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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ㅣ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18
헤르만 헤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1년 11월
평점 :
품절
헤세의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이제사 첫 리뷰를 쓰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역시나 난 '비문학으로의 편식'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제라도 '문학소년'이 되어 리뷰를 쓴다는 것에 대견함을 느낀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를 정도의 '강렬한 문학리뷰'를 맛보여 드릴 것이다. 비문학 편식쟁이의 문학읽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 공개한다.
다들 <데미안> 한 번쯤은 읽어보셨을 것이다. 아직도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내 리뷰를 읽고 다시 한 번 시도해보시길 바라고 말이다. 난 세 번쯤 읽은 것 같은데, 읽을 때마다 색다른 느낌이 들어서 참 즐겁기 그지 없다. 이번에 읽은 <데미안>의 맛은 '선악과를 따먹는 맛'이라고 감히 소개하겠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포인트가 '선과 악의 세계'를 다루고 있고, 그 두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할 것인가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이 책의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가 처음 느낀 '선악과의 맛'을 보여줄 차례다.
싱클레어는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이 사는 집에서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대단히 놀란다. 밝은 세계란 부모님과 누나가 살고 있는 공간으로 자상한 부모님과 착한 누나들이 살고 있는 공간으로 자신도 그 공간에 살고 있다고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같은 집'인데도 하인과 일꾼 들이 머무는 공간은 밝음과는 거리가 먼 어둠의 세계, 그 자체였다. 일단 말투부터 사뭇 달랐다. 밝음의 세계에서는 교양이 넘치고 사랑과 애정이 가득한 내용의 언어를 고상하게 쓰는데 반해서, 어둠의 세계에서는 온갖 저급하고 상스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천박하기 그지 없는 말본새가 어린 싱클레어를 놀라게 만들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어두운 세계의 일원이 밝음의 세계로 찾아왔을 때는 다시 착한 말씨로 바뀌어 부모님과 누나들,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깎듯하게 대하곤 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어둠의 세계에서 밝음의 세계로 한순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싱클레어는 그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서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 놀라움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자신조차 믿기 힘든 진실이었기 때문이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의 공존'을 경험하고서 그저 감탄만 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린 싱클레어가 진정한 '악의 세계'를 만나고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프란츠 크로머와의 만남이었다. 싱클레어가 장난 삼아 해버린 '거짓말' 때문에 프란츠의 올가미에 걸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거짓말이란 '훔치지도 않은 사과'를 훔쳤다고 자랑스럽게 영웅담처럼 떠벌린 허풍이었는데, 못되먹은 프란츠가 싱클레어를 '사과도둑'으로 몰아 사과주인에게 일러 바치겠다고 협박을 한 거였다. 어린 싱클레어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지 못하고 프란츠의 협박대로 2마르크라는 거금을 다 갚을 때까지 삥뜯기고 말았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허풍이 뻥이었다고 밝혀지는 순간부터 망신살을 넘어서 또래 아이들에게서 왕따로 내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프란츠에게 돈을 주지 않아 '사과도둑'이라고 고발이라도 당할라치면 '그 사실'이 아버지에게 전해져서 엄청나게 혼이 날 것이 뻔했기에 싱클레어는 이도저도 하지 못한 채 '고양이 앞의 생쥐'마냥 그저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악의 세계'를 톡톡히 경험하고 있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프란츠가 싱클레어의 뒤를 쫒아 삥을 뜯고 있었는데, 그날은 조금 이상했다. 여느 날처럼 돈이 없다고 했는데도 프란츠는 웃음 띤 모습으로 싱클레어에게 "상관없어"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프란츠는 싱클레어에게 '누나'를 소개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소개해주는 것이 어렵다면 누나와 산책을 나오기만 하면 자신이 자연스럽게 누나와 친해지겠다(!)면서 어서 빨리 누나를 데리고 나오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아직 성에 눈 뜨지 못한 싱클레어였지만, 이 일만큼은 직감적으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악에 대한 두려움에 이미 길들여진 싱클레어는 우물쭈물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고, 그런 싱클레어를 음흉하게 보고 있던 프란츠는 약속을 꼭 지키라면서 그날은 헤어졌다.
