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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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같은 책'을 '여러 출판사' 버전으로 읽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문학적인 소양'이 부족한 탓에 직접 읽고 비교하며 두루두루 견문을 넓히려는 목적이 가장 크지만, 부족한 소양으로나마 '뒤침(번역)의 차이'를 직접 느껴보기 위해서다. 이 책도 벌써 세 번째 읽고 있지만, 최근에는 '황금가지' 출판사와 '해문출판사'를 읽었기에 둘의 차이점을 대조하며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먼저,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책은 2004년 경에 뒤쳐졌고, 해문에서 출간한 책은 1991년 경에 뒤쳐진 듯 보인다. 뒤쳐진 때와 출간한 때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정확한 뒤침 시기는 그보다 이른 것으로 짐작되지만, 둘 사이의 시기가 벌써 10년 이상 벌어진 것을 보면 벌써 확연한 차이가 눈에 띄였다. 가장 큰 차이는 '뒤침투'가 사뭇 달라졌다. 즉, '뒤쳐진 문장이 품고 있는 뉘앙스'가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황금가지에서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외판원이 '스타킹'을 판매한다고 뒤쳐졌지만, 이 책, 해문에서는 '명주양말'이라고 뒤쳐졌다. 비단실로 짜여진 양말이라니, 정말 세월의 격차가 느껴지지 않는가. 또 하나는 황금가지에서는 푸아로가 '프랑스어'를 습관적으로 구사하는 것을 십분 살려서 뒤쳐진데 반해, 해문에서는 푸아로의 말투조차 '우리말'로 뒤쳐진채 유려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으로 뒤쳐졌다. 이는 두 출판사 사이의 가장 큰 차이이므로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알다시피 이 책의 '배경'은 영국이다. 하지만 명탐정(비록 은퇴하긴 했지만)으로 활약하는 에르퀼 푸아로는 벨기에 사람으로 '벨기에식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영국인들이 스스로 문제시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에 대한 작가의 의향이 다분히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영국 작가인 아가사 크리스티는 영국 독자들에게 '외국인들도 영국인들만큼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란 말이다. 따라서 영어권 독자들은 이런 작가의 의향까지 '영어 원문'을 읽으면서 함께 느낄 수 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독자들은 이미 '우리말'로 뒤쳐진채 이 책을 읽기 때문에 굳이 푸아로가 영국을 무대로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동시'에 읽어 내려간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왜냐면 '영어'도 우리말로 뒤쳐졌고, '프랑스어'도 우리말로 뒤쳐진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황금가지 출판사는 굳이 영어는 우리말로 뒤쳐놓고서 '프랑스어'는 푸아로의 입을 통해 전달되도록 해놓았다.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물론, 원작에서 외국인이 전달하는 '이질감'은 충분히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국사람들에게 '프랑스 발음'은 '제2외국어' 수준으로 이해될 소지가 충분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에겐 '영어' 이외에 다른 외국어를 즉석으로 해석하고 뜻을 이해할 사람이 그닥 많지 않음을 고려한다면 우리 독자들에게 상당히 어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을 게다.

 

  물론, '모나미는 내 친구' 정도는 상식적으로 익히 알고 있을 테지만, 푸아로가 헤이스팅스를 부를 때 "Mon Ami~"라고 지칭하는 것이 단박에 이해될 한국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며 범인을 찾으려는 '추리소설'의 성격상 술술 읽어내려가는 '그 맛'을 제대로 살린 '해문출판사'의 책이 내게는 더 친숙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는 바다. 다만, 이 책이 뒤쳐진 때가 무려 30년 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뒤쳐진 말투'가 상당히 옛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추리소설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해문출판사'를 권장하고, 좀 더 세련된 읽기를 원한다면 '황금가지'를 추천하는 바다. 물론 또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게 된다면 달라질 수 있음을 알리는 바다.

 

  이로써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두 가지 버전으로 읽어나갈 명목이 생겼다.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으로 짐작되지만 하나씩 비밀을 벗겨나가는 즐거움으로 리뷰를 할 작정이다. 추리소설의 맛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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