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18
헤르만 헤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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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헤세의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이제사 첫 리뷰를 쓰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역시나 난 '비문학으로의 편식'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제라도 '문학소년'이 되어 리뷰를 쓴다는 것에 대견함을 느낀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를 정도의 '강렬한 문학리뷰'를 맛보여 드릴 것이다. 비문학 편식쟁이의 문학읽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 공개한다.

 

  다들 <데미안> 한 번쯤은 읽어보셨을 것이다. 아직도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내 리뷰를 읽고 다시 한 번 시도해보시길 바라고 말이다. 난 세 번쯤 읽은 것 같은데, 읽을 때마다 색다른 느낌이 들어서 참 즐겁기 그지 없다. 이번에 읽은 <데미안>의 맛은 '선악과를 따먹는 맛'이라고 감히 소개하겠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포인트가 '선과 악의 세계'를 다루고 있고, 그 두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할 것인가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이 책의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가 처음 느낀 '선악과의 맛'을 보여줄 차례다.

 

  싱클레어는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이 사는 집에서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대단히 놀란다. 밝은 세계란 부모님과 누나가 살고 있는 공간으로 자상한 부모님과 착한 누나들이 살고 있는 공간으로 자신도 그 공간에 살고 있다고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같은 집'인데도 하인과 일꾼 들이 머무는 공간은 밝음과는 거리가 먼 어둠의 세계, 그 자체였다. 일단 말투부터 사뭇 달랐다. 밝음의 세계에서는 교양이 넘치고 사랑과 애정이 가득한 내용의 언어를 고상하게 쓰는데 반해서, 어둠의 세계에서는 온갖 저급하고 상스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천박하기 그지 없는 말본새가 어린 싱클레어를 놀라게 만들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어두운 세계의 일원이 밝음의 세계로 찾아왔을 때는 다시 착한 말씨로 바뀌어 부모님과 누나들,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깎듯하게 대하곤 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어둠의 세계에서 밝음의 세계로 한순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싱클레어는 그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서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 놀라움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자신조차 믿기 힘든 진실이었기 때문이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의 공존'을 경험하고서 그저 감탄만 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린 싱클레어가 진정한 '악의 세계'를 만나고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프란츠 크로머와의 만남이었다. 싱클레어가 장난 삼아 해버린 '거짓말' 때문에 프란츠의 올가미에 걸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거짓말이란 '훔치지도 않은 사과'를 훔쳤다고 자랑스럽게 영웅담처럼 떠벌린 허풍이었는데, 못되먹은 프란츠가 싱클레어를 '사과도둑'으로 몰아 사과주인에게 일러 바치겠다고 협박을 한 거였다. 어린 싱클레어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지 못하고 프란츠의 협박대로 2마르크라는 거금을 다 갚을 때까지 삥뜯기고 말았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허풍이 뻥이었다고 밝혀지는 순간부터 망신살을 넘어서 또래 아이들에게서 왕따로 내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프란츠에게 돈을 주지 않아 '사과도둑'이라고 고발이라도 당할라치면 '그 사실'이 아버지에게 전해져서 엄청나게 혼이 날 것이 뻔했기에 싱클레어는 이도저도 하지 못한 채 '고양이 앞의 생쥐'마냥 그저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악의 세계'를 톡톡히 경험하고 있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프란츠가 싱클레어의 뒤를 쫒아 삥을 뜯고 있었는데, 그날은 조금 이상했다. 여느 날처럼 돈이 없다고 했는데도 프란츠는 웃음 띤 모습으로 싱클레어에게 "상관없어"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프란츠는 싱클레어에게 '누나'를 소개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소개해주는 것이 어렵다면 누나와 산책을 나오기만 하면 자신이 자연스럽게 누나와 친해지겠다(!)면서 어서 빨리 누나를 데리고 나오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아직 성에 눈 뜨지 못한 싱클레어였지만, 이 일만큼은 직감적으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악에 대한 두려움에 이미 길들여진 싱클레어는 우물쭈물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고, 그런 싱클레어를 음흉하게 보고 있던 프란츠는 약속을 꼭 지키라면서 그날은 헤어졌다.

 

  싱클레어는 나날이 야위어 갔다. 프란츠에게 삥을 뜯기느라 자신의 저금통을 깨기도 하고, 집안 곳곳에서 푼돈과 귀중품, 심지어 먹거리까지 훔쳐내었던 탓에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이 싱클레어를 잠식해 갔는데, 이제 누나를 악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일까지 강요받고 있으니, 없던 병도 생길 정도였던 것이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그런 싱클레어를 걱정스레 지켜봤지만, 싱클레어는 차마 진실을 고백하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와서 이미 '인기남'이 되어 있던 데미안과 만나게 되었다. 묘한 분위기에 지극한 매력까지 갖춘 미남이었던 데미안은 전학을 오자마자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지만, 싱클레어보다는 두어 살 형이었던 탓에 싱클레어와 면식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데미안이 고민 많은 싱클레어에게 다가와 고민을 단박에 해결해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싱클레어는 자신만의 비밀이 들통난 것 같아 뜨끔했지만,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서 프란츠와 있었던 말 못 할 비밀을 술술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자 데미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자신이 해결해주겠다고 장담한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하루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데미안의 호언장담이 실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싱클레어는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는 기분이 들 정도로 해방감을 느끼게 됨과 동시에 '데미안'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생기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데미안은 '카인'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싱클레어에게 들려주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카인'이 사실은 살인자가 아니라 '능력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까닭인 즉슨, <성서>에서는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하나님은 '죄인의 표식'을 남겼지만, 자애스런 하나님이 남긴 표식 덕분에 카인은 죄를 사함받고 뭇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핍박받지 않게 구원하셨고 적혀 있으나, 진실은 다르다고 데미안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미안이 들려준 이야기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카인에게 남겨진 '죄인의 표식'이라는 것은 뻥이고, 카인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던 탓에 뭇사람들이 카인을 경외하며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카인의 후예들'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지도하고 이끄는 훌륭한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고 말이다.

