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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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한강 / 문학동네 (최신 개정판, 2025) [개정판 (2018) / 초판 난다출판사 (2016)]

[My Review MMCXXXIII / 문학동네 26번째 리뷰] 한강 소설을 읽을 때마다 '죽음'과 마주하는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라는 표현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게 <작별하지 않는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 소설 전편에 해당하는 문구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한강은 '죽지 마라'고 말한다. 수많은 죽음을 묘사하면서 그 어둡고도 찬란한 미사여구를 흐드러지게 썼으면서도 죽지 말고 살라고 말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그랬고, <채식주의자>에서도 그랬고, <바람이 분다>, <희랍어 시간>...내가 읽은 모든 한강 소설에서 무섭고 힘들겠지만 꿋꿋하게 이겨내고 살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미학이라도 써내려는 듯이 '죽음'을 그토록 아름다운 문구로 꾸며 놓고서 말이다. 차라리 끔찍하게 써놓았다면 말이나 하지 않을 것을...

그리고 이 책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해설'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강 소설에 대한 '주석'을 달아 놓은 듯이 말이다. 그 첫머리에 한강은 소설에서 '질문'을 던진다고 하였다. 특별한 '답'을 요구하지는 않으면서 그저 담담하게, 때론 무심하게 '질문 공세'를 펼친다고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가 알아서 판단할 몫이라고 했지만, 그조차 급할 것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순간 조급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에 제대로 답을 찾기 힘들 거라면서 차분하고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 듯 질문에 답을 하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

나는 그동안 한강 소설을 읽으며 '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모양이다. 한강의 소설은 '이런 책'이며, '저렇게'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이니 '그런 답'을 찾았다면 옳게 읽은 셈이라는...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누가 보더라도 뻔한 답을 찾아야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인냥 열심히 답을 찾았다. 물론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인 셈이다. 애초에 뻔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을 곱씹어보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인데, 어리석게도 난 그간 헛되게 읽었던 셈이다. 그럼 한강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는 애초에 죽음을 피할 순 없다. 그렇다고 죽어 마땅한 삶 또한 없으니 '어떤 삶'이든 살아보라. 삶은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함이 아니다. 내 삶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모두'가 찬란한 삶이다. 그러니 죽지 마라! 죽음은 슬픈 것이다. 감당하기에 너무도 비통한 슬픔이다. 그러니 살아라! 찰나와 같이 스치듯 지나는 삶일망정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그러니 죽지 마라! 아무리 힘들고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진저리를 치더라도 삶에는 가치가 있다. 그러니 살아라! 스치듯 지나는 짧은 삶일망정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모두 기쁨일지니...

<흰>의 첫머리에도 단 두 시간 남짓한 삶과 마주해야 했다. 산달이 다 차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젊은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 한적한 시골에서 남편마저 직장에 있던 그 순간에, 모진 산통을 견디고서 갓 지은 배냇저고리를 검붉게 물들인 채 한 시간만에 겨우 두 눈을 뜬 갓난아기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 본 젊은 엄마의 첫 아기는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한 삶을 살다 온몸을 휘도는 고통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한 젊은 엄마는 홀로 싸늘히 식어가는 갓난아기의 눈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한강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죽음'이었을까? '삶'이었을까? 첫 느낌은 죽음에 대한 애달픔이었다. 너무 짧은 생애이지 않은가 말이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을 갖춘 의료시설에서도 '팔삭동이'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더구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초산'이었을 젊은 엄마가 낳은 아기의 건강상태가 좋았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한 '삶'은 너무나 미약했기에 '죽음'이 압도적으로 강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강 작가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조차 담담하게 써내려 갔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꼭 감았던 두 눈을 뜨고 엄마를 바라봤다고 서술했다. 아직 뱃속에 더 있어야 할 순간일텐데, 너무 서둘러 나와서 미처 자라지 못한 상황이었을 텐데, 갓난아기는 힘겹지만 두 눈을 뜨고 따뜻한 엄마의 품속에서 엄마를 바라봤다고 했다. 그 한 시간 남짓한 '만남'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깊고 깊은 생각의 끝에 나는 '기쁨'이었다고 답을 찾았다.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난 그리 생각을 하였다. 조금만 더 느긋한 '만남'이었다면 그 기쁨을 더 오래오래 누릴 수도 있었을 테지만, 갓난아기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조금 서둘렀고, 그리 많은 준비를 갖추지 못한 서툰 만남이었지만, 젊은 엄마의 첫 아기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눴고, 아직 말도 배우지 못해서 뭐라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힘겹게 뜬 두 눈 가득 '기쁨'을 뿌려주고 서둘러 가버린 짧은 삶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한강 작가는 이런 애달픈 기쁨을 온통 '흰' 것으로 치장하였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수의, 그리고 하얗게 웃다는 말까지 흰 것들로 말이다. 세상의 모든 흰 것들은 '죽음'과도 같은 애달픔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 흰 것들은 삶의 '기쁨'을 관통하고 있고, 순간이든, 영원이든, 삶은 기쁨이니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소설들이라는 '질문의 의미'를 찾아냈다. 여전히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답을 떠올렸다. 길고 긴 여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내 삶도 기쁨이길 바랄 뿐이다. 아직까진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서 하나도 기쁘지 않지만 말이다. 내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볼 누군가가 없기에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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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사의 쓸모 - 어른의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 66개의 단어들
김범준 지음 / 한빛비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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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사의 쓸모 : 어른의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 66개의 단어들>  김범준 / 한빛비즈 (2025)

