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1 : 국내편 (무선 보급판) 퇴마록 (반타)
이우혁 지음 / 반타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VIII / 반타 2번째 리뷰] 벌써 여러 차례 '퇴마록 리뷰'를 작성했지만, '애니메이션'까지 출시되었기 때문에 여러 모로 흥분된 상태라서 현재 이책 저책을 뒤적거리고 있다. 이 '신간'은 아직 출시 전(4월2일 출간예정)이긴 하지만, 현재 '밀리'에서 미리 읽을 수 있어서 읽어 보았다. 내용은 그닥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들녘'에서 '엘릭시르'로 출판사를 옮길 때 '개정판'을 내놓은 상태였고, 이번에 <뉴 퇴마록(퇴마록 후속편)>을 기획중이라서 출판사를 '반타'로 옮기게 되었다고 까닭을 밝혔다. 그럼에도 소소한 변화는 있다. 바로 '주석'에 관한 부분인데, 기존에 출간되었던 내용에서 좀더 간결하면서 명확한 방향으로 주석을 달았다는 점에서 '보완'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크게 바뀐 내용은 없으니 '기존의 독자들'이라면 '구판과 신판'의 차이점을 찾는 재미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주목해야 할 점은 '원작 소설'과 '애니메이션' 사이에 벌어질 간극이다. 마블코믹스의 '원작 만화'가 마블시네마틱에서 '어벤져스'로 연출되면서 상당 부분 '원작의 내용'과 달라진 모습으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 만화를 즐기던 독자분들도 '기존의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영화에서 사뭇 달라진 캐릭터와 스토리에 흠뻑 빠져들어 갈 수 있었다. <퇴마록>도 그럴 가능성이 많다. 애초에 '세기말 현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퇴마록'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던 까닭은 '새천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대적 분위기도 한몫 단단히 했더랬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30여년이 지났기에 그런 '버프'를 받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원작에서는 '핸드폰'도 변변히 없어서 승희의 텔레파시와 '세크메트의 눈(세계편에서 등장)'에 의존했지만, 현재는 '스마트폰'이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에서는 박신부도 '스마트폰'을 들고 나올 정도였다. 원작의 팬이었던 분들은 이런 점에서 상당히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DC코믹스'의 대표적 주인공 슈퍼맨도 1960년 당시의 원작만화에서는 '미국내 잠입한 소련 공산당'을 색출하는 내용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 '시대적 정황'을 반영해서 달라지는 모습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 퇴마록>이 이제 막 '영화'로 나왔다. 돌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워낙 넓은 팬층을 보유하고 있어서인지 '관심도'는 꽤나 높은 편이다. 그리고 '퇴마록 세대'가 아닌 MZ세대에게는 '애니메이션'이 새로운 원작으로 다가설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원작 소설'의 내용을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애니메이션>도 꽤나 세세하게 연출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영화'와 'TV방영'으로 나뉘어서 나올 가능성도 점쳐 본다. 그렇다면 '퇴마록 영화'는 4명의 퇴마사와 다른 능력자들이 '어셈블(집결)'한 내용으로 나올 것이고, 'TV방영'분은 퇴마사들의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을 다룰 가능성이 꽤 높게 예상된다.

국내편 1권에서 '영화용 에피소드'는 <하늘이 불타던 날>, <측백산장>, <유혹의 검은 장미>,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 <생명의 나무>다. 그리고 'TV방영용 에피소드'는 <어머니의 자장가(이현암)>, <파문당한 신부(박신부)>,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박신부)>, <저주받은 소녀(장준후)>, <태극기공(이현암)>, <귀검 월향(이현암)>일 것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1편>에서 <파문당한 신부>, <태극기공>의 일부 내용을 함께 내보냈다. 박신부가 아우라 능력을 얻고서 파문 당한 까닭과 이현암이 무리하게 수련하던 도중에 '주화입마'에 빠져 죽게 된 상황에서 들끓는 기혈을 막아주고 70년 내공을 전수해준 장면과 그렇게 목숨을 걸고 무리한 수련을 하는 까닭이 '물귀신'에게 화를 당한 여동생 현아의 죽음 때문이라는 까닭도 함께 담아서 상영해버렸다. 심지어 '세계편'에서 블랙서클의 최종보스 마스터가 불러낸 악마 '아스타로트'와 '혼세편'에서 밝혀지는 승희의 몸속에 봉인된 '애염명왕'의 능력까지 <애니메이션 1편>에서 차용해 써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향후 '퇴마록씨네마틱유니버스(퇴씨유)'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사뭇 기대가 되는 점이다.

만약 <애니메이션 2편>도 '국내편'의 내용으로 보폭을 좁히게 된다면, 인도의 <베다>에 나오는 거대한 뱀 브리트라가 등장하는 <생명의 나무>가 주축이 된 스토리를 보여줄 것이다. 여기서 '남방신인'으로 예언된 현승희가 퇴마사에 합류하는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와 '북방도인' 이현암이 보여줄 '어검술(검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술수)'의 정수인 <귀검 월향>의 내용도 초반부에 다룰 것이다.