 

  어린 싱클레어는 놀랐다. 단순히 <성서>에 적힌 '진리'와 내용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릴 적 자신이 경험한 '이질적인 존재의 공존'을 데미안이 다시금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자신의 세계관과 동질적인 이야기를 전해준 데미안이 새삼 다시 바라보게 되기도 했지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성서>의 내용과 사뭇 다르게 말하고 있는 데미안을 멀리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데면데면했던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몇 년 뒤에 또다시 놀라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바로 '골고다 언덕 위, 세 개의 십자가 이야기'였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 이야기속에서 데미안은 또다시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기다리는 예수에게 한 도둑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겠다고 말하자 예수는 그 도둑의 죄를 사하여주고 천국으로 인도해주겠다는 말도 함께 해주었다. 그러자 반대편에 매달려 있던 도둑은 예수를 비아냥거리면서 "그렇게 대단한 분의 아들이 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느냐?"면서, 회개하고 천국행 티켓을 받으려는 도둑을 싸잡아 맹비난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는 당연하게도 회개한 도둑은 천국으로, 예수를 욕보인 도둑은 지옥으로 갔으며, 예수는 삼일만에 부활하여 널리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산증인이 되었다고 전하는 내용이었는데, 데미안은 이 이야기로 색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회개한 도둑은 비겁자이고, 예수를 맹비난한 도둑은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십자가형을 받을 정도면 '최악의 범죄자'였을텐데, 평생을 죄악을 저지르며 살다가 예수의 한마디 말로 천국행이란 보상을 획득한 도둑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채 '부정'하는 못난이였을 뿐만 아니라 비겁한 '기회주의자'에 불과할 뿐이고,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댓가를 '십자가형'이라는 합당한 처벌로 달게 받은 도둑이야말로 정정당당하니 참으로 멋지지 않느냐는 이야기였다. 딴에는 신선한(?) 해석이지만, 역시나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이단자의 교활한 말씨라는 생각에 다다른 싱클레어는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데미안과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에 대한 풀 수 없는 난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잡은 듯한 희열을 싱클레어는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싱클레어는 나이가 들었고, 드디어 사랑에 눈뜨게 되었다.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그래서 붓을 들어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싱클레어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은 분명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그렸는데,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그림속의 대상이 '누구'를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다 그리고 붓을 내려놓은 순간, 싱클레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모습은 마치 '데미안'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데미안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시간이 흘러 전쟁에 참전한 싱클레어에게 다시 찾아온다. 적군의 포탄에 큰 부상을 당한 싱클레어가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잃고 있다가 되찾았을 때 자기 옆에 데미안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 자리에서 싱클레어와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고한다. 하지만 이는 이별이 아니라 싱클레어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알듯 말듯한 이야기만 남긴 채 둘은 헤어지고 만다. 이는 싱클레어가 소년의 티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선 다음 구절을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이는 싱클레어가 꾼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날개짓을 하는 새 꿈'의 이야기를 담아 써보낸 편지에 데미안의 답장 내용의 일부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나와야 진정한 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그 세계의 신은 '선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악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뜻모를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이 책의 진면목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서>에 담겨 있는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감히 <성서>에 토를 달거나 다른 견해를 말하면 '이단'으로 찍혀 '이교도의 푸대접'을 받기 마련이다. 그런 <성서>에 담긴 '신의 모습'은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로 그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성서>를 읽다보면 '구약'과 '신약'이 서로 다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악한 존재까지 품고 보듬어서 바른 길로 이끄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에, 구약에서는 절대신으로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가이없이 선량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는 적대적 파괴를 일삼는 폭군과 다를 바 없는 무자비한 신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똑같은 하나님'일텐데 말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조차 '선과 악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말이다. '아브락사스'라는 신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선과 악, 양면적인 모습을 띤 신'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양면적인 모습'과도 일맥상통한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선'과 '절대악'을 동일개념으로 볼 수 없기 마련이다. 어떻게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악마를 선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놓고 보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선악의 공존'을 인식하고 있다. 다음은 '악마의 대명사' 루시퍼에 대한 이야기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루시퍼'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 '대천사장'이었던 존재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타락천사'라 부르며,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불충의 존재로 여기며, 그때부터 사악한 존재들, 악마의 우두머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루시퍼가 대천사장에서 타락한 악마가 되고 말았을까? 루시퍼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벌을 내리러 강림하던 중이었다. 천벌을 내린 까닭은 하나님의 명을 어긴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던 이교도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천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 거리낌없이 천벌을 수행하려 땅으로 내려온 루시퍼는 천벌을 내리려 했지만, 그 땅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천벌을 내리지 않고 다시 하나님이 계신 천상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따져 물었다. "왜 죄없는 이들을 벌하려 하십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 나를 믿지 않고 나의 명을 따르지 않으니 천벌을 시행하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루시퍼는 "그곳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도 죄가 있더란 말입니까? 