[My Review MMCXXXII / 한빛비즈 174번째 리뷰] 우리 말에는 형용사가 많다. 그만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를 나타내주는 말이 많다는 건 '같은 사물'이라도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길게 부연설명을 하지 않고도 '형용사 단어' 하나만으로도 풍부하게 표현해 낼 수 있기도 하다. 그럼 자연스런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외국어에는 우리 말처럼 형용사가 다채롭지 못하다는 것인가? 그 흔한 외국어인 '영어'조차 잘 못하는 나로서는 가늠조차 하기 힘들지만, 외국인들의 입을 빌어서 표현하자면, "한국어는 '악마의 언어'다"라고 할 정도로 뒤치기(번역하기) 힘든 언어라고 혀를 내두르곤 한다. 오죽했으면 한강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었던 으뜸공로자는 다름 아닌 '뒤치미(번역가)'라는 말을 하겠는가. 한국 소설을 외국어로 뒤쳐내는 일이 무척이나 힘든 까닭이 바로 한국어의 어마어마한 '표현력'을 품고 있는 단어를 감히 외국어가 감당해내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에 '한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다름 아닌 '한류열풍'을 타고 'K-pop'이 큰 인기를 끌자 한국어의 묘한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 어떤 열성팬은 한국아이돌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제발 '한국어' 가사를 '영어'로 바꿔서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왜냐면 '영어 가사'로 바꿔 부르면 그냥 평범한 '팝송'이 되어 버려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란다. 당장은 '한국어 가사의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겠지만, 일단 뜻을 몰라도 '한국어 가사'만 들어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그 매력에 빠져서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며 노래 가사의 뜻까지 알고 나면 더 큰 매력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으니, 제발 '한국어'로 불러 달라고 간절히 애원을 하는 열성팬의 의견이었다. 왜 전세계 K-pop팬들이 그리 많은지 짐작케 해주는 단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도 '우리 말 실력'을 높이기 위해 <국어사전>을 끼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독서논술지도'를 하기 위한 노력의 한 모습이기도 했지만, 재미가 없었다면 <국어사전>을 소설책 읽듯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새롭게 알아낸 낱말들이 많았는데, 형용사의 순우리말 표현도 그때 알게 되었다. 형용사(形容詞)는 모양 형, 얼굴 용, 말씀 사를 쓰고 있기에, 곧바로 뒤치면(직역하면) '얼굴의 모양을 나타낸 말'이란 뜻이다. 여기서 얼굴이란 '사물을 대표하는 부위'를 뜻하는 것일테니,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는 말을 '형용사'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를 순우리말로 표현한다면 어떤 말이 딱일까? 바로 '모양씨'다. 모양이나 상태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는 핵심(씨)을 이보다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이런 매력을 깨우치니 다른 뜻도 함께 찾아보았다. 동사는 '움직씨', 명사는 '이름씨', 수사는 '셈씨', 조사는 '토씨', 부사는 '어찌씨'였다. 그리고 감탄사는 '느낌씨'다. 이렇게 풀어내니 딱딱하고 어렵기만 하던 '문법'조차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 책 <형용사의 쓸모>는 내게 그런 느낌을 다시금 불러 들였다. 그리고 또 하나를 떠올렸는데 인기 TV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던 <세대공감 올드 앤 뉴>였다. 어른 세대와 어린 세대가 쓰는 말이 서로 달라 '공감'하기 힘든 점이 없지 않았는데, 이 프로그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세대공감'을 이룸과 동시에 '우리 말의 매력'을 새삼스럽게 느꼈을 것이다. 그때 익혔던 낱말 가운데 '두루뭉술하다', '휘뚜루마뚜루' 같은 말은 지금도 계속 쓰고 있다. 이 책에서도 '늘차다', '결곡하다', '습습하다', '늡늡하다', '여낙낙하다' 같은 말은 평소에 써본 적도 없는 신선한(?) 