사실 <퇴마록>만큼 방대한 내용을 다룬 판타지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해리포터>는 초딩용으로 보이고, <반지의 제왕>이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인데, 스케일면에서는 <퇴마록>이 훨씬 더 크다. '말세편'에 이르면 퇴마사들의 활약은 전세계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 어찌 그리 큰 스케일을 연출했었던 것인지 지금 되돌이켜 생각해봐도 참 놀라운 연출력이다. 이제 '마블영화'도 시들해졌는데 '퇴마록 애니'가 매년 연례행사처럼 개봉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조만간 '국내편 2권'으로 못다한 이야기와 더 풍성한 이야기꺼리로 찾아뵙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VII / 민음사 21번째 리뷰]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 이유는 '사랑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4대 비극은 이놈저놈 다 죽어서 난장판을 만들어놨기에 감동을 해야 할지, 애통해 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 없고, 그의 5대 희극은 웃으라고 만든 작품일텐데 당췌 어느 부분에서 웃음보를 터뜨려야 할지 어리둥절하게 만들어서 엉뚱했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은 어찌 됐든간에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그저 좋았다. 어릴 적부터 말이다.

그런데 50대에 다시 읽어보니 어릴 적의 감동과는 사뭇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의 4대 비극 못지 않게 이놈저놈 다 죽어나자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려 여섯 명이나 죽었다. 맨 먼저 '머큐쇼'가 죽은 것은 너무 유명할 것이다. 극에서는 대사 몇 마디 나눈 뒤에 로미오의 겨드랑이 사이를 뚫고 들어간 티볼트의 검이 머큐쇼의 급소를 찔러 대사 몇 마디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고 말지만, <영화>에서는 머큐쇼가 검에 찔려 죽어가는 와중에도 '명대사'를 남기며 좌중을 웃기고 끝내는 울려버리는 '명장면'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티볼트'의 죽음은 너무 싱겁기 그지 없다. 로미오의 친구인 머큐쇼의 죽음에 대한 '정당방위'이자 길거리에서 싸우지 말라는 군주의 명을 어긴 티볼트에게 내리는 '대리 심판'의 성격에 '로미오의 분노'까지 더해버리고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허무한 죽음 때문에 <로미오와 줄리엣>은 '4대 비극'에 낑기지 못하는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허무한 죽음은 그 뒤에 죽는 '파리스'도 마찬가지다. 가짜 죽음으로 '케풀릿 가문의 묘지'속에 들어간 줄리엣을 두고서 두 연인이 결투를 벌이다 일어난 사단인데, 굳이 '파리스'까지 죽음으로 엮은 까닭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파리스'도 '머큐쇼'와 같이 베로나 군주의 친척이기에 '죽음의 무게'만 따진다면 결코 가벼운 죽음은 아닐 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인 주인공의 죽음이다. 가짜 죽음에 빠진 줄리엣을 보고서 준비한 독약은 머뭇거리지 않고 탈탈 털어넣은 '로미오'가 줄리엣의 품에 안고 죽는다. 마침맞게 깨어난 줄리엣은 자신이 살아있을 유일한 빛과 같은 존재인 로미오가 싸늘하게 죽은 것을 확인하고 뒤따라서 죽으려고 자신의 몸을 '칼집' 삼아 칼을 가슴에 꽂고 자결한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케풀릿과 몬터규는 자식의 죽음 앞에 당혹해하고 슬퍼하면서 '몬터규 부인' 또한 '로미오의 추방 소식'에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고 전하는 비극적 연출을 한다. 이렇게 여섯 명이나 죽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야 인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여러 죽음을 목격할 수 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로미오와 줄리엣', 두 사람의 죽음만이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이의 죽음은 여타의 '비극 작품'속에서 보여주는 애통함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만큼 '죽을 이유'가 타당성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조차 그다지 애뜻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너무나 '옛날 말투'스러운 뒤침(번역)이 몰입감을 앗아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원문 그대로 뒤쳐냄(완역)'이기보다는 '문맥에 따라 뒤쳐냄(의역)'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다. 원문을 살리더라도 '익숙한 어투'로 자연스럽게 뒤쳐냈으면 좋았을텐데, 낯설고 어색한 두 연인의 대화를 읽고 있으면, 얘네들이 '사랑'하기는 했는지조차 의심할 정도다. 이는 로미오, 줄리엣의 두 연인의 대화만 어색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등장인물의 대화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초중고 어린이독자'들에게 그닥 권하고 싶지 않았다. 자칫 '고전에 대한 거부감'만 심어주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두 남녀의 사랑이 이토록 가슴 절절한 이야기를 충분히 즐겼으면 한다. 원수 가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던 두 남녀가 처음 본 사이임에도 사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철천지 원수일지라도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서로 애정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냔 말이다. 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서로를 원망하고 죽기를 바라는 원수지간일지라도 '사랑'에 빠지면 그런 살벌한 감정조차 한순간에 사그라들 수 있다는 것을 '젊은 남녀 두 사람'이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니냔 말이다. 만약 몬터규와 케풀릿 가문 사이에 '사돈지간'이 맺어져서 더 치고받고 싸우다가 '로미오와 줄리엣'이 알콩달콩 살아가며 예쁜 손주가 탄생하면서 눈 녹듯 화해하는 '해피엔딩'을 보여주었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면 더 아름답고 재미난 이야기로 거듭날 수 있었을텐데라고 어릴 적부터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왜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 것일까? 