저는 천벌을 시행할 수 없나이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반기를 든 루시퍼는 하나님의 분노로 '타락천사'로 지목받았고, 천벌을 받아 아름다운 두 날개가 불타는 형벌을 받아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루시퍼는 '죄없는 영혼들'을 지키고자 하나님의 군대에 맞서는 '악마의 군단'을 만들었고, 그때부터 천사와 악마의 다툼이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마치, 데미안이 들려주는 이야기 같지 않은가? 이런 류의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연쇄살인마를 잡아 법정에 세우니, 살인자가 사실은 '원조 피해자'였고, 살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실상은 '살인자의 가정'을 파탄낸 강간범들이었다는 천인공노할 이야기가 종종 세간의 이슈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법치국가에서 '개인적인 복수'는 금지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와 딸이 무참히 살해된 현장을 목격한 남편이자 아빠가 냉정을 찾아 침착하게 경찰에 신고를 하고 피해자가 잡히기만을 무작정 기다리며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힘든 일이다. 천만다행으로 가해자가 모두 잡혀서 법정에 세워진다고 해도 '초범'에, '반성문 1000장'을 쓰는 등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므로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모범수로 유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전자발찌를 차고 가석방되어 풀려나게 된다면, 피해당사자가 '법대로 치루어진 일'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이는 사회적 공분을 높이 살만 일이기도 하며, 피해자의 분노와 사회에 미칠 악영향을 생각한다면 '완전격리'에 해당하는 처벌을 내려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사랑과 교화를 목적으로 '갱생한 수감자'에 한해서 사회복귀를 실현하는 것이 피해자의 억울한 심정을 보듬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사적인 복수를 행한 무법자에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사연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과 악의 뒤바뀜 현상'을 지켜볼 수 있다. 과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란 말인가? 선과 악은 절대적으로 분리된 개념이 아닌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양면성', 또는 '이중성', 혹은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가? <데미안>의 매력이 엿보이지 않는가. '선과 악의 공존'이라는 끔찍한 혼종을 직접 눈으로 본 것 같은 충격이 전해지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1차세계대전을 경험한 이들에게 <데미안>은 신선한 충격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경험한 '전쟁'이라는 것이 실상은 '순수한 악'에 가깝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전쟁에 참여할 당시만 해도 '절대적으로 선한 행위'를 하고 있다며 '자발적 참전'을 선택했고, '당연한 의무'라고 여겨 전선으로 향하는 열차를 작별의 눈물과 승전의 환호로 떠나보낼 수 있었고, 조국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행진하는 군인들에게 뜨거운 키스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들 모두가 겪은 '전쟁의 참상'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서로를 향한 총구에 의해 아까운 젊은 피가 솟구쳤으며, 탱크를 비롯한 신무기로 서로 힘을 과시하며 '대량살상'을 할 수 있는 강항 파괴력만이 적들을 벌벌 떨게 만들어 끔찍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킬 수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독가스 같은 치명적 살상무기까지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과연 그들 모두는 '선한 존재'였을까? '악한 존재'였을까?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어떻게 '선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전쟁은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순수한 악'인 셈이다. 그런 악한 세계를 창출해낸 모든 이들도 '악마'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터에 참전한 이들 모두 '자신'이 악마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은 외적을 무찔러 조국의 명예와 가족의 안전을 지킨 '선한 존재'라고 여길 것이다. '선과 악의 공존'하는 묘한 경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인식과 경험을 갖고 있던 당시 젊은이들에게 '2차세계대전'은 또 다른 축제였을까? 그렇지 않다는 '토마스 만'의 평가는 대단히 공감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 <데미안>이 전쟁에 참전한 젊은이들의 필독서가 되었다는 후일담에도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이라는 두 세계가 공존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다시 말해, '이중인격자'로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절대선이라 여겼던 '신'마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마당에 '누굴' 믿고 따라야 하며, 기댈 곳이 없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한 우리들이 '의지'할 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기자신'을 믿어야 한다. 스스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 믿고 의지할 데를 찾아떠나는 어리석은 짓일랑 품지 말고, 스스로 우뚝 서고, 스스로 곧게 자랄 수 있는 멋쟁이로 거듭나야만 한다. 바로 '새가 알에서 깨고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새는 알에서 '스스로' 깨고 나온다. 줄탁동시라 하여 껍질을 안에서, 또 밖에서 함께 깨고 나오는 감동스런 장면을 연상하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스스로 깨고 나오려는 의지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의 세계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새만이 푸른 창공을 훨훨 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알껍질도 못 깨고 나오는 미약한 존재가 두 날개를 퍼득이는 수고를 하며 하늘을 누비고 다닐 수 있을까? 난 없다고 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을 인식하는 힘이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말이다. 만일 인류가 '에덴동산'이라는 알껍질 속에 안주하는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종교적 관점에서는 영혼의 안식과 평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에덴을 떠나는 것이 끔찍한 비극일지 모르겠으나, 차리리 한가롭기만 한 에덴동산을 떠나는 것이 인류에게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었으며 쫓겨난 발걸음이 '장엄한 첫 발짝'이 아니었을까? 비록 그들에게 고난과 노동이라는 힘든 삶이 주어졌더래도 그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는 즐거움(?)을 맛보지 않고, 한가롭게 에덴동산의 풍요속에서 아무런 욕구도,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는 지루한 삶을 지속하는 것은 도리어 끔찍한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이는 천국에서 안락하고 건전하게(?) 지내는 것보다 지옥의 스릴과 익스트림을 맛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현실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는 삶일 것이다. 위험천만한 짜릿함을 맛보고 싶다가도 불멍이나 물멍을 때릴 수 있는 한가로움이 반복되는 삶 말이다.