말이어서 그 당시의 즐거움을 떠올리며 더 꼼꼼히 읽고 또 읽어나갈 지경으로 푹 빠지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 '늘차다(능란하고 재빠르다 :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온 경험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숙련도)'와 '여낙낙하다(성품이 곱고 부드러우며 상냥하다/미닫이 따위를 열거나 닫을 때에 미끄럽고 거침이 없다 : 내적인 힘과 외적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췄을 때 나타나는 특별한 품성)'는 뜻이 정말 마음에 흡족했다. 딱 내가 추구하는 삶에 어울리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낙낙하다'라는 말을 알기 전까진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겉으론 부드럽지만 속은 굳건한 사람이 되어 '어떤 어려움'에 닥치더라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멋진 사람이 어릴 적부터 존경스러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늘찬 삶'을 추구하면 아주 딱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 내가 아무리 '늘차고 여낙낙한 삶'을 살기로 노력하고, 그런 말을 즐겨 쓴들 이 '아름다운 말뜻'을 알아듣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앞에서도 번역하다는 '일본식 한자표현' 말고 순우리말로 '뒤치다'라고 썼지만, '뒤침'이라는 말뜻을 알고 있는 이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이 표현은 나도 어떤 책의 저자가 '일본식 한자 표현'을 대신할 '우리 말'을 찾으려다 '번역'이란 말을 대신할 우리 말로 '뒤침'이라고 하면 좋겠다는 뜻에 십분 공감해서 따라 쓰게 되었다. 딴에는 '번역'이란 말 대신 '옮김'으로 쓰고 있긴 하지만, 외국어 번역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단순히 옮겨 놓는 일보다는 훨씬 차원이 높은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꼭 맞게 노력했다'는 뜻을 담아 '뒤치다(엎어지거나 자빠진 것을 바로 잡아 정돈하다)'로 대신하면 좋겠다는 글쓴이의 뜻을 쫓아, 번역이란 말을 대신해서 '뒤침'이라고 줄곧 써왔다. 하지만 이런 '뒤침'이라는 표현을 알아채는 이가 없어서 부득이 '뒤침(번역)'이라고, '뒤치미(번역가)', '뒤치다(번역하다)', '뒤친(번역한)', '뒤칠(번역할)', '뒤쳐진(번역된)' 따위로 활용해서 혼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늘차고(오랜 경험과 노력으로 순련되고)', '여낙낙한(외유내강한)' 삶을 지향하며 살아갈 것이다라는 식으로 '섞어서' 쓸 수밖에 없을 것이 씁쓸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한 번 뜻을 품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며 살아온 나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굽힐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이 책은 단지 '우리 말의 숨은 뜻'을 새삼스레 밝혀내어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모양씨(형용사)가 갖고 있는 뜻을 활용해서 '인생의 교훈'을 찾고 지혜로 승화시켜 삶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지침서로 활용하였다. 그렇기에 이 책은 '지식'을 쌓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지만, '지혜'를 깨닫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참신함을 느낄 수 있으니 재밌기도 했지만, 그보다 '일상'에서 지혜를 깨닫게 해주었으니 더욱 희망으로 가득해졌다. 멋진 어른이 되고픈 이들에게 권하기에 딱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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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이주, 왜 고국을 떠날까? - 책가방문고 23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4
루스 윌슨 지음, 전국사회교사모임 옮김, 설동훈 감수 / 내인생의책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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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더잘 시리즈 4]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4 : 이주, 왜 고국을 떠날까?>  루스 윌슨 / 전국사회교사모임 / 설동훈 / 내인생의책 (2010)

