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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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나 내 취향은 '텍스트'였다. 영상이 주는 감동과 아름다움에 가려져서 읽어낼 수 없었던 '숨겨진 내용'을 소설을 읽으면서 곱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영화'가 원작이고, 영화의 인기를 반영해 지어낸 '소설'로 또다시 그 인기를 증명하였기 때문에 '원작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감동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해도' 면에서는 확실히 소설이 월등히 나았다.


  내가 원작영화를 보면서 놓쳤던 부분은 '광부들의 파업'과 '대처 수상의 똥고집'이 가지고 온 영국 저소득층의 슬픔이었다. 대영제국으로 영광을 누리던 시절, 석탄을 캐는 광부는 '산업역군'이었으며 영국을 명예를 지켜낸 영웅들이었다. 허나 '석탄산업'이 저물고 대영제국이라는 타이틀도 내려놓을 즈음에는 광부들은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광부들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석탄을 캐려고 했지만, 석탄산업은 저물고 석탄을 캐내면 캐낼수록 적자를 보는 퇴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에 마가렛 대처는 과감한 개혁드라이브를 시행했으니 퇴물이 되어 버린 탄광을 아예 폐기처분하는 방법으로 영국경제를 되살리려 했던 것이다. 당연히 광부들은 파업을 하며 강경하게 대처했다. 생존권이 달린 '나쁜 정책'을 지지할 멍청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처는 막무가내였다. 광부들을 살리려면 영국 전체가 죽어야 한다면서, 광부들에게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빌리네 아빠(재키)와 형(토니)는 이런 일련의 경제정책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빌리는 '발레'를 접하게 된다. 막연하게 권투를 배우며 '남성성(?)'을 익혀가던 빌리는 권투에 집중하기보다는 '춤'에 가까운 권투를 하다가 얻어맞기 일쑤였다. 마침 권투연습을 하는 장소에 발레수업이 동시에 펼쳐지는 우연이 겹치면서 빌리는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춤에 대한 본능'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권투 동작에 발레(춤)를 접목시킨 것이다. 이런 해괴망측한 짓을 거쳐 빌리는 '발레동작'에 매료되어 갔고, 결국엔 권투수업은 때려치우고 발레수업을 몰래 듣게 된다.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물론 '발레선생님'과 '그 딸'은 빼고 말이다.


  발레선생님은 한눈에 빌리의 천재성을 알아본다. 그리고 개인수업을 해주며 '발레 오디션'을 준비하게 한다. 하지만 생계조차 버거운 빌리네 가족은 빌리가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필요한 '참가비'조차 마련하기 힘들 정도다. 아빠와 형 뿐만 아니라 (탄광)마을사람 모두가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마당에 모두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대가로 생계를 꾸릴 수 있는 '대안'을 대처가 제시하기는 했지만, 파업참가자들은 그런 대안을 선택한 사람들을 '배신자'라고 부르면서 온갖 모욕적인 말과 린치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 자신들의 생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빌리의 발레 참가비'를 선뜻 내어줄 사람은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 절박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어려움을 뚫고 빌리는 '로열발레학교'에 당당히 입학하였고, 발레리노(남자무용수)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어렸을 적에 흠뻑 빠졌던 <백조의 호수>의 주연을 당당히 맡아 '비상'하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물론 '원작영화'도 그렇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와 소설이 대박을 치자, 실존 인물이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다. 필립 모리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언론에는 '필립 말스덴'으로 소개되곤 했지만, 그의 본명은 '모리스'가 맞단다. 그의 일생은 영화에서 보여준 것이 대부분 맞다고 한다. 발레를 몰래 배우지 않고 3살부터 여동생과 함께 배웠다는 것과 발레보다는 '탭 댄스'를 추고 싶었다는 점이 다를 뿐, 가난한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도 사실이고, '로열발레단'에 입학한 것도 모두 사실이란다. 참, 그리고 '가난한 애'가 '고급학교'에 다니면서 열등감을 느꼈던 적도 없단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그런 '열등감'을 살짝 언급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보다는 '동성애자'라는 오해가 가장 큰 고충이었다고 한다. 발레 같은 것은 여자들이나 하는 것인데, 남자가 '여자의 춤'을 춘다는 것 자체가 그런 오해를 불러오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그를 가장 괴롭게 했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자연스런 현상인 모양이다. 특히나 '동성애자'는 비정상인으로 취급 받으며 온갖 나쁜 짓을 받아 마땅한 불결한 존재로 취급하였으니, 발레를 배운다는 것조차 '몰래' 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으리라.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어떤 편견과 시련도 한방에 날려버리기 마련이다. 빌리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세상 그 어떤 '백조'보다 강렬한 인상을 보여주며 그 어떤 점프와도 비교할 수 없는 '비상'으로 관객들을 매혹시켜버리자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도 한 방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정상인들이었을 '관객'들이 한 눈에 반해버린 존재가 '비정상인(소수자)'가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세상은 참 얄궂다. 반푼 쯤 모자란 바보들이 '천재'를 바라보면서 박수갈채를 보내곤 하지만, 그 천재가 진정으로 '비상'하기 전까지는 '날개짓'도 할 수 없게 꺾어버리려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보들은 자신들의 재주없음을 한탄하며 '천재들의 날개짓'을 시샘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온갖 편견을 내비치며 '또 다른 천재'들의 등장을 일사분란하게 막아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자신과 '다름'에 매우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는 바보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나조차도 그런 바보같은 짓거리를 서슴지 않고 뿜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보들의 행진'을 멈춰야 한다. 여자가 축구하고 남자가 설거지하는 '일상'이 평범해질수록 우리 사회는 건전해지기 때문이다. 여자는 '집안일', 남자는 '바깥일'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오류는 과거에 묻어두어야 한다. 그땐 그랬지..라면서 추억할 꺼리도 못되는 것을 애써 끄집어 내어서 '사회적 편견'의 소재로 쓰이면 참으로 곤란하다. 그냥 '인간'일 뿐이다. 남자든 여자든 '똑같은 인간'이란 말이다. '인간차별'이 어색하고 모욕적으로 들린다면 '남녀차별'이라는 말도 써서는 안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으리라 본다.