 

  여기까지, <데미안>의 맛이 어떤가? 다음에는 또 다른 맛으로 헤세를 맛보려 한다. 물론, '또 다른 문학'일 수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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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팀장입니다 - 서툴고 의욕만 앞선 초보 팀장들을 위한 와튼스쿨 팀장수업
레이첼 파체코 지음, 최윤영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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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팀장이 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물론, 팀장 자신의 스킬이나 실력이 뛰어나야 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무엇보다 팀원들을 '잘 만나는 것', '잘 다루는 것', 그리고 '잘 이끄는 것'에 유능해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팀장과 팀원의 궁합이 환상적으로 어울어져야 훌륭한 팀장도 될 수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우수한 팀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수한 팀을 만들 수 있는 훌륭한 팀장이 되는 방법은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방법은 '있다'. 만약, 없다면 이 책이 존재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좋은 팀장이 '타고나는 것'이라면 그저 좋은 팀장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팀장은 분명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그런 좋은 팀장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 그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선, 좋은 팀장이 되기 위해서는 팀원을 잘 관리하고 코칭해야 한다. 그리고 팀원이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팀장의 안목'과 '탁월한 선택'으로 팀원의 자질과 사기를 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실 '유능한 팀원'만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부분은 그다지 필요가 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능한 팀원'은 좋은 팀장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확률이 낮다. 그러니 '웬만한 팀원'을 데리고 잘 이끌어야 하는 것은 오로지 팀장의 몫이 된다.

 

  그럼, 팀원을 잘 다루기 위한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상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성과를 높이면 상을 줄 것이고, 그 반대면 패널티를 받거나 상을 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알 수 있게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팀원이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는 '동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기에 대한 '피드백'도 빠르고 정확해야 한다. 팀원들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또는 부족한 것이 있는지 스스로 파악하고 솔선수범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팀원들 스스로 일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도록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적절히 해결할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업무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상벌을 받는 기준인 성과와 부진에 대해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체계적인 관리를 해야 한다.

 

  여기서 팀원들에게 더욱 강조해야 할 부분은 바로 '동기부여'와 '책임감'이다. 일을 하면서 '동기'가 사라지면 일의 효율이 늘어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책임감'이 없다면 일은 진척되지 않고 제자리걸음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팀장이라면 반드시 이 두 가지를 팀원에게 심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

 

  이제 어느 정도 팀원 관리에 성공을 했다면, 팀장 자신의 관리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좋은 팀장이 되기 위해선 '명확한 기준'을 바탕으로 자기 업무에 대한 '체계성'을 키워 나가야 한다. 모든 관리의 기본은 '절차'에서 비롯된다. 만약, 팀장 스스로 이 '절차'를 무시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하게 된다면 팀원들의 신뢰를 잃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절차는 미적거리지 말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성과급을 줘야 할 때 미적거리거나 퇴사를 시켜야 할 사람을 바로 자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리스크'가 발생하게 되고,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응축과정'을 거쳐서 한 순간에 문제로 터져버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팀원을 잘 관리하는 비법을 알아야 할 때다. 개별적인 팀원들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니 명심해야 한다. 첫째, 명확한 규범. 둘째, 팀원들끼리 공감하는 힘. 셋째, 공평한 발언권이다. 이 세 가지 원칙이 잘 이루어져야 탁월한 팀워크로 우수한 팀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어려운 말은 없을 것이다. 다만, 실천이 힘들다. 이를 테면, 팀장이 팀원들에게 권위를 앞세우며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길 좋아한다면 우수한 팀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팀장에게 무거운 책임이 주어지고 실적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도 팀장이 감수해야 하기에 '원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팀원들을 닥달하기 마련이고, 규범에도 없는 업무를 지시하기도 하며, 팀원들의 발언권을 묵살하며 팀장의 고집만 내세우는 일도 비일비재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수한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팀장 스스로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바로 팀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각오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팀장의 '권한'은 팀장 자신이 아니라 '팀원들'을 위해서 써야 팀원들의 사기가 진작된다. 그래야 팀원들의 성과가 팀장의 성공으로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팀원들의 사기가 현저히 떨어지면 자연스레 팀장의 성공도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팀장은 가장 먼저 솔선수범 해야 하고, 팀원들과 함께 호흡하며 함께 성공하는 길을 제시하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여기까지 대충 읽어봐도 어려운 내용은 없을 것이다. 이해 못할 부분도 전혀 없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실천'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무능력하고 제멋대로인 팀원을 만나면 더욱 대책 없는 상황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 십상인 자리가 바로 '팀장'인 탓이다. 그런 팀원을 만났는데도 '좋은 팀장 코스프레'만 하고 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 딱 좋다. 과감하게 밀어 붙일 땐 밀고 나가야 한다. 물론, 명확한 규범을 밝히고 공정한 절차로 신속하게 상벌을 내리며 팀원들의 불만에 경청하면서도 '규범과 절차'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잘라낼 것은 잘라내야만 한다. 그건 온전히 팀장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팀장의 자리에 오르면 팀원들의 고충을 미리 헤아려서 팀원의 사기을 진작시키고 일의 성과를 끌어올려 '성공하는 팀'을 운영한 다음, 팀장의 자리에 걸맞는 권위와 존경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팀장도 사람인지라 상사의 질책을 받은 다음에 팀원들에게 '좋은 팀장 코스프레'를 하기보다는 '받은대로 돌려주기'라고 하는 것처럼 팀원들을 들들 볶는 팀장이 되기 일쑤다. 또는 팀원들의 고생으로 얻어낸 성과를 팀장이 날름 낚아채서 독식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런 팀들은 하나 같이 오래가지 못하고 해체되기 마련이다. 그런 해체 위기에 맞닥뜨린 당신에게 꼭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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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노벨상 읽어드립니다 읽어드립니다 시리즈
김경일 외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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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그노벨상은 재밌거나 바보같은 연구에 수여하는 상이다. 그래서 "도대체 왜 이런 연구를 한거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연구를 하는 이가 아니라면 이그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상에는 상금이 없다. 명예롭지 못한 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당신의 연구는 황당하고 하릴없으니 드리는 상입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상을 받은이가 훗날 노벨상을 수여하거나 되려 유명해지는 일이 빈번하단다. 심지어 노벨상을 받는 것보다 이 상을 받는 것이 더 영광이라는 수상자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까닭을 물으니 노벨상을 수상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할 연구가 없는 '마침표' 같지만, 이그노벨상을 수상하면 더욱 분발하라는 응원을 받는 느낌이라 곧바로 또 다른 새로운 연구에 착수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는 연구자도 있다. 실제로 이그노벨상을 받은 황당한 연구에서 영감을 받아 더욱 넓히거나 깊이 연구한 결과 노벨상을 수상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쯤 되면, 이그노벨상은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엉뚱하고 황당한 괴짜 연구자에게 수여하는 특별한 상이 되어 버리고 만 셈이다.

