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온다, 스마트 시티 와이즈만 미래과학 14
김성화.권수진 지음, 원혜진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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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지 않은 미래에 '스마트 시티'가 생긴단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정교한 '센서'가 온갖 사물에 장착되고 온 도시를 뒤덮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컴퓨터에 '복제'가 가능해지고, 그렇게 복제된 도시에 온갖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태풍이나 홍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뿐만 아니라 도시의 전력상황과 교통상황 등 '모든 정보'를 한 번에 다룰 수 있어서 안전하고 편리한 도시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단다. 더구나 '사물 인터넷'으로 도시의 모든 것을 '연결'하고, 자율주행차를 비롯해서 온갖 편리한 시스템을 갖추게 될테니, '스마트 시티'가 완성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걱정을 덜고 그저 '스마트 시티'가 베푸는 안락함에 만족하며 살기만 하면 될 것이다.

 

  심지어 '에너지'조차 자급자족이 가능해질 것이다. 지금도 필요한 전력을 얻기 위해 화력발전소와 핵발전소를 통해 충분한 양을 얻고 있지만,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방사능폐기물'을 쏟아내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반해, 스마트 시티에서는 도시 전체에 풍력발전소와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할 수 있게 되어 보다 청정한 에너지를 필요한 만큼 만들어내고 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핵발전소보다 더 적은 양의 전력을 생산할테지만 도시 전체에 필요한 전력양을 '빅데이터'로 한 눈에 알 수 있을테니, 거의 정확한 수요예측으로 꼭 필요한만큼 만들어서 꼭 필요한 곳에 알맞게 쓸 수 있게 '통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란다. 더구나 '남는 전력'이 있다면 전력을 모았다가 '필요한 곳'에 되팔 수도 있게 된다고 한다.

 

  더구나 미래의 농사는 '스마트 팜'으로 대체될 것이란다. 그동안엔 넓은 경작지가 필요했지만, '스마트 팜'은 수평적으로 넓힐 필요가 없이 '수직적'으로 높이 쌓을 수 있게 된단다. '스마트 팜'은 토양에다 직접 씨앗을 뿌려 태양빛과 물을 공급하는 것이 아닌, '수경재배' 방식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방식으로는 사막이나 우주에서도 얼마든지 '식물(채소)'를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이제 농사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미래에는 사람이 직접 농사를 짓는 방식이 아닌 '스마트 파머(인공지능)'가 대활약을 하며 온 도시에 필요한 만큼의 '신선채소'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단다.

 

  이처럼 온 도시가 '통제'되고 '계획'한대로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면 도시에 사는 사람은 편리함을 넘어 행복해질 것이 틀림없겠지만, 문제는 '기업'이 유지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장경제'가 완벽한 자급자족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더구나 '스마트 시티'를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이 한 나라에만 독점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 기술이라는 것이 그닥 어려운 기술력이 아닌 탓이다. 그래서 '한 나라'에서 시작만 하면 다른 나라도 서둘러서 도입을 해버릴 것이기 때문에 '기술력 선점'의 이점조차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적다. 오히려 후발주자들이 선발주자들의 실패를 엿보고 더 나은 시스템을 구축할테니, 이래저래 '퍼스트 펭귄'이 되고 싶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스마트 시티'를 운영하기 위해서 온 도시에 '센서'를 장착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악명 높은 '빅 브라더'를 불러오지는 않을지 심히 걱정스럽다는 점이다. 정부가 또는 '특정기업'이 빅데이터를 통해 온갖 정보를 끌어모아 악용할 사례는 불을 보듯 뻔하게 실행될 것이며, 부정한 세력에 의해 개개인이 '철저히 감시' 당하면서 '특정권력집단'에 반대하는 성향의 사람들만을 골라내 벌건 대낮에 '공공력'을 투입해서 잡아가 감금하고 처형해버릴 우려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테니 말이다.