싱클레어는 나날이 야위어 갔다. 프란츠에게 삥을 뜯기느라 자신의 저금통을 깨기도 하고, 집안 곳곳에서 푼돈과 귀중품, 심지어 먹거리까지 훔쳐내었던 탓에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이 싱클레어를 잠식해 갔는데, 이제 누나를 악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일까지 강요받고 있으니, 없던 병도 생길 정도였던 것이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그런 싱클레어를 걱정스레 지켜봤지만, 싱클레어는 차마 진실을 고백하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와서 이미 '인기남'이 되어 있던 데미안과 만나게 되었다. 묘한 분위기에 지극한 매력까지 갖춘 미남이었던 데미안은 전학을 오자마자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지만, 싱클레어보다는 두어 살 형이었던 탓에 싱클레어와 면식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데미안이 고민 많은 싱클레어에게 다가와 고민을 단박에 해결해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싱클레어는 자신만의 비밀이 들통난 것 같아 뜨끔했지만,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서 프란츠와 있었던 말 못 할 비밀을 술술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자 데미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자신이 해결해주겠다고 장담한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하루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데미안의 호언장담이 실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싱클레어는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는 기분이 들 정도로 해방감을 느끼게 됨과 동시에 '데미안'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생기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데미안은 '카인'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싱클레어에게 들려주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카인'이 사실은 살인자가 아니라 '능력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까닭인 즉슨, <성서>에서는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하나님은 '죄인의 표식'을 남겼지만, 자애스런 하나님이 남긴 표식 덕분에 카인은 죄를 사함받고 뭇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핍박받지 않게 구원하셨고 적혀 있으나, 진실은 다르다고 데미안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미안이 들려준 이야기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카인에게 남겨진 '죄인의 표식'이라는 것은 뻥이고, 카인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던 탓에 뭇사람들이 카인을 경외하며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카인의 후예들'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지도하고 이끄는 훌륭한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고 말이다.
어린 싱클레어는 놀랐다. 단순히 <성서>에 적힌 '진리'와 내용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릴 적 자신이 경험한 '이질적인 존재의 공존'을 데미안이 다시금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자신의 세계관과 동질적인 이야기를 전해준 데미안이 새삼 다시 바라보게 되기도 했지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성서>의 내용과 사뭇 다르게 말하고 있는 데미안을 멀리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데면데면했던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몇 년 뒤에 또다시 놀라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바로 '골고다 언덕 위, 세 개의 십자가 이야기'였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 이야기속에서 데미안은 또다시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기다리는 예수에게 한 도둑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겠다고 말하자 예수는 그 도둑의 죄를 사하여주고 천국으로 인도해주겠다는 말도 함께 해주었다. 그러자 반대편에 매달려 있던 도둑은 예수를 비아냥거리면서 "그렇게 대단한 분의 아들이 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느냐?"면서, 회개하고 천국행 티켓을 받으려는 도둑을 싸잡아 맹비난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는 당연하게도 회개한 도둑은 천국으로, 예수를 욕보인 도둑은 지옥으로 갔으며, 예수는 삼일만에 부활하여 널리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산증인이 되었다고 전하는 내용이었는데, 데미안은 이 이야기로 색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회개한 도둑은 비겁자이고, 예수를 맹비난한 도둑은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십자가형을 받을 정도면 '최악의 범죄자'였을텐데, 평생을 죄악을 저지르며 살다가 예수의 한마디 말로 천국행이란 보상을 획득한 도둑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채 '부정'하는 못난이였을 뿐만 아니라 비겁한 '기회주의자'에 불과할 뿐이고,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댓가를 '십자가형'이라는 합당한 처벌로 달게 받은 도둑이야말로 정정당당하니 참으로 멋지지 않느냐는 이야기였다. 딴에는 신선한(?) 해석이지만, 역시나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이단자의 교활한 말씨라는 생각에 다다른 싱클레어는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데미안과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에 대한 풀 수 없는 난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잡은 듯한 희열을 싱클레어는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싱클레어는 나이가 들었고, 드디어 사랑에 눈뜨게 되었다.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그래서 붓을 들어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싱클레어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은 분명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그렸는데,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그림속의 대상이 '누구'를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다 그리고 붓을 내려놓은 순간, 싱클레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모습은 마치 '데미안'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데미안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시간이 흘러 전쟁에 참전한 싱클레어에게 다시 찾아온다. 