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도라 문, 이빨 요정을 만나다 이사도라 문 시리즈 13
해리엇 먼캐스터 지음, 심연희 옮김 / 을파소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사도라 문, 이빨 요정을 만나다>  해리엇 먼캐스터 / 심연희 / 을파소 (2022) [원제 : Isadora Moon meets the Tooth Fairy(2021)]

[My Review MMCXXXV / 을파소 14번째 리뷰] 어린 시절에 '치과'에 가길 좋아하는 어린이는 없다. 좋아하는 어린이가 있을 수도 있다고? 그렇다면 걔는 어린이가 아니다. 어린이가 '전기드릴'을 좋아할 수는 있어도, 그 드릴로 자기 이를 구멍 뚫고, 긁어내고, 갈아내는 일을 견뎌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모님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치과에 발을 들여놓는 까닭은 딱 하나다. 달콤한 사탕? 아니다. 예쁜 간호사 선생님? 더더욱 아니다. 그건 바로 바로 참을 수 없는 '치통' 때문이다. 볼따구가 팅팅 부어 올라서 욱신욱신 거리는 것도 참을 수 없는데, 평소에 맛나게 먹던 음식조차 손에 댈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밀려올 때쯤이면 이젠 만사가 다 포기다. 배도 고파오지만, 그런 건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저 아프고, 또 아플 뿐이다.

그렇게 치과 '문턱'에서 30분, '의자' 위에서 30분 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어린이가 한두 명쯤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러다 치과 치료가 끝나고 통증이 가라앉게 되면 의외로 순순하지고 만다. 손에는 어김없이 달콤한 사탕을 꼭 쥐고 있고 말이다. 그래도 좀 의젓한 어린이라면 통증이 가라앉고 나면 '치료행위'에 대한 무서움이 사라지고, 치과선생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낼 여유를 찾게 된다. 그리고 좀 똑똑한 어린이라면 치과에 다녀온 뒤부터 '이닦기' 등 관리에 더욱 철저히 하기 마련이다. 물론 세상에 그런 어린이는 흔치 않지만 말이다.

이사도라가 이번에 만난 에피소드는 바로 '이빨'이 빠지고 '새이빨'로 가는 첫 경험 이야기다. 아, 사람의 경우엔 '이'로,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이 경우엔 '이빨'로 표현해야 한다. 아시다시피 이사도라 문은 '뱀파이어 요정'이므로 이빨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영어 표현으로는 'tooth'로 통일된 듯 싶다. 영어를 잘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어 예문을 살펴보면, tooth는 단수, teeth는 복수로 구분할 뿐, 사람이나 개도 모두 tooth로 쓰고, 우리 말로만 '치아'와 '이빨'로 구분했을 뿐이다. 암튼, 누구나 '젖니'에서 '간니'로 이갈이를 첫 경험할 때는 조금씩 흔들흔들 거리다가 쑥 빠지곤 한다. 흔히 자다가 그런 경우가 많고, 식사할 때 끈적이는 음식에 달라붙어서 빠지는 경우도 흔하다. 이사도라는 사과를 먹다가 빠졌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그건 '뱀파이어 전통'으로는 날카롭고 뾰족한 송곳니는 '뱀파이어의 자긍심'에 해당하므로 특별한 유리 상자 속에 넣어서 평생 간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정 전통'으로는 빠진 이빨은 베개 밑에 두고 이빨 요정이 가져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빨 요정은 이빨을 가져가는 대신 '요정 은화'를 선물로 두고 갈 것이고 말이다. 이사도라는 '아빠의 전통'을 따를 것인지, '엄마의 전통'을 따를 것인지 좀처럼 선택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사도라는 이럴 때 선택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 아빠를 따라 '뱀파이어 전통'에도 따라보고, 엄마를 따라 '요정의 전통'을 따라보고 난 뒤에 이사도라에게 딱 맞는 방법을 선택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사도라의 빠진 이빨은 '하나뿐'이었다는게 문제였다. 하나를 둘로 나눌 수도 없고, 더구나 이빨 요정이 가져가 버리면 다시는 되찾을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 와중에 이사도라는 자기 이빨을 가져간 이빨 요정이 그것으로 무얼 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이빨 요정은 그렇게 가져간 '헌 니'를 모아 반짝반짝 빛나는 궁전을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아빠가 반대 의견을 강력하게 냈다. 뱀파이어의 송곳니는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절대로! 그래서 이사도라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를 따르자니 '치과'에 가기가 무섭고, 또 요정의 전통을 따르지 않아서 실망할 엄마 때문에 고민이었다. 그렇다고 엄마를 따르자니 그 어떤 요정 이빨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이사도라의 송곳니를 그냥 넘겨주기도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어떡하지?