 

  그런 이그노벨상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얼마나 엉뚱하고 황당하면 이 상을 탈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는지 말이다. 이에 우리 나라 대표 심리학자 세 명이 '이그노벨상의 진면목'을 요모조모 살펴 볼 수 있도록 친절한 안내서를 써냈다. 책내용은 이렇다.

 

  처음으로 소개한 연구내용은 '욕도 잘 쓰면 약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에 전세계의 욕을 연구할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 있단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서 말이다. 이 연구의 핵심은 '욕을 하면 고통이 줄어든다'였단다. 실제로 욕을 시원하게 내뱉거나 누군가 쏟아내는 찰떡같은 욕을 들으면 꽉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욕도 잘만 쓰면 효용가치가 높아진다는 연구인 셈이다. 물론, 욕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는 상황에 적절한 욕을 쓰면 되려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늘상 욕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큰 효과가 없단다. 이런 사람들은 욕을 할 때마다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고 성품과 인품이 모두 나빠져서 품위 없는 무례한 사람에 불과하단다. 그렇지만 평소에는 욕을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착한 사람이 욕을 한바가지 쏟아내면 자신에게는 스트레스 해소로 작용하고, 청중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어 '나쁜 말'을 들으면서도 기분은 좋아지는 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정말 엉뚱한 연구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누가봐도 별 것 아닌 연구를 심도 깊게 연구한 이에게 수여하는 것이 바로 이그노벨상이다. 그렇지만 만약 '욕에 관한 연구'가 여기서 그쳤다면 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연구내용은 또 이어진다. 바로 '손가락 욕'과 '외국어 욕'에 관한 연구다. 연구자는 욕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 뒤에 '말이 아닌 욕'과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욕'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지 복잡다단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결과만 얘기하자면, 욕을 말로 해야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결과만 봐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손가락 욕은 바로 품위 없는 행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교양인이 품위 없는 행동을 하고서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또한, 알아 듣지 못하는 욕도 긍정적인 효과가 그다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욕은 '알아 들을 수 있어'야 효과나 나타난다는 얘기다. 이를 테면, 한국인에게 '뻔데기'라는 욕을 하면 자신을 능력을 비하하거나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어 상황에 적절할 경우에 모든 사람에게 한바탕 웃음을 선사할 수도 있지만, 외국인이 들었을 땐, 애벌레와 어른벌레 사이의 과정인 '번데기'가 왜 욕이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어떤가? 욕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연구를 수 년 동안 하고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것을 인정할 만 한가.

 

  한 가지만 더 소개하겠다. 연구내용은 '저주인형은 효과가 있을까?'다. 저주인형이란 직장인들이 종종 나쁜 상사에게 대놓고 화를 낼 수 없으니 대신 화를 내고 벌을 퍼부을 수 있는 대상을 일컫는 말이다.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유발 원인 가운데 '상사의 부당한 일처리'에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에 대한 짜증이 상위권에 든다는 것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이럴 때, 못된 상사 대신에 할 말 다하고, 심지어 복수의 칼날을 내리 꽂을 수 있는 저주인형은 훌륭한 대안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그노벨상 수상자의 연구 핵심내용이다. 정말로 '저주인형'에게 대신 분풀이를 하면 속이 시원해질까? 하고 말이다.