젊은 두 남녀가 서로의 아름다움에 '한 눈에 빠져버리는 사랑'을 이룬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첫 눈에 호감을 가졌더라도 더 많은 만남, 더 많은 대화, 더 많은 사건사고를 겪고 난 다음에 '결혼약속'을 했더라면 아주 바람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줄리엣의 아버지가 베로나 군주의 친척인 '파리스'와 정략결혼을 서둘렀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몬터규 가문과 사건사고를 많이 치는 바람에 케풀릿은 자신의 출세에 지장을 겪고 부담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한 방법으로 군주의 친척인 '파리스'와의 결혼을 서둘러 성사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촌인 티볼트가 죽어서 '하루'를 더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주에 줄리엣의 결혼을 확정지으려고 했다. 그만큼 케풀릿은 쪼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줄리엣을 더욱더 '사랑의 열병'에 빠져들도록 만든 패착이었다. 좀더 '비밀연애'를 즐기며 사랑을 맛보고,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면서 '이성의 끈'을 챙길 수 있는 여유만 있었더라도 줄리엣은 '가짜 죽음'으로 파리스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로미오와의 약속을 지키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운명의 장난'도 있었다. 줄리엣의 가짜 죽음을 계획한 것은 '로런스 신부'였다. 그는 가짜 죽음에 빠지는 약으로 두 사람의 비밀 결혼을 지키려 했고, 더 나아가 원수지간이던 두 가문이 '젊은 남녀의 사랑'을 계기로 화해하기를 기획했던 것이다. 일단 가짜 죽음으로 줄리엣을 무덤속에서 깨어나게 만들고, 이 사실을 로미오에게 미리 알려서 무덤속에서 어린 신부를 구출해내고 추방된 '만토바'에서 신방을 차리고 머물다가 시일이 지나 두 가문의 앞에 '두 사람의 결실'을 선보이면 해묵은 원한관계도 눈 녹듯 사라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역병'이 드는 바람에 로미오에게로 가던 '연락'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줄리엣의 죽음 소식만 전달되는 바람에 로미오는 너무 서둘러서 죽고 만다. 그리고 뒤늦게 깨어난 어린 신부는 새신랑의 주검 앞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뒤따라 죽고 만다. 이 어찌 비극적인 운명이란 말인가. 그 짖꿎은 운명은 줄리엣이 묻힌 무덤 앞에서 로미오와 파리스가 벌인 결투조차 오래 끌지 못하고 '순식간에' 끝맺어 버리는 장난질을 쳤다. 아무리 생사를 건 결투였을지라도 몇 번의 챙챙챙으로 시간을 벌었다면, 그 사이에 줄리엣이 '가짜 죽음'에서 깨어날 시간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불꽃 같은 짧은 사랑'은 우리들 곁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가히 '불멸의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비극적 결말'로 끝맺기는 하지만 우리네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의 대명사로 길이길이 남았다. 너무 짧은 사랑이어서 '젊은이들의 철없는 불장난'이라는 비난도 함께 받는 작품이긴 하지만, 시작이 '불장난'이면 또 어떠랴?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도 아름답기 그지 없는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스킷 - 제1회 위즈덤하우스 판타지문학상 청소년 부문 대상 수상작 텍스트T 7
김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VI / 위즈덤하우스 39번째 리뷰] 자신이 가진 재능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남을 위해서' 써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선진국 중에서도 '남을 돕는데 매우 인색한 국가'로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하위권도 아닌 밑에서 두 번째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불명예에 그리 수긍하는 편이 아니다. 왜냐면 우리 스스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타이틀이 가지고 있는 명예로움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외국인 손님이 오면 매우 친절하게 대해서 전세계 여행객들에게 칭찬을 무지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조사결과를 불신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사실이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친절을 베풀기는 '인색'하면서 베품을 받는 것에는 '익숙'하다 못해 당연한 것인데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화를 내곤 한다. 심지어 사소한 친절에 '감사 인사'를 할 줄도 모르고 친절한 분들에게 '갑질'을 하고, '꼴값'을 떨면서 제 스스로 품위 없음을 증빙이라도 하듯 남발하기 일쑤다.

아닌 것 같다고? 그럼 당신은 '심폐소생술'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는가? 안 배운 분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남자라면 '군대'에서나 '예비군/민방위 훈련'시에도 늘상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웬만한 직장에서는 2년에 한 번쯤 '심폐소생술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고 있기에 모르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 그러면 묻겠다. 지금 당신 앞에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환자가 발생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환자의 생명을 구할 것인가? 이렇게 물으면 십중팔구 '하지 않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위의 조사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족이나 지인이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경우에는 당연히 해야 하고, 지나가는 사람일지라도 붙잡고서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할 것이다. 그런데도 '심폐소생술'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겠다는 한국인은 별로 없었단다. 부끄러운 일이다.

