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8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8
이충환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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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나 읽지 못하는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 책 속에 담긴 내용이 어려운 것은 둘째치고, '벽돌책'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두께와 쪽수를 자랑하는 까닭에 좀처럼 읽기 꺼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렵고 난해한 내용을 한 번이라도 접해보는 순간부터 세상이 달라보이는 까닭에 '고전'은 꾸준히 사랑받아 왔고 오래도록 '읽어야 할 책' 목록에서 빠진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고전'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왜 없겠는가. 지금껏 수많은 선배독자들이 '고전'을 먼저 접하고서 최선을 다해서 이해하기 쉽고 재미나게 풀어내려 엄청나게 노력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쫌만 발품을 팔다보면 <고전책>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중에 [웅진지식하우스]에서 선보인 '지적 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시리즈가 있다.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그 내용이 참으로 '수준급'이고, 빠르게 완독할 수 있도록 분량도 '종이책 100쪽 분량' 안팎이라 누구라도 쉽게 읽고 교양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 내용을 음미하며 읽는 '정독 독서가'라면 30분만에 독파하기는 힘들 것이고, 책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길 좋아하는 '속독 독서가'라면 충분한 시간일 것이다.

 

  참고 삼아, '정독 vs 속독'의 장단점을 비교하자면, 정독은 '기억'에 오래남기는 장점이 있는 반면 완독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강박을 줄 수 있다. 반면에 속독은 '전체 내용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아주 탁월한 방법이자, 원하는 내용만 골라 읽을 수 있는 발췌독을 병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용한 독서법이지만, 책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으면 '기억'이 금세 휘발되어 사라져버리는 단점도 있다. 이렇게 장단점이 다양한 만큼 '어느 방법'이 더 좋으냐는 물음보다는 '필요에 따라' 어떤 독서법을 선택할 것이냐라는 판단이 더욱 현명할 것이다. 유의할 점은 '독서는 절대 강요해서는 얻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이는 '독서법'도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독서법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법이다.

 

  이 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그 유명한 <코스모스>의 '축약본'이라고 해도 좋다. 다른 고전책에 비하면 책 내용이 어렵지 않고 재밌기로 유명한 책인데 유일한 단점은 '두껍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매한 분들'은 많지만 '완독한 분들'은 그닥 많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 쉽고 재밌는 책을 '완독'의 성취감을 줄 수 있는 '포켓북 버전'이라고 소개해도 무방할 것이다. 단지 이 '지대30분고전' 시리즈는 eBook으로만 출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살짝 아쉬울 따름이다. 예쁘고 깜찍한 '문고판' 형식으로 출간이 되었어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부담없이 수준 높은 교양을 쌓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요즘에는 누구나 손에 들고다니는 '스마트폰'이 있으니 전자책으로 나온 것도 시기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긴 '종이책'을 여전히 좋아하는 나조차 요즘에는 부쩍 '전자책'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노안이 찾아와서 '작은 글자'가 잘 뵈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그렇지 않다고 깨톡을 날리는 모양이다.

 

  암튼, 책의 내용은 이렇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를 통해서 우리에게 우주를 친숙하게 만들어주었다. 그가 나사에 몸을 담고서 참여한 프로젝트만 59년 마리너 계획(금성), 69년 아폴로 계획(달), 72년 파이어니어 10호(목성), 73년 파이어니어 11호(토성) 계획, 75년 바이킹 계획(화성), 77년 보이저 계획(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직접 참여했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미국 나사는 그의 뜻을 기리며 꾸준히 우주탐사를 진행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사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우주를 친숙하게 만들어준 그는 '외계인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아서 모든 프로젝트에서 '생명체의 존재'를 찾아 헤매곤 했다. 그래서 <코스모스>를 읽으면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서 지구로 찾아올 외계인에게 "여기에 지구인이 살고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노력 또한 느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보이저 호'에는 혹시 만날지도 모르는 외계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메시지'가 황금 레코드에 실려 지금도 태양계 밖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이 보이저 호에는 '한국어' 메시지도 담겨 있어 한국의 7080세대 가운데 '천문학자'를 꿈꾼 이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말이다. 안타깝게 성적이 살짝 모자라서 '천문학도'는 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처럼 <코스모스>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주의 신비'를 파헤쳐주는 동시에 '어딘가에' 꼭 있을 외계인의 존재를 찾으려는 세이건의 노력이 담뿍 담긴 책이다. 그래서 그 방대한 내용을 탐독하다보면 누구라도 '외계인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현재까지 태양계 안에서 '생명체의 존재'를 확인한 바는 없으며, 지금까지 관측한 결과에서도 '외계인의 존재'는커녕 지구 행성 말고 다른 곳에서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코스모스>는 폐기처분해야 할 책일까?