 

  결론은 의외로 대단히 효과적이라고 나왔단다. 우리는 나쁜 감정을 함부로 분출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이를 어기면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고 으레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처럼 '나쁜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히게 되면 병이 되어 버리고 마는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우리 나라 여성들에게서 자주 발생한다고 해서 이름도 '홧병'이 된 것도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풀지 못하고 쌓아두게 되어 생긴 병이라고 한다. 이때, 저주인형에게 적절하게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면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이그노벨상 수상 이유였단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어떤 것이 가장 좋을까? 말로만 해야 할까? 날카로운 바늘을 인형에 꽂는 행위는 효과가 없을까? 놀랍게도 모든 방법에 효과가 좋았다. 스트레스 해소 방법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꼭 맞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찾았다면 그대로 시도해도 무방하며, 색다른 해소 방법이 떠올랐다면 그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릴 때까지 하면 효과가 직방이라고 한다. 그럼 저주인형은 '저주대상'과 꼭 닮아야 할까? 라는 연구를 한 결과는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냥 대충 그린 그림에 '이름'이나 '별명'을 붙여놓고 저주의 대상을 '상상'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한다. 되려 저주인형을 저주대상과 꼭 닮게 만들면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까닭은 실물과 꼭 닮을수록 폭력을 가하면 할수록 '죄책감'이 쌓이기 때문이란다. 역시나 이그노벨상을 받기 위해선 재미와 흥미를 넘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분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밖에도 '소변을 참으면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거나 '설명서는 왜 안 읽을까?', '사이코패스 진단법' 같은 흥미롭지만 굳이 왜 이런 걸 연구할까 싶은 연구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는 연구자와 저자를 만날 수 있는 재미난 책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감춰진 '심리'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유용한 책이기도 하다. 한 가지만 더 소개하면서 마무리 하련다. 이 책이 얼마나 유용한 책인지 판가름 해보길 바란다.

 

  우리는 2년 사이에 세 차례의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그런데 한 가지 종류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백신을 맞았을 것이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선호했던 백신이 있었는데 기억이 나는가? 내 기억으론 수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백신은 '값이 비싼' 백신이었고, 그닥 선호하지 않은 백신은 반대로 '값이 싼' 백신이었다. 그러면서 왜 자신에게는 '비싼 백신'을 놔주지 않느냐면서 불만을 쏟아냈던 사례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백신의 효능은 가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고, 개인적인 면역력에 딱 맞는 적절한 백신을 맞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는 결론이 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비싼 백신'이 더 좋은 효능을 낼 것이라 굳게 믿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이쯤해서 연구할 수 있는 내용이 바로 '싼 게 비지떡일까?'다.

 

  수많은 사람들이 물건의 '기능'보다 '가격'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가격이 높을수록 좋은 물건이라는 상식이 부추기는 점이 없지 않지만, 진실이 밝혀져서 가격에 거품이 잔뜩 낀 물건일지라도 비싸게 주고 샀으니 만족해버리는 경우가 흔히 벌어지곤 한다. 이쯤되면 사람들은 '사실'을 믿기보다는 '믿음'이 사실이길 바라는 일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고, 이런 경험이 쌓이면 '믿음'이 그대로 '진리'가 되어버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단다. 바로 '플라세보 효과'가 그렇다. 가짜 약이 불치병을 낫게 하는 놀라운 기적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역기능도 있다. 철떡같은 '믿음'이 동반되지 않으면 플라세보 효과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짓'이라도 '진실'로 믿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꿈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도 증명되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재밌는 연구가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 진지하게 설명한 책을 소개해보았다. 별 것 아닌 주제를 평생에 걸쳐 연구하는 모든 이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고 싶어졌다. 비록 이그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다하더라도 당신들의 연구가 결코 헛된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이그노벨수상자 가운데 소똥으로 바나나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기술을 연구한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아무도 먹지 않을 것 같지만 언젠가 그 기술이 인류의 고민을 해결해줄 열쇠가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릴없다고 쓸모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좋은 경험이었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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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 새로운 세상을 꿈꾼 25명의 20세기 한국사
강부원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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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위인을 얼마나 공정하게 평가하고 있을까? 친일 논란이 많은 위인(?)들이 아직까지도 떠받들 듯 칭송되고 있는 반면에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애국애족하던 수많은 열사와 의사 들은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하고 역사에서 지워진 채, 우리 기억에서조차 잊혀져 버렸기 때문이다. 한편, 수많은 위인들을 공정하게 평가내리지 못하는 원인을 꼼꼼히 볼작시면,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날조되고 '경제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아전인수격으로 왜곡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또한 이것이 대한민국 주류언론에서 벌이고 있는 꼼수라는 점에서 심각성을 느낄 수 있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 위인들의 평가를 다시 내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대한민국 103년'이라는 시점에 말이다.

 

  그럼 우리가 재평가해야할 위인들은 어떤 분들일까? 무엇보다 '여성위인'에 대한 폄하를 걷어내야 한다. 전근대 뿐 아니라 근현대사에서도 '여성의 역할'은 남자들을 보필하는 것으로 한정하며, 좋게 말해서 '내조'라고 일컬으며 남자들이 양지에서 활동할 때 여성위인들은 음지에서 꼼지락거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위인의 평가는 '남녀의 차이'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폭넓은 관점에서 평가를 내려야할 것이다. 일제시대에 나라 잃은 슬픔이 '남자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3·1만세혁명 당시에 '독립만세'를 목놓아 부르고 외쳤던 이들은 '우리 민족' 전부였고, 일제 치하 한민족의 설움을 느껴 손에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울분을 쏟아내고 자주독립이라는 열망을 꿈꿨던 이들도 '우리 민족' 전체였다. 그런데도 독립운동을 했던 위인들은 대다수 '남자'만을 기리고 '여성'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뿐더러, 유관순이라는 이름 이외에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을 정도다.

