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화의 사기 4 : 비상시국에 살아남는 법 장자화의 사기 4
장자화 지음, 전수정 옮김, 사마천 원작 / 사계절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장자화의 사기 4 : 비상시국에 살아남는 법>  사마천 / 장자화 / 전수정 / 사계절 (2018)

[My Review MMXC / 사계절 14번째 리뷰] 사마천의 <사기>는 술술 읽히는 역사책은 아니다. 유명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쉬이 읽히는 편이지만, 낯선 인물이 나오는 대목에서 어김없이 브레이크가 걸리며 미적거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비단 <사기> 뿐만 아니라 모든 '고전'이 다 그렇지만 말이다. 이 책 <장자화의 사기 4>권도 그런 경우다. 때는 '전국시대 말'에 해당하며 전국칠웅에 해당하는 연, 제, 조, 위, 한, 초, 그리고 진이 서로 '합종'과 '연횡'을 하며 치열한 수 싸움을 할 때는 읽을 맛이 크게 웃도는 편인데, 말기에 접어 들면 '진 나라'가 크게 우위를 잡으면서 나머지 나라들에서 '자충수'를 두는 등 망국의 조짐이 등장하면서 이름조차 낯선 인물들이 나라꼴을 우습게(?) 만드는 짓을 참 많이 저지르고 있는 시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책에서 낯익은 대목은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협객 형가' 이야기이고, 진 나라가 멸망하는데 일조했던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의 이야기, 한 고조 유방이 한 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 '대장군 한신' 이야기와 천하삼분지계의 원조격인 '회음후 한신'이 끝내 한 고조에게 토사구팽 당하는 대목 정도다. 이렇게 죽고 죽이는 이야기 한복판에서 '서로 살기 위해서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순간'을 한 데 모아 책 제목으로 <비상시국에 살아남는 법>이라고 지어 놓았다.

그런데 이건 좀 의외였다. 무릇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 '비상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이 나쁠 것이 없다고 여기며 책을 읽어 나갔는데, 읽다 보니 몇몇 인물들은 차라리 죽는 게 훨씬 더 바람직하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국시대'라고는 하나, 저 살자고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키고도 '영웅' 취급을 하고, 그런 영웅 소리를 듣는 양반이 자신이 해야 마땅한 일(?)마저 제 손으로 이루지 못하고, 애꿎은 선비(士)를 꼬드겨서(?) 대신 목숨을 담보로 일을 시키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그들이 과연 영웅이 맞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란의 시기'라고는 하지만, 노자와 장자가 말하던 '도덕'이 추락하고, 공자와 맹자가 강조하던 '인의'가 사라져버린 듯 한 생각에 미쳤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통일의 위업을 이루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다. 연 나라 태자 단이 '형가'의 재주를 빌어서 폭군(?) 진시황을 암살하려 든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있는데, <영웅>(2003년)이다. 감독 장예모, 주연 이연걸, 양조위, 견자단, 장만옥, 장쯔이 등이 열연했기에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진시황을 암살하려 든 형가를 '협객'으로 볼 것인지, 한낱 '자객'에 불과한 것인지,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너무 극과 극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시황을 '폭군'으로 본다면 그를 암살하려 한 형가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대사를 실행한 의로운 협객일 것이고, 진시황을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위대한 영웅으로 본다면 형가는 시대의 조류를 어그러뜨리는 깡패 같은 자객에 불과할 것이다. 허나 진시황과 형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인물들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무고한 관계였단 말이다. 그런데도 왜 목숨을 걸고 죽고 죽이려 만나야만 했던 것일까? 그건 바로 '연 나라 태자 단'이라는 인물이 중간에서 계략을 짰기 때문이다.

진 나라는 연 나라를 토벌하려 했는데 국경이 맞닿지 않아 먼저 조 나라를 쳐야만 했다. 어차피 천하통일을 원했던 진시황에게는 어느 나라를 먼저 멸할지는 '순서'의 문제였을 뿐이다. 그래서 연 나라는 조 나라와 '합종'의 맹약을 지켜 함께 싸웠으나 강성한 진 나라 앞에선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조 나라는 멸망하기 직전이었고, 연 나라도 진 나라와 맞서 싸우길 포기하며 강경한 입장이었던 '태자 단'을 내쫓았던 것이다. 그렇게 쫓기던 처지의 '태자 단'은 진시황 한 명만 암살하면 어그러진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겠다는 염원에 '형가'에게 진시황 암살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해야 마땅한 일을 '부탁'한 관점으로 보아야 옳을까? 아니면, 해서는 안 될 일을 '청탁'한 관점으로 봐야 정당할까? 역시나 진시황에 대한 평가가 앞서야 내릴 수 있는 결단일 듯 싶다.

그런데 사마천은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모호하게 두고서 '주변 인물'에 대한 평가만 옳다 그르다 말할 뿐이다. 중국 최고의 통일 업적을 남긴 탓에 영웅적인 면모를 부정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진 나라가 통일왕조로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한 고조 유방에 의해 한 나라가 건국되었으니 '폭군의 이미지'로 낙인을 찍기는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형가에 대한 평가는 '협의'라고 극찬을 했다. 비록 암살에는 실패했으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태자 단의 '요청'을 받고 한 번 맺은 약조를 지키기 위해 아무리 험난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신조를 지켰기에 그 '의리'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조로 말했다.