과연, 이사도라의 선택은 무엇일까? 결국 요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빨 요정'과 만나긴 해야 할텐데, 만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무척 궁금하지 않겠어 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과학이 문제일까? - 10대에게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왜 문제일까?
김동광 지음 / 반니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문제일까?] <왜 과학이 문제일까?>  김동광 / 반니 (2023)

[My Review MMCXXXIV / 반니 1번째 리뷰] <왜 문제일까?> 시리즈가 나왔었다. 벌써 2년 전이다. 독서논술쌤으로 지내다보면 이런 유형의 책은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신간소식'을 제때에 들을 처지가 못할 정도로 '현역'에서 은퇴한 선생이다보니 좀 발빠르게 챙겨서 읽지 못할 뿐이다. 한때는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을 주고 리뷰를 부탁할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리즈 책이니 틈틈이 읽어볼 작정이다. 암튼, 시리즈 책 목록을 훑어보니 초등 고학년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읽으면 좋을 내용으로 주제를 선별해 놓았다. 인문적 교양을 쌓으면서도 '통합교과'로 문이과 융합형 교과 연계가 되어 있어서, 학생들이 읽으면 '관심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끌어들여, 궁극적으로는 '사탐/과탐' 영역과 연관이 된 내용이기 때문에 학습에도 도움이 될만한 훌륭한 참고 자료로 가득했다. 나의 학창시절에도 이런 유형의 책들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면 '사탐/과탐' 영역을 단순히 암기하기에 그치지 않고 '비판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어서 학업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방법도 저절로 터득했을텐데 말이다. 옛날에는 그저 죽어라 외우고, 나중에 대학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서야 겨우 이해하는 느려터진 학습법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해박하고 친절한(?) 선생님이 계셔서 '코칭'이라도 제대로 받았더라면 좋으련만, 공부하다 생긴 '호기심'과 '궁금증'을 질문하면, 그 당시에는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걸 쓸데없이 왜 물어!"라는 대답과 함께 꾸중만 들었으니 말이다. 지금 내가 논술쌤이 되고 보니, 그건 그 선생님도 잘 몰랐기 때문에 '대답'을 회피한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왜냐면 나도 잘 모르는 걸 학생들이 물어보면 짜증부터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학생이 어떤 질문을 하든 다 대답할 수 있도록 이책저책을 탐독하고 있다. 그래도 모르면 '다음 시간'에 제대로 답변해주기 위해서 더 많은 책을 읽고 답을 찾으면서 말이다. 이건 '선생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학생을 칭찬해주지는 못할 망정 '핀잔'이나 '꾸중'을 하는 선생은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 책 <왜 과학이 문제일까?>는 과학이 인류에게 미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결코 외면해선 안 된다는 취지에서, 과학이 우리에게 일으킨 많은 문제들을 되돌아보고, '과학 지상주의'에 빠져들어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밝혀냈다. 더구나 오늘날의 과학은 '거대과학화' 되고, '상업화' 되어 꼭 필요한 과학을 발전시키기보다는 '돈(이익)'을 얼마만큼 벌어 들일 수 있는 과학연구인지부터 따지기 때문에 '첨단과학'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우리 사회는 '부자'를 위한 과학', '권력'을 위한 과학으로 되려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경향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고 말이다. 거기다 과학이라는 분야조차 '차별'이 심해서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차별도 심심찮게 폭로가 되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이 가져다주는 편리함과 엄청난 이득에 취해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불평등을 조장해서 선택받은 소수만을 위한 과학으로 치중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럼 과학으로 인한 문제들에는 어떤 예가 있을까? 먼저, 전쟁과 과학발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점이 우려스럽다. 아시다시피 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독가스'라는 대량살상무기이자 독성 화학무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맨해튼프로젝트'라는 '거대과학의 시작'으로 인해 핵폭탄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터뜨려 엄청난 인적 · 물적 파괴를 직접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과거의 전쟁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까지 목숨을 건 처절한 전투를 벌어야 해서 '전쟁의 위험성'을 피부로 느낄 수라도 있어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지만, 1차 · 2차 세계대전에서는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포탄과 폭탄, 그리고 독가스와 핵폭탄 같은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가진 무기로 전쟁을 치뤘기 때문에 전쟁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더 많은 인명살상을 결과로 겪고 나서야 '전쟁의 위험성'을 새삼 깨닫게 되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다 전쟁의 양상도 확연히 바뀌었다. 