  누가 뭐라든 '나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당당히 드러낼 수 없을만큼 부끄러운 짓은 살인과 같은 '폭력'을 저지르는 짓이다. 그 어떠한 폭력도 용납할 수 없는 까닭이 바로 '부끄러운 짓'이기 때문이다. 허나 '동성애'가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동성애자'를 범죄자 취급하며 마녀사냥하듯 몰아붙일 일이 전혀 아닌 것이다. 딴에는 '동성애'가 종족번식을 차단하는 '사회악'으로 작용한다며 거품을 물고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불임부부'와 '난임부부'도 마찬가지로 사회악으로 대우할 셈인가? 외모에 편견을 갖고 '변형된 유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잘 생기고 예쁘면 '무죄', 못 생기면 '유죄'와 무엇이 다를 것이냔 말이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인해 '자폐스펙트럼 환자(일명 '자폐증')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고 한다.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보통사람'을 정상으로 놓고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다.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도 '똑같지 않으면 불편해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 얘기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도 평범해 보이려 애쓰지는 말길 바란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성숙한 사회를 꿈꾸는 건 인지상정 아니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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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6 - 1936-1940 결전의 날을 준비하라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6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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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30년대 후반, 일제는 폭주하기 시작한다. '민족말살정책'이 시작한 것이다. 중일전쟁의 발판으로 삼은 '식민지 조선'은 일제의 '병참기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일제는 침략전쟁을 '서양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아시아의 단결'이란 뜻의 '대동아공영'이란 미명으로 포장하고, 수많은 조선인을 침략전쟁에 참전토록 하였다. 허나, 일본제국에 의해서 일본제국만을 위한 전쟁에 '조선인'이란 이름으로 참전할 리가 만무할 따름이다. 이에 일제는 조선인들을 '2등 국민'으로 차별하면서도 '내선일체'를 내세워 희생양, 아니 총알받이로 이용하려 들려 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힘 없는 백성이 된 조선인은 '창씨개명' 따위로 억지로 일본인이 되어 전장으로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처우를 받으며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이용 당하고 또 이용 당했다. 이겨도 자랑스럽지 않은 '남의 나라 전쟁'에 말이다.

 

  물론, 이에 맞서 맹렬히 저항하는 세력은 많았다. 독립운동의 기치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일제는 분명 그 힘이 다하고 있었다. 분명 '전쟁의 시작'은 늘 승전이라는 빛나는 전과로 장식했지만, 이는 '기습공격'이라는 비겁한 술수에 불과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될수록 일제는 초반의 승기가 무색할 정도로 무력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독립운동세력이 '게릴라전'을 펼칠 때마다 일제는 번번히 패배하곤 했기 때문이다. 비록 게릴라전이라서 '소규모 전투'의 승전일 뿐이었고, 곧이어 '대토벌'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물량으로 보복을 해와서 독립운동세력 뿐만 아니라 이들을 물신양면으로 도와주던 민간인들의 피해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지만, 일제의 빈틈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일전쟁'의 양상은 전선이 점점 확대되어 가기만 했고, 연이은 일본군의 승리에도 전쟁은 쉽사리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가 중국을 점령하기에는 중국이 너무 컸던 탓이다. 거기다 '공산주의 세력'은 날로 확대되어 갔다. 소련에 이어 중국까지 '공산화'가 뚜렷해지고, 세계대공황에서도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보다 경제회복이 빠르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자 전세계 수많은 인민들이 '공산주의의 매력'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제의 만행은 '제국주의의 민낯'을 낱낱히 밝혀주는 꼴을 면치 못했고, 공산당의 일원으로 활약하는 것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는 정정당당한 일이 되어 버리는 통에 '공산주의자=애국자'로 통용되는 일로 커져만 갔다.

 

  이는 우리측 독립운동가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에 수많은 독립운동이 활기를 잃고 '변절자'가 속출하는 와중에도 '공산주의'는 노동자와 농민 들의 시위와 파업에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 일제에 저항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독립전쟁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서도 '공산주의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세력은 열악한 환경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공산국가인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공산주의자'로 전향하는 일도 흔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독립운동의 명맥'을 이어온 이들 가운데 유독 돋보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보천보 전투'로 유명한 김일성이다.

 

  우리는 김일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일찌기 공산당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것에 부인하지는 않고 있으나, 그가 '청산리대첩'과 같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일성의 독립운동을 깎아내려버리면 '또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동시에 폄하하는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김일성의 독립운동 참여 '사실'은 인정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해방 후에 '한국전쟁'을 일으킨 원흉이라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북한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남한에서는 그를 곱게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김일성은 '제한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해방 이전의 활약에 대해서만 논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암튼,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약 했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이 주제해서 만든 항일조직으로 일단은 '중국군'에 소속되어 있지만,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따로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계략으로 인해 밀정이 파견되어 독립운동세력을 와해하거나 주축인물을 일제에 투항시켜 변절시키거나 '또 다른 밀정'이 되어 더 많은 독립운동가를 색출해내려 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불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백척간두의 상황에서도 '김일성'만큼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밀정이 '김일성'을 배신자, 변절자라고 실토하더라도 중국공산당 뿐만 아니라 조선공산당원들도 모두 '김일성'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 김일성이 인맥관리에서부터 활동의 청렴성까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도 '자기관리'만큼은 철저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자기 주위에 '적'을 두지 않고 두루 명망을 갖추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김일성의 인기는 이를 반증하는 확고한 증거로 작용했던 것이다.