근데 아무리 '의리'를 높게 쳐준다 해도 '국가의 대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에까지 확대해서 해석하는 것이 옳은 '도리'일지 의문스럽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의리'로 따질 일이지만, 한 나라의 임금을 해치는 일에도 '의리'를 개입하는 것이 온당한 처사냔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야 '법'이 왜 존재하며, '도덕'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의리'에 충실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져도 '의로운 행동'이었냐만 따지면 될 일일텐데 말이다. 아니 칼 끝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니 힘 쎈 놈이 가장 의로운 사람 행세를 해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의리'가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결코 약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일단 약자가 되면 살아서는 그들과 '정의'를 논하기 힘들고, 죽고 난 뒤에야 겨우 '동정심'을 사는 것이 고작일테니 말이다.

누가 영웅인지 따지는 일은 '기준'이 모호해서는 안 된다. 내 나라 영웅은 '이런' 기준을 삼고, 남의 나라 영웅은 '저런' 기준으로 따진다면 모두가 인정할 '영웅'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마천은 영웅의 기준을 '사건의 원인'에 두고, 그 원인의 옳고 그름만을 따졌으나, 그래서는 '똑같은 사안'인데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으니 모호할 따름이다. 따라서 '형가'를 의리를 다한 협객으로 극존칭을 삼고 싶었다면 무도한 힘을 앞세워 패업을 이룬 진시황을 죽이려 한 형가만 드높일 것이 아니라, 무도한 진시황이 세운 나라를 잘못된 '선택'과 '판단'으로 일찍 멸망하게 만든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도 똑같이 드높였어야 한다. 나쁜 놈이 세운 나라도 나쁜 나라임에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허나 역사를 이런 식으로 다루면 엉망일 게 분명하다. 역사는 '시대의 조류'이고, 일개 백성의 역사를 낱낱이 밝히기보다 '백성의 안녕과 평안'을 좌지우지할 국가의 대사가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그렇게 따지게 될 때의 '기준'도 모두가 공정하다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근거가 타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마천이 '형가'를 평가한 것에 큰 의의를 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일개 필부의 '의리'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하의 대세'가 진시황에게 기울었고, 그가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기에 '전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일상의 안정은커녕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먼저 죽여야만 하는 참극을 멈출 수 있게 한 진시황의 업적을 크게 보아야 함이 더 옳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역사는 돌고 돌아 진시황의 대업도 악정을 일삼는 폭군의 행태로 변하고 말았다. 그때가 되어서는 '폭군'을 없애고 억울하게 핍박받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백성을 위해 '난세'를 평정할 새로운 영웅을 찾는 것이 옳은 일이 될 것이다.

케데헌의 한의사가 한 명대사로 마무리 하련다. 병을 낫게 하려면 '병의 원인'을 알아내야 하는데, 그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 책은 '비상시국'에서 살아남는 법을 논한다면서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일부분'인 인물들의 고사를 늘어놓았다. 물론 대세를 읽어낼 줄 아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허나 현자가 팔을 들어 가리킨 '달'을 볼 줄 모르고 '손가락'만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을 뿐이라면,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요즘 같이 어지러운 시국에서 '진정한 영웅'이 누구이고, 그 영웅이 나아가는 길을 청소는 못해줄망정 딴죽은 걸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웅이라 지칭해서 꼭 한 사람만을 떠올릴 것은 없다.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영웅은 언제나 '위기 때마다 강한 모습을 보여준 위대한 국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위대한 국민들이 만들어가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영웅들이다. 제발 이런 위대한 국민들이 나아가는 길을 더럽히고 걸림돌이 되는 짐스런 분들은 제발 좀 자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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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화의 사기 3 : 세 치 혀로 세상을 바꾸다 장자화의 사기 3
장자화 지음, 전수정 옮김, 사마천 원작 / 사계절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장자화의 사기 3 : 세 치 혀로 세상을 바꾸다>  사마천 / 장자화 / 전수정 / 사계절 (2018)

[My Review MMLXXXIX / 사계절 13번째 리뷰] 왜 사람이들이 <고전>을 많이 읽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 <고전>을 즐겨 읽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별빛마저 감춰진 깜깜한 한밤중에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들이 '등대'를 찾아 헤매듯이 한치 앞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혼미한 세상이 펼쳐질 때마다 '등대'를 찾듯 <고전>에서 '해법'을 찾으려 탐독하곤 한다고 말한다. 십분 이해가 가는 얘기였다. <고전>에는 옛 사람들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는 책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럼 어떤 <고전>을 읽으면 좋으냐는 물음을 던졌더니, 무엇보다 '내 나라의 <고전>'을 먼저 읽으라고 권했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엄마'를 찾듯이, 혼미한 세상에서는 '모국어'로 쓰여진 <고전>을 탐독하는 것이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여기서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우리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물'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은 잘 알면서 등한시 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원효, 박지원, 정약용, 이이와 이황 등등 우리 선조들이 남긴 '기록유산'도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것만 소중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남의 것이긴 하지만 <고전>은 전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지혜보따리임에 틀림없기에 반드시 섭렵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 책, 사마천이 쓴 <사기>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다른 책도 마찬가지지만 <고전>을 읽을 때, 자칫 '방대한 분량'에 짓눌려서 꾸역꾸역 읽는 것에만 매몰되는 경향을 주의해야 한다. 특히 '주제'를 잊지 말고 끝까지 탐독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다. 그렇지 않으면 애써 '지혜보따리'를 열어놓고도 '무엇'이 소중한 보물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 거나 주워 섬기는 '중구난방' 격으로 읽다가 지쳐서 허무하게 손가락 틈 사이로 보물이 죄다 빠져나가 버리고 남는 것은 '빈 손바닥'만 쳐다보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고서 남겨 놓은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다름 아니라 '세상의 이치란 무엇이냐?'라는 물음이다. 우리는 한 평생을 살면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임금님에게 충성하라는 말들을 '최고'로 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사마천이 '고대 중국사'를 쭈욱 펼쳐놓고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잘 살고 못 산 일대기가 쫘악 펼쳐졌는데, 도무지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더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착하게 살았는데도 '입 바른 소리' 한 번 잘못 놀려서 제 목숨도 잃고, 삼족이 멸족하는 불운을 겪는 이가 있는가 하면, 천하의 악인으로 정평이 난 '짐승'같은 것들이 한 평생을 떵떵거리며 사는 것도 눈꼴 시린데, '천수'까지 누리면서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도무지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절대로 정의롭지 못해 보이더란 말이다. 뭐, 그마저도 '하늘의 섭리'라고 한다면 사마천도 반박할 말은 없지만서도, 그 '하늘의 섭리'라는 것이 어떤 이유로,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몹시 궁금하더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마천이 <사기>를 펴내면서 묻고 또 물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물론, 그 답은 '독자의 몫'이다. 사마천은 자신이 남긴 글에 '어떤이'는 옹호하고, '저떤이'는 그 반대인 듯한 뉘앙스로 나름의 답을 내리긴 했지만, 무려 2000여 년 전에 살았던 이의 '해답'이 오늘날에도 곧이 곧대로 정답일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평가는 '독자'가 마땅히 해야 할 숙제다. 그렇다고 부담부터 가질 필요는 없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 독자들은 대다수 '비전문가'다. 그러니 학문적 성과를 내야 할 의무가 있는 '역사전문가(?)'처럼 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다. 대중 독자들이 <고전>을 읽는 목적은 그게 아닐 테니 말이다. 깜깜한 밤에도 길을 잃지 않고 '반듯이' 갈 수 있는 '등대 같은 참지혜'를 얻는 데 역점을 두면 된다.