적군의 포탄에 큰 부상을 당한 싱클레어가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잃고 있다가 되찾았을 때 자기 옆에 데미안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 자리에서 싱클레어와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고한다. 하지만 이는 이별이 아니라 싱클레어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알듯 말듯한 이야기만 남긴 채 둘은 헤어지고 만다. 이는 싱클레어가 소년의 티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선 다음 구절을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이는 싱클레어가 꾼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날개짓을 하는 새 꿈'의 이야기를 담아 써보낸 편지에 데미안의 답장 내용의 일부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나와야 진정한 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그 세계의 신은 '선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악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뜻모를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이 책의 진면목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서>에 담겨 있는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감히 <성서>에 토를 달거나 다른 견해를 말하면 '이단'으로 찍혀 '이교도의 푸대접'을 받기 마련이다. 그런 <성서>에 담긴 '신의 모습'은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로 그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성서>를 읽다보면 '구약'과 '신약'이 서로 다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악한 존재까지 품고 보듬어서 바른 길로 이끄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에, 구약에서는 절대신으로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가이없이 선량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는 적대적 파괴를 일삼는 폭군과 다를 바 없는 무자비한 신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똑같은 하나님'일텐데 말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조차 '선과 악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말이다. '아브락사스'라는 신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선과 악, 양면적인 모습을 띤 신'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양면적인 모습'과도 일맥상통한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선'과 '절대악'을 동일개념으로 볼 수 없기 마련이다. 어떻게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악마를 선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놓고 보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선악의 공존'을 인식하고 있다. 다음은 '악마의 대명사' 루시퍼에 대한 이야기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루시퍼'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 '대천사장'이었던 존재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타락천사'라 부르며,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불충의 존재로 여기며, 그때부터 사악한 존재들, 악마의 우두머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루시퍼가 대천사장에서 타락한 악마가 되고 말았을까? 루시퍼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벌을 내리러 강림하던 중이었다. 천벌을 내린 까닭은 하나님의 명을 어긴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던 이교도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천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 거리낌없이 천벌을 수행하려 땅으로 내려온 루시퍼는 천벌을 내리려 했지만, 그 땅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천벌을 내리지 않고 다시 하나님이 계신 천상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따져 물었다. "왜 죄없는 이들을 벌하려 하십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 나를 믿지 않고 나의 명을 따르지 않으니 천벌을 시행하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루시퍼는 "그곳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도 죄가 있더란 말입니까? 저는 천벌을 시행할 수 없나이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반기를 든 루시퍼는 하나님의 분노로 '타락천사'로 지목받았고, 천벌을 받아 아름다운 두 날개가 불타는 형벌을 받아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루시퍼는 '죄없는 영혼들'을 지키고자 하나님의 군대에 맞서는 '악마의 군단'을 만들었고, 그때부터 천사와 악마의 다툼이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마치, 데미안이 들려주는 이야기 같지 않은가? 이런 류의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연쇄살인마를 잡아 법정에 세우니, 살인자가 사실은 '원조 피해자'였고, 살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실상은 '살인자의 가정'을 파탄낸 강간범들이었다는 천인공노할 이야기가 종종 세간의 이슈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법치국가에서 '개인적인 복수'는 금지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와 딸이 무참히 살해된 현장을 목격한 남편이자 아빠가 냉정을 찾아 침착하게 경찰에 신고를 하고 피해자가 잡히기만을 무작정 기다리며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힘든 일이다. 