과거의 전쟁에서는 참전하는 '군인'만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전후방의 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총력전'이 벌어지면서 오히려 군인보다 '민간인'의 피해가 훨씬 더 커졌다는 것이다. 도시를 향해 쏘아진 '독가스'와 '핵폭탄'이 과연 누굴 죽였겠느냔 말이다. 아무런 대비도, 방비도 없이 민간인들은 그야말로 학살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도 과학은 전쟁의 시기에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왜냐면 적을 얼마나 많이 죽이고, 더 빨리 죽여서, 상대국을 무력화시켜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적의 심장부라고 여기는 곳이라면, 그곳이 전방이든 후방이든 가리지 않고 '선제타격'을 하며 상대국이 미처 대비하지도, 방비하지도, 그래서 '반격'하지 못하게 초토화시키는 것이 최우선 목표인 탓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군산복합체'를 만들어 전국민이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군대와 산업'이 결탁해서 최후의 하나까지 짜내서 상대를 섬멸시키려 총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이는 '거대과학의 탄생'을 실현시키고 만 셈이다. 개별적으로 연구해오던 '과학'에서는 꼭 필요한 연구도 하지만, 과학자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지만, '거대과학'으로 총력을 기울이려면 '엄청난 연구자금'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경제적 낭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분위기로 몰아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연구자금'만큼 '성과이익'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한 나라의 경제가 휘청거리게 만들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경제위기(?)를 감수해낼 국민들이 과연 있을까? 그렇기에 거대과학을 추진하는 정부에서는 '이익이 날 만한 과학연구'에만 연구자금을 몰아주는 경향을 띠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꼭 필요한 '기초과학연구'에는 성과이익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에 연구자금이 말라가고, 당장 눈앞에 큰 이득을 가져다줄 안정적이고 확실한 연구에만 엄청난 자금을 지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과학연구가 먼 미래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거대과학화'된 과학연구자들은 인류에게 꼭 필요한 생명과 안전, 그리고 일상의 행복을 가져다 줄 '연구성과'까지 특정 국가와 기업에게 '로열티'와 '지적재산권'을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물론, 특허와 같은 '재산권 소유'는 당연히 보장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엄청난 연구자금을 투자해서 '신약'을 개발했는데, '공짜약'으로 무료배포할 수는 없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제약회사의 지적재산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1회 투여' 비용으로 1억 원이라는 고액을 책정했다면 어떨 것 같은가? 이런 식이라도 '재산권 보장' 운운할 수 있을까? 이런 조치는 한마디로 '돈 없는 가난한 환자들'은 신약조차 써보지 못하고 그냥 죽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기업이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돈장사를 하는 것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느냔 말이다. 이런 예는 에이즈, 백혈병,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그 실태를 아주 생생히 겪어보았다. 과연 앞으로도 '환자의 생명'을 두고 부자와 빈자로 구분 짓는 행태를 반복해야만 할까?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도, 투자금 회수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이익을 챙기는 선을 넘어서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연구 개발'로 나온 신약을 효과적으로 처방하기 위해서 국가가 나서서 '건강보험'을 제공하는 형태로 치료방법이 발견되는 즉시, 그 혜택도 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기 때문에 '국민 모두의 관심'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온 국민의 관심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은 또 있다. 바로 '과학계에도 여전한 불평등' 때문이다. 특히, '첨단과학'이 발달 할수록 어렵고 복잡한 '정보'를 제대로 이해하고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과학은 점점 발전하는데, 그로 인해서 기존의 세대는 점점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 나온 신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고, 그 기회를 잘 살리기 위해 '정보교육'까지 제공한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해서 사회적 불평등은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닌, '빈부격차' 때문이다.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들은 정부가 첨단기기를 '공짜'에 가깝게 싸게 제공하고, 그 기기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무상교육'을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은 그런 '기기'를 쓸 시간적 여유도 없고, 그런 '교육'을 들을 시간에 추가근무수당을 챙기기 위해 일터로 나가는 일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할수록 '빈부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은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부자들만을 위한 과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게 문제가 된다. 