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정통 만화 삼국지 8 - 천하삼분(天下三分)
나관중 원작, 천웨이동.량샤오롱 글.그림 / WISDOM(위즈덤)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XXVII / 위즈덤(WISDOM) 8번째 리뷰] 결국 유비가 서촉땅을 얻었다. 유비가 삼고초려를 하고 제갈량이 내놓은 계책이 '천하삼분지계'였는데, 드디어 천하를 셋으로 쪼개는 형세를 갖춘 것이다. 조조의 북위, 손권의 동오, 그리고 유비의 서촉, 이렇게 천하는 셋이 되었다. 허나 갈 길이 멀다. 이제 막 '한 황실의 복위'를 위해서 주축이 될 거점을 마련했을 뿐, 여전히 '헌제'는 승상 조조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으며, 손권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이다. 유비가 나아갈 길은 이토록 험난한데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한 정도라니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유비에게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는 바로 '제갈량의 존재'다. 유비가 화려한 비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와룡선생'이라 불리던 제갈량과 함께 하면서부터였다. 공명이 있었기에 유비는 '적벽대전'에서 형주를 빌릴(?) 수 있었고, 형주를 발판 삼아 '서천땅'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천연요새와 다를 바 없는 '서촉'을 기반으로 방어를 굳건히 하고, 천혜의 보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힘을 기를 것이다. 이제 유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힘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유비에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유비는 유장에게서 서천땅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냥 얻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뺏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유비가 유장의 영내로 '군대'를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동천땅(한중)'의 주인, 장로 때문이었다. 장로가 유장을 공격했기에 홀로 막아낼 수 없었던 유장은 '유비군'을 구원군으로 요청한 것이다. 유장의 신하들 중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유비는 세상이 다 아는 효웅인데, 늑대(장로)를 몰아내고자 호랑이(유비)를 끌어들이는 격이라며 성문 앞에서 목을 메어 자살하면서까지 유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충신들도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유장은 '그릇'이 작았다. 그에게 너무도 과분한 충신들의 간언이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유비는 방통과 함께 서천땅으로 들어왔고, 유장을 대신해서 장로와 싸우러 갔다.

그런데 여기서 사달이 났다. 장로의 공격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선봉으로 나선 마초의 공격은 장비의 용맹과 공명의 지혜로 '우리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한중땅이 워낙 험준한 지형이었기에 수비에 치중하는 장로군을 서둘러 공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비는 유장에게 '병사와 병량미'를 요구했으나, 유장은 자신들도 가진 게 없다며 '늙은 병사와 쌀 약간'을 보내왔을 뿐이다. 이에 불같이 화를 내는 유비는 장로군을 뒤로 하고 유장을 치러 군사를 되돌렸다. 이런 대접을 받으며 더 싸우다가는 '병량'이 떨어져서 진퇴양란에 빠져 자멸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바로 유장이 틀어박혀 있는 '성도(서촉의 수도)'로 쳐들어가 유장을 잡고, 서촉을 차지했다.

애초에 이렇게 했으면 되었을텐데 왜 유비는 방통을 잃어가면서까지 뜸을 들였던 것일까? 어차피 유장을 공격(!)해서 서촉을 빼앗을 거였으면서 말이다. 그간 유비는 도겸에게서 '서주'를 얻을 때도, 유표에게서 '신야'를 얻을 때에도 도덕군자처럼 굴었다. 거듭 사양하고, 또 사양하는 행동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심지어 애써 얻은 '서주'를 여포에게 거저(?) 내어주고 자신은 더 작은 '소패'로 옮겨가기까지 했을 정도다. 더구나 노숙이 찾아와 빌려간(?) 형주를 되돌려 달라고 했을 때에도 '서촉'을 차지하면 당연히 돌려줄 것인데, 서촉의 주인이 자신과 '친족'이라서 쉽사리 빼앗을 수 없어서 그런다고 할 정도로 유비는 인의를 중시했다. 그런데 유장을 구원하러 왔다가 결국은 '서촉'을 차지하고 말았다. 이런 180도 다른 행보는 과연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여기에는 '도리'를 지키지 않은 유장의 태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는 과거에도 조조에게 사로잡힌 여포를 죽이라고 조언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여포와 손을 잡고 함께 조조와 싸우기도 했었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조조에게 빌붙어서 유비는 여포를 죽이라고 했을까? 그건 여포가 먼저 유비를 '배신'하고 위기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서주땅까지 주며 함께 조조와 맞서자고 했건만, 여포는 끝내 유비를 배신하고 조조의 공격에서 유비를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비는 끝내 여포를 죽이라 했다. 아무리 '인의도덕'을 중시하는 여린 공자처럼 굴더라도 유비는 '인의'를 저버린 사람에게까지 한없이 아량을 베푸는 멍청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유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비군이 왜 장로군과 싸우고 있었던가? 유장 홀로 장로와 맞서 싸울 수 없었기에 대신 싸워주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도와주워 온 유비를 돕지 않고, 뒤에서 '장난질'만 치고 있다면 불같이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즉, 유장이 먼저 '인의'를 무시하고 배신했으니 유비로서는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명분을 찾게 되자, 드디어 유비는 '결전'을 시행하고 서천땅을 차지한 것이다.