 

  당연히 그건 아니다. 왜냐면 우주가 너무나도 넓기 때문이다. 77년에 쏘아올린 보이저 호조차 2024년 현재 '태양계'를 벗어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보이저 호가 명왕성의 궤도를 벗어나 더 멀리 날아가긴 했지만, 태양계의 범위 안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르트 구름'에 이제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 구름을 벗어나는데만도 지금까지 날아간 거리만큼 더 멀리 나아가야 겨우 '태양계 밖으로' 나가 항성과 항성 사이의 '텅빈 공간'에 접어들게 된단다. 이렇게나 큰 태양계조차 '우리 은하'에 비춰보면 조그만 점에 불과할 뿐이고, 우리 은하를 포함한 '은하단'에 견주면 깨알 같은 점으로도 표시할 수 없는 범주일 뿐이며, 온 우주에 비하면 감히 언급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우주인 셈이다. 이렇게나 넓고 넓은 우주에서 오직 '지구 행성'에만 지적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비효율적인 '공간낭비'냔 말이다. 바로 칼 세이건이 한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주를 연구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곳에 우리 모두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지적능력은 '지구밖까지' 뻗어나가고 있는데, 우리보다 훨씬 더 지적능력이 뛰어날 것이 틀림없는 '외계인'들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지구 행성'에서만 갇혀 있다면 우리는 지적인 생명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직무유기'를 하는 셈일 테니 말이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한 장면처럼 운명적인 만남을 성사시켜야 할 숙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물론 '숙제검사'를 할 존재는 없다. 그러나 숙제를 꼭 검사받는 맛으로 하는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칼 세이건은 생애를 통해서 오직 이것 '숙제'를 하기 위해 온 생애를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숙제'를 하다 뜻하지 않은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태양계 개발'을 통해서 인류가 지구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멀지 않은 미래에 실현하게 될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달'이 될테고, 그 다음엔 화성, 수성, 그리고 커다란 행성의 위성들에도 정착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외계인'과도 조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광활한 우주도 비로소 '우주마을'로 축소되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칼 세이건의 꿈이 담긴 <코스모스>에 오롯이 새겨진 것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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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동물대탐험 3 : 반가워 제돌아 - 돌고래와 바다 친구들 최재천의 동물대탐험 3
최재천 기획, 박현미 그림, 황혜영 글, 안선영 해설 / 다산어린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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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인걸까? <성경>에 따르면 조물주께서 온세상에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고서는 "네가 세상 모든 것들의 주인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훗날 인간들은 이를 근거로 온세상을 제것인 것마냥 제멋대로 행동한 결과는 '지구온난화', '해수면상승', '기후위기', '미세먼지', '미세플라스틱', '방사능오염수 방류' 등등 한마디로 전지구적인 재앙을 초래하고 말았다. 세상 그 어떤 동식물도 전지구적인 파괴를 일삼지 않는데, 오직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신들의 터전인 자연환경을 망치고, 생태계를 파괴하며, 결국은 동족인 인간마저 스스로 절멸시켜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는데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황송한 표현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잠시, 책 내용으로 들어가서, 3편에서는 '개미박사(최재천)'가 바닷속에서 '제돌이'와 재회하는 장면이 나오게 된다. 1~2편에서 밀림을 탐험하며 '의태'와 '진화'에 대해서 알아보던 동물탐험대원들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해양생물의 신비로움'에 대해서도 연구하게 된다. 그렇게 수많은 동물들을 만나다가 '제주 남방큰돌고래'인 제돌이와 재회하게 된다. 제돌이는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쇼를 공연하던 남방큰돌고래로 많은 인기와 사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넓은 바다를 헤엄쳐야 할 돌고래가 좁은 수족관에서 지내는 것이 '동물학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이 시민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고, 더구나 제돌이의 경우에는 '불법포획'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제주도 바다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자칫 적응을 못하면 어떡하느냔 걱정도 했었지만, 체계적인 관찰보호를 거쳐 바다에 방류한 탓에 무사히 돌고래 무리와 합류하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 책이 꾸며지게 된 것이다. 