왜 그랬을까? 십중팔구는 '잘 할 줄 몰라서'라고 대답했단다. 몇몇 분은 '괜히 도와줬다가 잘못되었을 경우 덤터기 쓸까봐'라고 대답했고, 나머지는 '귀찮아서'라는 답변도 나왔단다. 물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의무사항'은 아니기에 그럴 수 있다. 사람 생명 구하는 일보다 '바쁜 일'이 정말 대한민국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괜시리 남을 돕다가 병원에 들락거리고, 경찰서에 불려다니고,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굳이 귀한 시간을 내서 '남의 생명을 구한다'는 위중한 일에 나서지 않는 것은 아주 현명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당신도 심폐소생술을 받지 못해서 위급한 상황에서 되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119구급대가 도착할 때까지 '단 5분동안'의 응급조치만 도와주어도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인데도 말이다.

소설 <비스킷>은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다. '소리'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남들이 들을 수도 없는 아주 작은 소리도 이 소년의 귀에서는 천둥이 치는 것처럼 크게 들리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볼펜 딸깍거리는 소리를 낸 학생의 '볼펜'을 몰래 빌려다가(?) 부셔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소심한 복수를 저지른 것이다. 먼저 그 녀석이 나의 '예민한 청각'을 괴롭혔기에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준 것 뿐이다. 다시 말해 '정당방위'란 말이다. 그런데 일이 꼬여서 그 싸가지가 나를 보더니 "내 볼펜 훔쳐간 게, 너라면서? 죽고 싶냐!"라고 말하며 싸움을 걸기에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이 그리 흘러흘러 '보다 큰 사건'으로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게 '주거침입죄'와 '공무원사칭죄'에 해당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말하는 중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곳이 '정신병원'이라는 점도 충분히 이상할 거라고 짐작은 하지만,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점,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는 점을 믿어주면 좋겠다. 굳이 또 믿지 못할 일도 아니라는 점만 인지하고 <비스킷>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아참, 그리고 하나 더 알고 있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비스킷'에 대해서다. '세상에는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어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존재감이 사라지며 모두에게서 소외된 사람', 이런 사람들을 '비스킷'이라고 부른단다. 왜냐면 분명 사람이지만 비스킷처럼 쉽게 부서지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스킷'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비스킷'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단다. 그들은 그렇게 '소외'되다가 끝내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존재감'이 사라져버려서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속에서 서서히 생명마저 희미해져서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이런 비스킷은 누구나 될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년은 그들이 내는 아주 작은 '소리'를 감지해 낼 수 있다. 미약한 숨소리, 힘없는 발소리, 가볍게 스치는 옷감의 소리를 듣고 그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소리의 '주인공'을 인식하는 순간, 비스킷은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보통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게 된다. '소외감'이 사라지면서 '존재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려 하고, 그걸 의식하는 순간, 비스킷들의 미약한 존재감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하지 않은가? 소외시키지 않고, 알아주려고 의식해주기만 해도, '소외'는 사라지고 '존재'는 드러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이 책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함께 살고 있으나 '소외' 당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마음 따뜻한 이야기다. '정신질환자'가 일으키는 크고 작은 소동이 아니라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소외 문제'는 대단히 심각해졌다. 왕따로 인한 학폭이 심심찮게 뉴스를 장식하고 있고, 부모 자격도 없는 이들이 저지르는 '아동학대'로 인한 사건도 자주 일어나고, 먹고 살기 바쁜 현실속에서 '무한경쟁'만 강조하고, 이런 경쟁에서 뒤쳐지는 이들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해, 그대로 '소외자'가 되고 마는 비정하고 무정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딴에는 이해가 된다. 바쁘게 살아도 '나 하나' 먹고 살기 힘든 판국에 누가 누굴 돕고 사는 일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럼에도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릴 적 유치원때부터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돕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누가 누구를 평생을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잖은가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진짜 '돕고 싶은 마음'은 있기는 한 걸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서 말이다. 그저 남을 돕는 일이 좋아서 자신이 가진 '재능 한 스푼'을 나눠줬을 뿐인데, 그 도움을 받고 너무나 고마워하는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보는 일이 정말 보람차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웃음을 당신은 몇 번이나 보았나? '특별한 재능'이 없어서 남을 도울 정도는 아니라고? 아무도 당신에게 '아이언맨'이 되어 달라고 한 적도 없다. 그저 낯선 길에서 길을 물었을 뿐이고, 무거운 물건을 들고 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분들에게 당신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뭐, 굳이 도와달라고 하지 않으니, 먼저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움 요청'을 하듯 당신에게 길을 묻고, 무거운 물건을 저쪽까지만 옮겨 달라고 한다면 어쩌겠는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이 책 <비스킷>의 소년 주인공이 그랬다. 예민한 청각 때문에 '거의 사라져가는 소외자'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비스킷'들의 존재를 드러나게끔 '관심'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였기에, 소년은 '비스킷'을 돕기 위해 범죄(?)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않을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이제 누가 누구를 어떤 이유에서도 '소외'시키지 말자. 아니 '소외' 당하지 않도록 조금만 세심히 관찰하고 관심을 가져 주자. 그 조그만 관심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한층 더 밝아지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말엔 숲으로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V / 이봄 7번째 리뷰] 글쓴이 마스다 미리는 1969년 생이다. 현재 50대 작가이고, 일본에서 30대, 40대 여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단다. 특히 '독신 여성'들에게 말이다. 그녀의 책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30대 중반의 독신 여성들'이다. 수짱이 그랬고, <내 누나>속 누나도 그랬고, <주말엔 숲으로>속 하야카와와 친구들의 나이가 그렇다. 심지어 '연애'도 안 한다. 아니 못한다. '애인'은커녕 '남친'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들의 대화속에서는 늘 남자가 등장한다. 잘 생겼으면 좋겠고, 부유했으면 좋겠고, 젠틀했으면 좋겠고, 요리를 잘하면 더 좋겠고, 언제나 '내편'이 되어 줄 수 있고 '따뜻하고 넓은 품'을 언제든 내어줄 수 있는 그런 멋진 남자와 '결혼'도 하고, '임신과 출산'도 하고, '가사와 육아'도 할 용의가 차고도 넘치는데, 정작 중요한 '남자'가 그녀들의 곁에 없다. 마스다 미리는 이런 여성들을 싸잡아서 '패배한 개'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언더독(underdog) : 경쟁의 패배자'에서 유래한 말인 듯 싶은데, 일본에서 '골드미스'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도 한다.