자, 이렇게 서천땅을 찾았으니, 동천땅(한중, 장로)도 찾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먼저 선수를 친 건 조조였다. 조조는 대병력을 이끌고 '한중'을 차지하러 왔던 것이다. 이때 방덕이 힘을 내어 막았으나 '양송'이란 간신배(특히, 뇌물을 유독 좋아함)에 의해 방덕의 목숨이 위급하자 조조에 투항을 해버리고 만다. 방덕이 투항을 하니 장로군도 더는 막을 수 없었고, 양송의 배신으로 인해 장로는 조조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러나 조조는 오히려 장로가 그간 '한중'을 잘 보살펴왔다면서 상을 내린 반면에 양송의 도움으로 한중을 차지했는데도 조조는 양송을 '배신자의 표본'이라면서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이렇게 한중을 차지하여 위세가 등등해진 조조군의 신하들은 내친김에 서촉까지 공략하여 유비를 단숨에 제압해버리자고 조언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조조는 군사를 물려버린다. 너무 욕심을 부리다 탈이 날 수도 있고, 오랜 전쟁으로 군사들도 기진맥진해 있으니 쉬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원소를 상대로 대승을 거둘 때의 장면과는 사뭇 다르다. 그 당시 곽가도 '속전속결'을 주장했고, 조조는 그에 따라서 원소의 아들들을 끝까지 쫓아서 전멸시켰었다. 그런데 왜 조조는 느긋하고 무뎌진 것일까?