특히, 최재천 박사님이 직접 제돌이 방류 프로젝트에 참여한 탓에 더욱 생생하게 그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시, 제돌이와 함께 들어간 바닷속의 풍경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멸종위기종인 '귀신고래의 사채'가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사채속에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가 널려 있는 모습은 이 책의 주제와는 상관없이 '비극'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어찌 하다 고래의 뱃속에 '쓰레기'가 가득했고, 깊은 바닷속에서도 인간들이 먹고, 쓰다가 버린 '쓰레기'들이 그득했던 것일까? 그건 어리석은 인간들이 돈 몇 푼 아낄 요량으로 바다에가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린 탓이다. 그렇게 버린 '쓰레기'를 해양생물들은 아무 것도 모른채 먹은 것이다. 그리고 뱃속에서 소화도 되지 않고 배출도 되지 않고서 죽을 때까지 '몸속'에 담고 다니게 된 셈이다. 그렇게 소화가 되지도 않는 쓰레기를 먹은 해양생물들은 배가 고픈데도 배가 더부룩하니 불러서 더는 먹지 못하고 굶어죽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왜 인간들은 바다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일까? 첫째는 '비용절감' 때문이고, 둘째는 땅속에 매립할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냄새도 나지 않고' 감쪽같이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과거 서울시민들이 쓰레기매립장으로 쓰던 '난지도'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요즘 어린이들은 '서울의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현재 '상암 하늘공원')를 모를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함부로 버린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참으로 궁금하기도 할 텐데, 대부분은 '쓰레기소각장'으로 들어가 연기가 되어 버리지만, 산이나 강, 그리고 계곡 따위에 함부로 몰래 버린 쓰레기들이 장마나 홍수 때 빗물에 쓸려 바다로 흘러간 뒤에 바다밑바닥에 쌓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바다에 쓰레기를 몰래 버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그렇게 버린 쓰레기들이 큰바다에서 다시 모여 거대한 대륙과 같은 '쓰레기섬'이 되기도 한다는데, 머지않은 미래에는 바다생태계가 망가져서 인류는 결국 굶주리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는 메시지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인류 종말을 대비한 씨앗저장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인류가 재앙에 가까운 일을 겪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 노르웨이령 스피츠베르겐섬에 '스발바르 국제 종자 저장고'를 만들었는데, 세계 100여 개 기관에서 100만 종 이상의 씨앗을 현재 저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씨앗들은 '지구 최후의 날'에 개봉할 예정으로 현재는 꽁꽁 잠겨있고, 연구목적을 위해서만 아주 조금씩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저장고의 문을 여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인간은 더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해온 행동들을 볼작시면 당연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망가뜨린 지구의 자연환경을 되살릴 수 있는 '지혜보따리'도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면 좋겠다. 더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쭐함은 버리고, 인간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세상의 모든 생물이 다 소중하다는 진실을 깨닫고 행동한다면 지구의 미래는 한층 밝아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로 절박할지라도 우리의 후손들도 아름다운 자연환경속에서 깨끗하게 살게 해주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과 동물은 쫌 '따로따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 인간은 '도시'에, 동물은 '야생'에 따로따로 말이다. 물론 '전원풍경'이 펼쳐진 자연과 마을이 어우러진 한적한 시골마을도 있겠지만, 농사와 어업, 그리고 산촌 지역을 제외한 별도의 '야생동물보호구역'을 마련해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꾸어나가며 인간들의 손길이 닿지 않고 발길이 머물지 않은 자리를 만들면 분명 효과적일 것이다. 이제 인간만을 생각하다가는 모두가 다함께 끝장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을 최고조로 올려야 할 것이다. 안 그럼, 정말 큰일이 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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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3
아서 C. 클라크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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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의 마무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목성이 스스로 빛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태양계에는 '2개의 태양'이 존재했고, 또 하나의 이름은 '루시퍼'라 불렀다. 왜 악마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좀 나중으로 미루고...

