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고려사 5 - 개혁의 실패와 망국으로의 길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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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V / 휴머니스트 43번째 리뷰] 제5권은 고려 26대 충선왕부터 34대 공양왕까지의 고려사를 다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원간섭기'에 이은 '여말선초'에 해당하는 500여년 고려사의 후기의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가 익숙한 부분은 '공민왕'부터 우왕, 창왕에 이은 '공양왕'까지의 시기만 자세히 배울 뿐이다. 고려 임금의 시호가 '충'자가 들어가는 경우는 사실상 '원나라의 간섭'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고려임금이라도 고려를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었고, 원나라 황제 또한 간섭했다고는하나, 실상은 실세를 누리던 '원나라의 환관(고려출신)'과 '고려의 권문세족(기황후세력)'에 의해 혹세무민하던 암울한 시기였을 뿐이라며 웬만한 역사책에서조차 대충 넘어가던 시절이다. 그나마 '공민왕의 개혁정책'이 많이 다루는 내용이지만, 끝내 '실패한 개혁'이라서 그리 중차대하게 다루지 않고 곧이어 벌어진 '역성혁명의 과정'을 위한 들러리(?) 역할로 끝맺음을 해버리는 것이 고려사 후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박시백의 고려사>는 달랐다. 비록 허약한 왕조로 이어진 '충'자 들어간 임금일망정 비중 높게 다루어서, 그 시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대략이나마 가늠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주었다. 더구나 '공민왕의 개혁'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그 끝에 실패를 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 또한 자세히 조명하였다. 그리고 개혁이 실패하자 맞붙게 된 '친원파(권문세족)'과 '친명파(신진사대부)'가 대립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수미쌍관구조를 이루며 마무리하였다. 저자가 밝힌 소감은 '두 저서'의 시간적 공백이 무려 20년인데, '20년 전의 자신'과 마주하는 느낌이 들어서 격세지감이 들었다고 밝혔다. 50대의 노련한 저자가 30대의 패기와 마주하고 있으니 오죽이나 그랬을까. 마치 '노쇠한 왕조'가 저물어가고 '산뜻한 왕조'가 새롭게 떠오르는 장면이 묘하게 마주치는 명장면을 연출했다고나 할까? 암튼 <박시백의 고려사>도 이렇게 마무리 되면서 <조선왕조실록>과 <35년>까지 장장 1000년의 우리 역사를 아우르게 되었다. 이후에는 '격동의 현대사'를 다루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그럼 '몽골제국'과 '원나라'는 같은 나라로 보아야 할까? 사실상 '유라시아 대륙'을 거의 다 점령통치한 '몽골제국'은 세계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린 제국이다. 그런데 '원나라 황제'가 제국의 변방인 여러 '한(칸)국'까지 통치력이 닿지는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고려'는 비록 원나라에 항복을 하고 '내정간섭'을 받았으나 끝끝내 '원나라'에 복속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오히려 '부마국의 지위'를 얻어서 원나라 황실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묘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렇기에 원나라가 내부적 혼란으로 약화되었을 때 '주원장'을 비롯한 반원세력이 활약을 할 때, 고려도 '공민왕'에 의해 '반원자주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독립적인 지위와 권력이 없는 상태였다면 그렇게 발빠르게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고, '역성혁명' 또한 이루어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려의 위상'을 다시금 조정해야만 한다. 고려는 유약한 나라가 아니라 강력한 나라였기에 '고유한 문화'를 보존하고 보전할 수 있었으며, 기회를 틈타 '잃어버린 자주성'을 되찾아 오는 저력까지 보여주었다고 말이다. 만약, 다른 나라에 휘둘리기만 한 '약소국'이었다면, 아무리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힘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제 풀에 넘어지고 말았을 것이고, 주변 강국들이 이를 그냥 좌시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시기적으로도 엄청난 위기속에서 해낸 업적이기도 하다. 즉,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던 시절에 개혁정책을 밀어붙였다는 말이다. 안으로는 왕권을 침해하는 난이 그칠 줄 몰랐고,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으로 온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해안가는 물론 수도인 개경까지 쳐들어오는 난리통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슬기롭게 물리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들이 겉핥기식으로 대충 보면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끝끝내 망하지 않고 이겨냈다는 점에서 '고려'의 대단한 위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무려 500여년이다. 태조 왕건이 918년에 나라를 세우고 태조 이성계가 1392년 다시 나라를 세우기까지 무려 5세기에 걸쳐 '강력한 파워'를 보여주어, 근근히 명맥만 유지한 허약한 나라가 아니라 당당히 맞서싸우고 지킬 건 지켰으며 챙길 건 다 챙겨놓고 그 위에 화려한 문화까지 꽃피운 나라가 바로 '고려'라는 나라였음을 우리는 기록에 새겨넣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호'로 '조선'이란 이름을 가장 먼저 썼고, 뒤이어 '한'을 썼고, 뒤이어 '고려'를 썼다. 그 사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라는 <삼국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나라이름을 썼으나, 현재는 '조선', '한', 그리고 '고려'라는 이름을 가장 널리 쓰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를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대한민국'이라 부르는 것, 북쪽의 동포들이 '조선'이라 칭하는 것에서 낯선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국호를 쓰면서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는 자긍심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한때 '까레이스키(러시아)', '커우리(중국)'라면서 우리의 '고려'를 낮잡아 불렀다. 또한 '조센징(일본)'이라면서 우리를 사람취급도 하지 않으려던 치욕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그대로' 되갚아주어야 한다. 그 방법은 우리의 <상소리 사전>에 '러시아', '중국', 그리고 '일본'이라는 욕설을 등재하는 것이다. 저들이 우리에게 했던 방식 '고대로' 되돌려주는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저들이 욕설로 썼던 우리의 나라이름을 만천하에 자랑스럽게 공포하는 것이다. '조선', '고려', 그리고 '대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고 강력한 나라의 이름으로 맹위를 떨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역사'를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할 사명이 있는 셈이다. 수많은 외침을 받고도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계승한 것으로도 모자라 더욱 발전시켜서 전세계에 '문화'를 전파하는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고 말이다. 오늘날의 '한류열풍'은 우연히 운이 좋아서 불어재끼는 바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저력'이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에서 비롯하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자부심으로 삼아 당당히 보여주어야 한다.