그건 아마도 '적벽대전의 패배' 때문일 것이다. 조조는 적벽대전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그 전까지는 100만 대군을 움직일 때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를 거두며 가는 곳마다 기염을 토할 정도였다. 그런데 대패를 경험한 이후에는 행보가 매우 신중해졌다. 그리고 '의심'도 많아졌다. 그래서 공명도 조조의 '의심병(?)'을 이용해서 다음 번의 '한중공략'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조의 용병술도 상당히 둔해졌다. 예전 같으면, 서촉과 동오의 '양동작전'이 벌어졌다면, 대군을 반으로 쪼개서 신속하게 진퇴를 결정하며 적들을 능수능란하게 물리치는 용병의 귀재로서 손색이 없도록 화려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조가 많이 무뎌졌다. 한중을 차지하고서 굳이 대군을 되돌려서 '합비'를 치러 갔다. 공명이 형주의 일부를 손권에게 돌려주면서 '합비공략'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조조도 동오를 정벌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낼 작정이었기에, 장료에게 군대를 맡겨 합비를 공격하러 보냈으나, 손권이 먼저 선수를 쳐서 '합비'를 거의 함락직전까지 몰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장료의 군대'가 합류하고, '악진'이 기를 쓰고 지켜내니, 도리어 손권이 섣불리 깊숙이 공격해 들어갔다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때 '감녕'이 목숨을 걸고 지켜주지 않았다면 손권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렇게 손권군은 퇴각을 했고, 이때부터 '료라이~(장료가 온다)'라는 소리만 들으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손권이 동쪽에서 공격해 들어가자 공명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중공략'에 들어갔다. 애초에는 '촉오동맹'에 따라서 유비군이 위기에 처한 손권을 구하러 가야했지만, 공명이 그런 허튼짓을 할 까닭이 없다. 공명은 '한중'도 차지하고, 한중을 지키러 군대를 되돌릴 수밖에 없는 조조의 처지를 생각해서, 동맹국에게 도움도 주는 절묘한 방식으로 동맹의 의리를 지킨 셈이다. 자, 이때에는 '황충과 엄안'이 대활약을 펼친다. 칠순이 넘은 노익장을 제대로 보여준 것인데, '천탕산 전투'에서는 적장 하후연까지 두동강을 낼 정도였다. 그렇게 조조의 원군이 오기도 전에 황충과 엄안은 '정군산'까지 점령을 하면서 북위를 공략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한중'을 완벽하게 점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어쩌랴. 공명이 한중을 차지한 것도 잠시 '형주'에서 위기를 맞게 된다. 한중을 빼앗긴 조조는 '사마의'에게 점점 더 힘을 실어주고, 한편으로 동오의 손권을 자극해서 '형주'를 완전히 빼앗아 유비의 숨통을 조이도록 만들었다. 과연 유비는 '형주'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 당시 형주를 지키고 있던 인물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다음 권에서 알아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 소외된 영혼을 위한 해방의 노래, 라틴아메리카 문학 서가명강 시리즈 7
김현균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XXVI / 21세기북스 37번째 리뷰] 이 책을 읽다보니, 시인은 어두운 시대의 저항정신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전부다. 수능세대로 아니고 마지막 학력고사세대에게 너무 깊은 '학문적 깊이'를 강요하면 솔직히 힘들다. 더구나 '공대출신'에게 코칭해주는 스승도 없이 '문학적 사유'에 뛰어드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지 정녕 몰랐다. 그냥 물가에서 물장구 치는 수준으로 감당할 수 있는 '깊이'와 '너비'가 아니라는 아찔한 생각만 들 뿐이다. 이런 '문학'에 관한 문외한 수준인데 감히 '라틴아메리카 문학'이라니...덜컥 책 구매부터 하기에 앞서 '제목' 아래 달려 있는 '부제'를 먼저 읽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굴뚝이었지만, 어쩌랴, 부제를 보았더라도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구매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페인어로 'no lo se(놀로세)'는 우리 말로 '나는 모른다'는 뜻이란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스페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가 '원주민의 정체성'을 버리거나 잃어버리고, '유럽계통 백인의 혈통'임을 인정받고자 했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유럽(스페인) 사람들에게 '백인 혈통'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내쳐졌다. 그리고서는 오랜 독립투쟁을 거쳐 어렵사리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오랫동안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유럽 강대국들'에게 직간접적으로 간섭을 받았고, 지금도 그런 경향은 여전하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내부 문제로 불안정한 일이 불거질 때마다 그들 스스로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빈번하 일어났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1521년 '코르테스'라는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백인화 된 것'에 대해서 승리라고 말하지도, 끝까지 저항했으나 끝내는 절멸 당한 '선주민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패배했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애매한 처지에 놓이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나는 모른다'는 말을 언제 어떻게 쓰면 좋은 것일까? 단지 '객관적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뜻할까? 아니면 '주관적인 해석'을 어찌 내려야 좋을지 모를 때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뜻할까? 결국 어느 한 쪽이든 결론을 내렸을 때도, 그 결과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뜻할 때 써야 옳은 표현일까? 참으로 애매하다. 그러나 '시인'이라면 그냥 모른다라고 쓸 것이다. 모르니까 모른다고 쓰는 게 맞다고, 또는 옳다고 하면서 아무 거리낌없이 썼다고 할테지만, '독자'들은 그 '모른다(놀로세)'는 한마디에서 수많은 영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현실을 감안해서 '놀로세'라는 한마디가 뜻하는 바가 얼마나 위대한 표현인지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몰랐던 상황'에서 깨닫게 된 처지가 되었을 때의 반향은 어떠했을까? 침략자 코르테스가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핏줄'을 더럽힌 뒤에 '혼혈'이 되었지만, 자신들은 '백인'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정복자들처럼 피부색이 하얗고, 정복자의 언어인 '스페인어'를 쓰고 있으며, 정복자의 문화와 신앙까지 무엇 하나 '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메스티소)은 몰랐다. 자신들이 태어난 곳이 바다 건너 '백인들의 땅'이 아니라 백인들이 정복한 '원주민들의 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문화는 '이동'이 가능하긴 하지만 '본래 땅주인의 것'이 훨씬 더 우세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의 '핏줄'이 아무리 정복자의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들은 '원주민의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정복자의 영광'까지 이어받을 수는 없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결국 메스티소는 멸망한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자의 핏줄로 다시 재건해야만 했다.

그런데 또 이걸 몰랐다. 자신들이 '백인'이라 철떡같이 믿고 있었던 탓에 자신들이 멸망시킨 '아스테카 문명'의 진면목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주민의 말도 잊어버렸고, 원주민의 문화도 잃어버렸으며, 원주민의 신앙도 깨끗하게 버려벌였다. 유럽 본토인들에게 까이고 잃어버린 자존심을 다시 재건해야 하는데, 재건할 방도를 몰랐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다시 '본토인의 문명'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라틴아메리카 땅에서 '유럽의 문명'을 다시 세우는 것 말이다. 그것이 또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들에게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유럽의 것'하고는 다른 '새로운 것'이라는 생각만 굳건히 했을 뿐이다. 이게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저항정신'이었던 것이다. 별다를 것이 없어 존심을 상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 말이다.

그렇게 라틴아메리카의 자존심을 세운 것이 바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백년 동안의 고독>(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며 한 번 손에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마력을 지닌 소설이라는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10쪽을 다 읽지 못하고 놓아버렸다. 뭐가 마술인지 마력인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다. 놀로세~ 그런데 이게 라틴아메리카 문학으로서는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고, 전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일상적 삶에서 확인되는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적 현실이라는 믿음에서 '문학이해의 시작'을 할 수 있다는데, 이게 탈중심적인 새로운 세계 인식의 방법이라는 소개만 이해할 뿐, '사실주의'의 기존 인식 방법과 새로운 인식 방법의 차이점을 구별해주는 스승이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암튼,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쾌거라는 사실만 이해했다.