30대 독신 여성은 명백한 '사회적 약자'다. 결코 '소수자'는 아닌데 사회적 약자 취급을 하고, 사회적으로 '함부로 대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기 딱 좋은 대상이다. 분명 잘못된 인식이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중년여성'들이 이러한 잘못된 인식에 자조적인 웃음을 섞어가며 한바탕 수다를 떨기 일쑤다. "맞아, 맞아"를 연발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마땅한 대안은 없다. 심지어 '연대의식'조차 갖길 거부한다. 약자는 아무리 많이 모여도 '약자'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그래서 변변한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체념하고 푸념만 늘어놓기 일쑤다. 그래도 쌓이는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기에 끼리끼리 모여서 '누가누가 더 불행한지' 배틀이라도 열린 듯이 서로를 향해 위로 섞인 자신만의 비극을 실감난 연출과 연기를 섞어가며 풀어내고 또 풀어낸다. 불행의 끝을 모른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비참함을 느낀 '서른다섯 살의 하야카와'가 일본의 시골로 이사를 했다. 하야카와의 직업은 '뒤치미(번역가)'다. 그래서 굳이 번잡한 도시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큰 문제가 없기에 시골로 온 듯 한데, 딱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전원생활'을 꿈 꿨던 것일까? 직접 텃밭을 일구며 손수 재배한 채소와 과일로 식단을 꾸리고, 자연의 품속에서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시며 온전한 '슬로 라이프(?)'를 실천하기 위해서도, 딱히 그런 까닭도 아니란다. 왜냐면 하야카와는 텃밭 같은 것은 고사하고 필요한 물품과 음식까지 '택배'로 해결하고, 심지어 하야카와의 집앞에 '가까운 역'이 있기에 언제든 맘만 먹으면 다시 도쿄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시골로 이사를 한 까닭은 '패배한 개' 취급을 받는 스트레스에서 온전히 벗어나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딱히 전원생활이 좋아서 시골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팍팍한 도시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온갖 불안한 정서에서 탈출하고자 '시골행'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 하야카와가 시골에 정착한 뒤로 그녀의 친구인 '마이코'와 '세스코'가 거의 매주 주말에 하야카와의 집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제목도 <주말엔 숲으로>다. 물론 시골이니까 울창한 숲도 있다. 그리고 그 숲속에는 호수도 있어서 하야카와는 친구들과 '카약'을 타며 즐기기도 한다. 숲을 산책하며 나무열매도 따먹고, 나무의 이름과 새의 이름도 알아내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 삶'을 즐기고 있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매력은 '계절의 변화'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엔 만물이 성장하고, 가을엔 단풍과 낙엽 구경이 제격이고, 겨울이면 '설피'를 신고 1미터가 넘게 쌓인 눈밭 위를 걸어서 돌파하는 재미도 즐길 수가 있다. 그럼에도 하야카와는 '도시의 삶'을 완전 포기하지도 않는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친구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 친구들의 손에는 늘 '선물꾸러미'가 들려 있고, 그 선물들은 대개 '맛있는 간식'들이다. 도심지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시골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것들을 친구들에게 부탁하기 때문에 '시골행'을 한 의미가 무색해지기도 하다.