논술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날, 한 학생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왜 한국사는 재미가 없는 거죠? 만날 '침략'만 당하고 땅뙈기도 쬐끄마하고, 그나마 반토막으로 나뉘어서 초라하기 짝이 없네요. 이런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거죠? 부끄럽기만 하잖아요. 저는 차라리 세계사나 배울래요."라고 말이다. 그 당시에는 말문이 막혔다. 당연히 그 학생에게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유구한 우리 역사의 당당한 모습'을 설파하여 반격을 하려고 했는데, 고조선도 망하고, 삼국도 망하고, 통일신라도, 고려도, 조선도 망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강대국들의 전쟁에 휘말려 '대리전'까지 치루고서도 남북대치, 여야와 보수진보 간의 갈등양상에, 현재에도 '주변 강대국'에 휘둘리다 못해 경제까지 휘청거리던 나라꼴 때문에 반박할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은 결국 답을 찾았다. '대한민국'이 진짜 대단한 이유를 말이다. 그럴듯한 비유를 하자면, 대한민국은 '전세계 5위'를 하는 실력이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대단한 실력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걸까? 그건 전세계 1등부터 5등까지 '한 클라스'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10위권, 100위 권 밖에 있는 있는 나라들은 저 멀리에 있고, 하필이면 전교 1등(미국), 2등(중국), 3등(러시아), 4등(일본), 그리고 5등(대한민국)이 한 반에 모여 있어서 '세계적인 클라스'인데도 그 실력이 제대로 돋보이질 않는 셈이다. 대략 전세계 50등을 하고 있어도 아프리카 한복판에 있었다면 '대빵 노릇'하며 저 커다란 대륙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을텐데, 하필 '최상위 클라스'가 대한민국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니 제대로 된 실력을 뽐내질 못하는 셈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전세계 꼴찌'에 '깡패 국가'인 북한도 한 클라스에 속해 있어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속에서 '대한민국'은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시간속에서 세계적인 탑클라스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 우리가 '한국사'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반만년'동안이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고대문명국의 지위'를 누려도 좋고,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할 수도 있고, '화려한 문화유산'도 풍족하니, 어디에 내놔도 빼어난 역사임에 틀림없다. 또한, 나라의 흥망성쇠에 따라 '약한 모습'을 보인 적도 많았지만, 단 한 번도 '고유한 문화'를 빼앗기고서 다시 되찾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증거로, 거대한 중국대륙에 속해 어마어마한 영향을 받았으나 '고유한 언어'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중국 역사속에 등장하는 수없이 '사라진 민족들'을 보라. 그들은 고유한 언어와 글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현재는 자취를 찾아볼 수조차 없지 않은가. 한때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우리말글'을 잃어버릴 뻔한 적도 있다. 하지만 결국엔 다시 되찾았고, 오히려 '한자'를 쓰지 않고도 '전세계 모든 문자와 언어'를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위대함만 세계 만방에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오히려 현재의 일본 젊은이들이 '한본어'라는 '한글'을 차용해서 일본어를 구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박시백의 고려사>가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고려의 위대함'을 일깨우는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라면, 우리는 더 나아가서 '위대한 한국사'로 새로 정립하여 우리의 자랑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고려사'가 부끄럽지 않게 되었는데, 다른 역사를 부끄럽게 여길 까닭이 없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국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국중심주의에 빠져 역사적 사실까지 날조하고 왜곡하고 곡해해서 유리하게 해석하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한국사'에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빼앗아 내것으로 만들고도 반성하지 않는 '제국주의적 역사관'이 없기에 자랑스러워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리고도 전세계 탑클라스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선진국이라 일컫는 나라들의 역사를 보면 우리와 다르다. 그네들은 '침략'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해 '문명개화'를 핑계삼아야 했지만, 우리는 그들의 침략을 받은 '피해국가'인데도 꿋꿋하게 버티고 고난을 감내하여 끝끝내 기적을 이루어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걸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역사에 '침략의 야욕'을 뿜뿜하며 '젊은 청년들'을 생지옥과 같은 전쟁터로 내몰고서 살아돌아오면 '영웅 대접'하며, 장렬히 전사하면 '신과 동급'으로 추증하여 참배라도 올려야 자랑스럽게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역사'를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어느 한 부분을 펼쳐봐도 감히 그 누구도, 그 어느 나라도 우릴 함부로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저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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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께 빛날래! 쾌걸 공주 엘리자베트 3
아니 제 지음, 아리안느 델리외 그림, 김영신 옮김 / 그린애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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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IV / 그린애플 6번째 리뷰] 프랑스 공주 엘리자베트 시리즈의 최종판이다. '순정동화'의 마지막답게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는데, 그건 바로 '프랑스 국왕 루이16세의 대관식'이었다. 물론 대관식이 열리기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늘 그렇듯 엘리자베트 공주에게는 쾌활한 소동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좀 스케일이 크다. 대관식에서 꼭 쓰이는 '성스런 보물들'을 훔쳐가려는 도둑 일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도둑들이 훔쳐가려는 보물은 다름 아닌 '루이16세'가 대관식에서 왕위에 정식으로 등극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샤를마뉴의 왕관'이었다. 무려 4킬로그램에 해당하는 금은보화로 장식된 화려한 왕관이었는데, 역대 프랑스 국왕이라면 대관식에서 꼭 그 왕관을 써야만 인정받았단다.