그렇게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주춧돌을 놓은 루벤 다리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영광과 승리를 대변하는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나카노르 파라 등 네 명의 시인을 대표로 삼아 그들의 시에 담긴 '저항정신'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난 그 시에 담긴 '의식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말이다. 이렇게나 '모르는 것' 투성이인 채로 책을 덮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그래도 그동안 수없이 리뷰를 써오면서 깨닫게 된 것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모르면 모르는 채로 솔직히 쓰는 것'이다. 이마저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게 된다'는 사실만은 뼛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난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젊은 시절에는 '기록'도 남기지 않고 '기억'에 의지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아는 것'은 기억이 나는데, '모르는 것'은 기억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말 당연한 이치지만, 그렇게 '몰랐던 것'을 다시 배우려 덤비니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방법'밖에는 아무런 도리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르면 모르는대로 '기록'을 남겨놔야, '그 시점'부터 다시 시작해서 좀더 수월하게 '앎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셈이다. 이 책도 그럴 것이다. 심오한 '시의 세계'를 파고들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물가에서 물장구치는 수준을 넘어서 '땅 짚고 헤엄치는 수준'까지는 올라갈 생각이다. 적어도 '해설'을 이해할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 내 안의 힘을 발견하는 철학 수업 서가명강 시리즈 24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XXV / 21세기북스 36번째 리뷰] 에리히 프롬의 철학은 다른 철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고 정평이 나 있다. 심지어 너무 난해한 철학에 익숙한 이들은 '쉬운 철학'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낼 정도라서 프롬의 철학은 철학도 아니라고 폄하할 정도다. 그만큼 쉽다는 말이다. 그러니 철학을 막연하게 어렵다고만 하는 분들이 접근하기 아주 좋은 철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쉽다고 했지 만만하게 보면 절대로 안 된다. 프롬의 철학은 '깊이'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함'에 놀랄테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 프롬은 양극단에 있는 개념조차 모두를 아우르는 '통찰력'으로 읽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테면, 프롬은 진화론적인 과학적인 관점이나 창조론적인 종교적인 관점까지 다 포용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기본 바탕으로 깔고 있으면서도 선불교의 깨달음도 동시에 주목하고 있다. 이런 사상적 유연함 때문인지 '유대인'이면서도 '이스라엘 건국'에는 반대하고, 그 땅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프롬의 철학을 아주 잘 반영한 책이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그리고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다. 이 책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프롬의 저서들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은 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나면 분명히 앞에 소개한 책들을 읽고 싶어질 것이다. 이미 읽으신 분들이라면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질 것이다. 나조차 그런 독자 가운데 하나였으니 말이다.

먼저, 프롬의 삶은 '존재지향적인 삶'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삶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소유'를 우선시하고, 최종 목적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이런 삶은 '무의미'할 뿐이다. '진정한 부자'를 예로 들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우리는 가진 재산이 많으면 '부자'라고 부르지만, 단지 '가진 것'이 많기만 한 사람을 진정한 부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주는 것'이 많은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소유'한 것이 많을 뿐인 사람은 존재감조차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하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진정 '부자의 존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액을 척척 뿌려대는 사람을 보면, 그가 지닌 '위력' 또한 어마어마할 것으로 느껴지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진정한 부자'로 느껴지진 않는다. 왜냐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부를 쓰는 것은 너무 하찮은 힘이기 때문이다.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다면 '거대한 힘'으로 느껴지긴 하겠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런 부자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존경심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지는 않는다. 더구나 인성까지 별로라면 그저 '플렉스(돈지랄)'하는 것일 뿐이라 여길 따름이다. 그런데 엄청난 재력으로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서 기꺼이 자산을 베푼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먼저, 그가 가진 힘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인격' 또한 훌륭하니 저절로 공경심이 솟아날 것이다. 거기다 돈 쓰임새가 올바르다면, 그런 이를 우리는 '진정한 부자'라고 부를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비로소 '부자의 존재'를 여실히 느낄 수 있고, 그런 존재만으로 우리는 안심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재지향적인 삶'이라 할 것이다.

