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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평점 :
역시나 내 취향은 '텍스트'였다. 영상이 주는 감동과 아름다움에 가려져서 읽어낼 수 없었던 '숨겨진 내용'을 소설을 읽으면서 곱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영화'가 원작이고, 영화의 인기를 반영해 지어낸 '소설'로 또다시 그 인기를 증명하였기 때문에 '원작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감동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해도' 면에서는 확실히 소설이 월등히 나았다.
내가 원작영화를 보면서 놓쳤던 부분은 '광부들의 파업'과 '대처 수상의 똥고집'이 가지고 온 영국 저소득층의 슬픔이었다. 대영제국으로 영광을 누리던 시절, 석탄을 캐는 광부는 '산업역군'이었으며 영국을 명예를 지켜낸 영웅들이었다. 허나 '석탄산업'이 저물고 대영제국이라는 타이틀도 내려놓을 즈음에는 광부들은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광부들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석탄을 캐려고 했지만, 석탄산업은 저물고 석탄을 캐내면 캐낼수록 적자를 보는 퇴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에 마가렛 대처는 과감한 개혁드라이브를 시행했으니 퇴물이 되어 버린 탄광을 아예 폐기처분하는 방법으로 영국경제를 되살리려 했던 것이다. 당연히 광부들은 파업을 하며 강경하게 대처했다. 생존권이 달린 '나쁜 정책'을 지지할 멍청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처는 막무가내였다. 광부들을 살리려면 영국 전체가 죽어야 한다면서, 광부들에게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빌리네 아빠(재키)와 형(토니)는 이런 일련의 경제정책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빌리는 '발레'를 접하게 된다. 막연하게 권투를 배우며 '남성성(?)'을 익혀가던 빌리는 권투에 집중하기보다는 '춤'에 가까운 권투를 하다가 얻어맞기 일쑤였다. 마침 권투연습을 하는 장소에 발레수업이 동시에 펼쳐지는 우연이 겹치면서 빌리는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춤에 대한 본능'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권투 동작에 발레(춤)를 접목시킨 것이다. 이런 해괴망측한 짓을 거쳐 빌리는 '발레동작'에 매료되어 갔고, 결국엔 권투수업은 때려치우고 발레수업을 몰래 듣게 된다.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물론 '발레선생님'과 '그 딸'은 빼고 말이다.
발레선생님은 한눈에 빌리의 천재성을 알아본다. 그리고 개인수업을 해주며 '발레 오디션'을 준비하게 한다. 하지만 생계조차 버거운 빌리네 가족은 빌리가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필요한 '참가비'조차 마련하기 힘들 정도다. 아빠와 형 뿐만 아니라 (탄광)마을사람 모두가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마당에 모두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대가로 생계를 꾸릴 수 있는 '대안'을 대처가 제시하기는 했지만, 파업참가자들은 그런 대안을 선택한 사람들을 '배신자'라고 부르면서 온갖 모욕적인 말과 린치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 자신들의 생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빌리의 발레 참가비'를 선뜻 내어줄 사람은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 절박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어려움을 뚫고 빌리는 '로열발레학교'에 당당히 입학하였고, 발레리노(남자무용수)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어렸을 적에 흠뻑 빠졌던 <백조의 호수>의 주연을 당당히 맡아 '비상'하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물론 '원작영화'도 그렇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와 소설이 대박을 치자, 실존 인물이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다. 필립 모리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언론에는 '필립 말스덴'으로 소개되곤 했지만, 그의 본명은 '모리스'가 맞단다. 그의 일생은 영화에서 보여준 것이 대부분 맞다고 한다. 발레를 몰래 배우지 않고 3살부터 여동생과 함께 배웠다는 것과 발레보다는 '탭 댄스'를 추고 싶었다는 점이 다를 뿐, 가난한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도 사실이고, '로열발레단'에 입학한 것도 모두 사실이란다. 참, 그리고 '가난한 애'가 '고급학교'에 다니면서 열등감을 느꼈던 적도 없단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그런 '열등감'을 살짝 언급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보다는 '동성애자'라는 오해가 가장 큰 고충이었다고 한다. 발레 같은 것은 여자들이나 하는 것인데, 남자가 '여자의 춤'을 춘다는 것 자체가 그런 오해를 불러오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그를 가장 괴롭게 했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자연스런 현상인 모양이다. 특히나 '동성애자'는 비정상인으로 취급 받으며 온갖 나쁜 짓을 받아 마땅한 불결한 존재로 취급하였으니, 발레를 배운다는 것조차 '몰래' 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으리라.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어떤 편견과 시련도 한방에 날려버리기 마련이다. 빌리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세상 그 어떤 '백조'보다 강렬한 인상을 보여주며 그 어떤 점프와도 비교할 수 없는 '비상'으로 관객들을 매혹시켜버리자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도 한 방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정상인들이었을 '관객'들이 한 눈에 반해버린 존재가 '비정상인(소수자)'가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세상은 참 얄궂다. 반푼 쯤 모자란 바보들이 '천재'를 바라보면서 박수갈채를 보내곤 하지만, 그 천재가 진정으로 '비상'하기 전까지는 '날개짓'도 할 수 없게 꺾어버리려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보들은 자신들의 재주없음을 한탄하며 '천재들의 날개짓'을 시샘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온갖 편견을 내비치며 '또 다른 천재'들의 등장을 일사분란하게 막아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자신과 '다름'에 매우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는 바보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나조차도 그런 바보같은 짓거리를 서슴지 않고 뿜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보들의 행진'을 멈춰야 한다. 여자가 축구하고 남자가 설거지하는 '일상'이 평범해질수록 우리 사회는 건전해지기 때문이다. 여자는 '집안일', 남자는 '바깥일'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오류는 과거에 묻어두어야 한다. 그땐 그랬지..라면서 추억할 꺼리도 못되는 것을 애써 끄집어 내어서 '사회적 편견'의 소재로 쓰이면 참으로 곤란하다. 그냥 '인간'일 뿐이다. 남자든 여자든 '똑같은 인간'이란 말이다. '인간차별'이 어색하고 모욕적으로 들린다면 '남녀차별'이라는 말도 써서는 안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으리라 본다.
누가 뭐라든 '나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당당히 드러낼 수 없을만큼 부끄러운 짓은 살인과 같은 '폭력'을 저지르는 짓이다. 그 어떠한 폭력도 용납할 수 없는 까닭이 바로 '부끄러운 짓'이기 때문이다. 허나 '동성애'가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동성애자'를 범죄자 취급하며 마녀사냥하듯 몰아붙일 일이 전혀 아닌 것이다. 딴에는 '동성애'가 종족번식을 차단하는 '사회악'으로 작용한다며 거품을 물고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불임부부'와 '난임부부'도 마찬가지로 사회악으로 대우할 셈인가? 외모에 편견을 갖고 '변형된 유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잘 생기고 예쁘면 '무죄', 못 생기면 '유죄'와 무엇이 다를 것이냔 말이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인해 '자폐스펙트럼 환자(일명 '자폐증')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고 한다.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보통사람'을 정상으로 놓고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다.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도 '똑같지 않으면 불편해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 얘기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도 평범해 보이려 애쓰지는 말길 바란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성숙한 사회를 꿈꾸는 건 인지상정 아니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