샤를마뉴 대왕이라면 그 유명한 '카롤루스 대제'이기도 하다. 다른 이름 같지만 '동일인물'이다.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가 '서유럽 전체'를 통일했을 때가 바로 '사를마뉴 대왕' 집권기였기 때문이다. 이후 '베르됭 조약'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3개로 쪼개지면서 '서프랑크 왕국'은 프랑스로, '동프랑크 왕국'은 독일로 각각 역사 편입을 하면서 '프랑스 역사'에서는 샤를마뉴 대왕로, '독일 역사'에서는 카롤루스 대제로 부른다. 스펠링은 'Charlemagne'다. 흔히 서로마제국의 황제 '카롤루스 대제'라고도 많이 알려졌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이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문이라고 볼 정도로 수많은 게르만족들이 서로마제국의 영토를 나눠먹었으나, 현재의 프랑스 지역이 일부를 '프랑크족'이 차지하고, 그 지역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서 '메로빙거 왕조'를 열고, 과거 서로마 지역의 대부분을 '카롤루스 대제'가 차지하게 되면서 '서로마제국의 황제'라는 별칭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샤를마뉴 대왕이 죽자 왕국은 셋으로 쪼개졌고, 다시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기에 '서로마제국 황제'라는 명칭도 자연스레 폐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 독일 제국이 그 명칭을 이어받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으나, 로마제국의 황제다운 강력함은 찾기 힘들었다.

암튼, 프랑스 왕정국가는 이후 대관식에서 '왕홀'과 '정의의 손'이라는 권위와 신성함을 상징하는 장식물 이외에 '샤를마뉴의 검과 왕관'을 대관식에서 선보이며 더욱더 화려하고 웅장한 대관식을 연출했단다. 현재 '샤를마뉴의 검'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보관중이지만, '샤를마뉴의 왕관'은 도난을 당하거나 파괴되는 수모를 겪다가 루이16세의 대관식 이후 프랑스 혁명 때 잃어버리고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단다. 기록에 따르면 루비 16개, 루비를 떠받치는 사파이어 16개, 에메랄드 16개, 총 48개의 보석이 박혀 있고, 왕관 안쪽에는 진주를 덧댄 진홍색 벨벳 모자로 마감을 해서 무게만 해도 무려 4킬로그램에 달했다고 한다. 거의 금 10돈이 3750그램이니, 거의 금 11돈에 해당되는 무게이다. 그걸 반나절 동안이나 진행되는 대관식 내내 쓰고 있었다니 '왕관의 무게'가 정말 장난 아니었던 셈이다. 이런 물건이니 혁명의 시기에 혼란을 틈타서 사라져버린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동화속에서 엘리자베트 공주는 이런 중요한 보물이 도난당하지 않도록 친구들과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도난의 위기'를 헤쳐나가고 무사히 친오빠 루이 오귀스트가 '루이16세'로 등극할 수 있게 힘을 모았다. 이를 두고, 동화속에서는 '연대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서로서로의 힘을 모아 함께 책임을 지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을 '연대'라고 말했다. 동화속에서는 '어린이'들이 연대를 해서 왕관을 훔쳐가려는 도둑들의 음모를 해결했고, 심지어 '외국인'들도 함께 참여해서 무사히 대관식을 치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위기는 몇몇 개인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이고, 이웃 나라가 고난을 당하면 그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남의 문제'로 치부하고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기에 '연대'는 우리 모두가 참여할 수 있고, 모든 인류가 함께 참여할 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연대를 하게 되면 못할 일도 없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현재 세계 여러 나라에서 겪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은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건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인 '연대'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건 꼭 전세계인들이 모두 '연대'를 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더구나 강대국이 벌이는 살육전쟁과 관세전쟁은 또한 어떤가? 연대는커녕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난 것마냥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만 있지 않은가 말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탄핵찬반 논쟁'은 도를 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이룩한 민주화이고, 어떤 희생을 치루고 피워낸 '민주주의'인데, 지금 그꼴이 어떤가? 이게 정녕 민주주의란 말인가? 서로의 생각과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해주는 기본 예절은 어디가고, 서로를 향한 막말과 욕설로도 모자라 '폭력과 위법'을 일삼느냔 말이다. 제발 부끄러운줄 알고 예의를 지키란 말이다. 그렇게 서로를 원수로 여기고 쌈박질하는 '남북갈등'에, 진보와 보수의 '남남갈등'까지 더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탄핵갈등'까지 덧붙여서 나라를 아주 망하게 만들려 작정했느냔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내몰아서 이득을 보는 것은 딱 한 명이다. 그 한 명만이 '다 죽은 목숨'을 연장시키고, 국민 모두를 악의 구렁텅이로 내몰아서, 저 혼자 잘 살면 땡 잡은 거고, 못 잡아서 죽어도 '개죽음'이 아니라 '본전'이니 막나가는 것이다. 거기에 놀아난 '동조범'들도 마찬가지 속셈이고 말이다. 왜 우리가 이런 죽어 마땅한 한 놈 때문에 나라꼴을 이모양 이꼴로 만들어야만 한단 말인가. 제발 정신 차리고 '딱 한 놈' 잡아족치는 연대를 보여줄 때다. 이 책의 제목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우리 함께 빛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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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을 달릴래! 쾌걸 공주 엘리자베트 2