 

  인류역사는 늘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끝내는 디스토피아를 맞은 적이 참 많다. 태평성대를 맞이한 줄 착각하는 순간 독재권력이 만들어져서 힘 없는 백성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다 끝내 백성들의 분노로 혼란해지고, 혼란해진 틈을 타서 여기저기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 전쟁을 일삼고, 그 끝에 한 나라가 망하고 다시 새 나라가 들어서는 '격동의 시대'를 되풀이하곤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마트 시티'와 '빅 브라더'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밖에 없다. 사물인터넷으로 온 도시가 초연결된 상황은 '개개인의 일상'이 무방비 상태로 감시 당하는 상태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개개인의 정보가 일일이 감시 당하고 '통제'되는 순간에 '빅 브라더'로 변용되어 악용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마트 시티'는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온 도시를 '센서'로 도배를 하고, 그 센서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줄 '초연결' 사물 인터넷이 절대로 가동되지 않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이미 '빅데이터'는 활용되고 있고, '사물 인터넷'로 연결된 물건들이 전 세계에 200억 개가 넘었으며, '자율주행차'를 비롯해서 '스마트 팜' 같은 미래기술은 성큼 다가와 이미 '현재'에 구현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만약 이 속도라면 멀지 않은 미래에는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스마트 시티'는 완성이 될 것이고, 매우 편리하게 이용하며 안락함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 행복이 불행으로 바뀔 '빅 브라더의 각성'을 품은 채로 말이다.

 

  밝고 아름다운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게 해야 할 일은 '철저한 대비' 뿐이다. 빅 브라더가 될 것이 뻔한 요소는 강력하게 막아놓아야만 한다. 물론 '종이 한 장의 차이'라서 강력하게 막으면 막을수록 편리하기는커녕 불편만을 초래할 것이다. 그래도 악용되고 난 뒤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대가'를 적게 치를 것이니 '강력한 대안조치'를 만들어놓은 뒤에 추진하는 지혜를 우리 모두가 모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입에 달콤한 것이 몸에는 해롭고, 입에 쓰디쓴 것이 정작 우리몸에는 더욱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마트 시티'가 가져올 달콤함보다 '빅 브라더'라는 쓰디씀을 먼저 경계하고 충분한 대안을 마련해야만 한다. 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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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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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움 출판사에서 '새로운 뒤침책'들을 내놓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뒤침(번역)이란 시대가 바뀌면 새로이 바뀌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이 꾸준히 뒤쳐지는 것일테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엔 씁쓸한 진실이 감춰져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공을 들여 새롭게 뒤쳐내었다해도 독자들의 관심밖으로 내몰려 버리면 '출판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출판시장은 한없이 좁아터져서 이런 문제를 쉽사리 넘길 수 있는 출판사는 몇 안 된다는 것 또한 크나큰 문제다. 나도 이런 문제를 최근에 들어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같은 책'을 '여러 출판사'를 통해 접해보니 알게 된 씁쓸한 진실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나 좁아터진 마당에 '메이저 출판사'만 살아남고, 그마저도 '온라인 서점'이 매출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니 '소규모 출판사'나 '오프라인 책방' 들은 죽을 맛일게다. 그나마 독자들의 관심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솟아날 구멍이라도 찾은 듯 활기를 띨 수 있을텐데 정녕 '쉬운 길'은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새움 출판사가 '새로운 뒤침'을 내세워서 기존의 메이저 출판사의 책을 이겨내려는 노력을 보이니 열렬히 응원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허나 독자들도 안다. 남을 시기하는 마음, 다른 책의 흠을 들춰내는 따위로는 결코 '좋은책'으로 주목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늘 바른 길을 걸어야만 결국에는 '좋은 결실'을 맺는 법이다. 그래서 새움 출판사가 '다른 뒤침'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리는 것으로 족하지, 다른 출판사는 '그르고' 자신만이 '옳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안타깝다. 물론 애초에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믿는다. 예전의 뒤침에 '잘못'이 있으니, 이를 바로 잡아 '새로 뒤쳤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그런 뉘앙스가 살포시 내려앉았다는 것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독자들도 '새로운 뒤침'을 접하면서 '예전의 뒤침'의 흠만 꼬집으며 저울질 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용감하게 '새로운 뒤침'을 내놓은 후발 주자들에게 힘찬 응원을 해줬으면 좋겠다. 커다란 강물을 이루기 위해선 '새로운 물결'이 늘 밀려와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도 벌써 세 번째 리뷰다. 첫 번째는 '개츠비'를 주목했고, 두 번째는 '데이지'에 관한 썰을 풀었으니, 이번엔 작중화자인 '닉'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닉 캐러웨이는 데이지와는 사촌관계이고, 톰 뷰캐넌과는 대학동창 친구관계다. 그리고 개츠비와는 옆집에 사는 이웃지간이고 말이다. 그런 닉이 사촌도 아니고 동창도 아닌 '낮선 이웃'에게 호감을 갖고 그의 이야기를 호의적으로 쓴다는 사실이 이 책의 흥밋거리 가운데 하나다. 닉은 왜 그랬을까?