프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불안과 절망에서 구원한다고도 말했다. 이는 남녀 사이의 '애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해동포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전 인류에 대한 광대한 영역을 아우르는 사랑이다. 앞서 '진정한 부자'의 예를 들었으니 계속 이어 가겠다. 엄청난 재력을 가진 부자가 '존재감'을 뿜뿜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기 힘들어 할 일조차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자들은 단지 '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돈을 긁어 모을 수 있는 재능'까지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능력자'이기도 하다. 이런 대단한 능력자들이 그들이 가진 힘을 '선과 악', 어느 방향으로 쓸지는 전적으로 그의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다. 이를 테면, 트럼프 같은 초일류 부자가 하는 짓을 보면 어떤가? 아주 선한 방향으로 그가 지닌 재능을 아낌없이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랑'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그저 자기 가족, 자기 인종, 자기 국가에 한정된 사랑을 표할 뿐이다. 그가 추구하는 '위대한 미국 만들기'는 그래서 아무 짝에 쓸모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설령 그의 방식대로 미국이 다시 '위대한 국가'로 재탄생한다고 할지라도 이는 '다른 나라'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 뿐이다. 더구나 그 희생조차 '자발적'인 행위가 아닌 '강요되고, 위협받은 상태'에서 억지로 한 행위이기 때문에 결코 오래 지속될 수도 없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트럼프가 '그냥 부자'일 뿐이지, '진정한 부자'는 아니며, 그가 가진 부로 얻고 싶어하는 '위대한 미국'이란 정책도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허울 좋은 허상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에측할 수 있게 된다. 어떤가? 철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유용하고, 쉽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은가? 이게 바로 '에리히 프롬 철학의 장점'이다.

기왕 '사랑'이란 말이 나왔으니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 대해 잠시 언급해보자. 프롬의 남녀간의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저절로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가슴 설레는 사랑을 '진정한 사랑(인연)'이라고 인식하곤 한다. 하지만 프롬은 '사랑의 감정'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가슴 설레는 사랑을 하고 싶다면 '사랑의 기술'을 연마해야 설레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운명적 만남'을 통해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기적 같은 일을 너무 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소설이나 동화속 왕자와 공주처럼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아니 '마법같은 연애'를 경험해본 적이 있었나? 나도 그런 적이 없지만,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랑으로 결혼까지 성공한 예를 본적이 없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일단 '만남'을 가졌고, 그 뒤에도 빈번하게 '사귐'을 하다가 '다툼과 싸움'도 참 많이 한 다음에 '사랑의 감정'이 싹터서 끝내는 '웬수같은 사랑'이 결혼이란 결실을 맺는 경우는 흔하게 보았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사랑의 기술'이라 말했다. 마치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라면, '멋진 풍경'을 찾아나서는 것보다 '그림 연습'부터 열심히 하는 것이 순서인 것처럼 말이다. 사랑도 잘 하고 싶다면, '운명적인 상대'를 못 만났다고 푸념하지 말고 '운명적인 상대'가 되기 위해서 먼저 노력하고, 서로에게 그런 연인이 될 수 있도록 '사랑의 기술'을 닦고 또 닦으라고 조언했다. 어떤가? 꽤나 현실적이지 않은가? 이게 바로 철학의 명쾌함이다.