아니 제 지음, 아리안느 델리외 그림, 김영신 옮김 / 그린애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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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III / 그린애플 5번째 리뷰] 프랑스 공주 엘리자베트 시리즈 제5권에 해당하는 이번 책의 제목은 <나의 길을 달릴래!>다. 엘리자베트 공주는 우리에게 친숙한(?) 프랑스 왕 루이16세의 친동생이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루이16세의 '무능함'만을 부각해서 보았지만, 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속사정까지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시리즈는 '실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동화같은 이야기를 써놓아서, 여자아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재미나면서도, 동시에 '역사의 이면'도 살펴볼 수 있는 유익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루이16세'는 어린 여동생의 슬픔과 고통까지 걱정하고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오빠이며, 동시에 그런 따뜻한 마음씨로 가족을 돌보는 것처럼 프랑스 왕국의 백성들에게도 '자애로운 아버지'로 군림하고 싶었던 평범한 임금이고 싶어했을 거라는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물론, '격동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구체제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던 무능한 임금의 모습도 루이16세의 한계점임은 분명하고 말이다. 만약, 루이16세가 평화로운 시대에 재임을 했더라면 그는 참 태평스런 시대를 누리게 했을 수도 있는 마음씨 따뜻한 임금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천방지축인 엘리자베트 공주를 보고 있으면 말이다.

이번에도 엘리자베트 공주는 사건사고를 몰고 다닌다. 단 하루도 얌전히 '공주 수업'을 받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이번엔 스케일이 더 커졌다. 북아프리아에 위치한 국가, 리비아에서 평화사절단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앞서서 언급했던 '베르사유 동물원'에 사육하게 될 동물들을 우호를 약속하는 선물로 데리고서 아주 호화롭게 방문했다고 한다. 1775년에 벌어졌던 실제 사건이다. 당시 리비아는 '해상무역'을 통해서 부를 쌓아 경제적 호황(?)을 맞이했더랬는데, 이게 종종 해적질로 변질되기도 했기 때문에 지중해를 항해하는 배들에겐 큰 위협이 되었단다. 이에 루이15세가 프랑스 함대를 출동시켜 리비아의 가장 큰 항구인 트리폴리 항구를 포위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리비아의 파샤(임금)는 프랑스 배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평화협정을 맺고, 프랑스는 함대를 철수 시켰다. 그리고 1년 뒤, 루이15세가 죽자, 리비아의 파샤는 루이16세와 다시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사절단을 보낸 것이다. 이때 사절단이 가지고 온 선물이 어마어마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사자, 표범, 낙타, 그리고 아랍의 말까지 프랑스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신기한 동물들을 엄청 가지고 왔다고 전한다. 특히, 아랍의 말은 유럽의 말보다 뛰어난 혈통을 갖고 있기에 프랑스 사육사들은 이를 '종마(씨말)'로 삼아 뛰어난 품종으로 개량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에 감동한 루이16세는 자신의 대관식에 '리비아 사절단'을 초청하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엘리자베트가 벌인 소동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자신의 결혼 상대가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 결혼 결정을 되돌리기 위해서 아무도 몰래 친오빠인 '루이16세'를 알현하고, 결혼을 무효로 되돌리려고 대소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유럽의 왕실에서는 '정략결혼'이 일상이었다. 다시 말해,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결혼'을 이용했고, '결혼'을 통해서 전쟁 직전의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약속하는 일을 계속 이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각국의 왕자와 공주는 살아생전에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듯 싶지만, 일상을 들여다보면 '개인의 영욕을 위해서' 누리는 것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싫은 것도 감수해야만 하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런 인생을 즐기며(?)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이루는 인물도 있겠지만, 그런 '정해진 운명', '짜여진 각본'에 따라 하기 싫은 것도 억지로 해야만 하는 '연극무대'같은 삶을 저주하는 인물도 있기 마련이다. 엘리자베트 공주는 후자에 가깝고 말이다.