 

  굳이 따지자면, 이 책에선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귀족적인 분위기를 띠는 '이스트에그'와 서민적인 분위기를 띠는 '웨스트에그' 사이에 존재하는 벽 말이다. 톰과 데이지가 살고 있는 곳이 '이스트에그'이니 톰과 데이지도 신분적으로 귀족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미국 동부지역에 살면서 서부지역의 촌뜨기와는 사뭇 다른 고풍스런 환경속에서 유복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웨스트에그' 지역은 주로 서민들이 살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스트에그' 방면으로 출퇴근을 하는 평범한 이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역의 출신들도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먼 조촐한 생활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개츠비만이 '웨스트에그'에 살면서 '이스트에그' 못지 않은 화려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기묘한 풍경속에 닉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개츠비의 이웃'이 되고 만 것이다. 자신의 출신이 '이스트에그'이면서도 말이다.

 

  그런 닉이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자신의 사촌인 데이지의 결혼생활이 어딘지 잘못되어 가고 있었고, 그 원인이 자신의 친구인 톰의 '바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접 겪고 알게 된 것이다. 비록 톰은 자신의 아내에게 '그 사실'을 감추려고 애쓰지만, 시도때도 없이 걸려오는 '남편을 찾는 전화'를 통해 데이지도 얼마간은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닉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친척에게 속시원히 '친구의 비밀'을 까발리고서 '한 가정의 파탄'을 지켜보는 것이 마땅했을까? 일단, 닉은 관망하는 것을 택한다.

 

  그 와중에 닉은 개츠비의 초대장을 받고 개츠비와 급속히 친분을 쌓는다. 비록 개츠비가 제법 훌륭한 '귀족 흉내'를 내곤 하지만, 그의 출신배경을 의심케 하는 의뭉스러움 때문에 닉은 '개츠비의 진실'을 파악했지만, 그의 순진한 열정과 거침없는 행동 덕분에 속내를 터놓고 지낼 정도로 급속히 친해졌던 것이다. 개츠비의 진실이란 그의 출신배경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의 소탕한 성격으로 인해 '악의 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가 악당(?)들과도 사업을 하는 것을 보며 '범죄자'라는 의심도 하지만, 그의 소탈하고 진솔한 행동거지에 그런 의심 또한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개츠비가 '초대장을 보낸 진실'을 알고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기까지 한다. 왜 그랬을까?

 

  그건 그와 데이지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톰과 결혼하기 전부터 둘을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둘 사이의 걸림돌(신분적 차이, 경제적 차이 따위)만 없었다면 데이지는 톰과 결혼하지 않고 개츠비와 결혼했을 거라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결론을 내렸기에 닉은 자신의 사촌이자 친구의 부인인 데이지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어차피 톰도 '목하 불륜중'이었으니 말이다.

 

  자칫 '막장 드라마'의 소재로 전락할 이 이야기가 매력적인 까닭은 '개츠비의 순수하고 순진한 사랑' 때문이라고 이미 밝혔다. 닉은 그런 개츠비의 매력에 빠져서 '개츠비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응원하는 쪽을 택했던 셈이고 말이다. 하지만 데이지는 '개츠비의 사랑'을 받을 만큼 썩 좋은 여자는 아니었다. 개츠비의 사랑에 감동하고 톰과 헤어질 결심까지 하지만 끝내 '톰을 사랑하지 않고 개츠비를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데이지는 '두 남자'를 모두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 남자도 좋고 저 남자도 좋으니 '이남자저남자다내꼬~'라는 심보가 작용한 듯 최종선택을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뤘기 때문이다. 그러다 '교통사고'를 내고서 그대로 내달리듯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모든 책임은 '순진한 개츠비'에게 다 떠넘기고서 말이다. 그리고는 개츠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과 함께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리고 만다. 그 사이에 개츠비는 살해를 당하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는커녕 사과도 않고, 흔한 꽃 한송이 보내지도 않고 외면해버린다.