이 책은 대만의 저명한 박사출신 문학가 장자화가 소설처럼 읽기 쉽게 펴낸 <사기>다. 보통은 이렇게 읽기 쉽게 쓰기 위해서 사마천의 <사기열전>만 따로 떼어 내서 술술 읽기 쉽게 편집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장자화는 <사기열전>뿐만 아니라 <본기>와 <세가> 등의 내용도 '읽을 만한 것'을 따로 추려내어서 자신의 이름으로 편집을 했고, 이를 다섯 개의 '주제'로 나누어서 <장자화의 사기(전5권)>을 펴냈다. 그래서 이 책은 '사마천'이 직접 쓴 <사기>의 축약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가운데 3권인 이 책은 주제가 '세 치 혀로 세상을 바꾸다'를 실현할 수 있을 정도로 혓바닥(?)을 잘 굴리는 인물들을 추려내서 책 한 권에 담아냈다. 손빈, 자공, 상앙, 소진, 장의, 맹상군 등등 이름만 들어도 관련된 고사성어가 떠올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들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읽다보면 정확한 시대배경과 사건순서, 인물의 이름 따위가 기억나지는 않아도,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옛이야기'라는 느낌을 먼저 받게 될 것이다. 그만큼 읽으면 바로 알 수 있는 '익숙한 스토리'다.

이를 테면, 너무 뛰어난 실력 때문에 절친한 친구의 시샘을 받아 두 다리를 잃어버린 손빈이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출세를 하여서 복수에 성공했는데, 그 방법이 전쟁의 혼전 중에 어지럽게 도망을 가다 길을 잃자 여기가 어디쯤인지 궁금했고, 마침 부하가 나무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보고를 하자 자세히 읽기 위해 불을 밝히고 소리 내어 읽었는데, 그 내용이 [OO장군, 바로 이곳에서 죽다]이었고, 다 읽기도 전에 수백 발의 화살이 온몸에 꽂혀서 즉사를 했다는 이야기다. 바로 손빈의 두 다리를 망가뜨린 실력 없는 그 친구의 최후다. 한편, 법가사상가로 유명한 상앙의 고사로는, 마을 한복판에 나무 기둥을 두고서, [이 기둥을 남쪽 성문 앞까지 옮긴 자에게 100금의 돈을 상으로 주겠다]고 공고했는데, 백성들이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았단다. 오히려 기둥에 올라타서 장난 치고, 오줌을 싸는 등 분탕질만 실컷 하고서 그대로 방치해둔 것이다. 다음날 상앙은 100금의 상금보다 열 배를 올려서 1000금을 주겠다고 하였고, 이번에는 건장한 남자 하나가 속는 셈치고 그 나무를 짊어져다가 남쪽 성문 앞에 옮겨다 놓았다. 그러자 상앙은 그 자리에서 상금 1000금을 주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온 백성들은 '나라에서 하는 말'은 굳게 믿고 따르려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진나라는 상앙의 '법치주의'로 인해 빠르게 국력을 키웠고, 다른 제후국들에 비해서 월등히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허나 세월이 흘러 상앙도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죽을 위기를 간신히 피하고 이제 국경만 넘어가면 살 목숨이었는데, 국경에서 멀지 않은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쉬려다가 뒤쫓던 군사들에게 잡혀서 사형을 당하고 만다. 이제 곧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었던 상앙은 왜 어이없게 국경 근처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을까? 그건 바로 '자신이 만든 법' 때문이었다. 모든 백성들은 국경을 넘을 때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데, 급하게 도망을 치려다 '신분증'을 챙기지 못한 상앙을 의심한 여인숙의 주인이 국경 근처 군사들에게 신고를 했고, 지극히 당연한 '법적조치'를 취하려 출동한 군사들에게 꼼짝 없이 붙잡혔던 것이다.