암튼, 엘리자베트가 이번에 결혼할 상대는 포르투갈 왕자다. 하지만 얼굴도 모른다. 그럼에도 결혼을 해야만 하는 까닭은 당시 프랑스와 앙숙이었던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포르투갈을, 프랑스쪽으로 끌어들여 한편으로 삼고 영국을 고립무원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영국은 '신교(프로테스탄트)의 국가'이고, 포르투갈은 '구교(로마 가톨릭)의 국가'이지 않은가. 그렇게 같은 종교(로마 가톨릭)인 프랑스와 포르투갈이 손을 잡게 되면 영국과의 경쟁에서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에 이번 '프랑스 공주'와 '포르투갈 왕자'의 결혼은 아주 중요한 결정을 담보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는 국가적인 이익을 따지는 셈법이고, 엘리자베트 공주 '개인의 삶'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폭력(?)적인 결정인 셈법이다. 더구나 엘리자베트 공주는 이제 막 '열한 살'이 되었을 뿐이다. 아무리 결혼 날짜가 2년 뒤라고는 하지만, 이미 '정해진 운명'이 자신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결정되어 버린다는 것에서 슬프고 아픈 것이다. 왕실 가문에 태어난 운명이 그렇게 결정되어 있다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인륜지대사로 여기는 '결혼'인데, 막강한 권력을 쥐고 흔드는 왕실 가문의 사람들조차 '정해진 이익을 위해서' 강제로 짝을 맺게 하는 것은 마치...훌륭한 혈통을 얻기 위해서 억지로 '짝짓기(교배)'를 강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이번 책에서는 리비아 사절단이 데리고 온 '암말, 에클립스'가 등장한다. 바람처럼 달릴 때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그런데 이번 사절단이 에클립스를 데리고 온 목적이 억지로 교배를 시켜서 뛰어난 혈통의 말을 낳게 하는 것이 목적이란다. 그렇게 뛰어난 말들이 프랑스에 넘쳐나게 되면 프랑스와 리비아 사이의 평화도 오래도록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엘리자베트의 '정략결혼의 목적'과 아주 흡사하지 않은가. 물론 아주 좋은 목적이다. 분명 '이익이 되는 결정'이고 말이다. 그런데 에클립스의 행복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단지 '가축'일 뿐이니 유용하게 써먹고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폐기처분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까? 왕실의 '가족'으로 온갖 보살핌을 살뜰하게 받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주 큰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희생(!)시켜 버리는 것으로 결정해버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냔 말이다.

여기에 프랑스 왕실의 교육을 담당한 '수석교사 마르상 부인'의 태도가 한 몫 한다. 그녀는 루이16세부터 엘리자베트까지 왕실 가족의 어린 시절에 아주 '철저한 교육'을 하는 것을 막중한 책임으로 맡고 있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 귀족 가문은 프랑스 역대 부르봉 왕조의 '왕실 담당 가정교사'로 책무를 맞고 있어서 죽을 때까지 그 임무를 다하는 것을 '프랑스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엘리자베트 공주의 경우를 봐도 알겠지만, 너무너무 싫은 사람이다. 말끝마다 "프랑스 공주(왕자)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라면서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하고, 지루하고 따분한 수업을 할 뿐이다. 각자의 성향이나 재능에 따라서 '유연한 학습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편일률적'으로 왕실 가문에 걸맞는 교육이랍시고, '변함없이 엄격한 교육'만을 강요할 따름이다. 그러다 '국익에 우선하는 행사'가 발생하면 아낌없이 '왕실 가족'을 희생양 삼아 '정략결혼'을 밀어붙이고, 그렇게 성사된 결혼으로 얻은 '국익'을 자신의 교육적 커리어 덕분이라고 우쭐거리는 아주 밥맛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교사로서의 자격'도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엘리자베트 공주는 사사건건 '마르상 수석 교사'와 대립을 하고 수업이 아니라 벌을 받길 자처한다. 물론, 이런 모습도 '학생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은 아닐테지만 말이다.

어떤가? 왕자와 공주의 삶이 그들이 입고, 먹고, 자는, 모든 것들의 화려함만큼이나 부러움의 대상인가? 이렇게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삶은 저 넓은 들판에서 맘껏 뛰어놀다가 적당한 때에 도살되어 식탁위에 맛난 요리로 오르는 '육우(고기소)의 삶'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에스파냐의 전통, '투우'가 어차피 도살될 소와 함께 펼칠 화려한 퍼포먼스로 육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처럼 '왕실 가문의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도 그런 투우의 화려함과 그닥 다르지 않아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엘리자베트가 벌인 소동의 결과가 자못 궁금해진다. 그녀는 어떤 소동을 벌였으며,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결정을 스스로 이루어낼 수 있었는지도 궁금해진다. 쾌걸 공주 엘리자베트의 다음 소동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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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랑 춤출래! 쾌걸 공주 엘리자베트 1
아니 제 지음, 아리안느 델리외 그림, 김영신 옮김 / 그린애플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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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II / 그린애플 4번째 리뷰] '공주 탐정 엘리자베트' 시리즈의 후속편으로 '쾌걸 공주 엘리자베트'라는 시리즈로 다시 돌아왔다. 시대적 배경은 '18세기 프랑스 부르봉 왕조'로 루이16세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벌어지는 실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이야기를 풀어간 '순정동화'다. 어릴 적에 소녀들이 주로 읽던 만화를 '순정만화'라고 불렀는데, 이 동화책도 여자아이들이 딱 좋아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하기에 '순정동화'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다.