 

  허나 김일성이란 '예외사항'을 빼고 나면, 조선인은 나라를 빼앗기고 온갖 설움을 받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 것이 맞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따라 친일을 하지 않거나 변절을 하지 않는 한 조선에서는 목숨 붙이고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었고, 이웃나라로 잠시 몸이라도 피하자고 떠난 이들도 '일제부역자', '일제의 스파이'로 오인되어 머나먼 타지로 쫓겨나는 푸대접을 받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조차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푸대접을 하는 마당에 소련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로 인해 스탈린은 '고려인 이주정책'을 강제로 밀어붙였고, 그로 인해 수많은 고려인들은 빈곤과 불모의 땅이던 '중앙아시아'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유도 궁색한 '일제의 스파이' 혐의를 받고 말이다. 소련의 공산혁명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던 영웅들조차 이런 푸대접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가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그분들의 업적을 뒤늦게나마 드높이는 일에 공을 들여야 하는 까닭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바로 그분들 덕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국의 핵폭탄이 일제의 항복을 끌어냈고, 그로 인해 조국이 해방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독립운동' 자체가 없었다면 '독립'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독립운동가'를 한분 한분 찾아서 그들이 받고 누려야 마땅한 공로에 아낌없는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래야 이 땅에 또다시 불운이 찾아와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도 당연히 '나라를 지키는 애국자'로 나서 싸울 것이다. 이처럼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도 망설이는 까닭이 있다면, 해방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연이어 겪으면서 '친일파'들이 '구국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독재정권이 들어서서 '이들'을 감싸고 경제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포장'하고 키워주고 거짓까지 일삼으며 '쉴드'를 쳐주는 못된 이들이 많았던 탓이라 하겠다. 이런 비극속에서 되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숨죽이며 살아야 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란 말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미워해야 할 것은 '외세의 힘'에 기대어 '자신의 안위'만 돌보는 매국노들이다. 나라의 위기를 눈앞에 두고서도 제 한 몸만 살려보겠다고 민족을 배반하는 놈들을 미워해야 마땅하다. 또한 자기 스스로 제 나라가 '약소국'이라 떠들고, 강대국에 '빌붙어야만' 살 수 있다며 떠벌리는 '노예근성' 쩌는 놈들은 밟아죽여도 시원치 않으리라. 그 못난 놈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것도 '힘 있는 나라에 납죽 엎드려 사죄를 해야 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말들 뿐이다. 들을 가치가 있는가? 자기 한 몸 노예가 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제 자식'마저 총알받이로, 성노예로 갖다 받쳐도 그 큰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떠들어대는 헛소리에 현혹될 것이냔 말이다. 이젠 진짜 미워할 놈들을 미워하자.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염치없는 것들에게 단단히 혼쭐내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마지막 7권에서 그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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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2 - 태평천국 라이징 본격 한중일 세계사 2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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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운 듯 하지만 안 배운 것과 진배 없을 정도로 깜깜한 '동북아시아의 근현대사'는 <한국사>에서조차 드문드문 배울 뿐,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한꺼풀 들춰보면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은 날 것이다. 왜냐면 '배우긴 배웠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 그건 역사는 '단편적'으로만 배울 뿐, '맥락'과 '흐름'이라는 거대한 차원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한국사>는 한반도에서만 일어난 일만 다루고, <세계사>는 백인들이 주인공이 되어 벌인 일만 써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단편적인 역사적 사건'을 가르치고 배우긴 하지만 '암기'하기 좋게 사건이 일어나게된 원인과 결과만을 '요약'해서 시험문제로 다루니, 웬만큼 역사에 통달하지 않고서는 '교과서'만 읽고서 역사의 맥락과 유구한 흐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역사는 그만 배워야 하지 않을까.

 

  1권에 이어 2권에서는 1840년대 한중일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토대로 전세계적인 '움직임'을 들여다볼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아편전쟁의 패배의 쓰라림 속에서 민중들의 반란인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진다. 일본에서는 이양선과 서양인이 출몰하면 몽땅 파괴하고 죽이는 쇄국을 하면서도 네덜란드 상인만은 출입을 허가하며 서양의 문물을 배우며 '난학열풍'을 벌인다. 그러는 한편, 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서구열강들에게 쳐발리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이나마 '개항'을 하기에 이르고, 이런 흐름에 미국이 '태평양시대'를 맞아 고래잡이하는 포경선의 안전한 활약을 보장받기 위해 동북아시아 3국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길목인 일본이 가장 먼저 주목 받고 말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세도정치 시기'의 대혼란을 겪으며 민중들이 핍박 받는 일이 자행되지만, 상대적으로 중일에 비해서 서양의 관심을 덜 받은 까닭에 아직은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오래 가지 않고 격변의 시기를 맞이할 거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책 <본격 한중일 세계사 2>의 핵심은 '태평천국의 난'을 다룬 것이다. 그동안 역사책에 종종 거론되긴 하지만 잘 알지 못했던 까닭에 이 책만큼 자세하고 흥미진진하게 알아볼 수 있는 책이 없기 때문이다. 고작 14년(1851~1864)만에 수억의 인명이 살상 당한 비극을 초래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대한 사안으로 다룰 수밖에 없는데도,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을 접할 수 있는 책이 드물다는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럴까?