어떤가? 굉장히 익숙한 이야기들이지 않은가? 그럼 이런 낯익은 옛이야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 '세 치 혀'를 잘 놀리면 벼락출세를 할 수도 있고, '세 치 혀'를 잘못 놀리면 한 목숨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패가망신을 당할 수도 있으니, 혓바닥(?)을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지 않겠는가. 바로 날카로운 독설, 패부를 찌르는 입담으로 단련된 '유세객'들의 출세에 관한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겠다. 제자백가들 가운데 '종횡가'로 구분되는 인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들은 '종횡가'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대치하는 평가를 마주하곤 한다. 대표적인 종횡사상가로 '합종연횡'을 주장하던 소진과 장의가 그렇다. 이들은 '귀곡자의 제자들'로도 유명할 정도로 입담이 훌륭한 '유세객'이기도 하다. 귀곡자의 제자들은 주로 '세 치 혀'로 전국에 유세를 펼쳐서 출세한 인물들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종횡가'는 말발(?) 하나로 세상을 주무르는 기세가 뿜뿜하는 엄청난 기량을 뽐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벼락출세한 이들의 결말이 좋은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아서 탈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했듯이 '혀로 흥한 자도 혓바닥이 뽑히는 형벌로 죽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종횡가의 인물들이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흙수저(?)들의 롤모델'이 바로 종횡가이기 때문에 아주 긍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신분이 천하거나 가진 재산이 없어서 '아빠 찬스(!)'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므로, 오직 '자신의 실력'과 '엄청난 노력'으로 우연히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당히 출세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횡가들은 '낭중지추'로 불리기도 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뜻으로 뛰어난 실력이 있기에 주머니 밖으로 (실력이) 삐쳐 나올 수밖에 없음을 빗대어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횡가들은 대부분 '실리주의'를 따른다. 허례허식 따위는 과감히 타파하고, 오직 '이득'을 추구하여 달콤한 결실을 따박따박 살뜰히 챙기면서 출세가도를 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횡가들의 최후가 그닥 좋지 않은 까닭은 이들이 '한미한 가문'에, '많지 않은 재산'으로 뒷배경이 튼튼하지 못한 탓에, 오직 '최고권력자의 동아줄' 딸랑 하나만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아, '권력자의 변심'으로도 종횡가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 치 혀'를 어찌 놀려야 한단 말인가? 벼락출세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아낌 없이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실을 얻게 된다면, 반드시 '겸손'해져야만 한다. 최고권력자 하나에만 매달리지 말고, 뛰어난 실력을 가진 '혓바닥'을 잘 굴려서 '자기 편'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서 자신의 목숨줄을 길게 늘릴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적까지 포용할 수 있는 넓은 아량을 보여주고, 감명시켜 기꺼이 '자기 편'이 되도록 해야만 한다. 그래야 '세 치 혀'가 간혹 할 수 있는 실수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뿌리 깊은 나무처럼 꿋꿋하게 설 수 있고,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종횡가'들은 변칙복서(!) 같은 경우가 많아서 기득권층을 짓밟고 출세하기 위해서 상당히 까부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 그렇게 출세하는 시작부터 '적(그것도 뿌리가 탄탄하고 세력이 큰 기득권층을)'으로 삼고 그 위에 올라서는 경우가 많기에 애초부터 착하게 살기는 글러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에 '종횡가들의 평가'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이다. 왜냐면 일단 '종횡가'들은 기존의 질서를 허물고, 그 위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새로운 질서'가 더 많은 국민들에게 공정성을 인정 받고, 든든한 지지를 받게 된다면 마냥 나쁜 것으로만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상앙'이다. 그는 약소국이자 후발주자였던 '진나라'를 다른 제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을 키워서 성장시킨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상앙' 단 한 사람이 이뤄낸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국력을 신장시키고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실력을 '규칙'적으로 착착 진행시켰던 그가 어찌 하다가 한 순간에 몰락의 길을 걷고야 말았을까? 그건 '권력의 자리'에 오른 이들의 불문율 '도덕적 타락(부정부패)' 때문이었다. 권세의 자리에 있으면 '어둠의 세력'이 마수를 뻗기 참 좋다. 이를 물리쳐야 '승승장구'를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은 '타락'하고 만다. 사람이다보니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선물 같은 뇌물'도 받고, '청탁 같은 이권'을 나눠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자기 잇속도 챙기다보면 '부정부패'에 어느새 몸을 담고 있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상앙도 그랬다. 그래서 그를 시기하던 세력에 역공을 당했고,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처형을 당하느니 '고향땅'으로 탈주를 시도했지만, 끝내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서 붙잡혀 죽고 말았다. 종횡가들의 최후가 대부분 이렇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서 어지러운 세상을 이겨낼 지혜를 얻고자 한다. 하지만 지혜 속에서도 '옥석'을 골라낼 줄 알아야 한다. '세 치 혀'를 잘 놀리면 위기를 기회로 삼고,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길을 엿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애써 찾아낸 길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트럼프의 관세 전쟁'으로 시작된 대한민국의 경제 위기는 '비상계엄'이란 또 다른 위기로 인해서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대위기를 초래할 뻔 했다. 하지만 '윤석열 탄핵'으로 급한 불을 끄고, 새 정부가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어나가며 그야말로 '전화위복'을 경험했다. 그치만 아직 완전한 위기극복을 한 것은 아니다. 전세계 경기침체는 아직 헤쳐나가지도 못했으며, 기후위기 속에서 여러 가지 환경재앙이 도사리고 있고,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의 위협이 대한민국에도 경고등이 켜지게 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험난한 여정을 헤쳐나가야만 한다는 중압감이 들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좌절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전세계를 이끌어나갈 '선도국가'가 되는 것 말이다. 아유~ 대한민국 같은 쬐끄만 약소국이 언감생심 야무진 꿈을 꾸느냐고 비아냥거릴 때가 아니다. 현시점에서 대한민국이 '선도국가'가 되지 않는다면, 나머지 다른 여정은 험난한 가시밭길이고 말 것이다. 오직 '선도국가'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바야흐로 '문화강국'으로 발돋움한 지금의 대한민국이지 않은가 말이다. 해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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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일반지능AGI,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스켑틱 SKEPTIC 38
스켑틱 협회 편집부 지음 / 바다출판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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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켑틱 38호 : 인공일반지능AGI,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스켑틱 협회 편집부 / 바다출판사 (2024)