여기에 더해 '인종차별', '여성차별'은 아직도 과학계의 평등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어떤가? 왜 과학이 문제가 되는지 여실히 보이지 않은가? 우리는 과학이 발전할수록 더 풍요롭고, 더 편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첨단과학이 가져다주는 풍요와 편리함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제공될 뿐이고,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의 일상은 더 빈곤하고, 더 불편한 진실만 마주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삼성 반도체가 수출 호황을 맞았다고 하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자랑스러워 한다. 하지만 삼성 반도체가 아무리 많이 팔린다고 해도, 내가 '삼성전자 주식'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이상 그닥 좋은 일도 아니다. 물론 한 기업이 성장하면 국가경제도 성장하는 것이고, 그러면 국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질 거라는 '낙수 효과'를 기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낙수 효과'를 실현시킨 정부는 전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기분만 좋을 뿐이다. 하지만 그 좋은 기분이 나의 삶의 질을 직접적으로 높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나라의 경제는 성장했는데, 가난한 나의 삶은 더 가난한 방향으로 추락할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부자들만 더 큰 부자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전체적으로 후퇴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민의 세금으로 발전시킨 과학적 성과가 제대로 '나의 삶'을 풍족하고 편리하게 만들고 싶다면 '비판적 사고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과연 이런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흰>  한강 / 문학동네 (최신 개정판, 2025) [개정판 (2018) / 초판 난다출판사 (2016)]

[My Review MMCXXXIII / 문학동네 26번째 리뷰] 한강 소설을 읽을 때마다 '죽음'과 마주하는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라는 표현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게 <작별하지 않는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 소설 전편에 해당하는 문구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한강은 '죽지 마라'고 말한다. 수많은 죽음을 묘사하면서 그 어둡고도 찬란한 미사여구를 흐드러지게 썼으면서도 죽지 말고 살라고 말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그랬고, <채식주의자>에서도 그랬고, <바람이 분다>, <희랍어 시간>...내가 읽은 모든 한강 소설에서 무섭고 힘들겠지만 꿋꿋하게 이겨내고 살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미학이라도 써내려는 듯이 '죽음'을 그토록 아름다운 문구로 꾸며 놓고서 말이다. 차라리 끔찍하게 써놓았다면 말이나 하지 않을 것을...

그리고 이 책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해설'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강 소설에 대한 '주석'을 달아 놓은 듯이 말이다. 그 첫머리에 한강은 소설에서 '질문'을 던진다고 하였다. 특별한 '답'을 요구하지는 않으면서 그저 담담하게, 때론 무심하게 '질문 공세'를 펼친다고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가 알아서 판단할 몫이라고 했지만, 그조차 급할 것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순간 조급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에 제대로 답을 찾기 힘들 거라면서 차분하고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 듯 질문에 답을 하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

나는 그동안 한강 소설을 읽으며 '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모양이다. 한강의 소설은 '이런 책'이며, '저렇게'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이니 '그런 답'을 찾았다면 옳게 읽은 셈이라는...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누가 보더라도 뻔한 답을 찾아야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인냥 열심히 답을 찾았다. 물론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인 셈이다. 애초에 뻔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을 곱씹어보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인데, 어리석게도 난 그간 헛되게 읽었던 셈이다. 그럼 한강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는 애초에 죽음을 피할 순 없다. 그렇다고 죽어 마땅한 삶 또한 없으니 '어떤 삶'이든 살아보라. 삶은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함이 아니다. 내 삶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모두'가 찬란한 삶이다. 그러니 죽지 마라! 죽음은 슬픈 것이다. 감당하기에 너무도 비통한 슬픔이다. 그러니 살아라! 찰나와 같이 스치듯 지나는 삶일망정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그러니 죽지 마라! 아무리 힘들고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진저리를 치더라도 삶에는 가치가 있다. 그러니 살아라! 스치듯 지나는 짧은 삶일망정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모두 기쁨일지니...

