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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꽃 ㅣ 반달 그림책
김영경 지음 / 반달(킨더랜드) / 2020년 3월
평점 :
[My Review MCMLXXI / 반달(킨더랜드) 2번째 리뷰] '그림책'을 읽을 땐 글자(텍스트) 위주가 아닌 '그림' 위주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텍스트'가 많은 그림책일지라도 글자를 쫓아가지 말고 그림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아주 작은 차이부터 살펴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이는 '줄글'로 된 이야기책에서 '행간'에 감춰진 참뜻을 찾아내는 훈련과 아주 흡사하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읽는 그림책이라면 더욱더 '그림, 본연의 맛'에 심취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

모든 그림책이 그렇진 않지만 '표지' 또한 그림책의 일부인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엔 '표지'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아주 바람직하다. 아이에게 앞표지를 먼저 보여주지 말고 뒷표지부터 찬찬히 뜸을 들이다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아이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도 좋다. "앞표지에는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을까?" 이런 질문을 '발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생각을 이끌어내는 질문'이란 뜻인데, '정답'은 없다. 그저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생각을 '표현'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이의 표현력에 따라 엄청난 감동이 피어나기도 한다. 물론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림책만 뚫어져라 노려보는 아이도 있고 말이다. 정말 천차만별이니 '정답'을 강요하지는 않길 바란다. 자주 그런 '발문'을 던지다보면 아이는 어느새 '표현력의 왕'이 되어 주체할 수 없이 표현하게 될테니 절대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물론 더 오래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내 경험으로는 '독서지도 1년동안' 수업중에 단 한마디로 하지 않던 아이가 2년째 접어드는 순간에 봇물 터지듯 쫑알거리는데, 그 순간의 감동이란 정말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수업은 '방문수업'이라서 어머님이 거실에서 볼일을 보시다 종종 아이의 방을 몰래 훔쳐보곤 했는데, 아이가 쫑알쫑알 입을 여는 그 순간에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울어버리셨다. 내심 표현은 안 했지만, 내 수업방식에 의문을 가지기도 했고, 비싼 수업료를 냈는데 아이는 멀뚱멀뚱 눈만 깜빡거리다가 수업을 마치길 1년이니 얼마나 초조하고 답답했을까? 그렇게 오랜만에 입을 연 아이는 그 다음 수업부터 '청산유수'였다. 언제 그렇게 표현력 훈련을 한 것인지 그동안 내가 수업중에 했던 말투까지 흉내내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고, 말문이 터지니 글쓰기도 덩달아 실력 발휘를 하여 앉은 자리에서 두 바닥을 쓱쓱 써내려가곤 했다. 그러니 참을성을 가지고 '아이가 할 법한 대답'을 연상하며, '아이가 했으면 좋을 올바른 대답'을 떠올리며 '좋은 질문'을 꾸준히 던지면 결국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줄거리는 두 아이가 이끌어 간다. 한 아이는 자그마한 벽돌을 쌓아 '자기만의 성'을 쌓아나가고, 다른 한 아이는 그 성밖에서 '벽돌을 쌓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성을 쌓던 아이는 성벽이 올라갈수록 점점 덩치가 커진다. 성밖에 있던 아이는 성장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아이를 비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어른들은 두 아이 가운데 '성을 쌓고', '성장하는' 아이를 좋은 아이, 올바른 아이, 훌륭한 아이로 결론 내릴 것이다. 반면에 성밖에서 빈둥거리는 아이는 그 반대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성벽을 높이 쌓던 훌륭한(?) 아이가 그만 성안에 갇혀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자신이 쌓은 성벽을 어쩌지 못하고 그만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갇힌 덩치 큰 아이는 지쳤는지 심심해선지 성벽에 기대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늘어뜨린 성안의 아이 손가락을 가만히 건드리는 성밖의 아이에 시선이 간다. 아주 강렬하게 말이다. 드디어 성밖의 아이가 주목받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성안에 갇힌 아이는 성밖에 있는 조그만 아이를 벽 너머로 바라본다. 그러자 성밖의 아이는 한 손에 든 '작은 꽃'을 번쩍 들어서 보여준다.
그 작은 꽃을 건내받은 성안의 아이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성벽 안에는 '작은 꽃'이 머물만한 곳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성안의 아이는 그 '작은 꽃'을 둘만한 장소를 물색하느라 이 벽돌, 저 벽돌을 들춰보지만 결국 찾지 못해 슬퍼진다. 왜냐면 작은 꽃이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성안의 아이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작은 꽃'이 시들기 전에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성안의 아이는 '작은 꽃'을 살리기 위해서 성벽을 넘어 작은 꽃이 살만한 들판을 찾았고, 그곳은 성밖에 있던 아이가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둘은 '작은 꽃'을 들판에 옮겨 심었다. 작은 꽃은 다시 생기를 되찾았고, 두 아이는 향긋한 꽃내음을 맡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옮겨 심은 '작은 꽃'은 어느새 자라서 커다란 해바라기꽃이 된다. 줄기와 잎이 무럭무럭 자라서 덩치 큰 아이만큼 자라자 덩치 큰 아이는 자기가 쌓아올린 성벽을 다시 돌아본다. 그 성벽은 이제 한 쪽 벽이 무너져서 망가져버렸다. '작은 꽃'을 살리기 위해 무리하게 벽을 넘다가 망가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덩치 큰 아이는 속상해하지 않고 무너진 벽돌을 허물어버리고 다시 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성밖에서' 말이다. 그렇게 성밖에서 벽을 허무는 동안 덩치 큰 아이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한다. 성벽이 낮아지자 그런 모양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낮아진 성벽 위에 다시 벽돌을 쌓아올리기 시작한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다. 두 아이가 힘을 합쳐서 함께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원래의 모양과는 달랐다. 처음에 쌓은 성벽은 '지붕'이 없는 형태였는데, 다시 쌓아올린 성은 '지붕'의 형태를 띄면서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였다. 그리고 차이점은 또 있었다. 첫 번째로 쌓아올린 성벽은 굳게 '닫힌 문'었는데, 두 번째로 쌓아올린 성벽은 온전하게 '집 모양'을 띄면서 닫혔던 문이 점점 활짝 '열린 문'의 형태를 띤다. 그렇게 성을 완성하고나니 두 아이는 '크기'가 같아졌다. 그리고 성의 꼭대기에는 '작은 꽃'도 심어놓았다. 그렇게 두 아이는 지붕 위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그림책은 끝을 맺는다.
그림책에서 '교훈'이 떠오르는가? '주제'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는가? 사실 그림책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책도 없다. 그래서 그림책은 아이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아주 훌륭한 교재다. 그런데 섣부른 어른들은 '그림책'속에서 한 가지 교훈과 주제를 찾아내곤 '벽돌처럼' 굳게 닫아버린다. 이 그림책의 주제는 앞으로 '이것이다'라면서 뿌듯해 한다. 너무 독단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하긴 '텍스트'로 가득찬 책들에서도 '정답'을 찾아내려 안간힘을 쓰기 일쑤인데, '텍스트'가 없는 책에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도 제발 그러지 말길 바란다. 하나의 그림책에서 열 개의 교훈을 얻으면 '10배의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고, 백 개의 주제를 찾아내면 '100배의 가치'를 얻은 셈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꼴랑 '1개의 가치'를 고집하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림책 100권을 읽어 봤자. 고작 100개의 '정답'밖에 찾지 못하는 바보들이다. 그림책 한 권에서 100개의 상상력을 얻어낸 아이들은 100권의 그림책을 읽으면서 '1만 가지의 교훈과 주제'를 찾아낸 천재들인 셈이다. 당신의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