또한, 그런 멋진 사랑꾼이 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야 비로소 타인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을 미워하면서 어찌 타인을 진정으로 배려할 수 있겠냔 말이다. 그래서 노예처럼 자신을 하찮게 여기며 상대를 여왕처럼 떠받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은 '왕'으로 군림하면서 상대를 '하녀' 부리듯 하찮게 대하면, 그 또한 진정한 사랑은 아닌 것이다. 그건 마치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서로 어울리는 듯이 보이지만, 둘 다 '독립적'으로는 존재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의존'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불완전한 모습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서로 '확실한 존재'를 갖추고서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동시에 상대를 위해 배려(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당당한 '주체'로서 존재하며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처럼 완벽한 아름다움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도 말했다. 특히,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악질적인 독재자에게 충성했던 독일 국민과 소련 인민 들이 바로 그렇다고 예를 들었다. 이런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서 프롬은 '중세인'과 '근대인'을 비교했다. 중세인은 신분사회 아래에서 자유를 잃고 '속박'받으며 살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았단다. 왜냐면 그들은 '자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자유'를 잃고도 억울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런 그렇게 제한된 삶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행복해했다. 그런데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깨우친 근대인들은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왜냐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고립'된 삶을 사는 것이 더 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본연이 지닌 욕망의 문제이기도 했다. 욕망에 따르는 것이 '자신의 권리'인만큼 그 권리를 뺏을 권한은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는 논리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프롬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예를 들면서 비판했는데, 당시에 '프로이트의 성욕구 해방 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튼, 극단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성적으로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든 '학대받고 싶은 욕망'이든 나름 존중해줘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사디즘적인 욕망을 지닌 이는 남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을 행사할 자유를 갈망할 것이고, 마조히즘적인 욕망을 가진 이는 상처받고 싶고, 학대받고 싶어할 자유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히틀러의 욕망'과 '독일국민들의 욕망'이 서로 상호충돌하지만 묘하게도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치즘'은 성공적으로 독일국민을 지배할 수 있었고, 독일국민들은 '독재자의 입맛'에 맞게 약소국의 국민들을 학대하고 학살에 가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디즘'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지만 '폭력을 행사하고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해석하면 딱이다. '마조히즘'도 개인 취향이지만, '학대받는 행위나 독재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해석하면, 나치즘에 휘둘린 독일국민들이 어떻게 끔찍한 행위에 아무런 비판도 없이 순종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소련의 스탈린의 통치행위도 그랬고, 현재 진행중인 '극우성향의 광기'가 전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나라도 윤석열의 내란선동에 '찬성'하고, 탄핵반대를 외치면서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극우단체가 꽤나 활약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에, '자유'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맹종'하는 것으로 해방감을 맛보는 중인 셈이다. 그들은 '독재자의 명령'이 부당한지, 옳지 않은지, 따지지도 않고 '맹종'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기에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그런 희생을 막연하게 '애국'으로 포장해주는 이들의 궤변에서 '달콤한 쾌락'을 느끼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파시즘'은 불안과 허무를 먹고 자란다고도 말했다. 저들은 진정한 자아와 자유를 찾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철저히 자신을 파괴하고 맹종과 방종을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한 최고의 방법으로 삼고,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스런 나날들을 '애국'이라 포장하는 독재자에게 기꺼이 복종하곤 한다. 그러나 독재자 윤석열이나 애국시민들이나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어느 한 쪽이 사라지거나 무너지면 '홀론 존재'할 수 없는 미약한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런 미약한 상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와 자유'를 찾는 방법으로 이성 회복, 사랑 충만, 책임감 투철, 그리고 관심 폭발 등과 같은 '덕(모럴)'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 존재의 확실성', 다시 말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야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권위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에 따르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서 그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하려는 '능동적인 자세'만이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이성을 공유하는 전인류를 모두 같은 동포로 여기는 '사해동포주의'를 표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사랑이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평등하게 사랑하는 보편적인 사랑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사랑을 함으로써 '완벽한 존재'에 이를 수 있다면서 존재지향적인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와 자유를 위한 최고의 삶이라고 주장했다. 그것도 어렵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아주 쉽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의 이런 하루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XXIV / 이봄 12번째 리뷰] 초고령사회로 급속히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 이제 '베이비부머'의 끝자락 세대인 74년생이 만 50세를 넘겨서 중장년층의 절반 이상이 '고령 인구'로 편입되고 말았다. 이제 '인구 절벽'을 맞아서 5000만 명이던 인구는 급감을 하고, 늦어도 2050년이 되면 '한국인 멸종' 사태를 맞게 될 거라는 걱정어린 전망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사회'를 맞이했던 일본이었는데, 한국보다 2배가 많았기에 그 속도는 우리보다 한층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런 관점으로 이 책 <평균 연령 60대 사와무라 씨 댁> 시리즈를 읽다보면 생각할 거리가 참 많아지게 된다.