<흰>의 첫머리에도 단 두 시간 남짓한 삶과 마주해야 했다. 산달이 다 차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젊은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 한적한 시골에서 남편마저 직장에 있던 그 순간에, 모진 산통을 견디고서 갓 지은 배냇저고리를 검붉게 물들인 채 한 시간만에 겨우 두 눈을 뜬 갓난아기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 본 젊은 엄마의 첫 아기는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한 삶을 살다 온몸을 휘도는 고통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한 젊은 엄마는 홀로 싸늘히 식어가는 갓난아기의 눈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한강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죽음'이었을까? '삶'이었을까? 첫 느낌은 죽음에 대한 애달픔이었다. 너무 짧은 생애이지 않은가 말이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을 갖춘 의료시설에서도 '팔삭동이'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더구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초산'이었을 젊은 엄마가 낳은 아기의 건강상태가 좋았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한 '삶'은 너무나 미약했기에 '죽음'이 압도적으로 강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강 작가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조차 담담하게 써내려 갔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꼭 감았던 두 눈을 뜨고 엄마를 바라봤다고 서술했다. 아직 뱃속에 더 있어야 할 순간일텐데, 너무 서둘러 나와서 미처 자라지 못한 상황이었을 텐데, 갓난아기는 힘겹지만 두 눈을 뜨고 따뜻한 엄마의 품속에서 엄마를 바라봤다고 했다. 그 한 시간 남짓한 '만남'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깊고 깊은 생각의 끝에 나는 '기쁨'이었다고 답을 찾았다.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난 그리 생각을 하였다. 조금만 더 느긋한 '만남'이었다면 그 기쁨을 더 오래오래 누릴 수도 있었을 테지만, 갓난아기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조금 서둘렀고, 그리 많은 준비를 갖추지 못한 서툰 만남이었지만, 젊은 엄마의 첫 아기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눴고, 아직 말도 배우지 못해서 뭐라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힘겹게 뜬 두 눈 가득 '기쁨'을 뿌려주고 서둘러 가버린 짧은 삶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한강 작가는 이런 애달픈 기쁨을 온통 '흰' 것으로 치장하였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수의, 그리고 하얗게 웃다는 말까지 흰 것들로 말이다. 세상의 모든 흰 것들은 '죽음'과도 같은 애달픔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 흰 것들은 삶의 '기쁨'을 관통하고 있고, 순간이든, 영원이든, 삶은 기쁨이니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소설들이라는 '질문의 의미'를 찾아냈다. 여전히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답을 떠올렸다. 길고 긴 여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내 삶도 기쁨이길 바랄 뿐이다. 아직까진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서 하나도 기쁘지 않지만 말이다. 내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볼 누군가가 없기에 그런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형용사의 쓸모 - 어른의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 66개의 단어들
김범준 지음 / 한빛비즈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형용사의 쓸모 : 어른의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 66개의 단어들>  김범준 / 한빛비즈 (2025)

[My Review MMCXXXII / 한빛비즈 174번째 리뷰] 우리 말에는 형용사가 많다. 그만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를 나타내주는 말이 많다는 건 '같은 사물'이라도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길게 부연설명을 하지 않고도 '형용사 단어' 하나만으로도 풍부하게 표현해 낼 수 있기도 하다. 그럼 자연스런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외국어에는 우리 말처럼 형용사가 다채롭지 못하다는 것인가? 그 흔한 외국어인 '영어'조차 잘 못하는 나로서는 가늠조차 하기 힘들지만, 외국인들의 입을 빌어서 표현하자면, "한국어는 '악마의 언어'다"라고 할 정도로 뒤치기(번역하기) 힘든 언어라고 혀를 내두르곤 한다. 오죽했으면 한강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었던 으뜸공로자는 다름 아닌 '뒤치미(번역가)'라는 말을 하겠는가. 한국 소설을 외국어로 뒤쳐내는 일이 무척이나 힘든 까닭이 바로 한국어의 어마어마한 '표현력'을 품고 있는 단어를 감히 외국어가 감당해내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에 '한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다름 아닌 '한류열풍'을 타고 'K-pop'이 큰 인기를 끌자 한국어의 묘한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 어떤 열성팬은 한국아이돌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제발 '한국어' 가사를 '영어'로 바꿔서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왜냐면 '영어 가사'로 바꿔 부르면 그냥 평범한 '팝송'이 되어 버려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란다. 당장은 '한국어 가사의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겠지만, 일단 뜻을 몰라도 '한국어 가사'만 들어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그 매력에 빠져서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며 노래 가사의 뜻까지 알고 나면 더 큰 매력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으니, 제발 '한국어'로 불러 달라고 간절히 애원을 하는 열성팬의 의견이었다. 왜 전세계 K-pop팬들이 그리 많은지 짐작케 해주는 단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도 '우리 말 실력'을 높이기 위해 <국어사전>을 끼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독서논술지도'를 하기 위한 노력의 한 모습이기도 했지만, 재미가 없었다면 <국어사전>을 소설책 읽듯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새롭게 알아낸 낱말들이 많았는데, 형용사의 순우리말 표현도 그때 알게 되었다. 형용사(形容詞)는 모양 형, 얼굴 용, 말씀 사를 쓰고 있기에, 곧바로 뒤치면(직역하면) '얼굴의 모양을 나타낸 말'이란 뜻이다. 