 

  닉은 이런 두 남녀를 지켜보며 절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토록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세상을 비관하는 한편 '개츠비의 순수성'을 위대하다는 표현으로 승화시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런 닉의 절망감을 알아차린 듯이 '미국사회'는 대공황을 맞이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미국의 독자들이 이 책을 사랑했던 까닭도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결코 '남일'이 아니며, 닉의 판단과 결론에 '암묵적인 동의'를 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결코 '찌질한 남자의 징징대는 러브스토리'가 될 수 없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닉'과 같은 작중화자가 등장한다면 무엇이라 말할까? 개츠비와 같은 '순수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까? 과연 대한민국에도 '순수, 그 잡채'인 존재가 있기는 한 걸까? 난 있다고 믿는다. 만약 없다면 대한민국은 진즉에 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이 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전세계가 부러워할 선도국가로 거듭나고 있다면, 그건 바로 '순수한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닉이 열렬히 응원하던 '그 순수'로 가득찬 사람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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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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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같은 책'을 '여러 출판사' 버전으로 읽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문학적인 소양'이 부족한 탓에 직접 읽고 비교하며 두루두루 견문을 넓히려는 목적이 가장 크지만, 부족한 소양으로나마 '뒤침(번역)의 차이'를 직접 느껴보기 위해서다. 이 책도 벌써 세 번째 읽고 있지만, 최근에는 '황금가지' 출판사와 '해문출판사'를 읽었기에 둘의 차이점을 대조하며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먼저,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책은 2004년 경에 뒤쳐졌고, 해문에서 출간한 책은 1991년 경에 뒤쳐진 듯 보인다. 뒤쳐진 때와 출간한 때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정확한 뒤침 시기는 그보다 이른 것으로 짐작되지만, 둘 사이의 시기가 벌써 10년 이상 벌어진 것을 보면 벌써 확연한 차이가 눈에 띄였다. 가장 큰 차이는 '뒤침투'가 사뭇 달라졌다. 즉, '뒤쳐진 문장이 품고 있는 뉘앙스'가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황금가지에서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외판원이 '스타킹'을 판매한다고 뒤쳐졌지만, 이 책, 해문에서는 '명주양말'이라고 뒤쳐졌다. 비단실로 짜여진 양말이라니, 정말 세월의 격차가 느껴지지 않는가. 또 하나는 황금가지에서는 푸아로가 '프랑스어'를 습관적으로 구사하는 것을 십분 살려서 뒤쳐진데 반해, 해문에서는 푸아로의 말투조차 '우리말'로 뒤쳐진채 유려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으로 뒤쳐졌다. 이는 두 출판사 사이의 가장 큰 차이이므로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알다시피 이 책의 '배경'은 영국이다. 하지만 명탐정(비록 은퇴하긴 했지만)으로 활약하는 에르퀼 푸아로는 벨기에 사람으로 '벨기에식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영국인들이 스스로 문제시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에 대한 작가의 의향이 다분히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영국 작가인 아가사 크리스티는 영국 독자들에게 '외국인들도 영국인들만큼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란 말이다. 따라서 영어권 독자들은 이런 작가의 의향까지 '영어 원문'을 읽으면서 함께 느낄 수 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독자들은 이미 '우리말'로 뒤쳐진채 이 책을 읽기 때문에 굳이 푸아로가 영국을 무대로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동시'에 읽어 내려간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왜냐면 '영어'도 우리말로 뒤쳐졌고, '프랑스어'도 우리말로 뒤쳐진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황금가지 출판사는 굳이 영어는 우리말로 뒤쳐놓고서 '프랑스어'는 푸아로의 입을 통해 전달되도록 해놓았다.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물론, 원작에서 외국인이 전달하는 '이질감'은 충분히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국사람들에게 '프랑스 발음'은 '제2외국어' 수준으로 이해될 소지가 충분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에겐 '영어' 이외에 다른 외국어를 즉석으로 해석하고 뜻을 이해할 사람이 그닥 많지 않음을 고려한다면 우리 독자들에게 상당히 어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을 게다.