[My Review MMLXXXVIII / 바다출판사 25번째 리뷰] 잡지를 읽는 재미는 솔솔하다. 하지만 '가격'과 '부피'는 감당하기 힘들다. 주간잡지는 말할 것도 없고, 월간잡지만 해도 연간 12권의 부피를 감당해야 한다. 월간잡지 3년만 구독해도 웬만한 책꽂이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그렇다고 철 지났다는 이유로 버리기에도 아까운 것이 바로 잡지다. 잡지란 특성이 아무 때나 심심풀이로 꺼내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해묵은 잡지라고 해도 꺼내 읽은 맛이 색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잡지의 가격이 점점 오르는 추세라서 권당 10000원이 훌쩍 넘으면 '연간 구독료'만 해도 (할인을 받았다해도) 10만 원이 훌쩍 넘게 된다. 이걸 감당할 수 있으면 '정기 구독'을 해도 상관이 없겠지만, 이게 또 은근히 부담이 되는 가벼운(?) 지갑이라서 고민이 되곤 한다. 그래서 적당히 절충한 것이 계절마다 출간하는 '계간 잡지'를 선택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다 눈에 띈 잡지가 바로 <스켑틱>이란 잡지였다. 물론 아직 '정기 구독'까지는 감당하지 못해서 '단행본'으로 띄엄띄엄 구매해서 보고 있다. 이번엔 38호, '인공지능'에 관한 주제를 테마로 삼은 내용이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하기로 2030년이면 인공지능AI가 일상생활에서도 '범용'으로 사용될 정도로 흔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인공지능이 '스마트폰'처럼 사람마다 한 대씩 소유할 수 있게 되고, 기업에서는 인공지능을 사람을 대신해서 '고용'해서 인건비는 절감하고, 생산력은 극대화해서 고성능의 제품을 값싸게 출하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심지어 기후변화에도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서 '최적의 에너지'만을 사용하여 산업을 돌릴 수 있게 되고, 온실가스나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공해물질을 '최소한으로 배출'하도록 조절할 수 있게 되어서, 인간은 힘든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쾌적한 지구환경 속에서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유토피아 같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물론, 이와는 정반대로 인간보다 똑똑해진 인공지능이 인간을 '노예'처럼 다루거나, 최적의 지구환경을 만들기 위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도리어 지구환경에 해악을 끼치는 인류를 절멸시키게 될 거라는 암울하고 끔찍한 미래를 점치는 이들도 있다. 과연 어떤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일까?