 

  태평천국운동은 홍수전이 "나는 상제님(하나님)의 둘째 아들이다"라는 예언을 들었다는 얼토당토 않은 사건으로 시작하지만,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대국의 자존심이 꺾인데다가 이후 서양의 침략에 변변한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 채, 백성들의 수탈에만 열을 올리는 무능력한 청조정에 대항하고(반봉건), 서양의 침략에 단호히 맞서며(반외세), 사회주의 색채를 띤 '사유재산 금지', '배급제 실시', '남녀평등 정책', '도덕을 앞세운 행정시스템' 등등 시대적으로도 대단히 앞선 사상을 내세웠던 탓에 당시 핍박받던 수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남경'을 점령하고 화남일대를 다스리며 청조정이 있는 북경까지 공략하는 등 청왕조를 뿌리채 흔들리게 만든 역사적인 운동이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난'으로 진압되고 만 까닭은 지도부의 분열과 타락으로 구심점을 잃고 오히려 백성들을 수탈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등의 만행을 일삼았던 탓에 '반봉건', '반외세',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수많은 이들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물론, 태평천국운동 이후에 손문(쑨원)이 똑같은 사상으로 중화민국을 건국하기에 이르고, 모택동(마오쩌둥)의 공산당 이념과도 유사한 사상을 내세웠던 탓에 역사적으로도 그 중대한 사건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태평천국이 '종교적 성향'을 내세웠던 것이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된 원인으로 보인다. 왜냐면 종교운동은 성스럽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성공할까 말까인데, 홍수전을 비롯한 왕을 자칭한 지도부가 먼저 상스럽고 부도덕적인 일로 서로 갈등을 일으키더니 끝끝내 저들끼리 치고 받는 과정에 상대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민심을 잃고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용두사미란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말이다. 이처럼 '태평천국운동'의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가기 마련이라, 한편으론 대단하다고 평하면서도 막장보다 더한 부끄러움에 감추기 급급한 역사로 치부하곤 한다.

 

  이쯤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도대체 그당시 백성들은 '사이비교주'와 다를 바 없는 홍수전과 그 일당의 꼬임에 넘어가 내전을 방불케 한 전쟁에 참여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했던 것일까? 그건 정부세력(청왕조)이나 반정부군(태평천국)이나 썩을대로 썩어빠졌기 때문이었다. 백성들 처지에서는 조금이라도 먹고 살 희망이 큰 쪽에 붙고 싶었을 뿐이다. 청의 관료들은 서양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면서도 백성들을 수탈하는데에는 도가 텄기에 일찌감치 민심을 잃었고, 그나마 태평천국운동의 초기에는 '살만한 세상'을 꿈꾸게 해줄 것만 같은 기대감이 부풀어 올라 사기충천하였고, 반봉건, 반외세라는 기치를 내세울 수 있었기에 기꺼이 전재산을 걸고 한 판 승부를 걸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백성들은 이쪽에 붙으나 저쪽에 붙으나 굶어죽기는 매한가지라서 큰 고민할 것도 없을 지경이었단 말이다. 그러니 알만 한 사람은 다 알면서도 '사이비교주'의 편을 들어 새로운 세상을 꿈꿨고, 이들을 상대로 큰 공을 세우면 청왕조에서 한 자리 내어준다고 약속을 하니,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쪽이나 저쪽에 붙어서 죽고 죽이는 비극을 연출한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심'을 거스른 나라가 잘 된 예가 없으며, 선량한 백성들이 먹고 살기 힘들 정도로 정치, 경제, 사회적인 혼란이 지속되면 큰 전쟁을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펼쳐지기 일쑤다. 백성이 유랑걸식을 하며 도적으로 바뀔 때 세상은 경천동지의 대격변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역사에도 잘 나와 있다. 황건적이 그랬고, 홍건적이 그랬다. 그리고 서구열강의 침탈에 청왕조의 무능이 여실히 드러나자 또다시 백성들은 들고 일어날 때를 기다린 셈이다. 그런데 '사이비교주'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이 등장해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말았으니 이때 죽은 수많은 백성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태평천국의 난'을 제대로 조명하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나게 된다. 특히 '나쁜 역사'는 반드시 반복되고, 역사를 잊은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는 까닭에 딱 걸맞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사이비교주'와 같은 이가 등장해서 '가짜뉴스'로 선동하고, 혹세무민한 일이 드물지 않기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종교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려는 못된 무리를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목놓아 외치는 '종교의 자유'는 온국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집단이기주의'와 다를 바가 없기에 관용을 베풀어서도 안 된다. 특히 '광신도 집단의 행패'가 이웃에게 주는 피해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렇기에 애초부터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서는 안 되지만 '사이비의 마수'가 손을 내미는 곳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가 소외를 시키고, 우리에 의해 소외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내 이웃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지며 우리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갈 때 사이비가 발을 붙일 곳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태평천국운동은 청왕조 아래서 신음을 하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선 것이 아니다. 백성들의 불만이 들끓던 시기에 혹세무민하며 자신들의 잇속을 단단히 챙기려는 무리가 백성들을 부추겨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이다. 그러니 태평천국운동을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웠고, 공산주의보다 앞서서 백성(약자)들의 편에 서서 '이른 사회주의 사상'을 펼쳤다는 등 좋은 말로 포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설령, 태평천국운동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하더라도 준비도 안 된 무능한 지도부에 의해 곧바로 무너져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민중의 의식성장'이다. 비록 피바다를 물색하게 만들 정도로 비극으로 치달은 운동이었지만, 훗날 '중화민국'이란 민주주의 국가를 설립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민중들 손으로 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중화민국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외세의 침략과 세계대전이라는 소용돌이속에서 공산당이 민중을 장악하고, 공산당이란 독재세력에 의해 중국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리지 못하고, 중국이 '세계 최고'라고만 주입된 무뇌충 집단이 되어 이성을 잃고 야욕만 내세우는 꼴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태평천국의 여파가 2권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4권에서 다시 이어지니 그때 다시 정리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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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18
헤르만 헤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1년 11월
평점 :
품절


  헤세의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이제사 첫 리뷰를 쓰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역시나 난 '비문학으로의 편식'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제라도 '문학소년'이 되어 리뷰를 쓴다는 것에 대견함을 느낀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를 정도의 '강렬한 문학리뷰'를 맛보여 드릴 것이다. 비문학 편식쟁이의 문학읽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 공개한다.