이 동화책에는 실존 인물인 '엘리자베트 공주'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30대에 짧은 생을 마감했는데, 결혼도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 혁명'이 그녀의 인생을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동화책은 엘리자베트가 10대 어린 시절 베르사유 궁전에서 지내던 시기를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사건은 동화책에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진난만', '천방지축'인 말괄량이 공주가 벌이는 요절복통 대소동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지경으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다만, 하기 싫은 공부를 강요하는 '수석 가정교사 마르상 부인' 때문에 불행하고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난 번 '뮤직박스 사건'을 계기로 함께 공부하기로 한 친구 '앙젤리크'와 그녀의 어머니이자 엘리자베트의 새로운 가정교사 '마코 부인' 덕분에 공부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그래서 엘리자베트도 상당히 똑똑해졌고, 공주다운 예절도 제법 티 나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곧 이웃나라 왕자와 결혼 약속을 한 언니 '클로틸드 공주'가 무도회 때 출 '춤곡'을 연습하는데, 엘리자베트도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엘리자베트는 춤을 출 수는 없었다. 아직 열 살밖에 되지 않아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동화책은 이처럼 좀처럼 배우기 힘든 '궁중 예법'과 같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익한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 역사'를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재미난 동화책을 읽으면서 '역사적 사실'도 함께 익힐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번 책에서는 베르사유 궁전 안에 있던 '동물원'에 관한 이야기다. 이 동물원은 루이 14세가 손자며느리인 '마리 아델라이드'에게 선물로 주면서 만들어졌는데, 마리 아델라이드는 이 동물원에서 수많은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방문자에게 환영의 뜻으로 물벼락을 내리는 장난도 이때 생겼고 말이다. 하지만 루이 15세는 동물원에 관심이 없어 동물원 관리는 엉망이 되었지만, 그래도 새 동물들은 점점 불어났다고 한다. 부실관리를 하는데도 '동물원 식구'는 점점 늘어나자 동물원은 더욱더 망가지게 되었단다. 루이 16세 때는 엉망인 동물원을 '간소하게' 복원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동물원의 동물은 그대로 달아나거나 일부는 시민들이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 일을 겪고도 남아있던 동물은 '파리 식물원'으로 옮겨져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그 당시에 공개되었던 사자의 이름이 바로 '으와카'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자가 맞다. 그리고 그 사자와 함께 지내던 개가 있었는데, 그 개가 죽자 으와카도 활기를 잃고 병들었다고 한다. 현재 '베르사유 동물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 이후 버려지고 파괴되어 철거되었다고 한다.

그럼 동물원과 궁중의 공통점이 있을까? 오늘날 몇 남지 않은 '왕실 사람들'이 동물원에 갇힌 동물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사실을 아는 분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과거의 막강하고 화려했던 '왕실 가문'은 현재는 대부분의 권력을 잃어버리고 명목상 '군주의 역할'만 수행하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왕실 사람들도 대대로 내려오는 '사업'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직접 벌어서 쓰기도 하지만, 대개는 국가의 세금으로 '왕실 사람들'이 쓰는 비용을 충당하기 때문에 왕자와 공주인데도 '국민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년 어마어마한 '국가 예산'을 축내던 것을 깎을 수도 없다. 적어도 '체면 유지'는 해야 하기에 엄청난 비용을 청구하고, 그보다 더한 비용을 사용해서 해마다 적자를 면하지 못하는 왕실이 많다고 한다. 실제로 영국왕실은 부족한 예산과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왕실의 일상'을 TV에 방송을 하며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기도 했단다. 엘리자베스 2세의 결단이었다는데, 그로 인해 영국 왕실이 전세계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결혼과 이혼 등의 사사로운 일상까지 다 공개되는 바람에 망신을 당하기 일쑤고, 심지어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파파라치에게 쫓기다 사망하고 마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정말 '동물원'에 갇힌 동물 신세와 다를 바 없는 처량한 신세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은 행복한 걸까? 과거에는 '동물원'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신기한 동물들을 보며 '견문'을 넓히는 유익함도 있었고, '쉽게 볼 수 없는 동물'을 전세계에서 잡아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일이었기에 '동물원'을 운영하는 것이 곧 '왕권의 파워'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럴까?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인권'이 소중한 만큼 동물에게도 '동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더구나 원래 살던 환경과 아무리 비슷하게 꾸미고, 동물원 사육사가 훌륭하게 돌봐준다 하더라도 '좁은 우리'에 갇혀 지내는 동물들은 낯선 환경과 수많은 관람객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증세'를 보이는 동물들도 많다고 한다. 물론 반론도 있다. 험한 야생환경에서 살다가 쾌적하고 편안한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안전하고 풍족하게 관리를 받는 것을 마냥 나쁘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밀렵이나 사냥으로 희생을 당할 뻔한 동물을 구해다가 '동물원'에서 보살펴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겠냐는 주장도 있다. 허나 거꾸로 생각을 해보자. 누군가 당신을 안락하고 쾌적한 '요양보호소'에 가둬놓고서 자유를 박탈해버린 것을 두고서 진정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질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캐어'가 필요한 분이 아니라면 건강하게 뛰놀 수 있는 '야생동물'을 강제로 잡아다가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어찌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겠냔 말이다.