2030년이라고 해봐야 겨우 5년 뒤의 미래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상반된 전망을 내놓고 여지껏 '설전'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누구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인공지능'에 대한 논란이 심해지는 것일까? 그건 바로 '인공지능'을 인간과 꼭 닮은 형태로 만들려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인간처럼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형태의 인공지능을 만들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AI보다 발전된 형태인 '인공일반지능AGI'을 말한다. 물론 인간의 능력보다 훨씬 더 뛰어난 '초인공지능ASI'을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과 대화도 가능하고, 감정도 교감하며, 정서를 나눌 수 있는 비슷한 능력의 '인공일반지능'을 선호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아직까지의 기술력으로는 '인공지능AI'도 제대로 구현하기 힘든 수준이다. 거기에 인간과 같은 '무거운 책임감'을 가르치고, '범죄에 악용되지 않을' 수 있는 판단력까지 갖춘 좋은 친구 같은 '인공일반지능'을 완성하기까지 아직은 멀고 먼 단계를 넘어서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갈림길'에 놓였다. 현재 인공지능의 수준이 꽤나 '인간지능'에까지 접근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인간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도덕성을 갖추고, 폭력성은 띠지 않는 성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도, '인공지능'은 수열의 확률에 근거해서 '근사값'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게 뭔소리냐면,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똑똑하게 보이는 분야는 '정보처리'에서만이라는 점이다. 수많은 정보를 정말 짧은 시간 안에 '검색'하고, '원하는 정보'를 빠르게 찾아서 '결과값'을 보여주는 것에는 인간이 결코 인공지능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공지능에게 인간처럼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하다보면 어느 정도 '인간의 대화'를 흉내(?)내는 것 같긴 하지만, 그 대화는 '확률에 근거해서 나온 답변'일 뿐이란 말이다. 이를 테면, A라는 인간은 활동적이고 색다른 것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라고 하면, 인공지능은 그런 A의 성향을 파악해서, A가 좋아할 만한 취미나 상품, 음식 같은 것을 '추천'하면서, A의 선택취향을 '알고리즘화'하여 추후에도 비슷한 패턴으로 계속 추천을 하며 A를 만족시키고, 호감을 얻어서 '친밀감'도 높이고, '신용도'를 높일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A에게는 '인공지능이라는 절친'이 생긴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점점 '은밀한 사생활'까지 정보공유를 하게 되면, A는 결국 인공지능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왜냐면 인간 A는 점점 더 인공지능에게 의지하고, 의존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봐도 인공지능을 굳이 '인간'처럼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내놓은 대안이 인간에게 유용한 정도의 '수준 낮은 인공지능'을 만드는 선에서 개발을 멈추자는 주장이다. '특이점'이라고 불리는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인공지능'을 개발하지 말고,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정도로 유용한 선에서 개발은 제한하고,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이 가져올 폐해를 미연에 막아보자는 주장이다. 이 정도만 개발해도 '인간의 고된 노동'을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있고, 인간보다 뛰어난 면이 있으니 '훌륭한 개인 비서'로 활용하는 선에서 인간을 돕는 '보조역할'을 하는 것에 만족하자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제한'이 잘 지켜질 것인가? 낙관적인 전망만 하자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지만, 인공지능개발이 개인간의 경쟁을 넘어 '국가간의 경쟁'으로 확장이 되는 순간, 첨단기술개발에 사활을 걸고 뛰어들 나라들이 널리고 널렸기 때문에 우려스런 대목인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국제관계에서는 '힘의 논리'라는 단 한 가지 규칙만이 통용되고 있기에, 저들보다 앞선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무한 경쟁이 끝없이 벌어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초월한 인공지능의 성능이 '범용 인공지능'으로 활용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일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렇게 되면 '인공지능'으로 인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로 펼쳐지는 미래예측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인공지능 이전의 첨단기술'은 최종선택을 인간이 할 수 있었기에 최악의 상황까지는 진척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간 인류가 만든 핵무기의 수만해도 지구를 두 동강 내고도 남을 정도였지만, 여지껏 용케 쓰지 않을 수 있었다. 허나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똑똑해져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도록' 맡겨 버렸을 때, 인공지능이 인류를 절멸시키는 가공할 '선택'을 하지 않고 평화와 번영을 보장할 수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과연 인류는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을 완성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인공지능은 인류와 '공존'을 선택할까? 아니면 인류를 '절멸'시켜버리는 일을 감행할 것인가? 또 하나의 난제는 공존을 선택한 인공지능이 선하고, 절멸을 선택한 인공지능은 악한 것일까? 행여나 그 반대는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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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7 : 인간은 타고난 거짓말쟁이다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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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7 : 인간은 타고난 거짓말쟁이다>  정재승 / 정재은, 이고은 / 아울북 (2021)

[My Review MMLXXXVII / 아울북 32번째 리뷰] '뇌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철학과 과학의 난제가 갑자기 풀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던 심리학자들이 '뇌과학의 발달'과 함께 정신분석학을 진정 과학답게 풀어내어 '인간의 심리'도 뇌의 영역에서 풀어내기 시작했고, 인공지능로봇을 개발하던 과학자들도 '인간의 뇌'가 신체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밝혀내면서 '인공지능(AI)의 실현'을 해내면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이렇게 뇌과학은 오늘날의 여러 분야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고,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에게도 '과학의 신비'를 간접적이나마 체험해주려는 목적에서 이 책이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뇌과학'을 들여다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뇌과학'의 최신 소식을 접하며 일상에서 낯설지 않게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활용해서 일상생활에서 인간이 보이는 '행동 패턴'마저 뇌과학적 접근으로 해설을 덧붙이는 이야기를 늘상 접했기 때문에 크게 낯선 내용도 없는 편이다. 이번 7권의 주제도 '인간의 거짓말'에 관한 내용인데, 인간이 거짓말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면서 '거짓말을 잘 하는 인간 집단'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인간 집단'보다 훨씬 더 생존률이 높다는 결과치만 보더라도 거짓말을 잘 하도록 인간이 발달하게 된 까닭을 알 수 있다는 정보를 쉽게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뇌과학'이 얼마나 깊숙이 우리 일상에 적용되고 있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그러니 '뇌과학'이라는 이름만 듣고서 겁을 먹고 어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한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는 '아우레'라는 외계 행성에 살고 있는 아우린(아우레 사람)이 황폐해진 행성을 대신해서 살기 좋은 행성을 찾다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 행성에 정착해서 살기 위해 찾아왔다가 '인간 탐구'를 시작했다는 줄거리를 선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인간 탐구의 객관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 외계인의 존재 여부를 증명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단지, 어린이 독자들의 '관심도'를 높이기 위한 흥미로운 이야기꺼리를 삽입한 거라고 보면 좋겠다. 딴에는 '뇌과학'에 대한 정보에 더해서 칼 세이건이 주창했던 'SETI프로젝트'를 다룬 '천문과학' 정보를 다루고 있다고 보면 좋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이게 '이질적인 요소'로 다가와서 몰입을 방해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억지로 이해하자고 한다면 '지적인 외계인'이 지구에 찾아와 '인간 탐구 보고서'를 작성하여 인간 탐구에 관한 객관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지만, 외계인의 존재가 확인된 바가 없는 현실에서 '인간 탐구의 객관성'을 다루어봤자,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성'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닥 신빙성을 얻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외계 종족이 자신들이 지구를 차지하기 위해서 심심하면 '인간 제거'를 운운하고 있는 내용이 하릴없는 '외계인 공포심'만 부추기는 것 같아 우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암튼, 인간은 거짓말을 능숙하게 잘 하는 것으로 상당한 이득을 얻는 생물이라는 것이 이번 책의 주제다. 다른 생물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데 반해, 인간은 왜 거짓말을 잘 할 수 있도록 진화한 것일까? 물론, '언어체계'가 발달한 생물도 지구상에 '인간'이 유일한 탓에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따로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도 남을 속이는 것(거짓)이 나쁜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 나쁜 행동을 능숙하게 잘 하는 인간 집단만 고도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곤 한다. 과연 왜 그럴까?