 

  다들 <데미안> 한 번쯤은 읽어보셨을 것이다. 아직도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내 리뷰를 읽고 다시 한 번 시도해보시길 바라고 말이다. 난 세 번쯤 읽은 것 같은데, 읽을 때마다 색다른 느낌이 들어서 참 즐겁기 그지 없다. 이번에 읽은 <데미안>의 맛은 '선악과를 따먹는 맛'이라고 감히 소개하겠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포인트가 '선과 악의 세계'를 다루고 있고, 그 두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할 것인가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이 책의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가 처음 느낀 '선악과의 맛'을 보여줄 차례다.

 

  싱클레어는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이 사는 집에서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대단히 놀란다. 밝은 세계란 부모님과 누나가 살고 있는 공간으로 자상한 부모님과 착한 누나들이 살고 있는 공간으로 자신도 그 공간에 살고 있다고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같은 집'인데도 하인과 일꾼 들이 머무는 공간은 밝음과는 거리가 먼 어둠의 세계, 그 자체였다. 일단 말투부터 사뭇 달랐다. 밝음의 세계에서는 교양이 넘치고 사랑과 애정이 가득한 내용의 언어를 고상하게 쓰는데 반해서, 어둠의 세계에서는 온갖 저급하고 상스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천박하기 그지 없는 말본새가 어린 싱클레어를 놀라게 만들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어두운 세계의 일원이 밝음의 세계로 찾아왔을 때는 다시 착한 말씨로 바뀌어 부모님과 누나들,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깎듯하게 대하곤 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어둠의 세계에서 밝음의 세계로 한순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싱클레어는 그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서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 놀라움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자신조차 믿기 힘든 진실이었기 때문이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의 공존'을 경험하고서 그저 감탄만 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린 싱클레어가 진정한 '악의 세계'를 만나고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프란츠 크로머와의 만남이었다. 싱클레어가 장난 삼아 해버린 '거짓말' 때문에 프란츠의 올가미에 걸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거짓말이란 '훔치지도 않은 사과'를 훔쳤다고 자랑스럽게 영웅담처럼 떠벌린 허풍이었는데, 못되먹은 프란츠가 싱클레어를 '사과도둑'으로 몰아 사과주인에게 일러 바치겠다고 협박을 한 거였다. 어린 싱클레어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지 못하고 프란츠의 협박대로 2마르크라는 거금을 다 갚을 때까지 삥뜯기고 말았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허풍이 뻥이었다고 밝혀지는 순간부터 망신살을 넘어서 또래 아이들에게서 왕따로 내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프란츠에게 돈을 주지 않아 '사과도둑'이라고 고발이라도 당할라치면 '그 사실'이 아버지에게 전해져서 엄청나게 혼이 날 것이 뻔했기에 싱클레어는 이도저도 하지 못한 채 '고양이 앞의 생쥐'마냥 그저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악의 세계'를 톡톡히 경험하고 있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프란츠가 싱클레어의 뒤를 쫒아 삥을 뜯고 있었는데, 그날은 조금 이상했다. 여느 날처럼 돈이 없다고 했는데도 프란츠는 웃음 띤 모습으로 싱클레어에게 "상관없어"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프란츠는 싱클레어에게 '누나'를 소개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소개해주는 것이 어렵다면 누나와 산책을 나오기만 하면 자신이 자연스럽게 누나와 친해지겠다(!)면서 어서 빨리 누나를 데리고 나오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아직 성에 눈 뜨지 못한 싱클레어였지만, 이 일만큼은 직감적으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악에 대한 두려움에 이미 길들여진 싱클레어는 우물쭈물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고, 그런 싱클레어를 음흉하게 보고 있던 프란츠는 약속을 꼭 지키라면서 그날은 헤어졌다.

 

  싱클레어는 나날이 야위어 갔다. 프란츠에게 삥을 뜯기느라 자신의 저금통을 깨기도 하고, 집안 곳곳에서 푼돈과 귀중품, 심지어 먹거리까지 훔쳐내었던 탓에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이 싱클레어를 잠식해 갔는데, 이제 누나를 악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일까지 강요받고 있으니, 없던 병도 생길 정도였던 것이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그런 싱클레어를 걱정스레 지켜봤지만, 싱클레어는 차마 진실을 고백하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와서 이미 '인기남'이 되어 있던 데미안과 만나게 되었다. 묘한 분위기에 지극한 매력까지 갖춘 미남이었던 데미안은 전학을 오자마자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지만, 싱클레어보다는 두어 살 형이었던 탓에 싱클레어와 면식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데미안이 고민 많은 싱클레어에게 다가와 고민을 단박에 해결해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싱클레어는 자신만의 비밀이 들통난 것 같아 뜨끔했지만,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서 프란츠와 있었던 말 못 할 비밀을 술술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자 데미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자신이 해결해주겠다고 장담한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하루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데미안의 호언장담이 실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싱클레어는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는 기분이 들 정도로 해방감을 느끼게 됨과 동시에 '데미안'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생기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데미안은 '카인'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싱클레어에게 들려주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카인'이 사실은 살인자가 아니라 '능력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까닭인 즉슨, <성서>에서는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하나님은 '죄인의 표식'을 남겼지만, 자애스런 하나님이 남긴 표식 덕분에 카인은 죄를 사함받고 뭇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핍박받지 않게 구원하셨고 적혀 있으나, 진실은 다르다고 데미안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미안이 들려준 이야기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카인에게 남겨진 '죄인의 표식'이라는 것은 뻥이고, 카인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던 탓에 뭇사람들이 카인을 경외하며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카인의 후예들'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지도하고 이끄는 훌륭한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고 말이다.