 

  실제로 목성이 '항성(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이론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목성은 '행성'치곤 상당히 큰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천문학자들은 목성의 질량이 조금만 더 무거웠다면 태양계는 '쌍성계'가 되었을 것이고, 우주 곳곳에는 '쌍성계'가 훨씬 더 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태양처럼 질량이 작은 별이 홀로 빛나고 행성도 이렇게나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특별한 경우라고 지적하곤 한다. 하지만 태양계가 '쌍성계'였다면 지구에 이렇게나 많은 생명이 태어나긴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면 생명은 '밤'에 더 많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이 한낮보다는 달빛이 은은한 밤에 '잉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등동물'일수록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잠을 자야 하는데, '두 개의 태양'이 번갈아 뜨게 되면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는 '밤의 시간'이 줄어드는 탓에 생명이 번성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지적하는 과학자들도 많다. 더구나 '야행성 동물'의 경우엔 잠보다 더 중요한 '먹잇감 구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어 '동물의 번성'에 큰 차질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생태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질 것이 분명하단 말이다.

 

  그런 까닭에 엉뚱한 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번성하게 되었다. 바로 목성의 위성이었던 '에우로파(유로파)'다. 이제는 목성이 행성의 지위에서 승격을 하여 '항성(태양)'이 되었으니, 에우로파도 당당히 '행성의 지위'를 얻게 된 셈이다. 2권의 초반에 중국의 우주선이 에우로파에 '연료보급'차 착륙을 했다가 괴생명체에 의해 우주선이 파괴되고 유일한 생존자는 '그 사실'을 알리고서 조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비록 소설속 이야기지만 '에우로파'에 생명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셈이다. 그러다 목성의 주변에 있던 '티코석판(TMA-1)'이 불현듯 사라졌다가 목성을 '새로운 태양(루시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행방불명이 되었던 데이비드 보먼이 존재를 나타냈고, 새로운 메시지도 전달했다. [이 모든 행성들은 에우로파를 제외하곤 당신들 것입니다. 에우로파에는 착륙을 시도하지 말길.] 

 

  과연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3권의 시작은 '루시퍼 탄생'으로부터 50년이 훌쩍 지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 '에우로파'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그리고 왜 하필 50년 뒤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던 걸까? 이런 이야기의 맥락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상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1986년에 지구를 찾아왔던 '헬리 혜성'이 76년 뒤인 2062년에 다시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전편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헤이우드 플로이드 박사가 바로 '헬리 헤성'에 직접 착륙해서 탐사를 하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실제로 2003년에 일본 탐사선 '하야부사'가 소행성에 착륙해서 시료를 채취한 뒤 2010년에 성공적으로 귀환한 일이 있었기에, 소설에서 '헬리 혜성'에 착륙해서 탐사를 마치고 유유히 떠나는 장면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비록 하야부사도 무사귀환에는 실패하고 우여곡절 끝에 시료를 채취한 '캡슐'만을 무사히 보낸채, 지구의 대기권 속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지만, 앞으로 더욱 기술발전을 이룬다면 '혜성탐사' 정도는 우아하게 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암튼, SF소설 <206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혜성탐사를 무사히 마친 플로이드 박사가 자신의 손자인 크리스 플로이드가 불시착한 '에우로파'로 구조를 떠나면서 이야기가 더욱 흥미진진해지게 된다. 과연 '접근금지명령(?)'을 보낸 에우로파에서 무사히 구조작전이 성공적으로 마치게 될 것인가? 이쯤해서 태양계의 새로운 별 '루시퍼의 등장'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사실 태양계의 이름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족보'에서 따오기 마련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말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성경'에 나오는 악마(사탄)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다니..과연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

 

