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 소외된 영혼을 위한 해방의 노래, 라틴아메리카 문학 ㅣ 서가명강 시리즈 7
김현균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My Review MCMLXXXVI / 21세기북스 37번째 리뷰] 이 책을 읽다보니, 시인은 어두운 시대의 저항정신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전부다. 수능세대로 아니고 마지막 학력고사세대에게 너무 깊은 '학문적 깊이'를 강요하면 솔직히 힘들다. 더구나 '공대출신'에게 코칭해주는 스승도 없이 '문학적 사유'에 뛰어드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지 정녕 몰랐다. 그냥 물가에서 물장구 치는 수준으로 감당할 수 있는 '깊이'와 '너비'가 아니라는 아찔한 생각만 들 뿐이다. 이런 '문학'에 관한 문외한 수준인데 감히 '라틴아메리카 문학'이라니...덜컥 책 구매부터 하기에 앞서 '제목' 아래 달려 있는 '부제'를 먼저 읽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굴뚝이었지만, 어쩌랴, 부제를 보았더라도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구매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페인어로 'no lo se(놀로세)'는 우리 말로 '나는 모른다'는 뜻이란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스페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가 '원주민의 정체성'을 버리거나 잃어버리고, '유럽계통 백인의 혈통'임을 인정받고자 했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유럽(스페인) 사람들에게 '백인 혈통'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내쳐졌다. 그리고서는 오랜 독립투쟁을 거쳐 어렵사리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오랫동안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유럽 강대국들'에게 직간접적으로 간섭을 받았고, 지금도 그런 경향은 여전하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내부 문제로 불안정한 일이 불거질 때마다 그들 스스로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빈번하 일어났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1521년 '코르테스'라는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백인화 된 것'에 대해서 승리라고 말하지도, 끝까지 저항했으나 끝내는 절멸 당한 '선주민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패배했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애매한 처지에 놓이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나는 모른다'는 말을 언제 어떻게 쓰면 좋은 것일까? 단지 '객관적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뜻할까? 아니면 '주관적인 해석'을 어찌 내려야 좋을지 모를 때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뜻할까? 결국 어느 한 쪽이든 결론을 내렸을 때도, 그 결과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뜻할 때 써야 옳은 표현일까? 참으로 애매하다. 그러나 '시인'이라면 그냥 모른다라고 쓸 것이다. 모르니까 모른다고 쓰는 게 맞다고, 또는 옳다고 하면서 아무 거리낌없이 썼다고 할테지만, '독자'들은 그 '모른다(놀로세)'는 한마디에서 수많은 영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현실을 감안해서 '놀로세'라는 한마디가 뜻하는 바가 얼마나 위대한 표현인지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몰랐던 상황'에서 깨닫게 된 처지가 되었을 때의 반향은 어떠했을까? 침략자 코르테스가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핏줄'을 더럽힌 뒤에 '혼혈'이 되었지만, 자신들은 '백인'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정복자들처럼 피부색이 하얗고, 정복자의 언어인 '스페인어'를 쓰고 있으며, 정복자의 문화와 신앙까지 무엇 하나 '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메스티소)은 몰랐다. 자신들이 태어난 곳이 바다 건너 '백인들의 땅'이 아니라 백인들이 정복한 '원주민들의 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문화는 '이동'이 가능하긴 하지만 '본래 땅주인의 것'이 훨씬 더 우세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의 '핏줄'이 아무리 정복자의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들은 '원주민의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정복자의 영광'까지 이어받을 수는 없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결국 메스티소는 멸망한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자의 핏줄로 다시 재건해야만 했다.
그런데 또 이걸 몰랐다. 자신들이 '백인'이라 철떡같이 믿고 있었던 탓에 자신들이 멸망시킨 '아스테카 문명'의 진면목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주민의 말도 잊어버렸고, 원주민의 문화도 잃어버렸으며, 원주민의 신앙도 깨끗하게 버려벌였다. 유럽 본토인들에게 까이고 잃어버린 자존심을 다시 재건해야 하는데, 재건할 방도를 몰랐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다시 '본토인의 문명'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라틴아메리카 땅에서 '유럽의 문명'을 다시 세우는 것 말이다. 그것이 또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들에게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유럽의 것'하고는 다른 '새로운 것'이라는 생각만 굳건히 했을 뿐이다. 이게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저항정신'이었던 것이다. 별다를 것이 없어 존심을 상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 말이다.
그렇게 라틴아메리카의 자존심을 세운 것이 바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백년 동안의 고독>(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며 한 번 손에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마력을 지닌 소설이라는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10쪽을 다 읽지 못하고 놓아버렸다. 뭐가 마술인지 마력인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다. 놀로세~ 그런데 이게 라틴아메리카 문학으로서는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고, 전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일상적 삶에서 확인되는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적 현실이라는 믿음에서 '문학이해의 시작'을 할 수 있다는데, 이게 탈중심적인 새로운 세계 인식의 방법이라는 소개만 이해할 뿐, '사실주의'의 기존 인식 방법과 새로운 인식 방법의 차이점을 구별해주는 스승이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암튼,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쾌거라는 사실만 이해했다.
그렇게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주춧돌을 놓은 루벤 다리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영광과 승리를 대변하는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나카노르 파라 등 네 명의 시인을 대표로 삼아 그들의 시에 담긴 '저항정신'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난 그 시에 담긴 '의식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말이다. 이렇게나 '모르는 것' 투성이인 채로 책을 덮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그래도 그동안 수없이 리뷰를 써오면서 깨닫게 된 것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모르면 모르는 채로 솔직히 쓰는 것'이다. 이마저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게 된다'는 사실만은 뼛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난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젊은 시절에는 '기록'도 남기지 않고 '기억'에 의지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아는 것'은 기억이 나는데, '모르는 것'은 기억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말 당연한 이치지만, 그렇게 '몰랐던 것'을 다시 배우려 덤비니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방법'밖에는 아무런 도리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르면 모르는대로 '기록'을 남겨놔야, '그 시점'부터 다시 시작해서 좀더 수월하게 '앎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셈이다. 이 책도 그럴 것이다. 심오한 '시의 세계'를 파고들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물가에서 물장구치는 수준을 넘어서 '땅 짚고 헤엄치는 수준'까지는 올라갈 생각이다. 적어도 '해설'을 이해할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