물론, '나쁜 의도'로 하는 거짓말을 잘 한다면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득해서 잘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도 함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좋은 의도'로 거짓말을 능숙하게 잘 한다면 이와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예쁜' 아내가 '맛있는' 아침을 해줘서 '기분 좋게'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선의의 거짓'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한 침대에서 일어난 아내의 몰골(!)이 예쁠 리도 없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대충 차린 아침밥이 일류 요리 뺨치게 맛있을 리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도 헝클어진 머리에 눈곱도 떼지 않고 손도 대충 닦은 채 가족을 위해 아침밥을 준비한 '아내의 노력'이 가상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차려줬다면 '위대한 아내'라고 추켜세워도 모자를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노력하고 애쓴 아내가 예쁘지 않고, 그런 아내가 차려준 아침밥이 맛 없을 리도 없는 셈이다. 그렇기에 '선의의 거짓말'은 좋은 의도로 한 거짓말이고, 비록 '거짓말'이길 하지만 절대로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우리 인간은 이런 고도의 언어체계를 갈고 닦은 생물로 진화했다. 그리고 지능적으로도 '선의의 거짓말'을 기본 장착한 인간 집단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 반대의 인간 집단이 있었더라도, 그 집단은 곧 '멸종'되고 말았을 것이다. 예쁘지도 않은 아내가 맛 없는 아침밥을 차려줄 리도 없으니 쫄쫄 굶거나,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인간 집단은 굶주림을 면치 못하고, 일의 성과도 형편 없어서 '절멸의 수순'을 밟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짓말' 하나에도 뇌과학적 이야기꺼리가 충만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 책에는 그런 알찬 정보들이 가득하다. 어린이책이지만 부모가 먼저 읽고 자녀에게 권해줘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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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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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 강대진 / 민음사 (2009) [원제 : Oidipous tyrannos]

[My Review MMLXXXVI / 민음사 25번째 리뷰] 읽을 때마다 '처음 읽은 듯' 새로운 느낌을 받는 것은 <고전>이 주는 선물 같다. 이전에는 '같은 책'이지만 '다른 출판사'이기 때문에 드는 느낌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곤 했는데, 그보다는 '읽고 또 읽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쌓는 경험(혹은 연륜)이 크게 작용하는 듯도 싶다. 왜냐면 출판사까지 같은 '동일한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종종 받기 때문이다. 왜 그 때는 느끼지 못했던 느낌을, 이번에는 느끼게 되었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려면 '그간에 쌓은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암튼, 지난 번에 읽은 <오이디푸스 왕>(이미영/별글)에 이은 '민음사' 버전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다.

이 책의 뒤친이 '강대진'의 해석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왕>은 일종의 '수사극(추리물)'으로 짜여졌다고 한다. 희랍(그리스) 테바이에 돌고 있는 역병의 근원이 무엇인지 밝히는 과정이, 마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명탐정이 단서를 찾고, 증거를 모아서 최종적으로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라고 외치는 장면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란다. 그 과정에서 테바이의 이전 왕이었던 '라이오스를 죽인 자는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불거졌다가, '내(오이디푸스)가 그 범인인가?로 바뀌고, 끝에는 '나(오이디푸스)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되었단다.

이걸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까닭은 '독자의 시선'에서 보면, 그 범인이 누구인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오이디푸스 왕의 친부가 라이오스 왕이고, 우연한 사고(피할 수 없는 운명)로 인해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누구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잠시 잠깐의 화를 참지 못하고 살해를 저지르기 때문에, 사건 자체의 '비극성'보다 정해진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비애'가 더 먼저 다가오기 때문에 '수사극'이라는 느낌을 덜 받게 된다. 애초에 범인이 누구인지 다 아는 마당에 무슨 '추리'를 하려 든단 말인가. 그런 까닭에 <오이디푸스 왕>을 읽고서 '추리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다.

하지만 극중 인물인 '오이디푸스'는 다르다. 그는 코린토스를 떠나 테바이로 가는 도중에 '스핑크스가 낸 문제'를 풀어내고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는 일을 겪는다. 다시 말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사건의 해결자'가 된 셈이다. 그리고 테바이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결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에 '임금이 비운 자리'를 꿰어차고 임금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서 맞이한 '새로운 문제'는 바로 테바이를 급습한 정체 모를 역병(전염병)을 막아내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밝혀내려다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자신이 어릴 적에 받았다는 '신탁(운명)'을 피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정해진 운명'대로 따르게 되었다는 '비극'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많은 독자들이 '필멸자의 숙명'이고,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비애'라는 주제에 꽂히고 만다.

그렇지만 <오이디푸스 왕>의 결말이 꼭 비극인 것만은 아니다. 필멸자인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마주할 용기를 짜내어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찔러 앞 못보는 봉사가 될지언정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다 지은 죄를 달게 받기 위해서 '고행'을 스스로 자초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는 약해 빠진 필멸자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신이 정해준 운명 따위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두 발로 걸어 나아가며 '자신이 지은 죄값'을 톡톡히 치르겠다는 다짐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런 오이디푸스 왕의 모습을 보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돌을 던질 용기가 있는 자는 얼마나 될 것인가?