 

  또한, 재평가의 기준을 바로 세우는 일도 시급하다. 유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 한국전쟁 당시의 영웅들을 추켜세우는 일이 많다. 그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분이 바로 '백선엽 장군'이다. 그분의 업적을 꼽으라면 너무나도 많아서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웅 중에 영웅이라고 치켜세우지만, 그가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숱하게 잡아다 가두고 죽인 장본인이라는 사실까지 감추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렇듯 시대적 아픔을 겪고 격동의 시절을 지내며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채 지내왔다.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인 시절에는 '일제의 수탈'보다 '북괴군의 만행'이 더 끔찍했을 지는 몰라도, 민족적 관점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평가를 하자면,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상처가 우리 민족 내부의 분란으로 벌어진 상처보다 더 치욕스럽게 생각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 본다면, 친일의 과오를 반공의 위업으로 덮어버리고도 남는 우리 현실은 이상하게 여겨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논리를 앞장 세워서 과거에 대한 잘못조차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너그럽게 용서하자면서도, 북한은 같은 민족인데도 사상과 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으니, 우리의 소원인 통일은 북한과 하는 것보다 일본과 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마지막으로 바로 잡아야 할 시급한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기준'을 고정사실로 못박아놓고 '고정불변의 진리'인 것 마냥 퍼뜨리고 있는 주류언론의 행태다. 언론은 '여론형성'이라는 아주 중요한 기능을 도맡아 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따른 막중한 책임감이나 사명감을 망각해버린 듯한 행태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우리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피해국인데도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받기는커녕 '가해국 일본'을 대신해서 남북으로 분단이 되어 버린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는 '미소냉전'이라는 강대국의 논리로 귀결된 잘못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선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강대국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자국이기주의'가 팽배해진 마당에 강대국들이 잡고 있는 '유리한 상황'에 잘잘못을 따져 바로 잡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셈이다.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주류언론'이라면,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지금이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온 국민에게 알리며 선진국에 걸맞는 시민의식을 키우는 '바른 언론'으로 활동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도 주류언론이 저지르는 행태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주변의 강대국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는 줏대없는 약소국에 불과하다는 듯,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보다는 '미래지향적'으로 경제발전의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며, 혈맹으로 맺어진 미국에게는 최대한 낮은 자세로 임하며 미국의 요구는 '어떠한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마땅히 추진해야 한다고..그리 하지 않으면, 쬐끄만 북한에게 집어삼겨질 것이라며 불안감을 조성하기에 급급하다. 더구나 옆나라 중국에 대해선 대한민국의 이익을 생각지도 않고 할말 못할말을 다 지껄이면서도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선 '종속'해야 이득이라는 논리를 펴며 중국의 해괴망측한 온갖 짓거리(동북공정, 한한령, 중국꺼라 우기기 등)에는 그저 수수방관만 일삼고 있다. 이런 엉터리 언론이 제대로 된 위인들의 평가에 소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정도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위인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인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 선진국에 걸맞는 대한민국 시민의 이름으로 평가를 내리기 위해 무엇이 올바른 판단인지 고심해야만 한다. 가장 바람직한 판단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식이 선결되어야 한다. 분란이 생겨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막무가내로 공격하고 흠집을 내며, 그도 모자라서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대처방안을 내는 저급한 말과 행동은 일절 금해야 한다. 이미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다. 그러므로 '세계시민'이라는 큰 안목으로 인류공영의 이상향을 내세워 '우리 문제'도 해결해야 마땅하다. 더구나 과거의 잘못된 이념갈등과 사상검증이라는 낡은 가치관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지나간 잘못은 '철저한 사과와 반성'을 거쳐 '관용과 포용'이라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 또한 폭력에 관해서는 냉철한 처벌을 내리고, 그 처벌을 달게 받은 이에 대해선 관대한 용서로 다시금 보듬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우리 근현대사의 위인들을 평가내린다면, 이 책에 언급된 '25명의 위인'이 제대로 보이게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은 '독립'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배운 리더들이 저마다 꿈꾼 '아름답고 멋진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노선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런 과정에서 각각의 노선 사이에 시기와 반목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분열적 사고방식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다라서는 '좌우합작'을 통해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계열'의 위인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 남북으로 갈라지는 아픔의 시절을 겪은 탓에 이들에 대한 평가가 소홀해지고 말았다.

 