심지어 '반려동물'을 키우면서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일이 태반이고, 인간들이 사는 공간에서는 반드시 '목줄'을 채워야 하고, '인공사료'만 평생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 반려동물 또한, '행복'을 논할 수 있느냔 말이다. 물론 '동물권'을 보장하고 인간과 친숙하게 지내는 동물을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명칭을 바꿀 정도로 인식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요즘엔 집밖에서 기르지 않고 '집안'에서 기르는 것이 일상이 되었을 정도로 '동물권'에 대한 인식도 많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물'이 인간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내용이다. '인간 위주'의 판단이 아닌 '인간과 동물의 공생'이 가능하고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말이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한 생명'에 대해서 '무한 책임'을 지겠다는 사명감으로 길러야만 한다. 쉽게 구매했다가 쉬이 버려도 되는 '장난감'하고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려동물'을 키우는 정성으로 '동물원 관리'도 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인간과 친숙한 몇몇 동물을 제외하곤 '야생동물'이 원래 있던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니 '동물원'이나 '수족관'을 관람할 때에는 동물을 최대한 안심할 수 있도록 예절(?)을 지키며 차분히 관람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당신 집'을 구경하겠다고 찾아와서 시끄럽게 소리지르고 함부로 당신 집의 물건과 당신을 대한다고 생각해보란 말이다.

참, '순정동화'라고 소개를 하고서는 너무 심각한 이야기만 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엘리자베트가 쿠키라는 이름의 '퍼그' 강아지를 선물로 받으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다. 마리 앙뜨와네트 왕비의 시종인 '모리스 드 퐁텐' 귀족이 지난 번 옷장에 갇힌 사건에 대한 앙심을 품고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쪽지를 남기고 귀여운 강아지를 납치해서 동물원에 갇힌 사자우리에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는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하지만 '공주 신분'답지 않은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는 '마르상 부인'의 감시와 눈길을 피해서 귀여운 강아지 구출 작전이 펼쳐진다. 쾌걸 공주가 아름다운 궁전에서 벌이는 대소동의 결말은 어떻게 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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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꽃 반달 그림책
김영경 지음 / 반달(킨더랜드)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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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XXI / 반달(킨더랜드) 2번째 리뷰] '그림책'을 읽을 땐 글자(텍스트) 위주가 아닌 '그림' 위주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텍스트'가 많은 그림책일지라도 글자를 쫓아가지 말고 그림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아주 작은 차이부터 살펴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이는 '줄글'로 된 이야기책에서 '행간'에 감춰진 참뜻을 찾아내는 훈련과 아주 흡사하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읽는 그림책이라면 더욱더 '그림, 본연의 맛'에 심취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


모든 그림책이 그렇진 않지만 '표지' 또한 그림책의 일부인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엔 '표지'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아주 바람직하다. 아이에게 앞표지를 먼저 보여주지 말고 뒷표지부터 찬찬히 뜸을 들이다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아이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도 좋다. "앞표지에는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을까?" 이런 질문을 '발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생각을 이끌어내는 질문'이란 뜻인데, '정답'은 없다. 그저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생각을 '표현'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이의 표현력에 따라 엄청난 감동이 피어나기도 한다. 물론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림책만 뚫어져라 노려보는 아이도 있고 말이다. 정말 천차만별이니 '정답'을 강요하지는 않길 바란다. 자주 그런 '발문'을 던지다보면 아이는 어느새 '표현력의 왕'이 되어 주체할 수 없이 표현하게 될테니 절대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물론 더 오래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내 경험으로는 '독서지도 1년동안' 수업중에 단 한마디로 하지 않던 아이가 2년째 접어드는 순간에 봇물 터지듯 쫑알거리는데, 그 순간의 감동이란 정말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수업은 '방문수업'이라서 어머님이 거실에서 볼일을 보시다 종종 아이의 방을 몰래 훔쳐보곤 했는데, 아이가 쫑알쫑알 입을 여는 그 순간에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울어버리셨다. 내심 표현은 안 했지만, 내 수업방식에 의문을 가지기도 했고, 비싼 수업료를 냈는데 아이는 멀뚱멀뚱 눈만 깜빡거리다가 수업을 마치길 1년이니 얼마나 초조하고 답답했을까? 그렇게 오랜만에 입을 연 아이는 그 다음 수업부터 '청산유수'였다. 