그렇지만 하야카와와 친구들은 이렇게 '주말마다' 모여서 수다를 떨고 난 뒤에 '자존감'을 얻게 된다. 30대 직장여성이 겪는 수많은 열받는 일 때문에 떨어진 자존감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되살리는 셈이다. 그녀들에겐 '힐링 공간'이고, 동시에 '힐링 타임'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긍정적이고 유익한(?) 수다를 소중한 친구끼리 떠드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임에 분명한데, 정말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것인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왜냐면 '수다'만으로 불평부당한 처우가 개선되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상사의 폭언, 욕설 등과 같은 언어폭력과, 성희롱, 성추행 등과 같은 성폭력을 받았다면 과연 '수다'로 분풀이하고 위로 받는 것으로 해결이 되느냔 말이다. 또한, 동료 직원과 선후배들에 의해 받는 '스트레스'도 장난이 아닐 것이다. 자신은 빈둥빈둥 놀면서 남에게 일을 떠넘기거나, 실수를 저질러 민폐를 끼쳐놓고도 '성과'만 쏙쏙 챙기거나 '똑같은'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정말 화가 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런 화가 나는 상황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한다는 식으로 눈치를 주는 직장이라면,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것을 넘어 '복수'라도 하여 정의구현을 실천하고 싶을 정도로 열받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그저 '여자들끼리의 수다'로 퉁치려고 한다. 그래도 어쩌겠어? 여자가 무슨 힘으로 불편부당한 일을 '개선'할 수 있겠어. 그저 감수하고 감내하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마음가짐으로 해탈하고 득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뉘앙스가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글쓴이의 '나이'가 궁금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분명히 그러한 '전근대적으로' 여성의 인권을 당연히 무시하고, 개선하기보다 퇴사를 강요하는 것이 더 쉬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게 우리 나라에서는 80년대까지였고, 90년대부터는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해서 2000년대가 넘어서면서 여성인권을 유린하는 직장과 사업주 들에게 '법적 철퇴'를 가하자, 비교적 '여성인권'을 확실히 보장받는 쪽으로 직장문화가 달라지긴 했다. 그럼에도 완벽히 달라지고, 보장할 수는 없었다. 인권의 사각지대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한 직장에서는 '사내 내규'에 여성 인권 보장을 명시하고, 어길 시에 중대범죄에 해당하는 무거운 책임을 묻는 일이 꽤나 많아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직장여성'들이 직간접으로 불편부당한 일을 당하게 되면 쉬쉬하며 감내하는 일이 없이 당당히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나가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아직도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간주하고 여성의 연대를 무시하며, 그로 인해 일본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눈치 보며 포기하고 마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실제로 전세계적으로 이슈를 불렀던 '미투 운동'도 일본에서만큼은 소리 소문 없이 잠잠해졌던 일도 있었다. 그 가운데 '퍼스트 펭귄'을 맡았던 한 일본 여성만 '이상한 여자'로 낙인 찍혀 사회생활조차 포기하고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뒤안길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

실제로도 일본에선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법정에서 승소하여 피해보상을 받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다고 한다. 도리어 '가해자'가 법정에서 진술하기로 "여성이 너무 섹시한 옷을 입고 있어서 참을 수 없어 강간을 했다"고 말했는데, 무죄 판결이 나오기도 했단다.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가 도리어 섹시한 여성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어서 강간을 저질렀는데, 이것은 도리어 여성이 남성을 '대놓고(?) 강간을 저지르라고 한 셈'이고, 남성은 여성의 야한 옷차림을 보면 '성적 본능'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남성이 강간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여성이 강간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기에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90년대 일본의 법정 판결 중 하나란다. 이런 선례가 있으니 이후로 '성폭력 사건'은 죄다 무죄 판결이 남발되었고, 일본은 아직도 여전히 '남성 가해자'보다 '여성 피해자'가 알아서 자기 몸을 보호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성범죄에 대한 인식조차 이런데, 다른 '여성 인권'은 제대로 보장이 되겠는가. 더구나 일본은 전국민이 상대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최고로 여기기 때문에, 사소한(?) 분란을 일으켜 시끄럽게 만드는 것보다 자신이 참고 견디는 것이 더 낫다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가 불편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도 주위에서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일지라도 당사자가 '인내'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면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달지 않는 사회분위기가 만연해 있다고 한단다. 이러니 '30대 독신 여성'이 패배한 개에 비유를 당해도 모멸감을 느끼기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래'라는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 전부라고 한단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30대 독신 여성'을 패배한 개에 비유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적어도 '자신'을 패배한 개라고 절대 수긍하지 않고 연대의 목소리를 높여 그런 표현을 한 주체를 향해 고소와 시위를 했을 것이다. 안 그런가?

마스다 미리의 책이 주는 '위안'은 분명하다. 읽고 있으면 절로 '공감'이 되고 팍팍한 삶의 지혜가 되는 부분도 분명이 존재한다. 그런데 곰곰이 곱씹어보면 은근히 '화딱지'가 난다. 왜 죄다 '참고 넘기는 지혜'로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상사가 있다면 '부당하다'고 말을 속시원히 하고, 뺀질거리는 동료가 있다면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고 네 몫의 일은 네가 하라고 당당히 말하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또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렵고 힘든 일도 감수하고 일하라고, 그리고 여자가 결혼하고 임신, 출산, 육아를 하게 되면 알아서 '퇴사'를 해주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고, 이런 모든 밥맛 같은 일을 겨우 '수다'로 해결하려 들지 말고, 당당히 목소리를 높이고, 여성들끼리 자연스런 연대를 통해서, 인간이기에 당연히 누려야 하는 '인권'을 당당히 되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소중한 내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발생하면 참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챙길 건 챙긴 뒤에 '수다'를 떨고 불행 배틀을 하면서 위로를 나누는 것이어야 순서가 맞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향수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IV / 열린책들 19번째 리뷰]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가 2004년이었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옛날이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이 무려 1985년에 선보였다는 것이다. 무려 40년 전에 나왔던 작품이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 읽어도 굉장히 놀라운 경험을 한다. 소설이 이렇게나 재밌다는 것이 첫 경험이고, 한 번 손에 들면 다 읽을 때까지 놓을 수 없다는 것이 그 다음이다. 이토록 '흡인력'이 높은 책은 정말 많이 없다. 더구나 등장인물이자 주인공인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살인자'다. 그에겐 아주 독특한 재능이 하나 있는데 '세상 모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이 특출난 능력을 이용해서 '향수 제조'에 능숙해지고, '최상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 아니 그 정도라면 '사람축'에 낄 수라도 있겠으나 살인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악마, 그 자체'다. 무려 스물다섯 명의 어린 소녀만 골라서 죽였다. 이런 희대의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이 소설은 재밌다. 놀랍도록 매력적이다. 그래서 의아한 것이다. 이게 왜 재밌냐면서 말이다.