[My Review MMCXXXI / 내인생의책 11번째 리뷰] 이주(Migration)는 자기가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뜻도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자기가 태어나지 않은 나라'로 떠나는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국제이주'나 '이민'이란 말로도 쓰고 있으나, 정치적 · 경제적 · 종교적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자기가 살던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을 이야기하려 한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2010년 이전에 벌어졌던 '사례'가 소개되어 있으나, 이 글을 쓰는 2025년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사례를 예로 들어서 리뷰하고자 한다. 지금은 그때와 '다른' 이유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 나온 사례들이 지금 원만하게 해결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강제이주', '난민' 문제는 세계화 시대가 저물고 자국보호와 자국이익이 우선시 되는 '자국우선주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보다 훨씬 더 강도가 센 '극우화'로 인해서 이주민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하지 못할 정도로 천박해진 선진국들의 낯뜨거운 민낯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이런 문제들을 짚고 넘어가 볼까 한다.

우리는 '외국인'에게 얼마나 너그러울까? 가까운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는 '오버투어리즘'이 문제되고 있다. 엔저효과(?)로 인해 전세계 관광객들이 일본을 찾아갔지만, 시골 구석구석까지 탐방하듯 관광을 하며 소비를 하는 '한국관광객'과는 다르게 '다른 나라 관광객'들이 일본에서 주로 관광하는 곳은 '유명 대도시'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일본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엄청나게 늘었지만, 그로 인해 짭짤한 수익을 본 곳은 '도쿄' 같은 대도시 정도였고,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관광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적자'를 맞을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외국관광객들이 '값싼 일본돈'을 물쓰듯 펑펑 쓰고 돌아다녔지만, 그로 인해 수익을 창출한 곳은 '대기업 프렌차이즈' 정도였고, 일본 소상공인들에게는 별로 수익이 돌아가지 않아서 '서민 경제'는 빨간불이 켜진 셈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물가가 연일 고공행진을 하는 바람에 외국인들은 자국에 비해서 엄청 싸다며 엄청나게 소비를 했고, 그로 인해서 일본 서민들은 '월급'은 오르지 않고, '물가'만 올라서 가뜩이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고 있는데, 외국인까지 무지막지하게 들어와서 '싹쓸이'를 해버리니, 일본 국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빈곤한 삶을 살게 되는 일이 벌어졌단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는 '이중가격제'를 허가하고, 외국인 손님과 일본 지역 손님에게 '가격차등'을 두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외국인들은 이를 '차별'이라 느끼고 일본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버리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관광대국'으로 성장하겠다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관광객을 향한 차별정책을 추진하는 이상한 행보를 걷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외국인 혐오'다. 외국 관광객이 일본을 찾아오는 것은 좋지만, '일본문화'까지 존중하는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면 '사절'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고 있다. 이게 단순 관광객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본으로 '이주'를 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감을 부추기는 일이 매우 빈번해졌다고 한다. 물론 일본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각자 '고국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일본에서 경제활동을 하면서 살아가겠다면서 '민폐'를 끼치거나 '일본문화'를 폄하하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 이주민들에 대한 반감은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정도를 넘어서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대우'를 당연하게 감수해야 한다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EU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젠지세대 시위'는 점점 극우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큰 문제다. 물론 EU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극우열풍(?)'이 벌어지고 있는 듯 하고, 특히 10대, 20대의 젊은 층이 그런 '극우세력화'하려 시위와 폭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 우려스러울 정도다. 그렇다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극우화' 되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부담'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해 화가 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불똥은 외국에서 일자리를 찾으러 온 '외국 이주민'들에게 향하고 있다. 자국의 젊은이도 일자리가 부족해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외국 이주민이 들어와서 더욱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맞지 않은 점이 있다. 외국인이 구하는 일자리는 대부분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는 낮은 임금의 노동이고, 자국의 젊은이들이 원하는 일자리는 '고학력, 고임금, 사무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젊은 세대들이 '같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극렬하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국인을 너무 많이 받아들이게 되면 각국의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복지정책의 혜택'을 보게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젊은 세대가 폭발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내는 '세금'으로 외국인들을 먹여 살리는 정책에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세금인상'과 같은 정책을 쏟아내는 선진국에서는 더욱더 가열찬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프랑스가 그렇다. 엄청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세금인상안'을 내놓고, '복지혜택'은 줄이는 정책을 쏟아내자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다. 비단 프랑스뿐 아니라 '경제 적신호'가 켜진 나라들은 요즘 대부분 이렇게 성난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단다. 그리고 이들은 '외국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고 있고 말이다.