한편, <안티고네>는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적 성격으로 읽어내는 맛이 톡톡한 작품이다. 특히, 오늘날에는 '국가가 정한 명령'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전통적, 관습적으로 지켜온 도덕'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따져보는 맛도 쏠쏠하다. 우리는 '법치주의'를 내세워 정해진 법대로 따르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사법정의'가 무너지고 법의 형평성이 무너진 상황에서 '맹목적인 법치주의'는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원흉이 된다는 사실을 '12·3비상계엄사태'부터 '윤석열탄핵'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국가가 정한 명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의롭고,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다시 말해, 권력을 가진 집단이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려고 사법을 악용하려 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일들이 '민주주의'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던지라 정말이지 식겁한 사태였다.

그에 맞선 '안티고네'는 인간이기에 마땅히 해야만 할 도리를 따른다는 논리가 얼마나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 아무리 '국가가 정한 명령(법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정의롭지 못하고, '인간답게 살 수 없는 법률'이라면 법에 저촉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저항하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 어떤 걸림돌이 있더라도 정정당당하게 행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다행히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들은 '비상계엄'이 부당한 것임을 잘 알고,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을 되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극우주의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극한의 갈등은 전쟁까지 불사하고, 강대강 대치에서 한발짝이라도 물러서면 패배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서 끝장 날 때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답게 살 권리'를 지키는 것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대원칙을 위해 서로 양보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티고네>의 결말을 보면, 모두가 죽는다. 오직 한 사람 독재자처럼 굴었던 크레온만 빼고 말이다. 그는 '안티고네'가 자신이 정한 법을 어기자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었지만, 종국에는 크레온 자신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크레온이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으면 '악인'이 달게 받는 죄값이라며 고소해 하기라도 했을텐데, 크레온은 뒤늦게 나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안티고네'에게 내린 형벌을 수습하려 들었지만, 너무 늦은 탓에 더욱 끔찍한 참극을 겪게 된 셈이다. 어쨌든 대부분 '강대강의 대치'는 대개 이런 죄값을 치르게 하고, 참극을 면치 못하게 만들곤 한다. 더구나 전쟁이라도 벌이게 되면 더욱 끔찍할 수밖에 없다. 전쟁의 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승자라고 해서 '남는 장사(?)'를 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러우전쟁'이나, '이팔전쟁', '미국vs이란' 가운데 러시아의 푸틴,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가 승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을까? 그들의 결말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그 말썽을 부려놓고도 '영웅' 대접을 받으며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산이다. 그리고 그들이 벌여놓은 짓으로 인한 '후폭풍'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작게는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큰 폐해를 남기고, 크게는 전 지구적인 참극을 남겨 놓을 것이 가능성이 농후할 뿐이다.

그런데도 어찌하며 고집불통인 권력자는 계속 나오는가? 이는 권력의 속성이 '잘못'을 인정하면 권력을 내려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자는 '잘못'을 시인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도, 크레온도 똑같이 '자기 잘못'을 제 때에 시인하지 않고, 고치려 들지 않았기에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권력자들은 처음엔 인지하지 못해 잘못을 고치지 못했더라도, 인지한 뒤에도 잘못을 시인하지 '못한다'. 시인하는 순간 권력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장을 본다. 어차피 스스로 내려가나, 끌려서 내려가나 '똑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허나 결코 똑같지 않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순간 '두 눈을 찌르는 형벌'을 스스로 내리고 권좌에서 내려와 한 사람의 죄인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오이디푸스 왕을 동정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테바이 사람들이 역병에 시달리고 죽음을 당했지만, 결코 오이디푸스 왕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그건 정해진 운명으로 인한 비극이었고, 인간 오이디푸스는 왕의 위치에서 테바이 국민들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크레온은 조국을 지켜낸 영웅을 떠받들고, 외국 군대를 몰고온 배신자를 처벌하는게 공정하다고 믿고 강행했지만, 자신이 직접 만든 법을 어긴 백성에게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고압적이고 강제적인 처벌만 고집하다가 결국엔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고 만 비극의 장본인이 되었다. 이런 크레온을 두둔하는 이들이 있었을까? 법치주의를 수호한 위대한 영웅이라고 떠받드는 이들이 있었느냔 말이다. 적어도 크레온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무도한 권력자의 비참한 결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아이아스>와 <트라키스 여인들>은 임팩트가 그닥 남지 않은 작품이었다. 아이아스는 굽힐 줄 모르는 영웅적 기질을 잘 보여주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닥 인기 있는 영웅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자신의 기준'으로 맞추지 못한다면 '자신을 소멸'시키는 쪽으로 선택하는 모습이 너무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나마 '안티고네'는 도덕적인 전통에 따라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 했기에 많은 이들에게 정당성이라도 얻었지만, 아이아스는 자신이 영웅인데 '영웅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 것에 역정을 내고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버리는 버리고 말았기에 공감대가 좀 떨어졌다. <트라키스 여인들>에서는 정말 유명한 헤라클레스가 등장해서 눈요기를 할 수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영웅적인 모습의 헤라클레스보다는 광기에 빠진 모습만 보이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만 보여주었기에 그닥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더구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데이라네이라'는 공주 신분인데도 '헤라클레스의 아내' 역할로 만족하고, 능동적이지 못한 수동적 모습만 연출하다 끝내 파멸하고 마는 인물로 등장해서 실망이 컸다.

나는 <고전>을 읽을 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며 읽기보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전>을 읽어야만 하는 까닭을 밝히는 쪽으로 읽으려 노력한다. 아무리 오래된 작품이라도, 그 안에 잠재된 '권위'와 '명성'에 잠식 당해서 '과거의 고찰'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오늘날의 독자들이 굳이 '낡은 작품'을 귀한 시간을 내어 읽을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전>을 읽으면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찾는 느낌으로 읽어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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