사실, 이 책의 역사적 배경은 18세기 프랑스다. 파리를 시작으로 '향수의 도시'라 불리는 그라스까지 곳곳을 누빈다. 그런데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아름다운 냄새만 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파리만 해도 아주 지독하고 구역질 나는 역겨운 냄새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하수도 시설도 없었고, 화장실도 변변치 않아서 집집마다 항아리에 똥오줌을 누고 나면 창밖으로 내던지기 일쑤였다. 이런 지경이니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거리는 똥오줌이 넘쳐나는 강으로 변신하고, 쥐와 벌레가 들끓는 도시로 유명했다. 이런 도시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기본적으로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손발을 씻거나 목욕 문화가 발달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세 유럽은 '그리스도교'의 영향 아래 있었고, 목욕은 '이교도의 문화'였다. 그래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목욕이란 걸 해보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더러운 도시'가 바로 프랑스 파리다. 이렇게 파리는 도시도, 사람도 온통 더러운 악취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인구밀도'는 유럽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더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발달한 것이 '향수'이고 말이다. 더러운 냄새가 나면 그 냄새를 향수로 덮어버리고, 그 향기가 날라갈 때마다 향수를 뿌리고 또 뿌리고 우웩~

이런 프랑스 파리에서도 가장 더러운 세느강 항구에 위치한 어물전에서 어느 생선가게의 아낙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다. 그루누이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채 살인죄를 저지른 여인에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아'가 된다. 엄마는 살인죄로 복역하다 사형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아기로 태어나지만, 그나마 주변 사람들이 궁휼히 여기는 바람에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며, 자비심 많은 판사의 배려로 버려진 아기를 적은 돈을 받고 길러주는 '보모'의 손에서 자라나게 된다. 하지만 사랑받으며 자라지는 못한다. 갓난아기인데도 보모에게조차 도저히 키울 수 없는 '존재'라고 거부 당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바로 '냄새'가 나지 않는 아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사람이라면 저마다 독특한 '채취'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이 아기는 갓 태어났는데도 그런 냄새를 가지지 못했다. 보통의 아기라면 당연히 나야만 할 그 냄새가 없는 아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눈도 채 뜨지 못한 그루누이는 코만 벌름거리며 주위의 모든 냄새를 빨아들이는 듯한 행동을 취한다. 그 모습이 마치 '눈도 뜨지 못한 괴물'처럼 느껴져서 그루누이는 보모에게서조차 버림을 받고 만다. 그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이사람 저사람에게 '떠넘겨지듯' 돌림을 당하는 바람에 그루누이는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고 만다. 그렇게 일을 할만한 나이가 되자 돈벌이에 나서게 되는데, 하필 일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인 '무두장이의 도제'가 된다. 무두장이란 동물의 가죽을 가공해서 만드는 일을 하는데, '양잿물'을 이용하는 등 아주 위험한 일이기에 종종 죽어나가는 도제가 있을 정도로 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루누이는 군말없이 해낸다. 성실해서가 아니다. 그는 태생부터 '악마'이기에 그 험한 일도 이겨낸 것이다. 스스로 그 악마적인 재능을 능히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그저 묵묵히 참고 이겨낼 뿐이다. 실제로 그루누이는 '무두장이'만이 걸리는 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기도 여러 차례 했다. 그런데도 기적같이 살아났다. 아주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천대를 받으면서 그루누이는 자신의 재능을 키우는 것에만 집중하며 버티고 또 버틴다. 온세상의 냄새를 구분할 줄 아는 능력 말이다.