 

  물론, '모나미는 내 친구' 정도는 상식적으로 익히 알고 있을 테지만, 푸아로가 헤이스팅스를 부를 때 "Mon Ami~"라고 지칭하는 것이 단박에 이해될 한국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며 범인을 찾으려는 '추리소설'의 성격상 술술 읽어내려가는 '그 맛'을 제대로 살린 '해문출판사'의 책이 내게는 더 친숙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는 바다. 다만, 이 책이 뒤쳐진 때가 무려 30년 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뒤쳐진 말투'가 상당히 옛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추리소설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해문출판사'를 권장하고, 좀 더 세련된 읽기를 원한다면 '황금가지'를 추천하는 바다. 물론 또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게 된다면 달라질 수 있음을 알리는 바다.

 

  이로써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두 가지 버전으로 읽어나갈 명목이 생겼다.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으로 짐작되지만 하나씩 비밀을 벗겨나가는 즐거움으로 리뷰를 할 작정이다. 추리소설의 맛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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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1
아서 C. 클라크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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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동안 '시간을 거슬러'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좋았다던가 나빴다던가...그런 느낌이 아닌 그냥 먼 옛날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말이다. 어린 시절 과학자를 꿈꾸던 나에게 '공상과학'은 상상력을 펼쳐내는 탈출구 같았다. 그래서 '천문학'에 유독 관심이 많았고 낮이고 밤이고 하늘에 떠 있는 천체에 가없는 관심을 쏟았더랬다. 하지만 'SF소설'을 쉽사리 접하긴 힘들었다. 책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아무도 나에게 '이런 책'이 있노라고 알려주지 않았던 탓에 아이들이 돌려보던 '만화책'이나 '과학잡지'를 통해서 겨우 공상과학을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눈곱만큼 적은 양으로도 나에게 엄청난 상상력을 심어주었는데, 만약 제대로 된 <SF소설>을 일찍부터 접했더라면 어땠었을까?

 

  그러다 겨우 90년대 들어서야 아이작 아시모프를 비롯해서 아서 클라크, 그리고 프랭크 허버트를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입시와 취업전선에 뛰어들던 시절이라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의 '공상과학' 섭렵기는 21세기에 접어들어서야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먹고 살기 바쁘기는 20대나 30대에도 계속이었기에 40대나 되어서야 하나둘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 이제 그 시작이다. <듄>을 구매했고, <파운데이션>도 구매했다. 이제 <스페이스 오디세이>마저 구입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21세기에 들어서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읽게 되니,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뭔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속에 구현된 '공상과학적 상상력'이 50년 전에는 대단히 센세이션한 놀라움이었을테지만 2022년이 되어서 읽으니 '과거의 유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인우주선'이 토성의 위성까지 탐사를 떠난다는 허무맹랑한(?) 설정이 실현되지 못했음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탓에 읽는 내내 '기대감'을 선사해야할 스펙타클함이 무뎌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책이 'SF소설계의 고전'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읽는 것과 진배없을 것이다. 2001이라는 숫자는 그저 '숫자'일 뿐이니 조금쯤 늘려서 3001이라고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 책속에 등장하는 '과학적 사실'은 살짝 뒤로 재껴놓고, 이 책이 말하고픈 '본심'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쪽으로 방향을 살짝 틀면 '고전의 깊은 맛'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속의 줄거리는 인류의 초창기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직 마땅한 '도구'를 발견하지 못해 최상위포식자들의 먹잇감 신세를 면치 못한 원시 구석기시대 말이다. 주인공은 '달을 감시하는 자'다. 아직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이 발달하지 못해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지내지만 '이름'이 뜻하는 바를 짐작하면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를 짐작케 해주는 이름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반투명한 '크리스탈'이 불시착하는 사건이 벌어진 뒤부터 '달을 감시하는 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게 된다. 그 전에는 표범과 같은 맹수가 나타나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작정 도망을 가야만 했고, 다른 동료가 표범에게 잡히더라도 구해줄 생각은 해줄 수 없는 나약한 '원숭이인간(유인원)'에 불과했는데, 크리스탈에 시선을 빼앗기고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달을 감시하는 자'는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가슴속에선 용기가 샘솟았다. 그래서 결국 손에 쥐기 딱 알맞은 돌멩이(석기, 주먹도끼)를 쥔 채 표범과 당당히 맞서 싸워 '표범고기'를 먹어치우는 쾌거를 거둔다. 이 일을 계기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최상위포식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1990년대가 되었다. 인간은 '우주선'을 띄워 '달기지'를 건설하고 수시로 여행을 떠날 정도로 '고도의 지능'을 갖추게 된 어느 날, 달기지에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져서 '폐쇄조치'가 내려졌다는 괴소문이 돌게 되었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달기지로 향하는 '플로이드 박사'는 비밀스런 임무를 띄고 홀로 떠나게 된다. 달에 도착해서 그가 마주한 것은 달표면에서 깊이 감춰진 TMA-1(티코 석판)였다.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로 이 석판은 만들어진 지 무려 300만 년이나 되었고, 발견 당시 태양빛에 반응해서 엄청난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쏟아내고서 잠잠해진 상태라는 결과를 보고 받는다. 300만 년이라니...인간이 만든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외계 생명체(ET)'가 존재하는 것이고, 심지어 '지적인 존재'가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런 '고도의 과학발달'을 이룬 지적인 외계 존재가 하필이면 지구의 위성인 '달'에 이런 물건을 심어두었단 말인가? 혹시 '지구침공'을 위한 전초기지인 것인가? 아니면 정반대로 선한 목적을 두었다면, 인류의 지능이 '자신들의 물건'을 발견할 정도로 발전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고, 그렇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던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디스커버리 탐사대원들'은 목성을 지나 토성을 향해 우주선을 파견한다. 이 과정에서 인공지능 컴퓨터인 'HAL 9000'이 비밀 임무를 감추기 위해 탐사대원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지구로부터 16억킬로미터나 떨어진 우주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대원들은 답답함을 넘어 막막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주선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진 탓에 사건은 숨가쁘게 돌아가고 그 과정에서 다섯 명의 탐사대원 중 넷이 죽고 만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보먼'은 겨우 미쳐버린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든 다음 지구와 통신을 통해 '비밀 임무'을 전해듯고 홀로 토성의 위성인 '이아페투스'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밀 임무'의 목적지인 TMA-2(스타게이트)를 발견했는데...