여기서 얼굴이란 '사물을 대표하는 부위'를 뜻하는 것일테니,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는 말을 '형용사'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를 순우리말로 표현한다면 어떤 말이 딱일까? 바로 '모양씨'다. 모양이나 상태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는 핵심(씨)을 이보다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이런 매력을 깨우치니 다른 뜻도 함께 찾아보았다. 동사는 '움직씨', 명사는 '이름씨', 수사는 '셈씨', 조사는 '토씨', 부사는 '어찌씨'였다. 그리고 감탄사는 '느낌씨'다. 이렇게 풀어내니 딱딱하고 어렵기만 하던 '문법'조차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 책 <형용사의 쓸모>는 내게 그런 느낌을 다시금 불러 들였다. 그리고 또 하나를 떠올렸는데 인기 TV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던 <세대공감 올드 앤 뉴>였다. 어른 세대와 어린 세대가 쓰는 말이 서로 달라 '공감'하기 힘든 점이 없지 않았는데, 이 프로그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세대공감'을 이룸과 동시에 '우리 말의 매력'을 새삼스럽게 느꼈을 것이다. 그때 익혔던 낱말 가운데 '두루뭉술하다', '휘뚜루마뚜루' 같은 말은 지금도 계속 쓰고 있다. 이 책에서도 '늘차다', '결곡하다', '습습하다', '늡늡하다', '여낙낙하다' 같은 말은 평소에 써본 적도 없는 신선한(?) 말이어서 그 당시의 즐거움을 떠올리며 더 꼼꼼히 읽고 또 읽어나갈 지경으로 푹 빠지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 '늘차다(능란하고 재빠르다 :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온 경험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숙련도)'와 '여낙낙하다(성품이 곱고 부드러우며 상냥하다/미닫이 따위를 열거나 닫을 때에 미끄럽고 거침이 없다 : 내적인 힘과 외적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췄을 때 나타나는 특별한 품성)'는 뜻이 정말 마음에 흡족했다. 딱 내가 추구하는 삶에 어울리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낙낙하다'라는 말을 알기 전까진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겉으론 부드럽지만 속은 굳건한 사람이 되어 '어떤 어려움'에 닥치더라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멋진 사람이 어릴 적부터 존경스러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늘찬 삶'을 추구하면 아주 딱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 내가 아무리 '늘차고 여낙낙한 삶'을 살기로 노력하고, 그런 말을 즐겨 쓴들 이 '아름다운 말뜻'을 알아듣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앞에서도 번역하다는 '일본식 한자표현' 말고 순우리말로 '뒤치다'라고 썼지만, '뒤침'이라는 말뜻을 알고 있는 이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이 표현은 나도 어떤 책의 저자가 '일본식 한자 표현'을 대신할 '우리 말'을 찾으려다 '번역'이란 말을 대신할 우리 말로 '뒤침'이라고 하면 좋겠다는 뜻에 십분 공감해서 따라 쓰게 되었다. 딴에는 '번역'이란 말 대신 '옮김'으로 쓰고 있긴 하지만, 외국어 번역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단순히 옮겨 놓는 일보다는 훨씬 차원이 높은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꼭 맞게 노력했다'는 뜻을 담아 '뒤치다(엎어지거나 자빠진 것을 바로 잡아 정돈하다)'로 대신하면 좋겠다는 글쓴이의 뜻을 쫓아, 번역이란 말을 대신해서 '뒤침'이라고 줄곧 써왔다. 하지만 이런 '뒤침'이라는 표현을 알아채는 이가 없어서 부득이 '뒤침(번역)'이라고, '뒤치미(번역가)', '뒤치다(번역하다)', '뒤친(번역한)', '뒤칠(번역할)', '뒤쳐진(번역된)' 따위로 활용해서 혼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늘차고(오랜 경험과 노력으로 순련되고)', '여낙낙한(외유내강한)' 삶을 지향하며 살아갈 것이다라는 식으로 '섞어서' 쓸 수밖에 없을 것이 씁쓸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한 번 뜻을 품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며 살아온 나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굽힐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이 책은 단지 '우리 말의 숨은 뜻'을 새삼스레 밝혀내어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모양씨(형용사)가 갖고 있는 뜻을 활용해서 '인생의 교훈'을 찾고 지혜로 승화시켜 삶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지침서로 활용하였다. 그렇기에 이 책은 '지식'을 쌓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지만, '지혜'를 깨닫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참신함을 느낄 수 있으니 재밌기도 했지만, 그보다 '일상'에서 지혜를 깨닫게 해주었으니 더욱 희망으로 가득해졌다. 멋진 어른이 되고픈 이들에게 권하기에 딱 좋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이주, 왜 고국을 떠날까? - 책가방문고 23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4
루스 윌슨 지음, 전국사회교사모임 옮김, 설동훈 감수 / 내인생의책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더잘 시리즈 4]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4 : 이주, 왜 고국을 떠날까?>  루스 윌슨 / 전국사회교사모임 / 설동훈 / 내인생의책 (2010)

[My Review MMCXXXI / 내인생의책 11번째 리뷰] 이주(Migration)는 자기가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뜻도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자기가 태어나지 않은 나라'로 떠나는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국제이주'나 '이민'이란 말로도 쓰고 있으나, 정치적 · 경제적 · 종교적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자기가 살던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을 이야기하려 한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2010년 이전에 벌어졌던 '사례'가 소개되어 있으나, 이 글을 쓰는 2025년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사례를 예로 들어서 리뷰하고자 한다. 지금은 그때와 '다른' 이유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 나온 사례들이 지금 원만하게 해결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강제이주', '난민' 문제는 세계화 시대가 저물고 자국보호와 자국이익이 우선시 되는 '자국우선주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보다 훨씬 더 강도가 센 '극우화'로 인해서 이주민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하지 못할 정도로 천박해진 선진국들의 낯뜨거운 민낯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이런 문제들을 짚고 넘어가 볼까 한다.