  더구나 여성 위인들은 남자들에 가려져서 그 빛을 밝히지도 못하고 사그라 든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도 하나 뿐인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때로는 남자들도 감히 할 수 없는 업적을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며 당당하게 해낸 훌륭한 분들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이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해 유복자를 키우며 온갖 힘든 일을 하던 남자현 의사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본 총독을 암살하려 앞장 서기도 했다. 이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영화가 전지현 주연의 영화 <밀정>이다. 그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을 바란다는 혈서를 작성해서 세계열강에게 호소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면 손가락은 아깝지 않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 여성 위인이다. 이런 위인을 수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면 기득권 세력의 논리에 따라 엉터리 여론을 형성하기에 급급한 '주류언론'의 방만한 태도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인은 '국민의 알 권리'를 실천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인데, 대한민국의 주류언론은 당연한 '그 권리'를 기득권과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만 활용하는 '선별적 알 권리'를 내세운 결과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진실을 알리기보다는 '저들의 세계관'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편협한 폄하와 왜곡까지도 일삼곤 했다. 조선노동자의 고통과 설움을 알기에 하나 뿐인 목숨도 아끼지 않고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 단식농성을 벌였던 강주룡 열사를 알고 있는가? 또, 일패 기생으로 유명세를 떨친 정칠성 열사는 3·1만세혁명을 계기로 투철한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고, 독립을 위해서 한 몸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독립운동가로 삶을 마쳤다. 그런데도 그들에 대한 평가는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면서 지붕 위에 올라간 상황에는 관심조차 없고, 그가 청상과부의 몸으로 살았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다. 또한, 천한 기생 주제에 성스런 독립운동에 가담하다니 독립운동가들에게 오점을 남길 뿐이라는 논조로 깎아내리기 급급할 뿐이다. 일제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해방 이후의 언론들도 비슷한 논리로 여성 위인을 발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디 이뿐인가. 조선독립운동의 트로이카로 불렸던 주세죽, 허명숙, 고명자는 사회주의 계열의 공산당이자 해방 이후에는 월북해서 숙청 당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알릴 이유조차 찾지 않고 말았다. 같이 활동했던 박헌영의 활약은 생생하게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처럼 우리는 아직도 대접받아 마땅한 위인들을 재평가하고 재발견하는 일에 소홀하다. 물론 나도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몰랐던 위인들이 수두룩했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제대로 평가받길 바라는 것이다. 이 책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은 자신의 뜻대로 살면서도 자신보다 모두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한 이들을 알리기 위해서 펴낸 책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의 뜻'대로 살기도 힘든데, 그 뜻이 개인적인 이득보다는 우리 모두의 이득을 위해 뜻을 펼쳤다면 존경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업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앞서 말한 '잘못된 기준' 때문일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아름다운 대한민국이 지금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늦지 않게 제대로 평가받아 마땅한 위인들을 널리 알리는 길은 다름 아니라 바로 독자들이 먼저 알아보는 방법이다. 더 많은 독자들이 위인을 알아보고 제대로 평가해주길 바랄 뿐이다.

 

책드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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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기 전에 알면 좋은 사실들
홍태화 지음 / 한빛비즈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이런 좋은 책은 널리 알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더구나 약자를 보호해야 할 법이 도리어 '강자의 유용한 도구'로 전락해버린 현실에서 가해자의 2차 폭력을 막고 피해자를 법의 울타리 안에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널리 알리는 일은 '지식인들의 의무'이자 '교양인들의 상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이 책에는 '언론 제보'와 'SNS 폭로' 등으로 자신이 받은 부당한 피해 사실을 알리는 방법이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사실을 밝힐 때 유용한 팁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거나와 '언론 제보'를 할 수 있는 채널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명', 그리고 '관련 법규'까지 소상히 일러주어서 정말 알면 알수록 좋은 상식을 누구나 쉽게 읽고 따라 할 수 있게 정리 되어 있다.

 

  더욱 유용한 까닭은 '관련 사례'를 조목조목 달아놓아서 자신이 받은 부당한 사례나 직장 갑질, 성폭력 등 따위를 대기업으로부터 명예훼손을 받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대응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기에 피해자인데도 가해자로 인해 '가해자로 둔갑'하는 황망한 일을 당했을 때 유용한 도움을 얻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현직 대통령도 언급한 말이지만,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이며,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고,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법적조치를 받을 수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법대로 따르면' 국민 누구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일이 없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법을 다루는 판사와 검사, 변호사가 우리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다보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그들에게 훨씬 유용하도록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거나 법과는 거리가 먼 '선량하기만 한 서민들'은 힘 있는 자들의 고소, 고발만 받아도 '사형선고'를 받는 것마냥 벌벌 떨기 일쑤다. 특히, '명예훼손'과 같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함부로 쓰여지는 '법적 횡포'에 법과 친하지 않아 '소외되고 문외한이 되어 버린 약자들'은 피해를 당하고도 가해자로 또다시 처벌을 받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처하곤 한다.

 

  이래선 약자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 할 도리가 없게 된다.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는 사실조차 약자들에겐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법'과 '법률'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만 한다. 그래서 최소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가해자들의 횡포에 당당히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왜냐면 당신은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다.

 

  현실은 비정하고, 법이 '힘 있는 자들'에게 더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약자들의 위한 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법을 잘 몰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명확한 '피해 사실'과 명백한 '피해 증거'만 확보해두면 당신을 도와줄 사람과 단체, 그리고 기관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를 가지고 '사실 관계'에 근거해서 '언론 제보'와 'SNS 폭로'를 통해 강자와 대기업의 횡포에 당당히 맞서고 피해자 앞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빌게 된 사례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OO 유업 불매운동'이다. 대기업의 갑질로 대리점주들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자 '언론 제보'를 통해 그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그 사실을 인지한 시청자들이 자발적으로 '불매운동'을 펼쳐서 가해자가 더는 악질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다며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개선이 되지 않자, 결국 사장이 일선에서 물러나는 촌극이 벌어지고 나서야 겨우 일단락이 된 사례도 있다.

 

  그러니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당당하게 알려야만 한다. 여기에 '안전하게'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유용한 안내서가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법의 도움이 절실한 이들에겐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이며, 법적인 상식이 필요한 예비 교양인들에겐 필독서가 될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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