트럼프 2기 정부가 들어선 미국은 어떤가? 관세 전쟁을 해서 미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부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실상은 만만한 '동맹국'들을 후려쳐서 뜯어낸 돈으로 잔치를 벌이려 했던 것이 들통났다. 그러다 대한민국 이재명 정부가 굳건히 버티며 불리한 협정문에 끝까지 사인을 하지 않자 '조지아'주 이민관리국(ICE)이 대한민국 국민을 불법체포감금한 뒤, 강제추방을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불법'을 저지른 범죄자가 아니라 '미국인 일자리'를 늘려주기 위한 공장을 '대신' 지어주는 일을 하던 고급엔지니어들이었다. 그들은 '공장'이 완공된 뒤에 미국에 눌러앉아 살 사람도 아니고, 고국인 대한민국으로 되돌아올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이 한 일도 철저히 '미국인'을 대상으로 일자리를 늘려주기 위한 일을 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미국 당국은 이들을 '불법이민자' 취급을 했고, 미국에서 내쫓아 마땅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물론, 이 사건의 결말은 대한민국의 완승, 미국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이민정책'에 완벽한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바로 이민으로 성공한 미국조차 '이민'은 불편한 진실이었던 것이다. 이제 더는 '이민'을 환영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인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세계화 시대'가 저물고 '정상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끝나고 난 뒤의 '반세기 동안의 평화 번영'이 인류의 역사를 되돌이켜 봤을 때 '비정상'이었다는 말이다. 인류는 그만큼 폭력이 일상이던 삶을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그럼 앞으로 '이민'은 절대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가 펼쳐질 거란 예상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주'는 멈추지 못할 것이다. 왜? 평화가 지속되지 못하고 전쟁이 여기저기에서 터지게 되면 피치 못하게 '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현재에도 아프리카 · 아시아에서는 정치갈등이 심해서 혼란 끝에 '내전'을 벌이고 있으며, 오랜 갈등과 내전으로 인해 경제적 빈곤을 겪게 되면 '먹고 살기' 위해서 고국을 등지는 '난민'이 속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이주'를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고 있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분쟁으로 인해서, 경제적 빈곤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외국으로 향하는 이주민들의 발길'은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유엔난민기구(UNHCR), 국제이주기구(IOM) 등에서 이주 난민을 도와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런 국제기구조차 '재정 부족'을 호소하며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선진국들의 경제여건이 지금보다 더 나았던 2010년대에도 '재정 부족'을 호소했는데, 요즘처럼 선진국들조차 '재정난'을 호소하며 내부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니 얼마나 더 난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재정적 여유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재정 지원이 원활하다고 '난민 문제'가 단박에 해결될 일도 아니고 말이다. 유대인 경전 <탈무드>에도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줘라"고 말했다. 난민들에게, 이주민들에게 적은 임금이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주 효과적인 대책이란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가? 이 문제를 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결코 쉽지 않다. 인류 역사상 '일자리'는 늘 부족했고, 경제가 호황일 때에도 '외국인 차별'로 인해서 이주민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주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것은 '이주민들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게 어렵다는 말이다.

그럼 이주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훌륭한 이주민'에 대한 예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이 책에도 소개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가 전쟁을 피해서 미국에 이주했을 때, '외국인 이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했더라면, 오늘날의 미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또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정착했다면 오늘날의 초강대국은 아마도 '그 나라'가 아니었을까? 물론, 아인슈타인이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으니 '외국인 이주민'이었을지라도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뛰어난 인재'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지만, 평범한 외국인들은 입국을 거절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물론, 오늘날에는 그런 인재를 서로 영입하기 위해서 각국이 경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누가 얼마나 현명하고, 누가 뛰어난 업적을 남길 줄 알고 '골라서' 환영한단 말인가? 일단 누구라도 환영해서 받아들인 뒤에 잘 대우하고,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길 꾀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은 아닐까? 대만계 미국인 잰슨 황이 왜 대만이 아닌 미국에서 '사업'을 했겠느냔 말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이 '사업'을 벌이기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훌륭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인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결국 세계 모두는 '이주'에 대한 시선을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와 그런 사회의 차이는 앞으로 더욱더 큰 차이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뭐, 독일의 메르켈 정책의 사례처럼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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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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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베르나르 베르베르 / 이세욱 / 열린책들 (2023) [원제 : L'Ultime Secre (2001년)]