우리는 '외국인'에게 얼마나 너그러울까? 가까운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는 '오버투어리즘'이 문제되고 있다. 엔저효과(?)로 인해 전세계 관광객들이 일본을 찾아갔지만, 시골 구석구석까지 탐방하듯 관광을 하며 소비를 하는 '한국관광객'과는 다르게 '다른 나라 관광객'들이 일본에서 주로 관광하는 곳은 '유명 대도시'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일본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엄청나게 늘었지만, 그로 인해 짭짤한 수익을 본 곳은 '도쿄' 같은 대도시 정도였고,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관광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적자'를 맞을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외국관광객들이 '값싼 일본돈'을 물쓰듯 펑펑 쓰고 돌아다녔지만, 그로 인해 수익을 창출한 곳은 '대기업 프렌차이즈' 정도였고, 일본 소상공인들에게는 별로 수익이 돌아가지 않아서 '서민 경제'는 빨간불이 켜진 셈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물가가 연일 고공행진을 하는 바람에 외국인들은 자국에 비해서 엄청 싸다며 엄청나게 소비를 했고, 그로 인해서 일본 서민들은 '월급'은 오르지 않고, '물가'만 올라서 가뜩이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고 있는데, 외국인까지 무지막지하게 들어와서 '싹쓸이'를 해버리니, 일본 국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빈곤한 삶을 살게 되는 일이 벌어졌단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는 '이중가격제'를 허가하고, 외국인 손님과 일본 지역 손님에게 '가격차등'을 두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외국인들은 이를 '차별'이라 느끼고 일본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버리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관광대국'으로 성장하겠다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관광객을 향한 차별정책을 추진하는 이상한 행보를 걷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외국인 혐오'다. 외국 관광객이 일본을 찾아오는 것은 좋지만, '일본문화'까지 존중하는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면 '사절'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고 있다. 이게 단순 관광객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본으로 '이주'를 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감을 부추기는 일이 매우 빈번해졌다고 한다. 물론 일본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각자 '고국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일본에서 경제활동을 하면서 살아가겠다면서 '민폐'를 끼치거나 '일본문화'를 폄하하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 이주민들에 대한 반감은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정도를 넘어서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대우'를 당연하게 감수해야 한다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EU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젠지세대 시위'는 점점 극우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큰 문제다. 물론 EU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극우열풍(?)'이 벌어지고 있는 듯 하고, 특히 10대, 20대의 젊은 층이 그런 '극우세력화'하려 시위와 폭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 우려스러울 정도다. 그렇다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극우화' 되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부담'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해 화가 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불똥은 외국에서 일자리를 찾으러 온 '외국 이주민'들에게 향하고 있다. 자국의 젊은이도 일자리가 부족해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외국 이주민이 들어와서 더욱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맞지 않은 점이 있다. 외국인이 구하는 일자리는 대부분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는 낮은 임금의 노동이고, 자국의 젊은이들이 원하는 일자리는 '고학력, 고임금, 사무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젊은 세대들이 '같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극렬하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국인을 너무 많이 받아들이게 되면 각국의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복지정책의 혜택'을 보게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젊은 세대가 폭발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내는 '세금'으로 외국인들을 먹여 살리는 정책에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세금인상'과 같은 정책을 쏟아내는 선진국에서는 더욱더 가열찬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프랑스가 그렇다. 엄청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세금인상안'을 내놓고, '복지혜택'은 줄이는 정책을 쏟아내자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다. 비단 프랑스뿐 아니라 '경제 적신호'가 켜진 나라들은 요즘 대부분 이렇게 성난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단다. 그리고 이들은 '외국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고 있고 말이다.