 

  이야기는 흥미진진하지만 '고전물'이 되어버린 터라 요즘 독자들에겐 '스펙타클'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속에서라면 5분안에 마무리될 '장면묘사'를 50페이지가 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묘사라는 것이 50년 전에나 흥분할 것만 같은 '무엇'이었기에 근래의 화려하다 못해 짜릿한 '장면연출'을 직관한 독자들에겐 별다른 감흥조차 주지 못할 '형형색색의 파노라마'를 펼쳐보이는 진부함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난관을 참고 끝까지 읽다보면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만 할 진정한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외계 지적생명체와의 만남' 말이다.

 

  사실 'SF소설'에서 외계생명체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도 존재하는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확률적인 계산'은 이미 해놓은 상태다. 온 우주를 통틀어서 '태양'과 비슷한 항성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 항성들이 '지구형 행성'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계산해 냈다. 그 결과, 광활한 우주속에 '지구인'과 같은 '지적인 존재'가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문제는 남았다. 우주가 너무나도 넓고 텅빈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지구가 가장 가까운 항성계인 '알파 센타우리'조차 빛의 속도로 4년을 넘게 날아가야만 한다. 별다른 조건을 따지지 않고 '빛의 속도'로 왕복하는데만 대략 8년이 걸리는 거리다. 아쉽게도 그곳에는 '지구형 행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 8년을 허비하며 조사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밖의 항성계는 편도로만 10년이 훌쩍 넘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현존하는 가장 빠른 우주선의 속도로 환산하면, 대략 200년이 넘는 세월을 우주선에서 보내야 겨우 도달할 거리라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외계 지적존재와의 만남'은 물 건너간 듯 보인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토록 먼 거리를 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면기술'이다. 마치 겨울잠을 자듯 우주선에서 출발한 직후에 잠에 들어 200여 년이 지나서 '깨어난' 뒤에 탐사활동을 한다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탐사방법이 바로 이런 '동면기술'이다. 하지만 문제점은 여전하다. '가는 동안'에 우주선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인 조종'은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불침번을 서듯 탐사대원들이 돌아가면서 안전한 우주항해를 한다는 설정을 하기도 하는데, 200년이 넘는 탐사 기간을 버티려면 '우주선 안'에서 세대교체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가능성만 더듬을 뿐 '실현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긴 매한가지다.