그러다 때가 왔다. 그루누이의 코는 이제 냄새를 잘 맡는 것을 뛰어넘어 '냄새의 성분'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으로까지 발현된 것이다. 그러면서 '욕망'이 생겼다. '냄새를 붙잡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바로 '향수 제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두장이의 도제'에서 '향수제조자의 도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회를 포착한다. 세느강 다리 위에서 향수제조를 오랫동안 해오던 '지제프 발디니'라는 향수제조사를 만난 것이다. 그루누이는 그의 도제가 되기로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루누이는 발디니를 부자로 만들어주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향기를 가두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작 어려운 일은 더 많은 냄새를 가둘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발디니의 '침수법'만으로는 냄새를 가둘 수 있는 재료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냄새를 거두어들일 '또 다른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그라스'라는 향수 도시를 알아낸다. 그루누이는 미련없이 발디니 곁을 떠난다. 발디니를 파멸로 이끌면서 말이다. 사실 그루누이를 악마로 지칭한 까닭은 그의 주변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사고사를 하기 때문이다. 엄마도 죽고, 보모도 죽고, 판사도 죽고, 그루누이를 어릴 적에 심하게 매질하던 이도 죽고, 무두장이도 죽고, 그리고 발디디도 죽었다.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도 다 죽고 만다. 물론 그루누이가 '살인'을 저질러서 죽은 것은 아니다. 모두 '사고사'다. 그루누이가 직접 살해한 이들은 모두 '한창 꽃처럼 예쁜 소녀들'뿐이었다.

그렇게나 예쁜 소녀들을 죽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그루누이가 유일하게 '사랑'을 느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스런 소녀에게서만 나는 향기'를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향기'를 모아서 최상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살인을 한 것이다. 그저 '향기'만 뽑아내기(?) 위해서라면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었을까? 맞다. 그래서 그루누이도 처음엔 죽이지 않고 '살아있는 소녀'에게서 그 아름다운 향기를 추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봤다. 그러나 실패였다. 왜냐면 '향기'를 아주 뜨거운 돼지기름에서 얻은 '유지'를 골고루 바른 아마포를 맨살 위에 붙여두고 반나절 이상 가만 있어야 하는데, 사람이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더구나 뜨거운 천을 온몸에 감싸고서 반나절을 꼼짝하지 않고 버틸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나마 많은 돈을 주고서 '모델'처럼 꼼짝말고 있으라고도 해봤지만 뜨거운 천을 두루고 가만히 참기는 했지만, 끔찍한 고통을 견디면서 오만상을 찡그리고 몸부림을 치게 되면 '아름다웠던 향기'조차 고통에 의해 역한 냄새로 변하고 말아버려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루누이는 '가장 아름다운 그 찰나의 순간'에 몽둥이로 뒤통수를 쳐서 단숨에 생명을 앗아버리는 방법을 고안한다. 그때 소녀들의 표정은 한없이 청순하고 꽃같이 아름다웠다. 그렇게 아름다운 시체를 아마포로 둘둘 감아서 '향기'를 뽑아낸다. 그렇게 만든 향수는 진정 '최상의 향수'인 것이다. 그렇게 무려 스물다섯 병이나 만든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마지막에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포집하는 과정에서 '살인 증거'를 남기고 그루누이는 살인혐의로 붙잡히고 만다. 그리고 사형대에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벌어지는 '광란의 도가니'는 이 소설의 백미이자 압권이다. 그루누이가 만든 '최상의 향수'를 맡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취해서 그루누이 발 아래 엎드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성을 잃고 본능에만 충실한 몸짓으로 가장 환희에 빠질 수 있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만다. 이게 그루누이가 만든 '최상의 향수'가 지닌 힘이다. 만약 이 향수를 뿌리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들어가면 프랑스 황제도 그루누이의 발등에 키스를 하며 충성을 받칠 것이며, 교황성하에게 보내는 편지에 향수를 한 방울 떨어뜨려서 보내면, 바로 황홀한 기분에 빠져서 '편지의 내용'대로 모든 일을 다 수락하게 될 수도 있다. 더구나 그 향수를 그루누이의 몸에 뿌리고서 다니면 모든 사람들은 그 향기에 취해서 그루누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받치려 들 것이다. 그야말로 그루누이는 '냄새의 신'이 되어 온세상 위에 군림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최고의 순간에 그루누이는 두려움을 느낀다. 자기가 만든 '최상의 향수'가 지닌 그 놀라운 위력을 가질 수 있음에도 '그 향기'를 맡은 그루누이 자신은 그 향기에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몸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것처럼 그루누이는 '최상의 향수'에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고귀한 신분에서부터 미천한 신분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이 '그 향기'에 취해서 황홀해하는 표정을 짓기 바쁜데, 왜 '냄새의 신'인 자신은 그 향기를 맡을 수조차 없다는 말인가? 왜 자신도 그 향기에 취해서 황홀한 느낌을 즐길 수 없단 말인가? 그루누이는 최고의 정점에서 '고독'을 느낀다. 단순한 외로움이 아닌 지독한 고독감을 맛보며 씁쓸해 한다. 그렇게 그루누이는 '사형수'에서 무죄를 이끌어내고, 심지어 마지막으로 죽인 소녀의 아버지에게 '양아들'이 되어 달라는 간청을 받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힘'을 누리고서는 홀연히 떠나버리고 만다. 그렇게 홀로 떠나고서 다시 되돌아온 파리 인근에서 한 무리의 거렁뱅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루누이는 그들 앞에서 '최상의 향수'를 자신의 몸에 뿌린다. 향기에 취해버린 그들은 미치광이처럼 그루누이에게 달려들었고, 그루누이의 몸을 물어뜯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그루누이는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버리고 만다.

과연 그루누이는 만족했을까? 태어날 때부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마지막 죽는 순간에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일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루누이는 그들이 느끼는 '포만감'을 함께 느끼며 행복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