각자 열심히 살다보니 어느새 맞이한 '노년의 삶'이란 주제가 퍽 절박하게 와닿는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따라주지 않고, 젊어서는 힘들고 아파도 금세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기운차게 일을 할 수 있었는데, '노인'이 되니 그게 맘처럼 되지 않는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놀려고 해도 놀 거리가 없다. 그렇다고 젊었을 때처럼 하려니, '그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정년퇴임을 하고 이제 '고희(70살)'를 맞이한 사와무라 씨가 딱 그렇다. 그래도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한 덕분에 '연금'이 부족하게 나오는 편은 아니지만, 노인으로 살다보면 그게 또 넉넉하지만은 않다. 앞으로 '벌 수 있는 돈'보다 '써야할 돈'이 늘 많은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여유를 부렸다간 '질병'을 얻는 것보다 더 무서운 '빈곤'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건강부터 챙겨야겠다고 집근처의 '헬스장(일본에선 '짐'이라고 한다. 헬스장이란 명칭은 '성행위를 하는 장소'라는 좀 야한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을 찾아서 운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젊은 '짐코치(헬스 트레이너)'가 인바디 검사결과를 보고서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인다는 말을 듣고서는 베시시 웃고 말았지만,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 코치가 다른 회원에게 가서도 똑같은 멘트를 하는 것을 엿듣고는 씁쓸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와무라 부인도 마찬가지다. 결혼 후에 '전업주부'로 쭉 살았지만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늘 아끼고 절약하는 것이 몸에 베어서 남편이 통 크게 한턱 쏜다는 말을 해도 정말 먹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고 만다. 하지만 그렇게 알뜰하게 생활하는 것이 늘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소소한 행복'을 위해서 질러야 할 땐 질러야 한다고 생각을 고쳐 먹지만, 막상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절약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살아야 하는 걸까? 젊어서는 젊기 때문에 '고생'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늙어서는 늙었기 때문에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평생을 '고생'과 함께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고생'과는 이별하지 못하고, 또 참고 참으며 남은 생마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만족'스러울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과감히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런 부모와 평생을 '한 집'에서 살아가는 히토미 씨는 어떨까?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긴 '마흔 살'이지만, 연애할 상대가 나타나면 언제든 화끈한(?) 연애를 할 거라고 매년 다짐한다. 하지만 새해가 지나면 또 어김없이 '솔로'다. 한 회사에서 18년 동안 일을 한 베테랑 직원이지만 '일의 성취욕'은 그닥 없다. 그저 평범한 '오피스레이디'일 뿐이고, 결혼과 동시에 미련없이 그만 둘 수도 있는 그저그런 직장일 뿐이다. 이렇게 솔로로 한 직장에서 오래 버티고(?) 있는 여성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변화'일 것이다. 하지만 히토미 씨에게 '변화'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집과 직장을 왔다갔다할 뿐, '딴 데'로 새거나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 이렇게 변화가 없는 걸까? 비단 '딸, 히토미 씨'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와무라 씨 댁의 가족 전부가 '변화'가 매우 부족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 점점 나이가 들어 늙어가는 것에만 막연히 두려움을 가진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탈출하기 위해서 '변화'가 절실하지만 딱히 '변화'할 만한 껀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오히려 '변화'가 지금 누리고 있는 '안정된 삶'조차 무너뜨릴까봐 두려운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런 불안감은 더욱 커질 뿐이다. 젊다면 '맨땅을 맨손으로도' 바꿀 용의가 있지만, 현재의 늙음이 그럴 용의조차 들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와무라 씨 댁의 문제는 '일본 전체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90년대부터 시작한 '잃어버린 30년 체제'가 일본사람들 모두에게 활기를 빼앗아버렸다. 무언가 변화를 주고 싶은데, 그조차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를 지나보내고나니 남은 것은 '노년'이라는 나이만 남았다. 물론 부족한 것은 없다. 그러나 넉넉한 것도 없다. 이제라도 뭔가를 해보고 싶지만 딱히 해볼 것도 마땅히 없다. 일본 사회 전체가 그렇게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물론 '일본의 방식'을 우리가 그대로 답습하던 시절의 관행은 난 정말 싫다. 일본은 일본이고, 한국은 한국이지. 왜 우리가 '일본의 문제'까지 고대로 답습할 것이라고 전망한단 말인가? 그런데 '초고령사회의 문제'만큼은 전세계가 똑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인류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인구 절벽'을 경험한 선진국들의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사와무라 가족의 문제점'은 우리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느냐? 그건 또 아니다. '문제제기'는 있지만 그에 대한 '대안제시'는 딱히 없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 작품 거의가 대부분 이렇다. 하지만 '정답'이 없다고 나쁜 책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정답'을 확신하는 책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초고령사회의 해법은 무엇일까? 좀 더 읽고 난 뒤에 이야기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 오랜만에 여행을 가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LXXXIII / 이봄 11번째 리뷰] 마스다 미리의 책은 '순서'를 잘 모르겠다. 애초에 '순번'이 없이 나와 있으니 무턱대고 손이 가는대로 읽긴 하는데, 읽다보면 뭔가 '차례'가 있는 듯한 감이 오고 '나중'에서야 그 차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 '마니악'적인 우월감(?)을 뽐내는 듯해서 기분 나쁘다. 진정한 팬이라면 '숫자'가 없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애초에 '진입장벽'을 없애면 그런 불편조차 없지 않겠는가. 뭔가 기분 나쁘다... 시작부터 '불평'을 쏟아내고 말았지만, 오해하지 마시길. '마스다 미리'의 작품이 대개 '이런 식의 서술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조금 흉내를 내보았다. 뭔가 '디테일'이나 '엣지'가 느껴지는 불평이지만, 그렇다고 머리 위에 '전구'가 번쩍이거나 '무릎'을 탁하고 치는 그런 날카로운 맛은 없다. 그저그런 밍밍한 불평투성이다. 그런데 그게 또 '마스다 미리'만의 맛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뭐 이런 맛이 있지 싶다가도 자꾸 먹다보면 그 '이런 맛'에 길들여져서, '뭐, 나름대로 이런 맛도 나쁘지 않네'라고 하게 되는 그런 맛이다.