 

  어린 싱클레어는 놀랐다. 단순히 <성서>에 적힌 '진리'와 내용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릴 적 자신이 경험한 '이질적인 존재의 공존'을 데미안이 다시금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자신의 세계관과 동질적인 이야기를 전해준 데미안이 새삼 다시 바라보게 되기도 했지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성서>의 내용과 사뭇 다르게 말하고 있는 데미안을 멀리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데면데면했던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몇 년 뒤에 또다시 놀라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바로 '골고다 언덕 위, 세 개의 십자가 이야기'였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 이야기속에서 데미안은 또다시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기다리는 예수에게 한 도둑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겠다고 말하자 예수는 그 도둑의 죄를 사하여주고 천국으로 인도해주겠다는 말도 함께 해주었다. 그러자 반대편에 매달려 있던 도둑은 예수를 비아냥거리면서 "그렇게 대단한 분의 아들이 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느냐?"면서, 회개하고 천국행 티켓을 받으려는 도둑을 싸잡아 맹비난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는 당연하게도 회개한 도둑은 천국으로, 예수를 욕보인 도둑은 지옥으로 갔으며, 예수는 삼일만에 부활하여 널리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산증인이 되었다고 전하는 내용이었는데, 데미안은 이 이야기로 색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회개한 도둑은 비겁자이고, 예수를 맹비난한 도둑은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십자가형을 받을 정도면 '최악의 범죄자'였을텐데, 평생을 죄악을 저지르며 살다가 예수의 한마디 말로 천국행이란 보상을 획득한 도둑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채 '부정'하는 못난이였을 뿐만 아니라 비겁한 '기회주의자'에 불과할 뿐이고,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댓가를 '십자가형'이라는 합당한 처벌로 달게 받은 도둑이야말로 정정당당하니 참으로 멋지지 않느냐는 이야기였다. 딴에는 신선한(?) 해석이지만, 역시나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이단자의 교활한 말씨라는 생각에 다다른 싱클레어는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데미안과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에 대한 풀 수 없는 난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잡은 듯한 희열을 싱클레어는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싱클레어는 나이가 들었고, 드디어 사랑에 눈뜨게 되었다.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그래서 붓을 들어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싱클레어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은 분명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그렸는데,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그림속의 대상이 '누구'를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다 그리고 붓을 내려놓은 순간, 싱클레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모습은 마치 '데미안'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데미안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시간이 흘러 전쟁에 참전한 싱클레어에게 다시 찾아온다. 적군의 포탄에 큰 부상을 당한 싱클레어가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잃고 있다가 되찾았을 때 자기 옆에 데미안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 자리에서 싱클레어와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고한다. 하지만 이는 이별이 아니라 싱클레어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알듯 말듯한 이야기만 남긴 채 둘은 헤어지고 만다. 이는 싱클레어가 소년의 티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선 다음 구절을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이는 싱클레어가 꾼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날개짓을 하는 새 꿈'의 이야기를 담아 써보낸 편지에 데미안의 답장 내용의 일부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나와야 진정한 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그 세계의 신은 '선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악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뜻모를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이 책의 진면목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서>에 담겨 있는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감히 <성서>에 토를 달거나 다른 견해를 말하면 '이단'으로 찍혀 '이교도의 푸대접'을 받기 마련이다. 그런 <성서>에 담긴 '신의 모습'은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로 그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성서>를 읽다보면 '구약'과 '신약'이 서로 다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악한 존재까지 품고 보듬어서 바른 길로 이끄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에, 구약에서는 절대신으로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가이없이 선량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는 적대적 파괴를 일삼는 폭군과 다를 바 없는 무자비한 신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똑같은 하나님'일텐데 말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조차 '선과 악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말이다. '아브락사스'라는 신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선과 악, 양면적인 모습을 띤 신'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양면적인 모습'과도 일맥상통한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선'과 '절대악'을 동일개념으로 볼 수 없기 마련이다. 어떻게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악마를 선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놓고 보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선악의 공존'을 인식하고 있다. 다음은 '악마의 대명사' 루시퍼에 대한 이야기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루시퍼'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 '대천사장'이었던 존재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타락천사'라 부르며,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불충의 존재로 여기며, 그때부터 사악한 존재들, 악마의 우두머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루시퍼가 대천사장에서 타락한 악마가 되고 말았을까? 루시퍼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벌을 내리러 강림하던 중이었다. 천벌을 내린 까닭은 하나님의 명을 어긴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던 이교도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천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 거리낌없이 천벌을 수행하려 땅으로 내려온 루시퍼는 천벌을 내리려 했지만, 그 땅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천벌을 내리지 않고 다시 하나님이 계신 천상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따져 물었다. "왜 죄없는 이들을 벌하려 하십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 나를 믿지 않고 나의 명을 따르지 않으니 천벌을 시행하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루시퍼는 "그곳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도 죄가 있더란 말입니까? 