  사실, '루시퍼'는 하느님을 따르는 대천사의 이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를 짓고 '타락천사'가 되었으며, 하느님의 명을 거역한 악한 정령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탄'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목성'을 스스로 빛나게 만든 '티코석판'이 어떤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복선을 깔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에우로파 행성'은 진정한 악의 소굴이 될 거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곳에 불시착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서 클라크가 '사악한 악령'을 외계생명체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락천사(루시퍼)'의 다른 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루시퍼가 왜 천사의 신분으로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지 말이다. 하느님은 죄 많은 인간들을 벌 주고자 했단다. 그 명을 받은 천사가 바로 루시퍼였고 말이다. 그런데 명을 받고 내려와 벌을 내리려고 하니, '죄를 받아 마땅한 인간들'이 아니라 '불쌍한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루시퍼의 눈에는 말이다. 그래서 불쌍한 인간들이 '회개'를 하고 벌을 면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했는데, 그것이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가 되어 루시퍼가 '대신' 벌을 받게 되었더란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루시퍼는 '타락천사'가 아니라 죄 많은 인간들 '대신' 벌을 받은 메시아(구원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와 그닥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이런 '루시퍼'를 악마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우주를 방랑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더욱 흥미를 더해간다. 곧 마지막 4권의 이야기도 풀어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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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6
헤르만 헤세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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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친숙한 헤르만 헤세의 소설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것은 <데미안>일 것이다. 하지만 보다 친숙한 작품을 꼽으라면 <수레바퀴 아래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그의 소설이 유독 '청소년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고, 이 책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딱 그 시기의 꿈 많은 소년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데미안>속 주인공 '싱클레어'도 소년의 모습을 엿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는 유년기를 거쳐 성인으로까지 성장하고 말지만, '기벤라트'는 안타깝게도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넘지 못하고 꿈이 좌절되는 경험이 적나라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방황하는 청소년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된 까닭은 작가인 '헤세'가 그런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이 바라는대로 '자신의 꿈'을 접고 맹목적인 엘리트 코스(출세길)를 따라가다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자살'을 시도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작가로 크게 성공한 뒤에 '자전적인 소설'인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필했고, 이 책을 통해서 어린 시절에 겪었던 아픔을 정화시킬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접한 수많은 청소년들도 은연중에 '공감'을 하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이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자살이 '선진국 중, 1위'라는 비극적인 현실속에서 이 책은 분명 달리 읽혀야 마땅하다고 보여진다.

 

  책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시골마을에 살던 한스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러자 마을의 어른들은 한스를 자랑거리로 삼았고, 그가 '엘리트 코스(졸업 후, 교회 목사가 될 수 있는 명문학교에 진학)'를 밟아 훌륭한 어른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당연히 한스의 아버지도 한스가 몰락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미 정해진 출세길을 따라 얌전히 순응하기만 하면 큰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할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대와 믿음이 어린 한스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분명 '목사'가 되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삶을 보장받을 것이며,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멋진 삶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세상에 대해 이제 겨우 눈을 뜬 어린 학생으로서 진정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인지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한걸음씩 걷다 보면 답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하라는 공부'만 묵묵히 할 뿐이다. 정작 한스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낚시를 하고 또래 친구들과 수영을 하며 어울리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성적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공부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일과의 거의 대부분을 '공부'에만 쏟는 생활에 지쳐가는 평범한 청소년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여유를 즐기지 못하고 긴장된 하루하루를 보내다 입학하게된 '신학교에서 지내는 삶'은 엄격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 한스는 자주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스는 '헤르만 하일러'라는 친구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갑갑하고 답답한 신학교에서 보내는 나날들 가운데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던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일러는 좀 색다른 친구였다. 물론 어려운 입학시험을 치루고 들어올 수 있는 명문학교였기에 하일러도 수재임에 틀림없었지만, 하일러는 억압적이고 복종만을 강요하는 학교의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시인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하일러의 성적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학교측에서는 하일러를 '문제학생'으로 낙인 찍고 아무도 그와 어울리지 못하게 조치를 취한다. 이는 한스에겐 끔찍한 형벌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문제아'라면서 어울리지 못하게하다니 말이다.

 

  결국, 하일러는 학교의 규칙을 밥 먹듯이 어기다 퇴학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한스는 차마 그러지 못한다. 왜냐면 아버지와 마을 어른들의 기대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스도 결국엔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심신이 지쳐서 더는 학업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스는 퇴학 아닌 퇴학을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고서 말이다. 이런 취급을 당한 한스의 아버지는 한스를 마을의 공장에 취직 시켜버린다. 왜냐면 집안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아서 '밥벌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스는 어렵사리 취직한 공장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공장일의 노동도 자신이 바라던 일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한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스는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비록 한스 스스로 '자신의 꿈'을 말한 적은 없지만, 그가 공부하면서, 학교에 다니면서, 그리고 아름다운 엠마와 잠시나마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리고 적성에 맞지도 않는 공장엘 다니면서도 한스에게 한줄기 위로를 해준 것은 한적한 시골마을을 품고 있던 자연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한스의 꿈이 무엇인지 무엇인지 물어봐주지 않았기에 한스도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스는 그렇게 아름답게 여기던 자연의 품으로 홀연히 떠나고 만다.