[My Review MMCXXX / 열린책들 25번째 리뷰] 지난 1권 리뷰에 이어 질문의 '답'을 먼저 말한다면, 인간이 느끼는 쾌락과 행복의 근원이 되는 위치는 바로 '뇌량'이다. 현재는 의학용어들을 우리말로 바꾸는 노력의 일환으로 '뇌들보(corpus callosum)'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좌뇌와 우뇌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신경세포가 집합된 곳'이다. 소설에서는 이곳에 전기자극을 주어서 '최강의 쾌락, 또는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고 했는데, 최근에 와서는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위치 많고,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밝혀냈다. 아직도 뇌의 신비는 모두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행복감과 '인위적인 조작'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만약 '자연적 행복'과 '인위적 행복'을 구분할 수 없고 똑같이 느낀다면 베르나르의 소설에서처럼 누구에게든 '뇌수술'을 시술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뇌수술'을 하지 않고도 '뇌들보의 쾌락 중추'를 강렬하게 자극할 수 있는 알약을 개발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법은 옳지 못한 것 같다. 행복의 느낌이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그 느낌의 정도가 똑같든, 같지 않든 간에, 일상 생활에서 '쾌감'과 '행복'을 누릴 만한 행동과 일을 한 뒤에 받는 '보상'이 아니라, 단지 '버튼'을 누르는 행위나 '알약'을 삼키는 단순함을 통해서 얻는 것을 허용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인간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의 쾌감과 가족의 행복을 얻으려 윤리도덕적인 바른 생활을 하려 노력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그저 '버튼'의 쾌감과 '알약'의 행복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버튼과 알약을 차지하려 폭력을 쓰는 것조차 자제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중화' 되고 언제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게 된다면 쾌감과 행복의 오남용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게 될 것이다.

이런 우려스러운 상황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사무엘 핀처'가 뇌수술을 받고 난 뒤에 보여준 말과 행동의 과격성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쾌락의 중추'에 전기자극을 줄 수 있는 스위치를 얻기 전에는 선하고 품위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하지만 '그 스위치'를 손에 넣게 되자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 빠져들어서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계속 더 많은 자극, 더 강한 자극을 원할 뿐이었다. 그러다 '치사량'이 넘는 자극을 주었다 판단하여 스위치를 멈추는 순간, 사무엘 핀처는 "멈추지마! 더 자극해달라고!"라면서 자제심과 이성을 잃고 오직 쾌락만을 쫓는 야수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다 자극을 그만 멈추고 쾌락 수위가 현저히 낮아지고 나서야, 방금과 같은 상황에서 절제하지 못한다면 자칫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사무엘 핀처는 '행복 스위치'를 타인에게 넘겨 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스위치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을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 바로 장루이 마르탱이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핀처는 '행복 스위치'를 누를 수 있는 '동기'가 필요했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했을 때 목표달성을 했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는 방식이어야 했다. 핀처는 그 동기로 '체스 대결'을 선택했다. 바로 이 '체스 대결' 이야기가 소설의 맨 처음에 보여주었던 '컴퓨터와 인간의 대결'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소설의 전개 방식을 상당히 흥미롭다. 현재에 벌어진 '살인 사건'을 추적해 나가는 이지도르와 뤼크레스 두 탐정(?)을 가장한 두 기자가 감춰진 비밀을 풀어나가고,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거듭 교차하면서 하나씩 나타나는 단서를 풀어서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다. 그 과정중에 밝혀지는 '뇌의 비밀'이 이 소설의 핵심 포인트다. 그래서 겉으로는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처럼 보이지만, 다 읽고 나면 '인간의 뇌에 감춰진 신비'가 한가득 풀어헤쳐 진다. 마치 한 편의 <백과사전>을 다 읽고 난 듯한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된다. 이게 베르나르 소설의 특색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20여 년이나 지난 '낡은 지식'이긴 하지만, 아직도 '뇌 연구'는 속속들이 밝혀진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기에 베르나르의 <뇌>로 호기심을 가득 품고서, 본격적인 '뇌 탐구'로 들어가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아쉽게도 이 책이 처음 나왔던 시절에는 '컴퓨터'와 '인공지능'에 관한 풍부한 지식도 얻을 수 있었겠지만, 불과 20여 년 만에 그쪽 분야는 눈부신 발전과 성과를 이미 얻어냈다. 그래서 인간보다 더 뛰어난 '초인공지능(AGI)'이 곧 실현될 것으로 전망하는 지금에 와서, 고작 '체스 대결'로 인간을 이긴 컴퓨터가 세계 최고의 대우를 받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옛이야기가 되버리고 말았다. 짧게는 5년, 길게 보면 20년 안에 인간의 뇌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AGI가 상용화될 것이다. 그 때에는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 제발 인간이 초인공지능의 노예로 전락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설령 노예가 될 수밖에 없더라도 초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윤리도덕적으로 선한 행동만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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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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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 / 문학과지성사 (2010)