저는 천벌을 시행할 수 없나이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반기를 든 루시퍼는 하나님의 분노로 '타락천사'로 지목받았고, 천벌을 받아 아름다운 두 날개가 불타는 형벌을 받아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루시퍼는 '죄없는 영혼들'을 지키고자 하나님의 군대에 맞서는 '악마의 군단'을 만들었고, 그때부터 천사와 악마의 다툼이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마치, 데미안이 들려주는 이야기 같지 않은가? 이런 류의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연쇄살인마를 잡아 법정에 세우니, 살인자가 사실은 '원조 피해자'였고, 살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실상은 '살인자의 가정'을 파탄낸 강간범들이었다는 천인공노할 이야기가 종종 세간의 이슈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법치국가에서 '개인적인 복수'는 금지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와 딸이 무참히 살해된 현장을 목격한 남편이자 아빠가 냉정을 찾아 침착하게 경찰에 신고를 하고 피해자가 잡히기만을 무작정 기다리며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힘든 일이다. 천만다행으로 가해자가 모두 잡혀서 법정에 세워진다고 해도 '초범'에, '반성문 1000장'을 쓰는 등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므로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모범수로 유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전자발찌를 차고 가석방되어 풀려나게 된다면, 피해당사자가 '법대로 치루어진 일'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이는 사회적 공분을 높이 살만 일이기도 하며, 피해자의 분노와 사회에 미칠 악영향을 생각한다면 '완전격리'에 해당하는 처벌을 내려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사랑과 교화를 목적으로 '갱생한 수감자'에 한해서 사회복귀를 실현하는 것이 피해자의 억울한 심정을 보듬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사적인 복수를 행한 무법자에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사연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과 악의 뒤바뀜 현상'을 지켜볼 수 있다. 과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란 말인가? 선과 악은 절대적으로 분리된 개념이 아닌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양면성', 또는 '이중성', 혹은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가? <데미안>의 매력이 엿보이지 않는가. '선과 악의 공존'이라는 끔찍한 혼종을 직접 눈으로 본 것 같은 충격이 전해지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1차세계대전을 경험한 이들에게 <데미안>은 신선한 충격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경험한 '전쟁'이라는 것이 실상은 '순수한 악'에 가깝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전쟁에 참여할 당시만 해도 '절대적으로 선한 행위'를 하고 있다며 '자발적 참전'을 선택했고, '당연한 의무'라고 여겨 전선으로 향하는 열차를 작별의 눈물과 승전의 환호로 떠나보낼 수 있었고, 조국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행진하는 군인들에게 뜨거운 키스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들 모두가 겪은 '전쟁의 참상'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서로를 향한 총구에 의해 아까운 젊은 피가 솟구쳤으며, 탱크를 비롯한 신무기로 서로 힘을 과시하며 '대량살상'을 할 수 있는 강항 파괴력만이 적들을 벌벌 떨게 만들어 끔찍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킬 수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독가스 같은 치명적 살상무기까지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과연 그들 모두는 '선한 존재'였을까? '악한 존재'였을까?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어떻게 '선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전쟁은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순수한 악'인 셈이다. 그런 악한 세계를 창출해낸 모든 이들도 '악마'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터에 참전한 이들 모두 '자신'이 악마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은 외적을 무찔러 조국의 명예와 가족의 안전을 지킨 '선한 존재'라고 여길 것이다. '선과 악의 공존'하는 묘한 경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인식과 경험을 갖고 있던 당시 젊은이들에게 '2차세계대전'은 또 다른 축제였을까? 그렇지 않다는 '토마스 만'의 평가는 대단히 공감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 <데미안>이 전쟁에 참전한 젊은이들의 필독서가 되었다는 후일담에도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이라는 두 세계가 공존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다시 말해, '이중인격자'로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절대선이라 여겼던 '신'마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마당에 '누굴' 믿고 따라야 하며, 기댈 곳이 없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한 우리들이 '의지'할 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기자신'을 믿어야 한다. 스스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 믿고 의지할 데를 찾아떠나는 어리석은 짓일랑 품지 말고, 스스로 우뚝 서고, 스스로 곧게 자랄 수 있는 멋쟁이로 거듭나야만 한다. 바로 '새가 알에서 깨고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새는 알에서 '스스로' 깨고 나온다. 줄탁동시라 하여 껍질을 안에서, 또 밖에서 함께 깨고 나오는 감동스런 장면을 연상하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스스로 깨고 나오려는 의지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의 세계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새만이 푸른 창공을 훨훨 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알껍질도 못 깨고 나오는 미약한 존재가 두 날개를 퍼득이는 수고를 하며 하늘을 누비고 다닐 수 있을까? 난 없다고 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을 인식하는 힘이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말이다. 만일 인류가 '에덴동산'이라는 알껍질 속에 안주하는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종교적 관점에서는 영혼의 안식과 평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에덴을 떠나는 것이 끔찍한 비극일지 모르겠으나, 차리리 한가롭기만 한 에덴동산을 떠나는 것이 인류에게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었으며 쫓겨난 발걸음이 '장엄한 첫 발짝'이 아니었을까? 비록 그들에게 고난과 노동이라는 힘든 삶이 주어졌더래도 그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는 즐거움(?)을 맛보지 않고, 한가롭게 에덴동산의 풍요속에서 아무런 욕구도,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는 지루한 삶을 지속하는 것은 도리어 끔찍한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이는 천국에서 안락하고 건전하게(?) 지내는 것보다 지옥의 스릴과 익스트림을 맛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현실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는 삶일 것이다. 위험천만한 짜릿함을 맛보고 싶다가도 불멍이나 물멍을 때릴 수 있는 한가로움이 반복되는 삶 말이다.