 

  또 하나의 대안은 '육신'을 대체하는 것이다. 유한한 육신을 대신해서 무한한 육신으로 거듭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기계의 몸'을 빌어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인데, 실제로 '뇌'를 제외한 모든 인체의 장기를 '기계'로 대신하거나 '뇌의 정보(기억)'를 컴퓨터에 그대로 이식하는 방식이라면 광활한 우주항해를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현재의 뇌과학 기술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하는데...그렇게까지 해서 외계인을 만나야 할 까닭까지는 잘 모르겠다.

 

  가장 최근에는 '웜홀'이라는 것을 상상해냈다. 무한한 우주공간을 '순간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공간을 왜곡하는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원래 공간'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없거니와, 다시 되돌린다해도 '그 공간'이 진짜 원래 공간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그런 '공간이동'을 성공한다하더라도 '시공간'을 돌파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또한, '육신'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한 채 가능한 방법일지도 장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정신적인 요소는 '차원'을 넘나들면서 왔다리갔다리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육체적인 요소까지 '차원'을 넘나들었을 때 온전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론상으로야 '원소 단위'로 인간을 쪼갠 뒤에 '또 다른 시공간'에 똑같은 갯수의 '원소'를 재구성해서 보낼 수는 있겠지만, 그 원소들이 분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친 뒤에도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을지는 아직까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양자역학'이 연구되고 있지만, 문제는 아직도 지구인 가운데 누구도 '양자역학'을 완벽히 이해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자, 이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외계 지적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다음 편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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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내가? 정치를? 왜? - 요즘 것들을 위한 최소한의 정치 상식
이형관.문현경 지음 / 한빛비즈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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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를 보면 날마다 정치인들이 싸우는 소식만 전해진다. 국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 정도로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고 언성을 높이면서 말이다. 이른바 '정쟁'이라는 명목 아래 서민들을 위한 민생법안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들만의 밥그릇 싸움'만이 펼쳐지곤 한다. 그뿐 아니다. 행정수반인 대통령을 비롯해서 그 휘하 장,차관들이 입에 올리는 정책이라고는 오로지 '부자들만의 잔치'를 벌이려는 듯, 민생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그들에게만' 유리한 정책을 연일 내놓기 일쑤다. 이에 야당이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여당은 대통령을 감싸며 '국민들의 지지율'만을 내세우며 그들의 정책이 정당하다고 아우성 소리를 지른다. 그 지지율이 20%든, 40%든, 반대하는 국민들이 50%가 넘는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말이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정치를 외면하곤 한다. 열심히 일하라고, 싸우지 말고 화합하고 조율하라고 뽑아놨더니 고작 싸움질밖에 하질 않는다면서 말이다. 이놈을 뽑든, 저놈을 뽑든 매한가지니 아예 정치와는 담을 쌓고 나몰라라하는 국민들도 점점 늘어나기만 한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국민들이 정치를 외면해도 되는 걸까? 정말 정치를 몰라도 괜찮은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안 된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더 많은 국민들의 '정치참여'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것이기에 국민들은 더욱더 정치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정치인들이 '독재'를 하게 되고, '저들만을 위한 입법, 행정, 그리고 사법'까지 장악하여 독단적인 정치를 하는 것을 그대로 '방조'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온 국민은 정치를 잘 알고, 잘 하는 '정치 100단'이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민주적인 교양시민'으로 거듭나야 한단 말이다.

 