트럼프 2기 정부가 들어선 미국은 어떤가? 관세 전쟁을 해서 미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부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실상은 만만한 '동맹국'들을 후려쳐서 뜯어낸 돈으로 잔치를 벌이려 했던 것이 들통났다. 그러다 대한민국 이재명 정부가 굳건히 버티며 불리한 협정문에 끝까지 사인을 하지 않자 '조지아'주 이민관리국(ICE)이 대한민국 국민을 불법체포감금한 뒤, 강제추방을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불법'을 저지른 범죄자가 아니라 '미국인 일자리'를 늘려주기 위한 공장을 '대신' 지어주는 일을 하던 고급엔지니어들이었다. 그들은 '공장'이 완공된 뒤에 미국에 눌러앉아 살 사람도 아니고, 고국인 대한민국으로 되돌아올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이 한 일도 철저히 '미국인'을 대상으로 일자리를 늘려주기 위한 일을 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미국 당국은 이들을 '불법이민자' 취급을 했고, 미국에서 내쫓아 마땅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물론, 이 사건의 결말은 대한민국의 완승, 미국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이민정책'에 완벽한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바로 이민으로 성공한 미국조차 '이민'은 불편한 진실이었던 것이다. 이제 더는 '이민'을 환영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인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세계화 시대'가 저물고 '정상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끝나고 난 뒤의 '반세기 동안의 평화 번영'이 인류의 역사를 되돌이켜 봤을 때 '비정상'이었다는 말이다. 인류는 그만큼 폭력이 일상이던 삶을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그럼 앞으로 '이민'은 절대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가 펼쳐질 거란 예상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주'는 멈추지 못할 것이다. 왜? 평화가 지속되지 못하고 전쟁이 여기저기에서 터지게 되면 피치 못하게 '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현재에도 아프리카 · 아시아에서는 정치갈등이 심해서 혼란 끝에 '내전'을 벌이고 있으며, 오랜 갈등과 내전으로 인해 경제적 빈곤을 겪게 되면 '먹고 살기' 위해서 고국을 등지는 '난민'이 속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이주'를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고 있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분쟁으로 인해서, 경제적 빈곤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외국으로 향하는 이주민들의 발길'은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유엔난민기구(UNHCR), 국제이주기구(IOM) 등에서 이주 난민을 도와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런 국제기구조차 '재정 부족'을 호소하며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선진국들의 경제여건이 지금보다 더 나았던 2010년대에도 '재정 부족'을 호소했는데, 요즘처럼 선진국들조차 '재정난'을 호소하며 내부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니 얼마나 더 난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재정적 여유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재정 지원이 원활하다고 '난민 문제'가 단박에 해결될 일도 아니고 말이다. 유대인 경전 <탈무드>에도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줘라"고 말했다. 난민들에게, 이주민들에게 적은 임금이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주 효과적인 대책이란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가? 이 문제를 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결코 쉽지 않다. 인류 역사상 '일자리'는 늘 부족했고, 경제가 호황일 때에도 '외국인 차별'로 인해서 이주민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주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것은 '이주민들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게 어렵다는 말이다.

그럼 이주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훌륭한 이주민'에 대한 예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이 책에도 소개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가 전쟁을 피해서 미국에 이주했을 때, '외국인 이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했더라면, 오늘날의 미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또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정착했다면 오늘날의 초강대국은 아마도 '그 나라'가 아니었을까? 물론, 아인슈타인이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으니 '외국인 이주민'이었을지라도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뛰어난 인재'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지만, 평범한 외국인들은 입국을 거절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물론, 오늘날에는 그런 인재를 서로 영입하기 위해서 각국이 경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누가 얼마나 현명하고, 누가 뛰어난 업적을 남길 줄 알고 '골라서' 환영한단 말인가? 일단 누구라도 환영해서 받아들인 뒤에 잘 대우하고,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길 꾀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은 아닐까? 대만계 미국인 잰슨 황이 왜 대만이 아닌 미국에서 '사업'을 했겠느냔 말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이 '사업'을 벌이기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훌륭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인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결국 세계 모두는 '이주'에 대한 시선을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와 그런 사회의 차이는 앞으로 더욱더 큰 차이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뭐, 독일의 메르켈 정책의 사례처럼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