 

  여기까지, <데미안>의 맛이 어떤가? 다음에는 또 다른 맛으로 헤세를 맛보려 한다. 물론, '또 다른 문학'일 수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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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팀장입니다 - 서툴고 의욕만 앞선 초보 팀장들을 위한 와튼스쿨 팀장수업
레이첼 파체코 지음, 최윤영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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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팀장이 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물론, 팀장 자신의 스킬이나 실력이 뛰어나야 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무엇보다 팀원들을 '잘 만나는 것', '잘 다루는 것', 그리고 '잘 이끄는 것'에 유능해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팀장과 팀원의 궁합이 환상적으로 어울어져야 훌륭한 팀장도 될 수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우수한 팀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수한 팀을 만들 수 있는 훌륭한 팀장이 되는 방법은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방법은 '있다'. 만약, 없다면 이 책이 존재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좋은 팀장이 '타고나는 것'이라면 그저 좋은 팀장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팀장은 분명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그런 좋은 팀장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 그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선, 좋은 팀장이 되기 위해서는 팀원을 잘 관리하고 코칭해야 한다. 그리고 팀원이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팀장의 안목'과 '탁월한 선택'으로 팀원의 자질과 사기를 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실 '유능한 팀원'만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부분은 그다지 필요가 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능한 팀원'은 좋은 팀장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확률이 낮다. 그러니 '웬만한 팀원'을 데리고 잘 이끌어야 하는 것은 오로지 팀장의 몫이 된다.

 

  그럼, 팀원을 잘 다루기 위한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상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성과를 높이면 상을 줄 것이고, 그 반대면 패널티를 받거나 상을 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알 수 있게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팀원이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는 '동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기에 대한 '피드백'도 빠르고 정확해야 한다. 팀원들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또는 부족한 것이 있는지 스스로 파악하고 솔선수범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팀원들 스스로 일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도록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적절히 해결할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업무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상벌을 받는 기준인 성과와 부진에 대해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체계적인 관리를 해야 한다.

 

  여기서 팀원들에게 더욱 강조해야 할 부분은 바로 '동기부여'와 '책임감'이다. 일을 하면서 '동기'가 사라지면 일의 효율이 늘어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책임감'이 없다면 일은 진척되지 않고 제자리걸음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팀장이라면 반드시 이 두 가지를 팀원에게 심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

 

  이제 어느 정도 팀원 관리에 성공을 했다면, 팀장 자신의 관리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좋은 팀장이 되기 위해선 '명확한 기준'을 바탕으로 자기 업무에 대한 '체계성'을 키워 나가야 한다. 모든 관리의 기본은 '절차'에서 비롯된다. 만약, 팀장 스스로 이 '절차'를 무시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하게 된다면 팀원들의 신뢰를 잃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절차는 미적거리지 말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성과급을 줘야 할 때 미적거리거나 퇴사를 시켜야 할 사람을 바로 자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리스크'가 발생하게 되고,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응축과정'을 거쳐서 한 순간에 문제로 터져버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팀원을 잘 관리하는 비법을 알아야 할 때다. 개별적인 팀원들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니 명심해야 한다. 첫째, 명확한 규범. 둘째, 팀원들끼리 공감하는 힘. 셋째, 공평한 발언권이다. 이 세 가지 원칙이 잘 이루어져야 탁월한 팀워크로 우수한 팀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어려운 말은 없을 것이다. 다만, 실천이 힘들다. 이를 테면, 팀장이 팀원들에게 권위를 앞세우며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길 좋아한다면 우수한 팀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팀장에게 무거운 책임이 주어지고 실적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도 팀장이 감수해야 하기에 '원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팀원들을 닥달하기 마련이고, 규범에도 없는 업무를 지시하기도 하며, 팀원들의 발언권을 묵살하며 팀장의 고집만 내세우는 일도 비일비재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수한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팀장 스스로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바로 팀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각오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팀장의 '권한'은 팀장 자신이 아니라 '팀원들'을 위해서 써야 팀원들의 사기가 진작된다. 그래야 팀원들의 성과가 팀장의 성공으로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팀원들의 사기가 현저히 떨어지면 자연스레 팀장의 성공도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팀장은 가장 먼저 솔선수범 해야 하고, 팀원들과 함께 호흡하며 함께 성공하는 길을 제시하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여기까지 대충 읽어봐도 어려운 내용은 없을 것이다. 이해 못할 부분도 전혀 없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실천'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무능력하고 제멋대로인 팀원을 만나면 더욱 대책 없는 상황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 십상인 자리가 바로 '팀장'인 탓이다. 그런 팀원을 만났는데도 '좋은 팀장 코스프레'만 하고 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 딱 좋다. 과감하게 밀어 붙일 땐 밀고 나가야 한다. 물론, 명확한 규범을 밝히고 공정한 절차로 신속하게 상벌을 내리며 팀원들의 불만에 경청하면서도 '규범과 절차'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잘라낼 것은 잘라내야만 한다. 그건 온전히 팀장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팀장의 자리에 오르면 팀원들의 고충을 미리 헤아려서 팀원의 사기을 진작시키고 일의 성과를 끌어올려 '성공하는 팀'을 운영한 다음, 팀장의 자리에 걸맞는 권위와 존경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팀장도 사람인지라 상사의 질책을 받은 다음에 팀원들에게 '좋은 팀장 코스프레'를 하기보다는 '받은대로 돌려주기'라고 하는 것처럼 팀원들을 들들 볶는 팀장이 되기 일쑤다. 또는 팀원들의 고생으로 얻어낸 성과를 팀장이 날름 낚아채서 독식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런 팀들은 하나 같이 오래가지 못하고 해체되기 마련이다. 그런 해체 위기에 맞닥뜨린 당신에게 꼭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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