언제 그렇게 표현력 훈련을 한 것인지 그동안 내가 수업중에 했던 말투까지 흉내내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고, 말문이 터지니 글쓰기도 덩달아 실력 발휘를 하여 앉은 자리에서 두 바닥을 쓱쓱 써내려가곤 했다. 그러니 참을성을 가지고 '아이가 할 법한 대답'을 연상하며, '아이가 했으면 좋을 올바른 대답'을 떠올리며 '좋은 질문'을 꾸준히 던지면 결국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줄거리는 두 아이가 이끌어 간다. 한 아이는 자그마한 벽돌을 쌓아 '자기만의 성'을 쌓아나가고, 다른 한 아이는 그 성밖에서 '벽돌을 쌓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성을 쌓던 아이는 성벽이 올라갈수록 점점 덩치가 커진다. 성밖에 있던 아이는 성장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아이를 비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어른들은 두 아이 가운데 '성을 쌓고', '성장하는' 아이를 좋은 아이, 올바른 아이, 훌륭한 아이로 결론 내릴 것이다. 반면에 성밖에서 빈둥거리는 아이는 그 반대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성벽을 높이 쌓던 훌륭한(?) 아이가 그만 성안에 갇혀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자신이 쌓은 성벽을 어쩌지 못하고 그만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갇힌 덩치 큰 아이는 지쳤는지 심심해선지 성벽에 기대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늘어뜨린 성안의 아이 손가락을 가만히 건드리는 성밖의 아이에 시선이 간다. 아주 강렬하게 말이다. 드디어 성밖의 아이가 주목받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성안에 갇힌 아이는 성밖에 있는 조그만 아이를 벽 너머로 바라본다. 그러자 성밖의 아이는 한 손에 든 '작은 꽃'을 번쩍 들어서 보여준다.

그 작은 꽃을 건내받은 성안의 아이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성벽 안에는 '작은 꽃'이 머물만한 곳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성안의 아이는 그 '작은 꽃'을 둘만한 장소를 물색하느라 이 벽돌, 저 벽돌을 들춰보지만 결국 찾지 못해 슬퍼진다. 왜냐면 작은 꽃이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성안의 아이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작은 꽃'이 시들기 전에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성안의 아이는 '작은 꽃'을 살리기 위해서 성벽을 넘어 작은 꽃이 살만한 들판을 찾았고, 그곳은 성밖에 있던 아이가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둘은 '작은 꽃'을 들판에 옮겨 심었다. 작은 꽃은 다시 생기를 되찾았고, 두 아이는 향긋한 꽃내음을 맡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옮겨 심은 '작은 꽃'은 어느새 자라서 커다란 해바라기꽃이 된다. 줄기와 잎이 무럭무럭 자라서 덩치 큰 아이만큼 자라자 덩치 큰 아이는 자기가 쌓아올린 성벽을 다시 돌아본다. 그 성벽은 이제 한 쪽 벽이 무너져서 망가져버렸다. '작은 꽃'을 살리기 위해 무리하게 벽을 넘다가 망가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덩치 큰 아이는 속상해하지 않고 무너진 벽돌을 허물어버리고 다시 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성밖에서' 말이다. 그렇게 성밖에서 벽을 허무는 동안 덩치 큰 아이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한다. 성벽이 낮아지자 그런 모양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낮아진 성벽 위에 다시 벽돌을 쌓아올리기 시작한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다. 두 아이가 힘을 합쳐서 함께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원래의 모양과는 달랐다. 처음에 쌓은 성벽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는데, 다시 쌓아올린 성은 '지붕'의 형태를 띄면서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였다. 그리고 차이점은 또 있었다. 첫 번째로 쌓아올린 성벽은 굳게 '닫힌 문'었는데, 두 번째로 쌓아올린 성벽은 온전하게 '집 모양'을 띄면서 닫혔던 문이 점점 활짝 '열린 문'의 형태를 띤다. 그렇게 성을 완성하고나니 두 아이는 '크기'가 같아졌다. 그리고 성의 꼭대기에는 '작은 꽃'도 심어놓았다. 그렇게 두 아이는 지붕 위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그림책은 끝을 맺는다.

그림책에서 '교훈'이 떠오르는가? '주제'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는가? 사실 그림책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책도 없다. 그래서 그림책은 아이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아주 훌륭한 교재다. 그런데 섣부른 어른들은 '그림책'속에서 한 가지 교훈과 주제를 찾아내곤 '벽돌처럼' 굳게 닫아버린다. 이 그림책의 주제는 앞으로 '이것이다'라면서 뿌듯해 한다. 너무 독단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하긴 '텍스트'로 가득찬 책들에서도 '정답'을 찾아내려 안간힘을 쓰기 일쑤인데, '텍스트'가 없는 책에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도 제발 그러지 말길 바란다. 하나의 그림책에서 열 개의 교훈을 얻으면 '10배의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고, 백 개의 주제를 찾아내면 '100배의 가치'를 얻은 셈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꼴랑 '1개의 가치'를 고집하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림책 100권을 읽어 봤자. 고작 100개의 '정답'밖에 찾지 못하는 바보들이다. 그림책 한 권에서 100개의 상상력을 얻어낸 아이들은 100권의 그림책을 읽으면서 '1만 가지의 교훈과 주제'를 찾아낸 천재들인 셈이다. 당신의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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