 

  과연 '누가' 한스를 죽음으로 내몰았던걸까? 아니면 한스는 나약한 자의 최후인 '자살'을 하고 만 것일까? 소설에서는 그의 죽음이 '타살'인지 아닌지 젼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스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꿈을 배우는 학교가 아니라 '출세(성공)'를 위해서 맹목적으로 '공부하는 기계'가 되고 마는 신세가 한스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과연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대로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왜 학교는 학생들에게 '꿈'을 가르치길 포기하고, 오직 '국영수 만점'만을 강요하는 걸까? 정작 '국영수 만점'을 달성한 뒤의 삶을 가르쳐주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사람은 저마다 '개성'과 '재능'을 타고났다고들 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가 바라는 정답은 '명문고-명문대-대기업-아파트장만-안락한노후' 뿐이다. 그토록 수많은 직업과 다양한 개성이 있는데도, 가장 바람직한 삶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이 온국민이 딱 '저것' 한가지만을 바랄 뿐이다. 과연 저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보장'이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대한민국 행복지수는 너무나도 형편없다. 그런데도 왜 '저런 틀에 박힌 삶'을 강요하는 걸까?

 

  이제는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정도는 어린이들도 쉽게 알 수 있다. 온가족의 웃음소리가 넘쳐나야 행복하다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오직 '명문대 입학', '대기업 입사'만이 유일한 행복이라고 외치는 사이, 우리 사회는 어느 새 '웃음꽃'을 잃어버린 슬픈 사회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맞이한 것은 '초고령화 / 저출생 사회'가 아니냔 말이다. 행복한 아이를 낳아 기를 자신을 '잃어버린 세대들'이 아니냔 말이다. 무한 경쟁을 추구하는 이토록 슬픈 비극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분명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웃음을 되찾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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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동물대탐험 2 : 나무늘보의 노래 - 달라서 좋아, 동물들의 생존 전략 최재천의 동물대탐험 2
최재천 기획, 박현미 그림, 황혜영 글, 안선영 해설 / 다산어린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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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각자 '자기만의 방법'으로 진화를 했다. 1권에서는 '의태'를 다루면서 생물들이 서로 '흉내내기'를 통해서 생존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는데, 2권에서는 '공생'을 다뤄며 생물의 다양성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생물은 '살아남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왜 살아가려고 하는지는 잠시 접어두어야 '생물학'을 보다 깊이 생각해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생물들의 생존전략이 얼마나 다양한지에만 좀더 집중을 하면 좋겠다.

 