천만다행으로 가해자가 모두 잡혀서 법정에 세워진다고 해도 '초범'에, '반성문 1000장'을 쓰는 등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므로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모범수로 유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전자발찌를 차고 가석방되어 풀려나게 된다면, 피해당사자가 '법대로 치루어진 일'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이는 사회적 공분을 높이 살만 일이기도 하며, 피해자의 분노와 사회에 미칠 악영향을 생각한다면 '완전격리'에 해당하는 처벌을 내려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사랑과 교화를 목적으로 '갱생한 수감자'에 한해서 사회복귀를 실현하는 것이 피해자의 억울한 심정을 보듬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사적인 복수를 행한 무법자에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사연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과 악의 뒤바뀜 현상'을 지켜볼 수 있다. 과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란 말인가? 선과 악은 절대적으로 분리된 개념이 아닌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양면성', 또는 '이중성', 혹은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가? <데미안>의 매력이 엿보이지 않는가. '선과 악의 공존'이라는 끔찍한 혼종을 직접 눈으로 본 것 같은 충격이 전해지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1차세계대전을 경험한 이들에게 <데미안>은 신선한 충격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경험한 '전쟁'이라는 것이 실상은 '순수한 악'에 가깝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전쟁에 참여할 당시만 해도 '절대적으로 선한 행위'를 하고 있다며 '자발적 참전'을 선택했고, '당연한 의무'라고 여겨 전선으로 향하는 열차를 작별의 눈물과 승전의 환호로 떠나보낼 수 있었고, 조국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행진하는 군인들에게 뜨거운 키스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들 모두가 겪은 '전쟁의 참상'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서로를 향한 총구에 의해 아까운 젊은 피가 솟구쳤으며, 탱크를 비롯한 신무기로 서로 힘을 과시하며 '대량살상'을 할 수 있는 강항 파괴력만이 적들을 벌벌 떨게 만들어 끔찍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킬 수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독가스 같은 치명적 살상무기까지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과연 그들 모두는 '선한 존재'였을까? '악한 존재'였을까?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어떻게 '선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전쟁은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순수한 악'인 셈이다. 그런 악한 세계를 창출해낸 모든 이들도 '악마'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터에 참전한 이들 모두 '자신'이 악마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은 외적을 무찔러 조국의 명예와 가족의 안전을 지킨 '선한 존재'라고 여길 것이다. '선과 악의 공존'하는 묘한 경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인식과 경험을 갖고 있던 당시 젊은이들에게 '2차세계대전'은 또 다른 축제였을까? 그렇지 않다는 '토마스 만'의 평가는 대단히 공감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 <데미안>이 전쟁에 참전한 젊은이들의 필독서가 되었다는 후일담에도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이라는 두 세계가 공존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다시 말해, '이중인격자'로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절대선이라 여겼던 '신'마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마당에 '누굴' 믿고 따라야 하며, 기댈 곳이 없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한 우리들이 '의지'할 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기자신'을 믿어야 한다. 스스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 믿고 의지할 데를 찾아떠나는 어리석은 짓일랑 품지 말고, 스스로 우뚝 서고, 스스로 곧게 자랄 수 있는 멋쟁이로 거듭나야만 한다. 바로 '새가 알에서 깨고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새는 알에서 '스스로' 깨고 나온다. 줄탁동시라 하여 껍질을 안에서, 또 밖에서 함께 깨고 나오는 감동스런 장면을 연상하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스스로 깨고 나오려는 의지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의 세계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새만이 푸른 창공을 훨훨 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알껍질도 못 깨고 나오는 미약한 존재가 두 날개를 퍼득이는 수고를 하며 하늘을 누비고 다닐 수 있을까? 난 없다고 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을 인식하는 힘이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말이다. 만일 인류가 '에덴동산'이라는 알껍질 속에 안주하는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종교적 관점에서는 영혼의 안식과 평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에덴을 떠나는 것이 끔찍한 비극일지 모르겠으나, 차리리 한가롭기만 한 에덴동산을 떠나는 것이 인류에게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었으며 쫓겨난 발걸음이 '장엄한 첫 발짝'이 아니었을까? 비록 그들에게 고난과 노동이라는 힘든 삶이 주어졌더래도 그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는 즐거움(?)을 맛보지 않고, 한가롭게 에덴동산의 풍요속에서 아무런 욕구도,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는 지루한 삶을 지속하는 것은 도리어 끔찍한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이는 천국에서 안락하고 건전하게(?) 지내는 것보다 지옥의 스릴과 익스트림을 맛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현실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는 삶일 것이다. 위험천만한 짜릿함을 맛보고 싶다가도 불멍이나 물멍을 때릴 수 있는 한가로움이 반복되는 삶 말이다.
여기까지, <데미안>의 맛이 어떤가? 다음에는 또 다른 맛으로 헤세를 맛보려 한다. 물론, '또 다른 문학'일 수도 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