'평균연령 60세'라는 표제가 지닌 뜻은 '한 가족'에 '세 식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버지 70세, 어머니 69세, 그리고 딸 40세, 그래서 평균으로 약 60세인 세 사람이 한 집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이게 뭐 그리 이상한 걸까? 연로한 부모를 '독신녀(흔히 말하는 '노처녀')'가 부양하고 있는 '평범한 가정'인데 말이다. 아닌가? 노총각이면 자연스러운데, 노처녀가 부모를 부양하면서 살아가는 것..노부부에게는 '연금'이 나오고 있으니, '완전한 부양'도 아니지만, 암튼 다 큰 딸이 '출가'도 하지 않고, '독립'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비치는 모습이 딴에는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마스다 미리의 작품에서 그닥 새롭지가 않다. '독신여성'이 주인공인 것이 전부이다. 처음 접했던 <내 누나>에서는 30대 독신녀, <수짱시리즈>에서는 30대에서 40대까지 꾸준히 독신녀, 그리고 <주말은 숲에서>에서도 40대 독신여성이 주인공이었다. 혹시 작가도 '노처녀'인가? 69년생이니 한창 시리즈를 연재할 때에 3,40대가 맞긴 하다. 그렇다고해서 작품속 주인공들이 딱히 '독신'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들의 수다내용은 대개 '결혼'이거나 '연애할 멋진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딱히 결혼할 마음은 없어 보인다. 그저 '멋진 남성'이 없기 때문에 할 생각도 없다는...아니면 이미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겨버렸기에 '경쟁에서 패배한 개'마냥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이 전부다.

이를 두고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썼다. 연애나 결혼 상대자를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요행히 '가슴 설레는 이성'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착각하기 쉬운 것은 '매력적인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지, 그런 사람만 발견한다면 '사랑의 감정'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프롬은 이러한 생각을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 하면서도 그림 그리는 '연습'을 하기보다 그릴 대상만 발견하면 그림은 '저절로' 그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사랑은 '우연히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만나고 부딪히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은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스다 미리'의 작품속 독신여성들은 애초에 '사랑의 기술' 따위는 전무하다. 그저 우연히 그루터기에 머리를 박고서 손쉽게 얻을 토끼를 기다리는 사냥꾼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자신을 '경쟁에 패배한 개'로 비유하는가? 30대면 늦었고, 40대면 연애나 결혼은 아예 불가능한가? 물론 생물학적 나이로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서 불리한 조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그런 불리한 조건을 초월하곤 한다. 그런 사랑을 위해서, 아니 그런 사랑을 원한다면 과감히 뛰어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점에서 마스다 미리의 '자조 섞인 주인공들의 푸념'이 살짝 귀에 거슬리곤 한다.

물론, 그러한 삶도 있다. 사와무라 히토미처럼 '1인 생활' 경험은 전무하고, '입사 18년차'에 베테랑 경력사원이지만 뭔가에 치이듯 무력감을 느끼고, 뭔가에 쫓기듯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은 '3인조와의 수다'뿐이다. 3인조라 함은 히토미처럼 독신여성인 친한 친구들을 말한다. 그녀들도 그녀 주변의 온갖 것들에게서 '스트레스'를 받고 함께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해방감'을 만끽하곤 한다.

여기까지라면 <수짱 시리즈>를 비롯한 여타 작품들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에 히토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알콩달콩 투닥토닥이 가미되면서 '차별화'를 꾀한다. 그런데 이 둘의 대화는 또 <내 누나>에서 보여줬던 '누나'와 '남동생'의 대화 방식과 또 유사하다. 그들 대화의 '노령 버전'이라고 하면 딱일 듯 싶다. 거기에 '황혼이혼'의 이슈가 컸던 일본이기에 살짝 위태위태(?)한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물론 '황혼이혼'을 꺼낼 정도로 둘 사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감지될 정도의 '긴장감'을 엿볼 수는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식이는 나빠요' 버전의 우스개소리가 유행한 것처럼 일본사회에서도 '정년퇴임'한 남편의 식사를 어디까지 챙겨줘야 하는지로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논쟁을 벌이는 유사한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그 결론은 회사에 다닐 때처럼 아침, 저녁은 챙겨주더라도(이식이), 주부인 본인들도 다 늙었는데 '점심'까지 챙겨주는 '삼식이'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기왕이면 아침만 챙겨주고 저녁은 외식으로 간단히 떼우는 '일식이'면 더 좋고, 차라리 직접 요리를 해서 아내에게 대접하는 '영식이'라면 대환영이라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우리도 어느새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 인기를 끌고 있다. 주방에서 요리하는 남자와 그런 뒷모습(또는 비주얼이 된다면 '앞모습'도 좋고)을 그윽히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여성의 모습을 아주 빈번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을 #플렉스 #성공적 #로맨틱 이라는 '해시태그'로 SNS에 올리면 좋아요와 구독을 꾹꾹 눌러줄 것 같지 않은가? 물론 남성들도 이런 장면에서 '앞치마 코스프레'를 한 여성과 므흣하게...쿨럭쿨럭

어쩌다 보니, 중구난방 '여행이야기'는 하나도 꺼내지 않았는데, 책속을 들여다봐도 '여행이야기'는 그닥 많지 않다. 그리고 대부분 '평범한 일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굳이 먼 여행을 떠나서 남의 집 담장 밑에 있는 화분속 꽃사진을 찍는 것이 대단히 유별나다고 느낀다면 굉장히 싱숭생숭할테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