  일단, 민주정치는 어려울지 몰라도 '교양시민'이 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매일 뉴스를 '경청'하고 정치인들이 하는 짓거리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웃들이 전하는 정치적 의견(여론)에도 '경청'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 표출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어떤 정책을 내놓는지, 국회의원들이 어떤 법안을 추진하는지, 법관과 검사 들이 누구를 기소하고, 어떤 판결을 내놓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면 될 일이다. 그리고 '정치참여'할 기회가 보이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이렇게만 하면 누구나 '교양시민'이 될 수 있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정치적 수단'을 잘 모르겠다면, 선거날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평소에 정치에 관심이 높았다면 적어도 '누구'를 찍어야 할지 난감해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집회나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이 정치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도 잘 알 것이다. 이뿐 아니다. '불매운동' 등과 같이 대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방법도 있다. 정치인과 경제인은 서로 끈끈한 관계를 맺기 십상이니 '대기업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면 '정치인의 행보'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을 어떻게 평가를 내리면 좋을까? 평가를 매길 수 있는 '기준'이 있을까? 물론 '객관적인 평가기준'이 있을 턱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정치가 이토록 혼탁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저마다 '개인적인 기준'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민주정치가 어려운 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평가기준'을 세워야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가능해진다. 이른바 '명분'이라는 것인데, 나의 정치참여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으려면 '타당한 기준'을 내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는 '객관적인 잣대'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겠기에 참고 삼아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 첫째, 소수의 이익보다 다수의 이익을 위하는 정치인이어야 한다. 다분히 '공리적인 기준'이지만, 발빠른 정책으로 신속한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의견'을 묵살하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일단 첨예한 논란이 예상될 때, 정책결정이 늦어져서 더 많은 손실이 발생될 때에는, 일단 '다수의 이익'을 챙기고 난 다음에 '소수를 위한' 후속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기에 하는 말이다. 둘째, 법과 질서를 지키는 정치인이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취지였다고 하더라도 사법체계를 흔드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다만, 법과 질서를 내세우면서 '저들만의 잔치'를 노리고 있다면, 법과 질서를 사랑하는 '국민들의 심판'을 먼저 받게 될 것을 명심하는 바른 정치인이어야 한다. 셋째, 부도덕한 윤리, 또는 그에 준하는 철학을 내세우며 '독단적인 행보'를 내딛으려는 정치인을 솎아내야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위에 내놓은 '나름 객관적인 기준'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용의주도하고 심보 고약한 철면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난 정치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주권자인 '국민의 동의'를 받는 절차를 거쳐야 함에도 '대의민주주의'를 앞세워 정치인으로 뽑힘과 동시에 '면책특권(?)'을 내밀면서 뻔뻔스럽게 '저들만의 잔치'를 누리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런 뻔뻔함은 저들의 '독단적인 판단'을 '국민들의 결정'이라고 오인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적어도 그런 뻔뻔한 작자들은 절대 '정치인'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냥 '정치꾼'에 불과한 쓰레기인 까닭이다. 교양시민이라면 이런 정치꾼들을 눈여겨보길 바란다. 그리고 절대로 대한민국 정치의 장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나 나름의 '소신'을 갖기도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살기도 힘겨운 마당에 어느 틈에 정치에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까지 할 수 있겠냔 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당신들의 삶이 하루하루 힘겨운 까닭이 '정치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바꿔나가길 소홀히 한 덕분에(?) 당신의 삶이 피폐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만 한다.

 

  한편, TV만 틀면 연일 '정치인들의 싸움박질' 때문에 밥맛이 떨어진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계신다. 기껏 뽑아놨더니 이놈도 싸우고 저놈도 싸우니 열불이 터져서 다시는 '정치'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기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정쟁'이라 부르고 '논쟁'을 일삼는 것이 바른 정치인이 해야만 할 일인 것이다. 흔히,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서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을 싸운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더 많은 이익'을 '더 많은 국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첨예한 다툼인 것이다. 이를 싸운다고 오해하도록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언론'이다. 언론이 '엉뚱한 편견'을 갖도록 전체가 아닌 일면만 보여주니 오해가 쌓인 것이고, 정치꾼과 결탁해 '저들만의 잔치'를 용이하게 주최하기 위해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만든 편견이다. 근본적으로 이는 '정치인의 책임'이 아니라 '언론의 무책임'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러니 TV에서 정치인들이 싸우는 모습이 보여진다면, 날카로운 눈썰미로 판단을 내리길 바란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어떤 정책(법안)을 내세워 무엇을 획책하려고 하는지 말이다.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지난 100년 동안 살얼음판을 건너왔다. 왕조의 멸망과 함께 일제에게 국권을 피탈 당하고 온갖 설움과 억압을 받았더랬다. 그 모진 역경을 딛고 독립을 쟁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며, 동족상잔이라는 비극과 군부독재, 그리고 민주화투쟁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지나왔다. 그리고 새천년을 맞이해 대한민국은 세계에 우뚝서는 자랑스런 역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정치판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첨예한 갈등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바라는 미래는 분명하다. 전쟁 없는 평화가 영구히 깃들길 바라며, 지속발전가능한 경제적 풍요속에서 전세계가 부러워마지 않는 아름다운 선도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 같이 많겠지만, 올바른 정치를 해나간다면 못할 일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겪어봐서 안다. 그리고 꼭 해낼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대한민국인이기 때문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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