 고통의 원인은 '내가 싫은 것을 강요하는 엄마의 욕구'이고, 툭하면 나오는 '엄마의 잔소리'다. 정말 생각만해도 끔찍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쇼펜하우어적인 해법은 '내 욕망을 잠재우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생선요리를 군소리 없이 잡숴주는 것이고, 백만 번 했던 얘기라도 '백만 한 번'째를 더 들어주며 마음속으로 '참을 인'자를 새기는 것이다. 그렇게 내 욕망을 '엄마와의 관계를 좋게 만들겠다'는 선한 의지로 나를 '착한 아들'로 만드는 순간, 나에게 수반된 고통은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그렇게 '억누른 욕망'이 언제고 또 다시 박차고 나올 때라는 사실이다. 싫은 요리를 계속 먹을 수는 없지 않느냔 말이다. 또 '백만 한 번째'는 참을 수 있어도 '백만 서른한 번째'에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릴 수 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참고 또 참는 일'을 무한히 반복해야만 한단 말인가? 이건 진정한 해결방법이 아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쇼펜하우어는 '타고난 성격'을 극복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욕망에 충실한 상태에서 벗어나, 과연 '내 욕망'은 바람직한 것인지 진지한 고찰에 들어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내가 좋아하는 '고기반찬'만 먹고 '엄마 잔소리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엄마'가 없는 세상이라는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도 먹을 수 있는 '생선요리'를 추천하고, '똑같은' 잔소리가 반복되지 않도록 나의 '라이프 스타일'에 변화를 주던가? '똑같은' 잔소리를 들어도 안 들리는 척, 못 들은 척, 딴짓을 해서 엄마의 주의를 돌리는 방법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노력을 '나' 뿐만이 아닌 '상대(엄마)'도 함께 해주면 좋으련만, 고령의 엄마가 그런 방법을 스스로 찾도록 강요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테니, 내가 2배 이상으로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딴에는 거의 '성자'와 같은 성스런 삶처럼 경건한 '욕망 제어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을 찾아내 '고통'을 벗겨내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시도해봄직하지 않은가.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고통보다 더한 시련이 주어졌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는 '서로의 욕망'을 이해해주고 '공통의 욕망'으로 함께 추구하며 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대화와 타협'만이 대한민국 사회에 닥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다면 이런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이런 고통을 참아내며 그저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엿 같은 세상'이지만 조금이라도 '나의 욕망'에 딱맞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서 '대타협의 장'으로 뛰어들 것인가? 그 타협을 하는 동안 진정으로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과 상종을 할테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세상은 그런 악의 구렁텅이에 불과하다고 쇼펜하우어가 지적했는데 말이다. 그런 악의 구렁텅이속에서도 진정 '선한 의지'를 발현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는 민주시민으로 거듭나는 것,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우리가 마주한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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