[My Review MMCXXIX / 문학과지성사 5번째 리뷰] 거듭 말하게 되지만, '한강 소설'은 내게 어렵다.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가 강렬하게 빛나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어두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끌어들여 찬란한데도 감탄할 수 없고 경건하다 못해 위축 들게 만들곤 하기 때문이다. 이게 내 솔직한 감상이라 할 수 있겠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서 그녀의 소설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소년이 온다>를 맨 처음 읽었고,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도 바로 이어서 읽었다. 그리고 살짝 텀을 두고서 <희랍어 시간>과 이 책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게 되었는데, 좀 힘들었다. 여느 통속소설과 같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가족'을 그리고 있지만, 한강 작가는 전혀 통속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자를 어두운 심해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깊고 깊은 심해가 주는 '경이로울 정도'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은 곧 '죽음'과 마주할 용기가 있어야 했기에 무척이나 이겨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도 '화가 서인주의 죽음'이 주된 이야기였다. 그녀의 친구인 이정희는 '자살'이 아니라 주장했지만, 평론가이자 그녀를 사랑했던 강석원은 '자살'로 기정사실화 한다. 그리고 서인주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살인사건(?)의 단서처럼 제공 되다가 마침내 마주하게 된 '진실'이 밝혀지자, 모두는 결국 '혼돈'속으로 빠져들고 말게 된다. 이런 이야기 전개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한강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서는 술술 잘 읽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서인주의 죽음이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른 피안의 세계'였고, 그렇게 밝혀진 진실이 주위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기보다는 '혼돈'에 빠뜨리고 말았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결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거기에 또 이해하기 힘든 점은 '먹'으로 그려진 그림에 대한 예술적 감각과 효과, 그리고 그에 따른 해석과 감춰진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미술에 대해서 '문외한'과 다를 바 없는 나로서는 도무지 아리송할 따름이었다. 다만, 천문학적인 지식을 열거하며 서술하는 것을 통해서 '간접적'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지만, 문학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이 비문학적 관점을 더 많이, 더 자세히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무슨 의미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눈이 녹으면?"이라고 운을 띄웠다면, 이과적 독자들은 "물이 된다"라고 태연하게 답을 하겠지만, 문과적 독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봄이 오지요!"라고 답을 할 거라고 한다. 이런 답을 들은 이과적 독자들은 깜짝 놀라고 만다. 눈은 당연히 '고체화 된 물'이기에 상온에서는 자연스럽게 '액체화 된 물'이 될 것인데, 눈을 '물'이 아닌 '겨울'로 이해하고, 시간적 흐름에 따른 계절적 변화를 머릿속에 떠올려서, 눈이 녹는 계절인 '봄'이 온다는 서정적인 답을 내놓는다는 것이 그야말로 신기할 따름인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는 [LIFE]라는 글자를 보면 문과적인 독자들은 '삶'이나 '인생'으로 이해하겠지만, 이과적인 독자들에겐 'Li(리튬)'과 'Fe(철)'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과적 관점이 더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과적 독자들이 정말 신기한 사람들로 인식될 것이다.

나에게 한강 소설은 그런 면모로 다가 온다. 물론 나에게 '문학적 이해력'이 많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실제로도 나는 '소설책'을 그리 많이 읽지 않은 편이긴 하다. 뭐, 무협지나 애정소설, 미스터리(추리)소설 같은 것도 '소설'로 쳐준다면 학창시절에 참 많이 읽긴 했지만, '순수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문학소설을 섭렵하지 못했다. 그래서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증을 따고 난 다음에 특히 '문학소설'을 많이 읽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뒤늦게 시작한 '만학도의 한계'를 한강 소설을 통해서 절실히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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