  다시 돌아와서, 자연환경은 생각보다 아늑하고 포근하지 않다. 그렇기에 보다 '효율적인 생존'을 위해 모든 생물들은 저마다 '생존전략'을 짠다. 이를 테면, 육식동물인 사자는 이빨과 발톱을 날카롭게 발달시켰고, 초식동물인 얼룩말은 다리를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발달시켜서 '생존율'을 높였다. 하지만 '에너지효율'만 놓고 본다면 몸집을 불리는 것이 '체온유지'에 유리하기 때문에 몸집이 큰 동물이 생존율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몸집을 키우다보면 '급격한 환경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다. 그리고 '먹이가 풍부한 따뜻한 곳'을 서직지로 삼으면 생존율은 높아지겠지만, 자신을 먹이로 삼는 '포식자'도 덩달아서 늘어나기 때문에 생존율이 급감하기도 한다. 그래서 '먹이가 적은 극한 환경'을 서식지로 삼기도 하는데, 먹을 것이 부족하고 살아가기에 부적합할 정도로 춥거나 건조한 지역이라서 '포식자'가 현저히 줄어드는 이점이 있어, 의외로 '생존율'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생물은 저마다 '살아가기' 위한 독특한 전략을 세우고, 주어진 자연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이 또한 오랜 시일이 지나고 나면 '진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이렇게나 다양한 생존전략 가운데 '공생'은 복잡한 생태계를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이른바 '꽃과 꿀벌의 공생관계'처럼 서로 다른 생물끼리 협력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꿀벌'이 사라지면 결국엔 '꽃'도 사라지고, 최종적으로는 '인간'도 더는 살아갈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장 최근에 겪은 '코로나 팬데믹'도 마찬가지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숙주로 삼는 '천산갑'을 사람들이 자주 잡아먹게 되면서 '인간'도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원래는 '감염고리'가 없던 별개의 개체였던 야생의 '천산갑'과 도시의 '인간'이 어찌하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다보니 복잡한 생태계의 그물로 얽히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모든 생물들의 생존전략 가운데 하나인 '공생'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만 끼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꽃과 꿀벌', '꽃과 나비', '개미와 진딧물' 등등과 같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의 협력적인 공생관계도 생태계는 허용하지만, '개미와 진딧물'의 공생관계에서 피해를 보는 '식물의 관점'에서 보면 얻는 것도 없이 빼앗기기만 하는 '기생관계'도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미와 진딧물'이 번성하게 되면 식물은 결국에 말라죽고 만다. 야생에 사는 '천산갑'이 인간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품고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었다. 애초에 '감염고리'조차 형성되지 않았던 관계로 '우연히' 천산갑과 인간이 마주치더라도 천산갑에 살고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산갑이 인간에게 '특효약'이라는 소식이 퍼지면서 인간은 야생에 머물던 '천산갑'을 도시의 시장에서도 판매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그렇게 '가깝게' 자주 접촉을 하다보니 '코로나바이러스'가 천산갑에서 인간에게까지 감염을 시키는 '연결고리'를 만들게 된 셈이다. 그런데 천산갑을 숙주로 삼고 있을 때에는 크게 위험하지 않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을 수 있게 되자 '면역체계'를 형성하지 못한 인간들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인간도 '생태계의 그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사슴을 습격하는 늑대가 골첫거리가 되자 늑대를 몽땅 사냥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포식자'가 사라진 사슴들은 '개체수'가 불어나 숲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숲이 황폐해지자 사슴도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사슴을 보호하려고 늑대를 사냥했던 것인데, '인간의 개입'으로 늑대가 사라지자 결국엔 보호하려고 했던 사슴도 사라지고 만 셈이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깨달은 '인간'은 늑대를 복원하였고, 사슴의 개체수가 적절히 유지되자, 숲도 다시 살아나는 '생태계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자연환경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생물의 다양성을 망가뜨리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은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생물종을 멸종하지 않도록 '인간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된 셈이다.

 

  물론, 인간도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개발하고, 인간이 살기에 알맞은 환경'을 조성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동안에 너무 '인간중심적인 개발'만을 앞세운 탓에 야생의 자연속에서 살던 동식물들이 살아갈 터전을 잃고 '인간이 사는 곳'으로 침범(?)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을 황폐하게 만든 탓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환경을 황폐하게 만든 탓에 우리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특정한 생물종'을 절멸시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테면, 함부로 바다에 버린 쓰레기들이 모여 태평양 한가운데 거대한 '쓰레기섬'이 웬만한 대륙의 크기 만하게 커져서 '바다생태계'를 오염시키는 주범이 되었고, 그 섬에 모인 플라스틱이 더 잘게 분해되면서 '미세 플라스틱'으로 인해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생물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바다거북의 콧구멍에 들어간 플라스틱 빨대를 기억할 것이다. 심지어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고래의 뱃속에 소화를 시키지 못한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잔뜩 들어가서 죽은 사체를 본 일도 있을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심각한 문제는 그저 '빙산의 일각'만큼일 것이다. 그 아래 잠겨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생태계 파괴'를 일삼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이 책은 생물학을 다룬 어린이책이고,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파괴'로 인해 벌어지는 위험성까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모님들이 먼저 읽고서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할 '배경지식'으로 삼아 '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 왜 중요한 일인지 설명해주면 좋을 것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지식'은 없는 법이다. 그리고 '배경지식'을 많이 알고 있으면 있는만큼 세상은 보다 더 넓어보이기 마련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훌륭한 독서법은 이책과 저책 '사이'에 숨겨진 지혜를 찾아내는 '남다른 안목'을 키우는 방법이다. 흔히 말하는 '행간'을 읽어내는 방법과 같은 것이다. 그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생물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 독서'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 말이다. 앞서 설명한, 이책의 '지식'을 저책의 '지혜'로 삼는 통섭의 학습법을 숙련시켜야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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